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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맨발 그대로의 사랑이었습니다. - 10-2

댓글: 4 / 조회: 1492 / 추천: 6



본문 - 09-10, 2015 20:27에 작성됨.

치하야 짱이 그렇게 자기 멋대로 군다면.

 나는.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진짜!!!!!!!!"

 나도 내 멋대로 굴 거야!

 빗소리를 지우는 정도가 아니라, 지구 반대편까지 닿지 않을까 싶은 소리를 지르고 일어섰다. 미키 반대편 이웃 분, 방에 계셨다면 죄송합니다.

 쓰레기통에 던져두었던 구깃구깃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손에 든다. 시계를 본다. 그 근처에서 택시를 잡을 수 있으면 공항까지 1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안 늦는다.

 지갑과 여권을 가방에 쑤셔 넣고 세수도 하지 않고 옷만 갈아입은 채로 신발에 양 다리를 집어넣었다. 빨간 우산을 들고 문을 벌컥 연다.

 누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알 바 아니다.

 뭐가 "잘 가."냐. 치하야 짱은 엄청 바보다.

 멋대로 날 좋아한다고 하고. 멋대로 내 행복을 정하고.

 이젠 눈을 돌릴 수 없다.

 내 사랑은.

 치하야 짱과 다르지 않다.

 내 행복은.

 치하야 짱 없이는 절대로 성립하지 않는다.

 엘리베이터로 돌진해서 1층까지 내려왔다. 현관을 뛰어나가는 나를 보고 카운터 언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역시 이상하려나, 지금 나는.

 이상하겠지.

 하지만 그래도 돼.


 다른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다. 난 날 위해 사는 거니까.



 머리 위로 든 우산에 비가 투둑 떨어졌다. 이런 날씨도 이젠 지긋지긋하다.

 그럼 어떡하면 좋을까, 그건 간단한 얘기다. 여기서 떠나면 된다. 국경 그 너머라고 해도.

 치하야 짱이 있는 곳에 내가 간다고 해도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다쳤다는 치하야 짱이 낫는 데엔 내가 있고 없고는 상관이 없다.

 그래도 그녀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날 봤으면 한다.

 손을 잡을 수 있는 곳까지. 말을 나눌 수 있는 거리까지 가자.

 있는 힘껏 땅을 찬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을 향해.

 결국 난 깨닫지 못했다.

 일이 이렇게 될 때까지,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깨닫고 말았다.

 치하야 짱이 없는 내일. 진짜 정말로, 모든 것이 늦어 버린 미래. 아주 잠깐 머리를 스친 그 풍경은 절대로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니다.

 역시 무서워. 미래를 그린다는 건. 언제 주변이, 나 자신조차 바뀌어 버릴지 모르니까.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원하지도 않고, 미래에서 후회할지도 모르는 자신이 훨씬 더 싫다는 걸 깨닫고 말았으니까.

 있지, 치하야 짱.

 미안해. 역시 나도 어쩔 수가 없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널 좋아해.

 네가 나 말고 다른 누군가를 위해 발렌타인 초콜릿을 만드는 생각을 했을 땐, 뭔가 싫다는 기분이 들었어.

 내 생일에 너희 집 열쇠를 받았을 땐, 매일같이 여기로 돌아오고 싶다고 생각하고 말야. 막연히 상상한 함께 지내는 시간들.

 그래도 만나고 싶으니 만나러 간다는 건 역시 좀 아닌가 고민하기도 하고. 딱히 하고 싶지도 않은 공부를 이유로 너희 집에 가기도 하고.

 익숙하지 않은 유카타를 입고 널 불러냈을 때 내가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모르지. 조금이라도 귀엽게 보이고 싶어서. 난 지금이라면 알아, 그 날 네가 나한테 차갑게 대했던 이유. 그 괴로움을, 상냥함을 깨닫지 못해서 미안해. 그래도 난 그날 밤, 아무리 아프더라도, 괴롭더라도, 네 곁에 있고 싶다고 분명히 바랐어.

 모든 것이 바뀌어 버린 그 할로윈날 밤도.

 한동안 못 만나게 될 나를 조금이라도 네 특별한 곳에 두고 싶어서. 그 이상으로, 그저 만나고 싶어서. 장난치면서 꼭 끌어안고.

 그 순간에 말이야, 이런 말 얼굴 보고는 못 하지만.

 나, 입술로 치하야 짱을 느껴 보고 싶다고, 분명히 생각했어.

 볼에 갖다 대면 어떨까, 그래도 역시 입술이 좋은데, 하고.

 좀 더 가까이 널 갖고 싶어서. 내 전부로 널 끌어안고 싶어서. 네 전부를 새겨 줬으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하고.

 그런 것들 전부가 다른 거라고 생각했어. 이건 그런 감정이 아니라고. 단지 좀 좋아하는 것뿐이라고 자신을 납득시킨 척을 하면서, 진짜 마음에서 계속 눈을 돌리고.

 하지만 그것도 끝이야.

 이젠 무리야.

 누가 아니라고 해도. 네가 그만한다고 해도.

 이게 내 사랑이야.

 아직 아무것도 전하지 않았어. 시작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끝나지도 않았을 거야.

 모든 것을 치하야 짱에게 털어놓고 나면, 이번에야말로 지금으로 돌아올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거면 됐다. 내가 바라는 건 그 너머에 밖에 없으니까.

 ‘하루카, 미래는 지금의 연장선이야. 그러니 지금을 소중히 하렴. 후회가 남지 않도록.’

 아레나 라이브 합숙날 밤, 프로듀서님이 했던 말이 뇌리에 떠오른다.

 지금은 안다. 그 말의 진짜 무게, 미래를 보는 것의 귀중함, 그리고 그걸 목표로 하는 내가 정말로 걸어야 할 길.

 달려라.

 달려라.

 달려라.

 더 빨리.

 치하야 짱의 포기도.

 내가 멋대로 그었던 한계선도.

 필요하다면 상식이든 뭐든.

 모든 것을 뛰어 넘을 수 있게.

 어찌해도 없어지거나 하지 않았던 이 마음도, 나 전부를, 저 하늘로.


 그저,

 네가 있는 곳으로.



………

……






 "여기면 됐어요!"

 기세 좋게 일어나다 차 천장에 머리를 부딪쳤다. 쿵 하는 소리와 내 목소리에 놀라서, 브레이크를 밟던 택시 기사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아파라.

