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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나이트 10 - 피그말리온Pygmalion : 타카가키 카에데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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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17, 2019 22:56에 작성됨.

 대답이 없어서 몇 번 더 문을 두드렸다. 겨울 씨? 산들바람을 탄 듯 목소리가 조용히 복도를 울렸다. 문은 안 잠겨있어요, 들어오세요. 나의 방문을 의아해했지만 당황하는 기색은 없었다.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나흘 전의 음색이었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니 풍경처럼 카에데가 창가에 앉아있었다. 낮은 책상 위에 술잔과 아직 따지 않은 정종, 몇 권의 책이 놓여있고, 신비로운 오드아이는 물론 ‘그때’ 느꼈던 분위기는 그대로였다.

 “갑자기 찾아와, 죄송합니다.”

 “죄송하긴요. 아무도 오지 않아서 조금 심심하던 참이었는걸요. 겨울 씨가 온 건 의외지만.”

 참, 겨울 씨라 불러도 되죠? 카에데가 뒤늦게 동의를 구했다. 뭐라고 부르시든, 상관치 않습니다. 나는 모자챙을 살짝 올렸다.

 “다행이에요. 멋대로 부르는 걸 싫어하시지 않아서.”

 “어제였다면, 싫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 만에 사람이 바뀔 수도 있군요. 충격적인 경험이라도 하고 오셨나 봐요.”

 “사고를 당했습니다. 머리 위로, 유성이 떨어졌죠.”

 카에데가 감탄했다. 그런 센스는 나쁘지 않은 거 같아요. 나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칭찬 감사합니다.

 “그래서, 어떤 연유로 저를 찾아오신 걸까요. 대체 여기는 어떻게 아시고. 별에게 계시라도 받으신 건가요? 제가 여기 있다는 표시를?”

 그렇게 말하고는 혼자 작게 웃었다. 전에도 이렇게 혼자 웃은 적이 있었지. 나는 머리를 굴렸다.

 “계시, 케이지けいじ와 표시, 효우지ひょうじ. 말장난이군요.”

 어머. 카에데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번엔 알아들으셨네요? 정말로 이게 맞았다니. 조금 어이없으면서도 내심 안도했다.

 “이번에는 알아들으실 수 있게 일부러 쉽게 내봤어요.”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모르신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하셨겠죠. 조금 기뻐요. 기뻐서 오래 얘기를 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할 일이 있어요.”

 카에데가 정종의 마개를 열었다. 오늘을 위해 덥혀둔 술이에요. 첫잔을 따르자 연기가 올라왔다. 이걸 다 마시기 전까지만 말씀을 들어드릴게요, 안주거리가 되어주세요. 바로 한잔을 가볍게 넘겨버렸다. 사케가 사라사라酒がさらさら. 작은 웃음이 뒤따랐다. 의미를 풀이하자면…… 술이 술술, 이겠지. 알아먹기 힘들었다.

 “얼마 전, 시오미 씨를 만났습니다.”

 “슈코 말이군요. 친분이 있으셨나요?”

 “아니요. 우연히 만나서, 우연히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타카가키 씨가, 사라졌다고.”

 아직 언론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 소속사가 기를 쓰고 막고 있으나 업계에서는 이미 소문이 퍼져버렸고 이를 들은 슈코의 소속사는 슈코도 사라진 건 아닌가 싶어 확인 전화를 걸었다.

 “그 소문을 안 들었어도, 저는 타카가키 씨가, 늦던 빠르던 사라질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만난, 그리고 보고 들은 카에데의 정보들은 실종을 가리키고 있었다. 취미가 온천 순례, 근래에는 시간이 없어 가지 못 했다, 슬슬 시간이 날 거다, 내게 한국에 대해 물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가지는 못 한다. 갈 곳이 정해져 있다는 뜻. 총선거 1위를 거머쥔 이 시점에서 소속사가 스케줄을 포기하고 휴가를 보내줄 리 없으므로 공식적인 휴식이 아니라는 뜻. 이 실종은 계획되어있었어.

 “닛타 씨에겐, ‘숨은 명소를 찾았으니 일이 끝나면 갈 거다’, 라고 하셨으며, 그 숨은 명소는, 시라사카 씨에게, 얘기하셨죠.”

 괴담으로 소문이 자자한 여관.

 “사람이 죽는 온천. 뉴스에도 나온 실화. 그리고, 방송 전, 사전 인터뷰.”

 ‘오늘 일이 끝나면 긴 휴가를 갖다오려고 해요.’ ‘지금껏 쉼 없이 달려오느라 많은 것을 놓쳐왔거든요.’ ‘많은 분들의 성원을 받아서 너무나 감사하지만’ ‘아이돌 타카가키 카에데로서 쌓아온 것들을 정리하려면 시간이 필요해요.’ ‘다음에는 저를 지켜봐주신 분들 만이 아니라 더 많은 분들까지도’ ‘깜짝 놀라실 만한 모습으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까지 모르셨던 타카가키 카에데로.’ ‘그렇다고 너무 크게 기대하지는 말아주세요,’ ‘실망하실 지도 모르니까.’

 “긴 휴가. 쉼 없이 달려오느라. 정리. 깜짝 놀랄 모습. 지금껏 몰랐던. 큰 기대. 실망. 말씀하신 단어들, 하나하나가, 전부 단서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가리키는 카에데의 목적, 동시에 실종 목적은 단 하나.

 “타카가키 씨는, ‘자살’을 하려는 겁니다.”

 노골적인 암시. 허나 까닭을 알 수 없어서 누구도 알지 못한 목적. 밝혀지면 업계는 물론 대중들이 발칵 뒤집혀질 게 뻔했다. 그리고 팬들에겐 큰 배신이겠지.

 “이 여관은 일본에서도 보기 드문 진짜 온천이에요. 조금 떨어진 곳에 움푹 파인 구덩이가 있는데, 자주 화산가스가 쌓이죠.”

 “편안히, 죽음에 이를 수 있겠군요.”

 “덕분에 몇몇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한지 이런 깊은 산 속에 있어도 여관 운영에 지장은 없나 봐요. 가십거리 수준이지만 뉴스에도 뜬 적 있고.”

 “봤습니다. 매년 두세 명은, 이곳에서 죽는다고.”

 “마지막으로 온천을 즐기다 갈 수 있다니. 운치 있지 않나요?”

 또 한잔을 넘기고 카에데는 미소 지었다. 구김살 하나 없는 진심. 첫 만남에서 궁금한 점이 있었다. 시련을 넘어 서서 드디어 정점에 올라선 이 사람이 나는 어째서 전혀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까.

 “언제부터 아셨죠?”

 “처음부터요.”

 “이런저런 소문을 들었다곤 해도 제 본 목적을 알기는 쉽지 않으셨을 텐데. 생긴 것보다 훨씬 비범하신 분이셨네요.”

 “말씀드렸잖습니까. 제 특기.”

