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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공주 THE HUNDRED LILY-6~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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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04, 2016 22:56에 작성됨.

6장  벚꽃 소녀

 

 빈 교실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아즈사 상과 얼굴 마주치기가 거북하다――는 일은 없었지만. 오늘은 혼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싶은 기분이었다.

 짧은 식사를 마치고, 문고본 한 권만을 들고 밖으로 나온다. 요 며칠간의 따스한 햇살은 오늘도 학원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다.

 이런 날엔 역시 밖에 있는 편이 기분도 좋다는 말이다. 앉을 곳을 찾으면서, 역시 벚나무 밑이 제일이란 생각을 한다. 모처럼 익힌 부유술이 나설 자리가 없단 건 이미 이전 수업에서 통감했다.

 넓은 구획을 둘러보고, 조금 높은 언덕 위에서 연분홍 꽃잎을 단 커다란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오늘은 저기까지 가 볼까.

 느긋하게 걸어도 그다지 시간을 소비하지 않고 언덕을 오를 수 있었다. 올려다보니 지금까지 이 학원에서 본 어떤 벚나무보다도 굵고 높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엉덩이 밑에 스커트를 잘 펴고 나서, 안심하고 거목에 등을 기댄다.

 지금부터 읽는 것도 며칠 전부터 조금씩 읽어 나가고 있는 이야기다. 허락되지 않는 사랑에 고민하는 남녀는, 결국 서로의 바람과는 달리 떨어지고 말았다.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은 괴롭고 고통스러워 보이는데, 왜 사랑을 하는 걸까. 그것도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쯤엔 나도 이해할 수 있게 될까.

 시선이 글자를 쫓아 위에서 아래로. 또 위에서 아래로. 벚꽃이 천천히 떨어지는 가운데, 포근한 시간이 흘러간다. 살랑 살랑 바람이 뺨을 쓰다듬으며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봄 향기를 나른다. 아무래도 이곳은 지금까지의 어떤 곳보다도 내게 편안함을 주는 것 같았다.

 20페이지쯤 읽어 나갔을 때였다.

 누군가가 풀을 밟는 소리가 점점 커진다. 요즘엔 손님이 많구나, 한숨을 쉬고 싶어지며 문고본을 옆에 두었다.

 "너……아이돌이 되고 싶어?"

 등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서, 어라 하고 의문스럽게 생각한다.

 그 질문이 갑자기 뭐라는 건지 영문 모를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 목소리가 지금까지 이 학원에서 들은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천천히 돌아본다.

 본 적 없는 교복을 입은 소녀가, 양 손을 뒤에서 맞잡고 서 있었다.

 검정색을 바탕으로 한 세일러복. 머리에 단 리본 두 개가 바람을 맞아 흔들리고, 봄 햇살과도 같은 따스한 미소를 띠고 있다.

 소녀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거라고 싶은 건 내 쪽이다.

 하지만 넌 누구냐는 의문보다도 먼저, 자연스럽게 그녀의 질문에 대한 답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되고 싶냐고 하면, 되고 싶어.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야?"

 내 쪽에서 묻자, 소녀는 미소를 더 깊게 만들고 작은 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그 교복, 그 학원 거지. 그러니까 너도 아이돌을 목표로 하고 있는 걸까 생각해서."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더 듣고 싶어서인지, 그녀에게 신기한 점이 너무 많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그러는 너는, 어디 학교야……?"

 "나? 난 네가 다니는 데 옆이야."

 가까운 데에 학교가 있었다니, 처음 알았다. 하지만 어디 학교든지 이 학원 학생이 아니라면 능력을 가진 건 아닐 것이다.

 별로 비밀로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외부인에게 어디까지 얘기해도 되는 건지 잘 알 수 없어서 긴장과 경계로 조금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런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그녀가 풍기는 분위기는 부드럽고 상냥했다. 금방 어깨의 긴장이 풀어져 간다.

 "이웃 사촌이란 걸로 있지. ……옆에 앉아도 돼?"

 "어? 응, 괜찮아."

 그녀가 바로 옆에 털썩 앉았다. 조그맣게 달린 리본이 들에 핀 붉은 꽃처럼 보여서였을까. 그녀의 머리에서도 봄의 풀꽃 같은 향기가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자잘한 것을 눈치챌 정도로 자기 가까이에 사람이 있다는 게, 내게 작은 충격을 주었다. 이 학원에 오고 나서는 누구도 들인 적 없는 영역이었는데. 전혀 모르는 소녀가 거리를 좁혀 오는 기묘한 감각. 하지만 그것은, 왜인지 싫지 않아서.

 소녀는 말을 하지도 않고, 세운 무릎에 두 팔을 두르고 어딘가 멀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 옆얼굴을 보고 있던 나도 그녀의 시선 끝을 본다. 거기에 있는 것은 우리들이 다니는 학원이었다. 그녀도 아이돌을 동경하는 소녀인 것일까.

 묻고 싶은 건 잔뜩 있었다. 하지만 쉬는 시간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릴 때까지, 우리들은 계속 말 없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작 몇 번 주고받은 말.

 그것이 봄 향기의 소녀와 처음 만났을 때의 전부였다.



………

……





 다음날도 맑개 잘 개인 날이었다.

 역시 독서를 하러 밖으로 나온 발이 나도 모르게 향한 곳은 그 언덕이었다. 어제의 신기한 소녀가 오든 오지 않든, 별로 관계는 없었다. 그 장소가 지금 계절에 가장 독서하기 좋은 곳이었을 뿐이다.

