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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맨발 그대로의 사랑이었습니다. -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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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10, 2015 20:25에 작성됨.

그것은, 맨발 그대로의 사랑이었습니다.

10. 이 마음을 하늘에

 

 조금 떨어진 차도를 휙 휙 달려가는 자동차는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 일본보다 조금 빠르게 설정된 제한속도를 더욱 오버해 있을 그 속도보다도, 애초에 차가 달리는 방향, 진행방향이 반대다. 마치 거울에 비친 세계처럼. 조금 눈부신 노을의 햇살이 영어만 가득한 표지나 건물 간판을 비추었다. 촬영이나 조명 기재를 들고 우리들을 둘러싸듯이 서서 렌즈나 빛을 향하는 사람들은, 피부색도 얼굴 모양도 여러 가지이고.

 내 눈앞에서 연기를 계속하는 미키는 그런 가운데서도 어디까지나 미키였다. 미키이고, '에리'였다. 원래 사람 눈을 끄는 가지런한 이목구비에만 의존하지 않는, 섬세하지만 정열이 담긴 연기. 그녀가 연기하는 '에리'에, 스탭 몇 명이 카메라를 돌리면서, 혹은 음향을 만지면서 감탄을 흘렸다. 몸짓이 큰 화려한 신이 아니다. 하지만 이국땅의 가짜 무대에서 '에리'는 분명히 여기에 있었다. 숨을 쉬고, 고민하고, 어깨에 맨 가방을 고쳐 맨다. 지금 세계의 중심에 그녀는 있었다.

 거기에 내가 들어간다. '에리'의 눈이 나를 발견하고, 의문과 놀람, 그리고 불안에 흔들렸다.

 "노조미……?"

 작은 신음소리 같은 목소리로 이름이 불려서, 내 발이 그녀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추었다. 쓸쓸한 웃음을 지으면서 그녀를 정면에서 바라본다.

 "에리, 그 사람은 여기엔 안 와."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일까.

 어째서, 였을까.

 아니, 그야 알지. 몇 백 번이나, 천 번 쯤은 대본을 읽었을 지도 모른다. 분명히 쓰여 있었어.

 하지만, 어째서. 네가 쫓아가지 않아서? 그 사람이 결정한 일이라서? 내가 잘못해서?

 "――――"

 입을 열고 대사를 말해보지만 잘 와 닿지 않는다. '노조미'의 말은 이게 맞나?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바람이 머리를 스쳤다. 언제나 자그맣게 흔들리던 두 개의 리본은 거기에 없었다.

 약간 정지한 공간을 감독의 목소리가 갈랐다. 통역을 들을 필요도 없다. 안 됐다는 건 알고 있다. 내가. 다음 테이크를 위해 스탭들이 움직임을 되찾는다. 대신 내 시간이 멈춘다.

 "하루카……?"

 걱정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건, 미키다. 미키로 돌아온 미키다.

 "미안, 미안! 실수해버렸어……. 다음엔 괜찮을 거야, 괜찮아."

 유감스럽게, 하지만 조금 실없이 웃어 보이는 건, 나. 하루카로 돌아온 하루카. 그럴 거다.

 그럼 아까 여기에 있던 건? '노조미', 아니면 '하루카', 아니면 다른 누군가?

 아니, 애초에 누군가가 여기 있었던 걸까. 내가 있을 곳은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닐까.

 그럼 지금은? 있다, 없다, 있다, 없다. '노조미'가, '하루카'가. '나'는?

 ――나는, 누구일까.

 익숙하지 않은 빌딩 너머로, 해가 저물어 간다.



………

……





 할리우드에 오고 나서 슬슬 1개월이 지나고 있다. 그리고 나와 미키가 촬영에 참가한 영화는 11월 말 들어서 촬영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다.

 난 할리우드 영화라고 하면 두두두두두 와장창 펑 하고 대폭발! 그런 아메리칸 적인 조크로 하하하, 그런 이미지가 강했지만 물론 영화가 그런 것만으로 성립될 리는 없고.

 대충 말하자면 미키와 나는 일본에서 온 유학생이란 설정으로, 미국에서 만난 스파이 비슷한 하드 보일드한 맨과 음모 권력이 소용돌이치는 사건에 휘말려서 여차 저차 해서, 역시 하하하 투쾅 하는 것도 있지마는. 거기에 약간 러브 로맨스 요소도 포함돼 있다. 물론 영어로 말해야 하는 장면도 많지만, 잉글리쉬 어휘가 늘었냐고 물으면 보시는 대로다. 핫핫하.

 ……웃으려고 해도 입 안이 마른다. 분위기를 띄울 웃음도 폐가를 덜걱이는 외풍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요 며칠간 찍고 있는 신이 러브에 관련된 부분이라, 영 잘 되질 않는다. 주로 나 때문에. 그렇다기보단, 전부 나 때문에.

 분함, 있다. 면목 없음, 있다. 하지만 이래선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차피 난 이 정도 밖에 안 된다는 포기가 있다. 난 어떻게 돼 버린 걸까. 그렇게 생각하는 한편으로 나는 내 상태가 안 좋아진 이유를 눈치 채고 있기도 하다. 단지 눈을 돌리고 있을 뿐. 요 1개월, 계속 그렇게 해 왔듯이. 생각해 버리면 해결이 되기는커녕, 몸이, 머리가, 움직이길 포기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촬영과 미팅이 끝나고 해산할 즈음, 난 도망치듯이 스튜디오를 빠져나왔다. 날은 진작 저물었지만 바깥도 그다지 춥지 않다. 그래도 코트 앞을 여미고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 넣고 걸어 나간다.

 "하루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확인할 것도 없이 미키였다. 그녀 목소리를 착각할 리도 없고, 애초에 이 땅에서 귀에 익숙한 인토네이션으로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한정적이다.

 "……미키. 무슨 일이야."

 "어, 그게. 무슨 일이 아니고."

 미키는 웬일로 말끝을 흐리고, 시선을 조금 떨어뜨린 채 종종걸음으로 내 옆으로 왔다. 정확히는 옆이라기 보단 반걸음 정도 뒤로.

 한동안 말 없이 걷는다. 자기가 말을 꺼내면서도 어찌할 생각도 없었던 거겠지. 난 지금 묵고 있는 호텔 방으로 돌아간다. 미키도, 옆인 자기 방으로 돌아간다. 그것뿐이다.

 갑자기 미키가 대담해졌나 싶더니 내 앞으로 돌아왔다. 왜인지 굳게 결심한 표정으로.

 "있지, 하루카. 역시 요즘 이상해. 무슨 일이야?"

 "……난 나야, 평소랑 똑같아."

 미묘하게 동문서답이란 걸 자각하면서도, 아까 내가 물었던 것과 같은 물음에 답해 본다. 미키는 역시 납득해 주지 않았다.

 "아니야. 그런 건 하루카가 아니야. 하루카답지 않아. 하루카 연기는, 그런 게 아냐."

 "아하하……. 그렇게 딱 잘라 말하면 꽤 기분 상하는데. 하지만 난 최선을 다해서 하고 있어. 연기가 형편없게 보였다면 그게 내 한계인 거야. 미안, 내일은 폐 안 끼치게 더 열심히 할 테니까――"

 "아니야! 그러니까, 아니라니까. 그런 게 아니고……."

