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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맨발 그대로의 사랑이었습니다. - 5

댓글: 2 / 조회: 1417 / 추천: 5



본문 - 09-10, 2015 09:03에 작성됨.

그것은, 맨발 그대로의 사랑이었습니다.

5. 여름의 시작, 맑음의 향기

 

 평소와 같은 레슨실. 어제와 바뀐 점이라면, 7월에 들어서 화이트보드 옆의 캘린더가 넘어가면서 날짜 위의 자양화 사진이 나팔꽃으로 변한 정도일까.

 피아노와 믹서가 있는 노래 연습에 특화된 이 방은, 요즘 점점 오르고 있는 바깥 기온이나 소음과는 완전히 격리된 공간이다. 손님들이 들어선 홀, 아레나 같은 곳을 제외하면 이곳만큼 쾌적하게 노래할 수 있는 장소도 없다.

 이 환경에서 최고의 퍼포먼스를 할 수 없다면 그 원인은 가수 자신에게 있을 뿐이다.

 따라와 준 프로듀서의 불안과 긴장이 섞인 시선을 느끼며, 보컬 선생님의 피아노에 맞추어 발성 연습을 마친다. 제대로 된 목소리가 나오는 분명한 감촉.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 하지만.

 다음 주말에 열릴 예정인 라이브의 세트리스트에 편성된, 지금부터 연습할 한 곡. 몇 번이고 노래한 이 곡은 평소 라이브 전에 여기서 노래할 때에, 연습이 아닌 그저 확인에 불과했다.

 원하는 감정에 원하는 음을 싣기 위한 조정은 진작에 끝났다. 오랜만에 부를 때라도, 이전보다 실력이 늘었을 자신에게 이 곡은 제대로 따라와 주었다.

 평소와 바뀐 점이라면.

 캘린더에 그려진 꽃 사진 말고도, 내 오른손에는 악보가 들려 있었다. 한 번 불러 보기만 할 때에는 전혀 필요 없는 물건이다.

 양 손으로 천천히 펼쳐 본다. 오선보 위를 뛰어다니는 음표의 흐름을 확인한다. 그 아래에 적힌 가사를 훑는다.

 이 시점에서, 이미 결과는 예상할 수 있었다.

 프로듀서가 컴퓨터를 만진다. 인트로가 없는 대신 4박자의 전자음이 날카롭게 울려 퍼진다. 1, 2, 3, 4, 1, 2――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목이 막힌 것 같은 느낌. 노랫소리가 갑자기 끊긴다.

 "아――――"

 여린박에서 시작된 노래는 소절 앞부분에 도달할 때에는 이미 내 것이 아닌 듯한 위화감에 싸여 버려서, 계속하는 것을 전신이 거부하고 있었다.

 가수를 내버려 두고 녹음된 백밴드의 연주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다시 프로듀서가 키보드를 두드리자 숨이 막힐 듯한 정적이 찾아왔다.

 목 상태가 나쁜 것은 아니다. 가사를 잊어버린 것도 아니다.

 "이 곡도 안 되나……."

 프로듀서가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이마에 손을 짚었다.

 "……죄송합니다."

 중간에 끊긴 노래 끝보다도 조그맣게 움츠러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치하야가 사과할 일이 아니야. 하지만 이렇게 되면 세트 리스트를 조금 건드려야겠다. 평소처럼 부를 수 있는 노래도 있지?"

 "네……."

 일단은, 이란 말을 삼켜서 배 아래까지 가라앉힌다. 자신의 모자람에 짜증과 한심함을 느낀다. 정신 상태에 좌우되어서 노래를 부를 수 없게 되는 아이돌이라니, 프로 실격이다. 노래하지 못하는 키사라기 치하야는 더 이상 키사라기 치하야가 아니다. 이전에 주간지에 내 폭로기사가 실렸을 때 일은 아직 기억 위쪽에 있지만, 이번은 그 때와는 비슷한 듯하면서 꽤 다르다. 증상도, 원인도.

 지금, 몇 개의 노래를 부르려 할 때, 아무리 부르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도 가사가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빠져나가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 노래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가 신기루처럼 흐려져 사라져 간다. 손을 뻗어도 노래가 점점 멀어져 가고 만다. 이제는 잘 부를 수 있다는 이미지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착지점을 잃은 노래는 그저 막연히 둥실둥실 떠다닐 뿐, 곡으로서 성립되질 않는다.

 마지막까지 억지로 부르려 하면 부를 수는 있겠지. 하지만 키사라기 치하야의 노래를 들으려 온 사람에게는, 금방 들킬 얄팍한 것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노래를 부르는 것을 나 자신이 용서할 수 없다. 이런 때에 뭘 따지냐는 말을 듣더라도 마지막에 남은 내 프라이드가 방해를 해서, 무의식중에 목을 막으려고 한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어떡하지……."

 컴퓨터 화면을 보며 생각에 잠기는 프로듀서에게는 면목 없지만, 나는 이유로 짐작 가는 것을 프로듀서를 포함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해야겠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번에도 원인에 짐작은 간다. 하지만 그것을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인정하지 못했다.



………

……





 그 날은 아침부터 비가 왔다.

 3주일쯤 전, 6월 중순. 나갈 준비가 끝나고 일하러 갈 때까지의 잠깐 남은 시간. 소파에 앉으며 이 비는 오늘 그칠까 하고, 나름대로 잘 다룰 수 있게 된 스마트 폰으로 일기 예보라도 확인하려고 인터넷을 열었다. 그 때, 검색 사이트 톱 페이지 위에 있었던 별것 아닌 칼럼의 제목이 눈을 끌었다.

 '내일 6월 12일은 연인의 날!'

 그런 날이 있었구나, 조용히 놀랐다. 특별히 축일도 아무것도 아니고, 반지나 그런 게 잘 팔리도록 멋대로 누군가 정한 거겠지. 시시하다.

