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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공주 THE HUNDRED LILY-1~2장

댓글: 4 / 조회: 4124 / 추천: 3



본문 - 02-04, 2016 22:48에 작성됨.

작가의 말

 

아이돌마스터로부터, (주로)치하야×하루카의 백합 SS입니다.

이번 주말은 미키의 생일인가, 뭔가 쓰고 싶네, 역시 하루치하도 쓰고 싶네, 오랜만에 이오리나 유키호도 쓰고 싶네, 이왕 이렇게 된거 모두 쓰고 싶네 그럼 잠자는 공주 해 볼까, 결국 기간 못 맞췄네, 라는 백합 좋아하는 사람의 이기심의 집합체입니다. 극장판의 '잠자는 공주 THE SLEEPING BE@UTY(예고)'를 정말로 제멋대로지만 통째로 빌린 극중극의 2차창작이라는 잘 알 수 없는 물건입니다만 네 가지만.

・바깥 무대에는 올라오지 않는 등장인물이 필요했기에 아이돌 이외의 분들에게도 이름만 출연 의뢰를 냈습니다.
・극중극과는 달리 히비키의 1인칭을 '본인'으로 변경하는 등, 가능한 한 원래 아이돌들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화'란 느낌은 엷어지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의 우정이 빛날 때'? 몰라, 그건 애정이다."를 시작으로, 수수께끼의 해석이 잔뜩 담겨 있는 것은 용서해 주세요.
・묘사를 박박 긁어냈을 텐데도 능력 부족으로 허무할 정도로 뒤죽박죽입니다.

BD가 발매되고 나서 1개월 이상 지났습니다만, 그 영화를 만들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경의와 감사를.
아이돌마스터를 좋아하게 되어서 정말로 행복합니다.

 

2014년 11월 30일

타마키 하야테

---

 

 

어둠 속에서야말로 강하게 빛나는 의지가 있다.


눈 앞의 절망에 몸이 움츠러들더라도, 소녀들은 목숨을 불태운다.


그 악몽 끝에 누구 하나 곁에 없게 되더라도.


모든 것은 희망을 내일로 이어가기 위해서.



'날 잊지 말아줘. 내가 여기에 있었단 걸.'

 

 

-xxx

 

 "이거 놔! 놓으라니까!!"

 자신이 목이 이렇게나 비통한 소리를 낼 수 있단 걸 처음 알았다. 하지만 그 외침은 어두컴컴한 돌로 된 복도에 허망하게 울릴 뿐, 누구 귀에도 닿지 않는다.

 "그만둬, 놓아줘!"

 말 없이 양 팔을 붙잡고 끌고 가는, 강인한 두 남자에게는 닿지 않는다. 이렇게나 가까이 있는데.

 "부탁이야, 허――"

 누구보다도 얘기하고 싶은 그 사람에게도, 닿지 않는다. 지금은 분명 멀리 있을, 누구보다도 소중한 그 사람에게는.

 쓰레기봉투처럼 끌려가 도착한 곳은 투박한 나무문. 남자 하나가 재빠르게 문을 열고, 드디어 양 팔이 풀려났다. 도망칠 틈도 없이 등을 떠밀려, 혼자서 깜깜한 방 속에.

 나도 모르게 비틀거려서 무릎을 꿇었다. 문이 닫혀 가는 걸 어깨 너머로 보면서, 점점 빛이 가늘어져 가는 데에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복도와 방이 완전히 단절된 후에 찾아온 것은 단 두명의 손님. 어둠과, 그리고 정적.

 이젠 소리칠 기력도 나지 않았다.

 어차피 이 목소리는 누구에게도 닿지 않는다.

 

 

1장  마음의 거리

 

 코 끝에 얇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올라탄 감촉을 느꼈다. 천천히 눈을 뜬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엷은 분홍색의 수많은 꽃. 잠들기 전의 기억을 떠올린다. 그래, 산책 도중에 발견한 벚나무 밑에서 잠들어 버렸었다. 무성하게 자란 키 작은 풀꽃들이 푹신한 융단 같아서, 기분 좋을 것 같았으니까. 무심코 몸을 뉘어 보았더니, 어느새인가 잠에 빠진 것 같다.

 코에 올라탄 '그것'을 손끝으로 잡아 눈 앞에 가져온다. 작은 벚꽃잎. 이 꽃잎 하나 때문만은 아니지만, 느껴지는 냄새는 온화한 봄 향기. 별로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봄 향기. 1년 전에 여기 오고 나서 두 번째로 맞는 봄 향기다.

 그나저나 기분 나쁜 꿈이었다. 잘 생각은 안 나지만 아무튼 깜깜했다는 인상이 있다. 이 꽃잎이 코에 올라타서 깬 건 아닐 것 같지만, 만약 눈 뜨는 데 도움을 줬다면 고마워. 그 이상 꿈이 계속되지 않아서 다행이야.

 그나저나, 코(하나)에 꽃잎(하나비라). 하나하나. ……후훗.

 "어이, 치하야~! 슬슬 쉬는 시간 끝이라구~!"

 윗몸을 일으켜서 목소리가 들린 쪽을 보니, 내가 입은 것과 같은 교복을 입은 사람 몇몇의 모습을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별로 내버려 둬도 상관 없는데.

 하지만 다음 수업까지 시간이 없단 것도 사실일 것이다. 귀찮게 생각하면서도 일어서서, 조금 흐트러진 치맛자락을 정돈한다.

 별 생각 없이 잡고 있던 꽃잎에 시선을 떨어뜨린다. 엄지와 검지를 놓자, 작은 분홍색은 흔들흔들 춤추듯이 천천히 발 밑으로 떨어졌다.



………

……





 내가 다니는 모모유리 학원은 일반적인 초등학교나 중학교, 고등학교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그런 구분을 했다간 안 그래도 적은 학생 수가 학교 운영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버릴 것이다. 오히려, 왜 아직도 폐교가 되지 않은 건지 고개를 갸웃거릴 레벨인데. 하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다. 어찌됐건 이 학원은 조금 특수한 소녀밖에 입학을 허가하지 않으니까.

