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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맨발 그대로의 사랑이었습니다. -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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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10, 2015 20:57에 작성됨.

그것은, 맨발 그대로의 사랑이었습니다.

11. 0과 0 사이, 혹은 원점

 

 넓은 창에서 들어오는 노을빛이, 고급스런 수트를 입고 마찬가지로 고급스런 의자에 앉은 남자의 등을 붉게 물들였다.

 그가 짜증나는 것처럼 양 손으로 가지고 놀고 있는 건 트럼프 다발이다. 둘로 나눈 그것을 책상에 눌러 굽혀, 엄지손가락으로 튕기듯이 셔플. 플라스틱제 트럼프가 쓸려서 겹쳐지는 가벼운 소리가, 혼자 있기엔 넓은 공간――대형 예능 사무소 961프로덕션 사장실에 작고 작은 진동을 만들었다.

 생각에 잠긴 남자 귀는 그 소리를 안 듣고 있다. 책상 표면을 무력하게 두드릴 뿐인, 들을 필요도 없는 공기의 흔들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드는군."

 방의 주인, 쿠로이 타카오는 언짢은 듯이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물론 트럼프가 어떻다는 얘기가 아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숙적의 얼굴.

 "타카기 자식, 또 요즘 잘 나가는 것 같더만. 며칠 전엔 아마미 하루카와 미키 짜――호시이 미키도, 할리우드에서 돌아왔다고 하고. 분하지만 영화 촬영은 무사히 크랭크업을 맞이했다고 봐야 하겠지."

 끝을 모르고 점점 성장해 가는 짜증나는 사무소 소속 얼굴들이, 쿠로이를 비웃듯이 머릿속에서 히죽이고 있다. 생각해 보면 그녀들은 늘 웃고만 있었다. 예능계를 얕보고라도 있는 건가.

 손 안에서 듣기 좋은 소리를 내면서 트럼프가 다시 한 뭉치가 되어 가지만, 그런 걸로 쿠로이의 마음은 풀리지 않았다. 정말로 짜증나기 이를 데 없다. 오랜만에 뭔가 방해 공작이라도 할까 생각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주피터라는 우수한 말을 내보냈기 때문이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게도 지금 쿠로이 손에 765프로를 상대할 만한 아이돌은 없다. 어쩔 수 없이 쓸 수 있는 수는 한정적이다.

 "젠장."

 신사답지 않은 말을 뱉으면서 뒤집혀 있던 트럼프 다발로 책상을 쳤을 때였다.

 내선 착신음이 사장실에 울린다.

 "――나다."

 "바쁘신 와중에 죄송합니다. 사장님과 얘기를 하고 싶다는 분이 계십니다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내게 면회 예정은 없다. 돌려보내."

 "알겠습니다."

 접수 여성의 목소리에 지긋지긋해하면서 수화기를 되돌려 놓으려다, 문득 생각한다.

 "……잠깐. 일단 그 녀석의 요건만 듣지."

 "네. 『765프로 아이돌의 재밌는 사진이 찍혔습니다. 나리한테도 나쁜 얘기가 아닐 걸요.』――라고 합니다."

 "마음이 바뀌었다. 들여보내."

 이번엔 수화기를 원래 자리에 놓고, 쿠로이는 내심 싱글벙글했다. 역시 감은 틀리지 않았다.

 트럼프 산에 한 손을 올리고 옆으로 밀어서 부채꼴로 편다. 그 중에서 적당히 다섯 장 카드를 뽑아, 한 번에 전부 뒤집었다.

 나타난 건 전부 조커.

 "큭큭큭…………. 하핫핫핫!! 이번에야말로 네 아이돌들을 밟아 주마, 타카기!"

 못된 웃음을 지으면서 가십 기자가 문을 두드릴 때까지, 쿠로이의 웃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자, 그럼, 일요일 밤의 골든! 오랜만에 765 전원이 모였어요! 생방임까~~~~"

『레볼루션!!』

 하루카의 오프닝 멘트에 맞춰서 오른손을 번쩍 든다. 방청자들도 포함해서 스튜디오가 하나가 된다. 이전엔 버라이어티 방송이라고 싫게 생각했던 적도 있지만.