 ……다만, 유래는 조금 신경 쓰였다. 말장난하고도 관계없어 보였고, 내일이 연인의 날인지 뭔지가 된 이유는 뭔가 있겠지. 호기심이 상관없다는 마음을 이겨서 링크를 눌렀다. 페이지가 바뀐다.

 아무래도 자신의 사진을 작은 액자에 넣어서 연인과 주고받는 브라질의 관습을 일본에 도입했다는 것 같다. 흑막은, 전국액자조합연합회? 으음, 납득이 갈 것도 같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작은 액자라.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게 되면서 일단 하나를 샀지만, 결국 어디 서랍 안에 넣어뒀던 것 같다. 모처럼이니까 하루카 사진이라도 넣어서 슬쩍 장식해 둘까.

 책상 제일 위의 서랍을 열어서 뒤적거리지만, 보이지 않는다. 두 번째. 요즘 안 쓰고 있었던 스테이플러나 체온계 같은 것들 안쪽에서 찾던 것을 발견했다.

 아직 뜯지 않은 상자를 열어 보니, 주변에 파인 홈 이외에는 장식이 없는, 나무 재질이 어렴풋이 보이는 갈색 나무 액자가 드러났다.

 그러면 여기에 어떤 하루카를 넣을까, 도저히 아이돌을 하는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표정이란 것을 자각하면서, 노트북에 옮겨둔 찍었던 사진들을 바라본다.

 깊은 눈에 한 쪽 발이 빠져서 양 팔을 휘적거리는 이 하루카일까, 꽃밭에 같이 갔을 때에 아이처럼 뛰어다니던 이쪽 하루카일까, 아니면 저저번 같이 라이브를 했을 때 무대 구석에서 몰래 찍은 하루카일까――

 전부 귀엽다.

 마우스 휠을 손가락으로 돌리면서, 아래로 아래로.

 아, 이 사진…….

 올해 하루카 생일에 둘이서 같이 찍은 사진. 조금 어색하게 웃는 내 옆에서 하루카의 만점 웃음이 피어 있다. 다음번에 프린트해서 하루카에게 주려고 했던 사진이다. 마침 잘 됐다고 생각하면서 프린터를 켜고 사진 전용 용지를 세트한다. 인쇄 시작.

 프린터가 소리를 내며 일하는 것을 들으면서, 문득――정말로, 문득. 생각하고 말았다. 나도 찍혀 있는 이 사진을 액자에 넣어서 내일 하루카에게 전해준다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고.

 하루카가 당황하는 표정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 정말로 고민에 빠질지도 모른다. 애초에 연인의 날 같은 건 모를지도 모른다. 나도 아까 알게 된 참이고. 아니, 내가 몰랐을 뿐이지 이 6월 12일이란 건 세간에선 널리 알려져 있는 걸까.

 그냥 별것 아닌 농담이다. 아마 실행조차 안 할 것이다. 역시 연인의 날 같은 건 시시하다고 생각했고, 애초에 누구랑 누가 연인이라고, 그렇게.

 이상한 생각을 했던 자신에 한숨이 나온다. 지친 걸까.

 그저 무의식중에 손이 인쇄가 끝난 사진을 액자에 넣었다. 유리 한 장 너머로도 선명한 하루카의 웃음을 바라보길 20초, 겨우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뭘 하는 거야, 나는.

 시계를 본다. 막 돌아온 현실이 잠깐 쉬게 두지도 않겠다는 듯이 나를 몰아붙이려 한다. 이래선 조금 뛰지 않으면 지각하고 만다.

 모처럼 할 일이 생긴 액자를, 일단 다시 서랍 속에 쑤셔 넣었다. 셔츠 손목의 단추를 잠그면서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와 우산을 접었을 때, 핸드폰이 메일이 왔음을 알렸다.

 "정말이지, 이런 바쁜 때에……."

 자업자득인 상황에 나도 모르게 불평을 하면서 핸드폰을 꺼냈다. 보낸 사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바보 같은 작은 짜증이 싹 가시고 무언가 다른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오늘 공부하러 가도 돼?』

 대답이 『그래.』 라는 무미건조한 말이 되어 버린 것은, 아마도 서두르고 있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

……





 당연하다는 듯이 묵고 가기로 한 하루카는, 어제와는 달리 맑게 개인 기분 좋은 아침을 즐기는 것처럼 태평하게 잠에 빠져 있었다.

 공부를 하려고 우리 집에 왔는데도 이 방법 저 방법으로 교과서에서 도망가려고 하는 하루카의 알 수 없는 행동에 고민하면서 보냈던 하루 끝 무렵에, 내일은 7시에 일어나서 쇼핑 가자며 자명종을 만졌던 건 하루카 자신이었는데. 충실하면서 기특하게 7시를 계속해서 외치는 자명종을 완전히 무시하고 꿈나라에서 돌아오지 않는 하루카. 그녀의 행복한 자는 얼굴을 잠깐 바라보고 나서, 뭐 상관없나 싶어 알람을 껐다. 모처럼 반나절의 휴일이다. 일을 갈 시간까지는 푹 자게 내버려 두자.

 "그나저나, 덥다."

 하루카한테 끌어안겨 있는 쪽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 나를 끌어안는 베개나 그런 걸로 착각하고 있는 건지, 타월켓 밑에서 꼭 붙잡혀 있다. 언제 이렇게 됐지…….

 냉정한 척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꽤 필사적이다. 하루카가, 너무 가깝다. 심장이 혈액을 보내는 리듬이 빨라져 간다. 왠지 체온도 점점 올라서, 이대로라면 땀이 나 버릴 것 같다.