 뒷좌석에서 요금 미터를 확인한다. 으아, 다섯 자리?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오랜만에 일본 지폐 몇 장을 건네고, 아픈 머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하고 차 밖으로 나왔다.

 ……춥다. 저쪽이랑은 전혀 다르다.

 입가까지 두르고 싶은 걸 참으면서 목도리를 목에 다시 감았다. 조금 더 뛰어야 하니 산소가 부족해지는 건 싫다.

 준비를 마치고 발을 내딛으려다, 무언가 생각났다. 우산을 택시 안에 놓고 와 버렸다. 이미 차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지만, 뭐 됐다. 밤하늘을 올려다보아도, 비가 내릴 것 같지는 않다.

 옆에서 봐도 바다를 건너 왔다곤 생각하지 못할 작은 가방 하나를 덜렁거리면서 병원의 넓은 부지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전화로 프로듀서님이 입원했던 데라고 했으니까 여기가 맞을 거다. 문제는 병실. 혹시 아직 집중치료실일까. 그 뒤로 프로듀서님한테 연락도 없었고, 지금 전화해서 묻는 것보다 접수대에 물어보는 편이 빠르겠지.

 그나저나. 수백 대는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을 뛰어가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병원 입구 부근이 전부, 꽤나 반짝거리고 있다. 정면에 하늘을 뚫을 것처럼 서 있는 건, 크리스마스 트리? 별로 큰 병원에 올 기회가 없어서 그게 드문 건지는 모르겠지만 조명 장식이 돼 있는 것 같다. 더욱 스피드를 올리면서 빛나는 이세계로 뛰어들어 본다.

 조명이 비춰진 나무 사이, 순록, 눈사람 같은 것들 옆을 뛰어간다. 반나절동안 비행으로 한숨도 못 잔 머리가 흔들려서 울린다. 비일상적인 빛에 둘러싸여서 꼭 꿈속에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

 결국 환각이라도 보게 된 건가 생각했다. 계속 생각했던 사람이, 마치 눈앞에 있는 것만 같은.

 일제히 여러 색의 빛을 발하는 크리스마스 심볼. 트리 밑에서 꼭대기를 올려다보는, 긴 머리를 등까지 늘어뜨린 연약한 실루엣이 하나.

 내가 바라는 사람을 멋대로 그 뒷모습에 덧씌운 걸 죄송히 생각하면서, 그녀와 트리를 돌아 병원 입구로 가려다.

 열 걸음정도 거리를 두고 내 발이 멈추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거친 숨을 고른다.

 심장이 격렬한 고동을 계속 만들어 내는 건 전속력으로 달렸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단 2개월 못 만난 정도로 잘못 볼 리가 없었다.

 훨씬 더 긴 시간동안 같이 있었고, 그보다 더 긴 시간동안 그녀는 내 마음 한 가운데에 있었으니까.

 "치하야, 짱……?"

 떨리는 목소리로 그 이름을 입에 담자, 상한 곳이 없는 깨끗한 머리카락이 바람을 받아 휘날렸다.

 "하루, 카――? 왜……."

 돌아본 그녀의 눈이 나를 정면으로 보고 크게 뜨였다.

 음, 어디 보자.

 ……꿈이었단 결말?

 사실 현실의 나는 아직 비행기 속에 있고, 어느새 잠들어 버렸다든가 그런.

 그것 치고는 몸이 아플 정도로 춥단 말이지. 치하야 짱이 양 팔로 감싸 주면 그것도 바뀔지도 모른다.

 지금 내게 그럴 자격이 없다고 해도.

 그걸 인정하고 멍하니 서있기 위해 난 여기 있는 게 아니다.

 한 걸음을 내딛었다.

 "치하야 짱은 왜 여기 있어?"

 "……나도 잘 모르겠는데. 조금 전에 일이 끝나서 집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굉장한 속도로 차가 달려와서는. 깜짝 놀라서 뒤돌아봤더니 갑자기 급정차해서, 안에서 아미와 마미가 나와서, 영문도 모른 채 뒷좌석으로 끌려갔어. 리츠코도 운전 좀 살살 하지. 수명이 줄어든 것만 같아."

 "――뭐야, 그게."

 치하야 짱은 그렇게 말하고 한숨을 쉬더니, 내게서 눈을 돌렸다. 그 눈동자엔 당황의 빛만이 어려 있어서, 얘길 들어도 나도 뭐가 뭔지 알 수가 없다.

 "마미가 이제부터 유키호 생일 파티를 할 거고 트리 밑에서 집합이라고 했으니까, 이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도 안 오고. 리츠코랑 애들은 나머지 멤버를 데리러 가서 안 돌아와."

 "응?"

 치하야 짱이 사고를 당했단 전화가 온 건 한참 전이다. 뭔가 큰 음모에 말려든 것 같은 느낌이 가시질 않는다.

 "하루카는 아직 할리우드에 있던 거 아니었어? 누군가한테 불려온 거야?"

 "난 있지, 지금은 치하야 짱 얘기보다도 영문을 모르겠는데……치하야 짱이 차에 치였대서."

 "뭐? "

 놀랐는지 치하야 짱이 숙이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하지만 곧 불편하단 듯이 눈이 흔들리고, 또 내게서 멀어졌다.

 "오늘, 어라, 벌써 어제인가? 프로듀서님한테 전화가 왔거든. 치하야 짱이 사고를 당해서 눈을 뜨질 않는다고 그랬는데. 으음, 건강해?"

 "미안하지만 난 보는 것처럼, 그런 일은 안 당했는데――"

 설마. 멍하니 치하야 짱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유감스럽게도 난 머릿속이 엉망이라서, 왜 이런 상황이 됐는지 생각할 여유가 없다.

 '치하야 짱'말고 다른 걸 생각할 자리가 없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그건 아무래도 좋다. 눈앞에 치하야 짱이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야말로, 난 전해야만 할 것이 있다.

 "저기, 치하야 짱."

 한 발 더 내딛었다. 치하야 짱이 겁먹은 것처럼 어깨를 움츠리고, 좁혀진 만큼 거리를 벌렸다. 가슴이 아팠지만, 나와 눈을 맞추려고도 하지 않는 치하야 짱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 내가 여기 있는지 알아?"

 "프로듀서한테 속아서, 잖아……?"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게 아냐. 바로 요 전까지 치하야 짱에게서 도망쳤던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그러냐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이제 나, 결심했어. 진짜 마음에서 눈을 돌리지 않겠다고. 그 마음을 위해서라면 뭐가 됐든 전력을 다해서 열심히 하겠다고."