 그렇게 머리로는 생각하지만. 어딘가, 그녀가 오늘도 나타나 주지 않을까 기대하는 자신이 있는 것도 분명했다.

 기대. 다른 사람에게 능동적으로 어떤 욕구를 느낀 건 얼마만일까. 이것도 요즘 내 안에 싹튼, 이해할 수 없는 것, 모르는 것을 이해하려는 마음 중 하나인 것일까.

 벚나무를 등받이 삼아 앉고 책을 편다.

 어제보다 빨리 그녀가 나타났기 때문인지, 아니면 내가 독서에 집중하지 못해서인지.

 10페이지도 읽기 전에 다시 등 뒤에서 그 부드러운 목소리가.

 "오늘도 있구나. 혹시 나 만나러 와 준거야?"

 돌아보자, 신기하고 포근한 분위기의 소녀는 어제와 같은 미소를 띠고 서 있었다.

 "별로……. 그냥 여기가 맘에 들었을 뿐이야."

 인정해 버리는 것도 왠지 싫어서 그렇게 퉁명스럽게 대답하자, 그녀는 아주 조금 미소를 쓸쓸하게 바꾸었다.

 "그렇구나. 난 여기,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럼 왜?"

 "으음. 그러는 게 나……니까?"

 말 끝을 조금 올려도 곤란하다. 묻고 있는 건 내 쪽인데. 모처럼 '알고 싶다'고 생각해도, 모르는 것만 잔뜩 늘어난다.

 당연하다는 듯이 내 옆에 앉은 그녀는 오늘도 시선을 학원쪽으로 향했다.

 이번도 이걸로 얘기는 끝일까, 그렇게 생각했던 때.

 "있잖아, 너……이름은 뭐야?"

 이렇게 가까이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것이 조금 놀라워서 옆을 돌아보니, 소녀는 나를 보면서 조금 고개를 갸웃거렸다.

 "……키사라기 치하야야."

 그렇구나. 아직 우리들, 서로 이름도 몰랐구나. 그건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과 같은 뜻이겠지.

 ――조금 더. 조금만 더.

 "너는?"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쯤, 누구도 질책하지 않을 것이다.

 "난 하루카. 아마미 하루카야."

 봄 향기라고 써서, 하루카. 그렇게 말하고 웃는 그녀에겐 이 이상 없을 딱 맞는 이름처럼 느껴져서.

 "하루카."

 조그맣게 중얼거려 본다. 입술에 올려 본 그 이름은, 달콤한 향기가 나는 허브티를 입에 댄 것 같았다.

 "……이름 그대로구나."

 "그거 무슨 뜻이야?"

 좋은 이름이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내 입에서 나올 땐 뭔가 뼈가 있는 것 같은 완곡한 말이 되고 말았나 보다. 야유받았다고 생각했을까, 아주 조금 꽃봉오리처럼 뺨을 부풀리는 그녀의 표정 또한 귀여웠다.  

 "딱히 의미는 없어."

 딱히 의미는 없는, 쓸데없을 시간. 그것은 봄 향기에 둘러싸여서 오늘도 흘러간다.



………

……





 우산 쓰는 법을 잊어버릴 것만 같다. 그런 시시한 것을 어렴풋이 생각했다.

 다음 다음 날도, 나는 정신을 차리니 언덕 쪽으로 걷고 있었다. 지정석이 되어 가고 있는 거목의 뿌리 부근에 앉는다.

 처음에 만났던 날과 똑같이, 오늘도 그녀는 나타났다. 마음속에 안도가 천천히 퍼졌다. 왜일까. 딱히 그녀가 오지 않아도, 나에겐 아무것도 나쁠 게 없을 텐데.

 "오늘은 뭘 하고 있어?"

 그녀의 물음에 돌아보면서, 물론 독서야――하고 말하려다, 양손에 시선을 떨어뜨리고 난처한 기분이 된다. 덮을 책이 없다.

 "이, 일광욕이야."

 낯부끄러워서, 괴로운 변명을. 소설을 가져오는 걸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래선, 이래선 마치.

 내가, 오직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여기 있는 것 같잖아――

 "흐~응, 그렇구나~."

 조금 기쁜 것처럼 장난스럽고 순진하게 말하면서, 소녀는 오늘도 내 옆에 앉는다. 리본과 봄 향기를 흔들면서.

 "지금 있잖아, 점심시간이지? 왜 치하야 짱은 혼자서 여기 있는 거야?"

 아까와 비슷한, 아까보다 긴 질문. 그 말 속에 처음으로 내 이름이 들어가 있는 걸 듣고, 아주 조금 기뻐진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대답은 그다지 재밌지는 게 아니다.

 "딱히 따로 할 게 없어서 그래. 혼자 있는 거 좋아하고."

 "하지만 치하야 짱, 지금 나랑 있잖아?"

 바로 그렇다. 나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 걸지도 모른다.

 지금도 다음 계절을 향해, 점점 벚나무가 그 꽃을 날리는 것처럼.

 "……아마미 상은――"

 "있잖아, 잠깐만."

 "……왜?"

 "어제는 '하루카'라고 불렀었지?"

 "성이 싫어?"

 "그런 게 아니라, 그런게 아니라 있지, 아, 정말!"

 그녀는 왠지 분하단 듯한 얼굴을 한다.

 "아무튼. 다음에 아마미 상이라고 부르면 점심밥 없어!"

 "왜 네가 정하는데――"

 소녀가 기대하는 것 같은 눈빛으로 이쪽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뭐, 됐나.

 "――하루카."

 "응."

 하루카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역시 그녀는 잘 모르겠다.