 모모유리 학원은 그런 적은 수의 학생에겐 아까울 정도로 광대한 부지를 가지고 있다. 지금 학교 건물하곤 다른, 전혀 쓰이지 않는 구교사도 그대로 남아 있고, 넓은 초원, 약간 높은 언덕, 바닥이 보일 정도로 맑은 강까지. 뭐든 있다. 지하실도 있다는 소문도 있다. 시골에 땅이 남아서 떡하니 만들어 봤습니다, 그런 느낌이 드는, 백 송이 백합이라고 쓰고 '모모유리'라고 읽는 신기한 학원. 그 주변에 이름에 관련된 백합 꽃이 보이지 않는 것도 신기한 얘기다.

 정원도 쓸데없이 넓다. 날 부르러 온 클래스메이트들의 조금 뒤를 걸으면서 그 크기를 다시금 실감한다. 여기에도 벚꽃이 만발해서, 이건 이미 정원이 아니라 어디 공원의 산책길이다.

 "그러고 보면 있잖아, 치하야. 아까 본인들, 이상한 열쇠를 발견했다구."

 억센 검은 머리가 흔들리면서, 가나하 상이 뒤돌아보았다.

 "열쇠?"

 "잠깐만, 히비키! 일부러 쟤한테 말할 거 없어."

 강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건, 그 옆에 있던 미나세 상이었다. 확실히 그게 무슨 열쇠든 간에 나랑은 상관이 없고, 미나세 상의 말에 든 가시에도 흥미가 없다.

 "저쪽에 작고 이상한 오두막이 있었어요! 너덜너덜했는데, 그 안에 나무로 된 상자가 있어서, 그 속에 열쇠가 있고, 책도 있고, 빙글빙글~ 하고 쇠사슬이 둘러져 있고, 종이랑 같이!"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손으로 크기를 표현하면서, 타카츠키 상이 더듬더듬 설명해 주었다. 상황은 전혀 모르겠지만 그 말의 의미는 아무래도 상관 없다. 그녀는 귀여우니까, 그거면 됐다.

 "하아. 결국 얘기해 버리는구나, 아요이. 이 일은 될 수 있으면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일단 너한테도 물어 두겠는데, 있잖아, 이 문양 어디서 본 적 없어?"

 미나세 상이 낡아빠진 종이 한 장을 내 눈앞에 내밀었다. 거기 그려져 있는 건 간소한 마크. 삼각형, 그 안쪽엔 한 변에 작은 사각형이 붙어 있다. ……이게 뭘까. 텐트?

 "미안하지만, 전혀 모르겠어."

 "그치. 이 중 누구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분명 이 종이랑 열쇠는 학원의 비밀과 연결돼 있을 거야!"

 "어머 어머. 재밌을 것 같다~."

 왠지 유난히 텐션이 높은 미나세 상과 대조적으로, 느긋하게 맞장구를 치는 건 아즈사 상이다.

 "어떤 비밀이야, 이오리 짱?"

 "어, 음, 그게……. 이 종이는 사실 어딘가를 나타내는 지도고, 열쇠는 거기서 쓰는 거고……. 그 왜, 재보가 든 보물 상자나, 몰래 사육되고 있는 드래곤의 발에 묶인 족쇄나, '잠자는 공주'가 있는 지하실 문이나!"

 나왔구만, 지하실. 그렇게 어깨를 으쓱이고 싶어진다. 이 학원은 어느 정도 역사가 긴 데다 유난히 넓어서, 이런 소문은 무수히 있다. 성당 스테인드 글라스의 마리아 님이 한밤중 아무도 안 볼 때는 눈을 감고 있다느니, 한밤중에 뒷마당으로 나가면 흡혈귀에게 습격받는다느니, 출입금지인 제일 높은 탑 꼭대기는 과거와 연결돼 있다느니. 애초에 이 학원이 천 년 전에 만들어졌다느니. 정말로 천 년 전부터 있었다면, 이런 소문 같은 것들은 전승이나 옛날 이야기가 되고 만다.  '잠자는 공주'도, 그런 학원에 관련된 소문 중 하나다. 누구도 본 적 없는 지하실에서, 소녀가 혼자 계속 잠들어 있다는.

 "……시시해."

 "뭐야, 치하야. 시비 거는 거야?"

 무심코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확실히 듣고서, 미나세 상이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분명 지금 건 내 실언이지만 어차피 사과해도 그녀는 얌전히 용서해 주지 않을 것이다. 늘 있는 일이다. 무시하기로 한다.

 "저, 잠깐만 둘 다, 이제 곧 수업 시작할 거야……."

 맨 앞을 걷던 하기와라 상이 뒤돌아서, 중재라기엔 미덥지 못한 가냘픈 소리를 냈다.

 "맞아. 늦으면 리츠코한테 혼날 거야."

 선생님 이름을 막 부르면서, 하기와라 상 옆에서 마코토가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있는 전원이 대화에 참가하고 있었다. 한가지 무서운 말을 하자면, 이 학원 학생은 이게 전부다.

 ……소란스러운 건 좋아하지 않는다. 난 누군가와 친하게 지내기 위해서 일부러 멀리서 이 학원에 온 게 아니다.

 이곳에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

 옆에서 아직 더 불만을 말하고 싶은 듯한 미나세 상도, 우리들에게 쏟아지는 모두의 시선도, 내버려 둔다. 입을 꼭 다물고, 등을 펴고, 앞만을 바라본다.

 쓸데없는 걸 신경 쓸 시간도 그럴 생각도 없다.

 좁아진 시야 구석에서 아즈사 상이 표정을 흐렸다. 하지만 그것도, 어찌 되든 상관 없는 일이다.


………

……





 "너희들, 예비종이 울릴 때까진 교실로 오라고 매번 말하잖아."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보다 조금 늦게, 구르듯이 교실로 들어간 우리들을 향하는 시선은 무척이나 차가웠다.

 "미, 미안해, 리츠코……."

 "티처라고 부르라고도 매번 말하고 있을 텐데?"