 카메라에서 시선을 돌려서, 옆에 앉은 하루카와 미키를 본다. 매주 편안한 이 공간에 둘이 있는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다. 그녀들이 돌아왔단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

 "갑작스럽지만, 신 코너부터. 타이틀은, '너희들, 그건 라디오에서 해!'예요!"

 촬영이나 음향 스태프의 표정까지 풀어지게 만드는 웃음을 뿌리면서, 하루카가 오른손을 크게 돌려서 등 뒤의 모니터를 가리켰다. 거기에 나온 코너 명을 슬쩍 보고, 미키가 작게 하품을 했다.

 "아후. 잘 모르겠는데 이 코너는 뭐야?"

 "미키, 대본은 잘 읽어 두자구……."

 미키의 페이스에 휩쓸리기 시작해서 당황하는 하루카 대신에, 내가 첫 코너를 이어받게 됐다.

 "음, 둘이 오랜만에 일본에 돌아왔으니까, 저쪽에 있던 동안에 쌓인 이야기도 있을 거 아냐. 그래서 시청자가 보낸 사연을 바탕으로 평범한 토크를 한대."

 "아, 고마워, 치하야 짱. 분명 그거면, 굳이 TV에서 할 필요는 없긴 하네."

 "뭐, 이번엔 이렇게 셋이 모인 기념편이니까, 가끔은 좋지 않을까. ……다시 한 번, 하루카, 미키, 어서 와."

 나를 따라서, 관객석에서도 "어서 와~!"하는 따뜻한 성원이 나왔다. 미키는 "고마워~."하고 싱긋 웃었고, 하루카는 부끄러운 뜻이 목 뒤를 긁었다.

 "그럼 두 사람에 대한 질문이 주로 나올 테니까, 내가 읽을게. 첫 사연은……생방임까 네임 '리틀 매치 보이'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미키 상, 치하야 상, 하루카 상,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두 분을 다시 생방임까에서 보게 돼서 기쁩니다. 영화 예고편도 봤는데, 특히 미키 상이 연기하는 에리가 너무 귀여워서 넋을 잃고 봤습니다. 어떻게 그런 귀여운 표현을 할 수 있는 건가요?』……래."

 "으음, 미키가 원래부터 귀여워서 그런 거라고 생각해."

 "……네, 그럼 다음 사연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어, 잠깐만. 이 코너, 그렇게 막 진행해도 되는 거야!? 좀 더 얘기하고 해야 하지 않아?"

 "생방임까 네임 '납빛 청춘'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하루카 짱, 미키 짱, 치하야 짱, 생방임까~?』"

 "생방임다~."

 "『영화 촬영 수고 많으셨습니다! 할리우드쯤 되면 규모도 크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뒷이야기 같은 게 있으면 들려주세요! 하루카 상, 뭔가 없나요?』래."

 "으음, 뒷이야기라. 분명 여러 가지 있었지, 미키?"

 "그랬지. 아니, 큰일이었던 건 촬영 자체보다도 성가신 하루카 때문이었어. 전혀 연기에 집중하지도 않고, 멍하니 있고. 그 뿐인 줄 알았더니, 치하――"

 "그만 그만 그만! 그거 털어놓으면 안 되는 얘기지!? 치하야 짱, 다음!"

 "괜찮아? 아직 아무것도 대답 안 한 것 같은데."

 "막 진행하자, 그러자."

 "알았어. 그럼 세 번째 사연은, 생방임까 네임 '사석에서 이오링에게 밟히고 싶어'님께서 보내주셨습니다."

 "욕망을 숨김없이 흘려버리는구나."

 "『오랜만에 평소의 세 명이 메인 퍼스널리티인데요, 요 3개월 정도 치 짱은 외롭지 않았나요?』……어리석은 질문이네. 그런 생각을 할 리가 없잖아."

 "그, 그렇지~"

 "그래? 둘이서 사회할 때, 가끔 치하야 상이 멍하니 있었다고 유키호가 그랬어."

 "그, 그건……아마, 좀 지쳐서 그랬을 거야."