 "그런 치하야 짱에게 제안이 있는데, 학교는 역시 친구를 만들기 위한 곳이라고 생각해."

 "……내가 이 학원에 온 이유는 그런 게 아닌 걸."

 그럼 왜, 라고 물어볼 걸 예상하고 대비를 한다. 가까운 거리에 있다곤 해도 이 앞은 누군가를 들이고 싶은 곳이 아니다.

 뺨의 긴장을 가능한 한 숨기고, 하루카에게서 시선을 돌린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구나. 하지만 치하야 짱하고 난 벌써, 친구 돼버렸는데 말야."

 "……뭐?"

 싱긋 웃으면서 그런 말을 한다. 놀라서 멈춰버린 뇌를 어떻게든 움직여서 하루카가 한 말을 곱씹는다. 친구. 친구…. 그런 걸까. 아직 만난지 3일밖에 안 된 그녀가?

 "어떨까."

 "너무하네, 치하야 짱은."

 한 번 마주친 시선을 다시 한 번 피하고 중얼거리자, 하루카는 섭섭하다는 듯이 살짝 머리를 긁었다.

 "뭐어, 나, 봄이 끝날 때쯤엔 멀리 가버리는데 말야."

 "……어?"

 쓸쓸한 목소리 그대로 하루카가 이은 말에, 눈을 크게 뜬다. 이런 시기에 전학이라니.

 "그래서, 어쩌면 치하야 짱에겐 난, 친구로 삼으면 안 될지도 모르지만――"

 추억만을 남기고 가는 친구. 그것이 내게 필요한가 아닌가로 말하자면, 물론 필요 없다.

 "――만약 치하야 짱이 그래도 된다고 말해 준다면, 기억해 준다면, 난 계속 여기 있을 수 있을지도 몰라."

 여기에 남은 내 추억 속에서만. 그런 여유 공간을 가졌던 기억은 없다. 없지만.

 "……기억해 둘게."

 그렇게 대답해 버린 건 왜일까.

 옆에서 기쁘단 듯이 웃는 하루카를 보고 싶었으니까?

 처음 겪는 것, 몰랐던 것에 대한 탐구심 때문에?

 모르겠다. 하루카와 함께 있으면 내 안에 모르는 것만 잔뜩 늘어 간다.

 하지만 처음으로 그런 자신을 좋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하루카는 학원과는 관계 없는 사람이라서일지도 모르고, 곧 어딘가로 가 버린다고 하니까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누구보다도, 하루카가 옆에 있는 게 싫지 않고, 오히려 편안하다고까지 느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르지만.

 지금이라면, 하루카에게라면, 내 안의 싫은 부분도 얘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한 번 자신과, 마주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난 아이돌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가능한 한 거기에 가까워지려고 하고 있어."

 그것은 처음 만났던 날, 처음 하루카의 질문에 대한 답.

 "그렇게 바라게 된 건, 이 학원에 온 건, 어떤 사고가 계기였어."

 그것은 아까 말하기를 주저한,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과거의 이야기.

 하루카가 조용히 나를 바라보면서, 무릎을 끌어안은 양 손에 꾸욱 힘을 주었다.

 "나한텐 남동생이 있었는데. 당시에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됐는데도, 공원에서 튀어나온 축구공을 쫓아서 허둥대면서 차도로 나가 버려서."

 근처의 공원에 남동생을 보러 갔던 마침 그 때.

 "평소엔 그런 짓 안 하는 애였는데. 운 나쁘게도, 서행해야 하는 좁은 길을 커다란 트럭이 빠른 속도로 그대로 치고 들어온 거야."

 뇌리에 되살아나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광경. 급 브레이크에 타이어가 아스팔트와 마찰하는 소리.

 "그래서, 남동생은……."

 하루카의 슬픈 중얼거림에 조용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숙이고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나를 비춘다.

 "그리고 이건 운이 좋았던 건지 나빴던 건지 모르겠는데. 이미 능력을 발현한 나는 그걸 방관한 채로 서 있지 않았어. 그런 건 할 수 없었어. 생각하기보다도 먼저 오른손이 튀어올라가 버려서."

 결코 닿지 않을 손은 내 순수한 소망을 형태로 바꾸어 냈다. 바꾸어 내고 말았다.

 "내가 처음에 깨달은 내 능력은 지키기 위한 힘이었어. 어떤 것도 통과시키지 않는, 단단하고 얇은 장벽. 하지만 만들어진 그건, 동생을, 유를 지키는 것과 동시에――"

 우직 하는 기분 나쁜 소리. 반투명한 장벽에 격돌한 트럭의 운전석은 한순간에 찌부러졌다. 지키기 위한 힘은, 다른 누군가에게 이빨을 드러냈다. 그리고 유마저 완전히 지키지 못했다. 그의 마음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입힌 건, 나다.

 "이제 됐어. 이제 됐어, 치하야 짱……."

 울 것 같은 목소리로, 하루카가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나는 용서받기 위해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니다. 내 죄를 용서해 줄 사람은 하루카가 아니다.

 "난 금방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이해했어. 유도 잠깐 멍하게 엉망이 된 트럭을 보고, 그리고, 나를 봤어."

 내 목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되지 못한 소리. 그리고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 내게 가장 소중했던 남동생의, 조용히 절망한 뒷모습.

 "그 눈에 떠올라 있던 건, 물론 공포였어. 그야 그렇지, 자기 누나가 순식간에 살인자가 된 거니까……."