 "무슨 말이야?"

 "여러 가지, 정말로 여러 가지가 있지만. 먼저, 사과하게 해 줘."

 숨을 크게 들이쉬고 단번에 머리를 숙였다.

 "미안해, 치하야 짱. 계속, 계속 상처입혀서. 깨닫지 못해서. 알려고도 안 했어. 내가 상처 입는 게 무서워서……"

 머뭇거리면서 고개를 들자, 치하야 짱은 황당하다는 것처럼 날 보고 있었다. 그 입술이 여러 번 주저하다가 열렸다.

 "그날 밤 얘기라면, 사과해야 할 건 나야. 중요한 여행 전날에 그런 얘기해서 미안해. 곤란했었지? ……싫었, 겠지."

 "확실히 여러 가지로 고민하기도 했어. 그치만 있지, 전혀 싫지 않았어. 치하야 짱이 좋아한다고 해 준 거. 그렇게나 날 생각해 준 거. ……기뻤어."

 "어……?"

 "그러니까 두 번째로는, 고마워. 나 같은 사람의 행복을 빌어 줘서."

 치하야 짱이 무언가를 결심하듯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나도 각오를 굳힌다.

 지금이라면 서로 응어리가 어느 정도 작아진 상태로 다시 한 번 이별할 수 있다. 서로의 아픔을 안고, 서로 다른 길을 제대로 걸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있지, 아니야."

 그래도. 어쩌면 내가, 치하야 짱이, 더 상처받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걸 선택했고, 여기에 있다. 그걸 선택받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치하야 짱은 몰라. 내가 원했던 행복의 모습을."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미안해, 치하야 짱. 나한텐 이런 말 할 자격 없을지도 모르지만. 다시 한 번, 이번엔 먼저 사과해 둘게."

 상처 주는 건 이게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분명 난 소중히 대하려던 팔로, 앞으로도 몇 번이나 치하야 짱에게 상처를 줄 것이다. 똑같이 치하야 짱에게 계속 상처받을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굉장히 심한 말을 할 거야. 제멋대로고, 거만하고, 잔혹한 말."

 "하루카……?"

 하지만 그게 내가 바라는 미래니까. 둘이서 걷고 싶은 길이니까.

 옆에 있었으면 좋겠고, 옆에 계속 있겠다는 의미니까.

 당연 것을 바라지 못하고. 아무리 서로 상처를 주었다고 해도.

 그 이상의 행복이 있을 테니까. 그 이상의 행복은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치하야 짱. 나도 너와는, 이제 친구로 못 지낼 것 같아."


 "그건 진작에 끝난 얘기잖아? 애초에 내 바람이기도 했고. 일부러 내 죄책감을 덜어 주려고 안 해도 돼."

 치하야 짱이 쓸쓸히 웃었다. 이별을 고했던 날 밤과 마찬가지로.

 그러니까 말야, 아니라구. 내가 보고 싶은 건 그런 웃음이 아니야.

 치하야 짱이 웃었으면 좋겠어. 행복하게, 기쁘게.

 내 옆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런 의미가 아니라. ……나 있지, 멋대로긴 하지만 치하야 짱한테 화난 게 있어."

 "나도 알아. 아까도 사과했잖아."

 "아니라니까. 내게 마음을 고백했을 때 말야, 치하야 짱, 뭔가 포기하고 있었지."

 "알고, 있었어?……하지만 당연하잖아. 뭔가를 바랄 수 있을 만한, 깨끗한 감정이 아니니까."

 "으응. 치하야 짱은 포기하면서, 그것 말고 다른 것도 바라고 있었어. 나한텐 그게, 빨리 빨리 판결을 내려달라고, 날 편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처럼 보였어."

 "그, 그럴 리가……."

 "그때 나는 그걸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하지만 있지, 사실은 싫었어. 슬펐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으니까. 아무것도 생각하려고 안 했으니까. 멈춘 생각을 다시 움직이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따랐다. 치하야 짱의 '좋아해."에 대답할 만큼의 "좋아해."를, 자신 안에서 찾을 수 없었으니까. 그런 걸 말할 자격 따위 없었다.

 "그러니까 이번엔 생각했어. 필사적으로, 정직하게. 치하야 짱의 마음, 내 마음. 내 바람, 치하야 짱이 발견해 준 것과는 다른 길과 그 끝을."

 내 바람은.

 "난 말야, 치하야 짱이 날 원했으면 했어."

 치하야 짱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괴롭게 얼굴을 찌푸리면서, 손이 주먹을 꽉 쥐었다.

 "하루카,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서 말하는 거야?"

 "응."

 "충분히 힘들었는데, 더 괴로워했으면 좋겠다고 그러는 거야?"

 "응."

 "나보고 더 상처입으란 거야!?"

 "응. ……하지만 그건 치하야 짱만의 짐이 아냐. 나도 같이 짊어지고 싶어."

 제멋대로고, 거만하고, 잔혹하고.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의 미래를 망가뜨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더라도.

 "부탁이야, 치하야 짱. 치하야 짱 전부로 날 원해 줘. 치하야 짱 전부를 내게 줘."

 "잘도, 잘도 그런 말이 입에서 나와!?"

 치하야 짱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소리친다.

 정말 그래. 정말로 말도 안 되는 말을 한단 건 알고 있어. 한 대 맞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하지만 난 이 거리에, 그 마음 끝에 있고 싶어. 그게 얼마나 아프더라도.

 한 걸음 더 내딛는다.

 "치하야 짱은 자기가 상처입기 싫으니까 떨어진 거였지. 내게 상처주지 않으려고 헤어지자고 말해 줬던 거지."

 "거기까지 알고 있으면서 왜 그런 말을 하는데……. 왜 또 내 앞에 있는 건데!"

 "내가 있고 싶어서."

 "――윽."

 치하야 짱이 숨을 삼켰다. 눈에 지금껏 본 적 없었을 정도로 슬픔이 어리고, 날 노려보았다.

 "위로도, 동정도, 이제 와선 다 필요 없어. 내 마음을 받아들이고 같이 있든지, 그걸 부정하고 떠나가든지, 두 가지 밖에 없단 걸 알고 그렇게 결정한 거잖아? ――넌 너무, 착하니까."

