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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공주 THE HUNDRED LILY-8~1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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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04, 2016 23:00에 작성됨.

8장  은발의 공주는 쌍둥이에게 전래동화를 들려준다

 

 바닥에 어질러진 수많은 인형과 쿠션. 벽에는 그림이 몇 장씩 걸려 있고, 예스러운 실내 장식이 방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방의 신기한 부분은 더 있다. 평소엔 보지 못할 만한 식물이 몇 그루나 천장까지 뻗어 있고, 새나 개구리 같은 생물까지 그 안에 있었다.

 도저히 평소에 생활하는 공간이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마치 돈 많은 귀족이 변덕스러움을 가득 담아, 장난으로 꾸며 놓은 듯한 방이다.

 덧붙여서 침대 위에서 베개를 등받이 삼고 있는 건 열일곱, 열여덟 쯤 된 소녀다. 훌륭한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를 초연하게 등 중간까지 늘어뜨리고 있다.

 그 양 옆에는 쌍둥이인지 얼굴도 몸집도 아주 비슷한 더 작은 소녀 둘이, 은발 소녀에게 어리광부리듯이, 매달리듯이 좌우에서 그녀의 팔을 잡고 달라붙어 있다. 더 작다고는 해도 입에 문 젖꼭지가 어울릴 나이는 진작에 지났을 테지만.

 현실감 없는 방에서, 같은 디자인의 검은 실내복을 입은 세 명의 소녀. 하지만 그녀들의 지금 행위만을 본다면 어떤 집에서도 어머니가 딸에게 하는 것과 같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은발 소녀의 오른쪽에 앉은, 머리를 오른쪽으로 묶은 소녀가 이야기의 다음 내용을 조른다.

 은발 소녀는 양손으로 펼친 가죽 표지로 된 큰 책에서 시선을 돌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마치 책 같은 건 필요 없다는 듯이, 막힘없이 그녀의 입에서 이야기가 자아진다.

 "구교사의 벚나무 밑에는 소녀가 잠들어 있고――"

 그것은 치하야와 다른 이들도 잘 아는, 그저 소문.

 "――몇 년이고 그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답니다."

 그럴 터였다.

 "몇 년이고, 몇 년이고……."

 하지만 은발 소녀의 말투는 재밌게 웃기게 얘기하는 게 아니라, 어딘가 슬픔을 담고 있었다.

 "불쌍해……."

 왼쪽편에 앉은, 긴 머리를 왼쪽에서 묶어 늘어뜨린 소녀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그렇지요. 하지만 마미, 어쩌면 이건 불쌍하단 말만으로 끝나는 그런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마미라 불린 소녀가 조금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뜻이야?"

 "이 이야기는 옛날 옛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래 동화. 아미, 여러분에겐 아직 들려 주지 않은 시작의 이야기가 있답니다. 그리고 어쩌면, 끝, 그 다음도."

 아미라고 불린 소녀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듯이 으음하고 신음했다. 그것을 미소지으면서 바라보던 은발 소녀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려 높이 떠올라 가는 달을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보름달에 가까운 하얗게 빛나는 달에 구름이 반쯤 덮이듯 걸려 있다.

 "여기까지는 계획대로……. 하지만 조금 불온한 기척이 느껴지는군요."

 생각을 정리하듯이 은발 소녀는 입술에 손을 올렸다.

 "준비 몇 개를 미리 해 두는 편이 좋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을 계속하는 은발 소녀에게, 마미는 젖꼭지를 우물거리면서 묻는다.

 "있잖아, 오히메찡은 뭘 원하는거야?"

 오히메찡이란 별난 이름으로 불린 소녀는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하는 것이었다.

 "저는 제 소망을 이루는 것 뿐이랍니다."

 

 

9장  붕괴의 서곡

 

 오랜만에 하늘에 구름이 많았다.

 이론 수업을 들으면서 창밖에 펼쳐진 풍경을 바라본다. 하루카와 보냈던 언덕 위의 거목은 분홍빛을 상당히 잃어버렸지만, 오늘도 당당히 서 있다.