 지금, 눈물은 흐르지 않는다. 그건 그 날, 그 장소에, 두고 왔다. 다른 수많은 감정과 함께. 내게 눈물을 흘릴 자격 같은 건 없다. 살인자인 내게, 무언가를 즐길 자격 같은 건 없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을 일으킬 순 없어. 이제 유의 곁에도 있을 수 없어. 그렇게 생각한 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집을 나와서, 도망치듯이 이 학원에 왔어."

 길을 떠나기로 결심한 그 날, 맹세했다.

 "여기서 누구보다도 강한 힘을 가지게 되면, 그 사용법을 익히면, 이번에야말로 누구도 상처입히지 않고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걸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해도 좋아. 그렇게 하는 것밖에, 그 운전수에게, 유에게, 속죄할 방법이 없어……."

 내 고백을, 하루카는 비통한 표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녀도 날 싫어하게 됐을까. 나 같은 사람하곤 엮이기 싫어졌을까.

 그렇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럴 만한 일을, 난 했으니까.

 하지만.

 "누군가를 상처입히지 않을 수 있게 될 때까지, 더 이상 소중한 사람 같은 건 필요 없었어. 지키고 싶은 건, 필요 없었어. 그런데, 너는……! 너희들은……."

 도망쳐 왔을 장소에서, 혼자 있고 싶었을 장소에서, 그래도 누군가는 곁에 있었다. 아즈사 상, 타카츠키 상, 하기와라 상, 가나하 상, 마코토와 리츠코, 미나세 상도 그렇다.

 가능한 한 엮이지 않도록. 다가오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에 뚜껑을 덮어, 계속 계속 감정을 죽이고 지내왔다.

 하지만 사실은 훨씬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만약 그녀들의 몸에 그 때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난 망설임 없이 오른손을 뻗고 말 것이다. 그러고 말 정도의 확실한 시간이, 우리들 사이엔 흐르고 말았다. 계속해서 밀쳐내 왔던 나 같은 놈을 버리지 않고, 개개인의 형태로 친구로서 봐 주었던 그녀들의 눈은, 정말로.

 정말로, 본의는 아니지만. 이제 쓸데없는 거라고 버려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루카가 내 뒤로 돌아, 나를 살짝 끌어안았다.

 놀라서 뒤돌아보려고 하자,

 "미안해, 지금은 앞만 보고 있어."

 라는 말로 금지당했다.

 내 가슴께에서 포개진 팔. 등에 느껴지는 가벼운 무게. 하루카의 온기가 전신으로 전해져 온다.

 글쎄, 가깝다니까. 왜 너는――

 톡 하고, 내 목덜미에 따뜻한 물방울이 떨어졌다. 분명 핥으면 짠 맛이 날 것이다.

 왜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너는 울 수 없는 나 대신에 눈물을 흘려 주는 걸 거라고 생각했다.

 부드러운 햇살 아래, 포근한 시간이 흘러간다. 온화한 바람은 한 송이씩 벚꽃을 흩어 간다. 그것은 계절이 바뀌고, 이 시간이 끝을 향해 간다는 분명함이고.

 하지만, 왜인지 사랑스럽다. 바로 옆에 있는 하루카의 머리 향기를 날라 주는 바람이. 어느새인가 좋아하게 된 봄 향기가.

 "만약 치하야 짱이, 아픈 건, 괴로운 건 싫으니까 혼자 있겠다고 해도 있지."

 하루카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다정하게 튀었다.

 "난, 치하야 짱 곁에 있고 싶어. 멋대로라서 미안."

 "혼자 있는 것도 꽤 어려운 일이구나."

 농담처럼 말하자 작은 웃음과 함께 느껴진 입김이 간지러웠다.

 "있잖아, 그거 알아? 벚나무 밑에는 여자애가 잠들어 있대."

 " '잠자는 공주' 전설 말이지. 이 학원의 전래동화. 하루카도 알고 있다니, 꽤 유명한 소문이 돼 버렸나 보구나."

 "응. 분명 그 여자애는 계속 계속 혼자 잠들어 있겠지. 아무리 꿈속이라곤 해도, 그런 건 역시 쓸쓸해. 나, 잘땐 누가 손 잡아줬으면 하는걸."

 "하루카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구나."

 "응, 맞아――아니, 아냐, 지금 건 없었던 걸로! 그게 아니라, 치하야 짱은 '잠자는 공주'님이랑은 다르게, 모처럼 이렇게 내가 있으니까 말야――"

 팔을 풀고 다시 옆으로 돌아온 하루카는, 부드러운 풀꽃 위, 나와의 사이에 살짝 손을 내려놓았다.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손, 잡고 있자."

 머뭇거리며 놓인 왼손에 시선을 향한다. 가느다랗고 깨끗한 손끝. 내 손도, 다시 무언가를 붙잡을 수 있을까.

 하루카의 말엔 답하지 않고, 내 오른손을 살짝 그녀의 손에 올렸다.

 하루카가 기쁜 듯이 웃는다.

 "이걸로 우리들, 친구네!"

 "글쎄 어떨까, 아마미 상."

 "아앗, 아마미 상이라고 그랬어! 치하야 짱, 내일 점심 없어~!"

 성으로 불러 주자, 하루카는 조금 화내고서 금방 표정을 풀었다. 그걸 따라서 내 얼굴에도 미소가 떠오르고 만다.

 이어진 손바닥이 따뜻하다.

 분명 그건 무척 간단한 일이고. 하지만 그대로 계속 붙잡고 있는 건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이 손만큼은 놓고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7장  깨어진 쿠키

 

 황량한 대지. 폐허가 된 학원.

 봄에는 만개한 연분홍색 꽃이 피어 있을 벚나무도, 지금은 쓸쓸히 갈색 줄기를 하늘로 뻗고, 가지를 비쩍 마른 팔처럼 벌리고 있을 뿐이고.

