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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사와 후미카 「fall」

댓글: 4 / 조회: 1653 / 추천: 2



본문 - 10-28, 2017 23:48에 작성됨.

1>> 2017/10/27

시트러스와 나와 새빨간 우산





2>> 2017/10/27

 어둠 속에서 새빨간 우산이 걸어나옵니다. 제 연인이었습니다.

 밤의 어둠은 한층 더 깊어지고, 가로등의 빛은 저희들로부터 조금씩 멀어집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사무소 근처의 공원. 오후 일곱 시.
 그녀의 로퍼가 빗방울을 튕기면서, 한 걸음씩 제게 다가옵니다.


「기다렸지, 후미카」

 허리를 곧게 편, 멋진 실루엣. 거리의 야경을 가두고 있는 것 같은 노란 눈동자.
 목덜미까지 뻗은 푸른 숏 헤어엔 광채가 돌아서, 밤의 어둠 속에서도 도드라져 보입니다.

 비를 피하고 있던 제 머리 위로, 새빨간 우산이 다가와 마주앉습니다.
 
 그 절도 있는 동작은, 같이 봤었던 오래된 서양 영화의 한 장면 같아서,
 어쩐지 현실감이 떨어지는 아름다움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한동안 눈 앞의, 어린 연인을 넋놓고 바라봤습니다.

 눈이 마주치자 카나데 씨는 상냥하게 웃으며 절 우산 안으로 끌어당깁니다.
 살짝 흐트러진 교복에선 감귤과 알콜향이 섞인 향수 냄새가 납니다.

 
 새빨간 우산 아래서, 큰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시월의 거리는 곧 다가올 겨울을 대비하며, 많은 것들이 변해 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회색 터틀넥에 얇은 푸른색 가디건을 걸쳤을 뿐이라,
 가을 밤바람을 막아 주길 기대하긴 어려운 옷차림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떨고 있는 걸 눈치챘는지, 카나데 씨는 맞잡은 손에 힘을 넣고 몸을 제 쪽으로 기댑니다.
 향수의 시트러스향이 다가오고, 몸이 따스해진 만큼 차가운 바람이 마음에 스며듭니다.
 여름 밤엔 느껴지지 않았던 풀냄새와 어른의 향기가 기쁨을 싣고 왔지만, 조금씩 슬픔의 색이 기쁨을 덧칠해 나갑니다.
 
 전 또다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돼 버렸습니다.
 
 눈 앞에서, 새빨갛게 물든 이파리 한 장이, 가을바람에 흔들리며 떨어져 내립니다.



 비 내리는 가로수길은 인파로 북적이고 있습니다.
 
 둘이서 사람들 사이를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갑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서로 너무 멀어지지 않게, 하지만 부딪히지 않게 걸어갑니다.
 카나데 씨도 평소대로 저랑 페이스를 맞추며 걸어 줍니다.

 때때로, 찌르는 것 같은 시선이 느껴집니다.

 투명한 우산에서 새빨간 우산으로. 세상은 호기심이나 비난의 눈길로 저흴 바라봐 옵니다.

 전 그 시선과 마주보지 못하고 눈을 아래로 돌렸습니다.
 돌로 포장된 산책길엔 새빨간 이파리 몇 장이 떨어져 있습니다.
 
 신발로 밟아 보니, 낙엽은 바스락 소리와 함께 부서집니다.
 빨개지던 손을 떼어 놓으려고 하니까, 카나데 씨는 제 손을 좀 더 세게 잡아옵니다.


「오늘은 춥네요, 후미카」

 저보다 총명한 제 연인은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체하며 웃습니다.

 흘끗 보니 카나데 씨의 오른쪽 어깨는 비에 까맣게 젖어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전 어디 한 군데도 젖질 않았습니다.
 새빨간 우산은 놀랄 만한 각도로 제 쪽에 기울어져 있습니다.

 전 입술을 깨뭅니다. 옛날에도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눈 앞의 카나데 씨만이 빗방울에 젖어 갑니다.
 몸은 젖지 않았지만, 마음은 흠뻑 젖었습니다. 카나데 씨는 어른 같았고, 전 아이 같았습니다.
 