 어제 하루카의 그늘진 표정이 떠올라서, 리츠코가 말하는 원소에 대한 설명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헤어질 때 하루카는 평소처럼 행동하려고 했다. 하지만 괴롭고 쓸쓸해 보이는 눈은 완전히 숨기지 못했다.

 내가 상처를 준 거다. 내 얕은 생각과 언동 때문에. 또 내가.

 "물질을 변화시킬 때 통감했겠지만, 이 세상에서 형태가 있는 물건의 구조를 아주 작은 단위에서 이해하는 건――"

 대체 나는 앞으로 얼마만큼의 후회를 쌓아가는 걸까.

 아이돌이 되면 더이상 이런 걸로 고민할 일도 없어지는 걸까.

 "자연계에 존재하는 건 원자번호 92번 우라늄까지인데 현재는 118종이 발견돼 있고, 능력을 쓰기에 따라선――"

 아니면. 아즈사 상을, 타카츠키 상을, 가나하 상을, 하기와라 상을, 마코토를, 리츠코를, 미나세 상을, 그리고 하루카를. 누군가의 마음을 붙드는 건, 내 손으론 어쩔 수 없을 만큼 버거운 일인 것일까. 죄로 더럽혀진 이 손으로는.

 실제로 어제 리츠코가 내게 아이돌의 소질이 있다고 말하고 나서, 미나세 상은 나와 눈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는다. 하루카도 내가 그녀를 위해 아이돌이 되겠다느니 하는 말을 꺼내서 곤란하게 만들고 말았다. 설령 아이돌이 되더라도 누구도 상처입히지 않고 살아갈 수 없다면, 애초에 내가 여기 있는 의미는――

 갑작스런 수업 끝 종이 리츠코의 설명과 내 생각을 중단시켰다.

 "그럼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아, 그리고 또 하나. 너희들한테 줄 게 있어."

 갑자기 교실 안이 시끄러워진다. 뭔가 좋은 물건일지, 아니면 대량의 과제일지. 기대와 불안과 흥미가 모두의 눈을 바쁘게 빛낸다.

 교단 앞에 한명씩 불려 나가서 리츠코에게 물건을 받는다. 내 차례가 되어서 앞에 나가 일단 인사를 하고, 자리에 돌아와 건네받은 꾸러미 속을 확인한다.

 그 안에 들어 있던 건――옷? 교복이라기 보단……의상? 흰 바탕에, 옷깃과 큰 단추 같은 것들은 선명한 파랑이다. 대체 누구 취향이고 뭘 위해서……?

 "이게 뭐야! 촌스러운 건지 귀여운 건지 잘 모르겠어!"

 옷을 꺼내서 펼쳐 보면서 소박한 곤혹을 입에 담는 것은 미나세 상. 격하게 동의한다. 그녀 것도 내 것과 거의 같은 모양이지만, 색이 들어간 어깨와 벨트 등은 핑크색으로 되어 있었다. 귀여운 옷인 건 분명하지만 평소에 입는 물건인가 하면 틀림없이 아니다.

 "그건 성스러운 옷. 착용한 자의 능력을 효율 좋게 끌어내고, 아픔이나 고통을 경감시킵니다."

 "뭐, 뭔가 파워 업 아이템 같아서 굉장한데!?"

 리츠코의 막연한 설명에 가나하 상이 감탄하며 성의인지 뭔지를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덧붙여서 아무리 격렬하게 움직여도 속옷이 보이지 않습니다."

 "대단해, 이젠 뭘 위한 건지 모르겠어!?"

 마코토가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설명을 더해갈수록 수상함이 증가해 간다. 이렇게 무릎 위로 뽀롱뽀롱하면서 속옷이 안 보인다고? 무슨 원리야. 신경쓰면 지는 건가. 게다가,

 "저, 그래서……왜 저희한테 이걸?"

 아즈사 상이 가장 묻고 싶었던 의문을 말해 주었다. 리츠코가 고개를 끄덕인다.