 리츠코의 관자놀이가 꿈틀 움직이고 표정이 더욱 험악해진다. 히익 하고 작은 비명을 지르고, 하기와라 상이 마코토 뒤에 숨었다. 마코토, 막 부르고 싶어지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얼굴 맞대고 그러는 건 그만둬.

 리츠코는 우리들 클래스를 담당하는 상당히 젊은 선생님이다. 아즈사 상과 엇비슷……하다고 할까, 어쩌면 아즈사 상이 더, 아니, 아무 것도 아니다. 어쨌든 아직 우리들과 별로 차이나지 않는 나이일 텐데, 꽤나 유능한 건 틀림없다. 어쨌건 우리들 수업은 전부 그녀가 담당하고 있다. 초등학교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도 하지만, 여긴 특수한 학원이다. 특수하고, 아마도 금전적으로 여유가 없는 학원이다. 교사 수가 극단적으로 적은 것도 그런 사정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다.

 "뭐, 됐어. 벌써 수업은 시작됐으니까, 다들 빨리 거기에 한 줄로 서."

 표정을 누그러뜨린 리츠코에게, 안심한 표정으로 가나하 상이 달려간다. 다들 그 뒤를 따르고, 나는 안정적으로 맨 뒤에.

 특수한 학원이라고 해도 물론 평범한 수업은 있다. 이 '음악'도 그 중 하나다.

 역시 마찬가지로 쓸데없이 넓은 다목적 교실에, 일곱 명 분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반주는 없다. 그 이전에 피아노가 없다. 넓이는 있지만 돈은 없다. 리듬을 새기는 것은 리츠코가 든 얇고 긴 봉.

 규칙적으로 흔들리는 그 움직임을 보면서, 배에서부터 소리를 낸다. 몇 번이고 부른 적 있는 합창곡은 악보를 들 필요도 없이, 입이 멋대로 가사를 읊어 준다.

 노래.

 이전엔 분명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은.

 싫어진 건 아니지만, 노래를 즐겁다고는 느끼지 않게 됐다. 일부러 노래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좋아한다는 감정은 전부 그 날, 그 장소에 전부 두고 와 버린 것 같다.

 지금은 노래할 필요가 있으니 노래할 뿐. 즐겁게 하란 말을 들으면 그렇게 표현한다. 거긴 스타카토로 하라고 지시받으면 튀듯이 소리를 낸다.

 거기에 자신의 감정을 끼워넣을 여지는 없다. 쓸데없을 뿐이다. 내 목적에 직접 연관되지는 않을 것 같아도, 지금은 그럴 필요가 있으니까 그렇게 할 뿐. 다만 옆에서 타카츠키 상이 혀 짧은 소리로 노래하는 건 무척 귀엽다.

 타카츠키 상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더니, 어느샌가 수업도 얼마 남지 않았다. 마지막 두 소절을, 비브라토를 넣으면서 정성껏 늘인다.

 "자, 음악은 여기까지. 다음 수업은 늦지 말고 와."

 수업 끝 종과 동시에 리츠코가 일갈했다.

 교실을 이동하는 의미가 없다고 매번 생각하는데. 어차피 여기엔 피아노조차 없고, 평소에 있는 교실에서도 문제 없을 것이다. 지각의 원인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건 됐고.

 다음 수업은――



………

……





 몇 번이고 말하지만, 여긴 특수한 학원이다. 그 특수성은 역시, 여기에 집약될 것이다.

 "자, 오늘도 부유술 수업 시작한다."

 기본적으로 과학적인 근거 없이, 양력 부력을 가지지 않는 물체는 이 세계에서 떠오르지 않는다.

 예를 들면 교단에 올려져 있는 저 두툼한 책. 하지만.

 리츠코가 검지손가락을 휘두르자, 그 책은 마치 위에서 실에 매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중력이란 이치를 무시하고 가볍게 떠올랐다.

 이 세상에 상식을 비트는 능력은 분명히 존재한다.

 극히 드물게 그런 힘을 가진 소녀가 태어나는 것이다.

 왜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인지, 그것도 일부 소녀에게만 발현하는 것인지, 아마 누구도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서 물건이나 사람을 띄우거나,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급류를 만들어 내거나, 대지에 구멍을 낼 수도 있다. 알기 쉬운 말로 묶어 버리자면, 소위 말하는 '마법'이다.

 그 능력이 있다는 걸 깨닫더라도 몰래 일상에서 쓰기만 할 뿐, 평범한 생활을 보내는 아이도 많다고 한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힘이라곤 하지만 그걸 대놓고 행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능력이 있다는 걸 들키면 그걸 이용하려고 하는 자들이 다가올 가능성이 있고, 애초에 이 능력은 나이를 먹으면서 어느새인가 사라져 버린다. 맘대로 쓰면 주변에서 백안시당하게 되기도 하고, 가능한 한 '평범하게' 지내는 게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나도 그럴 예정이었다. 철들 무렵 자신에게 '능력'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도, 특별히 감개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 사실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하지만 난 지금 여기에 있다.

 그 능력을 키우기 위한 이 학원에.

 모모유리 학원은 바로 그런 능력을 키우고 높이기 위한 장소이다. 능력을 가진 소녀만이 입학을 허가받고, 누구보다도 강한 힘을 가지기 위해 매일 매일 단련해 나간다. 이 학원에 학생이 적은 것은 그 때문이다.

 마코토, 하기와라 상, 타카츠키 상, 아즈사 상, 가나하 상, 그리고 미나세 상. 다들 분명 그들 나름대로의 생각을 품고 이 학원에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목적은 같다.

 목표는, 능력자들의 정점.

 "여태껏 한 걸로 대부분의 기초는 가르쳤을 거야. 물체 이동의 응용이니까 그렇게 어렵진 않아. 실제로 하는 건 처음이지만……치하야, 해 볼래?"

 지명받아서 한 걸음 앞으로 나간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미나세 상 것이라 생각되는 혀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역시 무시한다. 오른팔을 똑바로 목표인 책에 향하고, 눈을 감고 집중한다.