 무언가를 이미지로 파악하는 것. 직감. 시키가 말하기를 뛰어난 공감각. 처음엔 아리송했던 카에데의 묘한 분위기도 실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타카가키 씨에게선, 죽음이 보였습니다.”

 이 사람은 삶에 대한 ‘의지’가 없다. 미련도 무엇도. 있는 것은 오직 죽음을 향한 갈망. 정점이 아닌 구덩이 아래 처박혀 있었으므로 아름답게 보일 리가 없었다.

 “데뷔 싱글. 재녹음 중이라고 하셨죠. 제가, 기대한다고 하자,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라고 하셨고요.”

 “완성 될 리가 없는 곡이니까요. 괜히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았어요.”

 “완성 시키고 싶지, 않으신 거였어요. 당신은, 이미 곡과 멀어졌으니까. 누구도 사실을 몰랐습니다. 관심도 없었고. 그런 세상에서, 더는 살기 싫으셨겠죠. 희망이 없으니까.”

 “잠깐. ‘실망’과 ‘희망’으로 재밌는 게 떠오를 거 같아요.”

 카에데가 능청스레 말했다. 이어서 진지해졌다. 머릿속에서 시답잖은 창의력이 작동하는 중이었다.

 “당신은, 이런 사람이에요.”

 빼어난 외모. 수준급의 가창력. 모델 출신 아이돌. 대중의 시선을 잡아끄는 신비로움. 무관의 여제. 드디어 왕관을 쓴 톱.

 그딴 게 아니라.

 “구수한 취향.”

 취미가 온천 순회. 술 마시기를 좋아하며 특히 좋아하는 건 온천에서 나온 뒤 한잔. 주로 닭꼬치와 은행을 안주 삼는 것이 젊은 여성이라기 보단 아저씨 같았다.

 “말장난.”

 이 스틱, 정말로 멋져요. 더위도 여름도 비슷하니까요. 일을 할 땐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케이크를 먹고 기운내세요. 완두쓰리포. 카페에서 만났을 때부터 카에데는 혼자 말하고 혼자 웃는 일이 많았다. 개그를 치고 있던 거였어. 아주 시답잖은 개그를.

 “은근한 장난기.”

 코노 ‘스텍키’, 돗테모 ‘스테키’このステッキ, どっても素敵. ‘아츠’이모 ‘나츠’모暑いも夏も. 일은 영어로 워크Work, 두근두근은 일본어로 와쿠와쿠ワクワク. 케이크는 케키ケーキ, 기운은 겡키げんき. 우연히 배운 한국어 ‘완두’로 원 투 쓰리 포까지. 발음의 유사성을 이용한 언어유희. 알고 보면 노골적이었으나 일본어에 서투른 나로선 알아채기 어려웠던 것들. 카에데는 일부러 가르쳐주지 않고 반응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떨어지는 사교성.”

 처음 내게 말 걸었을 때 보인 쭈뼛거리는 태도. 대화를 이어나가기 어려운 말주변. 직접 만나본 슈코가 말하길 속을 알기 어려운 사람. 연예계 생활을 오래 했고 일 할 때만큼은 선배의 관록을 보이는 사람이 이렇다는 건.

 “남들과 어울리기 힘든, 어른스러워 보이지만, 실은 소극적인 성격에…….”

 “한낱 인간이죠.”

 다시 한잔. 작은 병 안에 많아봐야 얼마나 술이 들어있을까. 이 사람 앞에선 가늠해 볼 여유도 없었다.

 “저는 전혀 대단치 않은 인간이에요. 어쩌다 마법에 걸려 높다란 성의 계단을 오르게 됐을 뿐. 정작 꼭대기에 올라도 그곳에서 더 무엇을 이루어야 할지 몰라요.”

 “그럼에도, 당신은 아이돌이었습니다. 외모와 노래, 신비성으로, 얼마든지 포장이 가능하죠.”

 “마케팅이에요. 저는 상품이니까. 기획으로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요.”

 제가 아니라 사람들의 인식을 말이죠. 차가웠다. 메마르고 건조하게 죽어가는 낙엽처럼. 창밖에서도 낙엽이 지고 있었다. 카에데가 그것에 눈길을 주더니 자신처럼 바라봤다. 안타깝고도 부러움이 묻어나게.

 “겨울 씨의 아이돌들도 마찬가지잖아요. 외모가 뛰어나면 언어가 좀 서툴더라도 이국에서 온 신비한 매력으로 치장할 수 있어요. 항상 밝을 리가 없는데 항상 웃는 아이로 만들 수도 있고. 산만한 성격을 천재적인 가능성으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죠. 깎아내리려는 건 아니에요. 있는 그대로를 말하는 거지.”

 “동감합니다. 무대 뒤, 그 아이들의 ‘본연’을 아는 건, 저 밖에 없죠.”

 애초에 이런 업계였다. 인간의 매력을 극대화시켜 돈을 받고 파는 일. 비난하려면 애초에 발을 들여선 안 됐어.

 “첫 만남 때보다 대화를 재밌게 해주시네요. 겨울 씨는.”

 “칭찬 감사합니다.”

 “궁금증이 늘어나고 있어요. 처음부터라고 하셨죠? 전부 알고 있었다면 어째서 저를 막지 않았나요? 누군가에게 알리지도 않고.”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죽든 말든 그것은 나와 관련 없는 일이라 여겼다. 매정하고 쓰레기 같은 생각이자 동시에 핑계.

 나는 감히 이 사람의 일에 관여할 자신이 없었다. 직감으로도 모든 걸 파악하기 어려울 만큼 깊은 어둠을 감추고 있었기에. 프로듀서로서 혼란을 겪고 있던 내가 끼어든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났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쭉, 고민했습니다. 당신이 한 말에 대해.”

 “제가 한 말?”

 “저는 프로듀서를 할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

 이 말만은 더듬지 않고 매끄럽게 할 수 있었다. 몇 번이나, 단 나흘 간 몇 번이나 되뇌고 고민했다. 내가 이 말을 부정할 수 있는지. 그 아이들에게 어울리는 프로듀서인지. 차라리 없는 게 나은 존재는 아닌지.

 “고민의 답이 나오셨나요?”

 “네.”

 “들려주세요.”

 “타카가키 씨. 저는, 프로듀서입니다.”

 “그렇군요.”

 “제 담당들이, 제 아이돌들이, 저를 프로듀서라 부르기에, 겨울P라 부르기에, 그렇게 여기므로, 저는 누가 뭐라 하든, 프로듀서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백야’입니다.”

 “백야…….”

 “저는 예전에, 해결사였습니다. 한국에서. 누구보다 강했고, 뛰어났죠. 살인과 싸움, 폭력, 고문, 공포에 능했습니다. 누구도 저를 무시 못 했고, 그곳에서, 저를 모르는 놈은 없었습니다. 동료들과 동생들, 형님들께, 자랑스러웠습니다. 양아치 짓은 하지 않았고, 제 신념에 따라, 부끄럽지 않게 행동했습니다. 그런 제가, 이제 이곳에서, 일본에서, 아이돌 업계에서,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팔을 걷어 흉터를 드러냈다. 이게 저입니다. 모자를 가지런히 정돈했다. 그리고, 이것도 저입니다.