 "유비무환이란 거에요. 마음속으로 염원하면 바로 그걸로 갈아입을 수 있으니 기억해 두세요."

 어렸을 때 본 마법소녀 애니메이션을 떠올린다. 이건 그거다. 그런 변신 코스튬과 비슷하다. 설마 이 나이에 얻을 기회가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전혀 입을 기회가 없기를 빌고 싶다.

 "그럼 이번에야말로 수업은 끝. 아, 그리고 야요이!"

 또 있는 건가, 모두가 손에 든 성의(가칭)에 머리를 박을 뻔했다.

 "할 얘기가 있으니까 밥 먹고 나면 점심시간 끝나기 전에 교무실로 와."

 "우? 네~."

 타카츠키 상이 순순히 대답하는 걸 확인하고, 리츠코가 교실에서 나갔다.

 일단 이건 옷장 깊은 곳에 봉인해두기로 하고.

 이번 점심시간. 하루카는 그곳에 와 줄까.



………

……





 기다려도 기다려도 하루카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음 일부를 어디 두고 온 것처럼, 그저 멍하니 조금 두꺼운 구름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본다.

 문고본은 가져오지 않았다. 시간을 때울 것을 준비하는 건 하루카가 올 거라고 믿지 않는 것 같아서 싫었으니까.

 또 늦잠일까. 오늘도 나, 아직 점심 안 먹었는데. 쿠키를 잔뜩 들고 와 준다면 조금쯤 지각한 건 너그럽게 봐 줄게.


 그러니――


 작은 바람에도 불구하고, 점심시간도 반 이상이 지났을 때쯤. 아아, 하루카는 안 오는구나. 그렇게 쓸쓸한 확신을 얻었다.

 아이돌 후보의 미래 예지, 그런 건 필요 없다. 어제 난 보고 말았다. 하루카의 고민, 괴로운 듯한 눈을.

 치마에 붙은 풀을 털고 천천히 일어나 언덕을 내려간다.

 한 번 돌아보자, 며칠간 좋은 등받이가 되어 주었던 거목은 지금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가만히 서서 바람에 꽃가지를 흔들고 있다.

 우둔하게 계속 서 있는 벚나무를 조금 부럽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다려도 기다려도, 안 오는 건 안 오는 거야. 상처를 준 내가 잘못한 거니까.

 이제 여기 올 일은 없겠지. 독서를 할 땐 다른 곳을 고르자. 곧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도 온다. 어차피 계속 여기 있을 순 없다는 말이다.

 이번에야말로 돌아보지 않고 교사를 향한다.

 현관이 보였을 때쯤, 야요이가 리츠코를 따라 교사 뒤로 돌아가는 게 보였다. 그러고 보면 아까 리츠코가 얘기할 게 있다고 했던가.

 교대하듯이 신발장 앞에서 신을 벗다가, 어라.

 리츠코는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것뿐이라면 굳이 직원실에서 나올 필요는 없다. 이제 수업 시작도 얼마 안 남았는데 어디로 가는 걸까.

 절대로 남한텐 들려주고 싶지 않은 얘기라면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호기심이 이겼다. 적어도 목적지만이라도 확인해 두려고 빠른 걸음으로 리츠코가 향한 쪽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현관에서 다시 나오자 샛길의 나무들 안쪽에서 또 타카츠키 상의 등이 보였다. 저쪽은……구교사? 요 1년간 한 번도 발을 들인 적이 없는 곳이다. 애초에 복도 판자가 썩어서 위험하단 이유로 출입금지였을 것이다. 왜 구교사에.

 지금 교사와 구교사를 잇는 샛길에 들어갈 때 마이크와 스탠드를 본딴 듯한 조각상을 발견했다. 이런 데는 온 적이 없어서 저런 것도 처음 봤다. 어차피 졸업할 때까지 이 학원의 절반도 모르는 게 아닐까 생각하면서, 타카츠키 상을 쫓아 발걸음을 빨리했다.

 역시 그녀들은 구교사로 들어갔다. 놓치지 않도록, 하지만 발이 썩은 나무를 밟아서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 뒤를 쫓아간다.