 "난 착하지 않아. 난 내 멋대로 행동할 뿐이야. 하지만 그런 안 좋은 부분에서도 눈을 돌리지 않기로 했어. 가장 소중한 마음이었으니까."

 ……무서워라.

 이렇게 치하야 짱을 상처 입히고.

 이제 받아들여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번엔 우리들은 정말로 결정적인 이별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치하야 짱은.

 그런 두려움을 계속 품고서도, 내게 전해 주었다. 진짜 마음을.

 자신이 엉망이 될 걸 알면서도, 그래도 내 행복을 빌어 주었다.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내가 내딛을 수 있는, 마지막 한 걸음을.

 "치하야 짱이 보여 준 미래가 옳을 지도 모르지만. ……스스론 어떻게 못 할 정도로 있지."

 미안해, 치하야 짱. 이젠 멈출 수 없어.



 "나, 치하야 짱을 좋아해."



 치하야 짱이 멍하니 날 바라본다. 그저, 바라본다.

 "이젠 친구라는 거리론 있을 수 없어. 물론 헤어지는 것도 싫어. 이 거리론, 만족 못 해."

 내가 다가갈 수 있는 거리는 이게 한계다. 하지만 전해지길. 내 가장 소중한 마음이. 미래를 향한 기도가.

 "내게 있어서 사랑이란, 내게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에게서 눈을 돌리는 거였으니까. 그런 건 이미, 친구도 뭣도 아니었던 거야."

 헤어진 날 밤에, 네가 좋아하는 사람 얘기를 시작했을 때. 그게 나라고 말하기 전. 듣기 싫었다. 그런 사람, 알기 싫다고 생각해 버렸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너를, 나 말고 다른 사람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너를 알게 되는 게, 견딜 수 없을 만큼 싫었다.

 있지. 나도 똑같았던 거야. ――으응. 깨닫고 나서도 계속 모른 척을 해 온 내가 훨씬 나쁘지.

 "그런 나도 있지, 이젠 네 행복을 멀리 떨어져서 빌 수는 없을 것 같아서."

 그런 나쁜,

 "그리고 내 행복은, 너와 함께 있는 걸로밖엔 이룰 수 없을 것 같아서."

 내 행복의 형태는.



 "내가 널 행복하게 만들게 해 줘. 내게만 널 계속 소중히 여기게 해 줘."



 무언가를 참는 것처럼.

 치하야 짱이 양 손을 입가로 가져가서.

 "하루, 카는……. 하루카는, 치사해. 전부 다 헛수고가 됐어. 멋대로 그런 말 하고……."

 "――미안해."

 "그럼, 안 되는데. 그렇게 될 리가, 없는데. 네가 어디선가 웃어 준다면, 그거면 됐다고. 겨우 생각하게, 됐는데……."

 "――정말로 미안해."

 "맨날 내 마음 같은 건 뒷전이고……."

 "그 때 기쁘게 생각했던 건, 지금 치하야 짱 마음을 알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역시 제멋대로……지."

 "……당연하지."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좋아하는걸, 하루카를. 지금까지 계속. 앞으로도, 어차피."

 오열이 섞여서 잘 안 들렸지만. 어차피 라니 뭐야. 잘못 들은 거겠지.

 "나도 정말 좋아해, 치하야 짱."

 하지만 제대로 전해져 왔어. 고마워――



 내게서 얼굴을 감추는 것처럼 딴 데를 보고.

 입을 덮은 양 손에서 괴로운 신음을 흘리고 있고.

 눈도 뭔가 흘러나올 것 같아서 전혀 그럴 여유가 없는데.

 필사적으로 감정을 억누르려는 건 전해져 오지만, 유감스럽게도.

 왜인지 내 눈엔 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

 그런 어쩔 수 없을 만큼 비뚤어진.

 어쩔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옆얼굴에.

 눈이, 마음이 이끌리는 건.

 역시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 그런 거겠지.


 "으……윽, 큿――"


 한 걸음 떨어진 땅에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하지만 역시 우산은 필요 없겠다고, 아무래도 상관없는 생각을 했다.

 그러지 않으면 내 발 밑까지 젖을 것 같았으니까.

 남은 거리를 좁혀서, 꼭 끌어안고 싶어질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역시 지금 내게 그럴 자격은 없다.



 그 후 내가 대답을 기다릴 동안 계속.

 내가 편지와 키홀더를 쥐고 있었을 때처럼, 치하야 짱은 소리를 높여서. 아무것도 속이려 하지 않고, 그저 계속 울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두 눈에선 멈추지 않고 눈물이 흘러서.

 치하야 짱이 이렇게 우는 건 처음 보지만.

 내가 치하야 짱네 집을 뛰쳐나왔을 때처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널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치하야 짱도, 나 같은 사람을 생각하면서 혼자 울었던 적이 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미안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이상으로 분명히 기쁘다고 느낄 거란 건.

 용서해 주는 걸까. 지금 치하야 짱은. 계속 상처를 줬던 나를.

 받아들여 주는 걸까.



 너무 불안해서, 참을 수가 없어서.

 뛰어서 다가가고 싶어지는 충동을 필사적으로 눌러서.

 생각 밑바닥에 가라앉혀 두었기 때문에.

 내 귀는, 주변에서 아무런 소리가 안 들린다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몇 걸음 분의 발소리에 의식이 되돌아왔을 때.

 치하야 짱의 머리가, 툭. 내 가슴에 그 무게를 맡겼다.

 평소엔 나보다 키가 큰 치하야 짱의 표정을, 지금은 볼 수가 없다.

 "하루카는 날 행복하게 해 주겠다고 그랬지."

 "내 모든 걸 걸고 약속할게."

 "……하나 조건이 있어."

 "말씀해 보시지요."

 "나한테도, 하루카를 행복하게 만들게 해 줘."

 "――전력을 다해서 행복해질게."

 치하야 짱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그 몸을, 드디어.

 겨우, 끌어안았더니.

 치하야 짱이 내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로 내 양 팔에 달라붙었다.

 따뜻해라.

 도망치고, 멀어지고. 꽤나 긴 시간이 걸려 버렸지만.

 겨우 도착한, 내가 바랐고 마지막엔 치하야 짱이 선택해 준 이게, 우리들의 거리다.

 이제,

 괜찮겠지.

 안 참아도, 안 참게 해도, 괜찮겠지?

 온 몸의 체중을 전부 내게 맡기고, 눈시울을 적신 채 올려다보는 치하야 짱 때문에 머리가 어지럽다.

