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카테고리.

  1. 전체목록

  2. 그림

  3. 미디어



잠자는 공주 THE HUNDRED LILY-25장~에필로그

댓글: 9 / 조회: 1719 / 추천: 5



본문 - 02-04, 2016 23:28에 작성됨.

25장  푸른 빛

 

 "좀 더 핀치일 때 멋있게 달려오고 싶었는데 말야."

 불타오르는 화염과 함게 나타난 것은 하루카였다. 이쪽을 돌아보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누, 누구야, 너!"

 세 번째 번개화를 한 미나세 상은 서 있는 게 고작인 상태였다. 하지만 날카로운 시선을 하루카에게 찌르듯이 향한다.

 "치하야 짱을 구해 줘서 고마워. 나머지는 나한테 맡겨."

 표정을 되돌린 하루카의 똑바른 눈동자에, 미나세 상이 숨을 삼켰다. 무언가를 느낀 것인지 그 얼굴에서 긴장이 풀어져 천천히 나를 보았다.

 "치하야, 알았어? 널 쓰러뜨리는 건 저런 금발 송충이가 아니라 이 나야."

 "……기다릴게."

 마지막까지 오기를 부리는 눈빛을 내게 향하던 미나세 상의 눈이 감기고 두 다리가 힘을 잃었다. 그 몸을 받치고 지면에 눕히고 나서 하루카를 올려다본다.

 "――하루카."

 "――알고 있어."

 거의 동시에 끄덕인 하루카는 출현시킨 언월도를 뒤쪽에서 잡고, 미키를 향해 대지를 찼다.

 한 순간에 간격을 좁힌 하루카의 일격을 낫으로 정면에서 막은 미키는 기세에 저항하지 않고 뛰어오르면서 여러 개의 광탄을 출현시켰다.

 나도 일어서서 하루카에게 뛰어가며 비처럼 쏟아지는 광탄을 두 장의 벽을 출현시켜 조종하면서 막는다.

 하루카 옆에 섰을 때 미키의 모습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하루카 앞에 나타난 미키가 칼날을 거대화시킨 낫을 목 부근을 노리고 일섬.

 대체 어디에 이런 힘이.

 뭔가가 강제로 움직이게 하고 있는 것처럼, 미키는 우리들 주위를 날듯이 뛰어다니며 하루카에게, 나에게 정신없이 칼날을 휘둘렀다.

 "한동안은 버티자, 치하야 짱. 등은 맡길 테니까."

 끄덕이자 하루카는 내 등 뒤로 돌아, 중심을 낮게 잡고 언월도를 잡았다. 나도 거의 손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벽을 출현시켜 팔의 미묘한 움직임만으로 반짝이고 사라지는 연두색 칼날에 맞춘다.

 거의 동시에 등 뒤에서 참격과 참격이 부딪히는 소리와 내가 낫을 튕겨내는 소리가 겹쳐진다. 막았다고 실감할 새도 없이 다음 위치로 방패를 이동시킨다.

 양 팔을 계속 움직이면서 아슬아슬한 방어를 반복하는 사이에, 점점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감각이 엷어져 간다.

 단지 하루카를 지키기 위해.

 공주님을 지키는 기사처럼.

 하루카도 그런 생각을 해 주고 있을까. 분명 내 시야 밖에서 전혀 들어오지 않는 연두색 칼날이 그 답일 것이다.

 이래선 어느 쪽이 공주고 기사인지. 애초에 어느 쪽이든 상관 없을지 모른다.

 뒤에 있는 것이 하루카니까 지키고 싶다, 단지 그거면 충분할 테니까.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속도로 낫을 휘두르길 계속하던 미키도 드디어 그 발이 느려졌다. 빈틈을 놓치지 않고 하루카가 등 뒤에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진홍색 칼날을 아래에서 위로 휘두른 하루카가, 순간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한 미키를 상공으로 날린다.

 스스로 고도를 높인 미키의 등 뒤에는 삼각형을 이룬 연두색 빛. 내가 막았던 세 개 정도가 아니다. 하늘 한 구석을 전부 메울 것처럼 생겨난 그것들은 20개가 넘었다.

 그 미키에게 하루카가 결사의 표정으로 달려들었다. 오른손에 쥔 진홍색 언월도가 홍련의 불꽃을 피운다.


 있잖아, 하루카――

 이제 이 세계에는 네가 사랑했던 건 거의 다 사라져 버렸는데.

 지키려고 했던 사람들마저 떠올릴 수 없는데.

 너는 왜 처음 만난 벚나무 아래에서, 봄 햇살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을까.


  '아이돌이니까'  '아마미 하루카니까'


 그렇게 말하며 쓸쓸하게 웃었던 너를 떠올린다.

 아이돌은 소녀들의 영원한 동경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하루카가 아이돌이라서가 아니다.

 아이돌로서의 하루카도 아니다.

 난 하루카라는, 한 명의 소녀를 동경한 것이다.


 "하루카!! 왜 모르는 거야! 미키랑 하루카는 이제, 이런 세계는 필요 없어! 하루카도 아이돌이잖아! 잠자는 공주의 절망을 알았잖아! 어째서!!!!"

 절규하는 미키가 두 팔을 들어올리고 천천히 공중의 삼각형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하루카가 언월도로 크게 공중을 베자, 거기서 폭염이 피어올랐다. 생겨난 불꽃은 아무런 기반이 없는데도 어두운 밤을 집어삼키며 점점 번져 간다.

 "'아이돌'이라서가 아니야. 내가 '아마미 하루카'라서도 아니야――"

 빛나는 삼각형이 에너지를 폭발시켰다. 덮쳐 오는 그것을 불꽃으로, 스스로의 검으로 떨쳐내며 하루카가 외쳤다.

 "난――아마미 하루카니까!"


 백 년 전의 '하루카' 같은 건 모른다.

 내가 지키고 싶은 건, 지금 여기에 있는 하루카다.

 나 같은 사람에게 웃어 주었던 하루카다.

 네가 거기 있어 준다면.

 나도 마지막 한 조각까지 이 목숨을 불태우리라.


 대지를 차고 하늘을 뛰어간다. 네 옆으로.

 기세가 약해진 불꽃 앞으로, 남아 있는 모든 힘으로 방패를 편다.

 부서질 것 같은 두 팔을 앞으로. 이 손이 무언가를 붙잡을 수 있도록.

 연두색 섬광이 사라지고 시야가 트였다. 하루카와 함께, 더욱 위로. 미키를 정면에서 바라보고 정지하자, 미키는 들어올린 채로 있던 두 팔을 우리들에게 내밀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미키의 절규에 호응하듯이 공중의 삼각형이 세 배로 늘어났다. 그것들이 그녀의 손바닥 앞으로 모여, 겹쳐져, 거대한 육망성을 밤의 어둠에 그려 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해, 저건. 저런 지독한 건 백 년 전의 나도 꺼낸 적 없어."

 간신히 쓴웃음을 지으면서 하루카가 한숨을 쉬었다.

 눈앞에는 잔혹할 정도로 아름다운, 연두색으로 반짝이는 절망의 빛.