 정처없이 걷는다. 그저 걷는다.

 어둡다. 어둡다. 어둡다. 여긴 어디일까.

 '이제 다들 없어져 버렸어. 하지만 있지, 난 여기 있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

……





 벌떡 몸을 일으켰다. 기분 나쁜 식은땀이 등에 축축하게 감겼다.

 익숙한 기숙사 방. 이불을 끌어안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기분 나쁜 꿈이었다. 얼마 전에도 비슷한 꿈을 꿨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며칠 전, 벚나무 아래에서 깜빡 졸았을 때…….

 그만두자. 아침부터 고작 꿈 같은 거에 정신이 팔려서, 굳이 기분을 어둡게 만들 필요는 없다.

 커튼에서 들어오는 햇살은 오늘도 부드러웠다.

 오늘도 하루카를 만날 수 있을까.

 아까 본 기분 나쁜 정경을 털어내듯이, 난 아즈사 상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교복으로 갈아입으려고 잠옷의 단추에 손을 댔다.



………

……





 "응, 다들 꽤 잘하게 됐잖아."

 하기와라 상은 교실 의자에서 변형시킨 삽을 손에 들고, 리츠코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날 첫 능력 수업은 밖에서 부유술을 쓸 수 있게 된 다음 과제로, 물질변화라 불리고 있다.

 눈앞의 물체를 구성하는 조직을 자신이 이미지한 것으로 다시 짜기 위해서는 특히 능력의 정밀한 컨트롤이 요구된다. 그 중에서도 예를 들면 동물 종류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자는, 지금은 셀 수 있을 정도밖에 없다고 한다.

 "해냈어, 마코토 짱! 마코토 짱이 가르쳐 준 덕분이야!"

 "그런 거 아냐, 유키호의 노력인 게 당연하잖아."

 마코토를 뛰어들듯이 끌어안는 하기와라 상도, 그런 하기와라 상을 가볍게 받아 안고 멋진 웃음을 짓는 마코토도, 평소대로.

 "흐흥. 이제 내가 못 하는 건 거의 없는 거 아닐까."

 귤에서 변화시킨 사과를 부유술로 띄우면서 자신만만하게 입가를 끌어올리는 건, 미나세 상이다. 과일을 바꾸는 것도 무기물에 비하면 훨씬 어렵다.

 "흐와아, 이거 정말로 사과 맛이 나는 걸까요? 아니면 귤 맛 그대로인 걸까아."

 "이오리 이미지에 따라 다를 것 같은데. 어쩌면 막 고야 맛이 날지도."

 허공에 물음표를 띄우는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둥실 둥실 떠 있는 사과를 바라보는 타카츠키 상의 눈은, 오늘도 반짝거려서 귀엽다. 그런 그녀에게 옆에 있는 가나하 상이 웃음짓는다.

 "저~, 이거, 되돌릴 수가 없어졌는데요……. 어떡하죠……."

 "저도 몰라요. 아즈사 상 물건이잖아요, 그거."

 허둥대며 도움을 요청하는 아즈사 상에게, 리츠코가 깊은 한숨을 쉰다. 아즈사 상은 자기 목걸이를 변화시키려고 했었을 것이다. 그녀의 손을 보자, 원래 물건과 같이 반짝이는 팔찌가 놓여 있었다. 그런 아즈사 상에게 말을 건다.

 "원래 모양이 기억 안 나나요?"

 "그건 괜찮은데……. 원래 모양으로 되돌리려고 해도 잘 안 돼서."

 "……잠깐 빌려 주세요."

 완전히 힘이 빠진 아즈사상에게서 팔찌를 건네받아, 그녀가 늘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떠올린다. ――괜찮아, 세세한 곳까지 떠올릴 수 있어. 요 1년간, 분명 계속 봐 왔던 물건이다.

 이미지를 그대로 팔찌에 흘려보낸다. 눈부신 빛과 함게, 그것은 내 손 안에서 익숙한 목걸이로 바뀌었다.

 "아마 이걸로 이전하고 똑같아졌을 거에요……. 원래대로 되돌리자 보다는 이 모양으로 만들자라고 생각하는 편이 잘 될 거라고 생각해요."

 목걸이를 내밀자 아즈사 상은 양 손으로 살짝 그것을 쥐었다가, 눈시울을 붉히고 얼굴을 들었다.

 "고마워, 치하야 짱……."

 무척이나 소중한 물건이었나 보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잠금쇠를 풀고 목에 두르자, 교복 옷깃과 가슴에 가려져서 목걸이는 눈에 띄지 않게 됐다. 안심한 듯이, 기쁜 듯이, 아즈사 상이 웃는다.

 평소와 같은 일상이었다. 종이 울리고 이 시간이 끝났다는 분위기가 교실에 차오른다.

 모두가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리츠코가 모두를 불러세웠다.

 "잠깐 괜찮을까? 전해야 하는 말이 있어."

 오랜 수업에서의 해방감에 찬물이 끼얹어져서, 대놓고 불쾌한 얼굴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런 모두를 순서대로 바라보고――리츠코는 마지막으로, 내게 시선을 맞추었다.

 "치하야."

 "네?"

 "요즘 이상한 꿈 꾸지 않았어?"

 "어? "

 갑자기 무슨 말일까. 주변의 모두가 신기하다는 듯한 표정을 띄운다.

 이상한 꿈. 확실히 짐작가는 곳은 있지만, 그게 대체――

 "예를 들면, 어젯 밤이라든지."