 일단은 진정하자. 소수일까, 소수를 세면 되는 걸까. 아아, 하지만 하루카의 얼굴이, 날숨이 귀에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있다. 슬쩍 옆을 보니, 부드러운 호를 그리는 예쁜 눈썹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가, 이 눈썹을 세면 되는 건가……?

 문득, 예전에 이 하루카의 옆얼굴에 입을 맞췄던 것을 떠올린다. 그때와 같이, 갑자기 조용히 불타오르는 듯한, 떳떳하지 못한, 신기한 느낌이 가슴 깊은 곳에서 불꽃을 쏘아 올리는 것을 느꼈다.

 당황하면서 하루카에게서 뭄을 떨어뜨리고 침대에서 내려온다.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고, 하루카를 돌아보았다. 그 자는 얼굴은 너무도 무방비해서, 반대로 누구도 간단히 손댈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손등으로 입가를 닦는다. 더위 때문이 아닌 기분 나쁜 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갑자기, 나는 하루카 곁에 있어선 안 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서 단번에 들이킨다. 차가움이 목부터 몸 한 가운데까지 떨어져, 겨우 날뛰던 고동이 원래 페이스로 돌아갔다.

 나는 대체 어떻게 돼 버린 걸까. 하루카가 너무 좋아서 망가져 버린 걸까.

 애초에 너무 좋아한다니 그게 뭐지. 너무 좋아하면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나는 어떻게 되고 싶다는 말인가.

 ‘내일 6월 12일은, 연인의 날!’

 어제 아침에 봤던 사이트의 광고가 플래시백된다.

 말도 안 돼.

 그건 좀, 비약이 심하다. 그보다도 영문을 모르겠다.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서 어리석은 생각의 싹을 내쫓는다. 하지만.

 서랍 속에 넣어둔 액자. 그것을 어떻게 할지, 나는 태양이 높아지고 하루카가 눈을 비비며 일어날 때까지 계속 고민하게 된다.



………

……





 하루카와 나란히 사무소를 나서서, 완전히 해가 떨어진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이 많은 듯한 느낌이 든다.

 가끔 옆을 달리는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눈을 찌푸리면서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며 집으로 돌아간다. 다음 다음 대로에 도착할 때까지, 한동안 하루카와 함께 길을 걷는다.

 결국 그 액자는 어떻게 할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로 일단 내가 들고 있는, 일에 들고 갔던 가방 속에 들어 있다.

 "참, 역시 일도 반나절밖에 안 하면 돌아가는 발걸음도 가볍네!"

 "그렇지. 하루카는 오늘 낮까지 푹 잤으니까."

 "으으, 그건 면목 없습니다……. 치하야 짱, 화났어?"

 "설마. 나는――"

 하루카와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그런 말을 삼키고, 대신 못된 웃음을 띄운다.

 "――아미가, '치하야 언니가 평소에 하고 있는 걸 알려줘! 아미는 그걸 반대로 해서 웃후~응한 바디가 될 테니까!'라고 태평하게 웃으면서 말했을 때 정도로밖에 화 안 났어.

 "……그거, 엄청 화내고 있는 거죠?"

 "아니, 아미에게 악의는 없었을 테니까. 하루카도 그렇잖아?"

 "그건 그렇지만, 치하야 짱, 그 다음에 아미한테 주먹돌리기 했으면서."

 "그거랑 이건 다른 얘기니까."

 히익, 하고 목이 막히는 듯한 비명을 흘리면서, 하루카가 한 발짝 물러난다.

 "그럼, 악의는 없었다지만 나와의 약속을 어긴 하루카를 어떻게 해 줄까."

 "머리는……머리는 봐주세요……! 이 이상 뇌세포가 죽으면 공부를 못 하게 돼버려요! 뭐든지 할 테니, 제발……."

 "……뭐든지?"

 뭐든지란 말을 듣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 그런 눈으로 보면, 시집 못 가게 돼……."

 흠칫하고 제정신을 차린다. 그런 눈으로 보였을까. 내가 깊고 깊게 억누르고 있을 것들이, 하루카에게――

 ……아니, 하루카는 재밌다는 듯이 몸을 배배 꼬고 있으니까, 단지 나를 놀렸을 뿐일 거다.

 "바, 바보 같은 말 하지 마. 그래, 하루카는――"

 숨을 고르고, 판결을 내린다.

 "어제 계속 도망쳤으니까, 이번에야말로 나와 공부를 해야겠구나."

 "……응?"

 "시험 전에, 또 우리 집에서."

 "어, 그건 약속이야?"

 "맞아. 약속을 어긴 하루카에게 어울리는 벌이야."

 단지 같이 있고 싶다는 바람을 같이 공부한다는 구실로 바꾼 것이 들키지 않도록, 허세를 부리듯이 없는 가슴을 폈다. 하루카가 따뜻한 웃음을 지었다. 그 시선이 가슴을 향해 있었다면, 하루카라 하더라도 한 대 쳤을지도 모르겠다.

 "에헤헤, 새 약속이다!"

 "그래."

 하지만. 하루카에게 들키지 않았다고 해도. 나는 내 안에, 나로서는 제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고 보면 하루카는 알고 있을까.

 "저기, 하루카.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응? 6월 12일이잖아, 왜?"

 이런 반응을 보니, 모르는 것 같다. 모른다면 지금 건네줘도 좋을지도 모른다. 흔들리는 가방에 슬쩍 손을 댄다.

 "아, 빨래하기 좋은 날이라고 그랬어!"

 "그랬지. 그래도 구름 모양이 수상해. 정말로 우산을 사무소에 둬서 괜찮겠어?"

 "우산은 집에도 하나 더 있고, 갑자기 비가 내릴 때 하나 놓아두면 편리하지 않을까 싶어서. 설마 지금 비가 내리거나――"

 톡, 코 위에 물방울이 튀겼다.

 "어, 진짜?"

