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상 짓고있는 그 고양이 같은 미소를 띄우며 발걸음도 가볍게 통통 튀며 내가 있는 쪽으로 오고 있는 노노하라 아카네와 마주쳤다.
...물론, 잘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 문예부실에서 그대로 돌아나오는 길이다보니, 문예부실로 가는 길이었을 바카네 녀석과 마주치는 건 어찌보면 꽤 높은 확률... 뭐지. 이 녀석도 청소당번이었나? 근데 이번주 중에 전학왔는데 청소당번 같은걸 했나?
"지금 어디 가는 길이야? 아카네 쨩은 지금 RED단으로 가는 길인데!"
"...빠져나오는 길이다만."
"왜?"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갸웃거리며 되물어보는 바카네를 보고있자니... 생각해보니 이 녀석만 아까 점심시간에 안왔었네. 사실 이 녀석 빼고 4명이나 거기에 모인 것도 정말 우연의 일치였는데, 그 자리에서 키타카미는 새로운 재앙을 들고왔고...
"푸우 쨩?"
...뭔가의 조직에 소속되어 있다고 주장한 이 녀석의 말대로면... 이 녀석은 지금 이 상황을 알고 있는걸까? 알아서 지금 나를 막아서려고 온건가? 아니면 정말 모르고 우연찮게 가던 길에 나랑 마주친건가? 어떻게 판단해야 하나. 어떻게 하는게 가장 좋을까.
>> 다이스 타임. 2표 먼저 나온 쪽으로 진행합니다.
1 ~ 50 : "그러지 말고 어서 가자!" 팔짱을 끼고 질질 끌고가기 시작하는 바카네...? 아니 근데 이 녀석도 보기보다 힘이 세네...?!
51 ~ 100 :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하자." 바카네를 끌고 그저께 이야기를 나눴던 학교 뒷편의 옥외 테이블으로...
갑자기, 근엄한척 태도를 바꾸며 저런 말을 하고는 나한테 팔짱을 끼고 내 몸을 다시 문예부실 쪽으로 휙 꺾어버리는 바카네...? 그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나를 끌고 가기 시작한다...?!
"어이, 잠깐, 뭐하는거야, 멈춰!"
"안됐지만 버스는 이미 떠났다구, 푸우 쨩!"
"아니 그게 지금 여기서 쓰이는 표현이 맞는거냐?!"
근데 저걸 다 떠나서 바카네 녀석, 키타카미만큼은 아니어도 이 녀석도 보기보다 힘이 세다...?!
"잠깐, 놔라! 야, 이건 아냐! 놓으라고! 잠깐 내 이야기를 들어!"
"안됐지만 말이지, 아카네 쨩은 푸우 쨩이 열심히 RED단에 참여해줬으면 하는 입장이라서 말이야! 그러니까 순순히 참여한다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거란 말씀이지!"
"뭔 유혈사태냐-! 야, 너도 안 가는 쪽을 더 바랄지도 모른다고!"
"설령 후회할지라도 지금의 아카네 쨩은, 푸우 쨩을 붙잡아서 다시 RED단으로 데려가는 걸 번복할 생각 따위 하지 않을거야!"
"아니 일단 좀 놓고 이성적으로-얌마!!!"
점점 가까워지는 문예부실의 문을 바라보며, 어떻게든 상황을 바꿔보기 위해 바카네 녀석을 막아보려했지만 소리를 지르던 늘어지던 철저하게 요지부동이다. 그렇게 점점 언성이 커진 끝에...
...그 직후, 동아리 건물 전체에 울려퍼진 '냐아아아아아아!'라는 비명 소리는 한동안 학생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고 한다나 뭐라나...
...아참, 물론 당연하겠지만, 네녀석의 별명은 적어도 졸업할 때까지는 고정이다, 바카네.
"...어이, 키타카미."
"응? 왜, 푸우 쨩?"
찰칵찰칵찰칵.
"...대체 왜 그렇게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거냐?"
"응?"
찰칵찰칵찰칵.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며 미즈, 치즈언니, 바카네, 그리고 나까지... 돌아가며 온통 온갖 포즈를 취하게 하며 사진을 찍는 키타카미다. 아니, 잠깐 멈추고 좀 뭐라고 설명을 해라. 이게 대체 뭘 위한 사진이고, 이렇게 의상 입고 사진을 찍는게 네 그 RED단 활동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거냐.
"어... 그러니까, 모에하면 역시 메이드잖아?"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만.
"나도 엄-청 생각해본거란 말야!"
뭘 생각한건데 대체. 차라리 생각 안하는게 낫지 않았을까.
"학교를 무대로 한 이야기에는, 이런 모에 캐릭터가 반드시 한명은 필요한 법 아니겠어?"
"...근데 4명씩이나 입힐 필요는 있는거냐?"
"누가 가장 모에할지 모르겠어서 일단 다 입혀본거야! 아무튼, 모에 캐릭터가 있는 곳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법이라고도 할 수 있어! 이건 거의 필연이라 해도 될 만한 소리야. 알겠지? 모에파워를 비약적으로 올려서 사건을 일으켜보는거라구!"
...성희롱 사건은 또 일어난거 같긴한데. 사건은 참 잘 일으키는구나, 너.
내가 구시렁거리는 소리는 깔끔하게 무시하고 다시 사진을 찍기 시작하는 키타카미. 한참 사진을 찍으며 좀 더 뇌쇄적으로! 같은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기까지 했지만, 슬슬 흥이 식었는지 사진기를 내려놓으며 갑자기 단장석의 자리에 털썩 앉고는 다들 앉으라는 듯 테이블에 팔을 쓱 흔들어보이는 키타카미. 딱히 그걸 거부하고 사진을 더 찍히고 싶던 사람은 없었는지 4명 모두 다 각자 의자를 꺼내 자리에 앉았다.
"뭐, 사진은 이정도면 재밌게 잘 찍었으니까... 지금 다같이 부실에 모인 김에, 제 1회 RED단 전체 회의를 지금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뿌뿌카뿌-! 하며 나팔소리 비슷하게 내며 자축하는 키타카미다. 그저께 내 방에 와서 했던건 역시 회의 같은건 아니었고 그냥 민폐였군. 그런데 회의란, 뭐 회의할 만한 건덕지를 정해놓고 하는 활동이었냐 이거.
"지금까지 우리 RED단은 많은 일을 해왔어! 전단지도 뿌렸고, 홈페이지도 만들었어! 교내에서 RED단의 지명도는 급격한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고, 그를 통해 제 1단계는 아주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거야!"
...아무리봐도 성공을 거둔건 내 멘탈에 흠집내는 것 정도였다고만 본다만. 아, 치즈 언니의 멘탈도 추가로.
"하지만 우리 RED단의 메일 어드레스에는 신비한 사건을 호소하는 메일도, 이 방에 기괴한 고민을 상담하러 오는 학생도 단 하나도 없었어!"
"그야 지명도가 높든 말든간에 뭘 하는지 도통 이해가 안가는 이상한 단체니까 그렇지 않을까... 동아리로도 인정 못받았다만."
"자고로 행운은 진득히 기다려야 한다고 옛 사람들이 말했다지만, 요즘 시대는 그렇지 않아! 우리가 직접 행운을 찾아나서야하는 법이라고! 그러니까, 찾으러 가보는거야!"
일동 침묵. 뭔가 우리가 반응해주기만을 기다리는 모양의 키타카미였기에, 결국 내가 총대를 메고 되물어 줄 수 밖에 없었다.
"...대체 뭘?"
"그야 당연히 이 세상의 신비한 일이지!! 시내를 샅샅이 수색하면 하나 정도는 분명히 기묘한 현상이 있을 거 아냐?"
...그 발상이 더 기묘한데 말이지. 분명 기가 막힌다는 듯 일그러져있을 내 얼굴은 그렇다쳐도... 어딘가 불편해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는 바카네, 늘상 똑같은 무표정의 미즈, 그리고 이젠 마음대로 하라는 듯 힘이 쫙 빠져있는 치즈 언니의 얼굴까지. 살짝 곁눈질로만 봐도 다들 영 시큰둥하다 못해 불만이 누적되어가는 느낌이다만, 키타카미는 그런 모습들을 전혀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크게 휘두르며 소리쳤다.
"다음 토요일.. 그러니까 내일! 아침 9시에 역 앞에 집합하는거야! 지각하면 안돼! 지각하는 녀석은, 사형이라구!"
...아니 뭔 사형이여 또... 저 사형이라는 말을 꽤나 좋아하는건가. 저런거야 그렇다쳐도.
"...너, 이 메이드 코스튬 사진은 대체 뭘 어쩔 셈으로 찍은거냐?"
"그야 당연히 홈페이지에 올리려고 찍은거 아니겠어?"
당연하다는 듯 당당하게 되묻지 마라 이 자식아! 이야기 끝나는 대로 바로 업로드를 시키려고 노트북에 카메라를 연결해서 파일을 옮기려던 걸 보면 분명 진심이다. 이렇게 해서 접속자 수를 늘린다는 생각이냐?
...물론, 내가 진심으로 입에 거품을 물듯이 키타카미를 막았고, 바카네도 나한테 적극 찬동하며 키타카미를 말린 끝에 우리들의 정신나간 메이드 코스튬 사진은 다행히도 인터넷에 올라가지 않게 되었다. 목깃을 당겨 내리게하고, 치마를 걷어올리고 하는 등 아주 위험천만한 사진을 찍게 해놓은 주제에 이걸 전 세계에 퍼지게 하려하다니.
"뭐, 알았어!"
...그렇게 흔쾌히 수긍하고 순순히 지울거면, 애초에 그런 짓을 꾸미지 말란 말이다 좀!
>>+3까지 다이스.
다음날, 집합 장소에 모인 순서를 판정합니다. 차례대로 미즈, 치즈언니, 바카네의 순서입니다.
쉬는 날에 아침 9시 집합이라니. 무슨 폭거란 말인가. 물론 어제 정하는 그 순간에 지적해서 바꾸지 못한 주제에 투덜대봤자 한심하기 그지 없겠지. 숨이 턱에 차도록 죽어라 달려 약속 장소인 북쪽 개찰구에 도착했지만 시간은 이미 9시 정각. 다른 멤버들은 이미 모두 모여 있었다.
"빰빠카빰! 푸우 쨩, 지각! 벌금이야!"
나팔을 불듯이 키타카미가 기쁘게 말했다.
"이제 막 9시가 됐다만..."
"땡! 아무리 늦지 않았다 해도 제일 마지막에 온 사람이 벌금이야! 그게 바로 RED단의 규칙!"
"처음 듣는 소리인데."
"그야 지금 정했으니까!"
거 참 텐션 높아보이네. 적어도 도저히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던 교실에서와 비교한다면 지금은 그냥 좀 철없는 애같은 분위기라서 어떻게 해체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지뢰와는 달리 그나마 좀 편안한 느낌이다.
아무튼 저 큰 키로 얼굴까지 들이밀며 말하는 키타카미 덕분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고, 분위기를 이기지 못해 고개를 끄덕여보이자 일단 오늘의 행동 일정을 정하자는 키타카미의 말에 따라 모두 근처 카페로 향했다.
"벌칙으로 카페는 푸우 쨩이 쏘는거야!"
네이네이... 뭐, 다들 적당히 시켜주겠지. 그래.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느릿하게 제일 마지막으로 키타카미의 뒤를 따라 걸어가는데,
"이야이야, 고마워 푸우 쨩."
어느샌가 뒤로 슬쩍 빠진 바카네가 그 트레이드 마크같은 고양이 표정을 지으며 슬쩍 속삭여왔다.
"사실 아카네 쨩 말이지, 푸우 쨩이 도착하기 딱 2분정도 전에 도착했으니까. 중간에 신호 하나라도 잘못 걸리든가 했으면 오늘 쏘는건 아카네 쨩이 되었을지도 몰랐어!"
아아, 그러십니까.
"으에엑, 뭐야, 그 시큰둥한 반응?"
"거 운 좋아서 좋으시겠수."
훠이훠이. 손을 휘저어 바카네를 쫓아내보지만 그래도 기죽지 않고 들러붙는 모습이 꼭...
"...파리?"
"우와아아!! 푸우 쨩이 폭언으로 아카네 쨩한테 화풀이해!!"
우는 척을 하며 앞으로 달려나가는 바카네가 상당히 시끄러웠지만... 다행인지 뭔지 몰라도 다들 바카네의 말에는 별 신경을 안써줘서인지 그대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일행 제일 뒤에서 따라가며 다시 잘 살펴보니, 다들 평소 입던 교복과 헤어스타일이 아니어서인지 인상이 확 달라지긴 했다.
일단 나한테 폭언?을 듣고 앞으로 달려나가 키타카미와 함께 이야기하며 앞장서고 있는 저 바카네는... 오늘은 머리에 힘을 좀 주고 온 모양인지 평소와 달리 착 가라앉아 차분히 정돈된 모습에 하얀색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헤어스타일이 차분해져서 조금은 어른스러워졌나, 싶지만 저 녀석이 까불거리고 워낙 어려보이는 외모이다보니 큰 차이는 잘 모르겠다.
그 옆의 키타카미는 착 달라붙는 면바지에 어깨만 가려지는 민소매 티를 입고 있었는데, 이 쪽도 학교에서처럼 양갈래로 머리를 묶고 온게 아닌 생머리로 확 풀고 와서인지 평소와는 인상이 확 다른...
...그래. 꿈에 나오면 상당히 무서울 것만 같다. 저녀석 머리, 도대체 왜 저렇게 긴거야...
그 뒤를 따르는 치즈 언니는... 머리를 양갈래로 깔끔하게 정리해왔는데, 그럼에도 숨겨지지 않는 그 머리의 풍성함의 볼륨이 압도적인 느낌. 하지만 머리띠가 없이 끈만으로 저렇게 정리해놓으니 이마가 조금 더 노출되어서 인상이 상당히 어려져보여서... 치즈 언니를 제외하면 모두 1학년인데 그냥 따로 말하지 않으면 다 같은 학년이라 해도 믿지 않을까 싶은 수준. 헤어스타일이 상당히 어리게 바뀌었어도 머리의 풍성함만큼이나 기품이 걸음마다 뿜어져나오는 느낌이다. 차분한 색조의 원피스는 이에 더해지는 화룡점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내 바로 앞에서 따라가고 있는 미즈. 이 녀석은... 어제와 다를 바 없이 그대로 교복. 하나같이 사복을 입고 왁자지껄한 이 무리에서 가장 겉도는 느낌을 풍기고 있다. 어쩐지 자연스레 RED단의 일원이 되어있지만 원래는 문예부원이잖아... 저 녀석의 아파트에서 들은 그 이해 못할 소리들 때문인지 괜히 신경쓰인다. 아니 다른건 다 그렇다쳐도, 왜 쉬는 날에도 그대로 교복을 입고 있는건데. 사복은 없는거냐.
바카네와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뭔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 키타카미의 반응에 물어보니,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푸우 쨩, 아카네 쨩.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가장- 불안한 두 사람만 따로 보내는 거라 단장으로서 걱정이 돼."
...누가 누굴 걱정한다고? 내가 지금 되도 않게 아침부터 돈을 뜯겨서 헛소리를 듣고 있나? 지금 키타카미가 누굴 걱정한다고 했냐? 근데 저녀석이 누굴 걱정할 입장이냐부터 따져야 할 거 같은데.
"어디까지나 신비한 일의 수색이니까, 진지하게 해야된다? 알았지?"
...네이네이, 알았으니 제발, 꼭 내 엄마라도 된 것처럼 굴지 말아줬으면 한다. 안 어울린다고. 그래도 가까스로 이런 불평불만을 입밖으로 뱉지 않은건 그래도 저 수색인지 뭔지 하는 동안 키타카미랑 떨어져 있으니 편하긴 할텐데 그걸 굳이 초치고 싶지 않다는 이성적인 판단에서 나온 선택이다. 입을 잘못 놀려서 괜히 더 피곤해질 필요는 없으니까.
"저기, 레이카 쨩. 아카네 쨩, 궁금한게 있는데."
"응! 말해봐!"
...바카네답게 태연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고, 또 그거에 기뻐하는 키타카미를 보면 저 둘이 가장 죽이 잘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아카네 쨩들은 구체적으로 무얼 찾아야 하는 거야?"
...어찌보면 당연한 질문이긴 한데, 태평한 질문이기도 하다. 뭔가 의미가 있을거라 믿고 있는건가, 저 녀석.
"자, 예시를 불러줄테니까 이런 걸 찾으면 돼. 일단-"
1. 불가사의한 것.
2. 의문이 가는 것.
3. 미스터리한 사람...
...아, 찾은거 같은데. 지금 신나서 뭔가 읊고있는 키크고 늘씬한 정체불명의 단체 단장님 말이지. 찾았으니까 오늘 활동은 끝인가?