 “어느 쪽 하나, 거짓은 없습니다. 중요한 건, 프로듀서라는 일이 아닌, 저 자신이니까. 제 아이돌들이 그렇다고 인정해준 답에, 당신이 끼어들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잔을 들다말고 카에데가 실소를 지었다. 평범한 사람은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잔을 내려놓고 내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겨울 씨. 방금 웃은 것까지요. 저 자신이 웃긴 거였어요. 감히 남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처지가 아닌데. 저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요. 정말로.”

 “무슨 뜻인지, 압니다.”

 “그것까지 알아내셨나요?”

 “제가, 제 아이돌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죠.”

 카에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 아이들을 전부 아끼는 걸로 보였지만 유독 한 아이에게 약하시더라고요. 그 아이가 재밌어 하니 제 장난에도 맞춰주시고. 프로듀서가 아이돌을 사랑한다. 마음은 잘못이 아니지만 공적으로 봤을 때 엄연한 실격 사유 아니겠어요.”

 “반성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가요?”

 “받아들여야지요. 제 마음을.”

 “어머나.”

 “어쩔 수 없습니다. 오늘 아침에 또, 반하고 오는 길이라.”

 머리 위로 별이 떨어지는 기분이었죠. 카에데가 흥미롭게 손끝으로 잔을 어루만졌다. 그런 사고를 당하고 오신 거군요.

 “가볍게 흘린 말로 겨울 씨를 아프게 만들었네요. 이런 분이신 줄도 모르고. 괜찮으시다면 용서하고 저랑 계속 대화를 이어나가주시겠어요?”

 원하시는 대로. 나는 기꺼이 손짓했다. 감사해요, 그럼, 다음 질문을 할게요. 카에데가 다시 잔을 들어 넘겼다.

 “겨울 씨는 왜 이제 와서 저를 찾아오신 건가요. 저를 말리러? 상관없는 일이잖아요.”

 “이제는, 상관이 있습니다.”

 “어째서?”

 “제 아이돌들이, 계속, 아이돌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일까요.”

 “당신을 동경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많아요. 모두가 저를 찾아오진 않죠.”

 “당신이 죽으면, 큰 실망을 하게 될 거예요.”

 쿵. 따르던 술병이 낮은 책상 위에 소리 나게 놓였다. 카에데가 반도 채워지지 않은 잔을 들고 마셨다. 동작이 거칠었다.

 “그 아이들을 위해 제가 계속 아이돌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로 들리네요. 저보고 계속 우상으로 존재해달라고. 제가 맞게 들은 걸까요.”

 “네.”

 “무례해요.”

 카에데가 바로 다음 잔을 들더니 들이키려다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감질나게 입술만 적시다 내려놓는 것이 분을 삭이는 걸로 보였다.

 “제가 어떤 이유로 이곳에 왔는지 아시는 분이 저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과 같은 행동을 하시는 군요. 알고서 한다는 점이 저를 더 불쾌하게 만들어요.”

 “실례를 범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말해보세요. 어떻게 막으실 건가요.”

 “팔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섬뜩한 진심에도 카에데는 흔들리지 않았다. 청색과 녹색의 눈을 살며시 굴렸다. 겨우 그것 밖에 안 되나요? 내게 묻는 눈짓이었다.

 알고 있다. 힘을 써봤자 결과는 달라지지 않으리란 것쯤은. 당장 오늘이 아니더라도 내일, 그 다음, 언젠가 이 사람은 목적을 이룬다. 단지 과정에 고통이 따르는지 안 따르는지, 낭만이 있는지 없는지 정도의 차이겠지. 풍파를 맞은 이 사람의 내면에 내가 미치는 영향은 그 정도였다.

 “한 번 씩 무례를 저질렀으니 넘어가도록 하죠. 그게 서로에게 좋을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떨어진 술맛은 어쩔 수 없겠지만.”

 “다른 이야기를 해보는 건, 어떨까요.”

 “저를 만족시킬 이야기가 아직 남았나요.”

 “근원에 가까운 이야기가, 남아있습니다.”

 시작이자 만남. 타카가키 카에데가 아이돌을 시작했을 때의 이야기.

 “저는, 선배가 있습니다. 선배격 되는 사람들은, 회사에 많이 있지만, 제가 선배라 부르는 사람은, 딱 한 명입니다.”

 입사한지 얼마 안 된 나를 출장에 데리고 간 사람. 낙하산으로 들어온 내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자 점차 인정해준 사람. 그때 나를 홋카이도로 데려가 아나스타샤를 만날 수 있게 해준 사람.

 “친화력이 있고, 정이 있고, 허세가 넘쳐보여도, 그 만한 능력도 있지요.”

 입사 때부터 두각을 보였다고 한다. 여기저기 견제를 받은 치히로와 달리 원만하게 일할 수 있었다는 건 관계를 조절하는 능력이 있다는 뜻. 본인은 많이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지만 지금까지도 치히로와 친근하게 지내고 있다.

 “톱 프로듀서. 별명이에요. 업계에서도, 다들 그렇게 부르더군요. 최근에, 새 별명이 생겼습니다.”

 회사를 지금 위치까지 올려놓은 공신. 회사의 주인인 팀장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할 인물. 혼자서도 수많은 아이돌을 담당하면서 그들 전부의 매력을 발굴하는, 내가 아는 한 가장 뛰어난 프로듀서.

 “가을P.”

 시원시원한 성격에 농부처럼 성실하다고 미오가 붙여준 별명.

 “타카가키 카에데의, 전 프로듀서.”

 치히로에게 선배의 입사 시절 이야기를 들었다. 평범하게 대학을 다니다가 이대로는 사회의 톱니바퀴가 될 것 같아 가장 열정을 불태울 수 있을 만한 일, 아이돌 프로듀서를 시작했다고. 능력, 성격, 경험 면에서 전부 완성형이라 입사 이후 지금껏 그대로를 유지했다고. 업계 신입의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놀라웠다. 그렇다면, 신입이 아니지 않을까.

 “선배는, 가을P는, 5년 전에 모델 출신 일반인, 타카가키 카에데를 발견하여 스카우트, 아이돌로 데뷔시켰죠. 당시에는 무명이었던, 현재 소속사에서요. 시간상으로 봤을 때, 아마 선배에게도, 당신이 첫 아이돌이었겠죠.”

 천부적인 능력을 타고났던 선배와 최고의 소재였던 카에데의 조합은 업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회사에 나오지도 않고 일할 정도로 사회성이 떨어지고 남을 위해서 일한다는 게 이상하다고 말하는 인간으로 하여금 아이돌 소속사를 차려 숨어있던 재능을 발휘해 대형 신인들을 속속 발굴해내서 5년 만에 어엿한 중견기업으로 키울 정도로 말이다. 선배와 카에데의 시작은 나와 아나스타샤의 시작이자 회사의 시작, ‘우리’의 시작이기도 했다.