 미키가 내 말을 자르고서 떼를 쓰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말을 고르면서 입을 뻐끔거린다.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는 안다.

 하지만, 안다고 인정해선 안 됐다.

 "미키, 그래선 잘 모르겠어."

 그러니 나는 모르는 척을 한다. 그밖에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하루카는, 애초에 더 잘 할 수 있어. 그리고 못 하는 것도 늘 필사적으로 어떻게든 해 왔잖아."

 "잘 못 하고 있으니까 더 열심히 노력하라는 말이야? 내 발목 잡지 말라는 그런 의미야?"

 "아니라니까! 있잖아, 지금 하루카가 열심히 한다는 건 뭐야? 내일이 되면 뭐가 어떻게 변한다는 거야!?"

 미키가 필사적으로 입을 꾹 다물고 다가왔다. 덕분에 앞으로 갈 수가 없다.

 "――내일은, 어떻게든 할게. 열심히 할 테니까."

 그녀의 등을 옆으로 우회해서 돌아가는 길을 걷는다. 열심히 할 테니까. 촬영이 빨리 끝날 수 있도록. 어떻게든 해 낼 수 있도록. 빨리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지만 나.

 딱히 빨리 귀국하고 싶지는 않은데.

 난 지금 어딜 향해 걷고 있는 걸까. 어디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

 "하루카!"

 다시 미키가 쫓아온다. 일을 끝나고 돌아가는 중일, 양복을 입은 키 큰 백인 남자가 우리를 수상하게 바라보았다.

 "있잖아, 하루카는 뭘 고민하고 있는 거야? 통역가가 있기는 하지만 확실히 감독님 연기 지시는 알아듣기 힘들 때도 있고――"

 "으응. 나 때문이야. 그건 제대로 알고 있어."

 "하지만! 얼마 전까지 찍었던 신은 좋았잖아! 요 며칠이야, 하루카가 이상해진 건. 무슨 일이 있었어?"

 아무리 숨기려고 필사적이어도. 역시 미키한테는 들켜 버렸네.

 요 며칠 찍고 있던 장면. 노조미에게, 에리에게, 중요한 요소일 마음의 동요.

 "……있지, 미키. 사랑이란 뭘까."

 "엄청 좋아한다는 마음이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내 말에 미키가 바로 답했다. 당연하단 듯이 말하고 옆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미키가 눈부셔서, 눈을 돌렸다.

 "갑자기 무슨 일인 거야?"

 "……미안해. 뭔가, 잘 모르게 돼 버려서."

 "사과 받아도 곤란한데. 하루카는 사랑을 한 적이 없어?"

 "어땠을까. 그것도 잘 모르겠네."

 으으음 하고 고민하는 미키에게 쓴웃음을 짓는다. 정말로 미안해. 어떻게 할 수도 없는 걸 물어봐서.

 "하루카는 사랑을 알고 싶은 거야?"

 "으음. 몰라도 어떻게든 해 왔는데 말야. 솔직히, 알고 싶지 않은 걸."

 "왜?"

 "……왜, 일까. 정말로 모르겠어."

 "흐응."

 풍성한 금빛 머리카락을 흔들면서 미키가 내 몇 걸음 앞을 걸었다. 그 머리가 붕 휘날리고, 엷은 녹색 빛을 발하는 눈동자가 똑바로 날 바라봤다.

 "저, 하루카. 키스할까."

 "――에에에에에에에엑!?"

 그 갑작스런 말의 의미를 알 수가 없어서 얼빠진 소리를 냈지만, 미키는 신경 쓰지 않고 쑥 거리를 좁혀 왔다.

 "누, 누가? 누구랑!?"

 "하루카가. 미키랑."

 "아니아니아니, 왜 그렇게 되는데! 노조미랑 에리는 딱히 키스 같은 거 안 하잖아!?"

 "맞아. ――왜?"

 "왜냐고 내가 묻고 있는데……."

 "하루카의 왜는 의미가 없으니까, 미키의 왜에 대답하는 거야. 있잖아, 왜 노조미랑 에리는 키스 안 해?"

 "그, 그건……. 둘 다 여자, 고?"

 "그런가. 그럼 하루카는 미키랑 키스, 할래?"

 장난을 치는 건가 했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너무나 진지했다. 미키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시선을 돌리고 만다.

 "미, 미키는 나랑 키스하고 싶어……?"

 "싫어."

 아무것도 없는 곳에 자빠질 뻔했다. 아니, 나는 어디에서든 넘어지기는 하지만요? "별로"도 "안 해"도 아니고, "싫어". 확실한 거절. 뭐야, 그게.

 "미키는 뭘 하고 싶은 거야."

 "미키는 어떻든 상관없어. 있지, 하루카는 미키랑 키스하고 싶어?"

 "아, 아니, 그건 좀……."

 "하루카는 미키가 싫은 거구나."

 "왜 얘기가 그렇게 돼."

 "왜 그럴까."

 그렇게 중얼거리고, 미키가 빙글 돌아 내게 등을 돌렸다. 멍하니 서있는 나를 두고 그녀는 다시 걸어가면서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키는 하루카도 꽤 좋아하지만."

 "그, 그건 고맙네."

 "――허니 말고는 키스하고 싶다곤 생각 안 해."

 "…………."

 표정이 보이지 않는 미키를 쫓아서, 이제 생각난 것처럼 발을 앞으로 내딛는다. 빨간 신호로 그녀가 멈추어도, 왠지 난 그 옆에 나란히 설 수가 없었다.

 "……하루카는 있잖아."

 "응?"

 "누구라면 키스 할 수 있어?"

 "어려운 질문인데."

 "허니?"

 "그건……어떨까. 아닐, 까."

 "다행이다. 하루카가 허니랑 키스하고 싶다고 말했으면, 카메라도 안 돌아가는데 하루미키동이 발발할 뻔 했어."

 "뭐야, 그게. 새로운 동부리야?"

 "별로 맛 없을 것 같아. 그게 아니고, 대전쟁. 할리우드 거리가 몽땅 불타 버려."

 "그, 그건 확실히 큰일이네……. 필름 속에서만으로 충분해."

 "응. 무사히 평화롭게 끝날 것 같아서 다행이야. 그런데 허니가 안 된다면――치하야 상은?"

 미키가 날 보고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한심하게도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안 보이고 끝났으니까.

 "……왜 치하야 짱 이름이 나오는데?"

 "하루카, 치하야 상하고 사이 좋잖아."

 "그, 랬지. 하지만 치하야 짱한테, 난 이제 친구도 뭐도 아니란 것 같고."

 목소리가 떨리는 걸 필사적으로 감추고,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말해 본다. 미키는 조금 고개를 옆으로 갸웃거리고 신호가 파랑으로 바뀌자마자 "흐응."이라고만 말했다. 그리고 역시 흥미 없다는 듯이 횡단보도의 하얀 선을 밟았다.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그 이상 대화는 없었다. 방 앞에서 헤어질 때 "내일도 열심히 하자."하고 웃어 준 미키의 표정이, 자기 전까지 내 마음에 쐐기처럼 박혀 있었다.

 일상에서 도망치듯이 닻을 올리고 한때의 꿈속으로 노를 저어도. 내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몇 개의 사슬에 묶인 채.

 나는 내일도, 여기에 있다.



………

……





 결론부터 말하자면, 난 다음날도 만족스런 연기를 할 수 없었다.