 멍하니 있는 하루카의 머리에도 빗방울이 떨어진다. 그것은 금방 실처럼 이어져서, 우리들을 적시기 시작했다.

 "으와, 와와와! 여기면 역보다 사무소가 더 가까울까! 치하야 짱은 접는 우산 갖고 있었지! 나 우산 가지러 돌아갈 테니까, 안녕!"

 "아, 잠깐――"

 말하기가 무섭게 하루카는 발을 돌리고 왔던 길을 쏜살같이 달려갔다. 사무소까지 같이 가려고 했는데. 내 접는 우산은 작으니까 둘이 쓰면 어깨가 젖을지도 모르지만,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을 텐데.

 한숨을 쉬면서 가방에서 우산을 꺼내 폈다. 가방 지퍼를 잠그려고 하다, 그 둘이 찍은 사진을 넣은 액자가 눈에 걸렸다.

 결국 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아니 딱히, 생각났으니까 빨리 전해주려고 했을 뿐이지, 오늘이 아니더라도.

 ……아니. 이걸 전해주든 전해주지 않든 그건 둘째 치고, 하루카를 쫓아서 사무소에 돌아가 버릴까.

 다시 한 번, 하루카와 함께 이 길을 걸을 수 있다. 조금 더 수다를 떨 수 있다.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엇나갈 것 같은 양 다리를 달래면서 빨리도 생기기 시작한 물웅덩이를 밟지 않도록 신중히 나아간다.

 문제를 뒤로 미루고.

 생각하는 것에서 도망치고.

 그런 나에게 벌이 내린 것처럼.

 하루카와 프로듀서가 사무소에서 나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프로듀서는 우산을 안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하루카가 빨간 우산을 펼치고 자신과 프로듀서가 비를 맞지 않도록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프로듀서가 당황하면서 빗속으로 도망쳐, 빠른 말로 뭐라고 하고 있다. 이 거리에선 들리지 않지만 아이돌이 자신과 같은 우산을 쓰고 있는 걸 목격당하면 어쩔 거냐, 그런 거겠지.

 하루카가 조금 웃고서, 가방에서 모자를 꺼내고 가짜 안경을 쓴다. 프로듀서가 포기한 듯이 한숨을 쉬면서 하루카에게서 우산을 받아, 거의 몸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걷기 시작한다.

 그런 그저 당연한 광경을, 어째서 벌이라고 생각했을까. 모르겠다. 모르겠지만.

 "아――――"

 나는 지금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어딜 향해야 할지도 모를, 자신의 몸을 안쪽부터 태우면서 세포를 유린하는 듯한, 감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뜨거움을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이미 폐는 재가 돼 버렸는지도 모른다. 소리를 이루지 못한 외침이 쌕쌕거리며 목 틈새에서 새어나왔다.

 

 폭력적으로 애절한 무언가가 혈액 대신 온 몸을 돈다. 몸의 자유조차 빼앗기는 느낌 속에서 오직 하나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진짜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옆길로 몸을 던지는 것뿐이었다.

 십자가에 매달려 화형당하는 마녀처럼. 태양 아래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흡혈귀처럼.

 뜨거움과 고통에 불타서, 눈부신 것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뜨거울 리가 없는데. 아플 리가 없는데. 아픈데도, 뜨거운데도, 점점 텅 비어가는 느낌. 내가, 내가 아니게 되어가는 듯한.

 손 끝에서 우산이 미끄러져 떨어졌다. 차가운 비가 나를 때린다. 셔츠가 축축이 젖어 간다.

 난 뭘 들떠 있던 걸까.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에 고통을 느끼고 있던 걸까.

 조금 옆을, 나를 눈치 채지 못한 두 사람이 지나간다.

 단 하나, 그것을 보고 내가 제대로 품을 수 있던 생각은.

 큰 우산 밑에서 젖지 않는 아슬아슬한 거리를 유지하고 걸어가는 하루카와 프로듀서는, 내 우산 밑에서 둘이 어깨를 적시면서 걷는 것보다, 자연스럽고 옳다고 생각했다.



………

……





 완전히 젖어서 돌아온 다음날.

 다행히도 몸이 안 좋아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벤트 중간에 있었던 미니라이브에서, 나는 마지막 한 곡을 부르지 못했다.

 그 날 'relations'가 스르륵 나에게서 멀어진 듯한 느낌을 받고 나서,

 몇 개의 곡이, 내게서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

……





 "치하야! 레슨 어땠어?"

 "치하야 짱, 괜찮아……?"

 한심했던 보컬 레슨을 끝내고 사무소로 돌아온 나를, 마코토와 하기와라 상이 소파에서 일어서며 맞이해 주었다. 둘 다 다른 일은 진작에 끝났을 텐데 기다려 준 것 같다.

 다음 주말 라이브는 우리들 세 명이 서는 스테이지다. 내 노래의 상태가 안 좋은 건 이미 사무소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지만, 둘은 이제 곧 같이 큰 라이브를 하기도 해서 특히 신경을 써 주고 있다. 폐를 끼치고 있는 걸 가슴 아프게 생각하면서 조금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그렇구나, 하고 낙담하던 마코토가, 금방 다시 얼굴을 들고 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치하야라면 괜찮아! 좀 상태가 안 좋더라도, 우리들이 붙어 있고 말야!"

 "응. 치하야 짱, 마코토 짱도, 일단 앉아 있어. 차 타 올게."

 하기와라 상이 종종걸음으로 부엌으로 갔다. 안쪽에서 사무 일을 하고 있던 오토나시 상에게 목례를 하고, 마코토와 마주보고 의자에 앉았다.

 "그렇구나, '눈이 마주치는 순간'도 안 됐구나……."

 "……응."