 계단을 한번 올라서 더 안쪽으로. 리츠코와 타카츠키 상은 그 복도 막다른 곳에 있는 방 안으로 사라졌다. 완전히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하고, 계단 그림자에서 나와 둘이 들어간 교실 앞에 선다. 방의 용도를 보여 주는 플레이트는 이미 문자가 닳아서 읽을 수 없다. 지금까지 봤던 구교사의 평범한 교실 구조와는 다르니, 특수한 수업에 쓰이는 곳이겠지. 문에 유리도 없어서 안을 들여다볼 수도 없다.

 이제 돌아가려던 참에, 문과 벽 사이에 틈이 있는 걸 깨달았다. 오래된 탓에 문짝이 잘 맞지 않게 된 거겠지. ……여기로라면.

 숨을 죽이고 작은 틈새에 한쪽 눈을 맞춘다.

 안쪽 광경이 눈에 들어온 순간, 소리가 나올 뻔해서 허둥지둥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다.

 붉은 색인지 오렌지 색인지, 그런 조명이 비추는 실내에서.

 리츠코는 한 주사기 끝을, 교복 윗도리를 벗은 타카츠키 상의 팔에 찌르고 있었다. 황록색으로 빛나는 기분 나쁜 액체가 타카츠키 상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더 큰 충격에 난 눈을 크게 떴다.

 타카츠키 상의 눈. 언제나 쾌활하게 빛나는 그 눈은, 지금은 이상할 정도로 붉은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대체 리츠코는 타카츠키 상에게 무슨 짓을――?

 보고 있는 광경에 이해가 따라가지 못해서 자신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무슨 병의 치료인가? 아니면.

 기분 나쁜 생각을 떨쳐 내고,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히 뒷걸음질친다.

 어느 쪽이 됐든 입밖으로 내선 안되는 일이거나, 나로선 감당할 수 없는 일일 것 같다.

 만약 점심시간이 끝나도 타카츠키 상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른 애들에게 지금 본 것을 털어놓고 상담하자.

 방을 뒤로하고 구교사 출구를 향한다. 기분 나쁜 땀이 이마에 흘렀다.

 밖에 나오기 직전, 나도 모르게 뛰쳐나간 내 발이 낡아빠진 복도의 판자 하나를 부수었다.

 삐그덕 하는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신발 끝이 나무와 나무 사이에 걸린다.

 그것은, 당연했을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였다.

 

 

10장  운명에 이끌린 소녀는 그 문을 연다

 

 미나세 이오리는 초조했다.

 야요이가 리츠코를 만나러 교무실로 가 버려서, 빨리 다음 수업 교실로 가서 준비를 하겠다는 히비키와 헤어져 이오리는 혼자 기숙사 방으로 돌아왔다.

 조금 전에 받은 성의란 물건을 난폭하게 옷장 속에 쑤셔넣고 혀를 찬다.

 '이런 게 있어도 그 녀석한테, 치하야한테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리츠코가 치하야에게 아이돌의 자질이 있다는 것을 알렸을 때, 이오리는 물론 분했고 화가 났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무력함이 화가 나고 비참했다.

 그런 녀석한테 뒤쳐지다니.

 아이돌이 될 수 없다면 자신은 대체 뭐란 말인가. 여기 있을 의미는――

 옷장에 주먹을 내지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 팔을 들어올렸다가――앗 하고 생각한다.

 내가 여기에 온 또 하나의 목적. 한동안 손대지 않았던 오두막에서 발견한 물건을 집어넣어 두었던 걸 떠올리고, 옷장에서 꺼내 하나씩 책상에 늘어놓는다.

 낡아빠진 종이, 쇠사슬로 묶인 책.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열쇠.

 종이에 그려진 마크는 아직까지 다른 곳에서 본 적이 없다. 열쇠도 어디에 쓰는 것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이라면――

 이건 쇠사슬을 벗길 수가 없어서 손대지 않고 있던 물건이다. 그리고 지금 이오리라면.