......뿜지 않은 것에 스스로 칭찬해도 되겠지, 이거. 목이 심히 아프지만, 기침하지 않으려 애쓰며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자랑스럽게 눈을 감고 손가락을 쭉펴며 설명하고 있는 키타카미는 덕분에 지금 내 반응을 제대로 못본 모양이다. 그리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아무 반응 없이 빨대로 조금, 또 조금, 카페오레를 마시고 있는 미즈.
...그리고 뿜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가까스로 견뎌낸 것같은, 그 댓가로 입가에 카페라떼가 줄줄 흐르고 있는 치즈 언니와...
"와아, 그렇구나~"
...저렇게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어떻게 소리 하나 안내고 테이블에 잔을 잘 내려놓을 수 있나 감탄이 나오는 바카네였다.
음, 저 테크닉에 한해서는 바카라는 멸칭을 떼줘도 될거같은데...
포권을 하듯 부들부들 떠는 양손을 감싸쥐고 테이블 아래로 내린 바카네는, 그래도 전혀 티 내지 않는 포커페이스로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레이카 쨩의 말은, 에일리언... 우주인이나, 시공을 일그러지게 하는 미래에서 온 사람이나, 초능력자 본인 혹은 그들이 지상에 남긴 흔적 등을 찾으면 된단 말이지? 아카네 쨩이 정리한게 맞지? 응?"
...저렇게까지 아무렇지 않게 유쾌하게 받아내는 저 모습은, 단순한 연기를 넘어선 예술의 경지라 칭해도 되지 않을까.
"그래그래! 바로 그거야, 아카네 쨩! 역시 소질이 있구나?!"
...연기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는 건 분명하다. 저 녀석, 데뷔하면 천재 배우 소리 들을거야.
"푸우 쨩도 조금은 아카네 쨩의 뛰어난 이해력을 본받으라구!"
...저런 천재배우의 영역에 있는 녀석을 뭘 어떻게 본받으라는 건데? 경악과 경외가 대부분이지만, 그 외의 뭔가 잘 표현 안되는 잡다한 감정까지 다 뭉뚱그려진 얼굴로 응시하니 바카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천연덕스럽게 미소로 답변했다.
"자, 다들 마신거 같으니 이제 출발해볼까?"
그렇게 큰 키 답게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가게를 나서는 키타카미를 필두로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의 뒤를 따랐다.
...새삼스럽지만 나가는 순간 눈에 들어온 영수증에 몰려오는 스트레스. 애초에 그냥 받지 않는게 좋았을 텐데... 뭐, 후회한들 어쩌겠냐.
>>다음 연재시까지...
바카네와 푸우 쨩이 돌아다니는 동안 일어날 일이나, 나눌 대화 주제를 자유롭게 적어주세요.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있다가 확인할거야! 라고 무시무시하게 웃어보이며 분명히 협박에 가까운 통보를 남기고 키타카미는 치즈 언니와 미즈를 이끌고- 미즈는 그냥 따라가는 느낌이지만 치즈 언니는 거의 연행당하는 분위기긴 했지. 치즈 언니를 위해 일동 묵념- 역의 동쪽 방향으로 사라졌다.
"자, 그럼 어쩔까?"
"어쩌긴 뭘 어쩌냐..."
아까 저 단장님이라는 분이 말씀하신 대로라면 우리는 서쪽 방향을 탐색해야겠지요. 네이네이.
...물론 말하나마나 이대로 그냥 집에 돌아가버리고 싶은 마음이 정말 굴뚝같지만...
"...집에 돌아가고 싶긴한데."
"그건 참아주라 푸우쨩."
...이거 봐. 바카네 녀석, 웃고있는 얼굴인채로 그대로 얼굴에 그늘이 드리우잖아. 이럴 거 같았는데 내가 무책임하게 그냥 집에 갈 수 있겠냐고...!
"...서있어봤자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일단 좀 걷자고."
"찬성!"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텐션이 확 올라가는 걸 보니 기분이 조금 미묘해지긴 하는데... 그러려니 하자.
별 아이디어가 없었기에, 우리는 역 근처에서 흐르는 강가를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벚꽃은 저문 시기고, 다른 꽃들은 보이긴 하지만 아직 봉오리가 피어나지 않은 상태라 풍경이 굉장히 미묘한 느낌. 그 미묘한 느낌 때문인지 사람도 그리 많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주변 주민 분들이 가볍게 입고 산책을 하는 느낌 외엔 한산한 산책로를 따라 걷고 있으니 바카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참 평화롭네에~"
"넌 평화롭지 않다는 듯 말한다?"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지."
푸우 쨩도 알긴 하잖아? 라고 덧붙이니 뭐라 할 말은 없다. 이 녀석이 그 괴현상을 내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경험시켜줬으니까. 뭔가 더 알고 싶지도, 그렇다고 아는 척 말하고 싶지도 않아서 언급을 피하고 싶어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으음... 푸우 쨩."
"뭐냐."
"아카네 쨩이랑 그, 시외로 데이트 간 이후로 있지."
...아주 잠깐, 저 녀석의 센스에 두통이 찾아왔다. 물론 바카네 녀석 나름대로 정보를 숨기기 위해 고른 단어겠지만, 이봐요, 난 여자에게 취미 없어.
"...너 단어 잘 골라라."
"딱히 틀린건 아니잖아."
...참자. 참아.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하니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바카네다.
"혹시 그 이후로 미즈키 쨩이나 치즈루 쨩이 푸우 쨩한테 뭔가 대화나 접촉을 시도한 적이 있었엉?"
말투는 참 가벼운데... 얼굴도 고양이 상으로 싱글싱글 웃고 있는데 말이지. 저 녀석 눈빛은 왜 또 날카로운거냐.
...접촉, 이라는 단어 선택에서. 능글맞지만 생각 이상으로 신중한 저 녀석이 고를만한 단어는 아니라는 판단이 든다. 일부러 나한테 압박을 주는건가, 아니면 저녀석이 조금 다급하다는 걸 어필하는건가.
...거참, 응 안 믿어~를 고상하게 돌려서 까는군 그래. 방금까지 내 눈동자를 들여보던 그 시선에서 단 하나의 신뢰도 느껴지지 않았다만. 물론 나도 이 녀석을 믿지 않으니 이렇게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하는 거고.
...이번엔 내 쪽에서 좀 떠보도록 할까.
"굳이 그런걸 물어보는 이유는 뭐냐? 뭐, 다른 녀석들 세력이 어떻게 움직이나 정찰이라도 하려는 거야?"
"이야이야, 너무 그렇게 날세우지 말라구, 푸우 쨩. 그런 의도는 없었으니 안심해."
워, 워. 아예 입으로 소리를 내며 양손을 들어 제지하려 드는 바카네 녀석. 내가 뭔 사나운 짐승인거마냥 대하지마, 이 자식아.
"뭐... 염탐같아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아카네 쨩네도 꼭 필요해서 물어본 것 뿐이니까? 아직 접촉이 없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라서 확인한 거라구."
"...그건 무슨 말이냐."
"그으게 말이지... 레이카 쨩을 중심으로 있는 아카네 쨩네 동료들이나, 아니면 다른 세력들 간에서... 뭐라 정리해야 하낭? 관점이 다르다고 해야할까? 이념이 다르다고 해야할까. 어쨌든 상당히 판이하게 다르거든. 그래서 정보가 되든 뭐가 되든 뭔가 세력 간에 불균형이 생기면 괜히 피곤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엉!"
...뭔가 나름대로는 문제가 있는 모양인데,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하고 있으니 도저히 그리 심각하다는 느낌을 못 받겠다. 내용도 잘 이해가 안가는데 메신저가 너무 가볍게 말하고 있어서 더더욱.
물론 이 앞에 있는 허풍쟁이 느낌의 고양이 같은 바카네 녀석은 제한되긴 해도 진짜배기 초능력자였고, 또 다른 부원은 스스로가 우주인이 만든 인공적인 무언가라고 정체를 밝혀오며 장황한 설정을 읊어놨고...
"뭐, 푸우 쨩이 아니라면 그걸로 됐나~ 그럼 가보자구!"
"...뭘 어딜 가보자는거냐."
"기왕 놀러 나온 김에 좀 둘러보고 다니자구. 푸우 쨩, 일단 아카네 쨩은 이 동네에 전학온 미소녀 전학생이라구? 이 동네 살던 푸우 쨩한테 에스코트를 좀 부탁해도 되는게 아닐까나?"
"...참 너란 녀석은 한결같이 건방지구나."
"건방지다니! 귀엽다고 하라구!"
...이런이런...
뭐, 어쨌든 노는게 아니라고 키타카미가 못박아 놓긴 했다만... 굳이 주말에 끌려나와서 그 귀찮은 녀석이 바로 옆에 붙어있지도 않은데, 별로 뭐하는지 이해도 안가는 헛짓거리를 하며 시간을 때우고 싶은 생각은 나한테도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못 이긴척, 바카네 녀석에게 끌려 다녀주기로 했다. 행여나 키타카미가 급습하더라도 이 녀석을 미끼로 던져주면 나는 적당히 명분이 생기니 빠져나갈 수도 있으니 말야.
그렇게 바카네와 함께 옷가게들을 윈도 쇼핑하고, 노점상의 싸구려 액세서리에 관심을 갖고 이것저것 달아보려던 바카네를 뜯어말리고,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를 보고 하나씩 사 들고 돌아다니며 먹거나... 꽤 충실하게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내가 뽑은 이쑤시개를 보고 치즈 언니를 재촉하는 키타카미. 그리고 그렇게 끝난 제비뽑기의 결과로 이번에는 나와 치즈 언니 두 사람의 팀. 그리고 나머지 3명의 팀으로 나뉘게 되었다.
"......"
뭔가 뚱하니 자기가 들고 있는 이쑤시개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키타카미는,
"...자, 그럼 다 먹었지?"
"저기, 아직 다 못먹었다만-"
"4시에 역 앞에서 집합하자. 이번에야 말로 뭔가 찾아와야해."
그렇게 딱 잘라 말하면서 남아있던 콜라를 다 마셔 비워버렸다.
"뭐, 그럼 가죠."
성큼성큼 큰 걸음걸이로 멀어져가는 키타카미네 일행-미즈도 꽤 다리가 긴 편이라 잘 따라가는 편이었지만 바카네 녀석은... 그저 묵념-을 배웅하고서 우리도 그 반대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뭐 당연하게도 뭔가 발견할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여태까지 미즈, 바카네가 그랬듯...
"...푸우 쨩."
어느 정도 충분히 걸어왔다, 싶은 때에 뭔가 단호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치즈 언니. 뭔가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사와요."
문예부실에서 늘 의기소침해있고 위축되어있던 그 눈빛이 아닌, 결의에 찬 눈빛에 고개를 끄덕여보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좋을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도 한정되어서 잘 이해시킬 수 있을 지도 모르겠사와요. 믿어줄지도 잘 모르겠지만..."
이런 말을 중얼거리며 줄곧 고민하던 치즈 언니는, 마침내 제일 먼저 이렇게 말했다.
"전 이 시대의 인간이 아니와요. 훨씬 더 먼 미래에서 왔어요."
...뭐,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다.
"언제, 어느 시간대에서 여기에 오게 되었는 지는 말할 수 없어요. 말하고 싶어도 할 수 없도록 다 제한이 되어있거든요. 타임머신을 타기 전에 미래의 이야기를 최대한 제한시키도록 미리 정신 조작을 해서 강제암시를 걸은 상태여요. 그래서... 필요 이상의 말을 하려고 하면 자동적으로 차단이 걸려버리니, 그 점은 고려하고 들어주셔요."
...검열삭제, 비슷한건가요. 어쨌든.
"시간이라는 것은 연속성이 있는 흐름이 아니라, 그 시간마다 잘려진 하나의 평면이 쌓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저기, 처음부터 이해가 안갑니다만."
"...아, 그렇겠네요. 그럼, 애니메이션을 상상해보는거여요.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래는 한 장씩 그려진 정지화면을 연달아 보여주면서 그걸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거잖아요? 시간도 그거랑 비슷하다 생각하면 되지만... 디지털적인? 셀 애니메이션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알기 쉬울까요?"
...뭐 대충 그렇다고 칩시다. 애니메이션은 잘 모르지만...
...이거 아리 녀석이 들으면 이해할 수 있을라나.
"시간과 시간 사이에는 단절이 있어요. 한없이 0에 가까운 단절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래서, 본질적으로 시간과 시간 사이에는 연속성이 존재하지 않사와요."
"...음..."
"시간 이동은... 쌓여있는 시간 평면들을 말하자면 2차원 평면이 아닌 3차원 방향으로 이동하는 거라 보면 되는거여요. 미래에서 온 저라는 존재는 이 시대의 시간 평면상에서 볼 땐 셀 만화 도중에 그려진, 필요 없는 그림과 같은 거죠."
"......"
"시간은 연속되지 않기 때문에, 만약 제가 이 시대에서 역사를 개혁하려 해도 미래에 반영되지 않사와요. 그냥 이 시간 평면 상의 일로 끝나버리고... 수백 프레임이 1초에 흘러가는 애니메이션에서, 중간에 아주 작은 얼룩이 하나 정도 생긴다고 하더라도 스토리가 바뀌거나, 일반 시청자가 봤을 때 티가 나거나 하진 않잖아요?"
......
"시간은... 강물 같은 아날로그가 아니라, 그 순간마다 시간 평면이 겹쳐져 쌓인 디지털적 현상인거에요. 이해가 되나요?"
"전혀요."
...그냥 미래에서 왔다는 것만 이해하자. 대충 그럴거라고 예상은 했으니까.
내 반응에서 살짝 쓰게 웃어보이던 치즈 언니는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제가 이 시간 평면에 온 이유는요... 지금으로부터 3년 전에, 커다란 시간 진동이 검출되었어요."
...또 3년 전인가.
"그러니까, 푸우 쨩이랑 키타카미 씨가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이어요. 조사를 하기 위해 과거로 날아온 우리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어요. 아무리 해도 그보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수가 없었으니까요."
애초에 시간여행이라는 것 자체가 생소한 나로서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없다 여부가 뭐 그리 중요한지 잘 모르겠지만... 치즈 언니가 정말 저렇게나 진지한 표정을 짓는 걸보면 위험한 일이긴 하겠지.
"조사 결과, 커다란 시간의 단층이 시간 평면들의 사이에 존재하는 것 같다는 게 결론이었사와요. 하지만 어떻게 그 시대에 한해서 그런게 존재하는 지 알 수 없었는데... 원인으로 추정되는 것을 찾아낸 것이 얼마 전이어요. 물론, 제가 있던 미래에서의 얼마 전이지만요."
"...뭐였는데요?"
답을 알것만 같다.
"키타카미 씨요."
와, 정답이네. 상품은 없겠지만.
"시간의 왜곡의 한가운데에 키타카미 씨가 있었어요.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금지사항에 걸려서 설명할 수 없으니 물어보셔도 소용 없사와요. 하지만, 이건 확실해요. 과거로 통하는 길을 닫은건 바로 키타카미 씨라는 것."
"...그 녀석이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물론 저희도 그렇게 생각했사와요. 고작 인간 한 명이 시간 평면에 간섭한다는 게... 아직까지 해명되지 않은 사항이와요. 수수께끼죠. 키타카미 씨도 자신이 그런 짓을 하고 있다고는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고요. 본인이 시간을 왜곡시키고 있는 시간 진동의 근원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으니까요."
...애초에 저런 현상에 대해서 알고 있을리가 없잖습니까, 라는 말은 고이 집어넣어두자.
"저는... 키타카미 씨의 근처에서 새로운 시간의 변이가 일어나지 않는지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음, 뭐랄까, 적당한 말이 잘 떠오르지 않지만... 감시자라고 보시면 되겠사와요."
"......"
"이런 이야기... 못 믿겠죠?"
그야 처음 들었으면 진지하게 정신과를 데려가야 하나 생각했겠습니다만... 2번 정도 다른 이야기를 미리 들어둔 덕분에 예방 접종은 충분히 된 모양이다.
"...아뇨. 그렇지만 왜 제게 그런 이야길 하는 건지..."
"...푸우 쨩이 바로 키타카미 씨에게 선택된 인간이니까요."
...하?
"자세히는 말할 수 없어요. 금지사항에 걸려버리거든요.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 푸우 쨩이 키타카미 씨에게 중요한 사람일 거고... 키타카미 씨의 일거수일투족에는, 모두 이유가 있어요."
"...그럼, 바카네랑 미즈는..."
"그 두 사람도 저와 아주 가까운 존재...라고 보시면 되겠사와요. 설마하니, 키타카미 씨가 이렇게나 정확히 우리들을 모을줄은... 생각지도 못했지만요."
...그럼 물어보자.
"치즈 언니는, 그 녀석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금지 사항입니다."
"키타카미의 행동을 그냥 방치하면 어떻게 되는거죠?"
"금지 사항입니다."
"아니, 미래에서 왔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고 있는거나 다름 없는거잖아요."