 책을 아래에서 들어올리는 힘과, 그걸 보조하듯이 밸런스를 잡고 위로 잡아당기는 힘. 책이 떠오르는 이미지가 확실히 뇌리에 떠올랐다. ――할 수 있다.

 확실히 굳은 이미지를 그대로 발현시킨다. 특별히 손에 느껴지는 반응은 없다. 하지만.

 "우와아~! 치하야 상, 대단해요!"

 타카츠키 상을 포함한 몇 명의 환성에 천천히 눈을 뜬다. 내가 상상했던 대로 그 책은 교단을 벗어나, 1미터 정도 높이에서 멈춰 있었다.

 "역시 치하야라구!"

 "이건 그렇게 어려운 게 아냐."

 눈을 반짝이는 가나하 상에게 어깨를 으쓱여 보인다. 책을 띄운 이미지를 머릿속에서 지우자, 책은 중력에 이끌려 원래 있을 장소로 돌아갔다. 아까보다 크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맞아! 그 정도는 여유지."

 기분 나쁜 얼굴을 보이는 건 역시 미나세 상이었다. 그 시선이 책을 바라보고, 그녀가 손바닥을 향했다.

 "잠깐만 이오리, 멋대로――"

 리츠코의 제지는 듣지도 않고 미나세 상이 살짝 눈을 감자, 두 번 공중에 떠올랐던 책은 다시 떨리면서 살짝 떠올라――옆으로 미끄러지면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 어라?"

 "……나보다 이동 거리는 긴 모양이네. 축하해."

 시비를 건 데 대한 보답으로 비꼬아 주었더니, 미나세 상은 어중간하게 벌리고 있던 입을 꼭 다물고, 이마에 퍼런 심줄을 띄울 기세로 나를 노려보았다.

 "좀 잘 한다고 잘난 척 하기는――!"

 "얼굴에 화를 띄울 거라면, 물건을 띄울 수 있게 노력하도록 해."

 "자, 자, 둘 다 그만해. 그럼 다들 개인 연습 시작해. ――알겠어? 늘 말하지만, 제일 중요한 건 확고한 이미지야. 떠오른 모습을 확실히 이미지하지 못하면 마음대로는 안 돼. 그것만 익히면 무게에 관계 없이 어떤 물건이라도 띄울 수 있게 되지만, 처음엔 상상하기 쉬운 종이나 연필부터 해 보는 게 좋아."

 익숙하다는 듯이 우리의 말다툼을 끊고, 리츠코가 손뼉을 쳤다. 다들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면서 연필이나 지우개 같은 것을 꺼낸다. 미나세 상도 적의가 섞인 시선을 내게서 돌리고, 연습 준비를 시작했다.

 나쁜 애는 아니지만 왠지 자꾸 내게 시비를 걸어 오니 곤란하다. 그걸 무시하면 더 화내니까 어떻게 할 수도 없다. 나도 나쁜 말이 하나 둘 흘러 나오는 건 매번 반성하고 있지만.

 "위험하니까 절대로 너무 무거운 물건이나, 자기 자신 같은 걸 띄우면 안 돼."

 리츠코가 연습할 때 주의할 점이나 어드바이스를 하면서 모두가 있는 곳을 순서대로 돌아다닌다.

 "잘 안 된다고 억지로 힘을 할동시켜도 안 돼. 심신에 너무 부담이 가서, 잘못하면 쓰러질 거야!"

 나도 연습을 해야지. 아까보다 큰데, 이 가방도 될까. 책보다도 띄우는 이미지를 강하게 갖는다. 시선 끝에서 가방이 공중을 떠도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등 뒤에서 미나세 상의 기쁜 목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그녀는 보기 좋게 교단 위의 책을 부유시키는 데에 성공해 있었다. 지기 싫어하는 그녀는 그 책만을 대상으로 능력 연습을 한 것 같다. 그렇다, 그녀는 지는 걸 싫어한다. 그리고 요령이 좋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성적이 좋은 나를 적으로 보고 시비를 거는 건지도 모른다.

 주위를 둘러보자 이미 마코토와 가나하 상도 부유술을 성공시켜서, 필기구를 둥실 둥실 공중에 띄우고 있었다. 아즈사 상의 연필도 떠 있지만, 저쪽으로 둥실 둥실, 이쪽으로 비틀비틀 하면서 조금 불안해 보인다. 연필 끝이 망가진 컴퍼스처럼 빙글 빙글 돌고 있다.

 "마코토 짱~. 잘 못하겠어~."

 눈물을 글썽이면서 하기와라 상이 자에 손바닥을 향하고 신음하고 있다.

 "괜찮아, 진정해, 유키호. 못 한다는 건 생각하지 말고, 성공하는 이미지만을 강하게 갖는 거야."

 그런 둘의 모습을 곁눈질하고 있으려니, 폴짝 폴짝 달려 오는 건――타카츠키 상!

 "치하야 상, 저도 잘 못 띄우겠어요……. 가르쳐 주시겠어요?"

 "잠깐만, 야요이! 그런 녀석한테 물어보지 말고, 그건 내가――"

 "그래, 좋아."

 떨어진 곳에서 미나세 상의 불만이 들려왔지만 신경 쓰지 않는다. 눈썹을 팔자로 만들고 눈 앞에서 지우개에 집중하는 타카츠키 상. 귀여워라.

 "있잖아, 타카츠키 상. 너무 힘을 줘도, 반대로――"

 갑자기 지우개가 휙 튕겨져 날아갔다.  "아야!"하는 작은 비명. 미나세 상이 코를 누르면서 교단 뒤에 쪼그려 앉았다.

 "미, 미안해, 이오리 짱!"

 실내화 소리를 내며 타카츠키 상이 미나세 상 쪽으로 달려갔다.

 "――잘 안 되는 법이야,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늦었네."

 너무 기운이 넘치는 것도 문제인지도 모른다.



………

……





 그날 밤.

 내 방에 돌아오자, 이미 아즈사 상이 의자에 앉아서 느긋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늦었구나, 치하야 짱."

 "……오늘은 좀 밤 바람을 맞으면서 머리를 식히고 싶었거든요."