 하지만 신기하게도 마음은 평온했다.

 힘을 전부 쓴 내가, 애초에 이렇게 공중에 있을 수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몸 깊은 곳에서 조용히 맥동하는 이 힘의 근원이 무엇일지, 나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자신이 해야 할 일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 힘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는 않는다.

 하루카를, 모두를 지키는 건 나다. 다른 누구에게 넘길까보냐.

 미키가 만들어낸 육망성이 폭발적인 빛으로 공중을 찢고 부수었다.

 방출된 힘의 격류에 삼켜지면서, 하루카와 함께 정면에서 그것을 받아 낸다.

 옆에 있는 하루카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뻗고 있는 팔도 이제 오래 견디진 못할 것 같다.

 하루카가 날 보았다. 그 눈이 내 눈동자를 비추고, 쓸쓸히 웃었다.


 아직 아무것도.

 네게 전하지 못했지만.

 이 마음은 전해지는 것일까.


 힘을 계속해서 방출하는 미키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이 힘……. 너도 아이돌의 힘을 가졌단 말야――?"


 미키는 누군가 한 사람을 깊게 사랑했던 거겠지. 굵은 줄기 같은 확실한 마음은, 하지만 그것만으로 계속 서 있기엔 불안정했던 건지도 모른다.

 하루카는 분명 모두를 사랑했다. 하지만 뿌리처럼 뻗은 그 마음에는 절대적인 기반이 될 누군가가 없었던 것이겠지.

 두 사람의 마음이 틀렸던 게 아니다.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리는 거다.


 먼 아래 지상에서 쌍둥이가 외친다.

 "안 돼! 새로운 잠자는 공주가 태어나버려!!"


 거기엔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옆에도,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다.

 확실한 인연을 키운 모두가 있다.

 어쩔 도리 없는 마음 끝에, 그대가 있다.


 "하루카."

 살짝 이름을 부른다.

 하루카는 한 순간 결심한 것처럼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곧 내가 정말 좋아하는 웃음을 짓고, 내게 손을 뻗었다.

 "――치하야 짱이라면, 괜찮아."

 분명 말로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것도, 있었던 것이다.


 자.

 내 전부를 빼앗을 수 있다면 해 보라고.

 "――하루카. 나, 아이돌이 될게."

 하루카의 손을 꼭 잡는다.

 이 손 만큼은 놓지 않는다.

 뿌리를 내리고 대지에 서서 하늘로 줄기를 뻗는 벚나무가, 봄에 꽃을 피우듯이.

 지금. 그 때의 약속을 이루자.


 빛에 둘러싸여.

 내 바람이 아이돌의 옷을 만들고,

 내 기도가 아이돌의 힘을 양손에 쥐게 한다.

 천천히 눈을 뜬다.


 먼 아래 지상에서 은발 소녀는 말한다.

 "한 쪽 뿐인 붉은 눈. 설마――"


 분명 지금 내 의식은 모두를 향한, 모두의 마음이 붙잡아 주고 있는 것이겠지.

 하루카를 향한 마음도, 슬픔의 연쇄 중 하나로 끝내게 두지 않는다.

 만약 긴 잠에서 깨어나 곁에 아무도 없게 되더라도.

 나, 널 잊지 않을 거야.

 내가 사랑한 세계를 잊지 않을 거야.

 그러니――


 양손에 잡은, 칼날이 없는 그것을 휘두른다.

 푸른 빛이, 넘쳐나는 절망을 계속해서 쏘는 잠자는 공주의 힘, 미키를 집어삼킨다.

 푸른 반짝임이 아침의 빛처럼 학원으로 쏟아져 내렸다.


 오직 혼자서 모든 것에 도전하려던 소녀의 눈에선 붉은 빛이 사라지고.

 밤의 어둠이 밝아져 간다.

 

 

최종장  영원의 약속

 

 미키가 떨어져 간다.

 그 몸이 지표에 격돌하기 직전에 리츠코의 오른손이 움찔하고 움직였다. 그 손끝에서 초록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미키를 부드럽게 받아내, 살짝 그녀를 지면에 내렸다.

 나와 하루카도 손을 잡고 미키를 쫓았다. 우리들이 그녀 옆에 내려와 서서 원래 교복 모습으로 돌아가자, 미키는 노곤한 듯이 눈을 떴다. 아이돌의 빛을 잃은 그 눈이 날 보고 엷게 웃음을 지었다.

 "아~아……. 져 버린, 거야. 하지만 괜찮아? 졸리지……않아?"

 "――졸리, 네."

 한 번 눈을 감으면 이제 오랫동안 뜨지 못할 것 같다.

 아이돌의 힘을 제어할 수 있어도 역시 잠자는 공주가 되는 운명에선 도망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시조 상과 아미, 마미가 다가온다.

 "치하야……."

 "괜찮아요, 시조 상. 분명 저는 백 년 후에 눈을 떠도 세계를 멸망시키는 일은 없을 거예요. 지금도 제가 뭘 위해 아이돌이 됐는지 제대로 기억하고 있어요."

 "그런 게 아니라――"

 "알고 있어요. 고맙, 습니다."

 시조 상의 눈이 백 년 후의 세계를 걱정해서 그런 게 아니란 것은 안다. 하지만 위로도 동정도, 내겐 필요 없는 것들이다.

 더욱 따뜻한 마음이 하루카의 왼손에서 전해져 온다.

 "뭐가 뭔지, 전혀――"

 "미나세, 상."

 "너, 설마……."

 다리를 끌면서 다가오던 미나세 상이 눈을 크게 떴다.

 "미안하지만 너와의 약속은 못 지킬 것 같아. 미키가 잠자는 공주였어. 그리고, 나도."

 

 그 말만으로 모든 것을 눈치챈 것 같았다. 미나세 상은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이기고 도망가겠다는 거야? ――나와 같은 시대를 살지 못했던 걸 후회하도록 해."

 말로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이 있는가 하면, 말 뒤편에서 전해지는 마음도 있다.

 "……미키, 그런 거 이제 전부 시시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조금 부러워."

 내가 미나세 상에게 대답하지 않고 있자, 미키가 대자로 누운 채로 말했다.

 "미키, 당신은 계속 고독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만, 사람은 꽤나 혼자가 되는 게 어려운 법이랍니다."

 그런 미키에게 말을 건 것은 시조 상이었다.

 "안경을 쓴 여성, 리츠코는 당신이 백 년 전에 구한 급우의 자손입니다. 당신의 얘기를 듣고 자란 그녀는 자신에게 능력이 있다는 걸 알고 바로 이 학원에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리츠코는 이런 외진 곳에서 젊을 때부터 교사를 하고 있던 건가. 하나의 납득이 조용히 마음에 떨어진다.

 "리츠코는 예전부터 말했습니다. 미키에게 처음으로 아침 인사를 건네는 건 자신이라고. 그리고 반드시 미키의 슬픔을 후세로 잇지 않겠다고."

 "……리츠코, 상의 친절은 너무 알기 힘든 거야."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는 미키의 눈이 눈부신 듯이 얇아지고, 한 방울의 눈물이 유성처럼 떨어졌다.