"금지 사항입니다."
"...키타카미한테 직접 말하는 거는?"
"금지 사항입니다."
"......"
...거, 철저하네...
"미안해요. 말할 수 없어요. 특히, 저에겐 지금 그런 권한이 없어요..."
더이상 뭐라 말을 하지 못하는 내 반응에, 얼굴이 점점 흐려지는 치즈 언니.
"믿어주지 않아도 좋아요. 그저, 푸우 쨩이 알고 있으면 해서 말한거니까요."
...셋 다 믿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는 건 같구만.
"...미안해요. 갑자기 이런 소릴 해서..."
"아뇨 뭐, 그건 상관 없는데..."
사실 믿지말라고 해도, 바카네 녀석이랑 겪은거 때문에라도 다 믿을 판이라서 말이지. 그런데 그걸 다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긴 하다. 아니 누가 저걸 믿겠냐고 상식적으로.
"...그냥 좀 보류하는걸로."
"네?"
"그거, 믿거나 안 믿거나... 그런거 다 떠나서, 다 나중으로 미루고. 보류하는 걸로 하죠."
...일단 이렇게 정리하도록 하자. 이게 맞을 거다. 어차피, 바카네나 미즈에 대해서 물어봐도 아까처럼 '금지 사항입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올 뿐일거고... 이런 식으로 핵심적인 것에는 대답을 들을 수 없고. 그렇다고 질문하지 않고서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에 무조건 적으로 ok하는 건 역시 아니니까...
"...네. 지금은 그거면 충분하여요. 앞으로도, 저와는 평범하게 지내줬으면 해요. 부탁해요."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면서, 정중히 양 손을 모으고 90도로 숙이며 인사하실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분명 오버라고, 이거.
...그래도, 딱 하나 궁금해진게 있으니 물어는 보자.
"...궁금한거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뭔가요?"
>>+3까지 다이스.
1 ~ 80 : "치즈 언니, 진짜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81 ~ 100 : "...그 때 키타카미가 말한 냄새는 뭔가요?"
그래도 꽤나 선선한 날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역앞까지 나름대로 죽을둥 살둥 뛰어가다보니 슬슬 따가워지기 시작했던 햇살이 제대로 몸의 온도를 올려버려준 덕분에 팔자에도 없이 땀을 줄줄 흘리게 되어버렸다. 아니, 휴일이라 학교에 안가서 이딴 유산소 운동은 안할줄 알았는데.
그래도... 키타카미의 그 코스프레 강요는 치즈언니나 나도 충분히 당해왔던 만큼, 쓸데없이 바카네 녀석한테 불똥이 튀게 되었으니 사람 된 도리로서 최선을 다해야 마땅했다.
뭐, 아무튼 그런거라고. 그러니까, 전화 끝나고 31분이나 늦은건 미안하다.
"...푸우 쨩...!"
...그러니까 이건 좀 놔라, 바카네. 난 어떻게 할수 있는게 없다니까.
숨이 턱에 차오르도록 죽어라 둘이서 뛰어서 도착했을 때, 기다리고 있던 3명은 제각각 다른 반응으로 우리 둘을 맞이했다. 미즈야 뭐, 늘상 그랬던 것처럼 무표정하게. 키타카미는 전화할 때는 살짝 화난 것처럼도 느껴졌는데, 방글방글 미소가 가득한 채로 만족스럽다는 반응...이었고.
"아까 전화가 끝나고, 31분이나 걸렸네! 그러니까, 21분 초과야!"
...아, 그냥 괴롭히는게 좋다는건가.
바카네는 뭐... 우리가 보이자마자 바로 내 옷자락을 붙잡으며 온통 울상이었고.
...키타카미한테 더 사정하지 않는건, 아마 우리가 오기 전에 충분히 이야기를 시도했지만 저 벽창호같은 단장 님이 전혀 듣지 않았다는 거겠지.
"푸우쨔아아아앙...!!!"
"...그, 미안하다니까... 좀 거리가 멀어서..."
"그치만...! 아카네 쨩, 21일 동안 메이드 복을 입게 생겼는데...?! 무려 3주 동안, 방과후에 메이드 복을 입어야 한다구...?!"
그렇게 녹초가 되어서 피곤한 몸을 겨우겨우 이끌고 집에 도착했다. 그나마 토요일이니까, 내일은 휴대폰 전원을 적당히 내려놓고 집에서 얌전히 쉬면 회복되겠지. 키타카미든 바카네든 누가 됐든 절대로 방해하지 못하게 완전히 잠수를 타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래, 내친김에 지금 당장 휴대폰 전원을 꺼두도록 할까.
그렇게 생각하며 신발을 벗기도 전에 그렇게 휴대폰을 꺼냈는데-
"푸우 쨩-!!"
"...하다못해 언니라고 불러라."
...거실에서 튀어나오면서 휙 달려드는 미라이 녀석을 가볍게 손을 뻗어 이마를 짚으며 껴안지 못하게 막았다.
"땀났으니까 붙지마."
...일단 이것도 이거지만... 이 녀석, 달라붙어서는 '...푸우 쨩은 오늘도 여전하구나...' 같은 화나는 말을 덧붙이니까 말이지. 쥐어박을 힘도 없으니 그냥 미리 컷하는게 편하다. 버둥거리다 말고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고는 바로 얼굴을 찌푸리는 걸 보니 잘했다는 생각 절반, 반대로 이녀석한테 헤드락이라도 걸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절반.
"...우와, 땀냄새! 바로 샤워... 아 그렇지 참!"
...되도 않는 잔소리를 하려다 말고 동생 녀석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푸우 쨩, 손님이 왔어!"
"...? 뭐?"
...무슨 소리야?
"푸우 쨩이랑 같은 반이라고 그러던데?"
...잠깐,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일단... 치하나 아리가 왔다? 아니, 그 둘만이 아니라. RED단의 그 누가 왔든... 미라이가 '같은 반이라던데'라는 식으로 말할 리는 없다.
물론, 미라이가 물론 사람 얼굴을 한번 보고 바로 외울 정도는 아니긴 하지만. 치하나 아리는 오랫동안 봐왔으니 저런 식으로 말할리가 없고, RED 단의 다른 멤버는... 방금 다들 녹초가 되어서 돌아갔고. 키타카미는 뭔가 화가 나서 돌아갔으니 갑자기 나를 앞질러서 우리 집에 와있을 리도 없고.
...아니 그럼 대체 누구야.
"지금 거실에 있어!"
...뭐 그건 잘 알겠다만... 같은 반, 이랬으니... 그리고 내 주소를 알만한 사람을 또 추려본다면. 남은 후보는 단 한 명.
벌컥.
"아, 푸우 쨩. 일찍 왔네?"
"타나카..."
...우리 반의 모범 그 자체이신 반장 님이 여긴 어쩐 일일까.
"어머, 땀 많이 흘렸네. 일단 씻고 나올래?"
"...아니 뭐. 잠깐 정도는 괜찮아."
네가 얼마나 기다렸는지도 모르고 말이지.
그렇게 덧붙이니 손사레를 치는 타나카였지만, 나도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가볍게 흔들어보이고 쇼파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래서 어쩐 일이야? 갑자기 연락도 없이."
"음...그게. 이번 주에 이래저래 쉬기도 하고, 뭔가 푸우 쨩을 중심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잖아?"
"...뭐 그랬지."
...새삼스레 되짚어보니 멘탈에 타격이 다시 돌아오는 느낌이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내 표정을 쭉 살피며, 타나카 코토하는 다시 말했다.
"그래서 그... 내가 학기 초에 푸우 쨩한테 키타카미 씨를 부탁한다고 한거 때문에 그런게 아닌가 해서 말야."
"...요컨데, 상태 확인?"
"아니 뭐, 그렇게 삭막한 발상은 아니야."
...꽤나 퉁명스럽게 대답한거 같은데, 가시돋힌 말에도 별로 아랑곳하지 않고 저렇게 사근사근하게 말하는 걸 보면 저 녀석이 얼마나 성실한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미안해."
"...? 뭐가?"
"거의 억지에 가까운 부탁을 해버렸잖아. 그래서 그 바니걸부터-"
"...그 얘기는 하지 마라 제발..."
"...아, 미안."
...사과하는 척 하면서 누구 멘탈을 또 흔들어 놓을 셈이냐.
...물론, 이 녀석에게 그런 악의가 있을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어딘가의 단장님과는 달리 다른 사람을 휘두르거나 하는 걸 즐기거나 하진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있으니까.
>>+3까지 다이스.
1 ~ 50 : 저녁시간이 다 되어서 타나카가 이만 집에 돌아가겠다고 일어납니다.
51 ~ 100 : 어머니가 거실로 들어오시면서 타나카에게 저녁을 먹고가라고 권합니다.
"어이, 타나카. 기왕 온 김에-"
"으응. 아니야. 볼 일은 다 봤고. 푸우 쨩도 빨리 씻어야 하잖아?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김에 살짝 들린거였으니까 신경쓰지 않아도 돼."
내가 뭐라도 말을 하려고 하는 걸 딱딱 칼같이 잘라버려서 어떻게 더 뭘 권할수 없었고...
...결국 그렇게 거실에서 나가서 현관으로 가는 타나카를 그냥 따라가서 배웅하는 수 밖에 없었다. 부엌을 오가면서 돌아다니던 미라이도 그 모습을 보고 졸졸 따라와서 같이 배웅한다고 그래서 혹시나 이 녀석이 어떻게 마음을 돌려줄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이 녀석, 간다는 소리 듣고도 '에~ 그러지말고~' 같은 소리 단 하나도 꺼내질 않는군...
"갑자기 와서 미안했어. 저녁 맛있게 먹고, 어머니께는 감사하고 죄송했다고 전해줘."
"...뭐, 잘 들어가라."
"바이바이~!"
...이럴 때는 치하도 함락시켰던 미라이의 천진난만함이 좀 도움이 될까 싶었는데, 타나카 쪽이 더 철벽같다는 걸 새삼스레 느낄 수 있었다. 뭐, 저녀석 말대로 씻어야 저녁을 먹을테고... 어쩔 수 없나. 그렇게 현관문이 닫히자, 에헴, 하고 거드름을 피우는 동생 녀석.
"...자, 푸우 쨩은 이제 밥 먹고 싶으면 빨랑 씻고-아파팟-!!"
...보답으로 말랑말랑한 두 뺨을 마구 잡아당겨주었다.
"...손님이 오면 좀 알려라, 이 녀석아...!!"
...놀랬잖냐!! 내 손님인데 왜 안 알리고 서프라이즈로 만드냐고?! 장난을 쳐도 정도가 있지!!
"아야야야!! 엄마-! 푸우 쨩이 괴롭혀!!"
...이크.
주방에서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 빨리 샤워실로 도망가야겠군. 뭐, 수습은 씻고 나와서 생각하자.
그렇게 씻고, 저녁을 먹고, 지쳐서 일찍 잠드는 걸로... 심신이 시달렸던 토요일은 끝이 났다.
월요일. 일어날 때부터 푹푹 찌는 찜통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 예감이 영 좋지 않았는데...아니나 다를까, 우리 학교의 명물인 언덕길이 시작될 때부터 때마침 점점 내리쬐기 시작하는 햇살이 열심히 협업을 시작하질 않나...
아니, '곧 있으면 장마에요~' 같잖은 홍보 따위 집어치우고 그냥 바로바로 퍼부었으면 좋을 것을... 당연하게도 갈아입을 옷같은 게 있을리도 만무한데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땀투성이가 되어버려서 당연히 기분은 나락. 아니, 하다못해 이 정신나간 언덕길에 에스컬레이터나 무빙워크를 설치하려는 공약 같은거 누가 걸 생각 없어? 나중에 선거권을 얻게되면 그 녀석한테 투표해줄 수도 있다고.
"...그 때에는 이미 졸업해서 상관없지 않을까?"
"...좋은 지적이야, 치하."
...자연스럽게 내 푸념에 대답해주는 치하는 정말 좋은 녀석이겠지. 되도 않는 소리라는 건 나도 알지만 짜증나서 그냥 뱉어본거라고.
"...하긴, 너도 좀 땀이 날 정도면 지금 이 날씨가 얼마나 정신 나간 건지는 알 거 같다."
저 녀석이랑 알고 지낸지도 3년이 넘는데, 방학 전에 치하가 더워하거나 땀이 나거나 한 걸 거의 본적이 없었으니까. 방학 중간에 만나면 그 때의 무더위엔 아무리 더위 저항 같은게 달린 키사라기 치하야였어도 땀범벅이 될 수 밖에 없었지만, 학교에서는 땀을 흘리거나 한걸 진짜 본적이 없다고 자신한다.
"...으으... 안되겠다..."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차갑게 식혀져있던 책상에 얼굴을 찰싹 붙혀서 열을 좀 식혀보려 했는데, 그거보다 책상이 내 열로 미지근하게 덥혀지는게 훨씬 더 빨랐다. 귀찮게 부채질 하기 싫어서 그랬지만... 별 수 없이 가방에서 책받침을 꺼내들었다. 늘상 그렇듯 시간이 남으니 치하도 적당히 내 옆에서 시간을 때우려 잠깐 온 거지.
"아, 키사라기 양."
"...타나카 씨?"
그렇게 부채질을 시작하니 타나카 코토하가 바로 교실로 들어오면서 치하를 찾...는데?
"바바 선생님이 찾으셔."
"...아. 알았어. 갈게. 잠깐 갔다올게."
...바바 선생이 치하를 찾아...?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바로 대답하는 걸 보면 치하도 알고 있던 것 같고. 그렇게 다시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보니, 치하는 이미 타나카의 뒤를 따라 교실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타나카 녀석. 토요일에 정말 단순히 그 얘기만 하고 가려고 온거였나...? 아니 그게 그렇게나 중요한 이야기였냐. ...가뜩이나 안돌아가는 머리가 더위로 맛이 간건가. 기말고사도 곧 올텐데, 수업 제대로 들으려면 좀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이렇게 적당히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하며 부채질만 반복하고 있다보니 교실 안으로 키타카미 레이카가 들어오는 걸 보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시간이 꽤 지나긴 했네. 곧 시작종 울릴 시간인거 같은데... 저 녀석, 원래 저렇게 늦게 다니지 않았던거 같다만. 아무튼 내 뒷자리에 털썩 가방을 던지고선,
"나도 부쳐줘!"
"직접 해라..."
"에~"
...입 삐죽거리지 마라. 그런다고 해줄 생각 없어. 주말에 그렇게 사람 괴롭혀 먹었으면 좀 자중해도 되지 않겠냐. 좀 적당히 만족할 줄도 알아야지.
...그렇지.
"키타카미. 너 '파랑새'라는 이야기 아냐?"
"응? 그건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시시하긴..."
...키타카미의 시선이 슬슬 날카로워지는 것 같아서 앞으로 몸을 돌렸고, 다행히도 바로 바바 선생이 들어와 조회가 시작되었다.
...아침에 그렇게 시작해서 그랬던 건지 몰라도, 불만이 가득하다는 걸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키타카미의 그 기운? 같은 것에 통 압박을 받아서... 수업이 끝나는 게 이렇게나 기다렸던 적이 없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종례가 끝나자마자 바로 잽싸게 짐을 챙긴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예부실로 피난을 가버렸다.
문예부실에서 미즈가 언제나처럼 독서를 하고 있는 모습은 뭔가... 이 방에 포함된 기본 옵션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 모습이 있어야 이 방 같은 느낌? 이라고 표현해야할까. 나도 상당히 빨리 온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미즈 녀석은 당연히 여기에 있을거란 생각이 기본적으로 머리 한구석에 박혀있었다는 이야기다.
...자, 그럼 그렇지 않은 쪽에게 말을 걸어볼까.
"넌 또 왜 오늘따라 이렇게 일찍 와있는거냐, 바카네."
"야호~ 푸우 쨩~ 일찍왔네~"
...이 녀석, 뭔가 반응이...
>>+3까지 다이스.
1 ~ 50 : ...국어책 읽기에 가까운, 뭔가 피곤한 반응.
51 ~ 100 : ...주말에 잘 쉰건가, 묘하게 텐션이 더 높아보이는구만.
"...글쎄다. 난 수업 끝나자마자 곧장 뒤도 안돌아보고 여기로 왔다만. 뭐 좀 있으면 오겠지."
내가 애초에 그 녀석이랑 그렇게까지 친한 것도 아니라서 별로 알 바도 아니라고.
"흐음."
"...왜 그러냐."
"푸우 쨩, 잠깐 이야기 좀 할까낭?"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서 문예부실에서 나가는 바카네 녀석...의 뒤를 순순히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아까까지랑 똑같이 밝았지만, 저 녀석... 순간적으로 움츠러들 정도로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푸우 쨩은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전에 그 저녁 때, 학교에 와서 음료수 하나씩 뽑아서 이야기를 나누던 그 벤치. 낮에도 인적이 드문 이 곳까지 다시 와서 빙글 돌면서 노노하라 아카네가 꺼낸 이야기는 심드렁했지만, 가느다랗게 된 눈에서 쏘아지는 눈빛은... 마치 다른사람이라도 된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아카네 쨩이 늘어놓는 이야기가 얼마나 허풍스러운지, 아카네 쨩도 잘 알지만 말이지. 그래도 푸우 쨩은 바로 겪어봤잖아?"