 “두 분에게, 연결고리가 있다는 단서는,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단골 술집부터.”

 카코가 선배에게 추천받은 술집은 은행구이와 닭꼬치를 잘 하는 카에데의 단골집. 톱 아이돌의 데뷔 초기 사인 포스터 같은 귀한 물건을 가게 한 구석에 썩혀둘 정도로 주인장은 아이돌에 관심이 없다. 내성적인 카에데가 자발적으로 포스터를 선물했을 리는 없으니 선물을 준비한 건 카에데의 동행인. 업계와 관련이 깊고 선물로도 영업을 할 만큼 일에 빠져서 사는 사람.

 “독특한 비유.”

 선배는 자주 자신을 마법사에 비유했다. 선배가 처음으로 마법을 건 사람은 카에데. 당연히 이 표현을 알 것이고 아나스타샤를 보면서 입에 배인 표현을 담았다. ‘마법에 걸린 기분일 거예요, 지금은.’

 “자주 하는 말장난.”

 일을 할 땐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내가 갖고 있던 아이돌 매거진 견본에 카에데가 해준 사인. 나는 그날 이미 똑같은 말을 선배에게서 들었다. 당연히 말장난인 줄도 몰랐지만 의미를 알게 되자 생각났다. 선배도 가끔씩 카에데처럼 시답잖은 센스, 보기와는 다른 깨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을.

 선배의 말장난은 업계에 적응 못한 신입을 위한 격려. 카에데의 말장난은 선배에게 보내는 메시지.

 “이상했습니다. 타카가키 씨는, 어째서 처음 만난 저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오려고 했을까.”

 타인을 대하는 게 서툴면서. 억지로 대화주제를 찾아가면서까지. 남들이 피하는 인상 나쁜 남자에게. 왜.

 “저 말고도, 몇몇 사람들에게 그러셨더군요.”

 일 하면서 만난 미나미. 괴담을 들려준 코우메. 함께 술을 마셨던 미즈키에게. 차후 행적을 알려가면서까지 접근한 이유는.

 “행적을 알리기 위해.”

 내가 선배와 관련 있기 때문에. 그들이 선배의 담당 아이돌이기 때문에. 자신을 봐달라고, 찾아와 달라고 필사적인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선배와 관련 없는 슈코에겐 평소처럼 대했지만 우리 회사 사람들에게는 어떻게든 가까이 다가왔다. 혹시라도 선배 귀에 들어갈 실낱같은 희망에 걸고.

 여관에 도착해 아이돌을 찾자 종업원은 나를 카에데의 방으로 안내했다. 내가 프로듀서임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지만, 카에데가 찾는 프로듀서는 다른 사람이었다.

 “두 분이, 이렇게 된 원인은 뭘까요.”

 왜 카에데는 이렇게까지 해야만 했을까.

 “톱 아이돌을 키워낸 프로듀서가,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이적한 회사에선, 자기 경력조차 밝히지 않았죠. 철저하게 신입으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럴 만한 원인이, 딱 하나 있더군요.”

 팀장은 카에데의 팬이었다. 데뷔 때부터 팬이었고, 이미 마음이 떠났음에도 카에데의 프로듀스 방향이 변한 시기를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경쟁사 유명 아이돌이므로 떠도는 소문까지 파악할 정도로. 그런 팀장이 카에데가 변했다고 지목한 사건이 있다.

 “데뷔 10개월 차에 터진, 연애 스캔들.”

 소속사 차원에서 이미지 관리에 들어가야 했던 사건. 신인 아이돌에겐 치명적으로 작용해 한동안 슬럼프에 빠지게 할 정도로 커다란 폭탄. 거짓으로 밝혀졌지만 만약 사실이었다면 그 대상은 내가 아는 한 단 한 명 밖에 없다.

 “사랑하셨군요. 선배를.”

 카에데가 잔을 들이켰다. 담담하게, 가을바람처럼 밝혔다.

 “사랑했어요. 우리는.”


 *


 My dear 가르쳐 줘 그 날의 두 사람은

 지금 어디로 간 거니? 묻고만 싶은데

 하지만 마음을 가둬 두고 입을 다 물었어.

 무엇이든 당신에게는 말할 수 있었는데…

 어째서


 *


 마스터 시즌. 계절별로 하나씩 낼 거라면서 선배가 기획한 음반이었다. 메인 테마가 되는 곡들엔 스토리가 담겨 있는데 여름을 시작으로 내년 봄에 마무리될 계획이라고 한다. 모든 곡들이 훌륭했고 나는 당연히 겨울 음반을 기대하는 중이었다. 참고로 여름 음반에는 시키가 참여했다. 가을 음반은 이미 준비가 끝나서 발매만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 노래, 좋네요.”

 “최고지? 개인적으로 내 야심작이다.”

 “네. 다른 곡들보다, 진하게, 선배의 색채가 묻어났어요.”

 가을음반의 메인 테마곡. ‘가을바람에 손을 흔들며’ 사랑하는 연인이 시간이 흐르자 변심하게 되어 마음이 멀어지고 결국 헤어진다는 내용. 선배는 이 곡에 공을 들였다. 스스로가 가을이라 그런 걸까.

 아니. 그걸 넘어선 무언가가 있었다. 캐물을 생각은 없었으나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확신이 들고, 호기심이 일었다. 선배.

 “응?”

 “이거, 혹시, 선배 이야기 입니까?”

 “…….”

 선배는 입을 다물었다. 기분 나빠하는 기색 없이 재생되는 노래를 듣고만 있었다. 다음 트랙으로 넘어가기 전에 프로그램을 종료했다.

 “전부는 아니야. 적당히 고쳐서 썼지. 누구나 한 번 쯤은 하는 경험……. 그런 걸로. 그런 거야.”

 “그런 겁니까.”

 “너도 있지 않아? 누구 좋아한 경험.”

 “…… 있습니다.”

 “하지만 다 잘 되지는 않잖아. 너도 지금 혼자인 것처럼 나도 혼자인 거지. 안 되는 때가 있어, 다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추억에 젖은 선배를 보는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덕분에 이 사람이 가을이라는 걸 확실히 할 수 있었다. 풍요의 계절이자 외로움의 계절에서 선배는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한 명 더. 나는 가을을 품은 사람과 마주하고 있다. 무더위를 견뎌낸 생명들이 마지막으로 짧은 생의 찬란함을 빛내고 떨어지는 계절에,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에 카에데가 있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었어요.”

 빈 잔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저도 그 사람도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죠. 자각한 건 한 여름. 우리는 ‘우리’가 되었어요.”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서서히 오렌지 빛으로 변해가는 산등성이가 벌써 단풍에 물든 것 마냥 변색됐다.

 “늘 함께 있었어요. 작은 회사에 직원도 얼마 없었고 저를 제일 잘 아는 건 그 사람이었으니까. 사무실에서, 스튜디오에서, 촬영장에서, 공연장에서.”