 생각을 못 하겠다.

 내가 위쪽에서 할 기회가 더 적을 테고.

 강한 힘에 이끌리듯이, 그 입술에, 내 입술이――







 "미안 미안 미안 잠깐만 기다려! 그 이상은 나중에 해!"

 닿으려던 참에, 너무도 조용했던 둘만 있었을 세계에 몇 개의 발소리와 함께 그 소리가 끼어들었다.

 …………………….

 야.

 "히얏호~~~! 가라 가라, 해 버려, 하루룽~!!"

 이쪽으로 달려오는 프로듀서님을 앞지르고 아미가 소리쳤다. 그 뒤로 왠지 본 적 있는 차 뒤편에서 많은 본 적 있는 얼굴들이.

 있잖아.

 찬물을 끼얹는다느니, 그런 미적지근한 표현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이건 얼음물을 끼얹은 꼴이다. 아이스 버킷 챌린지다.

 당황스럽게 웃음 짓는 아즈사 상. 그리고 유난히 재밌어 보이는 히비키 짱. 짜증날 정도로 온화한 웃음을 띤, 그녀로선 드문 색 목도리를 두른 타카네 상. 볼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고개를 숙인 마미. 왠지 조금 쓸쓸하게 우리들을 바라보는 유키호. 그 옆에서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마코토. 입을 열고 멍하니 있는 야요이 눈을, 뒤에서 이오리가 화난 얼굴로 가리고 있었다. 이마에 손을 짚고 한숨을 쉬는 건 리츠코 상.

 이게 무슨 일이야. 전원 집합이다.

 있잖아, 나 분명히, 다 같이 함께하는 거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굳이 지금. 이 장면에, 어쨌든 간에, 다들 필요 없었던 거 아냐?

 제일 뒤에서 얼굴 정면에 들고 있었던 비디오카메라를 내리는 건――

 어?

 카메라!?

 

 뭐 하는 거야, 저 새는!???

 "미안해, 하루카, 치하야! 진짜 미안해, 설마 둘이 진짜로 이렇게까지 그렇고 저렇고 이랬을 거라곤 생각을 못 해서!"

 우리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당황하면서 멈춰서 있는 프로듀서님. 폭발할 것 같은 분노의 날 끝을 어떻게든 봉우리 쪽을 향하면서, 그래도 역시 찌를 것처럼 노려본다.

 "일단은……설명. 해 보시죠?"

 히윽, 하고 유키호 같은 소리를 내면서 프로듀서님이 당황한다. 도움을 바라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지만, 다들 딴 데를 보고 있다. 일치단결이란 뭐였는지.

 "그러니까 있지……. 우리들 사이에서 너희들 상태가 이상하단 얘기가 나와서……. 일단 너희들이 제대로 만나서 얘기하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될 것 같아서, 그 기회를 어떻게든 만들어 봤는데……."

 "그래서 저한테 치하야 짱이 사고를 당했단 거짓말을 했단 말이죠."

 한숨을 쉬고 싶어지는 걸 필사적으로 참으면서, 화난 표정은 무너뜨리지 않는다. 그야 어지간한 이유로 치하야 짱을 만나러 바다를 건너오지는 않았겠지만 있지.

 "……아무리 우리를 위해서라고 해도. 해도 되는 농담하고, 안 되는 농담이 있잖아요. 심장이 찌부러질 만큼 걱정했다구요. 왜 비행기는 이렇게 느린 걸까, 반나절이나 하늘 위에서 울 뻔 했다구요. 아무리 저라도 완전 화난 하루각하 인페르노라구요. "

 이글이글 등 뒤에서 업화의 불꽃이 흔들리는 걸 느끼면서, 모조리 공범자라는 사람들을 둘러본다. 모두의 얼굴에 공포가 어렸다.

 "그래서요, 우리들을 여기에서 만나게 해서, 뭐가 어디까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하루카와 치하야가, 서로에게, 그, 연애 감정으로 고민하고 있단 건 오토나시 상이 짐작했었어. 물론 다른 이유도 몇 개 생각해 봤는데, 설마 여기까지 사태가 진행돼 있을 줄은 몰라서. 뭔가 오해가 있어서, 만약 이걸로 잘 해결되면 속였던 것도 유키호 생일 파티랑 크리스마스 파티로 떠들썩하게 흘려버리려고 생각했거든."

 "잘 해결 안 됐을 땐요?""

 "유키호 생일 파티랑 크리스마스 파티로, 떠들썩하게 전부 흘려버리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똑같잖아요!?"

 아, 정말.

 모두들 다 어쩔 수가 없지만.

 그래도 가장 어쩔 수가 없는 우리들을, 평소처럼 모두가 둘러싸고 있고.

 아무리 그래도 전부 웃으면서 흘려버리기는 좀 더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 정도로 불안하게 만들어서 화가 났지만.

 그 이상으로――

 "하루카. 날 좀 풀어줄래?"

 아.

 지금까지 내 팔 안에서 계속 조용히 바닥을 보고 있던 치하야 짱이, 작지만 잘 들리는 무섭도록 차가운 목소리로 모두의 고막과 심장을 떨리게 했다.

 나 이상으로――

 분노를 감춘 소녀가, 바로 옆에 있었다. 이건 아무리 나라도 어쩔 수가 없다. 치하야 짱은 엉망인 얼굴로 울던 모습을 모두에게 보인 셈이고.

 나와는 정반대로 차가워서 동상을 입을 것만 같은 푸른 불꽃을 뿜어낸다.

 "다들, 미안하지만 좀 앉아 줄래?"

 "네."

 치하야 짱 목소리에 모두의 대답이 깔끔히 나오고, 순서대로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역시 단결이란 굉장해.

 "무슨 말인지는 알았어. 하지만 있지, 아무래도 석연치가 않아서, 그――"

 "죄송합니다!"

 다시 겹쳐지는 하모니. 다행이다, 내가 이것저것 신경을 안 쓰더라도, 이제 분명히 765프로는 평안할 거다.  

 "어, 응……. 이제 됐어.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어이가 없단 듯이 한숨을 쉬고서 치하야 짱이 조금 미소 짓자, 겨우 얼어붙어 있던 분위기가 풀어졌다.

 "아핫, 이거 무슨 촬영이야? 코토리, 카메라 안 돌리고 있어도 돼?"

 거기에, 더 밝은 목소리가. 조명 빛을 받지 않아도 반짝반짝 빛나는, 부스스한 머리를 날리며 걸어오는 건.