 "――!?"

 그것을 지적당해서 등줄기가 얼어붙는다. 아무도 없는 폐허가 된 학원. 왜 리츠코가, 그걸?

 "높은 능력을 지닌 자는 말이지, 그 능력이 완전히 눈뜨기 전에 과거나 미래가 보일 때가 있어. 억누를 수 없게 되어 가는 힘이 무의식중에 발현되어서, 그걸 비추는 거야."

 리츠코는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두 팔을 붙잡혀 복도를 끌려가고 어두운 방에 내던져지는 며칠 전의 꿈이,

 엉망이 된 학원을 등지고 혼자서 계속 걷는 어젯밤의 꿈이,

 과거나 미래, 라고――?

 "――큿……."

 갑자기 머리에 아픔을 느끼고 관자놀이에 손을 짚는다. 그런 게, 그딴 게, 과거나 미래여도 될 리가 없다.

 "네가 뭘 봤는지는 몰라.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게 있어――"

 리츠코가 한번 말을 끊고, 결심한 것처럼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눈이 뜨인다.

 "치하야. 네게는 아이돌이 될 소질이 있어."

 조용한 교실에 리츠코의 목소리만이 늠름하게 울렸다. 조용한 충격이 교실을 내달리고, 갑자기 고해진 사실에 자신의 목이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 당장 어떻고 저떻고 그런 건 아닌데. 치하야, 앞으로 너는 중대한 결단에 내몰리게 될지도 몰라. 그것만은 기억해 둬."

 그런 말을 남기고, 리츠코는 빠른 걸음으로 교실을 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지고 다시 교실을 정적이 감쌌다.

 "………………웃기지 마."

 작은 신음을 옆에서 듣고 돌아본다.

 "웃기지 말라고!! 어째서――!!!"

 미나세 상이 포효한다. 그녀가 쥐고 있던 사과가 손에서 벗어나 허공에 떠올랐다. 그녀의 손에서 몇 줄기의 전격이 흐르고, 사과에 수렴해 간다. 견디지 못하게 된 듯이 사과가 산산조각나 튀면서 잔해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난 인정 안 해. 네가 아이돌이라니!"

 들어올려진 어깨. 거꾸로 솟는 긴 머리. 온 몸에서 분노와 전격을 방출하면서, 눈에 깃든 것은 불타오르는 듯한 적의. 그 모든 것을 손바닥에 모으는 것처럼, 공중에서 그녀과 대치했을 때와 같은 번개로 된 구체가 그녀의 양 손에 태어났다. 두 개의 고밀도 에너지 덩어리는 섬광을 흩뜨리면서 튀어 나갈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이번만큼은 타카츠키 상도 허둥대며 미나세 상 뒤에서 연약하게 눈동자를 굴릴 뿐이었고.

 지금 미나세 상에겐 내 말은 닿을 것 같지 않다.

 전격을 남김없이 받아낼 강한 벽을 떠올린다.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을 때,

 "그만해, 이오리 짱, 치하야 짱!"

 우리들 사이에 뛰어들어 온 것은, 의외로 하기와라 상이었다. 내게 등을 돌리고 미나세 상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비켜, 유키호! 이젠 못 참아!"

 "아니야, 이오리 짱! 우리들 친구중에 아이돌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 나타난 거잖아? 축하한다고 말해 줘야해."

 "안됐지만 난 너처럼 솔직히 사람을 축복할 수 있을 만큼 머릿속이 꽃밭이 아냐. 자꾸 그런 소리 하면 그 태평한 머리부터 날려버리겠어."

 "꽃바――아으으. 하지만 있잖아, 이오리 짱. 난 알아. 고집 부릴 때도 있지만, 사실은 이오리 짱은 착한 애란 거. 그리고 아이돌이 한 명만 뽑힐 거라곤 리츠코 상도 말 안했어!"

 험한 표정의 미나세 상이 의표를 찔린 것처럼 두 눈을 크게 떴다. 천천히 전기 번개로 된 구체가 작아져 가고, 그녀의 몸에서 방출되던 번개 줄기가 줄어들어 간다. 미나세 상이 시선을 떨구었다.

 "한 사람이 아닐 가능성……. 거기까진 생각 못 했네. ……너무 흥분했었나 봐. 미안해, 유키호."

 일단은 창을 거둔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표정을 굳힌 채로 복도로 나갔다. 그 발이 문턱을 넘기 전에 미나세 상은 뒤돌아보았다.

 "착각하지 마. 절대로 인정 같은 건 안 할 거니까. 널 없애버려서라도 내가 아이돌이 돼 보일 테니까――"

 미나세 상의 모습이 교실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나간 쪽과 나를 보고 안절부절 못하던 타카츠키 상에게 가볍게 끄덕인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타카츠키 상도 교실을 폴짝거리며 뒤로했다.

 "다, 다행이다……."

 내게 등을 돌린 채 하기와라 상이 비틀 비틀 주저앉았다.

 "정말 고마워, 하기와라 상."

 "으응. 치하야짱, 괜찮았어……?"

 "응. 네 덕분에."

 그녀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앉아 감사하는 내게, 하기와라 상은 연약하지만 굳센 마음이 느껴지는 웃음을 띄웠다.

 "어 그게……뭔가 큰일이 됐지만, 축하한다구, 치하야!"

 가나하 상이 나를 끌어안고,

 "대단해, 역시 치하야야!"

 마코토가 하기와라 상에게 손을 내밀면서 싱긋 웃는다.

 "고, 고마워……."

 하지만 그 축복을, 칭찬을, 내가 받아들여도 되는 지는 잘 알 수 없었다.