 "아이돌이나 잠자는 공주 뿐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의 소망과 마음이, 이 학원에는 모여 있습니다. ……이오리, 당신의 아버님도 그렇답니다."

 "아버지가?"

 시조 상의 말에 미나세 상은 놀란 듯이 얼굴을 들었다.

 "당신의 아버님은 타카기 님과 만나 이 학원에 원조를 청했습니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득도 없는데도."

 "그래서 아버지는 내가 아이돌이 되겠다고 했을 때……."

 또 하나 의문이 풀린다. 이 학원이 너무나 적은 학생수로도 어떻게든 존속할 수 있던 건 어떤 시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솔직히, 지금은 그런 것보다――

 "미나세 상, 다른, 애들은……?"

 "여기에 없는 애도 있으니까 뭐라고 말은 못하겠는데. 학원이 푸른 빛에 휩싸였을때 분명히 치유의 힘을 느꼈어. 그 전에 이미 늦지 않았다면, 분명 괜찮아."

 미나세 상의 말에 안도가 퍼진다. 안심하자 동시에 잠기운이 강해진다.

 이제 분명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시대엔 없는 것이겠지.

 "그럼 난 이만 갈게."

 "――치하야! 실패하면 가만 안 둘 거야. 백 년 후에도 2백 년 후에도, 내가 무덤 밑에서 나와서 널 날려버릴 테니까."

 "후훗. 내가 인정한 네가 그렇게 말해준다면 안심이야."

 "누, 누가!"

 딴 데를 보는 미나세 상에게 쓴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녀의 눈에 작은 눈물 방울이 반짝였던 것은 꺼내지 말아 주자.

 고마워, 미나세 상.

 결국 입에 담을 일은 없었던 그 말을 추억과 함께 마음속에 소중히담아 둔다.

 아즈사 상, 타카츠키 상, 하기와라 상, 가나하 상, 마코토, 그리고 리츠코.

 모두에게도 제대로 감사와 이별의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시간은 없어 보였다. 나머지는 미나세 상과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자.

 내가 사랑한 세계를 계속 지켜줄 사람들에게.

 발을 돌려 구교사 쪽으로 걸어간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하루카만이 따라온다.

 벚나무 아래, 지하로 이어지는 나선 계단. 돌로 된 그것을 한 걸음씩 밟아 내려간다.

 하루카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데이트가 이런 음침한 곳이라니. 그녀에게 미움받고 말까. 문득 생각한 것에 작은 웃음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시조 상이 있었던 방 반대편으로 걸어 나간다. 양초가 비추는 복도 막다른 곳에 열려 있는 어두운 방. 분명 내가 저번에 꿨던 꿈은, 여기에 끌려온 미키의 과거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아무도 없는 폐허가 된 학원이, 역시 미래라는 게 됐을 터인데.

 꼴 좋다. 다들 분명 무사할 거야. 운명 같은 거 내 알 바 아냐.

 ――유. 나, 드디어 네게 자랑할 만한 게 생겼어. 그걸로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곤 생각 안 하지만. 사실은 멀리서라도 널 지켜보며 살고 싶었는데.

 이 두 손은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기만 하는 게 아니다. 마지막까지 누군가를 지킬 수도 있었다.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에게 시선을 향한다.

 옆에서, 정말 좋아하는 꽃이 핀다.

 "치하야 짱, 나 있지, 치하야 짱과 보냈던 시간, 정말로 행복했어."

 하루카가 부드러운 봄의 햇살 같은 웃음을 지으며 음미하듯이 말했다.

 "아이돌인 내가 아니라. 잠자는 공주로서 사라진 나도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이 손에 넣은 소중한 마음이야. 짧은 생을 받은 내가, 확실히 여기에 있었던 증거야."

 하루카의 마음은 내 것과 같은 모습일까. 자신조차 잘 표현할 수 없는 이 마음은.

 "치하야 짱. 날 잊지 말아줘. 내가 여기에 있었단 걸. 내가 치하야 짱을 소중히 생각하고 있었단 걸."

 달라도 상관 없긴 하지만. 내 마음은 그걸로 변하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조금 신경쓰였으니까. 더 가까이서, 강하게 널 느끼고 싶어졌으니까.

 "그럼 분명, 나――"

 하루카의 머리를 끌어당겨서 작은 꽃잎 같은 입술에, 살짝 내 그것을 겹친다. 아주 잠깐 하루카의 전신이 경직하고, 놀라서 크게 뜨였던 눈이 천천히 감겼다.

 ――다행이다.  

 입술로 말을 막아도. 네가 하고 싶었던 말은 알 수 있어. 너와 내 마음은 이렇게나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하루카의 두 팔이 내 등에 둘러졌다.

 처음 한 키스는 하루카의 눈물 맛이 났다.

 또 하루카는.

 울 수 없는 나 대신에 눈물을 흘려 주는 거겠지.

 입술을 떼자 뺨을 벚꽃잎처럼 물들인 하루카가 한 걸음 물러서서 조금 화난 것처럼 입을 삐죽 내밀었다.

 "너무해, 치하야 짱. 기습이라니. 그것 때문에 무슨 말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렸어!"

 "하루카야말로 너무해. 일부러 짠 입맞춤을 제공해 주다니."

 "이, 이건 아니야! 땀이야!"

 "그래. 모처럼의 내 첫번째 키스는 땀 맛이었던 거구나."

 눈을 부비면서 하루카는 조금 웃었다.

 "약속할게, 하루카. 난 절대로 널 잊지 않아."

 "――응!"

 태양처럼 빛나는 웃음이 조금 눈부셔서 눈을 가늘게 떴다. 울고 있는 하루카도 화내고 있는 하루카도 귀엽지만. 제일 좋아하는 네 표정을 뇌리에 각인시킨다. 몇 백 년이 지나도 빛바래지 않도록.

 "하루카――"

 마지막에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딱 맞는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루카도 마찬가지인 듯, 음 하고 신음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안녕, 은 좀 그렇지. 아까 밤이었으니까, 좋은 밤이야?"

 "하지만 원래는 아직 낮이었는걸. 미키의 힘으로 밤의 장막이 내려왔을 뿐이고."

 "그것도 그런가. 그럼 역시――"

 하루카는 웃는다.

 "좋은 아침이야, 치하야 짱. 백 년 분 먼저 말해 둘게."

 나도, 웃는다.

 "좋은 아침이야, 하루카. 내일의 네가 부드러운 아침 햇살에 감싸이기를."

 분명 내 기도는 닿을 것이다. 아이돌의 힘을 얕보지 말아 주었으면 한다.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는다.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문이 닫혀 간다.

 눈물로 눈을 빨갛게 물들인 웃음.

 그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본 하루카였다.

 한 줄기 빛도 들어오지 않는 방 중앙에 검은 관이 놓여 있다. 꽤나 취미가 나쁜걸.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뉘어 보니, 과연 그렇게까지 나쁘진 않을지도 모른다. 분명 이건 산 자를 위해 만들어진 특수 제작품일 것이다.

 어둠 속에서 눈을 감는다.