아카네 쨩이 하는 일에 대해서 알고 있잖아.
가볍게 덧붙인 이야기는, 말하는 저 태도랑 비교하면 참으로 무겁기 그지 없었다.
...뭐, 그랬지. 그랬지만, 그 때 넌 이렇게도 말했다.
"...키타카미 레이카는 상식적인 인간이라 별 문제가 없을거라고도 그랬잖아."
"그야 그렇겠지?"
"그럼-"
"-그럼?"
내 말을 그대로 되물어보면서 압박하는 바카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위축되거나 할 이유 같은건 어디에도 없다. 이런다고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거였으면, 이 녀석이랑 그 저녁 때 여기 나왔을 때 진즉 무슨 일이 일어나고도 남았을거다. 또, 내 추측이 맞다면... 이 녀석이 말한 대로 뒤에 조직이 움직이고 있다면, 내가 뭐 어떻게 노노하라 아카네에게 태도를 취하느냐가 내 처우에 크게 좌우되지도 않을거고.
그래서 그냥 생각난 대로 이야기해줬다.
"그럼 별로 친하지도 않은 녀석이랑 데면데면한게 크게 문제되는 행위냐?"
"뭐, 인간 관계 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지."
"...인간 관계 상으로?"
...굳이 저렇게 강조하는 이유가 뭐냐.
"말했잖아? 그 때 푸우쨩이랑 같이 간 곳은 레이카 쨩의 '여드름'같은 거라고."
"...어이."
...설마...
내 표정을 본 바카네가 피식 웃으면서 표정을 조금 풀곤 다시 평소의 경망스러운 어조로 돌아오며 말했다.
"자, 어차피 아카네 쨩은 또 일하러 가봐야해서, 이야기를 길게 하진 못한다구. 그래서 빠르게 얼굴만 비추고 가려고 일찍 온 거였어. 그럼 아카네 쨩이 지금 굳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
저 녀석이 말하는 '일'이 뭔지... 이 시점에서도 모른다고 하면 진짜 눈치가 동생 녀석 만도 못하게 없는 셈이겠지.
성큼성큼 다가와서 조용히 귓가에 속삭이는 바카네... 아니, 노노하라 아카네는.
"...레이카 쨩을 좀 소중히 대해주라구."
'신님' 일지도 모르니까~
"자, 그럼 아카네 쨩은 일이 있어서 먼저 갔다고 대충 둘러대줘~ 부탁할게! 푸우 쨩!!"
철저히 일적인 관계...인가. 그럴거라 생각은 했지만... 막상 그렇다 느껴지니 조금 씁쓸하긴 하다.
"저... 그럼 갈까요?"
"아. 그러죠."
계속 서있을 수도 없으니. 치즈 언니의 권유에 따라 같이 문예부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냥 그거 말고는 오늘 무슨 일이 있으셨나를 가볍게 물어봤고, 학년이 올라가니 수업이 좀 어렵다...정도의 가벼운 일상 대화를 나누면서 문예부실에 다시 돌아왔는데.
"자, 그럼..."
"...엥?"
가방을 내려놓고 바로 하나 둘 옷을 벗기 시작하는 치즈 언니...?
"잠시만요, 갑자기 옷은 왜 벗으시는 거에요?!"
"어, 키타카미 씨가 부실에서는 메이드 복을 입고 있으라고 하셔서...?"
"그걸 곧이곧대로 따르냐고요?!"
"그래도..."
"아니 됐으니까요! 다시 옷 입어요!"
...아니, 이런건 왜 굳이 고지식하게 또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까... 설마 저게 마음에 들었다던가 그런건 아닐...텐데...
...사실 상상 이상으로 잘 어울리긴 했어서 혼자 독백하는 것도 조금 머뭇거려지긴 했다. 그래. 사실 메이드든 웨이트리스든 뭐든, 저렇게 키든 몸매든 괜찮으면 입히지 않는게 잘못이라는 식의 논리를 펼쳤던 키타카미를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것만 같은 느낌이라서.
...하지만 이딴 소리, 절대 입밖에 내진 않겠다. 난 키타카미와 달라.
그렇게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단장석에 앉아 책상 위에 어느덧 문예부실 비품처럼 거치되어있는 내 노트북을 켰다. 사이트를 뭔가 더 만들어보라고 키타카미 녀석이 지시는 하긴 했으니 HTML 에디터를 켜보기라도 하려는 생각이지. 하지만 이런 허접한 사이트에, 뭘 하려는지도 잘 모르겠는 목적을 위해 뭘 어떻게 발전시켜야하는 지는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에디터를 키고 나면 항상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하다가 탄식 끝에 파일을 닫기만 하는 패턴의 반복이 이어질 뿐이었다. 매번 이럴거면 차라리 신경 쓰지 않으면 편하지 않을까 생각도 들지만, 어차피 한가하니까 말이지.
"으으..."
그렇게 팔짱을 끼고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며 신음하던 내 앞에 찻잔이 놓였다.
"차 좀 드시고 하셔요."
"아, 감사합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다소곳히 쟁반을 들고 방긋 웃고 있는 치즈 언니가 눈에 들어왔다. 저 기품있는 미소와 다소곳한 행동에서...
...아까 철회시키지 말고 그냥 메이드 복을 입게 내버려 뒀으면 참 좋았겠다는 글러먹은 생각이 들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키타카미 녀석... 패션 센스는 꽤 뛰어나니까 말이지.
"감사합니다."
치즈 언니는 미즈한테도 차를 주었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대답하는 미즈였지만 치즈 언니는... 아까 나와는 달리 미소가 조금 불안? 해보인달까.
오늘은 또 빨리왔구만. 조회 전에 뒷자리에 말을 거니, 입을 삐죽이 내밀고 있던 키타카미는 콧방귀를 뀌면서 대꾸했다.
"흥-이다. 그거, 혼자서 했다구."
"혼자서 뭘...?"
"주말에 갔던 코스, 싹 다 돌아봤으니까!"
"...아, 그런거였나."
"괜히 여러명이서 가면 집중력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냥 혼자 갔어!"
...거참 기특한 생각이긴 한데, 그런건 좀 알려주고 하지 그러냐. 네가 늦게라도 와서 왜 없냐 어쩌냐 할까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좀 생각해주면 안되겠냐.
"빠뜨린게 있을까 싶었는데 말이지...으음..."
"...무슨 범행현장이냐고."
형사도 범인도 아니면서 굳이 다시 찾아가는 건 뭐라고 해야할 지 모르겠다. 뭐, 신기한거 찾는다는 입장을 잘 생각하면 형사 비슷한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으으...더워... 하복, 그냥 먼저 입으면 안되는걸까나~"
"...기간이 정해져있으니 별수 있냐."
"그치만 더운데~!"
그 텐션을 조금이라도 어찌하면 좀 열이 덜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확실히 이 녀석 근처에 있으면 나까지 괜히 더워지는 느낌도 들고.
...그래서.
"키타카미."
"응? 왜?"
"전에도 말했던 것 같지만, 찾아낼 수도 없는 수수께기 같은건 포기하고, 평범한 고등학생다운 놀이를 개척해보는 건 어떠냐...?"
...솔직히 이런 말 꺼내는게 좋은 건지 잘 생각은 안가는데, 그래도 누군가는 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충동적으로 꺼낸 말인데...
의외로 키타카미는 얌전히 책상에 엎드려있는 그대로 축 늘어진 텐션으로 대답해서, 조금 놀라고 말았다.
"고등학생다운 놀이는 뭔데...?"
...더워서 그런지 힘이 빠진 느낌이구만.
"뭐... 넌 이쁘게 생겼으니까, 멋진 남자라도 찾아서 시내 산책같은거 같이하던가. 데이트도 되고 일석이조잖아?"
"시내 산책보단 등산이 좋은데..."
"등산이든 산책이든 걔랑 가라고. 네 그 이상한 성격 좀만 숨기면, 남자 구하는 정도야 쉬울거 아냐."
...그러자 콧방귀를 뀌며 차갑게 대답하는 키타카미.
"흥. 연애같은건 아무래도 상관 없어. 연애 감정 같은거, 일시적인 변덕일 뿐인걸. 정신병이랑 다를거 없어."
아니, 내가 보기엔 네 쪽이 더 정신...
...생각해보니, 이녀석이 텐션이 좋든 어쨌든 저렇게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건 이게 처음인거 같다.
대답을 않고 있으니 창밖으로 멍하니 시선을 던지고 있던 키타카미가 다시 무기력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있지, 나도 가끔은 그렇게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런 순간적인 변덕으로 귀찮은 짐을 짊어질 정도로 바보는 아닌걸."
...아니었냐, 같은 말도 하지 말자.
"그리고 단장인 내가 남자 사냥 같은거나 하고 있으면, RED단은? 만든지도 얼마 안됐는데?"
"뭐... 적당한 놀이 동아리로 바꾸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사람들도 모일거야."
"그건 싫어."
단칼에 거절당했다.
"그런게 재미 없으니까 RED단을 만든건데, 수수께끼의 전학생 같은 거랑 간판 아가씨도 모아놨는데.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야? 으으... 화끈한 사건 하나쯤 일어나지 않으려나..."
책상 위에 뒹굴뒹굴하면서 저렇게 푸념하는 키타카미는... 꽤 신선했다. 평소같이 앞뒤 안가리고 급발진해서 민폐를 끼쳐대는 것보다는 훨씬 귀엽고 말이지. 하는 족족 기행이니까 남자들이 죄다 피한다지만, 얼굴은 미인이고. 진짜 얼굴 값 못하는 녀석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조회시간부터 그렇게 책상에서 고개를 뗄 생각이 없어보이던 키타카미는 그렇게 오전 수업시간 대부분을 누워서 잠에 빠져서 보내버렸다. 정말 웃기게도, 앞에선 수업 들어오는 교사들 눈치를 봐서 뭐하다 싶으면 깨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단 한번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
...우연이겠지, 이거? 바카네 녀석이 했던 말 때문에 이런 사소한 것도 괜히 신경쓰이게 된단 말야...
사실 신경이 곤두섰던건, 열심히 졸던 키타카미 때문 만은 아니었다.
키타카미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던 이유도 그 신경이 곤두선 이유에서 연결이 되긴 한다. 아침에 등교하면서, 내 신발장에서 발견된 쪽지 하나.
'방과 후 사람들이 나가고 나면, 1학년 5반 교실로 와.'
...라는 내용의 쪽지가, 아무리 봐도 여자애의 글씨로 적혀있었다.
...이건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거지?
일단,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 때 책갈피에 적혀있던 미즈의 글씨와는 확연하게 다른 걸 나라도 알 수 있는 정도였으니까. 미즈의 글씨는 뭔가 꼭 활자를 찍어내는 듯 기계처럼 깔끔한 느낌이었지만, 지금 이 쪽지에 적힌 글씨는 딱 보기에도 여고생이 썼을법한 동글동글한 느낌. 그리고 미즈가 굳이 신발장에 메시지를 넣는 방법 같은걸 쓸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럼 바카네 일까? 아니,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일축할 수 있다. 바카네라면 키타카미처럼 과감하게 행동할테지. 대놓고 찾아와서 끌고가던, 약속을 잡던 하면 했겠지, 이렇게 대충 찢어놓은 노트 조각에 시간도 정확히 안 잡힌 약속 같은 건 할 이유가 없다. 같은 이유로 치즈 언니도 각하. 치즈 언니라면 오히려 정중히 편지지와 봉투를 준비했을거란 느낌.
...다음은, 아리와 치하...일 가능성인데.
...내가 이 둘 글씨를 못알아 볼리는 없다. 더군다나 아리 녀석이 바꿔 쓰려고 하는 글씨도 몇 번을 봤었기에 아리 녀석이 치하를 어떻게 포섭해서 치하에게 대신 필체를 바꿔가며 쓰게 했다던가? 하면 가능성이 좀 있을지도 모르겠다.
"...퍽이나."
...치하가 아리 녀석한테, 뭐하러 그런 부탁을 고분고분히 들어주겠는가. 그럴 가능성이 전무하다. 그래도 그나마, 뭔가 혹하는 조건을 걸었다면야 가능성이 있기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키타카미 일까, 같은건... 아닐거다.
아침에 물어본건 다 저 녀석을 떠보기 위함도 있었는데, 뭔가 장난을 치려해서 다 계획을 짜놨는데 저렇게까지 축 처져서 내리 잠이나 자고 있을 녀석이 아니다. 저게 다 연기? 그럴 리가.
그 외에 뭔가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으면 강제로 끌고 나가면 나갔겠지.
그런고로... 남은건-
"제 3의 인물...인가."
...근데 이것도 좀 웃기는게. 대체 나한테 뭐가 있다고 이렇게 몰래 불러내려는 건가. 내가 남자라면 러브레터라도 가능성이 있었을거라 생각하는데 말야... 상대가 여자일거라 생각은 들지만, 혹시나 여자가 아니라면, 적어도 남자라면 굳이 글씨를 여자처럼 바꿔가며 쓸 이유가 없고...
...모르겠다.
그렇게 종례까지 끝나고, 나는 학교 안을 쭉 돌아다녔다. 키타카미는 몸이 안좋다는 소리를 하고 일찍 귀가했고... 여기에서 용의 선상에서는 자연히 빠지게 되었다.
아무튼 이렇게 말은 했으니 문예부실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일찍 돌아가도 된다고 안내는 가능하겠구만. 이건 기특하게 생각해주자.
그런 고로, 저 방과후 약속에 가기 전에 일단 문예부실부터 가서 안내부터 해둘까. 괜히 먼저 교실에 돌아가서 아무도 없는 와중에 혼자 기다리고 있는 건 좀 화나는 일이니까 말이지. 적당히 문예부실에서 시간을 때우고 가서 교실을 살펴본 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집에 가면 그만이다.
그렇게 행동지침을 정하고 문예부실에 도착했고...
>>+3까지 다이스.
+1은 미즈, +2는 치즈 언니, +3은 바카네의 유무입니다. 체크 값을 통과하면 이미 문예부실에 와있고, 못하면 뭐...
뭔가, 여기에 항상 사람이 있던 풍경만 생각해서 그런가. 이렇게 텅 비어있는 건 단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바카네든 키타카미든 누구 하나 시끄럽게 굴고 있거나, 키타카미가 치즈 언니를 괴롭...아니, 이건 됐고.
하다못해 다 없더라도... 미즈는 늘 그랬듯 앉아서 책을 읽고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항상 머리 한구석엔 있던거 같다. 그런 기대가 충족되지 않아서인가, 굉장히 공허하게 느껴졌다. 각자 이것저것 자기 짐꾸러미를 갖다놓은 게 있었지만, 그건 결국 그 주인이 있어야 의미가 있다는 걸까.
...뭔 또 감상적인 소리냐. 아직 중2병이냐고.
스스로 생각해봐도 어이가 없어지는 사고의 흐름에 피식 웃고는 세차게 고개를 저어버리며 적당히 단장석에 몸을 던졌다. 키타카미가 없을 때, 노트북을 이쪽에 거치해놔서 여기서 사이트 작업을 한답시고 항상 앉긴 했으니까. 핑계삼아 노트북이라도 키고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가 그 쪽지인지 뭔지가 누가 친 장난인지 확인만 하고 집에 돌아가면 그만이다. 하루정도는 다들 어쩌다보니 안 모일수도 있는거고. 이런 흐름이 쭉 이어지면 이런 민폐스러운 모임도 자연히 흐지부지 되어서 끝날수도 있고 말이지.
"...흠..."
턱을 괸채로, HTML 편집기를 열고 스크롤만 올렸다 내렸다 반복. 이 사이트도 적당히 핑계대가며 손 안대다보면 흐지부지하는데에 한몫 하려나? 아니면 난 뭔가 최선을 다했다는 의미로 뭐라도 건드려봐야하나.
별 의미도, 뭔가 시도하지도 않을 고민을 하면서 스크롤만 까딱이기를 수십분.
...역시, 오늘은 아무도 안올 모양이다.
"이럴줄 알았으면 치하랑 아리 녀석하고 같이 일찍 돌아갈걸 그랬나."
어차피 장난일거라 생각하면서 뭘 기대해서 남은건지. 스스로도 잘 이해 안되지만, 어쨌든 남아서 시간 보냈으니 확인은 해야겠지. 그렇게 결정하고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볼일도 없고. 일찍 확인하고 적당히 돌아가자고.
...그런데 생각해보니 항상 내가 먼저 나가서 몰랐는데, 문예부실 문은 잠그고 가야하나? 아니면 걍 냅둬도 되나?