 아이러니했다. 아이돌과 프로듀서에게 있어선 안 되는 일이 아이돌과 프로듀서이기에 찾아오고 말았다. 지금은 둘 다 업계에서 선배, 워너비로 불리지만 당시에는 막 사회인이 된 청춘들. 감정이 움직이는 걸 막는 건 불가능이었겠지.

 “6년 전 어느 날에 그 사람이 저에게 명함을 줬어요. 아름다운 분이시라고. 아이돌이 되어줄 수 있냐고. 처음엔 잘못들은 건가 싶었죠. 19살은 아이돌을 시작하기엔 늦은 나이잖아요. 모델 동료들도 수상한 사람이라고 의심했고.”

 쉽게 상상이 갔다. 지금보다 어린 선배와 카에데. 풋풋하던 시절이 망상 속에서 살아 움직였다.

 “시간이 비면 만나자고 연락이 왔는데 그 날이 마침 크리스마스였어요. 실은 데이트 신청이 아닐까,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이 사람도 그런 부류일까.”

 “그렇지만, 나가셨군요.”

 “마음이 움직이더라고요. 제안도 특이했고 목적이 순수하다고 느껴서. 거짓이 보이지 않았어요. 신기하게도 그 사람 앞에선 낯가림이 심한 저조차 편하게 말을 할 수 있었고요.”

 왜 저에게 제안했냐고 물었어요. 카에데의 어조가 점차 부드러워졌다. 저보다 매력적인 사람들을 두고, 남들 앞에 나서기 어려운 저에게만 제안한 이유를. 테이블을 두고 마주앉은 남녀의 뒤로 내레이션처럼 흘러갔다.

 그 사람들은 계속 모델을 하면 되겠죠. 저는 계속하면 안 된다는 건가요? 그렇게 심한 말을 할 생각은 아니고요, 음, 아, 저는 사실 프로듀서 시작한지 한 달 밖에 안 됐습니다. 네? 얼마 전까지는 대학 생활을 했어요.

 “남들처럼 강의를 듣고, 남들처럼 하루하루 살다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러다가는 남들처럼 회사 들어가서 지루하게 살다 남들처럼 죽겠구나, 하고. 그런 건 너무 아쉽잖아요. 그래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내가 해야 되는 일을 찾았죠. 그게 뭘까? 내가 뭘 좋아했더라? 고민하다 보니 고등학생 때까지 아이돌에 빠져 산 게 떠올랐어요.”

 망상 속에서도 선배는 유연하게 말을 풀어갔다.

 “사람에겐 그 사람만이 가진 개성이 있고,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걸 발견하고 개발하는 게 프로듀스예요. 저는 타카가키 씨가 아이돌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게 없었어요.”

 지금까지 와는 다른 '두근두근한 일'을 하고 싶으시면 연락 주세요. 선배와 카에데의 목소리가 겹쳤다. 두근두근한 일. 그때부터 하던 말장난이었나. 와쿠와쿠. 카에데는 시계소리처럼 몇 번이나 그것을 반복했다.

 “그 사람처럼 되고 싶었어요. 말버릇을 따라해 보고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연기해 보기도 했죠. 효과를 보진 못 했지만 대신 다른 일이 벌어졌어요. 그 사람과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마찬가지로, 그 사람도 저를.”

 여름을 배경으로 두 남녀는 마음을 고백했다. 내리쬐는 태양빛이 그득한 세상 중 그늘진 곳만을 골라가며 만나야 했지만 밀회의 어둠에서 그들은 자유로웠고, 비로소 색색이 아름다운 가을에 절정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동화는 여기까지.

 “가을에 함께 온천에 갔어요. 우리 둘 다 온천을 좋아했으니까. 바쁜 와중에 억지로 휴일을 내면서까지 찾아갔죠. 돌아와 보니 그 날 연예 뉴스 1면에 올라왔고요.”

 현실에는 엔딩이 없다. 등장인물이 원치 않더라도 끝을 봐야만 하고 끝을 정하는 건 당사자가 아니다.

 “저는 그 때 괴물을 봤어요. 이 세계의 악의라는 괴물. 처음부터 이렇게 되도록 누군가 정해놓은 것 마냥 상황이 우리를 벼랑으로 몰아갔죠.”

 감정이 격해짐에 따라 망상이 가속했다.

 “사무실에 전화가 빗발쳤어요. 가십을 파헤치는 기자들, 논란이 달갑지 않던 스폰서들, 배신감을 느낀 팬들. 네. 팬들.”

 저를 사랑해주는 줄 알았던. 감정이 굽이쳤다. 저를 왜 사랑하는지 모르겠던 팬들. 공포, 불안, 불신. 동공의 색이 탁해졌다.

 “차마 입에 담기도 어려운 말들을 하더라고요. 내 앞에서 그렇게 꼬리치더니 뒤에선 다른 놈이랑 붙어먹었냐고.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어요. 이해할 수도 없고요. 저는 그 사람들에게 꼬리친 적이 없거든요. 기쁘다고 느껴온 지난 시간들이 회의로 변하자 의문이 따라왔어요. 나는 무대 위에서 진실했던가? 저 사람들은 나를 얼마나 알고 내 팬이 된 거지? 이렇게 쉽게 등 돌릴 거라면 어째서 날 응원해준 걸까? 그 뒤론 팬레터를 읽지 않게 되었죠.”

 신데렐라는 참 이상해요. 식어버린 술이 잔에 담겼다. 단 하룻밤 만나 춤춘 왕자랑 어떻게 결혼을 할 수 있을까요. 그 온도만큼이나 말의 온도도 낮았다. 왕자가 자기를 언제 버릴 줄 알고.

 “한 동안 활동을 쉬고 입장을 정리했어요. 회사는 어떻게든 그 일을 신빙성 없는 루머로 만들려고 했죠. 기자들에게 돈을 쥐어줘 가면서. 당시에는 모든 게 이상했어요. 우리의 사랑은 지탄받아야만 했고, 배신이 되었고, 거짓이 되어야만 했죠. 그 사람하고도 만나지 못한 채 두 달이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저는 마음이 맞는 동료들에게 사정을 털어놓았어요. 차라리 그 사람과 함께 떠나고 싶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고 싶다. 그랬더니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미친 거 아니야? 망가진 웃음이 튀어나왔다. 겨우 사랑이 뭐라고 이 모든 걸 포기할 수 있어? 조소를 조절하는 기능이 망가져버렸다. 너는 더 일을 해야 해, 그만둘 때가 아니야. 비틀린 인간의 얼굴. 내겐 익숙한 표정.

 “모든 것에 경멸이 들었어요. 업계에도 동료들에게도. 당시에는 정말 모든 게 싫어서 집안에 틀어박힌 채 살아갔죠. 씻지도 않고 방에서 커튼 치고 살아가는 거, 나쁘지 않더라고요. 후줄근한 모습으로 나가면 안 된다면서 먹을 것도 회사 사람이 사다주고. 이대로 평생 살아가도 되겠다 싶을 즈음 나가야만 하는 일이 생겨버렸죠.”