 새빨간 우산은 저만을 지키는 것처럼 밤의 어둠 속에 피어 있었습니다.


 방에 도착할 때까지 두서없는 이야기를 나눕니다.

 원래는 둘 다 이야기가 많은 성격은 아니지만,
 연인이 젖어가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는 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조금이라도 따뜻해지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전 추위가 신경쓰이지 않는다는 것처럼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이어 나갑니다.

 아침에 이불 밖이 너무 추워서 일어나기 어려웠던 이야기.
 댄스 레슨을 받다가 넘어져 버려서 트레이너 씨가 진지하게 걱정해 주신 이야기.

 자꾸자꾸 강해져만 가는 빗소리에 덮여, 지워져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제 목소리를
 카나데 씨는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으면서,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굉장히 상냥하게 웃어 줍니다.



 제가 사는 아파트는 도심에서 좀 멀고 가로등이 적은 조용한 곳에 세워져 있습니다.
 비와 바람 소리만이 저희를 마중나와 줬습니다.

 외투를 행거에 걸고 따뜻한 음료를 내와서,
 저희는 침대에 등을 기댄 채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전 일본 근대 소설을, 카나데 씨는 해외 소설을 좋아합니다.

 요즘은, 연애 소설을 자주 읽게 됐습니다.
 옛날에는 단순한 감상밖에 떠오르지 않았던 이야기가, 지금은 아플 정도로 스며들어옵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고뇌하는 등장인물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작가의 세세한 표현 하나하나에 가슴이 조여옵니다.

 아아, 이 사람들도 저랑 똑같은 고민을 안고 있는 거네요, 하고
 위대한 선구자들과 공감하며, 그들이 제 앞길을 받쳐 주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이 들지만,
 마지막엔 결국 슬픔에 빠지게 됩니다.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들은 사랑을 관철해 나갑니다.
 스스로가 불타 버린다 하더라도, 당신에게 전할 수만 있다면 그래도 상관없다고.
 그들의 사랑은 정열적이고 아름답고, 그리고 용감하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제게는 용기가 부족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노래할 수 있는 용기도, 감사를 표할 수 있는 용기도, 언제나 카나데 씨에게서 받아 왔습니다.

 저 혼자서는, 곁에 앉아 있는 연인의 손을 잡을 용기도, 사랑한다는 마음을 전할 용기도 낼 수가 없습니다.
 제게는 당신을 사랑할 용기도, 당신을 상처입힐 용기도, 둘이서 아픔을 나눠 받을 용기조차도 없습니다.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멎고, 대신 카나데 씨의 숨소리가 들려옵니다.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 오는 숨소리는 제 독서를 멎게 하고, 조만간 제 심장마저 멎게 하려는 듯했습니다.

 숨 쉬는 방법을 잊고 육지에 올라가 버린 인어처럼, 저는 책을 덮고 곁에 앉은 연인과 마주봅니다.

「후미카」

 하고 이름만을 부르며, 카나데 씨는 부드럽게 미소짓습니다. 그리고 제 뺨에 손을 뻗고, 다시 한 번

「후미카」

 제 이름을 불러 줍니다.
 차가운 손에는 상냥한 불길이 켜져 있어서, 마치 제 약점을 꿰뚫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노란색 눈동자에 비치는 전 카나데 씨의 슬픔을 띤 채, 당장이라도 울어 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대로 둘이서 침대로 들어갑니다.
 카나데 씨는 덮어씌우는 것처럼 제 몸 위로 올라옵니다.
 향수의 시트러스향이 납니다. 마음이 조이듯이 아픕니다.

 새빨간 입술이 제 입술에 겹쳐집니다.
 카나데 씨 스스로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가장 싫어하는 곳이기도 하다고 말한 적이 있는 그 입술입니다.
 입술은 가만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맞닿은 곳에서 열기가 퍼져나가는 게 느껴집니다.
 서로의 몸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땀에 촉촉히 젖어 갑니다.

 저는 눈을 감았습니다.


 숨이, 입술이, 옷 위를 더듬으며 제 몸을 둘러싸기 시작합니다.
 손발에 목에 온 몸에, 카나데 씨가 도장을 찍어나갑니다.