 하루카에게 한 번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은 느낌도 들지만. 제대로 전해졌겠지.

 말해 뒀으면 좋았을 일들, 해 뒀으면 좋았을 일들, 몇 개인가가 떠오르지만. 딱히 후회할만한 것들도 아니다.

 결국 벚나무 아래에서 읽었던 소설의 결말도 모르는 채가 되었지만.

 지금의 나는 그들의 기분을 알 것 같기도 하니까. 눈을 떠도 다음은 안 읽어도 된다.

 다음 백 년 후의 세계에서는 다른 취미를 찾아 볼까.

 내가 저지른 죄는 없어지지 않지만. 사소한 기쁨을 맛보는 것쯤은 용서해 줬으면 한다.

 ……그렇지. 노래 같은 건 어떨까. 분명 다시 한 번, 노래를 진심으로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모처럼이니까 곡을 만들어서 가사도 써 보자. 처음은――새로운 잠자는 공주의 이야기를.

 조금 슬픈 노래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잠자는 공주 이야기를 절망만으로 끝내지는 않는다. 아이돌은 탄식의 우상 같은 게 아니니까.

 꿈 속에서 이야기를 잣자. 처음이자 마지막 키스를 추억으로 남기고, 마지막 잠자는 공주의 시작을 노래하자.





 

 백 년의 세월이 흐르더라도. 나는 너를 만나러 가리라.

 내가 계속 생각하는 한, 네가 내 마음속에서 없어질 일은 없으니까.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이 곁에 있어 주었던 것을.

 나는 계속――잊지 않는다.

 

 

after xxx

 

+xxx -I still love you-

 

 길고 긴 꿈을 꾸고 있었던 것 같다.

 천천히 눈을 뜬다.

 최악의 기상이었다. 일단 어둡다. 새까맣다. 오늘 아침 태양은 전혀 의욕이 없다고 생각했다.

 누워 있는 곳도 차갑고 딱딱하다. 왜 이런 데서 자고 있었더라.

 상반신을 일으켜 본다. 곧 머리가 뭔가에 부딪혀서 둔탁한 소리와 아픔을 만들었다. 아무래도 차갑고 딱딱하고 좁은 침상인 모양이다. 왜 이런 곳에…….

 위를 막고 있는 무언가를 양 손으로 들어올려서 옆으로 미끄러뜨린다. 시야를 막고 있던 것이 점점 없어져도 눈앞에 있는 것은 똑같은 어둠이었으니 딱히 의미는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일어나서 어두운 방 안을 신중히 걷는다. 부딪히지 않도록 앞에 뻗고 있던 팔이 무언가에 닿았다. 이게 문일까.

 손잡이라 생각되는 곳을 잡고 단번에 연다. 드디어 약간의 조명을 발견했나 싶었지만 미덥지 못한 양초 뿐. 방 밖으로 이어져 있는 것은 어두침침한 돌로 된 복도. 뒤돌아서 방 안을 보자 중안에 있던 건 칠흑의 관. 아무래도 저 안에서 자고 있었던 것 같다. 꽤나 취미가 나쁜걸.

 막 일어난 머리가 영 움직여 주질 않는다. 왜 이런 데에 있는 건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일단 이 강렬한 공복과 목마름을 어떻게든 하고 싶다. 밖에 나가야지.

 복도 끝에 있던 나선 계단을 올라간다. 몸이 무거워서 발이 엉킬 것 같다. 일어나서 바로 가혹한 운동에 내몰릴 정도로 어제 나는 나쁜 일을 했던 걸까.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올라간 끝에 겨우 밝아졌다. 밖이 가깝다. 마지막 몇 계단을 단번에 뛰어 올라갔다.

 지면을 밟고 선 내 뺨을 무척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지는 바람이 쓰다듬었다. 갑작스런 아침의 빛은 눈에 나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난 팔로 챙을 만들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부시다.

  '치하야 짱.'

 누군가에게 불린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잠들기 전에도 뭔가가 눈부셔서 눈을 가늘게 떴었던 것 같다.

 ――그래.

 태양처럼 빛나는 웃음을 내게 보여 주었던 소녀.

 "하루, 카――"

 싹트는 것처럼 머릿속에 떠오른 그 이름을 입에 올리자, 시야에 비치는 햇빛이 조금 번졌다.

 아침 햇살이 눈부셔서가 아니라.

 봇물 터지듯이 되살아난 추억들이 너무도 사랑스럽고 소중한 것들이어서.

 유, 미나세 상, 타카츠키 상, 가나하 상, 하기와라 상, 아즈사 상, 마코토, 리츠코. 덤으로 시조 상과 아미, 마미――

 잠들기 전 내게는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다.

 지키고 싶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본다. 황량한 대지. 폐허가 된 학원.

 등 뒤에 있는 벚나무는 쓸쓸하게 갈색 줄기를 하늘로 뻗고 있다. 말라 비틀어진 팔처럼 벌려진 가지에 꽃은 피지 않았다.

 흘러가는 세월은 모든 것을 바꾼 것이겠지.

 여긴 분명 내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세계다.

 그리고 내가, 죄와 추억을 끌어안고 앞으로 살아갈 세계다.



………

……





 교사 주위를 빙 둘러봤다. 사람의 기척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벌써 몇 십 년도 더 전부터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은 것 같다. 미나세 상과 다른 애들이 마지막 졸업생이 된 것일까.

 나를 신용하고 학원이 그 역할을 마쳤다면, 난 그 기대에 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곤 해도. 딱히 뭘 분발할 것도 없이. 전혀 세계를 부수고 싶다는 상태가 될 조짐은 없었다.

 난 내가 소중히 생각했던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다. 내가, 그녀들이 사랑했던 세계의 귀중함을 알고 있다.

 고대부터 이어져 온 잠자는 공주의 이야기는, 지금 끝난 것이다.

 하지만 난 앞으로 한동안 살아가게 되는 셈이고. 앞으로 어떡하지. 일단 더이상 이 학원에 있을 필요는 없다.

 학원을 한 바퀴 돈 내 발은 마지막으로 하루카와 만났던 언덕으로 향했다.

 꽃을 달지 않은 벚나무에 등을 기대고, 그 날처럼 앉아 본다.

 긴 세월을 지나 풍화한 교사. 그 주변에 펼쳐진 광대한 부지도 손질을 하지 않아서 잡초가 멋대로 자랐다. 당시의 정원 같은 풍경과는 많이 다르다.

 그것들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문득 생각한다.

 어쩌면 내가 본 미래의 광경은 지금인 것일까.

 그러고 보니 꿈 속에서 벚나무에 꽃은 피지 않았었다. 미키를 쓰러뜨린 그 날에는 꽤 떨어지기 시작했다곤 해도 작은 핑크빛 꽃잎은 분명 있었다.

 오싹하게 기분 나쁜 예감이 등줄기를 훑었다. 설마, 바꿨을 미래가 아직 이어지고 있나――?

 하지만 조금 생각해 보고, 딱히 두려워할 것도 아니란 것을 깨닫는다. 아무도 없는 건 당연하다. 벌써 백 년이나 지나 버렸으니까. 그 쓸쓸함은 이제 내가 착실히 다시 짊어진 것들이다.