 모모유리 학원은 전원 기숙사제다. 땅만큼은 쓸데없이 넓은데 왜인지 방은 2인이나 3인 1실이다. 마코토와 하기와라 상, 타카츠키 상과 가나하 상과 미나세 상, 그리고 나와 아즈사 상이 각각 같은 방이다.

 클래스메이트 중에선 가장 간섭해 오지 않는 아즈사 상이 룸메이트가 된 건, 내겐 행운이었는지도 모른다. 내 쪽에선 거의 말을 걸지 않고, 아즈사 상도 무리해서 얘기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적당한 거리감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이게 만약 미나세 상이었다면 성가셔서 편히 잠도 못 잘테고, 타카츠키 상이었다면……다른 의미로 잠을 못 잘지도 모른다.

 "또 이오리 짱이랑 다퉜고 말이지~."

 "……그거랑은 관계 없는 일이에요."

 침대에 걸터앉으면서 무미건조하게 답한다. 밖에서 생각을 하고 있던 건 사실이지만 그건 미나세 상에 대한 게 아니라, 내가 이 학원에 오게 된 계기에 대한 것이었다. 그 날 일을 오랜만에 떠올리고 말았으니까――

 "이오리 짱도 열심히 하니까 말야. 치하야 짱처럼."

 "…………."

 "요즘 치하야 짱, 너무 열심히 하는 거 아니니? 뭘 초조해하는 거니?"

 "아즈사 상하곤 관계 없는 일이에요."

 왠지 오늘 아즈사 상은 평소보다 끈질겼다. 평소였으면 내가 입을 다물었을 때 얘기를 끊어 줬을 텐데.

 "별로 치하야 짱이랑 제대로 얘기한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있지, 치하야 짱은 왜 이 학원에――"

 급 브레이크에 타이어가 아스팔트와 마찰하는 소리. 우직 하는 기분 나쁜 소리. 내 목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되지 못한 소리. 그리고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는, 내게 가장 소중했던――

 "그만하세요! 아즈사 상이랑은 관계 없는 일이라고 하잖아요!"

 듣기 싫은 소리를 전부 지우듯이, 비명 같은 목소리가 아즈사 상의 물음을 끊었다. 뇌리에 되살아나는 최악의 광경에, 주먹을 쥔 손에 땀이 배어나온다.

 "미, 미안해……. 조금 걱정이 돼서……."

 "…………저야말로, 큰 소리를 내서 죄송합니다."

 급격하게 오른 체온이 천천히 내려간다. 면목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아즈사 상에게, 진심으로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한다.

 아즈사 상이 선의로 신경 써 주고 있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건들지 말아줬으면 하는 곳은 어쩔 수 없이 있다. 만약 모든 걸 얘기한다 하더라도 뭐가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위로나 동정 같은 걸 원하는 게 아니다. 그런 걸 위해 난 여기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샤워하고 올게요."

 눈을 내리깔고 입을 다물어 버린 아즈사 상에게서 등을 돌린다.

 분명 나는 조금 여유가 없어진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저히 걸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

……





 우울한 기분과는 관계 없이, 하늘은 오늘도 맑았다. 풀꽃들도 어딘가 기쁜 것처럼 봄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다. 들려오는 건 온화한 물 흐르는 소리.

 이런 날에 가장 마음을 쉬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건 부드러운 햇빛 밑에서 독서를 하는 것이겠지. 청경우독? 내 알 바 아니다. 맑은 날에도 독서는 해야 한다.

 벚나무에 등을 기대고 페이지를 넘기던 손을 잠깐 멈추고 문득 고개를 드니, 여기서 조금 아래쪽을 흐르는 강에서 아즈사 상과 다른 애들이 보트를 타고 놀고 있었다. 마코토가 뱃머리를 등지고 세게 노를 젓고, 하기와라 상은 그런 마코토를 평소처럼 따스한, 행복한 웃음을 지으면서 보고 있다. 그런 셋을 태운 한 척의 배는, 각 표면을 장식하는 무수한 꽃잎 위를 나아간다.

 꽃뗏목(花筏)이란 말이 있다. 옛날 사람들은 떨어진 벚꽃잎이 띠처럼 물에 떠서 흘러가는 걸, 뗏목에 비유해서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꽃뗏목, 그렇게 조그맣게 중얼거려 보고, 다시금 예쁜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학원엔 고전이란 수업이 없어서, 좀처럼 이런 말과 만날 기회가 없다는 건 조금 유감스럽다. 하지만 그런 평범한 커리큘럼 속에서 사는 것보다 나는 이쪽을 선택했다. 다음 능력 수업도 계속해서 부유술이었을 것이다. 참 느긋하구나, 하고 마음 속으로 혀를 찬다.

 좀 더, 좀 더, 좀 더――

 자신 속의 갈망이 고개를 처든다. 더 빨리. 더 많은 힘을. 더 강하게.

 하지만 초조함과 아주 비슷한 강한 감정에 혐오를 느끼고 머리에서 몰아낸다. 그만두자. 어제 아즈사 상하고 부딪힌 데에 대한 반성으로, 이렇게 진정하기 위한 수단을 고른 것이다. 다시 양 손에 든 문고본에 시선을 향한다.

 책은 좋다. 지금은 이게 나와 학원 바깥 세계를 잇는 유일한 물건일지도 모른다. 몰랐던 어휘도 내 안에 축적되어 간다. 그것들은 능력과는 관계 없는, '쓸데없는 것'일 텐데. 모든 것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는 것은 역시, 내 안에 아직 평범한 생활에 대한 미련이 남이 있기 때문일까.

 지금 읽고 있는 이 책도 가공의 이야기다. 쟁란의 시대에 태어난 남녀가 허락되지 않는 사랑을 해서――그 다음은 아직 읽지 않았으니 모른다. 아무튼 말해 버리자면 어딘가의 누군가가 낳은 가공의 산물이고, 아마도 긴 시간에 걸쳐 형성된 쓸데없는 것들의 묶음, 그 결정이다.