 "그리고 히비키는, '머나먼(하루카나)'이란 단어가 나왔을 뿐인데 어깨를 들썩였다고 그랬어. 하루카 때문에?"

 머릿속에 경보가 울린다. 하루카는 히죽히죽 웃고만 있다. 남 얘기도 아니잖아.

 "다음으로 가자, 다음."

 당황을 감추면서 대본을 봤을 때였다.

 "응? 뭐야~? 추가? 이거 읽으면 돼?"

 하루카를 낀 반대편, 미키가 스태프에게 뭔지 모를 종이를 한 장 받아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치하야 상, 먼저 이것 좀 읽을게~. 생방임까 네임 '쎅찌 쌍둥이의 언니'……이게 뭐야, 읽기 힘들어!"

 "하루카, 지금 당장 미키한테서 그걸 뺏어!"

 "어? 어어?"

 "으음, 의역하면, 『하루룽이 지금 앉은 자리, 한 가운데가 아니라 미묘하게 미키미키보다 치하야 언니한테 가깝지 않아?』인가? ……무슨 말이야?"

 "무슨 말일까. 다음으로 넘어가자."

 "아~, 알겠다! 하루카, 온에어 중에도 조금이라도 치하야 상 옆에 있고 싶어서 그러지!"

 "어? 별로 난…………어라? 정말로 의자 위치가 표시된 데에서 꽤 떨어져 있어! 왜!?"

 당황하면서 급하게 의자를 원래 위치로 되돌리려고 하다가.

 그 동작을, 거의 앉은 그대로 하려고 했던 게 잘못이었다.

 갓샹! 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하루카가 화면에서 사라졌다.

 "하루카!"

 "몰랐는데, 하루카가 미키하고 거리를 두려고 했다니 말야."

 "그럴……생각은……. 난 미키도 좋아해……."

 쓰러진 채로 하루카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테이블 뒤에 있어서, 지금 TV엔 유감스럽게도 그 모습이 비치지 않을 것이다. 이건 이거대로 왠지 재밌다.

 "그래. 하루카는 그렇게 날 좋아했구나."

 "어, 아니, 그게 아니라."

 "……상처받았어."

 "아, 그러니까, 엄청 좋아하는데!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벌떡 일어난 하루카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다시 테이블 밑으로 가라앉았다. 미키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재밌어 보이네, 하루카."

 "왠지 코너 취지가 바뀐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한 나를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미키는 왠지 삐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코너 이름부터 바꿔야겠어. '너희들, 그건 집에서 해!!'그런 느낌으로."

 "자, 자 자~! 그럼 다음 코너로 갈게요! 이어서, '히비키 챌린지'!"

 부활한 하루카가 소리치지 영상이 바뀌었다. 평소였으면 스튜디오 쪽은 조금 이완된 분위기였을 텐데, 미키 얼굴은 뾰로퉁한 그대로였다.

 "하루카."

 "응?"

 "치하야 상도."

 "왜?"

 "둘 다 닭살 떠는 건 자유지만, 미키를 따돌리는 건 너무해."

 "그러니까 있지, 의자는 내가 한 게 아니라……."

 "맞아, 이번 건 하루카가 잘못했어."

 "치하야 짱까지 너무해!?"

 "그건 일단 두고, 물론 미키랑도 다시 이렇게 방송 찍을 수 있어서 난 기뻐."

 "그럼 됐지만. 미키도 좀 심하게 놀렸다고 생각해."

 "좀 봐줘……."

 테이블에 엎어지는 하루카를 보면서, 미키가 재밌다는 듯이 웃는다.

 간만에 세 명이서 하는 생방임까 수록. 물론 요 3개월, 누구와 사회를 하든 재밌었지만.

 다시 한 번 돌아왔다는 실감이 든다.

 바로 며칠 전, 미키보다 이틀 늦게 귀국한 하루카를 공항으로 마중 갔을 때를 떠올린다.













 맞아, 하루카 의자를 내 쪽으로 옮겼던 건, 물론 나야.

 하루카 가까이 있고 싶어서, 라기보단 조금이라도 같은 공기를 마시고 싶어서 그랬는데,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겠지.



………

……





 "치하야 짱!"