 "자, 유키호. 생일 축하해인 거야. 선물을 고르다 보니까 오는 게 늦었어."

 "고, 고마워, 미키 짱……."

 무릎을 꿇은 채로 있는 유키호에게 봉지를 건네주고, 그녀는 똑바로 내 쪽으로 걸어왔다. 다들 일어설 동안 눈앞에서 멈춘 그녀와, 시선을 맞출 수가 없다.

 "안녕, 하루카."

 "미키. 왜 여기에 있어……?"

 "미키도 허니를 만나러 오고 싶었는걸. 당연하잖아."

 "일, 은?"

 "정말,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야. 일하는 일본이 이상한 거야. 미키랑 하루카, 오늘부터 새해까지 오프라구? 스케줄 확인 안 했어?"

 "아……."

 그랬던가. 이젠 요일 감각도 엉망이다. 로스앤젤레스를 떠난 게 23일이었을 텐데 다들 왜 유키호 생일 얘길 하는 걸까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시차나 이동시간을 생각하니 확실히. 일본은 지금 이브 21시 쯤일까.

 치하야 짱과 얘기가 끝나면 곧장 돌아가려고 했지만, 그렇구나. 일단 휴일이구나…….

 "이, 이번엔 미키랑 무슨 일 있었니? 아냐, 하루카. 어쩌면 좀 다툼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하루카한테 비행기 티켓을 주라고 부탁한 건 나야! 11월 마지막 날에, 하루카 상태가 이상하다고 미키한테 전화가 와서, 슬슬 어떻게 해야겠다 싶어서――"

 초조하게 말을 늘어놓는 프로듀서님 목소리는 반쯤 흘려들으면서, 또 머릿속으로 시차를 생각한다. 일본보다 할리우드가 17시간정도 빠르다. 내가 프로듀서님한테 전화한 건 할리우드에서 11월 30일이었지만. 프로듀서님이 전화를 받았을 때, 여긴 이미 12월에 접어들었을 때다.

 하루 먼저. 내 숨길 수 없는 상태를 미키가 눈치 챘던 밤, 프로듀서님한테 연락을 했던 거구나.

 정말, 나는.

 모두한테 도움만 받고.

 ……하지만.

 "있잖아, 미키."

 "왜애?"

 "분명히 날 일본에 보내려고 그랬다곤 해도 말야. 미키가 '솔직하게 전부 말할게' 다음에 말했던 건 전부 진심이었지?"

 "응."

 오늘 몇 번째일지 모를 침묵이 찾아왔다.

 내겐 가장 무겁고, 가장 차가운 지금 고요함.

 "하루카, 잠깐 이쪽으로 와."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내 손을 미키가 잡았다. 그대로 조금 떨어진 곳까지 데리고 갔다. 평온한 웃음을 지은 채로 날 지긋이 바라보고, 그 발이 멈추었다.

 "있지, 하루카. 지금이라면 제대로 미키를 바라봐 줄 거야?"

 "……응. 나도 미키가 들어줬음 하는 이야기가 있어."

 "들을게."

 이번엔 고개를 들고, 똑바로 미키를 바라보았다.

 "미안――같은 말은 듣기 싫지?"

 "응. 미키도 좀 지나쳤다는 거 알고 있고, 그걸 시작하면 해가 져 버려."

 "진작에 져 있지만 말이지."

 "아핫."

 "그럼 더 뻔뻔한 말 할게. 미키, 새해가 밝으면 다시 한 번. 나랑 같이 연기해 줘."

 "그런 부탁이야? 아니면 명령?"

 "도전."

 "……흐응."

 미키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말면서, 흥미 없게 대답하면서도.

 계속 진지하게 날 바라봐준 걸, 알고 있으니까. 망설임 없이 말을 계속한다.

 "다시 한 번, '노조미'를 봐 줘."

 "자신 있게 말하는 걸 보니까, 겨우 뭔가가 개운해졌나봐?"

 "응. 이젠 앞을 보는 걸 겁내거나 하지 않을 거야."

 "그래. 그럼 하루카는 앞으로 뭘 위해 아이돌을 하는 거야?"

 "하고 싶으니까. 어찌됐든 재밌으니까. 그리고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 그 끝에 있으니까."

 "…………."

 "나 말야, 쭉 무서웠어. 지금이 정말 좋았으니까. 모두가, 내가, 각각 서로의 길을 걸어가서. 점점 멀어져서, 그것 말고도 소중한 걸 몇 개고 잃어버릴 지도 모른다고."

 몇 번이나 같은 걸로 고민하고. 그 때 그 때 어떻게든 해결해 왔지만. 그건 확실히 끌어안고 목표하는 곳까지 걸어가야 하는 거였어.

 "그러니까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 좋아하는 사람. 아무것도 포기 안 해도 되게, 대단한 아이돌이 될 거야."

 "……하루카는 욕심쟁이야."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거, 엄청 하루카답다고 생각해."

 미키가 즐겁게 웃는다.

 확실히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런 제멋대로인 생각을 이룰 수 있는 데까지 가는 건.

 하지만 난 노래하는 것. 춤추는 것. 연기하는 것도, 정말 좋아하니까.

 주변이 얼마나 대단해 지더라도, 가슴을 펴고 있고 싶은 사람 옆에 있고 싶으니까.

 전부 다, 나니까.

 "그러니까 옆에서 보고 있어, 미키. 내 '노조미'를, '아마미 하루카'를."

 "뭐, 대단한 데까지 가고 싶은 건 미키도 똑같으니까. 어디까지나 따라가 줄게, 하루카."

 하지만, 하고 미키는 장난스럽게 내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하루카가 미키 라이벌이 아니게 됐단 건 변함없겠다. 허니 쟁탈전 상대가 둘이나 줄어서, 럭키인 거야."

 "그, 그건, 으음……."

 "하지만 치하야 상이 하루카 게 돼 버리는 것도 왠지 짜증나네."

 "에헤헤……. 어, 근데 미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까 거기에 없었잖아!?"

 "새삼스럽지만, 솔직히 말해서 다 들통 났었어."

 미키는 당해낼 수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치하야 짱을 보자, 그녀는 입술을 깨물면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당황하면서 너무 가까운 미키에게서 거리를 두었다. 혹시 치하야 짱은 질투심이 많거나 그런 걸까……?