...굉장히 귀찮아서 신경 끄고 냅두자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여기에 있는 가장 값나가는 물건이 내가 가져온 노트북이라서 문 단속은 하고 가야할 것 같다. 열쇠는... 미즈가 가지고 있나? 그런데 미즈가 지금 없으니...
...열쇠는 교무실에 물어봐야겠군.
교무실은 1학년 5반 교실을 지나가면 있으니까. 그래, 교실 확인만 먼저 하고 난 다음 열쇠를 받아서 다시 돌아와 문을 잠그고 열쇠를 반납하고 집에 돌아가면 되겠구만.
"...거, 더럽게 번거롭네."
마음같아서는 신경 끄고 싶은데 말야. 그냥 돌아가기는 역시 찜찜하잖아, 젠장.
...까먹지말고, 내일이라도 미즈한테 물어봐서 열쇠가 있으면 스페어키를 좀 받아두도록 하자.
누가 거기에 있다 해도 딱히 놀랄 건 없었지만... 타나카 코토하가 있으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늦었네, 푸우 쨩."
생긋 웃으면서 말하는 그 모습은 아침에 반에서 마주쳐서 인사를 건내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다만 위화감이 느껴지는 건... 저 녀석이 굳이 나한테 신발장에 편지를 남겨 방과후에 남게 해서 만나는 등의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할 정도로 생경한 사이가 아니란 말이지.
평소와 같이 단정히 정리된 생머리를 흔들어 다시 정리하면서, 타나카 코토하는 평소같지 않게 교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다소곳하게 행동하던 녀석답지 않은 행동이 괜히 거슬린다.
"뭐하고 있어? 안 들어오고."
...교실 한가운데로 걸어가면서 그렇게 말하는 타나카에게 이끌리기라도 한듯, 나는 자연스럽게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편지는 네가 보낸거냐?"
"응. 뜻밖이었어?"
...그걸 몰라서 묻냐? 할말이 있으면 여느때처럼 적당히 불러내서 말하든, 아니면 적당히 메일을 보내면 될걸 갖다가 대체 뭐길래 편지 같은걸 은밀하게 주고 그러는 거냐.
"무슨 일이냐, 라는 거 얼굴에 다 보이네? 푸우 쨩."
키득거리면서 말하는 타나카 코토하는 아까 종례 때까지의 그 모습과 전혀 다를게 없어 보이는데...
무언가가 다르다는 위화감이 느껴진다.
"응, 뭐... 볼일이 있어서, 겠지? 조금 묻고 싶은게 생겨서 말야."
그렇게 말하고는, 타나카는 발걸음을 떼서 얼굴을 내 얼굴 바로 앞으로 가져왔다.
"푸우 쨩은 혹시, '하지 않고 후회하기보다는 하고선 후회하는 게 낫다'는 말. 어떻게 생각해?"
"...갑자기 그런건 왜 물어보고 있냐."
"글쎄? 궁금해서 그렇지 않을까? 아무튼, 푸우 쨩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 궁금해."
...무슨 진로 고민 같은 거라도 있는 건가?
"...잘은 모르겠다만... 말 그대로의 의미이지 않겠냐."
"그럼 말야, 만약에 말인데... 현 상태를 유지한다면 더욱 악화될 뿐이란 걸 알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좋은 방향으로 돌릴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때. 푸우 쨩이라면 어떻게 할 거야?"
"뭐야, 그게?"
...뭔가 진로상담 같은 게 맞을 거란 느낌이 슬슬 들고 있다. 아니, 잘 생각해보면 저 타나카가 굳이 남몰래 불러내는 것도 그렇고. 저렇게 굳이 빙빙 돌려서 물어보는 식이라면... 대놓고 진로 상담을 해오면 나한테 폐가 되지 않을까, 부담스럽지 않을까 해서 배려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타나카 코토하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고.
...본인이 직접 솔직히 밝히기 전에 내가 먼저 '진로 상담 얘기 아니냐'라고 하는 건, 저 녀석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될테니... 짐짓 모른척 해줘야겠군.
"...뭐, 일본 경제에 대한 이야기야?"
...되도 않는 소리라는 듯 빙긋 웃으면서 무시하는 타나카. 그래, 흰소리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고...
...아무튼 대답하라는 거냐. 조금 고민해본 끝에 생각을 정리해서 말해보았다.
>>+3까지 다이스.
푸우 쨩의 대답은?
1 ~ 80 : "일단 뭐든 상관 없으니 바꿔보려고 하지 않을까." "...그럴수도 있겠지?"
81 ~ 100 : "어떤게 더 좋은지 모르는 상황이면, 바꾸지 않는 이유가 있지 않겠냐? 악화되기만 해도, 현상태 유지가 가장 그걸 완화시키는 거라서 현상유지를 시키는 걸지도 모르잖냐." "......"
뒷짐을 지고 서있던 타나카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마주친 시선에서는 저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현재 상태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테니까, 라는 거야?"
"비슷하지."
"...역시 그게 보통의 대답이려나..."
뭔가 방금과는 달리 다른 사람의 대답을 바라는 말이 아니다. 그냥 스스로 정리하려는 혼잣말.
"...그렇지만 윗선에 있는 사람들은 급작스러운 변화 같은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현장은 시시각각 변해가니까 말이지. 윗사람들처럼 태평하게 손놓고 수수방관하고 있으면 점점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갈 것 같은데, 그럼 독단적으로라도 강경한 조치를 취해봐도 좋지 않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고 있는 타나카는... 일전에 나에게 키타카미의 케어를 맡기던 것처럼, 오늘 점심 메뉴는 그저 그랬다는 식의 뉘앙스로 말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일지 모를 소리를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타나카에게서 이질감이 느껴진다.
...그렇지. 지금 반 어디에 아리가 숨어서 내 반응 같은걸 몰래 찍고있거나 한건 아닐까. 어디, 청소 용구함이나 교탁 밑... 아리의 몸집이 작은걸 생각하면 어느 쪽이든 가능성이 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관찰 대상에게 나는 이제 질려버렸어. 그러니까..."
무슨 직감같은 거라도 있었을까. 반을 두리번거리다 말고 살짝 뜸을 들이는 타나카가 신경쓰여서 우연찮게 시선을 던지니 내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눈을 빛내고 있는 타나카가-
"푸우 쨩을 죽인 뒤에, 키타카미 레이카가 어떻게 나올지를 봐야겠어."
-뒤에 숨기고 있던 오른손을 재빠르게 휘둘렀다.
"...?!"
정말, 거의 무의식 적으로 뒤로 물러서자 방금 전까지 내 목이 있던 공간을 빛이 반사되는 무언가로 타나카가 갈라버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평소와 같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면서 타나카 코토하는 오른손을 가볍게 위아래로 흔들어보였다. 그래, 평소와 같은 미소로. 하지만 그 오른손에 쥐어져있는 물건은... 여고생이 쥐고있기에는 너무나도 무시무시한 군용나이프처럼 보였다. 단순히 모형일거라 일축하기엔 예사롭게 빛나는 금속의 반사광이나, 그걸 흔들고 있는 타나카의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 절대 마츠다 아리사가 꾸민 몰래카메라 따위가 아닐거란 확신을 실어주고 있었다.
저런걸 어떻게, 저렇게나 가볍게 휘두를 수 있을까. 저런 상대에게서 처음 일격을 피한건 정말 요행에 지나지 않았다. 한발짝 물러섰다고는 하지만, 엉겁결에 몸을 뒤로 뺀것이었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균형을 잃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상황이었고... 그동안 알고 있던 것과 현재 상황의 미스매칭으로 인해 멍청히 얼어붙은 채로 타나카의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었을 뿐. 양 옆에 여느 때처럼 잘 정렬되어있는 책상 덕분에 옆으로 피할 길 따위는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 양 손으로 바닥을 밀며 튀어오르듯 일어나 뒤로 재빠르게 물러났다.
타나카는 그런 나를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을 뿐, 굳이 쫓아오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거리가 멀어지자, 그제서야 현실감이 돌아오며 공포감과 황망함이 뒤섞인채로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대체 뭐야. 왜 이런 상황이 된거냐. 왜 내가 타나카가 휘두르는 나이프의 표적이 되어야 하는 거냐고... 잠깐, 방금 타나카가... 뭐라고 했었지? 날 죽인다고? 왜, 아니 대체 왜?!
"ㄴ, 농담은 그만하라고...!"
...갑작스러운 상황변화와 너무 많은 정보량에 뇌가 맛이 갔는지, 가까스로 나온 말은 고작 이 정도였다. 하지만 무슨 말이라도 해야한다는 생각으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이게 이해 되는 녀석이 있다면 좀 나와봐. 대타출동을 허락할테니까. 체력 1/4정도는 내준다고 젠장. 기왕이면 설명도 곁들여줬으면 좋겠지만.
"응? 농담인 것 같아?"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술을 삐죽이는 저 모습은 내가 알던 타나카 코토하가 맞는데. 왜 저 녀석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있는 저 오른손에 들린 저 물건은 왜 저렇게나 미스 매치인거냐고. 태연한 저 표정이 더 공포다. 차라리 무언가 감정적으로 폭발하거나, 이런 낌새가 미리 느껴졌던 대상이었다면 차라리 '그럴지도 모른다'하고 이정도로 공포를 느끼진 않았을 지도 모르지. 정말, 15년정도 살아오면서 지금처럼 공포를 느낀 적은 없다.
"흐음... 죽는게 싫은건가? 살해당하고 싶지 않아?"
"...?"
"나는 유기 생명체의 죽음에 대한 개념이 잘 이해가 안 가서."
...저 녀석... 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냐...?
영문 모를 말을 하면서 진심을 담아 칼을 휘둘러 대는 동급생이라니. 그리고 그것도, 나랑 뭔가 감정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진흙탕 개싸움을 해서 앙심을 품은 것도 아니라, 정말 평소 원만하게 지내온 성실한 반장이 내게 칼을 휘둘러대다니...!
야, 다시한번 말한다. 이딴 상황이 진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 할 수 있는 놈 있으면 나와서 나랑 교체해. 대타출동을 허락한다고!
"...이해도 안 가고, 웃음도 안 나와. 그 위험한 물건은 슬슬 치워둬."
"응, 그건 안될거 같아."
숙제 제출해야하니까 빨리 공책 넘겨줘, 라는 말을 할 때와 똑같은 표정으로 웃어보이면서 타나카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나, 정말로 네가 죽길 바라고 있으니까."
칼을 허리춤에 쥐어서 체중을 실은 자세로 달려드는 타나카. 굉장히 잽쌌지만, 이번에는 거리가 있었기에 나한테도 여유가 있었다. 타나카가 땅을 박차기 전에 먼저 튕겨지듯 도망치며 교실에서 빠져나가-려다가 문이 열리지 않아 그대로 부딪히고 말았다.
"어?"
입 밖으로 나온 얼빠진 소리에, 등 뒤에서 타나카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분명 본래라면 문이 있어야할 복도쪽 교실 벽을 망연히 살펴보고 있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시멘트로 잘 발라 덮어놓은 것처럼. 본래 그런 모양이었다는 듯 문은 오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말도 안돼..."
타박, 타박. 작은 발소리와 함께 등 뒤로 다가오는 목소리.
"소용 없는 짓이야. 이 공간은 지금 나의 정보 제어 하에 있으니까. 탈출구는 진즉 봉쇄해뒀어."
정보 제어...?
"아주 간단한 일이야. 이 건조물의 분자 결합 정보를 조금만 조작하면 바로 바꿀 수 있으니까. 지금 이 교실은 밀실이야. 나갈 수도, 들어갈 수도 없어."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느낌과 함께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전까지 교실에 드리우던 저녁 노을도 전부 사라졌고, 운동장 쪽으로 난 창문도 모두 콘크리트 벽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느샌가 켜져있던 형광등이 차갑게 늘어선 책상 표면을 비추고 있었다.
491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뭔가 이래저래 불안하기 짝이 없는 오후 수업시간이 지나고... 예정되어있던 청소당번까지 다 마치고 뒤늦게 문예부실로 갔는데...
"미즈키 쨩은 얌전해서 입히기 편하네! 봐, 치즈루 쨩! 이러면 금방 끝난단 말야!"
"그... 알겠으니까 빨리..."
...인형같은 인상의 미즈를 인형놀이하듯 메이드 복을 입히고 있던 키타카미가 있었다. 그리고 뭔가 뒤쪽에서 어쩔줄 몰라하는 치즈 언니까지.
"아, 푸우 쨩! 청소 일찍 끝냈구나? 좋아. 다음은 푸우 쨩 차례니까, 금방 끝내고 준비해줄게!"
그리고 나를 발견하고 얼굴이 여러 의미로 일그러지는 치즈 언니와, 속옷이 다 보이는 차림으로 나와 시선을 맞추고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보이는 미즈까지.
...좋아.
키타카미의 저 인삿말에 나는 단번에 상황을 파악하고 반쯤 열려있던 문에서 반걸음 뒤로 물러난 다음 조용히 문을 닫았다.
"...실례."
그러고 그대로 다시 몸을 90도로 돌려 복도를 따라 걷기로 했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간다. 그래. 그것 외엔 나에게 선택지는 없다. 뭐? 아주 당연하게 다음은 나라고? 그걸 듣고 내가 아주 얌전히 '그래, 기다릴게.'라고 반응해줄줄 알았냐?!
어림도 없는 소리지! 내가 호락호락 당해줄줄 아냐?!
이번에야 말로 키타카미의 횡포에서 벗어나리라. 그렇게 결의를 다진 내 앞에...
>>+3까지 다이스.
1 ~ 80 : "야호~ 푸우 쨩!" "...바카네?"
81 ~ 100 : "아, 푸우 쨩." "...뭐야. 타나카?"
2표 먼저 나온 쪽으로 진행합니다.
"야호~ 푸우 쨩!"
"...바카네?"
늘상 짓고있는 그 고양이 같은 미소를 띄우며 발걸음도 가볍게 통통 튀며 내가 있는 쪽으로 오고 있는 노노하라 아카네와 마주쳤다.
...물론, 잘 생각해보면 내가 지금 문예부실에서 그대로 돌아나오는 길이다보니, 문예부실로 가는 길이었을 바카네 녀석과 마주치는 건 어찌보면 꽤 높은 확률... 뭐지. 이 녀석도 청소당번이었나? 근데 이번주 중에 전학왔는데 청소당번 같은걸 했나?
"지금 어디 가는 길이야? 아카네 쨩은 지금 RED단으로 가는 길인데!"
"...빠져나오는 길이다만."
"왜?"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으로 갸웃거리며 되물어보는 바카네를 보고있자니... 생각해보니 이 녀석만 아까 점심시간에 안왔었네. 사실 이 녀석 빼고 4명이나 거기에 모인 것도 정말 우연의 일치였는데, 그 자리에서 키타카미는 새로운 재앙을 들고왔고...
"푸우 쨩?"
...뭔가의 조직에 소속되어 있다고 주장한 이 녀석의 말대로면... 이 녀석은 지금 이 상황을 알고 있는걸까? 알아서 지금 나를 막아서려고 온건가? 아니면 정말 모르고 우연찮게 가던 길에 나랑 마주친건가? 어떻게 판단해야 하나. 어떻게 하는게 가장 좋을까.
>> 다이스 타임. 2표 먼저 나온 쪽으로 진행합니다.
1 ~ 50 : "그러지 말고 어서 가자!" 팔짱을 끼고 질질 끌고가기 시작하는 바카네...? 아니 근데 이 녀석도 보기보다 힘이 세네...?!
51 ~ 100 :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하자." 바카네를 끌고 그저께 이야기를 나눴던 학교 뒷편의 옥외 테이블으로...
"...자, 자! 그러지 말고 어서 가자구, 제군!"
갑자기, 근엄한척 태도를 바꾸며 저런 말을 하고는 나한테 팔짱을 끼고 내 몸을 다시 문예부실 쪽으로 휙 꺾어버리는 바카네...? 그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나를 끌고 가기 시작한다...?!
"어이, 잠깐, 뭐하는거야, 멈춰!"
"안됐지만 버스는 이미 떠났다구, 푸우 쨩!"
"아니 그게 지금 여기서 쓰이는 표현이 맞는거냐?!"
근데 저걸 다 떠나서 바카네 녀석, 키타카미만큼은 아니어도 이 녀석도 보기보다 힘이 세다...?!
"잠깐, 놔라! 야, 이건 아냐! 놓으라고! 잠깐 내 이야기를 들어!"
"안됐지만 말이지, 아카네 쨩은 푸우 쨩이 열심히 RED단에 참여해줬으면 하는 입장이라서 말이야! 그러니까 순순히 참여한다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거란 말씀이지!"
"뭔 유혈사태냐-! 야, 너도 안 가는 쪽을 더 바랄지도 모른다고!"
"설령 후회할지라도 지금의 아카네 쨩은, 푸우 쨩을 붙잡아서 다시 RED단으로 데려가는 걸 번복할 생각 따위 하지 않을거야!"