 그리운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녀가 크리스마스에 다시 할리우드로 가고 나서는 거의 매일 전화를 했으니까. 하지만 스피커 너머가 아닌 그녀의 목소리는 무척 깨끗해서, 같은 장소에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한 쪽에만 하고 있던 이어폰을 빼면서 불편하지 않은 공항 로비 의자에서 일어섰다. 저편에서 인파를 헤치고 곧장 달려오는 애타게 기다리던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에서 흔들리는 두개의 리본.

 "하루카."

 입에 담은 말이 그녀에게 전해지기까지, 이제 1초조차 걸리지 않는다. 그 뿐인가, 그 거리가 점점 좁혀지다가 강한 충격과 함께 0이 되었다.

 살짝 넘어질 뻔 했지만 정말로 넘어지진 않았다. 하루카가 뛰어들면서 양 팔을 등에 감아서, 떨어지는 걸 허락해주지 않는다.

 "하루카, 좀 힘들어."

 기브 업이란 것처럼 하루카 등을 두세 번 두드려도, 그녀는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놓아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좀 있지,"

 "……10퍼센트."

 "뭐가?"

 "치하야 짱 에너지."

 "뭐야, 그게."

 "꽉 찰 때까지 움직일 수 없습니다."

 로봇처럼 말하는 하루카를 보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 자세론 그녀가 볼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 이게 무슨 일인지.

 "일단 좀 놔 줘."

 "에너지가 꽉 찰 때까지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건 아까 들었어. 어떻게 하면 충전되는데?"

 기가 막혀서 물어보자, 하루카는 드디어 얼굴을 들었다.

 날 올려다보고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입을 기묘한 모양으로 오므리고는,

 "츄~."

 이상한 목소리로 울었다.

 "뭐?"

 "……자, 잔뜩 먹자."

 "이상하게 얼버무리려고 하지 마."

 "치하야 짱이 잘못한 거야! 안 들린 거야, 뭐야? 싫어서 그래!?"

 "잘 안 들렸단 말야. 다시 한 번 말해줘."

 "……………………츄~."

 "하루카는 햄조의 울음소리도 낼 수 있게 됐구나."

 "그렇긴 한데 아니야!"

 "농담이야. 일단은 전해졌어."

 "그럼 빨리! 컴온!"

 "하지만 안 돼."

 "어째서!!"

 10퍼센트인 하루카가 갑자기 물러나서, 원망스럽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런 데서 키스라니, 말도 안 돼.

 "하루카와 처음 하는 키스는, 완벽한 시추에이션과 그에 맞는 장소에서 할 거라고 마음속으로 정했는걸."

 "아, 사람들이 보고 있어서란 상식적인 판단이 아니었구나."

 필사적으로 진지한 표정을 지으려고 하지만 뺨이 물드는 걸 감추지 못하는 하루카도 귀엽다.

 "그보다도 하루카가 상식을 벗어난 거 아냐? 여긴 일본이야. 좀 오랜만에 만났다고 키스를 해 달라니, 미국 물이 심하게 들었어."

 "응, 태클을 건다면 거기부터지. 뭐어, 월드 와이드한 지금 하루카 상에겐, 키스 같은 건 그냥 인사에요, 인사."

 "……설마."

 "응?"

 "다른 사람하고 하진 않았겠지?"

 "아, 잠깐, 무서워, 안 했어 물론."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을 생각은, 없는데 말이지?

 "……정말로?"

 "진짜라니까! 입술은 노 터치, 노 프라블럼! ……그야 미국이니까 뺨에 가볍게 하는 건,"

 "있었어?"

 "있었던가~ 어땠더라~"

 "하루카, 하나 말해 두겠는데."

 "네."

 "일본에서 다른 누군가가 그렇게 하면――"

 "알고 있어요! 전 치하야 짱만의 거에요!"

 "좋아."

 "있잖아, 전에도 생각했는데, 혹시 치하야 짱, 질투심 깊어?"

 "……글쎄."

 질투. 어떨까.

 ……모르겠다.

 지금까지 가족 말고는 이렇게 소중한 사람이 없었고, 그 사람이 손을 뻗으면 만지는 걸 허락해 주고, 하지만 언젠가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싫다.