 "그래도 아직 시간은 있고, 일단 이번엔 공연까지 부를 수 있는 곡으로 확실히 연습하면 어떻게든 될 거야. 프로듀서라면 구성같은 것도 잘 해 줄테고.

 "……정말 프로듀서에게는 면목이 없어."

 "가끔은 이럴 때도 있지 뭐. 발라드 쪽은 '파랑새'나 '잠자는 공주'도 안 됐던가?"

 "……."

 마코토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만다.

 "흐음, 나도 오랜만에 옆에서 들을 수 있나 하고 기대했는데, 어쩔 수 없나. ……그럼 가끔은 내가 발라드 부르거나 하는 건 어떨까!?"

 "후후. 마코토 짱, 부른다면 뭘 부를 거야? 자, 차 타 왔어."

 "고마워."

 돌아온 하기와라 상에게서 찻잔을 받는다. 하기와라 상이 마코토에도 차를 건네면서 그녀 옆에 앉아, 테이블에 쟁반을 두었다.

 "으음, '곁에'나?"

 "그건 아즈사 상 노래잖아……. 게다가 마코토 짱 이미지랑은 다르고."

 "이미지라니 뭐야! 아니, 이 이야기를 유키호랑 하면 늪에 빠지고 지뢰를 밟게 될 것 같으니까 그만 둘게……."

 둘이 대화하는 것을 들으며 차를 입에 댄다. 따뜻함이 천천히 퍼져서, 나도 모르게 "맛있다."고 중얼거렸더니 하기와라 상이 싱긋 웃었다.

 "다행이다. 지쳤을 땐 역시 차를 마시면서 푹 쉬는 거지. ……그래서, 치하야 짱,"

 하기와라 상의 눈이 내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이, 조금 가늘어졌다.

 "나랑 부를 'inferno'는, 될 것 같아?"

 "……미안해. 아마, 무리일 거야."

 "……그렇구나."

 하기와라 상이 유감스럽다는 듯이, 하지만 무언가 납득한 것처럼 조용히 끄덕였다. 마코토가 의자 등받이에 깊게 몸을 맡기고,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이번에 치하야가 이렇게 된 원인은 뭐가 있을까."

 "……우리들이라도 괜찮으면 언제든지 도와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사양하지 말고 말해줘."

 "……고마워, 둘 다."

 그녀들의 상냥함이 마음에 스며서, 조금 어깨의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따끔한 아픔을 동반한 죄책감을 느낀다.

 분명 하기와라 상은 어렴풋이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내가 못 부르게 된 곡들의 공통점을.

 하지만 나는, 이번 일로 누구와도 상담할 생각이 없었다.

 나 자신이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분명 해결책은 외부에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증명하고 싶었다. 모두가 지탱해 준 키사라기 치하야는, 되찾아 준 노래는, 이제 괜찮다고. 앞으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계속 노래할 수 있는 힘을 받았다고, 제대로 증명해야 한다.

 3주 전부터 내가 못 부르게 된 곡은 전부 사랑 노래다. 나 자신의 심정이 어떤지 하는 건 둘째 치고 그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이전에 가나하 상이 크리스마스 라이너라는 CM에 출연하게 되었을 때, 그녀가 지금 여기에 있는 세 명과 하루카에게 상담을 청한 적이 있다. 연기하게 된 역의 여자애 마음을 잘 모르겠다, 사랑이란 뭘까.

 다들 여러 가지 사랑에 대한 이미지가 있는 것 같지만 나는 그게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랑 노래를 부를 때, 계속 가사 속 인물에게 물어보고 있다. 그걸 그대로 가나하 상에게 조언해 주었다.

 너는 누구야? 어떤 사람을 생각하면서, 웃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하는 거야?

 '그녀'는 노래하거나 연기하는 내 안에 밖에 없어서, 나만 그 아이와 대화할 수 있다. 정면에 마주보고 아무리 시간이 걸리더라도 조금씩 이해해 나가서, 자신에게 쌓아 간다. 그것이 아무리 이해하기 어려워도 표현할 때에는 내가 너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가슴을 펼 수 있도록.

 그런 식으로 계속 노래해 왔다. 하지만 지금은.

 마코토와 하기와라 상과 헤어져서 완전히 어두워진 집으로 가는 밤길을 혼자서 걷는다.

 하루 종일 구름이 끼어 있던 하늘은 지금이라도 울기 시작할 것 같다. 그 날도――고작 액자 하나에 정신을 뺏기면서 하루카와 나란히 이렇게 걸었던 밤도 이런 하늘이었지, 그렇게 떠올리면서.

 그렇다, 분명 나는 모르게 돼 버린 것이다. '연인의 날'이나, 액자나, 프로듀서나, 하루카나. 막대자석 더미에서 한 움큼을 떼어 내서 봉지 안에 던져 넣은 것처럼, 붙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있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어. 『당신은 지금 어떤 마음이야?』"

 다니는 사람도 거의 없는 밤길, 하지만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도록 오늘 부르지 못한 가사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돌아갈 수 없는 두 사람이란 걸 알고 있지만, 조금만 이대로 눈을 돌리지 말아줘."

 몇 백 번이나, 몇 천 번이나 노래하고 읽었던 그것은 기억의 서랍을 열 필요도 없이 술술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이 가사 속에 존재했던 '그녀'의 모습은 역시 붙잡을 수가 없다.

 '그녀'가 빠진 가사 같은 건 그저 의미 없는 말의 연속일 뿐이다. 그런 게 노래가 될 리가 없다.