 '물질변환. 지금이라면 간단히 쓸 수 있을지도 몰라! 컨트롤이 어려운 전격으로 태워서 끊을 필요도 없어.'

 집중하고 오른손을 책으로 향한다. 순식간에 굳게 책을 닫고 있던 사슬은 몇 가닥의 얇은 철사로 변했다.

 기대에 떨리는 손으로 철사를 풀고 책을 손에 든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겨도 넘겨도, 어디 말인지 알 수 없는 말만 적혀 있어서 전혀 읽을수가 없어!

 결국 원점으로 돌아왔다. 괜히 쌓여 버린 짜증을 풀듯이 책을 바닥에 내던진다.

 '왜……! 어째서냐구……!'

 분한 것처럼 낡아빠진 책을 노려본다. 그리고 깨달았다. 페이지 사이에서 끄트머리가 삐져나온, 변색된 양피지.

 별 생각 없이 그것을 끄집어 내 펼쳐 본다.

 이건, 지도……일까.

 그래, 틀림없다. 그것도 이 학원 거다. 지금 있는 기숙사, 수업에서 쓰는 교사, 조금 떨어져 있고 아무도 발을 들인 적 없는 구교사,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쓸데없이 넓은 부지.

 그런 지도의 구교사 근처에, 조그맣게 가위표가 그려져 있다.

 입학하고 나서 이미 주변은 대충 걸어 봤지만, 이런 데엔 아무것도 없었을 것이다.

 '혹시……땅 밑? 진짜로 이거 보물 지도였던 거야?'

 스스로도 바보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아버지가 무언가를 숨겨 두었을지도 모른다.

 겨우 발견한 단서. 다음 수업이 시작되기까진 아직 시간이 있다. 교복이 더러워지면 곤란하니 다른 옷으로 일단 갈아입고,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군데 군데 녹슨 열쇠를 손에 든다.

 가보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

……





 혹시 모르니 유키호에게 삽을 빌려 왔다. 그렇다기보단, 그 자리에서 "엄청 튼튼한 걸 만들어 줘!"라고 억지로 부탁해서, 학원 의자를 멋대로 변화시키는 걸 주저하던 유키호에게서 뺏어 온 거지만.

 '여기 맞지?'

 지도에 그려진 마크 근처에 서 본다. 옆에는 벚나무 한 그루가 심겨 있을 뿐, 역시 그 외엔 아무것도 없다.

 조금 실망하면서도, 모처럼 왔으니 이오리는 반쯤 될대로 되란 심정으로 삽을 들고 벚나무 뿌리 부근을 파내려갔다.

 깡 하고 삽 끝이 뭔가 딱딱한 것에 부딪혀서 손이 저렸다. 조금 더 흙을 치우자 의외로 큰 철판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삽을 고쳐잡고, 기대에 가슴을 두근대며 작업을 계속한다. 역시 여기엔 뭔가가 있었어!

 땅 아래에서 나타난 건 타타미 반 장 정도 크기의 철로 된 사각형. 손잡이가 달려 있는 걸로 봐선 문일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무거운 그것을 어떻게든 미끄러뜨리자,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과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이 있었다. 어디까지 이어지는 건지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본능적인 공포에 몸이 움츠러든다. 좋다고 이런 어둠 속에 들어가려는 사람 따위 분명 없을 거다.

 '하지만 난 반드시 찾아내야만 해. 아버지가 숨기고 있는 뭔가를.'

 기대보다 공포로 떨리는 다리를 질책하면서 한 걸음, 어둠속에 걸음을 내딛는다. 튼튼한 감촉에, 일단 무너지진 않을 것 같아 안도의 한숨을 쉰다.

 결심하고 나선형 계단을 내려간다. 이오리의 발소리만이 돌로 둘러싸인 공간에 울렸다.

 이 학원에 지하실이 있다니 들어본 적은 없다. ……소문으로는 있었지만.

 길고 긴 계단을 얼마나 내려갔을까.