 시종일관 불만스런 표정을 한 감독님. 반복되는 리테이크에 피곤을 감추지 못하는 스태프님들. 어두운 표정으로 걱정스럽게 보는 미키.

 떨쳐낼 수 없는 뭔가에 발을 묶인 채인 내가, 주변 사람들 모두를 한 점에, 이 장소에, 못박고 있다.

 내가.

 나 때문에.

 빛이 들지 않는 캄캄한 터널 속을 벽에 손을 짚으면서 걸어가는 느낌. 똑바로 걸어가고 있을 텐데, 필사적으로 걷고 있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지나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언제까지고 터널이 계속되는 것도 아닐 텐데. 앞으로 나아가면 언젠가 끝이 날 텐데.

 애초에 이 터널은 어디로 이어져 있는 걸까. 애초에 이 길이 맞던가?

 피로 이상으로 다른 무언가가 끈적하고 무겁게 달라붙어서, 하루를 끝낸 몸이 코트를 벗기도 전에 침대 위에 털썩 떨어졌다. 엎드린 채로 베개에 얼굴을 묻고 크게 한숨을 쉰다. 던져놓은 가방을 뒤적거려서 핸드폰을 끄집어냈다.

 어슴푸레한 조명 밑,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으로 부재중 전화가 없었던 걸 확인한다. 새로 온 메일은 4개. 야요이와 마코토, 일과 관련된 게 2개.

 ……딱히. 기대 같은 건 안 했고. 아무것도.

 간단히 그것에 답신을 하고 핸드폰을 내던지려다――다시 대기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11월 31일, 22시 11분. 표시된 시각이 올해 마지막 달이 시작될 때까지 2시간도 안 남았다는 것을, 특별히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담담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 12월이 되어도 특별히 뭔가가 변하는 것도 아니다. 내일도 난 여기에 있고, 내일은 꼭 모두를 납득시킬 만한 연기를 해야 한다. 바뀌는 건 아니지만, 바꾸어야만 하는 건 있고. 자꾸 꼬이는 내 손가락은 내 의식과 관계없이 멋대로 전화번호부를 불러냈다.

 별 생각 없이 터치스크린에 올린 엄지손가락을 아래에서 위로 미끄러뜨린다.  '아'부터 시작되는 연락처가 주르륵 흘러간다. 그 동작을 벌써 세 번째. 그리고 스크롤된 화면에 놓인 엄지손가락 바로 밑, '왠지 모르게' 거기에 있는 연락처 하나.

 ‘치하야 짱'

 ――뭘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자조하듯이 일그러진 입술이 베개에 쓸렸다.

 요 1개월, 한 번도 전화도 메일도 한 적 없는 연락처.

 요 1개월, 한 번도 전화도 메일도 오지 않은 연락처.

 10월 마지막 날에 "좋아해."라고 말해 주었던 사람.

 그리고 동시에, "이젠 친구도 아니야."라고 내게 말했던 사람.

 생각하지 않으려. 생각하지 않으려 해 왔다. 그 상처를 들여다보면, 이젠 눈을 뜨는 것이 무서워져 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일은 커녕 호흡조차 못 하게 될 것 같았으니까.

 그 할로윈 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지. 왜 그런 말을 했던 것인지. 뭘 위해 날 거절한 것인지.

 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무슨 말을 해야 했는지. 어떻게 하고 싶었던 건지.

 그 모든 것을 생각하는 것이, 어째서인지 너무도 무서웠다.

 도망치듯이 다시 엄지손가락을 움직인다. 금방 그녀의 이름은 위쪽으로 흘러 화면에서 사라지고, 화면을 손가락으로 문지를 때마다 다른 연락처가 계속해서 나타난다. 또 다른 이름 하나를 발견하고 손이 멈추었다.

 특별히 용건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어떤 때에도 내 고민을 들어 주고, 등을 떠밀어 주었던 사람.

 ……상담을 해 봐야 할까. 하지만 뭘? 일을 잘 못 하고 있는 것?

 아니면.

 윗 몸을 일으켜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떨리는 손으로 통화 아이콘을 터치하고, 귀에 핸드폰을 댔다.

『――하루카니?』

 "프로듀서, 님……."

 두 번째 콜 소리보다도 빨리,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의 목소리가 내 고막을 흔들었다.

『음, 그 쪽은 어때? 몸은 괜찮니?』

 왠지 초조한 것 같으면서도 배려가 담긴 목소리가, 지금 엉망인 내 사고를 조금 진정시켜 주었다.

 "저……네. 괜찮아요. 모두들 잘 지내요?"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얄팍한 허세와. 덤처럼 덧붙인 물음.

『이쪽은 평소랑 똑같아. 다들 착실하게 해 주니까 일은 계속 늘어나는데 점점 내가 할 일은 편해지고 있어.』

 농담 같은 오랜만에 듣는 프로듀서님의 목소리. 그런가. 평소랑 똑같구나. 다들. 그녀도. 기쁜 것 같은, 쓸쓸한 것 같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마음이 왔다 갔다 해서 시선이 바닥 한 점에 떨어졌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래. 하루카는 뭔가 힘든 일 없니?』

 "――아하하, 딱히 없어요. 갑자기 왜 그러세요."

『아니, 일부러 전화까지 걸고, 뭔가 있었나 싶어서.』

 "좀 프로듀서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그런 건 안 되나요?"

 장난스럽게 말하자 스피커에서 우물우물, "뭐야, 그게.".

『별로 난 상관없지만 말야, 고맙게도 잠깐 잠깐 시간도 나고. 하루카 얘기라면 얼마든지 들어 줄게.』

 "고맙습니다. ……그럼 조금만, 말씀대로 할게요?"

 미키와 다른 배우들과 휴식 중에 있었던 콩트 같은 이야기. 미국에서 발견한 신기한 과자 이야기. 여기 TV 프로그램 이야기.

 그런 시시한 이야기를 프로듀서님은 맞장구를 치면서 들어 주셨다.

 완전히 이런 얘기의 흐름에 익숙해져 버렸을 즈음이었으니.

『그렇구나. 그래서 하루카는 그때 왜 그렇게 생각했니?』

 갑자기 프로듀서님이 내게 질문을 던졌을 때, 바로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 그게, 저요?"

『응.』

 "전, 그게……무슨 얘기였죠?"

『야…….』

 어이없단 목소리로 말하는 프로듀서님.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던 '나'에 대한 얘기.

『난 무슨 얘기든 상관없는데――그게 하루카가 하고 싶은 얘기면."

 나를 나무라는 듯한 말투가 아닌데. 프로듀서님의 말이 아프게 느껴졌다. 마치 내 지금 상황을 다 들킨 것만 같아서.

 "어, 그러니까……. 저,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던 걸까요……."

『――하루카?』

 필사적으로 감춰 두었을 텐데. 내 목소리가 떨리는 걸 눈치 챈 건지,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의아함이 담겨 있었다.

 "뭘 하고 싶었더라……."

 이제 그만둬야지. 생각하는 것도, 말하는 것도. 그렇게 생각해도 멈추질 않는다. 브레이크가 망가진 자전거가 언덕길을 내려가듯이.

 "저, 아이돌 안 하는 게 나았을까요……."

『뭐? 』

 "――어?"

 스피커에서 들려온 놀라는 소리보다도 내가 놀라는 소리가 더 컸다.