 뻣뻣한 표정을 짓는 나를, 아즈사 상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

……





 뭔가를 먹을 기분도 들지 않아서, 점심시간이 되자 나는 사람 눈을 피하듯이 늘 가는 언덕을 향했다. 어제 하루카에게 점심밥은 없다고 듣기도 했으니 마침 잘 됐는지도 모른다.

 아이돌. 막연한 동경을 품고 있었을 뿐, 푹신푹신한 그 말의 무게를 지금 나는 아직 알 수 없다.

 벚나무 줄기 아래에 앉아 하루카를 기다린다. 문고본은 가져오지 않았다.

 춤추듯 떨어지는 벚꽃잎 수를 센다. 그런 의미 없는 행위를 과거의 내가 본다면 화를 낼까. ……트럭 운전수나, 유는.

 세 자릿수가 될 때 쯤,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평소였으면 하루카는 이미 여기에 와 있을 시간일 것이다.

 이제 하루카는 여기엔 안 와 주는 걸까. 따끔하게 아픈 불안이 가슴을 쓰다듬었다.

 당연한 일이 무너지는 건 언제나 한 순간이다. 다가오는 트럭도. 오늘 리츠코의 말도.

 일어서서 주변을 둘러보니――앗.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쪽을 향해 필사적으로 뛰어 오는 사람 그림자가 눈에 들어와, 입가가 풀어져 버린다. 언제나 어느샌가 뒤에 서 있는 것이 하루카의 신기한 점 중 하나였지만. 가끔은 저런 당황하는 등장도 좋다. 그 손에는 뭔가를 들고 있어서, 저건……바구니?

 하루카의 눈동자가 나를 보고, 크게 손을 흔들었다. 어린애 같은 그 행동을 되받아칠 기분은 들지 않아서, 하루카가 여기로 오는 걸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더니,

 그 발이 언덕 경사에 걸려, 하루카는 머리부터 들에 핀 풀꽃에 뛰어들었다.

 "히붓"

 "하루카!?"

 당황하면서 다가가려 하자, 하루카는 익숙한 듯이 일어나서 부끄럽다는 듯이 혀를 내밀었다.

 생각보다 훨씬 긴 시간이 걸려 겨우 언덕 위로 올라온 하루카는, "읏샤"라고 입으로 말하면서 앉았다. 안 어울리는 말에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내가 나중에 앉는 건 처음이란 걸 깨달았다. ……괜히 고민할 필요도 없겠지. 생각하기보다도 먼저, 평소의 거리에 앉았다. 하루카의 머리 냄새를 알 수 있는 거리. 오늘은 내가 고른 거리.

 문득, 오늘은 하루카의 부드러운 향기가 조금 강한걸, 하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여기 오기까지 그녀는 머리부터 엎어졌었다. 살펴보니 꽃 한 송이가 세 번째 리본처럼 하루카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그걸 손끝으로 잡아 하루카에게 보여 주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이 웃으면서 감사를 했다.

 "아, 고마워, 치하야 짱. 아~ 정말, 왜 이렇게 됐지. 넘어지고, 늦잠 자고."

 "하루카는 잠꾸러기였구나."

 "시, 시끄러 정말! 애초에 왜 내가 어젯밤 늦게까지 일어나 있었는데!"

 "왜 그랬는데?"

 "비밀이야!"

 뺨을 붉히고, 딴 데를 보고. 금방 금방 바뀌는 하루카의 표정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하지만 비밀이란 말이지. 신경 쓰이니까, 그럴 거면 처음부터 말하지 말았으면 한다.

 "그럼 그건 뭐야?"

 이쪽이라면 알려줄까 싶어서 하루카가 손에 든 바구니를 가리키자, 그녀는 어흠 헛기침을 했다.

 "치하야 짱, 점심밥 안 먹었지?"

 "응."

 "어, 진짜로 안 먹었어? 그럼 안 돼."

 "네가 그랬잖아……."

 "뭐, 그렇지만."

 한숨을 쉬고 싶어진다. 하루카가 바구니 뚜껑을 열어 안에 손을 넣는 걸 지켜보고 있으려니, 안에서 나온 건 쿠키 하나였다.

 "공복은 최고의 스파이스라고도 하고 말야, 만약 입에 안 맞아도 치하야 짱은 이걸 안 먹곤 못 배길 걸~. 자, 여기."

 과자에 스파이스는 필요 없지 않나 마음 속으로 태클을 걸면서, 하루카가 내민 쿠키를 받는다. 초콜릿 맛인 것 같은 그것을 잠깐 바라보고 살짝 문다. 너무 달지도 않고, 너무 쓰지도 않고. 바삭한 쿠키를 씹자 금방 혀 위에서 녹아내렸다. 은은한 초콜릿 향기가 입 안 가득 퍼진다. 평소에 과자는 거의 먹지 않지만, 이건 틀림없이,

 "맛있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자, 하루카는 휴 하고 숨을 내쉬고 만면의 웃음을 지었다.

 "다행이다. 혹시 '이런 거 못 먹어' 같은 말 들으면 어쩌지 싶었어."

 하루카는 바구니 뚜껑을 열고 나와 자기 사이에 두었다. 색색의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인 수많은 쿠키가 꽃다발처럼 잔뜩 들어차 있다.

 "나 과자 만드는 거 좋아하는데 말야, 다른 사람한테 주는 건 오랜만이라 뭔가 재밌어져서 한가득 만들어 버렸어. ……먹어 줄래?"

 "……고맙게 받을게."