 터틀넥의 소매나 칼라를 걷어내며, 입술의 새빨간 빛으로 저를 물들이듯이.
 담담하게, 절절하게.

 사랑이라는 건 결국 미화된 성욕에 불과하다고 전에 어디선가 들었지만,
 카나데 씨의 이 행위는 스스로의 사랑을 증명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카나데 씨는 자신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전해 주기 위해서 제 몸에 닿고 있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동자 뒤에 눈물이 모여, 흘러내릴 것 같습니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카나데 씨가 있습니다.
 하지만 눈을 뜰 수도, 손을 뻗을 수도 없었습니다.

 저와 카나데 씨는 인어와 왕자님은커녕, 남자와 여자조차도 아니니까.
 눈물을 보일 용기도, 눈물을 바라볼 용기도 제겐 없습니다. 저는 힘겹게 계속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입술이 떨어지고 카나데 씨는 제 등 뒤에 손을 두르며, 뺨을 제 뺨에 대 옵니다.
 호흡은 격렬하고, 카나데 씨의 심장소리가 직접, 제 마음 속까지 울려퍼집니다.

「후미카」

 제 이름을 중얼거립니다.
 귓가에 들려온 그 소리는 너무도 연약해서, 밖에 내리는 빗소리에 덮여 지워져 버렸습니다.
 카나데 씨는 그것 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카나데 씨가 내는 소리와 빗소리가 두 사람뿐인 방에 조용히 울려퍼집니다.
 

 카나데 씨가 숨을 고르는 걸 들으며 눈을 뜹니다.
 제 곁에, 잠든 카나데 씨의 얼굴이 있습니다.
 그 눈가에는 눈물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상냥하게 카나데 씨의 몸을 꼭 끌어안습니다.
 시트러스향은 땀에 씻겨 사라졌습니다.
 대신, 부드러운 냄새가 납니다. 나이에 어울리는, 어린아이 냄새.

 목덜미에 살짝, 입을 맞춥니다.



 눈을 뜨니, 빗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곁에 카나데 씨도 없습니다.
 제 방에는, 일인분의 소리와 따스함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서둘러 침대에서 뛰쳐나가서, 옷걸이에 걸어 둔 가디건을 집어들고 문을 엽니다.
 현관의 우산꽂이에, 새빨간 우산이 꽂혀 있는 게 눈에 들어옵니다.


『후미카, 사랑해』


 카나데 씨가 고백한 다음날, 시트러스향을 감은 채 가져온 우산이었습니다.

 특별히 장식이랄 것도 없는, 심플한 빨간색 우산.
 예전의 카나데 씨였다면 절대 고르지 않았을, 눈에 띄기만 하는 디자인.


 다행이야. 카나데 씨는 사라져 버린 게 아냐.

 안도의 한숨을 흘리자마자, 바로 다른 불안이 떠오릅니다.

 만약에 정말로 카나데 씨가 사라져 버린다면, 전 카나데 씨를 찾을 수 있는 걸까요.
 전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걸까요.

 만약에 카나데 씨가 새빨간 우산 아래서, 후미카도 갈래? 하고 손을 뻗어 준다면, 전 제 힘으로 우산 안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저희는, 둘만이서 살아갈 수 있는 걸까요.
 
 새빨간 우산은 카나데 씨의 연정이고, 세상에 대한 선언이기도 했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카나데 씨」

 도와 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름을 부릅니다.
 이름을 부르면서 갇혀 버렸습니다. 마음 속에서 뭔가가 무너져내리고, 카나데 씨에게 품은 마음이 흘러넘쳐 나옵니다.

「카나데 씨」 「카나데 씨」

 저는 연인의 이름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계속 불렀습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방 밖에서, 새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을 고하는, 규칙적인 그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귀를 막아 버립니다.
 새빨간 이파리처럼,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떨어져내렸습니다.



19>> 2017/10/27

 끝



元スレ
鷺沢文香「fall」
http://ex14.vip2ch.com/test/read.cgi/news4ssnip/150903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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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스타일을 바꿔봤습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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