 그래도 이렇게 내가 마음의 평온을 얻고 있는 이상, 가치는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빼곡히 들어찬 문자 위를 시선이 달린다.

 노가 물을 가르는 소리도 이젠 멀리 들린다.

 나는 다시 책의 세계에 끌려들어갔다.



………

……





 "아즈사 상, 어제는 죄송합니다."

 하루의 수업을 끝내고 방에 돌아오자 마자, 오늘도 먼저 돌아와 있던 아즈사 상에게 깊이 머리를 숙였다.

 "어머? 어머 어머?"

 아즈사 상은 눈을 두리번거렸다. 그것도 그렇겠지. 평소엔 좀처럼 내가 말을 거는 일은 없으니까. 분명 내일은 우박이 내릴 거라고 생각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나……왜 사과 받고 있는 거지?"

 놀란 건 그 부분입니까, 하고 숙인 머리가 그대로 바닥에 격돌할 것만 같다. 우물쭈물 아즈사 상의 표정을 올려다 보니, 정말로 곤란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어젯밤에 아즈사 상한테 화를 내서……. 아즈사 상이 걱정해 주고 있단 건 알고 있었는데."

 내 사죄를 들은 아즈사 상은 천천히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입가에 상냥한 미소를 띄웠다.

 "그거라면 내가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었어."

 "아즈사 상은 잘못한 거 없어요. 제가 멋대로……."

 "그래도 갑자기 물어보면 싫을 때도 있지. 미안해, 신경을 못 써서. 내가 더 초조했는지도 몰라."

 "그건……."

 "여태껏 느긋이 얘기한 적도 없었으니까, 뭐가 치하야 짱을 상처입히는지도 몰라서. 나도 무척 후회했어. 그러니까 있지――"

 아즈사 상이 말을 끊고 내 눈을 정면에서 들여다보았다.

 "가끔은 얘기도 하자? 그렇게 말은 해도, 치하야 짱은 적당히 맞장구만 쳐 주면 되니까. 오늘은 내 얘기 들어줄래?"

 남과 얘기하는 건 별로 안 좋아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제에 이은 오늘에는 간단히 거절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아즈사 상도 나 때문에 고민하고, 날 위해 낸 결론이겠지.

 받아들인다는 것 이외에 선택지는 없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둘이서 테이블을 끼고 의자에 앉아서, 아즈사 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행이다. 음, 그럼 뭐부터 얘기할까."

 "안 정해 뒀던 건가요……."

 "난 아무래도 있지, 대본이나 지도나, 정해진 대로 진행하는 걸 잘 못 하는 것 같아."

 "그런데도 이런 외진 곳에 잘 찾아오셨네요."

 "여기엔 있지, 헤메서 들어온 거야."

 지금 발각되는 충격적인 진실.

 "그렇지. 모처럼이니까, 오늘은 내가 이 학원에 왔을 때 얘기를 할게. 사실은 나――"

 다시 한 번 아즈사 상이 말을 끊었다.

 "여기엔 우연히 도착한 거야."

 "그건 아까 들었어요."

 "어머?"

 한숨을 쉬고 싶어진다. 하지만 두 번 들어도 놀랄 만한 일임은 변함이 없다.

 "헤메 들어왔다곤 해도, 어떻게……."

 "나 있지, 실은 특기인 능력이 순간이동이야."

 "그렇군요, 그래서 이런 데까지…."

 "지금은 아직 10미터 떨어진 데까지가 한계지만 말야."

 "그럼 텔레포트가 없었어도 결국 여기에 도착했을 거란 거 아닌가요!"

 이상하다. 단순한 청자로 있으려고 했는데 태클을 걸고 있다. 마이페이스인 사람이라곤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그것도 그렇네. 그래서 며칠을 걸려도 원래 있던 곳으론 돌아갈 수 없어서, 깨닫고 보니 이 학원의 부지 내에 있었어. 처음엔 그냥 예쁜 풍경이구나 하고, 강하고 그 너머에 있는 약간 높은 언덕을 보고 있었을 뿐, 설마 배움터일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

 "태평하시군요."

 "사실은 그렇지도 않았어. 계속 물도 음식도 입에 못 댔으니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서."

 "완전히 조난자잖아요, 그거."

 "힘없이 걸어가다 보니 있지, 눈앞에 양산을 쓴 은색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여성이 서 있었던 거야."

 "……'은발의 대공', 인가요."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서 그런 신기한 인물을 만났다는 얘길 들으면, 보통이라면 그건 환각이라고 웃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학원에 얽힌 소문 중에, 검은 세일러 복을 입은 은색 머리를 가진 여성이,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는 구교사 창문에 비친다는 게 있다. 이 '은발의 대공'이라 불리는 이야기는 수많은 소문 가운데서도 특히 자주 이야기되는 것 중 하나다. 시시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드래곤'이나 '잠자는 공주' 같은 것보다는 있을 법한 이야기니, 간단하게 환각이라고 반론할 수도 없다. 다만 '은발의 대공'이 양산을 들고 있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 사람은 실크로 된 얇은 장갑을 낀 손을 내게 내밀고, 이 학원 본교사까지 데려가 줬어. 감사 인사를 하려고 옆을 봤더니, 이미 그녀는 처음부터 거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단다."

 "……."

 "그리고 나서 여기서 리츠코 상을 만나고. 나한테 능력이 있었으니까, 다음 봄부터 여기 입학하지 않겠냐는 말을 들어서."

 "우리들과 만났다는 거군요. 여기 오게 된 사정은 알겠습니다. 상상했던 것보다 건너뛴 것 같지만요. 하지만 그럼 왜 아즈사 상은――"

 어제는 자신이 답하지 못한 것을 남한테 물어도 되는 것인지 한 순간 머뭇거렸지만.

 "지금도 여기 있는 건가요?"

 헤메 들어온 거라면 나가면 될 뿐이다. 그런 그녀가 지금도 이 학원에 머물고 있는 그 이유가 궁금해지고 말았다. 아즈사 상은 먼 곳을 보는 것처럼 내게서 시선을 돌리고,

 "누군가를 찾고 있는 건지도 몰라."