 노란색 쿠키를 하나 집어서 이리저리 바라본다. 이런 색 쿠키는 처음 봤다.

 "이건 뭐야?"

 "그건 있지, 호박이야."

 호박으로도 쿠키를 만들 수 있구나. 조금 감탄하며 입안에 집어넣는다. ……그렇군. 호박 본래의 달콤함도 꽤 과자와 어울리는 법이구나.

 하나, 둘. 둘이서 바구니에 손을 넣을 때마다, 점점 쿠키가 줄어들어 간다. 내가 묻지 않아도 하루카는, 이건 적당히 굽기가 어려워~ 라느니, 다음엔 그걸 시험해보려고~ 라느니, 쿠키에 관한 여러가지 것들을 얘기해 주었다.

 이건 산미 있는 홍차에 어울릴 것 같다. 모처럼이니 여기에 마실 게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생각했을 때, 새삼스럽게 자신이 식사를 즐기고 있다는 걸 깨닫고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누군가와 함께.

 요 1년간 뭔가를 먹을 때 즐겁다고 느낀 적은 없었으니까――

 손 안의 하트 모양을 한 정석적인 밀크 쿠키에 시선을 떨군다. 과자. 배를 채우기 위해 만들어진 건 아니고, 필요한 영양을 보급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당분이 너무 많은 게 대부분이다. 그야말로 쓸데없는 것의 결정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 이것을, 하루카는 어젯밤 최선을 다해 만든 것이다. 맛의 취향이 어떤지도 모르는 날 위해 설탕 양이나 굽는 시간에 머리를 싸매면서. 그야말로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 버릴 정도로.

 공복은 최고의 스파이스라고 하루카는 말했지만.

 이게 내게 정말로, 정말로 맛있게 느껴지는 건, 하루카가 날 생각해서 만들어주었다는 게 쿠키 하나 하나에서 전해지기 때문이고.

 쓸데없는. 쓸데없는 것. 그럴 텐데.

 어떡하지. 그 마음이, 참을 수 없이 기쁘다――

 쿠키를 집는 손이 멈춘 것을 보고 하루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슬슬 배불러?"

 작게 고개를 흔든다. 아니다. 아니야.

 어떡하면 이 마음을 전할 수 있을까.

 어떡하면 이 마음에 보답할 수 있을까.

 나도 하루카에게 뭔가를 해 주고 싶다. 하지만 내겐 아무것도 없고, 솔직히 마음을 표현하는 것조차 잘 하지 못하고.

 뭔가 내가, 이 학원에서 얻은 것……. 그런가.

 "있지, 하루카. 나, 아이돌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

 하루카의 손 안에서 코코아 쿠키가 바스락 떨어져 부서졌다.

 "어……."

 하루카가 눈을 크게 뜬다. 그 입도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이 한번 열렸다가, 그리고 그대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닫혔다.

 "그렇……구나."

 하루카가 쥐어짜낸 것은 생각과는 달리, 연약한 목소리였다. 솔직히 조금 기뻐해 주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럼 나, 뭔가 네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을지도 몰라."

 봄이 지나고, 하루카가 멀리 가 버리기 전에. 그녀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숙이고 있는 그 얼굴이 흐려졌다.

 "아이돌에 가까워질 수 있는 힘이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지만, 나, 널 위해서라면――"

 "그만해!!"

 하루카의 고개가 튕기듯이 들리고, 큰 소리를 냈다. 놀라서 숨을 삼키는 나를 보고 하루카가 후회하는 것처럼 바닥을 보았다.

 "미안……. 하지만 부탁이야, 날 위해 아이돌이 되겠다니, 그런 말 하지 마……."

 매달리는 듯한 그 목소리에 어쩔 도리도 없이 곤혹스럽다.

 어째서.

 아이돌이 될 수 있으면, 멀리 떨어지더라도 네가 있는 곳으로 날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네 소원을 이루는 것도, 행복하게 하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르는데.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서는 아이돌의 힘 같은 건 필요 없으니까, 적어도 누군가를 돕기 위해 쓰겠다고. 겨우 그렇게 생각할만한 사람을, 그럴 수 있는 힘을, 찾아냈다고 생각했는데――

 "……알았어. 널 위해 아이돌이 되겠단 말은 안 할게."

 "……미안해."

 왜 네가 사과하는 거야. 분명 내가 착각했을 뿐이야. 줄어든 거리에 들떠서 네 기분을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어.

 분명 넌 이런 나한테도 상냥하니까, 새로운 곳으로 이사가더라도 친구 복이 많겠지. 굳이 무거워진 내 마음을 끌어안고 거기로 갈 필요는 없다.

 쓸데없는 참견이라곤 생각하지만. 어떤 곳이라도, 네 웃음이 흐려지지 않기를. 지금은 이제 그것만을, 그저 바란다.

 "그래도 하루카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내가 지킬 테니까."

 이번에야말로. 누군가를 지켜 보이겠다.

 "고마워. 하지만 있지, 나도 치하야 짱을 지키고 싶은걸."

 그렇게 중얼거리는 하루카는, 아주 조금 쓸쓸해 보이면서도 뭔지 모를 마음을 느끼게 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벚꽃잎이 바람에 실려 떨어져 간다. 계절이 옮겨가며 변하듯이, 일상도 끊임없이 변화해 간다. 시간의 흐름은 어쩔 도리 없이 상냥하고, 잔혹하고.

 이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내게 있어서 너는 이미, 누구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계속 이대로 같이 있을 수 있다면――

 하지만 내가 아무리 바라더라도. 이렇게 벚나무 밑에서 같이 시간을 보낼 일은 이제 없을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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