 뭐야,

 지금 그거.

 침대 위에 상반신이 털썩 떨어졌다.

 안 돼.

 이럼 안 돼.

 튀어 오르듯이 일어서서 핸드폰을 꼭 쥐었다.

 "죄송해요, 프로듀서님. 저 뭔가 좀 지친 것 같아요."

『야, 하루카――』

 "내일은 열심히 잘 할게요. 이제 꽤 추워졌으니까, 프로듀서님도 몸조심하세요."

 연달아서 내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멍하니 어두운 창밖을 바라본다.

 지금, 난.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어째서. 왜 얘기가 그렇게 돼.

 난 계속 아이돌이 되고 싶었고.

 아이돌이 됐고.

 그리, 고――?

 내게 소중했던 것이, 지금 있는 이 장소가, 발밑부터 무너져 내리듯이.

 아니다. 아닌데. 제대로 서 있어야 하는데.

 모르고 있었다. 전혀 깨닫지 못했다. 어느새 난 이런 곳에 있던 걸까.

 치하야 짱에게서 도망치고. 생각하는 것에서 도망치고. 현실에서도 도망치고. 프로듀서님에게서도 도망치고.

 하지만 내가 제일 많이 도망쳤던 건. 무엇보다도 무서웠던 건――

 빛나지 않는 핸드폰을 꼭 쥐고 멍하니 서 있었다.

 드디어, 알았다.

 하지만 내겐 분명 아직 깨닫지 못한 게 있다.



………

……





 그로부터 3주일이 지난 그 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12월에 들어서는 별 문제 없이 촬영이 진행되고 있다. 내 연기가 개선된 게 아니라. 꽉 막힌 그 장면을 나중으로 돌리고 다른 신을 찍기로 감독님이 정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문제는 미뤄지고 어떻게든 매일 매일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어제로 끝. 내일부터는 다시 '노조미'의 심정을 찾아내야 하는 장면 촬영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솔직히 난 아직도 그녀를 정면에서 마주보지 못하고 있다. 요 3주간 결국 자신에게서도 눈을 돌리길 계속해 왔다.

 그런 일요일인 오늘이 어떤 날인가 하면.

 오랜만에 하루 종일 오프라서, 난 로스앤젤레스 시내에서도 특히 번화한 거리에 쇼핑을 하러 왔다. 안 그래도 화려한 거리는 며칠 남은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장식으로 더욱 반짝이고 있다.

 특별히 갖고 싶은 게 있는 건 아니지만. 비가 온다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것도 좀 그래서, 기분 전환 삼아 메트로버스에 탄 게 몇 시간 전. 메트로라고 하면 지하철이란 이미지 밖에 없었지만, 버스는 물론 땅 위를 달린다. 몇 개의 루트로 드넓은 로스앤젤레스를 종횡무진 달린다. 여기에 오는 데에도 꽤 고생했고, 익숙하지 않은 도로 감각과 변변찮은 영어뿐인 장비로 무사히 호텔까지 돌아갈 수 있을까 조금 걱정되기는 한다.

 큰 사거리에 멈추어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돌아본다. 저쪽은 아까 점심을 먹었던 카페니까, 이번엔 다른 쪽으로 가 볼까. 하지만 너무 멀리 가서 미아가 되는 건 싫고…….

 조금 망설이다가 결국 시야에 비치는 제일 높은 빌딩을 향해 걸어 보기로 했다. 가방이 비를 맞지 않게 잘 끌어안고 걷기 시작한다. 평소에 쓰는 것보다 좀 큰 가방이라서 신경을 쓰며 걷는다. 쇼핑하러 가는 거니까 큰 가방이 좋겠다 싶어서 가지고 나왔지만, 미국에 올 때 기내에 가지고 들어갔던 가방이라 그 때 물건이 뒤섞여 들어 있어서 별로 물건을 넣을 자리가 없다. 말하자면, 이 가방을 가지고 나온 의미가 없다. 더 말하자면 결국 아직까지 아무것도 안 샀으니, 애초에 밖에 나온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난 뭘 하고 있는 걸까. 그렇게 혼잣말을 해 본다. 분명 중얼거리는 게 주변의 누군가에게 들렸다고 해도 일본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안심되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하고. 아, 하지만 말의 의미는 몰라도 이상한 사람이라곤 생각할까. 그만하자, 혼잣말.

 12월도 하순에 접어들었지만 그렇게 춥지는 않다. 이쪽은 아직 최고기온이 간단히 20도를 넘기도 하니까. 눈으로 변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비가 톡 톡 우산을 때린다.

 조금 걸어가다가, 위만 바라보던 시야 구석에 일본 글자가 보여서 '오'하고 놀랐다. 이건……일식집? 로스앤젤레스엔 미츠코시 같은 일본 백화점이 없어서 일본인이 고향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장소도 꽤 한정돼 있다. 조금 전에 식사를 한 참이지만 왠지 내 발은 그 가게로 끌려갔다. 잠깐 들여다보기만 하자. 표지로 삼은 빌딩을 놓치지 않도록 주의하고――

 "으앗."

 넘어졌다. 발 밑 주의가 소홀해져서 단차에 걸려 버린 것 같다. 가방이 어깨에서 미끄러져서 속에 든 것들이 널브러져 버렸다. 지붕이 있는 데라 정말 다행이다. 무슨 일인가 이쪽을 바라보는 점원에게 쓴웃음을 짓고, 굴러다니는 지갑이니 지도니 하는 것들을 주워 간다. 그 손이 마지막으로 본 적 없는 봉투에 닿았다.

 어라, 내가 이런 걸 가방에 넣어 뒀던가? 주워 보니 속에 뭔가가 들었는지 달그락 소리가 났다. 수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일단 봉투를 꼭 쥐고, 주위 시선에서 도망치듯이 조금 떨어진 가게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

 자, 그럼 문제는 이 수수께끼의 봉투다. 일단 위험한 물건은 아닌 것 같다. 속에 종이가 들어 있는 것 같아서 일단 그걸 꺼내 봤다. 접힌 메모 용지처럼 보이는 거기에 적힌, 단 한 줄의 말에 깜짝 놀랐다.

  '당신을 만나서, 정말로 행복했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너무나 짧은 편지를 쥐었다. 글자 모양이 조금 흐트러졌지만 잘못 볼 리가 없다. 이건 치하야 짱 글씨다. 언제, 왜 이런 걸.

 조금 생각한 끝에 '언제'의 답은 짐작이 갔다. 이건 그 할로윈 날 밤――우리들이 결별하기 조금 전, 내가 화장실에 갔을 때 그녀가 가방에 몰래 넣어뒀을 것이다. 내가 돌아왔을 때 당황하면서 다시 앉았던 치하야 짱. 누가 속을 뒤졌던 것처럼 가방 깊은 곳에 묻혀 있었던 핸드폰. 그런, 거였구나. 하지만 왜.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그날 밤 일. 하지만 달리기 시작한 사고를 멈출 수는 없었다. 입구에 손을 대고 봉투를 뒤집자, 그것을 부채질하듯이 키홀더가 하나 손바닥 안에 굴러 떨어졌다.