"아니 일단 좀 놓고 이성적으로-얌마!!!"
점점 가까워지는 문예부실의 문을 바라보며, 어떻게든 상황을 바꿔보기 위해 바카네 녀석을 막아보려했지만 소리를 지르던 늘어지던 철저하게 요지부동이다. 그렇게 점점 언성이 커진 끝에...
"앗, 푸우 쨩이다!"
......굉장히 상쾌해보이는 표정의 키타카미가 문예부실에서 불쑥 고개를 내밀며 기쁘게 소리쳤다.
"넵! 단장님, 아카네 쨩이 지금, 마음대로 부활동을 째려고 한 불량 단원을 잡아왔습니다!"
"응! 잘했어, 아카네 쨩! 어서 데리고 들어와!"
"야! 바카네! 너 후회할거야!"
의기양양하게 나를 끌고 문예부실로 들어온 바카네는-
"...하?"
온통 새빨간 얼굴의 기품 넘치는 메이드와, 여느때처럼 자리에 앉아 책을 읽고 있지만 인형과도 같이 메이드복이 잘 어울리는 미즈를 목도하고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안 그래도 치즈루 쨩까지 다 갈아입히고 난 다음에 푸우 쨩을 붙잡으러 가려고 했는데 말야, 아카네 쨩이 수고를 덜어줬어!"
철컥, 하고 문예부실의 문이 잠기는 소리에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리는 바카네.
...이젠 끝났구만... 체념하는 나와 달리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다는 심정으로 말을 꺼내는, 궁지에 몰린 고양이 상의 바보녀석...
"...저, 저기, 레이카 쨩...? 아카네 쨩도, 입어야하는거야...?"
"응! 푸우 쨩을 잘 잡아온 보상으로, 아카네 쨩부터 갈아입혀줄게!"
...그 직후, 동아리 건물 전체에 울려퍼진 '냐아아아아아아!'라는 비명 소리는 한동안 학생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고 한다나 뭐라나...
...아참, 물론 당연하겠지만, 네녀석의 별명은 적어도 졸업할 때까지는 고정이다, 바카네.
"...어이, 키타카미."
"응? 왜, 푸우 쨩?"
찰칵찰칵찰칵.
"...대체 왜 그렇게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거냐?"
"응?"
찰칵찰칵찰칵.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며 미즈, 치즈언니, 바카네, 그리고 나까지... 돌아가며 온통 온갖 포즈를 취하게 하며 사진을 찍는 키타카미다. 아니, 잠깐 멈추고 좀 뭐라고 설명을 해라. 이게 대체 뭘 위한 사진이고, 이렇게 의상 입고 사진을 찍는게 네 그 RED단 활동이랑 무슨 관계가 있는거냐.
"어... 그러니까, 모에하면 역시 메이드잖아?"
...의미를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좀 해줬으면 좋겠다만.
"나도 엄-청 생각해본거란 말야!"
뭘 생각한건데 대체. 차라리 생각 안하는게 낫지 않았을까.
"학교를 무대로 한 이야기에는, 이런 모에 캐릭터가 반드시 한명은 필요한 법 아니겠어?"
"...근데 4명씩이나 입힐 필요는 있는거냐?"
"누가 가장 모에할지 모르겠어서 일단 다 입혀본거야! 아무튼, 모에 캐릭터가 있는 곳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법이라고도 할 수 있어! 이건 거의 필연이라 해도 될 만한 소리야. 알겠지? 모에파워를 비약적으로 올려서 사건을 일으켜보는거라구!"
...성희롱 사건은 또 일어난거 같긴한데. 사건은 참 잘 일으키는구나, 너.
내가 구시렁거리는 소리는 깔끔하게 무시하고 다시 사진을 찍기 시작하는 키타카미. 한참 사진을 찍으며 좀 더 뇌쇄적으로! 같은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기까지 했지만, 슬슬 흥이 식었는지 사진기를 내려놓으며 갑자기 단장석의 자리에 털썩 앉고는 다들 앉으라는 듯 테이블에 팔을 쓱 흔들어보이는 키타카미. 딱히 그걸 거부하고 사진을 더 찍히고 싶던 사람은 없었는지 4명 모두 다 각자 의자를 꺼내 자리에 앉았다.
"뭐, 사진은 이정도면 재밌게 잘 찍었으니까... 지금 다같이 부실에 모인 김에, 제 1회 RED단 전체 회의를 지금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뿌뿌카뿌-! 하며 나팔소리 비슷하게 내며 자축하는 키타카미다. 그저께 내 방에 와서 했던건 역시 회의 같은건 아니었고 그냥 민폐였군. 그런데 회의란, 뭐 회의할 만한 건덕지를 정해놓고 하는 활동이었냐 이거.
"지금까지 우리 RED단은 많은 일을 해왔어! 전단지도 뿌렸고, 홈페이지도 만들었어! 교내에서 RED단의 지명도는 급격한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고, 그를 통해 제 1단계는 아주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거야!"
...아무리봐도 성공을 거둔건 내 멘탈에 흠집내는 것 정도였다고만 본다만. 아, 치즈 언니의 멘탈도 추가로.
"하지만 우리 RED단의 메일 어드레스에는 신비한 사건을 호소하는 메일도, 이 방에 기괴한 고민을 상담하러 오는 학생도 단 하나도 없었어!"
"그야 지명도가 높든 말든간에 뭘 하는지 도통 이해가 안가는 이상한 단체니까 그렇지 않을까... 동아리로도 인정 못받았다만."
"자고로 행운은 진득히 기다려야 한다고 옛 사람들이 말했다지만, 요즘 시대는 그렇지 않아! 우리가 직접 행운을 찾아나서야하는 법이라고! 그러니까, 찾으러 가보는거야!"
일동 침묵. 뭔가 우리가 반응해주기만을 기다리는 모양의 키타카미였기에, 결국 내가 총대를 메고 되물어 줄 수 밖에 없었다.
"...대체 뭘?"
"그야 당연히 이 세상의 신비한 일이지!! 시내를 샅샅이 수색하면 하나 정도는 분명히 기묘한 현상이 있을 거 아냐?"
...그 발상이 더 기묘한데 말이지. 분명 기가 막힌다는 듯 일그러져있을 내 얼굴은 그렇다쳐도... 어딘가 불편해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는 바카네, 늘상 똑같은 무표정의 미즈, 그리고 이젠 마음대로 하라는 듯 힘이 쫙 빠져있는 치즈 언니의 얼굴까지. 살짝 곁눈질로만 봐도 다들 영 시큰둥하다 못해 불만이 누적되어가는 느낌이다만, 키타카미는 그런 모습들을 전혀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크게 휘두르며 소리쳤다.
"다음 토요일.. 그러니까 내일! 아침 9시에 역 앞에 집합하는거야! 지각하면 안돼! 지각하는 녀석은, 사형이라구!"
...아니 뭔 사형이여 또... 저 사형이라는 말을 꽤나 좋아하는건가. 저런거야 그렇다쳐도.
"...너, 이 메이드 코스튬 사진은 대체 뭘 어쩔 셈으로 찍은거냐?"
"그야 당연히 홈페이지에 올리려고 찍은거 아니겠어?"
당연하다는 듯 당당하게 되묻지 마라 이 자식아! 이야기 끝나는 대로 바로 업로드를 시키려고 노트북에 카메라를 연결해서 파일을 옮기려던 걸 보면 분명 진심이다. 이렇게 해서 접속자 수를 늘린다는 생각이냐?
...물론, 내가 진심으로 입에 거품을 물듯이 키타카미를 막았고, 바카네도 나한테 적극 찬동하며 키타카미를 말린 끝에 우리들의 정신나간 메이드 코스튬 사진은 다행히도 인터넷에 올라가지 않게 되었다. 목깃을 당겨 내리게하고, 치마를 걷어올리고 하는 등 아주 위험천만한 사진을 찍게 해놓은 주제에 이걸 전 세계에 퍼지게 하려하다니.
"뭐, 알았어!"
...그렇게 흔쾌히 수긍하고 순순히 지울거면, 애초에 그런 짓을 꾸미지 말란 말이다 좀!
>>+3까지 다이스.
다음날, 집합 장소에 모인 순서를 판정합니다. 차례대로 미즈, 치즈언니, 바카네의 순서입니다.
높은 순서대로 먼저 도착합니다.
쉬는 날에 아침 9시 집합이라니. 무슨 폭거란 말인가. 물론 어제 정하는 그 순간에 지적해서 바꾸지 못한 주제에 투덜대봤자 한심하기 그지 없겠지. 숨이 턱에 차도록 죽어라 달려 약속 장소인 북쪽 개찰구에 도착했지만 시간은 이미 9시 정각. 다른 멤버들은 이미 모두 모여 있었다.
"빰빠카빰! 푸우 쨩, 지각! 벌금이야!"
나팔을 불듯이 키타카미가 기쁘게 말했다.
"이제 막 9시가 됐다만..."
"땡! 아무리 늦지 않았다 해도 제일 마지막에 온 사람이 벌금이야! 그게 바로 RED단의 규칙!"
"처음 듣는 소리인데."
"그야 지금 정했으니까!"
거 참 텐션 높아보이네. 적어도 도저히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던 교실에서와 비교한다면 지금은 그냥 좀 철없는 애같은 분위기라서 어떻게 해체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지뢰와는 달리 그나마 좀 편안한 느낌이다.
아무튼 저 큰 키로 얼굴까지 들이밀며 말하는 키타카미 덕분에 나는 고개를 끄덕여야만 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고, 분위기를 이기지 못해 고개를 끄덕여보이자 일단 오늘의 행동 일정을 정하자는 키타카미의 말에 따라 모두 근처 카페로 향했다.
"벌칙으로 카페는 푸우 쨩이 쏘는거야!"
네이네이... 뭐, 다들 적당히 시켜주겠지. 그래.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 느릿하게 제일 마지막으로 키타카미의 뒤를 따라 걸어가는데,
"이야이야, 고마워 푸우 쨩."
어느샌가 뒤로 슬쩍 빠진 바카네가 그 트레이드 마크같은 고양이 표정을 지으며 슬쩍 속삭여왔다.
"사실 아카네 쨩 말이지, 푸우 쨩이 도착하기 딱 2분정도 전에 도착했으니까. 중간에 신호 하나라도 잘못 걸리든가 했으면 오늘 쏘는건 아카네 쨩이 되었을지도 몰랐어!"
아아, 그러십니까.
"으에엑, 뭐야, 그 시큰둥한 반응?"
"거 운 좋아서 좋으시겠수."
훠이훠이. 손을 휘저어 바카네를 쫓아내보지만 그래도 기죽지 않고 들러붙는 모습이 꼭...
"...파리?"
"우와아아!! 푸우 쨩이 폭언으로 아카네 쨩한테 화풀이해!!"
우는 척을 하며 앞으로 달려나가는 바카네가 상당히 시끄러웠지만... 다행인지 뭔지 몰라도 다들 바카네의 말에는 별 신경을 안써줘서인지 그대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일행 제일 뒤에서 따라가며 다시 잘 살펴보니, 다들 평소 입던 교복과 헤어스타일이 아니어서인지 인상이 확 달라지긴 했다.
일단 나한테 폭언?을 듣고 앞으로 달려나가 키타카미와 함께 이야기하며 앞장서고 있는 저 바카네는... 오늘은 머리에 힘을 좀 주고 온 모양인지 평소와 달리 착 가라앉아 차분히 정돈된 모습에 하얀색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헤어스타일이 차분해져서 조금은 어른스러워졌나, 싶지만 저 녀석이 까불거리고 워낙 어려보이는 외모이다보니 큰 차이는 잘 모르겠다.
그 옆의 키타카미는 착 달라붙는 면바지에 어깨만 가려지는 민소매 티를 입고 있었는데, 이 쪽도 학교에서처럼 양갈래로 머리를 묶고 온게 아닌 생머리로 확 풀고 와서인지 평소와는 인상이 확 다른...
...그래. 꿈에 나오면 상당히 무서울 것만 같다. 저녀석 머리, 도대체 왜 저렇게 긴거야...
그 뒤를 따르는 치즈 언니는... 머리를 양갈래로 깔끔하게 정리해왔는데, 그럼에도 숨겨지지 않는 그 머리의 풍성함의 볼륨이 압도적인 느낌. 하지만 머리띠가 없이 끈만으로 저렇게 정리해놓으니 이마가 조금 더 노출되어서 인상이 상당히 어려져보여서... 치즈 언니를 제외하면 모두 1학년인데 그냥 따로 말하지 않으면 다 같은 학년이라 해도 믿지 않을까 싶은 수준. 헤어스타일이 상당히 어리게 바뀌었어도 머리의 풍성함만큼이나 기품이 걸음마다 뿜어져나오는 느낌이다. 차분한 색조의 원피스는 이에 더해지는 화룡점정.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내 바로 앞에서 따라가고 있는 미즈. 이 녀석은... 어제와 다를 바 없이 그대로 교복. 하나같이 사복을 입고 왁자지껄한 이 무리에서 가장 겉도는 느낌을 풍기고 있다. 어쩐지 자연스레 RED단의 일원이 되어있지만 원래는 문예부원이잖아... 저 녀석의 아파트에서 들은 그 이해 못할 소리들 때문인지 괜히 신경쓰인다. 아니 다른건 다 그렇다쳐도, 왜 쉬는 날에도 그대로 교복을 입고 있는건데. 사복은 없는거냐.
...어쨌든 이 개성넘치는 5인조는 짧은 시간 걸어간 끝에 카페에 도착했고.
"자, 다들 시켜! 이건 푸우 쨩이 사는거니까 팍팍!"
...제발 남의 돈으로 생색내지마라, 키타카미.
>>+3까지, 카페에서 주문할 메뉴를 2개씩 적어주세요. 적절히 배분하겠습니다.
"저는... 카페라떼로 하겠사와요."
"그럼, 나는 딸기 초콜릿 프라프치노로 부탁해!"
"어이, 키타카미."
제각기 개성넘..치는 것까진 아니지만, 각자 취향에 어느정도 어울리는 느낌으로 주문한다 싶었는데 바로 가게에서 가장 비싼 음료를 대뜸 주문해버리는 건 뭐하자는건데.
"...뭐, 사기로 했으니 별 수 없지."
...이렇게 넘어가야 속 편하다. 가장 비싸다 한들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럼 난 적당히 카페모카로..."
"아, 푸우 쨩. 우리 캐모마일 티도 한번 같이 시켜서 나눠마셔보자! 전부터 궁금했어!"
"어이, 1인당 1음료야. 그 이상을 바라지 마라 제발."
동의도 안받고 정해놓은 룰에 순순히 따르는 걸로도 감사해야지, 어디서 남의 지갑을 싹다 털어먹으려고 드는거냐.
그나저나...
"...미즈, 안 시키냐?"
메뉴판만 하염없이 올려다보며 꼼꼼히 살펴보고 있는 이 무표정 안경소녀. 마카베 미즈키-미즈만이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진지하게 메뉴판을 계속 읽으며 음료를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 3번 정도 정독을 마친 뒤에
"...캐모마일 티로..."
"에에~ 미즈키 쨩? 그거, 마시면 졸음이 솔솔 오는 그런 차라구?"
...어이, 바카네. 다른 사람이 장고 끝에 겨우 고른 메뉴를 그렇게 퇴짜놓지 마라. 그렇게 말하며 살짝 흘겨보았지만 꿋꿋하게 시선을 받아내며 대꾸하는 고양이 소녀 되시겠다.
"하지만 굳이 아침부터 진정작용이 있는 차를 마시는 건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구? 아까 레이카 쨩이 말해서 한번 골라본거라던가 그런건 아니지?"
"......"
이 말에 다시 메뉴판을 슥 훑어보고는,
"...카페오레...로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메뉴를 정정했다.
아니 뭐 어떻게 정하든 간에 결국 내가 사는거니까.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말을 꺼낸 키타카미의 제안은...
"두 팀으로 나뉘어서 시내를 돌아다닙니다. 그러다가 신비한 현상을 발견한다면, 스마트폰으로 연락을 하며 상황을 지켜보는거야."
...뭐냐 그건. 포x몬 go라도 되냐? 걸어다니다가 신비한 현상이랑 맞딱뜨리는게 그렇게 쉽게 일어난다고 장담하는거야?
"이후, 나중에 다시 모여서 반성회를 가져 반성할 점과 이후의 전망을 이야기합니다. 이상!"
...발상은 참 어이가 없다못해 획기적이지만...정리는 그래도 단순하게, 그리고 깔끔하게 잘한 느낌이다. 뭐어 여기에 굳이 필요 없는 토를 달아봤자 피곤해지는건 기정사실이니 넘어가자.
"자, 그럼 제비뽑기로 팀을 나누는거야!"