 "……하루카가 미키랑 다른 애들을 계속 봐 왔던 것처럼 말야. 미키도 하루카, 어느 정도는 소중히 보고 있었다구."

 뒷걸음질 스텝을 밟으면서, 미키는 양 손을 등 뒤에서 맞잡고 웃었다.

 따뜻한 게 가슴속에 넘쳐서.

 따뜻한 게 아주 조금, 눈에서 흘러넘쳐서 뺨을 적셨다.

 "……응."

 "그래서 하루카가 혼자서 고민하면서 상담 안 해줬을 때, 꽤 쓸쓸했으니까 있지?"

 "……응, 미안해. 고마워, 미키."

 "응. 그럼, 미키는 하루카만 신경 써 줄 수가 없어!"

 말하기가 무섭게 미키는 몸을 돌려서 프로듀서님한테 달려갔다. 팔에 달라붙는 미키를 당황하며 떼어내려고 하면서, 프로듀서님이 날 봤다.

 "하루카, 추우니까 슬슬 가자! 유키호 생일 파티야."

 "――네!"

 조금 눈을 비볐다.

 폐를 많이 끼쳤는데도, 다들 거기에 있어 주었고.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게 있을지도 모르지만.

 제대로 말로 전하기 위해서.

 가자.

 내가 바라는 그곳까지.

 

 

한 에필로그-다시 만나는 날까지

 축제 소란 뒤에는 늘 쓸쓸함이 떠돌지만.

 왠지 오늘은.

 "하루카, 쓰레기는 대충 정리 끝났어."

 "고마워~. 나도 빨래 거의 다 끝났어."

 이제 곧 날짜도 바뀔 시간. 조금 전에 끝난 유키호 생일 파티&크리스마스 파티. 나와  치하야 짱은 여러 가지 사죄를 겸해서 그 뒷정리를 하겠다고 나섰다.

 ……뭐,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긴 하지만. 그걸 눈치 챈 코토리 상은 "뒤는 젊은 둘이 천천히 보내~."같은 말을 해서, 막 때려 줬다. 그런 코토리 상에게 비디오카메라에 대해서 치하야 짱이 추궁하는 장면도 있었고. 결국 그건 처음부터 녹화한 게 아니라 치하야 짱이 나한테 안겨 왔을 때부터였던 것 같지만……물론 치하야 짱은 카메라를 뺏어서 문답무용으로 메모리를 지워 버렸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다들 평소와 똑같이 우리들을 받아들여 주었다.

 오늘도 모두 다 모이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을 텐데.

 그런 건 내색도 하지 않고, 그대로 내가 돌아올 장소로 있어 주었다.

 유키호를 축하하고. 미키와 내 일시 귀국을 기뻐해 주고. 치하야 짱과 나는 놀림 받기도 하고.

 모든 게 아주 자연스러워서. 오랜만에 모두 함께 보내는 시간을 모두가 진심으로 즐겼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시 내년엔 모두 다 모이는 건 힘들지도 모르겠네."

 인쇄된 스케줄 표로 완전히 덮인 화이트보드를 보면서 치하야 짱이 말했다. 아무래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것 같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역시 쓸쓸해?"

 "그야 그렇지."

 하지만. 내가 걱정되는지 이쪽을 보는 치하야 짱에게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나한텐 이제 제대로 된 목표가 있으니까."

 "뭔데?"

 "톱 아이돌이 되는 거야."

 "그거 처음부터 네 꿈이었잖아."

 "그렇긴 한데. 지금은 꽤 구체적이야."

 "예를 들면?"

 "내년 오늘은 돔에서 라이브를 하는 거야. 다들 모여서."

 "후후, 꽤 장대한 계획이구나."

 "그럼. 하지만 내가 하고 싶다고 말하면, 이런 시기라도 큰 회장을 잡을 수 있을 만한 아이돌이 될 거야."

 "정말 제멋대로 굴게 됐구나, 하루카. 아메리칸 풍토란 무서워."

 "……미안해. 그래도 난 이제 처음부터 뭔가를 포기하거나 안 할 거야. 이룰 때까지, 타협 안 할 거야.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서. 내가 같이 있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건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뭘 남 일처럼 말하고 그래."

 "어?"

 "나,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을 위해서, 전력을 다해서 열심히 할 거니까. 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

 치하야 짱에게 한 걸음 다가간다. 거리가 없어진다. 이렇게 간단한 일……이었구나.

 조금 수줍게 웃으면서 치하야 짱이 날 바라본다.

 "원하는 건 원한다고 말하고. 하고 싶은 건, 할 거야."

 "그래. 그런 하루카는 지금 뭘 하고 싶은데?"

 "…………."

 "난 '모르는'거지? 아무래도 말로 안 하면 난 이해 못 할 것 같은데?"

 뭐야, 이 여유 넘치는 웃음은! 짜증나!

 "그건, 있지, 키,"

 "키?"

 "…………으으."

 "왜 그래, 하루카."

 "잠깐만, 치하야 짱은 애인한텐 이렇게 못된 짓 하는 사람이었어!?"

 "자, 슬슬 안 나가면 나도 막차 놓칠 거야."

 "알았어, 알았어! 키스가 하고 싶어! 뽀뽀! 알겠어!?"

 자포자기하고 소리치는 나를 장난스럽게 바라보던 눈이 살짝 감겼다.

 이거, 오케이란 말이지? 하루카 상 갑니다?

 뺨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면서 조금 발꿈치를 들었다. 그 입술을 목표로 고정하고, 다가가면서, 나도 눈을 감고――

 "알았지만, 안 돼."

 "~~~~!!!!"

 어느샌가 눈을 뜬 치하야 짱의 얼굴이 바로 옆에 있었다. 그리고 내 입술에 닿은 것은, 내가 원했던 그게 아니라 검지손가락이었다.

 "왜!!"

 "여기 사무소야. 모씨가 비디오카메라를 설치해 놨을지도 모르잖아?"

 "……그 가능성은 부정할 수 없지만."

 "하루카의 키스는 나만의 것이니까."

 치익 치익 하고.

 철판 위에 방치 당했다.

 저, 슬슬 먹어 주지 않으면 타 버릴 것 같은데요.

 뭔가 아까부터 내 취급이 너무하지 않아? 역시 트리 밑에서 얼음물은 무시하고 치하야 짱한테 뽀뽀할 걸 그랬어. 앞으로도 내가 위쪽에서 입맞춤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치하야 짱, 그렇게 여유만만해서 되겠어? 너무 장난치면 언젠가 역습할 거라구?"