 그 장식, 작은 크리스탈에 갇힌 것은 주걱 같은 몸통에 의욕 없어 보이는 얼굴을 한 캐릭터. 이 녀석은 본 적이 있다. 여름이 끝날 즈음, 치하야 짱과 여행을 갔던 여관에서 발견한 물건이다. 내가 "귀여워"라고 했고, 그녀가 "어디가?"라고 평했던 지방 마스코트 캐릭터.

 링을 잡고 조명에 비추어 보니, 그 얼굴은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딘가 슬퍼 보이기도 하고. 거기엔 즐거웠을 추억이 갇혀 있었다.

 반짝이는 아름다운 추억. 하지만 결코 즐거운 일만 있지는 않았던 치하야 짱과의 추억.

 신발 옆에 툭 물방울이 떨어져서, 의아하게 생각한다. 여기엔 비가 안 올 텐데.

 톡 하고, 하나 더. 멈추지 않았다. 둑이 무너진 것처럼 흘러넘치는 기억이, 감정이, 유일한 출구를 찾은 것처럼 눈에서 흘렀다.

 "왜, 치하야, 짱."

 결국 입에서도 흐르기 시작했다.

 즐거웠는데, 분명히.

 어느새, 어째서, 치하야 짱은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던 기억 속에 밖에 남지 않은 걸까.

 하지만 그건 무척이나 소중하고, 사랑스럽고.

 번져 가는 시야 너머에서 크리스탈이 은은한 조명을 반사하면서 반짝였다. 그걸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에 어렴풋했던 사고가 결국 '그것'에 도달했다.

 그렇, 구나.

 치하야 짱도, 똑같았던, 거구나.

 분명 나와 만난 걸, 함께했던 시간을, 정말로 소중히 생각해 줬던 거다. 여행을 갔던 추억도, 반짝이는 유리 속에 넣어 두듯이, 소중히. 하지만 거기엔 절대로 손을 대지 않도록.

 이젠 어디로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몇 개의 소중한 것들이, 기쁨과 슬픔과 함께 몸 전체를 휘저었다. 생각한다, 생각하지 않는다 하는 문제가 아니라. 그저 멈추질 않았다. 감정의 격류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다.

 키홀더를 움켜쥐고 가슴에 댔다.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면서 아픈 기억에 손을 뻗는다. 치하야 짱의 마음을 바라본다.

 ‘좋아해, 하루카.’

 마지막에 치하야 짱과 얘기를 했던 밤. 우리들 관계의 토대를 무너뜨린 말. 작은 속삭임이었지만 너무도 강한 마음이 담겨 있었던, 단 한 마디.

 거짓말도, 장식도. 허세도, 수치도 없는. 틀림없이 치하야 짱의 모든 것이었다. 모든 것을 밝혀 주었다. 이제 와서 그 말의 진의를 생각할 필요도 없다. 치하야 짱은 정말로 나를 소중히 생각해 주었다. 지금까지 관계를 망가뜨려 버릴 정도로.

 나를, 사랑해, 주었다.

 ‘내게 있어서 사랑은, 내게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의 행복을, 내가 바랄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어.’

 내게 좋아한다고 말하기 전에. 그녀는 자신의 사랑에 대해서 그렇게 말했다. 그땐 그 말의 의미를 끝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지만.

 지금은 안다. 그 사랑이 날 향한 것이었다면.

 치하야 짱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여자를 사랑하게 된 자신으론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치하야 짱의 '행복'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랑의 행복은, 좋아하고, 사귀고, 스킨십을 하고. 더 가까워져서, 결혼하고, 가정을 만들고. 그런.

 분명 전부는 무리일지도 모른다. 둘 다 여자니까. 그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란 벽이고. 누군가의 마음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무척, 무척 멋대로 추측하는 거지만. 치하야 짱은 그런 의미로 날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자기 자신도. 그래서 처음부터 가까워지려는 게 아닌 고백을, 내게 했다. 이 이상 아무도 상처받지 않도록. 적절한 거리를 둘 수 있도록.

 하지만 누군가 다른 사람과 내가 행복해지는 것을, 그녀는 진심으로 바랄 수가 없었다.

 ……그런 건.

 그런 건 당연하잖아.

 나도 알아. 경멸할 리가 없잖아. 사랑이란 그런 거지?

 ‘친구조차, 아니야.’

 날 찢어 놓듯이 관통한 총알 같은 말.

 그래도 치하야 짱은 내 행복을 빌어 주려고 했다. 친구로서, 친구의 행복을. 그렇게 있을 수 있도록. 그게 올바른 '우리들'의 관계라고 생각해서.

 하지만 그녀는 나와 계속 친구로 지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싫어진 건가 생각했다. 치하야 짱에게 달라붙는 내가, 방해가 된 건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분명, 어떤 의미로 아주 조금은 맞았다. 내 멋대로인 악의 없는 호의는, 계속해서 옆에 있던 그녀를 상처입혔다.

 늘 내가 치하야 짱을 더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지하게 좋아하는 감정과 마주봤던 건 치하야 짱이었다.

 그녀가 나와 친구로 지낼 수 없었던 건.

 나와 있으면 어찌 할 수 없을 만큼 괴로웠으니까.

 분명 그건 결별의 인사가 아니라.

 언젠가 다시 진짜 친구가 되기 위한, 필사적인 기도였던 것이다.

 "으, 아……. 으흑, 으――"

 꼭 죄어진 목 속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래선 내가 친구로서 실격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언제부터 치하야 짱은 그런 마음을 품고, 그래도 나 같은 애 옆에 있어 주었을까.

 둘이서 여행을 갔던 여름의 끝?

 분명 키 홀더를 할로윈 날까지 전해주지 않았던 건, 그 날을 생각하고 미리 사 두었던 것이겠지. 생각해 보면 갑자기 여행을 가자고 말을 꺼낸 것부터가 치하야 짱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분명 마지막으로 즐거운 추억을 만들기 위해서. 나와 보낸 시간을 소중한 기억으로 봉해 두기 위해서.

 그렇다면, 여름 축제에 치하야 짱을 불렀을 땐 이미 그랬을까?

 그러고 보면 그날 밤 치하야 짱은 내게서 계속 거리를 두려고 했었다. 그 날 일 때문에, 치하야 짱은 날 피하려고 하는 걸까 생각하게 됐다. 그리고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이미 치하야 짱이 내 곁에 있는 걸 괴로워했다면 전부 납득이 간다.

 그럼 더 전, 여름이 시작될 즈음?

 치하야 짱이 다시 노래를 잃을 뻔 했을 때. 아무것도 내겐 상담해 주지 않아서. 하지만 갑자기 날 불러냈나 싶더니, 흠뻑 젖어서 뛰어와선 내게 라이브 티켓을 건네주고. 이런 걸 생각하는 건 아무리 그래도 치하야 짱에게 실례가 될까. 그 라이브에서, 사랑 노래는 나만을 위한 게 아닐까 생각한 건 오만일까.

 ……아니.

 분명 치하야 짱의 마음에서 계속 눈을 돌려온 게 훨씬, 훨씬 심한 짓이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계속.

 이런 건 조금만 생각하면 더 빨리 깨달을 수 있는 거였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걸 계속 피해 왔던 건――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든다. 조금 떨어진 빌딩의 커다란 디스플레이에, 미국에서 대인기인 아이돌이 비치고 있다. 선전하고 있는 새 CD는 일본에서도 발표가 결정된 물건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동경했었다. 아이돌이 되는 건 내 꿈이었다.