 하루카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지만, 믿고 있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 붓 끝에서 떨어진 먹물처럼 무언가 새까만 것이 마음속에 퍼져나갔다.

 하지만 비좁고 추한 내 '사랑'에는, 왠지 그게 잘 와 닿았다. 느끼고 말았다.

 어느샌가 내려가 있던 시선을 조금 되돌려서, 그래도 낮은 시선인 채로 물었다.

 "만약 그렇다면……. 하루카는, 싫어?"

 "으음, 어떨까. 정도에 따라 다를지도 모르지만, 좀 기쁠지도."

 "기뻐? 왜?"

 "……비밀."

 어이없어하는 내 눈 앞에서, 하루카는 왠지 간지럽다는 듯이 웃었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 하루카는 그것도 포함해서 날 용서해 줄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걸, 받아들여 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는 하는데. 어떨까.

 그런 하루카는 어느새 웃음을 집어넣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새삼스럽지만, 치하야 짱만 왔어?"

 "나만으론 부족해?"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그건 그거대로 좋은데, 전엔 다른 애들 때문에 여러 가지가 엉망이 됐으니까, 뭔가 의표를 찔렸다고 할까."

 "미키 때는 시간이 빈 애들이랑 다 같이 마중 갔었는데. 프로듀서가, "이번엔 방해꾼들은 들어가 있을 테니까 치하야 혼자 다녀오지 않을래?"라고 그래서."

 "아, 그렇구나."

 "그러고 보면 하루카는? 미국에서 돌아오는 것 치고는 짐이 작은데."

 "갈 때랑 똑같이, 거의 다 집에 직접 보내 버렸어. ……참고로, 하룻밤 묵을 짐은 있는데. 이 다음 치하야 짱 일정은?"

 "오후는 오랜만에 완전히 오프야."

 "그렇구나, 그럼,"

 "응."

 "그 전에 사무소 들러도 돼? 누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다녀왔다고 하고 싶어. 기념품도 두고 싶고."

 "당연히 괜찮지. ……그 가방, 내가 들게."

 "고마워~. 그럼 난 자유로워진 손으로 치하야 짱의 손을 들어 줄게."

 "……정말이지."

 "아~, 에너지, 30퍼센트."

 나란히 걸으면서, 옆에서 망가진 로봇 같은 소리를 내는 하루카를 보고 쓴웃음을 짓는다.

 그런 나도.

 급속도로 망가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만나게 돼서.

 여러 가지 생각이 장대비처럼 마음속에 차올라서, 물이 불어나서.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이 얇은 벽이 무너진다면, 난, 우리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맞잡은 손만으로 자신은 무척이나 만족하고 있으니, 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다.

 단지 우리들이 이 날 사무소에 들렀다가 어디로 갔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





 그날 사무소를 나온 뒤에 걸었던 것과 같은 길을.

 그날과 마찬가지로 하루카와 나란히 걷는다. 오랜만에 셋이서 사회를 맡은 생방임까 수록에서 몇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공항에서 있었던 일로부터 며칠밖에 안 지났는데 더 추워진 듯한 느낌이 드는 1월 말의 밤.지금 우산을 계속 두드리는 비가 눈으로 바뀌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다.

 "우헤에~. 춥다아. 하지만 어차피 내릴 거면, 비 보다 눈이 좋은데."

 옆에 있는 하루카도 똑같은 생각을, 하지만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역에서 내려서 다시 바깥의 찬 공기를 쐰 하루카 코끝이, 어느샌가 발그레해져 있었다.

 "그래? 비든 눈이든 별로 차이는 없잖아."

 "모르고 있구나, 치하야 짱. 재미가 달라."

 "말씀대로 영문을 모르겠습니다만."

 "비가 내려도 눈사람은 못 만들잖아."

 어린애 같은 말을 하는 하루카는 원망스럽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기가 내쉰 하얀 숨이 왠지 재미있어서, 추위로 얼어붙은 뺨의 근육이 조금 풀어진 걸 느꼈다.

 "어차피 이 정도 비가 눈이 돼도 쌓이진 않을 거야."