 호흡이 거칠어졌다. 타카가키 씨? 취기가 올라왔는지 혈색이 붉어졌다. 순식간에 잔을 비우고 다시 잔이 채워지는 과정이 반복됐다. 말이 빨라질수록 몸이 웅크러들었다.

 “틀어박히고 두 달. 문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어요. 며칠 전부터 쭉 느껴졌지만 그 날은 확연했죠. 인터폰 카메라로 확인했더니 모자에 선글라스를 쓴 사람이 문 앞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고. 숨이 멎는 줄 알았죠.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어요. 방 안에서 이불을 덮어쓰고 있다가 용기를 내서 다시 밖을 확인했어요. 다행히 그 때는 없어졌지만 불안이 가시질 않더라고요. 언제 또 나타날지 몰라,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는지도 몰라. 저는 제가 안전한 곳에 숨은 줄 알았는데 갇힌 거였을 줄은 몰랐어요. 철창 안에 가둬두고 어떻게 살아가나 관찰당하고 있던 거죠. 도망친다면 지금 뿐이었고 당장 밖으로 나갔어요. 계절이 바뀐 줄도 몰라 옷을 제대로 못 챙겨 입었지만 다시 돌아가기 싫어서 택시를 잡아 그 사람에게 갔죠. 반쯤 두려우면서도 반쯤 설레더군요. 도착하자마자 벨을 누르니까 그 사람이 나왔어요. 구원처럼. 품에 안겨서 있었던 일을 전부 말했더니 그 사람은…….”

 타카가키 씨. 멈춰야 했다. 다가가려하자 카에데가 나를 제지했다. 오지 마세요, 계속 들어요, 이젠 제가 말 할 차례니까.

 “궁금증을 해결해드려야죠. 제가 누구인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겨울 씨만 저에게 말하는 거 치사해요.”

 “그만하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아니요. 계속 할 거예요. 그 사람은, 그 사람이 뭐라고 했냐면요……. 결심을 했대요. 저랑 헤어지기로. 저를 위해서.”

 발음이 뭉개져갔다. 제가 이런 일을 더는 겪지 않게 하겠다며, 다 지우고 떠나겠대요. 눈가에 고인 빛이 뺨을 타고 흘렀다. 집에 돌아와서야 알았죠. 툭, 떨어져선 술잔에 담겼다. 그 날이 크리스마스였다는 걸.

 “그때 그 순간, 타카가키 카에데는 이미 죽었어요. 지금까지는 떠밀려 살아온 거죠. 회사에는 제가 필요했으니까. 정확히 말해 ‘아이돌 카에데’가 필요했으니까. 공식적으로 모든 열애설을 부정하고 다음 해에 저를 복귀시켰어요.”

 카에데의 소속사는 지금까지도 카에데 외엔 크게 성공한 아이돌이 없었다. 어쩌다 대형 신인 하나 발굴해 낸 덕에 먹고 사는 곳. 그 이상은 해내지 못 하는 곳. 당연히 그렇겠지. 카에데를 키운 사람은 이제 그곳에 없으니.

 “저는 힘들다고 말해선 안 됐어요. 신데렐라. 마법에 걸려 성으로 온 사람이니까. 늘 들어왔죠. 우린 너에게 모든 걸 걸고 있다고.”

 뒤를 이를 사람이 없으므로 회사의 모든 지원은 하나로 몰린다. 카에데를 총선거 상위권에 올리는 것. 어떻게든 1위를 만들어 회사가 건재함을 보여야만 했다.

 “아이돌 업계라는 겉보기에 아름다운 성. 거기엔 늘 성에 어울리는 공주가 있어야만 해요.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동경을 이끌어낼 사람이. 우상 하나만을 바라보고 오늘도 수많은 지망생들이 계단을 오르고 있어요.”

 그러나 결과는 번번이 실패. 객관적으로 나쁘지 않은 성적이더라도 오직 1위만을 노리는 이들에게 정점 이외에는 실패에 불과하겠지. 형평성이 어긋난 지원에 주위 시선도 곱지 않았을 텐데. 겨우 한 명의 인간에게 가해졌을 부담이라기엔 너무나도 컸다.

 “제가 불행해져서 다른 신데렐라들이 성을 목표로 오지 않는 것. 회사는 그걸 두려워했어요. 힘들게 쌓아올린 아름다운 성이 무너지는 걸 원치 않았어요.”

 무관의 여제, 왕관을 쓰다. 올해 드디어 꿈을 이루었음에도 그녀가 아름답지 않던 이유. 숙원을 이루고도 사라진 이유는.

 “저를 끝까지 성에 묶어두어야만 했죠.”

 그것이 숙원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인형에 불과해요. 장식장에 넣어두고 멋대로 가치가 정해지는 인형. 편안히 앉아 관상하는 사람들에게 제 의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예쁜 옷을 입으면 박수쳐주고,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했을 땐 비난하면 되니까.”

 왕관 따위 쓰기 싫었어. 감정이 가라앉았다. 무게를 견딜 힘 같은 건 내게 없는데. 땅 아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새카만 구덩이 안에서 고개 든 해묵은 절망이 간신히 고막에 닿을 소리를 냈다.

 “감당할 수 없는 행복을 불행이라 한다면, 저에게 이 마법은 저주와 다름없겠죠. 누구도 풀어주지 못할 저주. 저는 더 이상 ‘그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된 거예요.”

 연풍. 코이카제こいかぜ. 사랑의 바람. 분명 선배가 프로듀스 했을 데뷔곡.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느끼는 애달픈 마음, 연심을 바람에 비유한 노래. 이 노래를 불러봤으니까 내가 품은 아나스타샤에 대한 연심도 알 수 있었겠지. 데뷔초의 카에데는 선배에게 품은 연심으로 이 곡을 노래했을 거야.

 “결국 저는 왕관을 써버렸고 톱 아이돌이 되어버렸어요. 그 무엇조차 제가 원해서 이룬 것이 없죠. 하지만 노래만은, 그 사람과의 사랑이 담긴 이 노래만큼은 거짓을 담기 싫었어요.”

 “그래서 택하신 게, 죽음이군요.”

 “이 노래마저 완성되면 사람들이 가진 제 인식은 더 확고해질 테니까. 제가 저로서 존재할 수 없는 세상에선 살아갈 필요도 없고요.”

 “동시에, 마지막으로 품은 희망이, 선배에게 보낸 메시지였고요.”

 “피그말리온 이야기를 아시나요?”

 카에데가 또 술을 따랐다. 줄기가 가는 게 슬슬 바닥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조각가. 자신이 만든 조각상과, 사람에 빠지고 말았다는…….”

 “자기가 만든 작품과의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금단의 사랑. 그러나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축복을 내려 조각은 생명을 얻고 피그말리온과 결혼했어요.”

 제게 필요한 건 동화가 아니라 신화였나 봐요. 천천히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불가능한 일을 꿈꾼 죄로 저주에 걸린 거죠.