 아직 조금 무겁다. 하지만 없어지지는 않을테고, 없애고 싶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 쓸쓸함은 내 것이다.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다.

  '이제 다들 없어져 버렸어. 하지만 있지, 난 여기 있어――'

 미래의 것이라는 꿈 속에서 들었던 듯한 목소리가 뇌리에 메아리친다.

 그래. 하루카는 확실히 여기에 있다. 내 추억 속에, 계속 있다. 언제든지 만나러 갈 수 있다.

 괜찮아. 아직 나는 걸어갈 수 있어.

 일어서려고 두 다리에 힘을 넣으려고 했을 때였다.

 "너……아이돌이 되고 싶어?"

 등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경악으로 눈이 크게 뜨였다.

 그 질문이 갑자기 뭐라는 건지 영문 모를 것이어서가 아니라.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과 처음으로 나누었던 바로 그 말이어서.

 그 목소리가 지금까지 이 학원에서 들은 누구의 것도 아니라서가 아니라.

 작은 아픔과 작은 행복과 함께 떠올리고 있던 목소리였으니까.

 그런,

 설마――

 천천히 뒤돌아본다.

 검정색을 바탕으로 한 세일러 복을 입은 소녀가 서 있었다. 머리에 단 리본 두 개가 바람을 맞아 흔들리고, 봄 햇살과도 같은 따스한 미소를 띠고 있다.

 아직 나는 꿈 속에 있는 걸까.

 "하지만 있지, 이제 이 학원엔 백 년쯤 전부터 학생은 없어. 아이돌 같은 건 필요 없게 됐거든. 왜인진 알지?"

 내가 일어서자 그 소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게 다가온다.

 "치하야 짱, 덕분이야."

 소녀는 웃음을 띠고 내 눈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사고가 쫓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그 날 만났을 때 처음으로 떠올랐지만 입에 담지 않았던 의문을, 백 년이 지나 던져 본다.

 "너는――누구야?"

 불쑥 내민 오른팔을 천천히 뽑아 냈다.

 푸른 빛과 함께 선혈이 소녀 복부에서 흘러나와, 그녀는 지면에 무너졌다.

 "너, 너무해, 치하야 짱……. 난, 하루카, 야……."

 그 소녀는 입에서도 피를 토하면서 엷은 웃음을 얼굴에 붙였다.

 "나와 하루카의 추억을 바보 취급하지 마."

 스스로도 소름 끼칠 정도로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나왔다. 오른팔을 그녀에게 향하고 푸르스름한 불꽃을 쏜다. 목소리를 낼 틈도 없이. 먼지 한 톨 남기지 않고. 불꽃과 함께 그녀는 사라졌다.

 불어 나가는 바람이 꽃잎이 없는 거목의 가지를 흔들었다.

 털썩 무릎을 꿇었다.

 누가.

 어째서.

 내게 이런 짓을 하지?

 세계를 구했으니까 감사하라느니 그런 말은 안 한다. 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그 목소리에 이름을 불려도 마음 깊은 곳에서 따스함이 차오르는 느낌이 안 드는 '하루카'가, 하루카라고?

 한 순간이라도 기대에 가슴을 두근대던 자신이 너무도 비참해서.

 내 소중한 하루카는.

 내가 사랑했던 하루카는.

 하루카 말고는 있을 수 없는데도.

 양손으로 얼굴을 덮는다.

 내 안의 하루카조차 푸르스름한 불꽃과 함께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상실감.

 아니다. 하루카를 죽인 건 내가 아니다. 난, 너를,

 어떻게, 하고 싶었던 걸까.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겠다.

 이런 세계는 더이상――



………

……





 정처없이 걷는다. 그저 걷는다.

 어둡다. 어둡다. 어둡다. 여긴 어디일까.

 어느새인가 밤이 돼 버렸다.

 그보다, 꽤 전에 밤이 됐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꽤나 멀리까지 왔다는 건 안다.

 늘어선 빌딩이 하늘을 향한 나무들처럼 주위를 둘러싸고, 마치 숲 속에 헤메어 들어온 것 같다.

 학원에서 하루 동안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도시는 없었으니까, 이것도 백 년이란 시간의 산물일 것이다.

 태양 같은 건 어디에도 없는데 수많은 사람들과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 속에서 나는 어쩔 도리 없이 혼자였다.

 이런 세계는 더이상, 나한텐 필요 없다.

 하지만 전부 부숴버리려고도 생각지 않는다.

 그럴 기력은, 없다. 분명 내 다리의 힘이 다 빠진 곳이 내 세계의 끝이 되겠지.

 "잠, 깐, 기다려."

 마지막 잠자는 공주는 아무래도 임종 때도 혼자일 것 같다. 아이돌에게 죽는 편이 그나마 나았을지도 모른다.

 "저기, 기다리라니까!"

 ……성가신걸. 누군가가 말을 걸 정도로 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겨우 따라잡았네!"

 어깨를 붙잡혀서 혀를 차며 뒤돌아본다.

 눈 앞에서 흔들리는 두 개의 붉은 리본.

 "너무해 정말! 혹시 나 잊어버렸어? 그야 백 년 만이고――"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과 소원 끝에서.


 "이제 다들 없어져 버렸어. 하지만 있지, 난 여기 있어."


 세계의 운명이, 지금 여기에 수렴한다.

 

 

FIRST CHAPTER -the Fate of the World-

 

 치하야 짱이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멍하니 나를 바라본다.

 어쩔 수 없다곤 생각해도 조금 상처받는다.

 일단 빨리 백 년만의 재회를 기뻐하고 싶지만, 백 년간 쌓아 두었던 걸 폭발시켜서 치하야 짱을 끌어안고 싶지만, 그 치하야 짱은 눈을 깜빡이지조차 않는다.

 "어, 저기, 치하야 짱?"

 치하야가 움찔 하고 천천히 양손을 자기 가슴에 올렸다. 뭔가를 확인하고 안도한 것처럼, 그녀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별로 거기, 백 년 지나도 전혀 안 커졌는데, 그걸로 된 거야?

 "정말로, 하루카, 구나."

 "맞아. 미안해, 오는게 늦어서. 여러가지 일이 있어서 밤에 일어나는 생활을 하게 되어서 말입죠. ……치하야 짱이 잠꾸러기인 것도 잘못이라고? 벌써 백 년 플러스 1개월이니까."

 그 날부터 백 년이 지났던 날에는 굉장히 두근두근해서 3일은 잠을 못 잤었는데. 언제라도 뛰쳐나갈 수 있도록 꼼지락거리면서 기다렸었는데. 아무리 지나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걱정되는 마음과 참을성있게 기다리자는 마음이 동거하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잠꾸러기인 점은 나도 남말할 처지는 못 된다. 여러 의미로.

 "그래. 그럼 벚꽃도 져 버리겠지."

 치하야 짱이 조금 웃었다. 드디어 웃어 주었다.

 "그러고보면, 학원 폐허에서 '하루카' 비슷한 뭔가를 만났는데."