 "그치만 있지, 가랑비라도 우산은 쓰지만 가루눈 정도면 우산 없이 나가고 싶어지지 않아?"

 "안 그래. 비든 눈이든 결국 젖어 버리잖아."

 "전혀 달라. 옷에 눈이 살짝 살짝 쌓이는 뭐라 할 수 없는 기쁨을 가르쳐 줄 테니까, 다음에 눈이 내리면 우산은 몰수할 거야."

 "좀 봐 줬으면 좋겠는데."

 입으론 그런 소리를 하면서도 내심 조금 기대되는 자신을 깨닫고, 또 조금 뺨이 풀어졌다. 비든 눈이든 상관없지만 하루카가 있다면 그거면 됐다. 빨리 눈이 와 주지 않을까.

 "하지만 하루카, 보통 눈이 더 곤란하지 않아?"

 "왜?"

 "일단 사회인으로서 자각은 가지는 게 어때……. 쌓이면 교통기관이 멈추잖아. 일하러 못 가게 돼."

 "아~. 확실히 우리들한텐 꽤 곤란하겠다. 하지만 예들 들어서 오늘 밤이면 별로 문제없지 않아? 치하야 짱네 집이면 어디든 별로 안 멀고, 어떻게든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

 "나, 오늘 밤 자고 가도 된다고 안 그랬는데."

 "어라, 하루카 상, 막차로 쫓겨나는 거야?"

 "안 돌려보낼 거야."

 "……흐응."

 하루카가 고개를 숙였다. 숨기려고 노력은 하는 것 같지만, 입가가 헤벌쭉해져서 기분 나쁘다.

 일본에 돌아온 날도 당연하다는 듯이 하루카는 우리 집에서 자고 갔다. 입고 있던 옷을 또 당연하다는 듯이 세탁기에 던져 넣고 다음날 집으로 돌아가 버려서, 결국 내가 말리고 개서 장롱 빈 곳에 넣어 두게 됐다. 앞으로도 하루카 물건이 지극히 당연하단 듯이 우리 집에 늘어갈 것 같은데……그건 그거대로, 상관없을까. 하루카에게 집 열쇠를 준 지 이제 곧 계절이 한 바퀴 돌 즈음이다. 이제 와서 뭘. 내가 그다지 물건을 들이지 않는 사람이라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한다. 나 혼자서 살기는 너무 넓은 지금 집. 물론 모씨를 위해서 얻은 집은 아니지만, 지금 와선 하루카에게 내 공간을 침식당하는 게 기쁘다고 할지, 그게 당연하게 느껴진다고 할지, 어딘가 만족되어가는 충실감을 느낀다고 할지――그만두자.

 뭐라고 할까,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분하다. 인정하는 게 아니꼽다.

 그렇지만 역시, 이 이상 점유될 리 없을 거라고 늘 생각했던 내 안팎의 하루카를 위한 리소스가, 계속해서 덮어쓰기 되면서 계속 팽창해 가는 것 같은 느낌이 낯간지러워서――

 난 모씨와 똑같은 칠칠치 못한 표정이 되지 않도록, 교대로 내밀고 있는 내 발에 시선과 의식을 집중했다.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가끔 한쪽 발이 작은 웅덩이를 밟는다. 거의 같은 간격으로 옆에서도 발소리가 끊이지 않고 겹쳐져 들려온다. 하루카가 옆에 있다. 내 옆에서 아주 조금 앞을 걷는 하루카의 갈색 신발을 눈을 감아서 시야 밖으로 밀어낸다고, 해도 하루카가 거기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소리가 들린다. 여기서 귀까지 막는다고 해도, 하루카의 머리에서 풍기는 달콤한 향기로 그녀가 거기 있다는 걸 인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지금은 비가 오고 있으니 무리일까. ……한번 해 보자.

 난 모든 신경을 코에 집중시키고 숨을 참――

 으려고 했을 때.

 어라.

 하루카가 옆에 있다. 그건 됐다,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알고 있다.

 그런데 난 왜 하루카가 옆에 있는데도 혼자서 빙빙 맴도는 생각을 하고, 자기 신발 같은 걸 바라보고, 결국에는 냄새를 맡으려고 하고 있는 걸까.