 모르겠다. 그렇게 제대로 마주보고 있었던 '그녀'가 지금 뭘 생각하고, 어디로 가 버렸는지. 이 곡 뿐만이 아니다. 즐거운 사랑, 괴로운 사랑. 이루어진 사랑, 이루지 못한 사랑. 하나의 만남과 이별. 사랑을 하는 곡과 내 안에 각각 있었던 여러 가지 사랑을 하던 모든 '그녀'는. 나, 는――

 가로등에 비추어진 지면에서 뻗어 나온 또 하나의 나는 조용히 따라올 뿐. 결국은 빙글빙글 돌고만 있는 생각에 출구를 제시해 주지는 않는다. 면목이 없구나, 나 같은 사람과 같이 다니게 돼서. 새까만 그림자는 역시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몸을 들이밀었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왔다. 바로 자 버리자. ……아니, 다음 라이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준비는 해 둬야지. 부를 수 있는 곡도 주의 깊게 들어 둘까.

 책상 위에 펼쳐진 악보 안에서 몇 개를 집는다. 소파로 가려다――다시 한 번, 책상을 돌아보았다.

 저 서랍 안에는 결국 아직도 건네주지 못한 액자가 들어 있다. 하루카와 함께 찍은 그 사진과 함께. 그리고 또 하나, 그 옆에――

 하루카――

 내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듣고 가장 먼저, 가장 걱정해 준 건 역시 하루카였다. 무슨 일이 있었어?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말해줘. 괜찮아, 치하야 짱――

 그렇게 말하며 나를 어디까지고 진지하게 걱정해 주고, 상냥하게 대해 주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나는 곁에 있으려고 하는 하루카에게서 살며시 거리를 두었다. 지금은 그대로 둬야겠다고 판단해 준 것인지, 하루카도 그것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동안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로 한 것 같았다. 그 뒤로 하루카와 말할 기회는 거의 없었다.

 말할 수 없다. 특히 하루카에게는,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만약 이 마음이 '그것'이라고 해도, 나는 인정하지 않는다. 인정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매달리면 손을 잡아 줄까. 어리광을 부리면 상냥히 대해 줄까. 그런 안이한 유혹도, 마음속에서 필사적으로 몰아낸다.

 사랑이란 뭘까. 물론 나는 그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 아주 좋아하는 감정을 상대에게 품는 것. 만약 서로 좋아하게 된다면, 사귀고, 결혼해서, 결국은 아이를 가지게 되겠지.

 그 길을 걸을 수 없는 두 사람에게 사랑이 싹틀 리가 없다. 다르다, 결정적으로 다르다.

 내가 하루카를 정말 좋아한다는――정말 좋아한다는 건, 인정하자. 나는 사랑 같은 걸 한 적이 없으니까, 이번에 뭔가 착각으로 그게 하루카한테 달라붙은 것뿐이다. 그래, 그저 사고다.

 하루카를 좋아한다면 최고의 친구로서 하루카의 행복을 바라야 한다. 사랑도, 결국 그녀는 멋진 남자를 만나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웃음을 그 사람을 향해 짓고, 내가 모르는 곳에서 첫 키스를 할 것이다.

 결국 하루카는 내게서 점점 멀어져서, 그녀의 길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

 그것을, 나는,

 나는,

 "――――어, 라?"

 창밖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비가 땅을 때리는 소리가 점점 강해진다. 그렇구나, 내리기 시작했구나. 그럼 납득이 간다. 비가 내리면 바닥은 젖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집, 비가 샌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하루――"

 비보다 큰 따뜻한 물방울이 아무것도 신지 않은 발에 살짝 떨어진다.

 "아냐, 아니야. 나는――"

 누군가에게 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변명이 계속해서 눈물과 함께 흘러나온다.

 하루카.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하루카가 아니야.

 하루카는 누구보다도 행복해졌으면 하는걸. 이상한 생각을 할 때가 아냐. 애초에 지금 내겐 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얼굴, 일단 얼굴을 씻어야지. 이래선 악보를 읽을 수가 없어. 세면실에서 수도꼭지를 돌린다. 얼굴을 들자, 세면실에 설치된 거울 속 나의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 아…………"

 나는 이 눈을 알고 있다. 이건, 그래.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눈이다――

 내가 지금까지 봤던 영화에서, 무대에서, 그것이 허구라고는 해도, 정말로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이런 눈이었다. 내 안에 태어난 '그녀'들도, 이런 눈이었다.

 난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과 마주보고, 그 눈의 강함을, 열량을 가진 것만 같은 시선을, 본 사람에게 바늘을 찌르는 듯한 안쓰러움을, 애처로움을 감싸는 엷은 그림자를, 그 눈동자 속에 담긴 애타는 마음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말로 이해했다.

 이게 좋아한다는 마음이다.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한 번 알고 만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동시에 그 부정이 의미 없는 일임을 나만은 알고 있다.

 "당신은 지금, 어떤 마음이야?"

 물을 것도 없다. 거울에 비친 그 눈이 어떤 말보다도 강하게, 내 심정에서 나온 하나의 해답을 가르쳐 주었다.

 이런 해석이 있어선 안 된다. 이건 잘못됐다. 이건 그런 노래가 아니라, 이런 마음의 '그녀'의 가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이, 내 '사랑'이다――

 "――큿, 너무한 얼굴……."

 눈물로 엉망이 되어서, 평소의 늠름한 분위기를 두른 키사라기 치하야의 얼굴은 어디에도 없다.

 누군가 본다면 뭐라고 할까. 하루카라면? 있지, 하루카. 이런 게 너를 애타게 그리는 키사라기 치하야야.

 너 때문에, 이런, 어쩔 도리가 없는 여자가 되고 말았어.

 네 행복을 축복할 수도 없는, 이런, 나쁜 여자가 되고 말았어.

 너와 멀어지는 걸, 아마도 나는 견디지 못할 거야.

 한 감정에 이름이 붙자, 하루카와 함께 있던 순간의 영문을 알 수 없었던 마음 하나하나가, 달콤하고 씁쓸한 납득과 함께 내 안에서 재인식되어 갔다. 자신이 다시 한 번 구성되는 듯한 느낌.