 사무소에 들어오고 나서. 그야 안 팔리는 시기도 어느 정도 있었지만. 그래도, 모두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즐거웠다. 사소한 활동도, 하루 종일 레슨만 하는 날도 충실한 날이었다.

 점점 큰 무대에서 라이브를 할 수 있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을 알아주고. 가슴을 펴고 아이돌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어서.

 내 꿈은 이루어졌다. 이루어지고 말았다.

 그러니 분명 나는, '지금'을 지키는 데에 너무 필사적이 되었던 거다. 충분히 행복한 시간을 정말 조금이라도 망가뜨릴 가능성이 있는 미래를 꿈꾸는 게, 무서웠다.

 다른 친구들은 '아이돌이 되는 것' 자체엔 그리 강한 집착을 품고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물론 그게 좋은지 나쁜지 하는 문제가 아니고. 예를 들어서 치하야 짱은 노래를 진지하게 추구하고. 마코토는 귀여워지고 싶다든가, 유키호는 약한 자신을 바꾸고 싶다든가 그런. 분명 다들 각각 다른 생각을 가슴에 품고, 아이돌이란 길을 골라서 무언가를 실현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나, 는.

 나도 물론 더 큰 스테이지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그런 바람은 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주변이 바뀌어 가면서까지 원하는 일인가 하면, 그렇지만도 않다.

 난 지금이 좋다. 친구들과 아이돌을 하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을 정말로 좋아한다. 그러니까 두 번째 올스타 라이브 때, 모두가 흩어져 버리는 게 너무도 싫었다. 필사적으로 이어 두려고 했다. 내 '모두 함께 즐겁게'는 다른 애들에게 폐가 되는 걸까 생각하기도 했다. 아레나 라이브를 앞두고 합숙했을 때, 프로듀서님이 해외로 가는 걸 말했을 때도 그렇다. 프로듀서님은 미래를 보고 결단했는데, 난 불안과 쓸쓸함에만 사로잡혀서.

 지금도 이렇게 할리우드에 와 있는 게 정말 옳은 것인지, 마음 어딘가에선 생각하고 있고. 다른 친구들과 치하야 짱과 떨어져서까지 걷고 있는 이 길은, 내가 바란 게 맞는 건지 생각하고. 그 끝에 있는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 무섭고, 눈을 돌리고.

 ……그렇다. 난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너무나 두렵다. 지금이 안 좋은 방향으로 바뀔 가능성을 보는 것이 두렵다.

 치하야 짱과의 관계도 그렇다.

 치하야 짱과 같이 있는 시간이 정말 좋아서. 이대로 계속 친구로 있었으면 하고.

 괜찮잖아, 그 앞일은 보지 않아도. 충분히 즐거웠으니까. 행복했으니까.

 그런데 치하야 짱이 그런 말을 하니까.

 친구로 있을 수 없을 만큼 좋아한다고 말해 주니까.

 어떡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어서.

 도망치고, 눈을 돌리고, 그 대상이 이렇게 멀리 떨어진 땅에서 어린애처럼 울고 있다.

 너무나 어리석었다. 내년 크리스마스도 같이 보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니. 그런 어린애 같은 순진하고 자기 멋대로인 '다음'을 기대하면서 치하야 짱에게 떠넘기기만 했던 나.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고, 눈 깜짝할 새에 가을도 끝나고. 막연한 소원만을 의지하며 맞은 겨울은, 이제 1년 전과는 모든 것이 바뀌고 말았다.

 바보 같아. 바보야. 이게 사람 마음도 자기 마음조차도 몰랐던 바보 같은 내 죄다.

 하지만 즐거웠다. 행복했다. 난 치하야 짱과 친구가 되어서.

 언젠가 치하야 짱이 다시 한 번 나와 친구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해 줄 때, 다시 만나면 된다. 그런 일도 있었지 하면서 괴로운 것도 웃어넘길 수 있게 되면. 일부러 그 이상을 바랄 필요도 없다.


 ――정말로?


 정말, 이야.

 한 순간 머리를 처드는 뱀처럼 떠오른 생각을 필사적으로 다시 한 번 집어 넣는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히 꽁꽁 덮어 둔다.

 그치만.

 치하야 짱이, 날 생각해서 내 준 답이라고?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은 나 같은 걸 위해서, 분명 마음이 엉망이 되도록 찾고 바라 준 '우리들'의 행복이라고?

 그 날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했던 내가,

 이제 와서 뭘 발견하고, 뭘 말할 수 있을까.

 "으, 윽, 아……극,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이젠 부끄러움도 체면도 뭣도 없었다. 어차피 시야가 부옇게 흐려져서 지나다니는 사람들 시선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당신을 만나서, 정말로 행복했습니다.'

 치하야 짱이 마지막에 내딛어 준 온 힘을 다한 한 걸음이, 바다도 시간도 뛰어넘어 도착하고 말았으니까. 정말 헤어질 때 들었던 말이, 내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부드럽고 애절하게 꼭 조였다.

 한 줄 뿐인 편지와 작은 선물을 움켜쥐고, 감정이 솟아오르는 대로 엉엉 울었다. 여기서 전부 내보내 버리자.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감정이 보이지 않을 만큼 깎여서 작아지도록. 둥실 떠올라서 내게서 멀어지도록.


 하늘을 넘어서 전해진 마음이 여기 있다.

 그렇다면 내 이 마음도 하늘에게 되돌려 주자.

 멀리 떨어진 너에게 닿도록.



 치하야 짱을 향한 좋아함. 치하야 짱이 내게 속삭여 준 의미의 좋아함. 그게 만약 내 안에 있다고 해도.

 이번에야말로 어쩐지 그런 게 아니다. 나 자신의 의지로 도망치지 않고, 눈을 돌리지 않고, 대신 없었던 일로 한다.

 만약 이게 우리들의 사랑이라면.

 부탁이야, 치하야 짱.

 나도 네 행복을 빌게 해 줘.

 누구보다도 소중한 네가.

 누구보다도 행복할 수 있도록.








 ――안녕.








 "아니야, 하루카!"

 오늘도 하루 종일 이어진 촬영을 끝내고, 촬영장을 뒤로한 내 등에 미키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걸음을 늦추어서 그녀의 발소리가 옆에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숙이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아니라니, 뭐가?"

 "나도 모르겠지만!"

 뭐야 그게, 하고 쓴웃음을 지어도 미키의 엄한 표정은 무너지지 않았다. 뭔가를 화내고 있는 것처럼. 뭔가가 답답한 것처럼. 우산을 안 든 쪽 손으로 주먹을 쥔 그녀의 머리 꼭대기에서, 삐친 머리가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 미키 머리카락은 평소보다 좀 더 말을 안 듣는다.

 "오늘 연기는 감독님도 오케이 해 주셨잖아. 나, 열심히 했어."

 "그렇지만, 그게 아니라……."

 미키가 입을 꼭 다문 채로 옆에서 내 눈을 들여다봤다. 둘의 우산이 부딪혀서 물방울이 튀었다.

 "그런 건 노조미의 '안녕.'이 아니야."

 "――윽."

 어제 길가에서 펑펑 울었을 때 기억이 되살아난다. 놀란 게 들키지 않도록 우산을 빙글 돌려서 그 그림자로 옆얼굴을 감추었다.

 "그거면 됐을 거야."