 “신호를 보낸 건 이번만이 아니에요. 그 사람이 아직 업계에서 일한다는 걸 안 뒤로 종종 메시지를 보내봤어요. 저를 찾아와달라고, 단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저를 만나달라고. 그 사람은 저와 관련된 일에는 한 번도 직접 오지 않았기 때문에 동료들이나 담당 아이돌들을 통해서. 그의 귀에 들어가기를 소원한 채.”

 하지만 오지 않았죠. 잔이 탁자 위에 놓였다. 제 앞에 있는 건 다른 신데렐라의 마법사, 그 사람은 끝까지 저를 찾아오지 않았어요. 다시 술병을 잡으려는 손을 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온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이미 당신은, 마음을 굳힌 지 오래니까. 선배가 왔더라도, 목적을 바꾸지는 않았겠죠. 어쩌면, 선배와 같이, 죽으려했을지도 모르고.”

 “어머. 그것도 그렇겠네요.”

 “가볍게 입에 담는 것 이상으로, 죽음의 무게는 크고, 깊으며, 치명적입니다. 당신의 경우, 업계 전체를, 혼란에 빠뜨리겠죠.”

 “그런 건 제가 알아야 할 사항이 아니에요.”

 “당신이 죽는다면, 이 업계,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특히, 아이돌들에겐 더욱 크게. 제 아이돌들은 아직, 성을 오르는 중입니다. 꼭대기에서 맞닥뜨리는 게, 파멸이게 둘 수는 없어요.”

 “어떻게든 저를 우상으로 두려는 거군요. 그런다고 결과가 바뀌진 않을 텐데.”

 “바꿀 수 있습니다. 해결. 그게 저의 일이고, 저의 영역입니다.”

 “당신이 업계를 바꿀 수 있나요? 저를 둘러싼 상황과 환경, 인식을 바꿀 수 있나요? 그것 외에 제게 해결은 없어요.”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대체 어떻게?”

 “말하십시오. 당신을, 가장 괴롭히는 이들. 팬이든, 회사 사장이든, 스폰서든, 맘에 안 드는, 아이돌 동료든 간에. 당신이 원하는 게, 그들의 멸망이라면, 제가 이루어드리겠습니다. 당신을 노리는, 모든 말, 쏟아지는 소문, 가십, 비난, 그 모든 화살들을, 제가 꺾어놓겠습니다. 필요하다면, 당신 눈앞까지 끌고 와서라도, 처단하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당신이 정말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닐 거 같네요.”

 병을 만지작거리던 손이 거두어졌다. 석양으로 붉게 물든 바깥을 카에데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를 똑바로 봐주는 사람이 필요해요.

 “다시 시작하십시오.”

 “여기까지 와서 뭘 더 시작하겠어요. 타카가키 카에데는 이미 톱 아이돌이 되어버렸는데.”

 “할 수 있습니다. 아이돌을 그만두면.”

 “네?”

 카에데에게 처음으로 당혹이 비쳤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죠?

 “겨울 씨는 제가 계속 아이돌을 하도록 만들려고 오신 게 아닌가요?”

 “저는 당신을, ‘살리려고’ 왔습니다. 당신이 아이돌을 할지, 어떨지는, 제가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타카가키 씨. 프로듀서가 아이돌에게 말했다. 이어서 모자를 벗어 백야가 카에데에게 말했다. 그만둬도 됩니다.

 “그 동안, 많은 일을 봐왔습니다. 아이돌이라서, 생기는 일들. 팬의 집착, 과도한 우상화, 업계와의 갈등, 친구와 틀어지는 것까지. 모두, 아이돌이 아니었다면, 일어나지 않아도 될 일. 그럼, 아이돌이 아니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무대 위는 아이돌의 영역. 무대 아래는 프로듀서의 영역. 그러나.

 “무대는, 하나만이 아니에요. 세상에는, 여러 무대가 있습니다. 내가 나로, 당신이 당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면, 어떤 무대에서든, 빛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저를, 마법사라고 했지만. 다시 모자를 쓰고 말했다. 저는 기사입니다.

 “만약 그 아이들이, 아이돌이기 때문에, 어떠한 문제가 생겨 앞을 가로막을 때, 저는 몸을 바쳐 그 문제를 해결할 것이고, 지켜낼 것이지만, 그로 인해, 아이들이 지치고 괴로워해서, 더는 안 되겠다고, 그만두고 싶다고 말한다면, 저는, 그 뜻을 존중할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 아이들은, 그 아이들이니까. 마찬가지로, 당신이 살아가는 것이 아이돌의 이야기라면, 아이돌을 그만두는 것은 배드 엔딩이겠지만, 이건 당신의 이야기.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 한, 아이돌이 아니어도 됩니다. 아이돌인 당신을, 지울 수 없듯이, 타카가키 카에데는, 쭉 타카가키 카에데니까. 감히 누구도 그 사실을, 멋대로 바꾸지 못하도록, 당신이, 그리고 제가,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두 가지 색 동공에 내가 비쳐보였다. 바람에 밀려들어온 가을이 방 안에 가득했다. 카에데가 가벼워진 술병을 기울이자 힘없이 흐르던 술이 이내 멎었다. 뚝, 뚝, 방울이 떨어져 마지막임을 고했다.

 카에데가 잔을 들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마시세요. 내 쪽으로 잔을 밀었다. 술맛이 뚝, 떨어져 버렸네요.

 “혹시 그거, 말장난, 입니까?”

 “맞아요. 죽을 마음조차 뚝 떨어지고 말았네요.”

 뒤에 작은 웃음 대신 씁쓸함이 묻어났다. 침울함도.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기 전에 마치려했으나, 예정보다 일찍 찾아온 겨울이 계획을 망쳐버렸다. 죄송합니다. 속으로 사과했다. 이렇게 되기 전에 올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나는 잔을 들진 않았다.

 “잠깐 지나갈 뿐이에요. 언제 다시 흥이 돌아올지는 모르고 당장 당신이 돌아간 뒤에 잔을 들지도 모를 일이죠. 그러니 어서 들어요. 또 변덕을 부리기 전에.”

 “죄송하지만, 체질상, 술이 안 맞습니다.”

 “그 정도 각오도 없이 저를 말리러 오셨군요.”

 “그리고, 이 잔의 주인은, 따로 있습니다.”

 쿵.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아래층에서부터 가늘게 소리가 다가왔다. 하나는 종업원, 뒤로 다른 하나가 겹쳤다.

 “지금, 오고 있네요.”

 “무슨 소리시죠?”

 “말씀드렸잖습니까. 저는 기사라고. 이곳에서, 제 역할은 두 가지. 당신을, 죽음으로부터 떼어놓는 것, 그리고, 시간벌이.”

 “시간벌이?”

 발소리가 계단 아래 도착했다. 삐걱대는 소리가 연신 울리고 그보다 크게 발소리가 찍혔다. 숨도 쉬지 않고 단풍실 앞까지 올라왔다.