 "기대해 둘게. 하루카가 멀어지는 것 말고는 뭐든 해도 돼."

 그렇게 말하고, 치하야 짱은 빠른 걸음으로 사무소 밖으로 나가 버렸다. 정말로 이게 여자 친구한테 할 짓이야?

 불을 끄고 문을 잠그고 나서, 이미 내려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않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뭐, 오늘은 불을 끌 필요는 없지만, 절약은 중요하니까.

 한발 먼저 건물 밖에 나온 치하야 짱은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걸어가고 있었다. 겨울 밤바람이 다 드러난 뺨에 차갑게 닿았다.

 "정말, 치하야 짱 너무해!"

 못된 뒷모습을 쫓아가서 쌓인 화를 쏟아 내고, 그녀의 옆얼굴을 본다.

 그 뺨이 새빨갛게 물든 건, 아마 밖이 추워서가 아니고.

 그 눈이 조금 젖어 있는 건, 글쎄 왜일까.

 그 이유를 파고드는 건 분명 멋없는 일일 테니까.

 떠오른 내 입맛대로인 해석을 가슴속에 소중히 담으면서, 그런 치하야 짱을 모르는 척 한다.

 "하루카는 오늘 밤 어떡할 거야?"

 한동안 말없이 걸었던 역으로 가는 길 위에서, 치하야 짱이 입을 열었다. 물론 진작에 집으로 돌아갈 막차는 끊겼다.

 ――이쯤일까.

 이 이상 따라가면 지금은 아직, 못 돌아오게 될지도 모른다.

 "난 사무소에서 잘 거야."

 갑자기 멈춰선 나를 치하야 짱이 돌아보면서 신기하다는 것처럼 바라본다.

 "일단 물어보겠는데, 왜?"

 "내일 곧장 미국으로 돌아갈 거니까. 아직 못 끝내고 온 게 있어서."

 웃으면서 그렇게 말하고, 사무소에서 프로듀서님과 했던 대화를 떠올린다.





『저, 프로듀서님. 이번엔 폐 끼쳐서 죄송합니다.』

『아, 아니. 나도 잘못했어. 미안하다.』

『그건 이제 됐어요. 전부 우리들을 생각해서 그랬던 거라고 알고 있으니까요. 그보다, 앞으로……말인데요.』

『왜?』

『죄송합니다. 저, 그쪽에서 제대로 일 못하고 있었어요. 여러 가지가 너무 어중간해서.』

『――그렇구나. 그럼 하루카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전 이제, 제가 그린 미래에서 눈을 돌리지 않기로 했어요. 아이돌인 미래도, 치하야 짱과의 미래도.』

『………….』

『어쩌면 잘못됐을지도 모르지만. 앞으로도 계속, 폐 끼칠지도 모르는데요――』

『하루카.』

『네?』

『그건 열심히 생각해서 낸 결론이지?』

『……네.』

『난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단은 전부 옳은 거라고 생각해. 하루카가 후회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걷는 길이라면, 난 등을 밀어줄 뿐이야. 다른 건 신경 안 써도 돼.』

『그런 걸까요?』

『어차피 진지하게 생각해서 발견한 길을 안 고르면, 그걸 곁눈질로 보면서 계속 후회할 뿐이니까. 그런 인생은 즐겁지도 않고 큰 가치도 없어. 그럼 하루카는 다음에 뭘 하고 싶니?』

『전――휴가이긴 하지만, 바로 할리우드로 돌아가고 싶어요. 가능하면 내일이라도. 저쪽에서도 폐를 끼친 사람이 잔뜩 있으니까요.』

『그거면 된 거지?』

『네. 앞으로 걸어가기 위한, 제 나름의 각오예요.』

『그럼, 이걸 줄게.』

『……로스앤젤레스 국제공항행, 티켓?』

『내가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치고. 하루카라면 그렇게 말할지도 모르니까 일단 준비해 뒀었거든.』

『――! 감사합니다.』

『좀 멋있는 말도 생각했었는데, 말하지는 않을게. 하루카가 한 선택은, 언제든 분명 베스트일 거야. 열심히 하렴.』

『네! 치하야 짱이랑 다른 애들도 잘 부탁드려요!』

『그래. 이쪽은 맡겨 둬.』





 치하야 짱의 눈을 지긋이 바라본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할 걸 그랬을까.

 잠깐 있다가, 치하야 짱은 "그래."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난 하루카와 즐거운 밤을 보낼 수 있을까 기대하기도 했었는데."

 "아, 위험해. 솔직히 결심이 흔들릴 것 같아."

 "그래도 하루카가 결정한 거라면. 전부 나중으로 미뤄야겠네."

 

 뭔가 우스운 것처럼. 하지만 신뢰가 담긴 눈빛을 내게 보내 주니까.

 "아까 굉장히 중요한 걸 치하야 짱이 뒤로 미뤘으니까, 그 복수야. 날 보고 싶은 마음에 몸부림치라구.

 "그럼 그렇게 할게. 다음에 만났을 땐 각오해."

 나도 이번엔 재회를 믿을 수 있으니까. 이번엔 가슴을 펴고 치하야 짱 옆에 서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이별이 아니다.

 다시 돌아오기 위한 여행을.



 "응. ――다녀올게, 치하야 짱."

 "다녀와, 하루카."



 발을 돌려 지금은 나만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이제 무섭지 않다.

 목표할 곳도, 돌아와야 할 곳도 있다.

 앞으로 내가 고를 길은 전부, 치하야 짱과 함께하는 미래로만 이어져 있으니까.

 고민하지 않고 그저 앞으로.

 그리고 다시 한 번 만났을 때에는.

 

 치하야 짱은, 나의――

 나는, 치하야 짱의――



 믿음직하지 못할 가로등 불빛이 유난히 밝게 느껴졌다.

 그만 해 줬으면. 내버려 뒀으면.

 지금 난, 도저히 아이돌이라고 할 수 없을 만한 표정을 짓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가로등은 용서 없이 내 눈앞에 늘어서 있다.

 잠깐 멈춰서 칠칠치 못한 표정을 감추듯이 목도리를 다시 감았다.

 첫 시련은 정말 별것 아니라고 한숨을 쉬고 싶으면서도.

 연이은 빛들이 가리키는 그 끝으로.

 난 내가 바라는 미래로 이어지는 길을, 걷기 시작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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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데타시 메데타시. 번외편 한 편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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