 생각하는 것도 싫어졌을 즈음, 이오리는 아래로 이어지는 단차가 갑자기 끝난 것을 깨달았다.

 그 공간은 계단을 끼고 한 쪽으로는 어두침침한 석재 복도가. 반대편에는 문 하나가 있었다. 이 열쇠는 여기서 쓰는 건가 생각했지만, 자물쇠가 보이지 않는다. 밀어도 당겨도 꼼짝도 하지 않으니 뭔가 다른 방법으로 잠겨 있는 것 같다. 아마 이쪽이 아니다.

 뒤돌아서 복도 끝쪽으로 시선을 향한다. 언제 켜졌는지 모를 양 벽에 걸린 양초 몇 개가, 흔들 흔들 믿음직스럽지 못하게 복도를 비추었다.

 몸을 추스리고 신중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이번엔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어두운 복도 막다른 곳. 눈 앞에는 커다란 문. 그리고 그걸 잠그고 있는 자물쇠.

 역시 돌아갈까 생각했다. 기분 나쁜, 정말로 기분 나쁜 느낌이 든다. 돌바닥에서 느껴지는 차가움 때문이 아니라, 어두침침한 복도 분위기 때문도 아니라.

 이 문 너머. 마치 뭔가를 감추기 위한 게 아니라, 뭔가를 가두어 놓으려는 듯한.

 열쇠를 가슴 앞에서 꼭 쥐고 어깨를 들썩이며 거칠게 숨을 쉰다. 열면 안 된다고 머릿속에 경종이 울린다.

 하지만 이오리는 이끌리듯이, 누군가에게 꾀이듯이.

 떨리는 손이 열쇠를 움켜쥐고 자물쇠에 찔러넣어 간다. 무서울 정도로 딱 맞았다.

 뺨을 타고 흐르는 땀이 멈추지 않는다.

 그 손이 천천히 돌고,

 찰칵.

 무겁게 울리는 해방의 환희.

 팔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문이 천천히 열린다. 그 안쪽에, 지옥의 불꽃처럼 흔들리며 빛나는 두 개의 붉은 눈동자를 봤을 때.

 이오리는 자신이 되돌이킬 수 없는, 터무니없이 강대한 무언가를 깨우고 말았단 것을 알았다.

 

 

11장  많은 것을 아는 교사는 결의를 품는다

 

 그 때, 아키즈키 리츠코는 자기 방에서 다음 수업에 쓸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기분 나쁜 감각에 목덜미에 소름이 돋는다.

 '뭐야, 이 아플 정도의 살기와 이상하게 큰 힘의 파동……. ――설마. 아니, 그럴 리 없어. 그건 너무 일러.'

 최악의 예감을 머리에서 털어 내고 안경 위치를 고친다. 다시 프린트에 손을 대려다가 형용하기 어려운 불안을 느끼고 창밖을 보았다.

 '어……새까맣잖아……?'

 겨우 태양이 하늘 꼭대기에 이르렀을 즈음일 텐데, 어떤 밤보다도 깊은 어둠이 학원을 감싸고 있었다.

 등줄기에 차가운 게 달리는 것을 느끼면서, 리츠코는 그 '최악'이 맞았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학원장님과 다른 사람들은 아직 여기엔 없어――어떡해야……'

 일단 이 일을 그들에게 전해야 한다. 초조한 마음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지금부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서 조립해 나간다.

 그리고 또 한 명. 그녀는 이미 눈치챘을 것이다. 빨리 연락을 취해야 한다.

 구교사를 내려다보면서 입술을 깨문다. 이런 일이 될 줄 알았다면, 모두에게도 전해 둘 걸 그랬다. 어찌할 수 없는 후회만이 폭풍처럼 태어나서는 마음 속을 유린한다.

 '부탁이야, 다들. 무사해줘. 금방 갈 테니까.'

 요 1년 이상을 함께한 학생들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게 두진 않는다.

 그리고 널 반드시.

 이제 자신은 해를 보지 못할 지도 모르지만.

 각오를 가슴에 품고, 리츠코는 맡겨진 마지막 '업무'에 착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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