그렇게 말한 키타카미는 테이블 위에 있던 이쑤시개를 다섯개 꺼내 가게에서 빌린 볼펜으로 그 중 2개에 표식을 하고선 움켜쥐었다. 그러곤 머리를 삐죽 내민 이쑤시개를 우리에게 내밀었다.
"자, 하나씩 뽑아! 마지막에 남는게 내꺼야!"
>>+3까지 다이스. 제비뽑기의 결과를 판정합니다.
+1은 미즈, +2는 치즈 언니, +3은 바카네입니다.
이 중 100에 가장 가까운 값이 푸우 쨩과 팀이 됩니다. 동률이면 컴마가 더 높은 쪽으로.
뽑기의 결과는, 표식이 된 것을 뽑은 게 나하고...
"앗, 푸우 쨩이랑 아카네 쨩이네!"
바카네 녀석.
그리고 나머지 세 사람은 표식이 없는 것을 뽑았다.
"이~런 구성이라..."
"...뭐냐, 그 표정은."
바카네와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뭔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는 키타카미의 반응에 물어보니, 후우, 하고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푸우 쨩, 아카네 쨩.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가장- 불안한 두 사람만 따로 보내는 거라 단장으로서 걱정이 돼."
...누가 누굴 걱정한다고? 내가 지금 되도 않게 아침부터 돈을 뜯겨서 헛소리를 듣고 있나? 지금 키타카미가 누굴 걱정한다고 했냐? 근데 저녀석이 누굴 걱정할 입장이냐부터 따져야 할 거 같은데.
"어디까지나 신비한 일의 수색이니까, 진지하게 해야된다? 알았지?"
...네이네이, 알았으니 제발, 꼭 내 엄마라도 된 것처럼 굴지 말아줬으면 한다. 안 어울린다고. 그래도 가까스로 이런 불평불만을 입밖으로 뱉지 않은건 그래도 저 수색인지 뭔지 하는 동안 키타카미랑 떨어져 있으니 편하긴 할텐데 그걸 굳이 초치고 싶지 않다는 이성적인 판단에서 나온 선택이다. 입을 잘못 놀려서 괜히 더 피곤해질 필요는 없으니까.
"저기, 레이카 쨩. 아카네 쨩, 궁금한게 있는데."
"응! 말해봐!"
...바카네답게 태연하게 질문을 던지고 있고, 또 그거에 기뻐하는 키타카미를 보면 저 둘이 가장 죽이 잘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아카네 쨩들은 구체적으로 무얼 찾아야 하는 거야?"
...어찌보면 당연한 질문이긴 한데, 태평한 질문이기도 하다. 뭔가 의미가 있을거라 믿고 있는건가, 저 녀석.
"자, 예시를 불러줄테니까 이런 걸 찾으면 돼. 일단-"
1. 불가사의한 것.
2. 의문이 가는 것.
3. 미스터리한 사람...
...아, 찾은거 같은데. 지금 신나서 뭔가 읊고있는 키크고 늘씬한 정체불명의 단체 단장님 말이지. 찾았으니까 오늘 활동은 끝인가?
시큰둥하게 생각하며 빨대를 빼고 얼마 남지 않은 카페 모카를 마셔서 치우려는데-
"-그렇지! 시공이 일그러진 곳이라던가, 지구인인 척 행동하는 에일리언을 발견하면 되는거야!"
"--------"
......뿜지 않은 것에 스스로 칭찬해도 되겠지, 이거. 목이 심히 아프지만, 기침하지 않으려 애쓰며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자랑스럽게 눈을 감고 손가락을 쭉펴며 설명하고 있는 키타카미는 덕분에 지금 내 반응을 제대로 못본 모양이다. 그리고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아무 반응 없이 빨대로 조금, 또 조금, 카페오레를 마시고 있는 미즈.
...그리고 뿜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만 가까스로 견뎌낸 것같은, 그 댓가로 입가에 카페라떼가 줄줄 흐르고 있는 치즈 언니와...
"와아, 그렇구나~"
...저렇게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어떻게 소리 하나 안내고 테이블에 잔을 잘 내려놓을 수 있나 감탄이 나오는 바카네였다.
음, 저 테크닉에 한해서는 바카라는 멸칭을 떼줘도 될거같은데...
포권을 하듯 부들부들 떠는 양손을 감싸쥐고 테이블 아래로 내린 바카네는, 그래도 전혀 티 내지 않는 포커페이스로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레이카 쨩의 말은, 에일리언... 우주인이나, 시공을 일그러지게 하는 미래에서 온 사람이나, 초능력자 본인 혹은 그들이 지상에 남긴 흔적 등을 찾으면 된단 말이지? 아카네 쨩이 정리한게 맞지? 응?"
...저렇게까지 아무렇지 않게 유쾌하게 받아내는 저 모습은, 단순한 연기를 넘어선 예술의 경지라 칭해도 되지 않을까.
"그래그래! 바로 그거야, 아카네 쨩! 역시 소질이 있구나?!"
...연기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는 건 분명하다. 저 녀석, 데뷔하면 천재 배우 소리 들을거야.
"푸우 쨩도 조금은 아카네 쨩의 뛰어난 이해력을 본받으라구!"
...저런 천재배우의 영역에 있는 녀석을 뭘 어떻게 본받으라는 건데? 경악과 경외가 대부분이지만, 그 외의 뭔가 잘 표현 안되는 잡다한 감정까지 다 뭉뚱그려진 얼굴로 응시하니 바카네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천연덕스럽게 미소로 답변했다.
"자, 다들 마신거 같으니 이제 출발해볼까?"
그렇게 큰 키 답게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가게를 나서는 키타카미를 필두로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의 뒤를 따랐다.
...새삼스럽지만 나가는 순간 눈에 들어온 영수증에 몰려오는 스트레스. 애초에 그냥 받지 않는게 좋았을 텐데... 뭐, 후회한들 어쩌겠냐.
>>다음 연재시까지...
바카네와 푸우 쨩이 돌아다니는 동안 일어날 일이나, 나눌 대화 주제를 자유롭게 적어주세요.
@다이스 갓이여, 치즈 언니의 차례는 대체 언제 오는가...
그리고 최근 키타카미의 상태는 어떤 것 같냐고 물어보는 바카네
@이 창댓 다이스 최애가 바카네라는 설이 읍읍
"자, 그럼 어쩔까?"
"어쩌긴 뭘 어쩌냐..."
아까 저 단장님이라는 분이 말씀하신 대로라면 우리는 서쪽 방향을 탐색해야겠지요. 네이네이.
...물론 말하나마나 이대로 그냥 집에 돌아가버리고 싶은 마음이 정말 굴뚝같지만...
"...집에 돌아가고 싶긴한데."
"그건 참아주라 푸우쨩."
...이거 봐. 바카네 녀석, 웃고있는 얼굴인채로 그대로 얼굴에 그늘이 드리우잖아. 이럴 거 같았는데 내가 무책임하게 그냥 집에 갈 수 있겠냐고...!
"...서있어봤자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 일단 좀 걷자고."
"찬성!"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텐션이 확 올라가는 걸 보니 기분이 조금 미묘해지긴 하는데... 그러려니 하자.
별 아이디어가 없었기에, 우리는 역 근처에서 흐르는 강가를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 벚꽃은 저문 시기고, 다른 꽃들은 보이긴 하지만 아직 봉오리가 피어나지 않은 상태라 풍경이 굉장히 미묘한 느낌. 그 미묘한 느낌 때문인지 사람도 그리 많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주변 주민 분들이 가볍게 입고 산책을 하는 느낌 외엔 한산한 산책로를 따라 걷고 있으니 바카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참 평화롭네에~"
"넌 평화롭지 않다는 듯 말한다?"
"...뭐...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말이지."
푸우 쨩도 알긴 하잖아? 라고 덧붙이니 뭐라 할 말은 없다. 이 녀석이 그 괴현상을 내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경험시켜줬으니까. 뭔가 더 알고 싶지도, 그렇다고 아는 척 말하고 싶지도 않아서 언급을 피하고 싶어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으음... 푸우 쨩."
"뭐냐."
"아카네 쨩이랑 그, 시외로 데이트 간 이후로 있지."
...아주 잠깐, 저 녀석의 센스에 두통이 찾아왔다. 물론 바카네 녀석 나름대로 정보를 숨기기 위해 고른 단어겠지만, 이봐요, 난 여자에게 취미 없어.
"...너 단어 잘 골라라."
"딱히 틀린건 아니잖아."
...참자. 참아.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하니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바카네다.
"혹시 그 이후로 미즈키 쨩이나 치즈루 쨩이 푸우 쨩한테 뭔가 대화나 접촉을 시도한 적이 있었엉?"
말투는 참 가벼운데... 얼굴도 고양이 상으로 싱글싱글 웃고 있는데 말이지. 저 녀석 눈빛은 왜 또 날카로운거냐.
...접촉, 이라는 단어 선택에서. 능글맞지만 생각 이상으로 신중한 저 녀석이 고를만한 단어는 아니라는 판단이 든다. 일부러 나한테 압박을 주는건가, 아니면 저녀석이 조금 다급하다는 걸 어필하는건가.
아무튼 뭐라 대답하면 좋을까. 사실대로? 아니면 거짓말을?
>>+3까지 다이스. 2표 먼저 나온 쪽으로 진행합니다.
1 ~ 50 : ㅇㅇ
51 ~ 100 : ㄴㄴ
"없는데."
"지이인짜아아???"
"...없다고."
"...뭐어, 알겠어. 푸우 쨩이 그렇다면야, 아카네 쨩이 믿어줘야겠지!"
...거참, 응 안 믿어~를 고상하게 돌려서 까는군 그래. 방금까지 내 눈동자를 들여보던 그 시선에서 단 하나의 신뢰도 느껴지지 않았다만. 물론 나도 이 녀석을 믿지 않으니 이렇게 되도 않는 거짓말을 하는 거고.
...이번엔 내 쪽에서 좀 떠보도록 할까.
"굳이 그런걸 물어보는 이유는 뭐냐? 뭐, 다른 녀석들 세력이 어떻게 움직이나 정찰이라도 하려는 거야?"
"이야이야, 너무 그렇게 날세우지 말라구, 푸우 쨩. 그런 의도는 없었으니 안심해."
워, 워. 아예 입으로 소리를 내며 양손을 들어 제지하려 드는 바카네 녀석. 내가 뭔 사나운 짐승인거마냥 대하지마, 이 자식아.
"뭐... 염탐같아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아카네 쨩네도 꼭 필요해서 물어본 것 뿐이니까? 아직 접촉이 없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라서 확인한 거라구."
"...그건 무슨 말이냐."
"그으게 말이지... 레이카 쨩을 중심으로 있는 아카네 쨩네 동료들이나, 아니면 다른 세력들 간에서... 뭐라 정리해야 하낭? 관점이 다르다고 해야할까? 이념이 다르다고 해야할까. 어쨌든 상당히 판이하게 다르거든. 그래서 정보가 되든 뭐가 되든 뭔가 세력 간에 불균형이 생기면 괜히 피곤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엉!"
...뭔가 나름대로는 문제가 있는 모양인데,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하고 있으니 도저히 그리 심각하다는 느낌을 못 받겠다. 내용도 잘 이해가 안가는데 메신저가 너무 가볍게 말하고 있어서 더더욱.
물론 이 앞에 있는 허풍쟁이 느낌의 고양이 같은 바카네 녀석은 제한되긴 해도 진짜배기 초능력자였고, 또 다른 부원은 스스로가 우주인이 만든 인공적인 무언가라고 정체를 밝혀오며 장황한 설정을 읊어놨고...
...그렇다면, 바카네나 미즈의 케이스 하나하나 소거하면 남는건 치즈 언니가 미래인이라는 것.
...뭐 물론, 마카베 미즈키가 진짜 우주인이라는 그 소리를 믿었을 때나 해당되겠지만.
"뭐, 푸우 쨩이 아니라면 그걸로 됐나~ 그럼 가보자구!"
"...뭘 어딜 가보자는거냐."
"기왕 놀러 나온 김에 좀 둘러보고 다니자구. 푸우 쨩, 일단 아카네 쨩은 이 동네에 전학온 미소녀 전학생이라구? 이 동네 살던 푸우 쨩한테 에스코트를 좀 부탁해도 되는게 아닐까나?"
"...참 너란 녀석은 한결같이 건방지구나."
"건방지다니! 귀엽다고 하라구!"
...이런이런...
뭐, 어쨌든 노는게 아니라고 키타카미가 못박아 놓긴 했다만... 굳이 주말에 끌려나와서 그 귀찮은 녀석이 바로 옆에 붙어있지도 않은데, 별로 뭐하는지 이해도 안가는 헛짓거리를 하며 시간을 때우고 싶은 생각은 나한테도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못 이긴척, 바카네 녀석에게 끌려 다녀주기로 했다. 행여나 키타카미가 급습하더라도 이 녀석을 미끼로 던져주면 나는 적당히 명분이 생기니 빠져나갈 수도 있으니 말야.
그렇게 바카네와 함께 옷가게들을 윈도 쇼핑하고, 노점상의 싸구려 액세서리에 관심을 갖고 이것저것 달아보려던 바카네를 뜯어말리고,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를 보고 하나씩 사 들고 돌아다니며 먹거나... 꽤 충실하게 시간을 때울 수 있었다.
그러던 중 울리는 휴대전화를 꺼내보니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12시에 일단 집합. 역 앞에서!]
"어라, 레이카 쨩이잖앙? 12시 집합...이라는데 지금 시간이..."
"...11시 50분이다."
"늦었네."
"...뛰어가도 12시까진 못 가지."
"그래도 서둘러서 돌아가자궁? 레이카 쨩이 짜증내면 아카네 쨩이 곤란해져~"
...그걸 넉살좋게 말하지 마라. 넌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지만 듣고 있는 이쪽이 느낄 죄책감을 좀 배려하라고.
"자, 푸우 쨩, 아카네 쨩. 늦은건 늦은거고."
...의외인데. 저렇게 일단락짓고 시작하나.
"수확은?"
"아하하, 그게..."
웃고있지만 시선이 점점 날카로워지는게 피부로 느껴진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게 아닌데도. 뭔가 그걸 바카네의 헤픈 웃음이 더 부추기는 것 같은 느낌인건... 역시 어떻게든 책임전가를 하고 싶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겠지.
바카네를 추궁하는 건 별 의미 없다고 생각했는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키타카미. 열심히 했냐, 하면 아주 살짝 양심에 찔리긴 한다만, 뭘 어떻게해야 열심히한거냐 라고 따질 수는 있으니까 양심의 가책같은 건 없다.
"찾은게 없었던거야?"
"없었다..."
"정말 찾아본거지? 어슬렁거리기만 한거 아니지, 푸우 쨩?"
"없었다니까. 그러는 너희 쪽은 뭐 좀 찾은게 있냐?"
...이보시죠, 단장님. 왜 내가 되물어보니까 바로 입 꾹 다물고 입술 삐죽이며 고개를 휙 돌려버리는 겁니까?
뒤에 서있던 치즈 언니가 난처함이 가득 담긴 미소로 대답을 대신해줬고, 미즈는 늘 그렇듯 멍하니 서있었고...
"...점심 먹고 다시 시작이야!"
...키타카미는 오기로라도 포기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적당히 역 근처의 햄버거 가게에서 점심을 때우고 있던 중, 키타카미는 다시 팀을 나누자며 아침에 카페에서 사용했던 이쑤시개를 다시 꺼내들었다. 아니...그거, 안 버리고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거냐...
>>다이스타임. 푸우 쨩과 같은 팀이 되는 사람?
2표 먼저 나온 쪽으로 진행합니다.
1 ~ 20 : 바카네
21 ~ 50 : 미즈
51 ~ 100 : 치즈 언니
※ 치즈 언니의 이벤트가 거의 없었으므로 어드밴티지를 좀 줍니다.
"와아, 아카네 쨩 이번에는 표식이 없넹!"
"......"
미즈와 바카네가 보여준 이쑤시개에는 표식이 없었고...
"...이번에도 있구만."
"자, 치즈루 쨩. 빨리 뽑아."
내가 뽑은 이쑤시개를 보고 치즈 언니를 재촉하는 키타카미. 그리고 그렇게 끝난 제비뽑기의 결과로 이번에는 나와 치즈 언니 두 사람의 팀. 그리고 나머지 3명의 팀으로 나뉘게 되었다.
"......"
뭔가 뚱하니 자기가 들고 있는 이쑤시개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키타카미는,
"...자, 그럼 다 먹었지?"
"저기, 아직 다 못먹었다만-"
"4시에 역 앞에서 집합하자. 이번에야 말로 뭔가 찾아와야해."
그렇게 딱 잘라 말하면서 남아있던 콜라를 다 마셔 비워버렸다.
"뭐, 그럼 가죠."
성큼성큼 큰 걸음걸이로 멀어져가는 키타카미네 일행-미즈도 꽤 다리가 긴 편이라 잘 따라가는 편이었지만 바카네 녀석은... 그저 묵념-을 배웅하고서 우리도 그 반대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뭐 당연하게도 뭔가 발견할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여태까지 미즈, 바카네가 그랬듯...