 "……그거, 이 시대의 쿠로이 상이 만든 '아마미 하루카'의 클론이야. 난 그런 건 필요 없다고, 치하야 짱이라면 괜찮다고 계속 말했는데, 나한테 비밀로 하고 몰래 만들었구만, 그 망할 사장."

 나도 모르게 지저분한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미안해, 치하야 짱. 정말 기분, 안 좋았지? 내가 알았었으면 반드시 말렸을 텐데."

 "그러게. 무심코 산산조각내 버렸어."

 "……쿠로이 상도 나쁜 사람은 아냐. 우리들을 믿는 마음이 조금 부족했을 뿐이고."

 "납득은 했어. 뭐든 아무래도 상관 없어져 버렸었는데, 네가 있으면 뭐든 아무래도 상관 없는걸."

 "음, 그 두가지는 확실히 다른 거지? 난 산산조각내지 않을 거지?"

 걱정되어서 물어보자 치하야 짱은 우습다는 듯이 피식 했다.

 "그런데 하루카, 난 네가 진짜 하루카란 건 알겠는데――"

 "어쩌면 가짜일 지도 몰라?"

 "내가 누구보다 소중한 하루카를 잘못 볼 리가 없잖아."

 "……그런 말 얼굴 맞대로 들으면, 엄청 부끄러운데요.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말하면 뭔가 무서워요."

 "그래서, 누구보다도 소중한 하루카를 잘못――"

 "스톱, 스톱, 제발 용서해줘! 엄청 기쁘지만 그런건 이런 대중 앞에서가 아니라, 알맞은 때와 장소에서, 그……."

 "말을 끊지 말아 줄래?"

 "치하야 짱 때문이야!"

 "정말. 그러니까, 네가 하루카인 건 틀림 없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냐는 말이야."

 "음 그러니까 그건, 지금 이야기할 게 아니라고 할까, 나중에 제대로 얘기할 테니까――"

 "말 못할 만한 일이야?"

 조용히 말하는 치하야 짱이 무서워요.

 그래서 나는 회상의 세계로 도망친다.



………

……





 치하야 짱과 나를 가로막는 문이 닫혔을 때.

 난 어두침침한 복도에 주저앉아 울었다. 소리를 내서 울었다.  '나'의 기억 속에서도 그렇게 눈물을 흘렸던 날은 없었다.

 아무리 속이려고 해도. 형편 좋은 변명을 자신에게 해 보아도.

 난 치하야 짱을 완전히 지키지 못했다. 그녀가 소중한 사람들과 지내는 미래를 지킬 수 없었다.

 나도 남겨진 이 세계에서의 짧은 시간을 치하야 짱과 보내고 싶었다. 치하야 짱이 마지막까지 있어 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그런 억지를 부릴 자격은 내게는 없다.

 이루어지지 못한 마음의 결정이 뺨을 타고 흐른다. 후회의 양 만큼 눈물이 흐르는 거라면. 멈추지 않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어쩔 도리가 없는 감정 그대로 나는 계속해서 울었다.

 영원처럼 느껴지던 그 시간이 눈물샘도 말라서 끝을 맞이했을 때.

 나는 코를 훌쩍이며 밖으로 나왔다.

 벚나무 주변에 수많은 사람들이 서 있었다.

 미키, 타카네 상, 아미, 마미, 리츠코 상. 그리고 치하야 짱의 급우들. 그 땐 아직 난 그녀들의 이름은 몰랐다.

 지하에서 돌아온 날 보고, 타카네 상이 감개 깊게 말했다.

 "치하야는 진정한 인연을 모두와 맺었고, 하루카, 당신은 치하야의 정말로 소중한 친구였군요."

 "친구……라. 으음, 어떨까."

 입술에 남는 달콤함을 생각하면 포근한 행복과, 작은 아픔과, 씁쓸함.

 조금 복잡한 맛의 나와 치하야 짱만의 비밀이다.

 그러고 보면 아까 치하야 짱과 얘기했던 이오리란 애가 없는 것 같아서 둘러보자, 마침 그녀는 누군가를 안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중이었다.

 "야요이가! 야요이가 아직 눈을 안 떴다고!"

 이오리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외친다.

 "그야 그렇겠지요. 동화에서는 눈을 뜨는데는 입맞춤이라고 들었습니다."

 타카네 상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웃기지 마! 그 머리카락을 오더 메이드 코트의 털로 만들어 버린다!"

 "기, 기묘한.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만큼 떠들썩하게 있으면 곧."

 이오리의 분노에 쩔쩔매던 타카테 상의 목소리에 이끌리듯이, 이오리 품속의 소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으음……. 어라? 이오리 짱? 좋아해~"

 갑자기 이오리의 목에 팔을 두른 소녀는 뺨을 부볐다. 그 행동에 어깨를 움찔거리고 필사적으로 떼어내려는 이오리가 외친다.

 "뭐? 잠깐만, 야요이! 이거 놔! 무슨 일이야 이건!"

 "힘을 증대시키는 약의 부작용으로 분노나 증오 같은 감정까지 증폭되고 말았기에, 효과가 떨어져서 억압되어있던 원래 감정이 흘러나오는 것이겠지요.

 "냉정하게 해설 안 해도 돼! 어떻게 좀 해봐!!"

 "이오리, 그런 칠칠치 못한 얼굴로 말해도 설득력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잖아!"

 "안심하시길. 그 효과도 또한 곧 없어질 것이기에."

 "그것도 싫어!!"

 "이오리 짱, 좋아해~"

 "핫! 나도 좋아해, 야요이! 하지만 입술은 그만둬 입술은 별로 상관 없지만!!??"

 그런 타카네 상과 이오리, 그리고 야요이의 대화를 멍하니 지켜보던 모두들 중 한 명의 소녀가 뭔가 불평을 중얼거렸다.

 "그렇지, 눈을 뜨는 데에는……키스. 하지만 그런, 역시 안 돼――으음. 여기서 가야지. 좋아. …………하우우~~"

 털썩, 소녀가 지면에 쓰러졌다.

 "유, 유키호!? 왜 그래, 아직 몸이――"

 "벼, 병이……. 치료에는 마코토 짱의, 누, 눈을 뜨게 하는……아으으."

 "……아즈사, 영문을 모르겠어, 저거."

 "어머 어머. 히비키 짱도 소녀의 마음을 공부해야겠구나?"

 "뭐? 본인도 소녀라고?"

 시끌벅적한 소동을 보고 있으려니 또 눈가에 눈물이 한방울 흘러나왔다. 이제 다 떨어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있지, 치하야 짱.

 넌 지켜낸 거야. 소중한 사람들을 모두, 제대로.


 그런 나를 보고 이오리가 물었다.

 "그래서, 치하야……는?"

 "……다음에 눈을 뜨는 건 백 년 후라고 생각해."

 자리의 공기가 쩍 하고 얼어붙었다.

 "저, 저기 있지. 치하야 짱은 모두가 그런 얼굴을 했음 해서 아이돌이 된 게 아닐 테니까. 자 자, 아까처럼 말야. 우리들은 웃고 있자? 응?"