 하루카가 옆에 있는데. 대화로든 뭐로든 그녀와 의식을 공유하고, 꽃과 같은 그녀의 웃음을 시야 한가득 피워서 사랑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내 코 같은 건 일단 아무래도 상관없다.

 퍼스트 스텝. 시선을 하루카에게 향해 본다. 추워서인지, 어느샌가 코 끝 뿐만 아니라 뺨까지 뜨거워 보일 정도로 빨개진 채로 입을 꼭 다물고 있다. 그렇다, 입을 꼭 다물고 있다. 수다쟁이 하루카가 이야기꽃을 피우질 않는다. 그래서 이런 침묵이. 내가 혼자서 우스운 일을 하게 됐다는 말이다.

 왜 이렇게 됐지. 왜 이렇게 된 거지.

 마지막에 어디서 대화가 끊겼더라. 가까운 기억을 되돌려 본다.



『어라, 하루카 상, 막차로 쫓겨나는 거야?』

『안 돌려보낼 거야.』

『……흐응.』



 재생 완료.

 분석 처리.

 이끌어 낸 결론은…….

 "아앗!?"

 "왜 무슨 일이야 치하야 짱!?"

 갑자기 큰 소리를 내서 놀랐는지, 하루카가 어깨를 움찔하면서 이쪽을 봤다. 하루카의 우산이 흔들리면서 내 우산과 부딪혀서 물방울을 튀겼다. 하마터면 젖을 뻔 했다.

 "저기 있지, 하루카……. 그런 건, 우리들한텐 아직 이르단? 생각이 드는데?"

 "무슨 말이야, 정말로."

 치켜뜬 하루카의 눈에선 얼버무리는 건지, 정말로 짐작이 안 가는 건지를 읽어낼 수가 없다.

 하지만 생각을 좀 해 봐.

 지금 우리들은, 그, 연인 사이고.

 그런 우리들에게 지금부터, 자고 가는 이벤트가, 있을 거고.

 ……또 하나. 떠올려 보자.

 조금 전에 하루카는 눈 눈 시끄럽게 굴었다. 연상되는 건 하얀 색.

 그리고 하루카의 상징, 꽃과 같은 웃음.

 1개월 쯤 전이었을까. TV에서 봤던 것 같다. 하얀 아네모네의 꽃말. 그건 '희망', 그리고……'기대'.

 "그러니까 그런 걸 기대해도 난 방법이나 뭘 어떡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

 "좀 진정해 주세요, 치하야 짱 상!?

 그래, 진정하자. 그러고 보면 조금 전까지 하루카는 하얗다기 보단 새빨갰다. 분명 빨간 아네모네의 꽃말은――

 "난 하루카한테 사랑받고 마는구나……."

 "저, 지금 치하야 짱의 머릿속 회로가 어떻게 된 건지 엄청 알고 싶은데요."

 "그건 안 돼."

 "역시 정정. 들어도 이해 못할 것 같고 뱀이 나올 것 같으니까 그만둘래."

 "하루카."

 "응?"

 "좀 진정하자."

 "아까 그러자고 했잖아!?"

 어이없어하면서 놀란다는 신기한 일을 해내는 하루카한테서 시선을 돌리고 앞을 본다.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지는 빨간 신호가 우리들 발을 멈추었다.

 확실히 오늘 난, 초조해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뭐에 대해서일까.

 지나가는 차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고, 하루카는 생각에 잠기는 내 옆얼굴을 신기하단 듯이 바라본다. 그렇다, 이렇게 하루카는 옆에 있다.

 그거면 됐을 텐데.

 하루카와는 바로 며칠 전에 같이 잤었다. 이제 와서 당황하고 긴장하고 할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평소와 같이. 그거면 됐을 거다.

 ……된 걸까.

 연인이란 이런 게 맞는 걸까.

 조금 생각하고, 이거란 걸 깨달았다. 위화감의 정체는.

 난 하루카의 좋은 연인이 되어 있는 걸까.

 "있지, 하루카."

 하루카의 눈을 똑바로 본다.

 "우리들, 좀 너무 건전한 거 아닐까?"