 하고, 쓸쓸한 눈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누군가라는 건 애초에 이렇게 먼 곳까지 '일부러' 오게 된 계기가 된, 그녀에게 무척 소중한 사람일지도 모르고, 여기서 만난 '은발의 대공'일지도 모른다. 아즈사 상의 진의는 모른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얘기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건 알았다.

 그녀에게 내가 모르는 미지의 부분이 있다는 게 반대로 내게 안도감을 주어서, 어깨의 힘이 조금씩 빠졌다.

 그래. 아즈사 상도 나와 마찬가지다. 얘기하기 싫은 일이 있는 건 나 뿐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게 나도 모르는 새에 열등감이 되어서. 하지만 분명 아즈사 상도 끌어안고 있는 게 있다. 벌려 두고 싶은 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난 여기 있을 수 있다. 아즈사 상과도 지금 이대로 있을 수 있다.

 시선을 되돌린 아즈사 상은 내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것을 깨달았는지, 그녀도 안심한 것처럼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갑자기 아즈사 상이 일어서서, 그녀의 양 팔이 나를 부드럽게 감싸안았다.

 "뭐, 뭔가요, 갑, 자기."

 "왠지 모르게 이러고 싶어졌어."

 당황하는 내 귓가에 폭식폭신한 말이 내려온다. 입이 아즈사 상의 상반신에 눌려서, 숨을 잘 쉴, 수가 없다.

 "있잖아, 치하야 짱. 언젠가 나한테도 치하야 짱 얘기를 들려줄래?"

 "그, 그건……. 저도, 몰라요."

 얼굴을 옆으로 돌려서 숨구멍을 확보하고, 숨이 차면서도 어떻게든 답한다.

 "후후. 지금은 그거라도 괜찮아."

 내가 간신히 한 대답을, 그녀는 역시 부드럽게 감싸안듯이 받아 주었다.

 한동안 아즈사 상에게 몸을 맡기고 눈을 감는다. 사람과의 관계 같은 건 쓸데없을 뿐이라고 생각했지만. 가끔은 쓸데없는 것에 마음을 맡겨 보는 것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아아, 뭘까. 이러고 있으니까, 무척 편안――

 하지 않다.

 머리에 닿는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최고로 짜증난다.

 이런 쓸데없는 지방 덩어리 따위, 날아가 버리면 좋을 텐데.

 

 

2장  아가씨는 큰 뜻을 품는다

 

 키사라기 치하야가 미우라 아즈사의 가슴에 적의를 품었을 즈음.

 미나세 이오리는 자기 방에서 치하야에게 평소와 같이 적의를 품고 있었다.

 '뭐야, 그 녀석. 오늘 수업에서도, 좀 잘 한다고 우쭐대기는.'

 자기 생각은 하지도 않고, 이오리는 벽장에 넣어 뒀던 무언가를 꺼냈다.

 낡아빠진 종이, 쇠사슬로 묶인 책.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열쇠.

 책은 쇠사슬로 세게 묶여 있어서 간단히 풀어서 읽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책에 손상이 가지 않게 사슬을 자르는 능력은 아직 못 쓰고. 열쇠도 자물쇠를 찾지 않으면 어떻게 할 수 없다. 역시 삼각형과 사각형이 조합된 이 수수께끼의 문양이 힌트가 될 것 같은데.

 하지만 분명 이건 학원의 비밀과 연결돼 있다고 이오리는 생각하고 있다. 이 학원은 아마도 단순한 능력자 육성을 위한 곳이 아니다. 그걸 파헤쳐야만 한다.

 사명감을 가슴에 품고 흐리게 빛나는 열쇠를 꼭 쥔다.

 애초에 이오리는 그런 수수께끼를 밝히기 위해 이 학원에 온 것은 아니었다.

 거대한 부와 권력을 쥔, 이 나라에서도 유수의 재벌을 이끄는 미나세 가의 막내로 태어난 이오리. 그녀는 언제나 우수한 양친과 오빠들의 등을 보며 자랐다.

 아무런 부족한 것 없이 생활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오리에겐 가장 큰 불만이었다. 주변엔 자신의 손으로 손에 넣은 게 하나도 없다. 이 '능력'도 우연히 지니게 된 것이니, 그저 쓸 수 있다는 것만으론 가문 같은 것들과 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 이오리는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힘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만들기로 했다. 능력자 중에서 정점에 서서 가족에게 자신의 존재를, 능력을 인정받으려고 했다. 이름만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손으로 손에 넣은 물건을 어떻게든 갖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에 맹렬하게 반대한 건 다름아닌 아버지였다.

 '왜 그러는데! 나도 내 힘으로 정상에 서고 싶어! 능력자의 정점, ――이 될 거야!!』

 '그러니까 그건 인정할 수 없다고 하잖니! 널 ――같은 걸 시킬 순 없다!'

 평소엔 이오리의 생각에 참견하지 않는 아버지는 어깨를 펴고 그렇게 말하고, 얘기는 끝났다는 듯이 등을 돌렸다. 말을 전혀 듣지 않는 아버지에게 이오리가 저항심을 불태운 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뭐야, 바보 취급하긴. 나도 할 수 있다고.'

 이오리는 국내에서 유일한 능력자가 모이는 학원에 몰래 바로 입학 수속을 마치고, 거의 가출 같은 식으로 이 학원에 왔다.

 그리고 이오리는 보았다. 입학식 날, 구교사 그림자에 슬쩍 놓인 조각상을. 거기에 새겨진 기증자의 이름은――

 '아버지!?'

 이상한 조각상이었다. 뭔지 모를 금속으로 된 그것은……마이크 하나와 그걸 지지하는 긴 스탠드를 본뜬 것 같았다. 왜 일부러 이런 모양으로 한 걸까.

 의문스러운 것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건 틀림없이 이 학원과 아버지의 수수께끼의 연결고리였다. 아마도 아버지에겐 딸에게도 얘기할 수 없는 비밀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만약 뒤가 구린 일이 있어서 얘기하지 못하는 거라면.