 "그런 빨간 눈을 한 녀석한테 들어도 말야, 그런 느낌."

 내 말에 이오리가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덕분에 아주 조금 모두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온다. 정말로 강한 아이라고 생각한다.

 "하루카가 말하는 대로입니다. 우리들은 그녀가 다시 눈을 뜰 때, 조금이라도 이 세계가 좋은 곳이 되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그녀의 행위에 보답하는,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겠지요."

 타카네 상의 말에 모두가 끄덕인다. 그렇다구, 짜증나는 표정을 지어도 치하야 짱은 기뻐해 주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그러면 우리들은 슬슬 이곳을 떠나기로 하지요. 아미, 마미."

 "라저~"

 "저, 타카네 상은 어디로 가는 거예요?"

 "톱뿌 시크렛또, 입니다."

 내 말에 타카네 상은 장난스러운 작은 웃음을 짓고 입술에 검지 손가락을 올렸다.

 "……미키는 어디로 가면 될까."

 미키가 쓸쓸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아이돌을 키울 필요가 없어졌다곤 해도 이 학원은 모두가 졸업할 때까진 계속될 테고, 너도 여기 있는게 어때?"

 그렇게 말한 건 리츠코였다.

 "그 다음에 도저히 갈 곳이 없다면, 별로 내가, 뒤, 뒷바라지 정도는 해 줄 수 있는데?"

 "에~. 리츠코, 상은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 같은 거 엄격할 것 같아서 싫어……."

 "엉!?"

 "역시 무서운 거야……."

 "그럼 우리집에 올래? 방은 잔뜩 남아 있고."

 "나도 이오리 짱네 집에서 살래~!"

 "조, 좀 적당히 해, 야요이! 언질 잡는다!?"

 "아하하. ……둘 다, 고마워인 거야."

 미키가 빛나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 내가 처음으로 본, 미키의 진심에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그래서, 하루카."

 "아, 타카네 상 아직 있었구나."

 "마지막으로 이 땅에서 해 보고 싶은 연구 실험이 있습니다만."

 "뭔데?"

 "흡혈귀의 전설을 알고 계십니까?"

 "이 학원에도 은근히 있었지, 그거."

 "조금 흥미가 가서 조사해 보았습니다만 이 땅과는 인연이 없는 듯 했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읽었던 문헌 속에 흥미로운 것이. 흡혈귀는 피를 빠는 것으로 동료를 늘린다고 하지요."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그 문헌에는 능력을 사용해 그와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해 시사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즉. 만약 흡혈귀의 흡혈행위가 아니어도, 흡혈귀 '같은' 것이 피를 빨면, 영구한 생명이라곤 할 수 없어도 백 년은 살 수 있는 흡혈귀 '비슷한 것'이 탄생하는 게 아닐까 하고."

 "나 돌아가도 돼?"

 "그렇겐 안 됩니다. 실험대는 하루카, 당신이니까요."

 "어, 싫어 그런 거."

 "뭐어, 그렇게 말씀하지 마시고. 히비키, 이쪽으로."

 "응? 뭐야?"

 "히비키는 동물과 마음을 나눌 수 있었지요."

 "그런데 그게 왜?"

 "그야말로 권수(眷獣)를 부리는 능력. 그리고, 미키."

 "왜애?"

 "미키는 아침에 약할 것 같습니다."

 "맞아~! 미키, 네 번쯤 도로 자는 거 완전 좋아해."

 "잠깐 기다려! 그런 이유로 미키를 불러서 날 어떡할 셈이야!?"

 "물론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백 년을 변함없이 지내는 잠자는 공주의 능력의 잔재를 합하면, 수명이 늘어날지도 모릅니다."

 "이젠 수상한 한방약 강매로 보이기 시작하는데."

 "마지막으로 저. 저는 햇빛에 약하기 때문에 평소에도 양산을 쓰고 있습니다. 덤으로 미스테리아스한 신비함을 갖추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필요 없어, 그런 시시한 거!"

 "농담입니다. 제 능력은 변화. 흡혈귀는 늑대나 박쥐로 변화할 수 있다고 하지요."

 "그렇긴 하지만 있지……."

 "그리고 우리들은 모두 같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은 말뚝으로 심장을 찔리면 죽음에 이릅니다."

 "누가 됐든 그래!!"

 "그러면 하루카. 이제부터 당신의 피를, 우리들 셋이서 빨도록 하겠습니다. 이름하여, 푸로젝토 뱀파이어 걸."

 "있잖아, 싫다는 내 의사는?"

 "하십시오, 히비키, 미키."

 "어, 뭔가 잘 모르겠지만 일단 팔에 간다!"

 "아, 잠깐, 진심으로 물지 마!"

 "발견! 맛있어 보이는 여자애, 하루룽."

 "미키!! 허벅지 안쪽은, 앗, 그만……."

 "저는 역시 목덜미에 실례하겠습니다."

 "응읏……. 제발, 그만, 해, 이 몸은, 평생 치하야 짱한테만――"

 하~~응.



………

……





 중간부터 묘사는 삼갔습니다. 여러가지로 규제가 엄한 백 년 후의 이 세상이니까 말이지.

 이러저러해서 시집을 못 가는 몸이 되어버린 나는, 치하야 짱의 신랑이 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게 아니라.

 흡혈귀 소녀가 되고 말았습니다. 안 그래도 늦잠 체질이었는데. 이제 무리야, 아침은. 햇빛을 받아도 조금 따끔따끔한 정도지만. 어중간한 흡혈귀라서 그런가.

 ……덤으로, 수명도 백 년 정도 늘어난 모양입니다.

 타카네 상은 분명 미키를 쓰러뜨리는 운명만을 받은 날 위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찾아 주었던 것이겠지.

 그 봄에 끝났을 내 목숨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은 잘못일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나는, 살아가는 걸 대충 하지는 못할 것 같았으니까. 어떤 시대에 태어나 눈을 떠도, 내가 쭉 그랬던 것처럼.

 치하야 짱과 한 번 더 만나기 위해.

 자, 그래서. 회상에서 돌아와도 치하야 짱의 기분이 풀릴 리도 없고.

 그야 팟 하고 갓 하고 츗 하는 부분을 지금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감동의 재회였을 텐데 '하루카는 세 명의 암여우에게 몸을 허락한 거구나, 흐응.' 같은 말을 들으면 물거품이다. 잘못하면 내가 산산조각난다. 그건 곤란하다.

 이 건은 다음 기회에.

 그 대신.

 "있잖아, 치하야 짱. 그 전에 읽어줬음 하는 게 있어."

 난 한 통의 봉투를 꺼내 치하야 짱에게 건넸다.

 꼭 지금 치하야 짱이 읽어줬으면 하는 거였으니까. 앞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려는 너에게.

 "하루카, 이게 뭐야?"

 봉투를 받은 치하야 짱이 곤혹스런 표정을 짓는다.

 "동생――유 상한테서 온 편지야. 멋대로일지도 모르지만, 그 뒤에 어느 정도 지나서 만나러 갔었어. 치하야 짱에 대한 걸 전하러."

 "유랑……만났어?"