 도착하자마자 문이 열렸다.

 “마법사가 오기 전까지, 시간벌이요.”

 “…….”

 방 안에 두 가지 가을이 엇갈렸다. 카에데의 숨이 멎고, 선배는 거칠게 호흡했다. 타이밍 좋게 오셨군요. 고개를 살짝 돌려 인사를 대신했으나 선배의 시야에 나는 없었다. 너는 나중에 따로 보고.

 “나랑 좀 얘기해. 카에데.”

 프로듀서가 자신의 아이돌과 마주했다. 이곳은 무대 뒤. 프로듀서의 영역. 잠시 서로 담당을 바꿔 활동해야했지만 이젠 제자리로 돌아가야겠지.

 내가 할 일은 끝났어. 나는 돌아서서 문을 나갔다. 저주를 푸는 건 마법사의 일이야. 이 동화의 끝이 해피 엔딩이길 빌며 마지막으로 인사를 남겼다.

 “오래오래 행복하십시오.”


 *


 이미 스캔들이 터진 이상 아무리 기사를 막아도 파헤치려는 움직임까진 어떻게 할 수 없다. 카에데에겐 쭉 파파라치가 붙었겠지. 그걸 알고서 선배는 의도적으로 만남을 배제하려 했다. 다만, 이번만은 아니었다.

 점점 노골적으로 변해가는 신호. 전에 담당이었으니 이상함을 제일 먼저 알아챘겠지. 업계 정보에 민감한 사람이니까, 애써 외면하려고 해도 실종 소식엔 몸이 먼저 움직였을 거야. 로케지에서 일하면서도 쉬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계속 일한다, 온천 거리 곳곳 숨은 장소들을 찾는 중이다. 아나스타샤가 말해준 선배의 행적은 카에데를 찾는 것이었다.

 애초에 그 사람은 만나지만 않았지 카에데에게서 관심을 끊은 적이 없다. 필요 없다고 거절했던 다음 호 아이돌 매거진 견본을 구해서 책장에 꽂아놨다는 건, 카에데에게 관심 없다는 어설픈 연기를 하려 했다는 것. 거기엔 다크 일루미네이트의 인터뷰가 실려 있으니 자연스레 받아도 될 텐데.

 “프로듀서로선 완벽하지만 인간으로선 빈틈이 많군. 그 사람도.”

 그렇게 신호를 받고도 어딘지 몰라서 쭉 헤매다니. 나는 달빛이 비추는 여관을 바라봤다. 아나스타샤와 다른 아이돌이 머무르는 숙소이자 선배가 아껴뒀던 숨은 명소. 아는 얼굴이라고 했으니 카에데와 왔다는 온천이 바로 여기. 카에데가 온천에 갈 거라는 것만 알고 우연을 가장해 만나려고 했지만, 더 깊은 곳까지 읽지 못 해서 먼 길을 돌아왔군.

 차라리 그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카에데는 마지막 만남 뒤에 죽으려고 했으니. 내가 가기 전에 만났다면 나중에 선배에게 갈 정신적 충격이 더 컸을 거야. 끝은 선배에게 맡겨야 해서 문자로 자살 여관 위치를 알려주긴 했지만. 아슬아슬했군.

 이제 어떻게 될까. 카에데는 정말로 아이돌을 그만둘까. 연풍의 리메이크는 완성될 수 있을까. 선배는 오늘 밤에 돌아올 수 있을까. 설마 사이좋게 손 잡고 화산가스 쌓이는 구덩이로 향하는 중은 아니겠지.

 괴악한 망상을 집어치우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총총히 박힌 하늘이 보기 좋았다. 이제 내가 신경 써야 할 건 따로 있어. 여관으로부터 풍겨오는 겨울의 냄새에 나는 옅은 웃음을 지었다.

 “오늘 밤은 가을과 겨울의 사이야.”

 프로듀서! 아나스타샤가 달려왔다. 겨우 며칠 만에 만나는 건데도 몇 년은 지난 것처럼 그립고 반가웠다. 나는 표정을 지우고 여느 때처럼 맞이했다.

 “오랜만이야.”

 “Я ждал. 기다렸어요. 자, 얼른 가요!”

 아나스타샤가 다짜고짜 내 손을 잡더니 잡아끌었다. 저기, 잠깐? 나는 맥없이 끌려가며 물었다. 어디 가는 건데?

 “조금 있으면 온천 청소시간이에요. 얼른 가지 않으면 프로듀서가 온천을 못 즐깁니다.”

 “괜찮은데. 나는 그, 옷 벗는 거, 안 좋아하기도 하고.”

 “걱정 말아요. 지금은 아무도 없는 시간이니까. 프로듀서만 тихо, 조용하게 푹 담갔다 나올 수 있어요.”

 정말 괜찮은데. 필요 없는데. 나는 그런 것보다 너와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하고픈 말은 많았으나 어버버 거리느라 입 안에서 맴돌기만 했다. 그것을 알아챘는지 아나스타샤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온천을 즐긴 뒤엔 프로듀서랑 함께 별을 보고 싶어요. 여긴 도시보다 별이 잘 보여요. 그리고…….”

 품 안에서 시집을 꺼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내게 받은 선물.

 “프로듀서에게 받은 стихотворение(시), 아냐, 잔뜩 읽었어요. 외운 것도, 들려주고 싶은 것도, 물어보고 싶은 것도 많아요.”

 “…….”

 “함께 해줄 거죠? 프로듀서.”

 숨을 내뱉는 순간 눈앞에 입김이 서리는 듯 했다. 아직도 내겐 환상이 진했다. 구겨진 종이를 다시 필 수 없듯이 영원히 끼고 살아가는 하는 운명이겠지.

 그래도 그게 나라면, 그게 프로듀서인 백야, 겨울P라면.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같이 보자. 별.”


 *


 나는 25살의 한국인으로 현재 이름은 백야, 별명은 겨울P, 전직은 해결사에 현직은 일본 아이돌 프로듀서다. 여기서 해결사란 돈을 주면 사람을 찾아 패거나 죽이는 일, 프로듀서는 아이돌을 프로듀스 하는 일을 말한다. 고아원에서 자랐으며 형님들을 만나 해결사로 일하다 모종의 이유로 지금 일을 하게 되었다. 온 몸에 흉터가 가득하나 정장으로 가리고, 눈빛이 날카롭지만 모자 아래 숨기고 있다. 감이 좋고 싸움에 능하며, 더위에 약하고 아직 일본어엔 서투르다. 그럼에도 이 일을 하는 이유는 내 담당 아이돌들이 아름답기 때문에. 나는 그 아이들 덕에 살아가고 있다. 내 아이돌들은 나를 백야, 겨울P, 프로듀서라고 부른다.











이겼다 (?)

시즌2 끝!


이지만 아직 후기와 후일담이 남았습니다.


내일 후기를,

그리고 최대한 빨리 후일담 에피소드를 써서

완전한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기다려주시고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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