 이익이 나오지 않는 데에 아버지가 연관될 리가 없다. 분명 이 학원은 아버지에게 있어서 이익인 거겠지만, 이오리가 입학하는 걸 그만큼 부정한 걸 보면 그 이유는 반드시 끝까지 숨길 속셈일 것이다. 만약 잘못된 일을 하고 있는 거라면 바르게 고쳐야 한다.

 '난 여기서 누구보다도 강해져서, 이 학원의 비밀까지도 찾아 주겠어!'

 두 개의 결의를 다시 한 번 굳힌다. 하지만 겨우 발견한 단서일지도 모르는 손 안의 종이도, 책도, 열쇠도 지금 이오리에겐 어찌할 수가 없다. 자신의 무력함에 입술을 세게 깨문다.

 "이오리~! 다녀왔다구~!"

 갑자기 방 문이 열리고, 목욕을 마친 히비키가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면서 들어왔다.

 "자, 잠깐만! 너 혼자 쓰는 방이 아니니까 노크 정도는 해!"

 당황하면서 책과 열쇠를 장에 밀어넣고, 이오리는 입구 쪽을 돌아보았다.

 "너무해, 이오리 짱. 오늘은 셋이서 대욕장에 가자고 그랬는데, 어느샌가 혼자서 목욕하고 오고."

 "가, 가끔은 혼자 있고 싶을 때도 있는 거야."

 히비키 뒤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 야요이에게서 고개를 돌린다. 결국 학원의 수수께끼에는 조금도 다가가지 못한 셈이고, 솔직하게 같이 목욕하러 갈 걸. 이오리는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입에는 내지 않는다. 솔직하지 못한 나이대.

 "내일은 나도 같이 갈게."

 한숨을 쉬면서 침대에 걸터앉는다. 얇은 잠옷 너머로 폭신폭신한 이불의 감촉이 기분 좋다. 그 옆에 히비키가 뛰어오르듯이 올라와서 침대에 엎어졌다.

 "그러고보면 있잖아, 이오리 짱. 아까 유키호 상한테서 리본을 잔뜩 받았어요!"

 히비키에 이어서 방에 들어온 야요이는, 과연 양 손에 한가득 리본을 들고 있었다.

 "이만큼이나 되는 양을 왜 유키호가 가지고 있던 거야."

 "뭔가 있지, 집에서 보내줬대. 조금 머리가 길어졌어요, 그렇게 편지에 적었더니, 잔뜩."

 "그정도 길이는 안 될텐데……. 그 애는 리본은 안 쓰고 말야."

 "응,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어도 못 쓰니까 받아줄래? 라고 그래서."

 "그렇구나. 그래도 이건 세명이라도 너무 많아. 게다가 내 취향도 아니고. 어떡해야 하는거야."

 옆에 올라온 야요이에게 리본 몇 개를 받아서 빤히 바라본다. 반대쪽을 보니 침대 위에 굴러다니던 책을 엎드린 채로 읽는 히비키가. 좋아.

 "뭐, 뭐 하는 거야, 이오리~!"

 "시끄러, 잠깐만 가만히 있어!"

 텅 빈 히비키의 등에 올라타서, 이오리는 손에 든 긴 리본을 눈앞에서 흔들리는 검은 머리에 감아 나간다.

 "자, 완성이야. 니히힛, 네 성가신 머리도 이렇게 해 놓으니까 꽤 스마트해지는구나."

 "너, 너무해, 이오리……."

 저항이 무의미하게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인 히비키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런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야요이는 만면의 웃음을 짓더니 리본을 든 채로 이오리를 끌어안았다.

 "에헤헤~. 히비키 상 귀여워요! 이오리 짱도 묶어 줄게!"

 "잠깐만, 야요이! 지금 건 장난으로――"

 이오리의 말은 듣지 않고, 야요이는 잽싸기 그녀의 앞머리를 뒤로 넘기고 리본으로 머리띠처럼 정리해 버렸다. 이오리는 입을 반쯤 벌리고 굳어 버렸지만, 지금은 이마의 주장이 격하다. 이마는 입만큼이나 의사를 말한다. 이마 say "더 앞으로, 더 앞으로".

 "유난히 이마가 허전하네. 그보다 뭐지, 신기하게도 그리움이 북받쳐 올라오는 느낌……."

 이오리가 감개 깊다는 듯이 리본에서 삐져나온 몇 가닥의 앞머리를 살짝 살짝 건드렸다.

 "이오리 짱도 엄청 귀여워요~! 저기, 저한테도 묶어 주세요!"

 진심으로 재밌어하는 야요이의 웃음을 보고 있으려니, 고민하던 것도 조금 가벼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난 놀기 위해 이 학원에 온 건 아니지만…….'

 머리 만지는 걸 허락해 주는 친구는, 분명 자신이 자신의 손으로 얻은 것이다. 그리고 머리를 만지고 싶다고 생각할 만한 친구도.

 "정말, 이제 자기만 하면 됐는데."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오리는 웃음이 넘치지 않게 주의하면서 리본을 받아, 야요이 뒤로 돌아 갔다.

 얼굴을 가까이 대자, 코에 한가득 야요이 머리카락의 포근하고 달콤한 냄새가 퍼져서 머리가 둥실 둥실 행복한 기분이 든다.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마약이란 건 이런 기분일까.

 '핫, 혹시 아버지는 여기서 비밀리에 마약 재배를!?'

 아니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닌가. 그리고 이건, 아직 생각해도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야요이 머리카락을 부드러운 손길로 빗어 정리하면서 이오리는 생각한다.

 '일단은 할 수 있는 일부터 해야지. 난 반드시 이 학원에서 톱이 될 거야. 치하야, 너한테도 안 져. 그리고 야요이는――'

 조금 떨어진 방 안에서, 키사라기 치하야는 재채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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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카와즈입니다. 이번에도 뭔가 길고 긴 놈을 가지고 왔습니다. 번역이 끝났으니 아이커뮤에도 올립니다.

각 챕터가 짧은 경우가 많아서 몇 개씩 합쳐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즐겁게 읽어주시면 기쁘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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