 "응. 그 뒤에도 몇 번인가. 그건 그가 죽기 조금 전에 나한테 맡긴 편지야."

 치하야 짱이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고 편지를 꺼내서 천천히 펼친다. 그녀의 눈이 적혀 있는 문자를 쫓는다.

 전부 다 읽고.

 치하야 짱의 눈에서, 똑, 하고.

 눈물 방울이 뺨을 타고 흐른다.



 그래. 요 백 년 동안도 여러 일이 있었다.

 타카네 상 일행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갔냐고?

 그건 그녀들의 이야기다.

 미키가 리츠코 상이랑 이오리 중 누구네서 살게 됐냐고?

 그것 또한 다른 이야기.

 유 상에게서 온 편지에 뭐가 쓰여 있었냐고?

 그건 언젠가 분명 치하야 짱이 말해줄 것이다.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 수만큼 이야기가 있다.

 그 시대의 이야기는 이미 끝나 버려서, 더이상 우리들 이외엔 누구도 남지 않았지만.

 미안해, 나만 오랫동안 계속 나와서. 하지만 메인 히로인이란 걸로 용서해 주세요.


 그래. 지금부터 시작되는 것은 우리들이 주역인 새로운 이야기.

 조금 늦잠꾸러기인 두 사람의 이야기고,

 흡혈 소녀와 잠자는 공주가 함께 살 뿐인, 아마도 별 재미도 뭣도 없는 작은 전설이고,

 아이돌――게으름뱅이들의 새로운 동화.


 그런 이야기가 생겨나곤 사라지며 이 세계는 계속돼 왔다.

 슬픔과 증오의 연쇄 같은 게 아니라.

 분명 누군가의 마음 속이나 누군가가 잣는 이야기 속에서, 사람의 마음은 이어져 간다.

 물론 지금 같이 있는 사람도.


 처음 보는 치하야 짱의 눈물이 반짝이는 보석처럼 빛나고 있어서.

 내게 웃어 보이고 있다.

 지금은 치사한걸. 글쎄. 아니, 처음에 기습을 한 건 치하야 짱 쪽이었고.

 조금 등을 폈다. 치하야 짱의 입술이 숨이 닿는 거리가 된다.


 두 번째 키스는 치하야 짱의 눈물의, 조금 짠 맛이 났다.


 ――좋아해, 치하야 짱.






 어떤 시대에도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어떤 시대에도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고 강하게 바랐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 모두의 동화를.

 나는 계속――기억하고 있다.

 

 

 치하야 누나에게



 으음, 73살이나 돼서 이런 편지를 쓰는 건 뭔가 부끄러운데.

 덧붙여서 누나(姉さん)라고 부른 적도 없었는데 말야.

 하지만 조금 재밌어졌으니까 다시 한 번.

 누나.

 어때? 뭔가 근질근질하지 않아?


 하루카 상한테서 누나 이야기는 전부 들었어.


 먼저 오해 하나를 풀게 해 줘.

 그 날 사고가 일어났을 때 내가 느꼈던 건,

 내 경솔한 행동이 부르고 만 참사에 대한, 자신을 향한 절망과 공포 뿐이었어.


 ……아니, 또 하나.

 난 분명 안도하고 있었어.

 자신의 목숨이 무사해서가 아니라.

 내가 눈앞에서 죽었을 경우 쪽이, 누나가 질 상처는 더 깊었을 테니까.


 누나가 그 때 나만을 생각해 주었던 것처럼.

 나 또한 누나밖에 생각할 수 없었어.

 누군가를 소중히 생각하는 감정에 단 하나 죄가 있다면.

 분명 그걸 품은 누구나가 이런 삶밖에 살지 못한다는 것이지.

 사람 목숨을 빼앗았는데도, 나한테는 누나가 어디론가 가 버렸던 게 더 슬펐으니까.


 그래. 그건 내 죄야.


 어른이 되고 나서 나는 나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누구였는지 계속 찾아다녔는데.

 결국 마지막까지 몰랐어.

 그 사람을 향한, 그리고 누나를 향한 속죄도 용서되지 않는 가운데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었던 거라면, 열심히 매일을 보냈던 것 정도지.


 그 날 누나가 해 줬던 건 잘못되지도 않았고 옳지도 않았다고 지금은 생각해.

 누가 살아야 했는가 하는 문제에 정답은 없어.


 단지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필사적으로 살지 않으면 안 돼. 행복해지지 않으면 안 돼. 권리가 아니라 의무야.

 그걸 포기하는 건 지금까지 그렇게 살고 죽어간 사람들에 대한 모독이야.

 그게 정답 없는 문제에 대한, 그로부터 60년을 고민하며 보낸 나 나름의 답이야.


 누나가 구해 준 나는 나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살았어. 이번엔 누나가 행복해질 차례야.

 만약 그래도 누나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면.


 옆을 봐. 누나에게 있어서 소중한 사람이 있을 거야.

 주변을 둘러봐. 그건 분명 누나가 지켜낸 세계야.

 하늘을 올려다 봐. 만약 지금 어둠이 덮여 있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빛이 비출 테니까.


 누나가 이어준 희망은 지금도, 어떤 곳에도 계속해서 싹트고 있어.

 누군가의 희망이나 바람은 분명 아직 누나에게 이어져 있어.

 어떤 바람이나 소원도 이룰 수 있는 사람을 아이돌이라고 부르는 거지.

 그럼, 나도 아이돌이 되게 해 줘.

 내 가장 큰 기도가 형태를 이루기를.

 행복해져, 누나(お姉ちゃん)――



 유

 

 

『잠자는 공주 THE HUNDRED LILY』


【끝】

 

---


안녕하세요, 카와즈입니다.


이번 작품은 즐겁게 읽어 주셨나요? 예고편이라는 짧은 영상에서 이만큼의 물건이 나올 수 있다는 데에 상당한 충격을 받았던 작품입니다. 그것과 함께 무척이나 번역하기 성가신 물건이기도 했지요. 자주 쓰지 않는 단어가 잔뜩 나온 탓입니다. 새로운 도전이라 생각하고 임했고, 아마도 합격점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사실 공식 예고편의 치하야의 한쪽만 붉은 눈을 봤을 때, 저 나름의 예상 해답(?)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이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왔지요. 설마 그 부분을 그런 식으로 해석할 줄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깔끔한 해피엔딩이 마음에 듭니다. 큥 뱀파이어 걸 관련 부분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지요. 중간 중간 잠자는 공주의 가사도 섞여 있습니다만, 알아보기 쉽게 잘 번역되었나요? 어디까지를 남기고 어디까지를 다듬을지는 늘 고민되는 부분입니다.


번역하다 보니 저 스스로가 괜히 즐거워져서, 혼자 회사에서 신나서는 굉장한 양을 이틀만에 해치우고 말았습니다. 3월부터 다시 제 수험생활이 시작됩니다만, 그 이전에 끝내게 되어 기쁩니다.


아무튼 즐겁게 읽어 주셨다면 그이상 기쁜 일은 없겠습니다. 그러면 또다시 재밌는 물건을 들고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요.

5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