 "갑자기 무슨 말이야……. 아, 좀 알 것 같아."

 그렇구나, 아까부터 치하야 짱은, 중얼중얼.

 하루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은, 우산이 부딪힐 만큼 가까이 있는 내 귀까지 닿지 않았다.

 하루카와 지금의 관계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같이 잤던 날 밤. 간단한 식사와 샤워란 최소한의 동작만 끝낸 하루카는, 내가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땐 이미 꾸벅 꾸벅 졸고 있었다. 장시간 비행을 마친 직후고, 그야 많이 지쳤겠지. 바로 자라고 하자 하루카는 고개를 떨구듯이 끄덕이고 "시차 보케나스~"라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하면서, 어기적어기적 침대에 기어들어갔다.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들려온 잠꼬대는 "나스시루 축축해~". 그 행복하게 자는 얼굴에 입을 맞추고 싶어지는 충동과 필사적으로 싸우고서 승리한, 아직 머리도 다 마르지 않은 나.

 그렇다, 우리들이 연인이란 관계가 되고 1개월은 지났는데, 우리들은 아직 키스조차 한 적이 없다.

 물론 마땅한 때에 마땅한 장소에서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니 잘 때 덮친다는 짓도 안 했는데. 입술은.

 어떤 걸까. 이건 일반적인 세간에서 볼 때 늦는 편일까. 아니면 아직 이른, 걸까. 요 1개월은 거의 계속 초원거리 연애였고, 게다가 우리들은 둘 다 여자니까 만약 일반적인 척도를 안다고 해도 같은 잣대로 재도 되는 건지 모르겠지만.

 우리들의 마음이 서로 통했던 크리스마스 이브 밤, 분명 키스를 할 뻔 했다. 공항에서 다시 만났을 때도 하루카는 나를 원해 주었다.

 실제로는 어떨까. 지금 하루카는 나를 얼마나 원하고 있는 걸까. 뭘 원하고 있는 걸까.

 하루카가 바라는 연인인 '치하야 짱'은 어떤 걸까.

 친구가 아니라 연인이 된 이 관계 이상을 바랄 것도 없다. 하루카와 이렇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고, 됐으면 된 대로 골 테이프를 끊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이걸로 겨우 스타트 라인에 서게 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관계성의 거리가 제로가 된 셈인데 이 이상 가까워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왜 난 이 이상 가까워지려고 하는 걸까.

 정말 억지를 쓰게 됐구나 하고, 어이없음 반 경멸 반인 하얀 한숨을 쉬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런 얍삽함 안에서 작지만 억누를 수 없는 기쁨 비슷한 것을 발견하고, 조금 자신에게 진절머리가 났다.

 내가 내게 정이 떨어지려는 그 옆에서, 하루카는 하루카대로 뭔가 생각에 잠겨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유난히 긴 신호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한 번 신호가 바뀐 걸 눈치 채지 못한 것 같다. 나아가려고 해도 횡단보도를 지나가는 자동차들이 방해를 해서 어쩔 수가 없다.

 지금 하루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른다. 물어보는 것도 왠지 꺼려지고, 분명 물어봐도 하루카는 대답해 주지 않을 거란 묘한 확신이 있다.

 대신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 '지금'과 '앞으로'에 대한, 불안인지 기대인지 나도 잘 모르는 막연한 것을 어떻게 하루카에게 정확하게 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있잖아, 하루카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하루카에게, 그리고 나에게 도망칠 길을 남겨두고 물어보는 게 고작이었다. 어떻게든 받아들일 수 있고, 어떻게든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하루카는 숙이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나는――"

 그녀의 시선 끝에서 신호등이 파랗게 빛났다. 곤란한 것처럼 막연한 웃음을 띠고 하루카가 나를 본다.

 "――파란불이야, 치하야 짱. 가자?"

 예상을 뒤집고 하루카는 아무것도 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발이 횡단보도를 밟는다. 세 번째 흰 선을 넘을 때 쯤, 자신이 멍하니 서 있단 걸 깨닫고 하루카 뒤를 쫓았다.

 다시 옆에 나란히 서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는지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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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는 번외편입니다. 작가님 왈, 하루치하가 닭살 떠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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