 떠나버렸던 '그녀'들도 마음속에 감춘 것을 이전과는 조금 바꾸어서, 천천히 내 안으로 되돌아온다.

 그래. 그랬구나. 너는, 그 때. 너는, 그럴 때.

 미안해. 나는 더 이상, 지금까지처럼 너희들 말을, 감정을 노래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너희들은 나와 같았던 거구나.

 ‘그녀'들이 나와 하나가 된다. 사랑 노래가 진정한 의미로 내 것이 된다. 노래하고 싶다. 들어 주었으면 한다. 나를. 그리고――

 하루카.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

 바깥과는 대조적으로 구름 하나 없이 맑게 갠 하늘 같은 마음에, 단 하나 남은 작은 충동에 몸을 맡기고 거실로 돌아와 핸드폰을 꺼냈다.

 떨리는 손으로 터치스크린을 조작한다. 부탁이야, 전화를 받아줘. 그렇게 바라면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금방,

 "치하야 짱? 무슨 일이야?"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의, 누구보다도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귓가에서 부드럽게 튕겼다.

 "오랜만이야, 하루카."

 "응. 오랜만이네."

 하루카가 가만히 내 말을 기다리고 있다.

 목소리가 듣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그거면 충분했을 텐데.

 한 번 자각한 욕망은 내 손을 떠나서 멋대로 커져만 간다. 하지만 그것도,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나만의 감정이고.

 "지금 어디에 있어?"

 "지금? 음, 오늘도 돌아가기 전에 사무소에 들렀다가, 좀 전에 나온 참이야."

 "그래."

 "……치하야 짱?"

 "하루카, 갈림길에서 기다려 주지 않을래?"

 "지금? 혹시 오려고?"

 "주고 싶은 게 있었는데 잊어버리고 있었어. 금방 갈게."

 "어, 하지만 비 엄청 오는데.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까, 치하야 짱――"

 하루카의 말을 다 듣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책상 서랍 속에서 어떤 것을 꺼내 가방에 쑤셔 넣고, 윗옷을 걸치고 밖에 나왔다.

 그날도 비가 내렸다.

 어차피 달릴 거다. 우산 같은 건 필요 없다. 나를 감싼 화장도, 화장을 엉망으로 만든 채 얼굴에 붙은 눈물 자국도, 전부 비로 쓸려나가 버려라.

 발이 지면을 찼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하루카에게 가까워진다. 하루카에게 품은 마음도 이 이상 없을 확신으로 바뀐다. 내가 비에 젖어 가면서 달리는 건 이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 하루카를 위해서 뿐이다. 그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아무리 잘못된 거라도. 아무리 제멋대로라도. 아무리 꼴사납더라도. 나는, 하루카가 정말 좋다. 이제 와서 어디가 좋은지 늘어놓을 필요도 없다.

 다른 건 이 다음에 생각하자. 내가 하루카에게 집착해서 생겨날지도 모르는 좋지 않은 것들도, 하루카가 장래 만나게 될 지도 모르는 멋진 남자에 대한 것들도.

 프로듀서 같은 남자라면 분명 하루카와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큰 우산을 둘이 쓴 모습이, 하루카에게 있어서 정답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나는 우산조차 없다. 흠뻑 젖은 나 같은 게, 하루카 옆에 설 자격은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어!

 발이 물웅덩이를 밟고 지나간다. 찰팍 튄 흙탕물이 내 청바지를 적셨다. 하지만 속도는 줄이지 않는다. 평소에 러닝을 할 때보다 훨씬 빠르게 달리고 있으니 숨도 가쁘다. 심장이 비명을 지른다. 그래도, 더 빨리 달리라고 온 몸을 질타한다. 조금만 더――

 늘 하루카와 헤어지며 손을 흔드는 갈림길. 하루카가 우산을 가지러 돌아갔던 날엔 또 보자는 인사를 하지 못했던 그 장소에서, 하루카는 건물 벽을 등지고 서 있었다.

 "하루카!"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을 발견한 기쁨에 가슴이 뛰고, 성대가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고 오늘 중 가장 큰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으와! 치하야 짱! 으와와와, 홀딱 젖었잖아!!"

 내 모습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는 하루카에게, 괜찮다고 웃어 보였다. 하지만 정말로 괜찮은 걸까. 눈물 자국이 남아 있지는 않을까. 제대로 웃고 있는 걸까.

 "갑자기 미안해. 어떻게든 오늘 하루카한테 주고 싶은 게 있어서."

 가방 속에서 그것을 꺼냈다. 하루카는 그것을 받아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받는 사람 이름이 없는 봉투 한 통.

 "이게 뭐야?"

 "티켓이야. 다음 주 라이브 티켓. 토요일, 시간 있어?"

 "마코토랑 유키호랑 같이 하는 그거구나. 으음, 그 시간이면 일 끝나고 바로 가도 늦을 것 같아서, 이번엔 응원하러 못 가겠구나~ 하고 아쉽게 생각했었는데――"

 "늦어도 돼. 부탁이야. 이번엔 왔으면 좋겠어."

 하루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분명 지금도 하루카는 내 노래에 대해서 당장이라도 물어보고 싶겠지. 하지만 손에 쥐어진 티켓과 내 눈을 번갈아 바라보고 무언가를 확신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한 마디만을 말했다.

 "알았어."

 하루카가 빗속에서도 시들지 않는 꽃 같은 미소를 지었다. 내가 좋아하는 하루카 표정. 곧 여름이 되는데도 봄의 부드러운 향기라도 날 것 같은 사랑스러운 꽃이, 눈앞에 피어 있었다.