 "안 됐어. 그건 분명 노조미가 아니야."

 "……그럼 누구란 거야. ――나, 라든지?"

 미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우산을 들고 머뭇거리면서 물었더니, 그녀는 딱 잘라 고개를 저었다.

 "하루카도 아니야."

 안심한 것 같으면서도. 하지만 석연치 않은 마음이 가슴 속에 소용돌이쳤다. 미키는 내 연기 어디가 아니라고 하는 걸까.

 "미안, 미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좀 모르겠어. 나 그렇게 잘 하질 못하니까, 이번엔 '노조미'랑 '하루카'를 하는 것만으로 벅차."

 다른 사람을 연기할 여유는 없어, 그렇게 농담스럽게 말하고 어제부터 끊이지 않고 비가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회색 구름이 무겁다.

 "있잖아."

 미키는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하루카는 지금 누구야?"

 내 발이 멈추고, 다른 발소리 하나도 끊겼다. 우산이 비를 튕기는 소리만이 묘하게 크게 들렸다.

 "사람 이름을 불러 놓고, 그건 좀 너무하지 않아?"

 "그치만 하루카 이상하잖아. 지금 하루카는 정말로 미키가 아는 하루카야?"

 "……아마미 하루카, 열일곱살. 취미는 과자 만들기. 여고생이고, 아이돌 하고 있어요."

 "그런 건 미키도 알아."

 "그럼 됐잖아."

 "흐응."

 미키가 재미 없다는 듯이 우산을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리면서 내 앞으로 돌아서 왔다. 주먹을 쥔 손을 내 입가에 슥 가져가 댔다.

 "뭐, 뭐야……?"

 "아마미 상, 열일곱 살이란 건 정말입니까?"

 아무래도 인터뷰를 하는 기자 흉내인 것 같다. 왜 그런 걸 시작했는지는 모르지만 얘기를 돌릴 수 있다면 뭐든 괜찮다고 생각했다. 걸으면서 적당히 대답해 본다.

 "여자는 언제까지나 열일곱 살이에요."

 "말씀의 의미를 잘 모르겠습니다만."

 "여자에게 나이는 그냥 장식이라는 말이에요."

 "그럼 역시 미키도 결혼할 수 있겠다, 아핫."

 "잠깐만, 원래대로 돌아왔잖아. 벌써 질렸어?"

 "아~, 엇흠. 취미는 과자 만들기라고 하셨는데요, 특히 잘 하는 게 있습니까?"

 "어…, 뭐든지 일단은 만들 수 있는데……. 만들 기회가 많은 건 쿠키겠네요. 한 번에 많이 만들 수도 있고, 녹지 않으니까 나눠 주기도 쉽고."

 "그렇군요. 슬슬 오랜만에 하루카의 수제 케이크를 먹고 싶단 얘기가 들립니다만."

 "미키, 일본에 돌아가고 나서."

 "칫."

 "꽤 잘 질리는구나, 미키는."

 "으엇흠. 여고생이면 여러 고민이 있을 때 아닌가요?"

 "전 그다지 학교 안 가거든요."

 "하지만 어느 정도 귀여운 것 같고, 솔직히 고백 같은 거 받지 않나요?"

 "어느 정도란 말,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얼굴 마주보고 들으면 짜증이 올라오는데."

 "같은 사무소의 호시이 미키 상에는 훨씬 미치지 못하잖습니까."

 "싸움 거는 거지?"

 "누, 눈이 진지해, 하루카 무서워, 농담이야!"

 "아~ 네, 네."

 "으음, 뭐더라――그래, 반대로 좋아하는 사람은 없나요?"

 "가십을 찾는 기자였나."

 "없나요?"

 "……없어. 쓸쓸한 고교생활이니까."

 "……흐응."

 "이번엔 정말 끝이야?"

 "으응. 하나 더. 있잖아, 하루카는 왜 아이돌이 되기로 했어?"

 "그야 노래하고 춤추고 하는 게 좋았으니까. 동경했으니까. ……그런데 미키, 완전히 말투 원래대로 돌아왔잖아."

 "그럼 왜 하루카는 지금도 아이돌을 하는 거야?"

 "물론 그게 재밌으니까――"

 "거짓말쟁이."

 "어?"

 미키가 마이크 흉내를 내던 팔을 내리고 갑자기 찌르는 듯한 시선으로 날 노려보았다.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선다.

 "하루카, 지금 전혀 재밌어 보이지 않아."

 "……그럴 리가 없잖아."

 "필사적으로 스스로한테 거짓말을 하려고 해도, 미키는 알아. 미키가 지금 하루카랑 일하면서 전혀 재밌지가 않은 걸."

 "다 아는 것처럼 멋대로 말하지 마."

 "몰라. 모르니까 묻고 있잖아. 있지, 하루카. 날 봐."

 "보고, 있어."

 "으응. 하루카는 아무것도 안 보고 있어. 미키도, 하루카 자신도."

 "……시끄러."

 "시끄러운 줄 알면서 한 번 더 묻겠는데. 하루카는 왜 지금도 아이돌을 하는 거야?"

 "그건 내가 아이돌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그러는 거야? 같이 영화를 찍는 데 방해가 된다고?"

 "그런지도."

 "역시 미키, 싸움 거는 거지?"

 "그런지도."

 차도를 달리는 차가 발을 멈춘 우리들 옆을 눈 깜짝할 새에 스쳐 지나간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미키의 눈을 가만히 바라본다.

 "나도 여러 가지 생각했어."

 "그 결과가 오늘 그거야?"

 미키는 피식 웃었다. 머리에 피가 확 올라서 달려들고 싶어지는 충동을 필사적으로 눌렀다.

 "윽! 미키는 좋겠네, 아~무것도 생각 안 하는 것 같아서.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만큼 하고!"

 "그거면 됐잖아. 하루카도 그렇게 하면 좋을 텐데."

 "하고 있어! 열심히 하고 있어! 어차피 나는 열심히 안 해도 되는 미키랑은 다르니까!"

 "열심히 하는지 안 하는지 그런 얘기가 아니야. 그냥 하루카는, 정말로 겁이 많을 뿐이야. 솔직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왜.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분노와 굴욕에 입술이 떨렸다. 미키는 이제 웃고 있지조차 않았다.

 "이번 기회에 전부 솔직히 말할게. 지금 하루카를 보면 정말 짜증이 나."

 조용히 말하는 미키의 눈이 강하게 빛났다.

 "늘 하루카를 라이벌이라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너무 과대평가했나 봐. 지금 하루카한테 그런 가치는 없어. 흥미 없어. 미키를 안 보는 하루카는 이제 이쪽에서 안중에 없어."

 "미, 키……?"

 

 "솔직히 말해서, 폐가 된다구. 엉터리 연기 밖에 못 하는 '아마미 하루카'는, 이 이상 미키랑 딴 사람들 방해좀 안 했으면 좋겠어."

 "뭣――"

 미키가 빙글 돌아서 멀어져 가는 걸,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반론하고 싶어도 아무것도 받아칠 수가 없다.

 뭘 입에 담든. 미키에게, 자신에게 변명을 쌓아갈 뿐이란 걸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대로 떠날 줄 알았던 미키는 "아, 맞다."하고 몇 걸음 앞에서 멈춰 섰다. 가방을 열고 내 눈 앞까지 돌아와서, 꺼내든 한 장의 종이를 떠넘기듯이 건네주었다.