 지금 이대로 하루카를 바라보고 있으면, 자각했지만 억누를 수 없는 욕망이 또 하나 단계를 올라갈 것만 같으니까. 아직 상처 입을 각오도, 상처를 줄 각오도 하지 못한 내가 그 꽃을 흩어놓을 만한 행동을 할 수는 없으니까.

 "고마워.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해. 조심해서 돌아가."

 "으응. 치하야 짱도 감기 걸리면 안 돼. 꼭 라이브 보러 갈 테니까!"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

 "응, 나중에 보자, 치하야 짱."

 그날 제대로 말하지 못했던 '나중에 보자'를 말하고, 각각 돌아갈 길을 간다. 하지만 이 길은 다시 이어질 것이다. 그것을 위한 티켓을, 오늘 전해줬으니까.

 비로 샤워를 하면서 이번엔 걸어왔던 길을 돌아간다.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루카는 집 안에서 비를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아직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밖에서 온 몸으로 맞으면서 올려다보는 비도 재밌구나. 분명 모를 테니까 다음번에 가르쳐 줘야겠다.

 온 몸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다. 푹 젖은 옷을 세탁기에 던져 넣고 뜨거운 물로 샤워를 끝내면 또 다른 자신으로 다시 태어날지도 모른다. 그런 감각이 우습게 느껴졌다.

 성큼 성큼 걸어 나간다.

 이윽고 서쪽 하늘 끝에, 비구름의 끝이 보였다.



………

……





 스테이지 위에서 하기와라 상이 백댄서를 데리고 솔로 곡을 춤추며 부르고 있다. 라이브를 할 때 그녀는 평소의 덧없는 분위기를 벗어던진 것처럼 다른 얼굴을 보인다. 불안도 물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하기와라 상의 표정에 그런 그림자는 전혀 없다. 동료가 한 곡을 큰 환성 속에 마칠 것을 확신하면서, 나는 무대 뒤에서 그녀와 교대해서 스테이지에 설 순간을 기다린다.

 회장의 뜨거운 열기가 기분 좋다. 의상의 가슴 부분을 펄럭여서 바람을 보낸다. 가슴은 흔들리지 않았다.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치하야, 할 수 있지?"

 "아뇨, 프로듀서. 제 가슴은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아요."

 "무슨 바보 같은 말을 하는 거야. 뭐, 그런 농담을 직접 꺼낼 정도라면 괜찮겠구나."

 "직접……이라니, 프로듀서도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아, 아무것도 아냐."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리는 프로듀서를 돌아본다. 피식 웃으면서 옆에 있는 마코토를 보니, 그녀는 엄지를 세우고 씩씩하게 웃었다.

 "헤헷, 치하야가 전력으로 부르는 '눈이 마주치는 순간', 기대할게!"

 "맡겨둬."

 하기와라 상 전에 격렬한 댄스곡을 노래가 끊기는 일 없이 가뿐히 소화한 마코토의 도전적인 눈빛을 똑바로 바라본다. 보고 있으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고 친구이며 라이벌인 그녀에게서 발을 돌렸다.  

 격렬한 박수와 환성 속에서 스테이지를 마치고 종종걸음으로 돌아온 하기와라 상과, 가볍게 터치를 나눈다.

 "수고했어."

 "고마워. 치하야 짱도 다녀와!"

 모두가 지켜보는 시선과 따뜻한 응원에 떠밀리며 스테이지 중앙으로 나아간다. 폐를 끼쳐서 미안해. 고마워, 이런 나를 믿어 주어서. 이 스테이지에서 사무소 사람들이나 팬들, 나를 기다려 준 모든 사람에게, 전력으로 퍼포먼스를 전하기 위해 마이크를 잡는다.

 하지만, 한 번 더 사과를.

 이 곡을 시작으로, 앞으로 내 사랑 노래 전부는 관계자석에서 파란 펜 라이트를 들고 모든 것을 믿고 바라봐 주는 단 한 명의 소녀를 위해서다.

 그런 나를 긍정해 주는 것처럼, 이 노래와 내 안에 있는 '그녀'가 살짝 미소지어 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까지와는 뭔가 다르다고 눈치 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봐 줘. 들어 줘. 지금 전력으로 사랑을 노래하는, 키사라기 치하야를.

 그 액자는 지금도 서랍 속에 있다. '연인의 날'같은 건 나와는 평생 인연이 없는지도 모른다. 이 마음도 평생 서랍 안에 넣어둔 채로, 무덤까지 가져가게 될지도 모른다.

 이 마음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계속해서 내 노래도 바뀌어 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두려워하거나 부정하지는 않는다.

 노래는 무엇보다도 소중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이 하나 더 생기고 말았다. 두 개의 마음을 소중히 끌어안고, 더욱 높은 곳으로. 이게 그 새로운 시작의 첫 걸음이 될 수 있도록.

 뒤에서 드럼 스틱이 두 번 울렸다.

 날카롭게 숨을 들이쉰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미래로.

 누구보다도 소중한 너에게.

 부디 닿기를, 나의 노래여――



………

……





 일기예보가 거짓말을 했다고 그랬어? 하루카가?

 ……그렇지. 그랬을지도 몰라.

 장마 때는 날씨에 좌우되는 게 많으니까. 제대로 알려주지 않으면 곤란하지.

 그 'inferno', 옆에서 듣고 소름이 돋았다고? 아니야, 난 단지……. 그리고 그건 너도…….

 아무튼, 정말로 폐를 끼쳐서 미안해.

 ――고마워. ……아니, 그러니까 그렇게 변한 건 없다니까.

 으응. 그렇지, 역시 일기예보나 절기 같은 건 믿을 게 못 되는지도 몰라.

 일기예보 리포터는 장마가 가고 본격적으로 여름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점점 봄 향기가 강해지잖아.



 아무것도 아냐, 그냥 농담이야. 잊어 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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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맑음'과 말미의 '봄'은 둘 다 발음이 '하루'로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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