 이건, 티켓? 비행기 티켓?

 받아든 내가 영문을 몰라서 눈을 깜빡이고 있자 미키는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좀 이르지만, 크리스마스 선물."

 손 안의 티켓에 시선을 떨어뜨린다. 12월 23일 14시 20분 로스앤젤레스 발, 일본행. 내일, 이다.

 "뭐야, 이게……."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미키는 내게 등을 돌렸다.

 "그럼――바이바이."

 젖은 길을 찰박거리며 황록색 우산이 멀어져 갔다.

 손 안에서 '크리스마스 선물'이 부스럭 구겨졌다.

 이런,

 것까지 준비해서.

 미키는 분명히, 꽤 전부터 날 포기했던 것이다.  ‘지금’에 필사적으로 머무르려고 제자리걸음밖에 하려고 하지 않았던 날.

 역시 나는.

 아무것도 눈치 채질 못했구나.

 어느새인가 기울어진 우산 끝에서 떨어진 빗방울이 비참한 내 뺨을 적셨다.

 눈이 내리지 않는 이 거리에.

 비는 아직 그칠 것 같지 않다.



………

……





 어제 미키가 한 말은 생각보다 훨씬 큰 대미지를 내게 입힌 것 같았다.

 알람 소리에 눈이 뜨였을 때, 온 몸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미키와 만나는 것을 몸과 마음이 완전히 거부하고 있는 것처럼.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꽁꽁 묶인 것처럼 무겁고 뻑뻑한 손끝이 겨우 움직였을 때, 이건 안 되겠구나 생각했다.

 팔만 이불 밖으로 뻗어서 베개 맡에 굴러다니던 핸드폰을 꺼내, '몸이 안 좋아서 오늘은 쉴게요'하고 연락을 했다. 원래 반 휴일일 예정이었고 그다지 영향은 없지 않을까. 푹 쉬렴. 그렇게 통역 담당자가 말했다. 그러고 보면 그랬던가. 요즘엔 그날 그날을 어떻게든 넘기는 게 고작이라서, 그다지 다음날 이후 일정을 확인 안 하는 버릇이 들고 말았다.

 그래도 혼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낮을 보내도 아무한테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야 그런가. 난 학생이지만 그 나름대로 돈을 받고 일을 하는 몸이다. 꾀병을 부려도 사회인인 내게, 일로밖에 관계가 없는 내게, 일부러 시간과 노력을 들여 화를 내 줄 사람은 없다. 그저 황당해 할 뿐이다. 못 써먹겠다는 인식만 하고, 필요 없다면 잘라낼 뿐이다. 어제 미키가 마지막에 그렇게 했던 것처럼.

 하지만 미키는.

 계속 마주봐 주었다. 걱정해 주었다. 나 같은 사람에게 화를 내 주었다.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해서 필사적으로 발을 들이밀려는 그녀에게서 도망친 건 나다. 같이, 모두 함께 같은 듣기 좋은 말만 늘어놓고 결정적인 데서 거리를 두는 건 늘 내 쪽이다.

 프로듀서님이 날 감싸고 구멍에 빠지고, 라이브 연습도 생각처럼 안 되고. 그 때도, 레슨도 일도 던져두고 멋대로 혼자서 고민했었다. 또 겨울에 이 꼴이다. 난 앞으로 몇 번 이런 걸 반복하게 될까. 아이돌을 계속하는 동안, 계속……?

 이 3일간 그치지 않는 빗소리가 성가시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도록. 들어오지 않도록.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뒹굴 거린다.

 치하야 짱의 마음에서 눈을 돌리고. 프로듀서님한테도 얼버무리고. 미키에게서도 도망쳤다.

 혼자뿐이고, 스스로를 잘 알 수가 없어서.

 아마미 하루카는 뭘 하고 싶었던 걸까. 내가 바란 내 지금은, 사실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지만 이젠 뭐가 됐든 내가 생각해도 의미 없는 것뿐일까. 전부 다, 이젠 어찌할 수 없는 데까지 와 버린 걸까. 감독님도 날 포기해 버렸을까.

 그럼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지.



 어제보다 강한 비가 발코니를 계속 두드렸다.

 정말, 시끄럽구만.

 난 아무 것도 듣고 싶지 않은데. 보고 싶지 않은데.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부탁이니까, 나 같은 건――



 빗소리보다 높은 전자음이 낮인데도 어두운 방 안에 울렸다.

 무시한다.

 멈추지 않는다.

 이불에서 머리를 내밀자 핸드폰이 빛과 소리로 전화가 왔음을 알리고 있었다.

 ――시끄러.

 이윽고 힘이 다 떨어진 것처럼 부재중 전화로 이어졌다. 하지만 한 마디 메시지를 녹음하기 전에 뚝 끊기고, 다시 전화벨을 울리기 시작했다.

 아아, 정말.

 핸드폰을 들고 슬쩍 발신인을 확인하니, 프로듀서님이었다.

 무슨, 일일까. 미키가 뭔가 내 얘기를 한 걸까.

 이대로 전화를 안 받는 것도 생각해봤지만, 이 기세라면 내가 전화를 받을 때까지 멈출 것 같지 않았다.

 터치스크린을 조작해서 머뭇거리면서 귀에 댔다.

『――하루카니!?』

 거의 비명에 가까운 프로듀서님 목소리가 내 고막을 때렸다. 소리뿐인데 굉장한 박력에 놀라서 어깨가 움찔했다.

 "어, 그게, 하루카에요. 아마도."

 꼼지락거리며 이불에서 나와서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는다. 프로듀서님 치곤 거친 호흡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하루카, 진정하고 들어.』

 "네?"

『일하러 이동 중에, 치하야가 사고를 당했어.』

 "응?"

 별로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도 아니었는데, 말의 의미를 잘 알 수가 없다.

 "저, 죄송한데요, 다시 한 번 말해 주세요."

『치하야가 차에 치여서 중태야. 의식이 돌아오질 않아.』

 "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던, 것 같다.

『생명에 지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위험한 상태래.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서 각오는 해 뒀으면 해.』

 "왜, 그, 그런……."

 일이, 일어난 거야.

『바쁜데 정말 미안하다. 네게 얘기를 할까 어쩔까 고민했는데――하루카는 알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내가 멋대로 판단한 거야.』

 조금씩 진정을 되찾아 가는 프로듀서님의 말은 역시 잘 머릿속에 들어오질 않았다.

『지금은 오토나시 상이 붙어 있어. 내가 다쳐서 신세를 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그 병원에 가게 될 줄은 몰랐지만……지금부터 갈 거니까, 또 상황이 변하면 연락할게.』

 있잖아.

『――하루카?』

 뭐야.

 힘 없이 떨어진 팔이 침대 위에 툭 떨어졌다. 손가락이 무의식중에 통화를 끊었다.

 빗소리만이 끊임없이 조용한 방에 울리고 있다.

 ……정말로.

 너무 멋대로 구는 거 아니야, 치하야 짱.

 나한테 좋아한다고 그래 놓고.

 나한테 잘 가라고 그러고.

 이번엔 아무런 말도 없이 어디로 가 버릴지도 모른대.

 적당히 좀 해.

 이제,








 ――나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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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가 비행기표를 꺼내는 부분에서 소름이 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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