"...푸우 쨩."
어느 정도 충분히 걸어왔다, 싶은 때에 뭔가 단호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치즈 언니. 뭔가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사와요."
문예부실에서 늘 의기소침해있고 위축되어있던 그 눈빛이 아닌, 결의에 찬 눈빛에 고개를 끄덕여보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좋을지, 이야기 할 수 있는 것도 한정되어서 잘 이해시킬 수 있을 지도 모르겠사와요. 믿어줄지도 잘 모르겠지만..."
이런 말을 중얼거리며 줄곧 고민하던 치즈 언니는, 마침내 제일 먼저 이렇게 말했다.
"전 이 시대의 인간이 아니와요. 훨씬 더 먼 미래에서 왔어요."
...뭐, 어느 정도 예상하기는 했다.
"언제, 어느 시간대에서 여기에 오게 되었는 지는 말할 수 없어요. 말하고 싶어도 할 수 없도록 다 제한이 되어있거든요. 타임머신을 타기 전에 미래의 이야기를 최대한 제한시키도록 미리 정신 조작을 해서 강제암시를 걸은 상태여요. 그래서... 필요 이상의 말을 하려고 하면 자동적으로 차단이 걸려버리니, 그 점은 고려하고 들어주셔요."
...검열삭제, 비슷한건가요. 어쨌든.
"시간이라는 것은 연속성이 있는 흐름이 아니라, 그 시간마다 잘려진 하나의 평면이 쌓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저기, 처음부터 이해가 안갑니다만."
"...아, 그렇겠네요. 그럼, 애니메이션을 상상해보는거여요. 마치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래는 한 장씩 그려진 정지화면을 연달아 보여주면서 그걸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거잖아요? 시간도 그거랑 비슷하다 생각하면 되지만... 디지털적인? 셀 애니메이션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알기 쉬울까요?"
...뭐 대충 그렇다고 칩시다. 애니메이션은 잘 모르지만...
...이거 아리 녀석이 들으면 이해할 수 있을라나.
"시간과 시간 사이에는 단절이 있어요. 한없이 0에 가까운 단절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래서, 본질적으로 시간과 시간 사이에는 연속성이 존재하지 않사와요."
"...음..."
"시간 이동은... 쌓여있는 시간 평면들을 말하자면 2차원 평면이 아닌 3차원 방향으로 이동하는 거라 보면 되는거여요. 미래에서 온 저라는 존재는 이 시대의 시간 평면상에서 볼 땐 셀 만화 도중에 그려진, 필요 없는 그림과 같은 거죠."
"......"
"시간은 연속되지 않기 때문에, 만약 제가 이 시대에서 역사를 개혁하려 해도 미래에 반영되지 않사와요. 그냥 이 시간 평면 상의 일로 끝나버리고... 수백 프레임이 1초에 흘러가는 애니메이션에서, 중간에 아주 작은 얼룩이 하나 정도 생긴다고 하더라도 스토리가 바뀌거나, 일반 시청자가 봤을 때 티가 나거나 하진 않잖아요?"
......
"시간은... 강물 같은 아날로그가 아니라, 그 순간마다 시간 평면이 겹쳐져 쌓인 디지털적 현상인거에요. 이해가 되나요?"
"전혀요."
...그냥 미래에서 왔다는 것만 이해하자. 대충 그럴거라고 예상은 했으니까.
내 반응에서 살짝 쓰게 웃어보이던 치즈 언니는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제가 이 시간 평면에 온 이유는요... 지금으로부터 3년 전에, 커다란 시간 진동이 검출되었어요."
...또 3년 전인가.
"그러니까, 푸우 쨩이랑 키타카미 씨가 중학생이 되었을 무렵이어요. 조사를 하기 위해 과거로 날아온 우리들은 놀랄 수 밖에 없었어요. 아무리 해도 그보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 수가 없었으니까요."
애초에 시간여행이라는 것 자체가 생소한 나로서는,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없다 여부가 뭐 그리 중요한지 잘 모르겠지만... 치즈 언니가 정말 저렇게나 진지한 표정을 짓는 걸보면 위험한 일이긴 하겠지.
"조사 결과, 커다란 시간의 단층이 시간 평면들의 사이에 존재하는 것 같다는 게 결론이었사와요. 하지만 어떻게 그 시대에 한해서 그런게 존재하는 지 알 수 없었는데... 원인으로 추정되는 것을 찾아낸 것이 얼마 전이어요. 물론, 제가 있던 미래에서의 얼마 전이지만요."
"...뭐였는데요?"
답을 알것만 같다.
"키타카미 씨요."
와, 정답이네. 상품은 없겠지만.
"시간의 왜곡의 한가운데에 키타카미 씨가 있었어요.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금지사항에 걸려서 설명할 수 없으니 물어보셔도 소용 없사와요. 하지만, 이건 확실해요. 과거로 통하는 길을 닫은건 바로 키타카미 씨라는 것."
"...그 녀석이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물론 저희도 그렇게 생각했사와요. 고작 인간 한 명이 시간 평면에 간섭한다는 게... 아직까지 해명되지 않은 사항이와요. 수수께끼죠. 키타카미 씨도 자신이 그런 짓을 하고 있다고는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고요. 본인이 시간을 왜곡시키고 있는 시간 진동의 근원이라고는 생각도 못하고 있으니까요."
...애초에 저런 현상에 대해서 알고 있을리가 없잖습니까, 라는 말은 고이 집어넣어두자.
"저는... 키타카미 씨의 근처에서 새로운 시간의 변이가 일어나지 않는지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음, 뭐랄까, 적당한 말이 잘 떠오르지 않지만... 감시자라고 보시면 되겠사와요."
"......"
"이런 이야기... 못 믿겠죠?"
그야 처음 들었으면 진지하게 정신과를 데려가야 하나 생각했겠습니다만... 2번 정도 다른 이야기를 미리 들어둔 덕분에 예방 접종은 충분히 된 모양이다.
"...아뇨. 그렇지만 왜 제게 그런 이야길 하는 건지..."
"...푸우 쨩이 바로 키타카미 씨에게 선택된 인간이니까요."
...하?
"자세히는 말할 수 없어요. 금지사항에 걸려버리거든요.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 푸우 쨩이 키타카미 씨에게 중요한 사람일 거고... 키타카미 씨의 일거수일투족에는, 모두 이유가 있어요."
"...그럼, 바카네랑 미즈는..."
"그 두 사람도 저와 아주 가까운 존재...라고 보시면 되겠사와요. 설마하니, 키타카미 씨가 이렇게나 정확히 우리들을 모을줄은... 생각지도 못했지만요."
...그럼 물어보자.
"치즈 언니는, 그 녀석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금지 사항입니다."
"키타카미의 행동을 그냥 방치하면 어떻게 되는거죠?"
"금지 사항입니다."
"아니, 미래에서 왔다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고 있는거나 다름 없는거잖아요."
"금지 사항입니다."
"...키타카미한테 직접 말하는 거는?"
"금지 사항입니다."
"......"
...거, 철저하네...
"미안해요. 말할 수 없어요. 특히, 저에겐 지금 그런 권한이 없어요..."
더이상 뭐라 말을 하지 못하는 내 반응에, 얼굴이 점점 흐려지는 치즈 언니.
"믿어주지 않아도 좋아요. 그저, 푸우 쨩이 알고 있으면 해서 말한거니까요."
...셋 다 믿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는 건 같구만.
"...미안해요. 갑자기 이런 소릴 해서..."
"아뇨 뭐, 그건 상관 없는데..."
사실 믿지말라고 해도, 바카네 녀석이랑 겪은거 때문에라도 다 믿을 판이라서 말이지. 그런데 그걸 다 순순히 받아들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긴 하다. 아니 누가 저걸 믿겠냐고 상식적으로.
"...그냥 좀 보류하는걸로."
"네?"
"그거, 믿거나 안 믿거나... 그런거 다 떠나서, 다 나중으로 미루고. 보류하는 걸로 하죠."
...일단 이렇게 정리하도록 하자. 이게 맞을 거다. 어차피, 바카네나 미즈에 대해서 물어봐도 아까처럼 '금지 사항입니다'라는 대답이 돌아올 뿐일거고... 이런 식으로 핵심적인 것에는 대답을 들을 수 없고. 그렇다고 질문하지 않고서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에 무조건 적으로 ok하는 건 역시 아니니까...
"...네. 지금은 그거면 충분하여요. 앞으로도, 저와는 평범하게 지내줬으면 해요. 부탁해요."
...그렇게 진지하게 말하면서, 정중히 양 손을 모으고 90도로 숙이며 인사하실 내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분명 오버라고, 이거.
...그래도, 딱 하나 궁금해진게 있으니 물어는 보자.
"...궁금한거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뭔가요?"
>>+3까지 다이스.
1 ~ 80 : "치즈 언니, 진짜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81 ~ 100 : "...그 때 키타카미가 말한 냄새는 뭔가요?"
2표 먼저 나온 쪽으로 진행합니다!
앞의 침묵은 뭐죠?
"치즈 언니. 혹시 진짜 나이가 어떻게 되나요."
"...후후... 금지사항, 이어요."
...아까와 달리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보이는 걸 보면, 아마 이건 뭔가 암시에 당해서 한 행동이 아니란 걸지도.
그 후로 뭐... 그냥 둘이서 이곳저곳 둘러보고 돌아다녔을 뿐. 상점가에서 구경도 하고, 군것질도 하고...
...그러고보니 치즈 언니가 살던 미래에서는... 튀김같은 걸 별로 안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상점가에서 냄새가 진동하던 고로케나 하나 사먹으러 가려 했더니 치즈 언니가 별로 안땡긴다고 그래서...
뭐, 아마도 부잣집 규슈일 이런 사람이 그런 시장판 음식이나 고칼로리 정크푸드 같은 걸 먹을리...
"...그러고보니 오늘 햄버거..."
...그러고보니 햄버거를 먹었는데, 왜 고로케는 싫어하는 거지...?
아무튼 별로 내켜하지 않는 사람에게 굳이 억지로 강요하고 싶지 않아서 적당히 돌아가다가 막과자 집을 발견하고 사갈만한게 있나 싶어 들렀는데...
"...엇."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물론 당연하게도 전화가 왔을테고... 지금 굳이 나한테 전화를 할 만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푸우 쨩~!]
"...거 목청은 언제나 좋구나 너는."
[지금 몇 시일까?]
"...응?"
...그 말에 잠시 귀에서 휴대폰을 떼고 액정 화면을 확인해보았다.
"...어이쿠."
...시간이 이렇게나 되었나.
"...어, 시간이 이렇게 됐나."
...뭐라 따로 할 말이 없어서 다시 갖다댄 휴대폰 너머로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뭐, 주말에 강제로 끌려나왔는데 내가 뭐 그리 사과를 하고 해야하냐, 하는 생각에.
[...어서 돌아와! 30초 이내에!!]
...어, 그건 좀 물리적으로 어려울거 같은데.
[그럼 10분 줄거야! 10분 후부터 1분 초과할 때마다, 1분당 1일씩! 아카네 쨩이 네코미미 메이드로 하교 시간에 전단지를 배부할 줄 알아!]
...그게 나랑 무슨 관계야... 라고 대답하려 했는데, 내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전화 너머가 소란스러워지더니 전화가 끊어지고 말았다.
...뭐, 진짜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그래도 바카네가 조금쯤은 불쌍하니 최선을 다해 돌아가보도록 하자.
>>+3까지 다이스. 푸우 쨩과 치즈 언니의 복귀까지 걸린 시간을 계산합니다.
+3까지의 다이스 합계로 판단하며, 다이스 합계 10당 1분이 경과합니다. 즉, 300이 나오면 30분 경과...
과연 아카네 쨩은 며칠이나 네코미미 메이드를 해야할까요?<어이
...물론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불가능한게 가능한 건 아니다.
"헥, 헥..."
그래도 꽤나 선선한 날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역앞까지 나름대로 죽을둥 살둥 뛰어가다보니 슬슬 따가워지기 시작했던 햇살이 제대로 몸의 온도를 올려버려준 덕분에 팔자에도 없이 땀을 줄줄 흘리게 되어버렸다. 아니, 휴일이라 학교에 안가서 이딴 유산소 운동은 안할줄 알았는데.
그래도... 키타카미의 그 코스프레 강요는 치즈언니나 나도 충분히 당해왔던 만큼, 쓸데없이 바카네 녀석한테 불똥이 튀게 되었으니 사람 된 도리로서 최선을 다해야 마땅했다.
뭐, 아무튼 그런거라고. 그러니까, 전화 끝나고 31분이나 늦은건 미안하다.
"...푸우 쨩...!"
...그러니까 이건 좀 놔라, 바카네. 난 어떻게 할수 있는게 없다니까.
숨이 턱에 차오르도록 죽어라 둘이서 뛰어서 도착했을 때, 기다리고 있던 3명은 제각각 다른 반응으로 우리 둘을 맞이했다. 미즈야 뭐, 늘상 그랬던 것처럼 무표정하게. 키타카미는 전화할 때는 살짝 화난 것처럼도 느껴졌는데, 방글방글 미소가 가득한 채로 만족스럽다는 반응...이었고.
"아까 전화가 끝나고, 31분이나 걸렸네! 그러니까, 21분 초과야!"
...아, 그냥 괴롭히는게 좋다는건가.
바카네는 뭐... 우리가 보이자마자 바로 내 옷자락을 붙잡으며 온통 울상이었고.
...키타카미한테 더 사정하지 않는건, 아마 우리가 오기 전에 충분히 이야기를 시도했지만 저 벽창호같은 단장 님이 전혀 듣지 않았다는 거겠지.
"푸우쨔아아아앙...!!!"
"...그, 미안하다니까... 좀 거리가 멀어서..."
"그치만...! 아카네 쨩, 21일 동안 메이드 복을 입게 생겼는데...?! 무려 3주 동안, 방과후에 메이드 복을 입어야 한다구...?!"
...아니, 그... 어쩔수 없었다니까...
"아참, 물론 '평일'기준이라서 4주 이상이야!"
"으아아앙!!!"
야, 키타카미?!
비수를 꽂아버리는 키타카미를 경악해서 바라보니까, 아무래도 이건 스스로도 조금은 찔렸는지 살짝 시선을 피한다.
"그래도 푸우 쨩한테 계속 벌금을 부여하는 것보다, 귀여운 아카네 쨩이 메이드 복을 입는게 더 수지타산에 맞지 않을까 해서? 오늘 푸우 쨩 안그래도 벌금 엄청나게 냈잖아."
...입술을 삐죽이며 검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저렇게 나름대로 논리를 내세우는데...
"...아니 차라리 그냥 나한테 벌금을 내라고 해라."
...불편해서 잠도 못자게 만들 셈이냐.
"...뭐, 그럼 벌금이나 아카네 쨩한테 벌칙 적용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회생의 기회!"
빰빠카빰~!
...너무 경쾌한 저 '빰빠카빰~!'이 왠지 더 성질나게 하는 건 왤까...?
"자, 그럼 푸우 쨩이랑 치즈루 쨩. 오래 걸렸으니까, 뭔가 성과는 있었던 거지? 응? 마지막 회생 기회입니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어보는 키타카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건 뭐...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뭐, 그래서 결국. 성과고 뭐고 당연히 있을 턱은 없었고... RED단의 휴일 활동은 시간과 돈만 낭비한 채 그대로 끝나버렸다.
"...피곤하여요."
...조금 퀭해보이는 느낌의 치즈 언니는,
"키타카미 씨는 정말, 엄청나게 빠르게 걸어서... 오전에 따라가기도 꽤 힘들었는데, 마지막에도 무리 하였어요..."
...규중의 아가씨 다운 반응을 보였다. 덧붙여지는 한숨은 아마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전부 포함하는 거겠지.
"...그래도, 오늘은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웠어요."
...그렇게 슬며시 속삭이고는, 우아하게 웃으며 뒤로 떨어지는 모습... 솔직히 저런 우아한 모습, 여자라면 누구라도 한번쯤 저렇게 해보고 싶다고 동경하게 되지 않을까.
"그럼, 다들 살펴가시어요."
...마지막까지 우아하게 인사를 남기며 치즈 언니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내 어깨를 두드리는...
"...푸우 쨩..."
천천히 돌아보니 상당히 미묘한 느낌의 미소를 짓고 있는 바카네 녀석이 있었다.
"뭐어, 오늘 아주 재미있었다구... 레이카 쨩은 역시, 아카네 쨩의 기대에 못지 않게 재미있는 사람이었어."
...입꼬리가 부들거리고 있다만. 그래도 천재적인 연기력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가까이 있는 나 말고는 알아보기 힘들었을게 분명했다.
"...뭐어, 푸우 쨩이랑 다닌 것도 재밌었지만 말이지."
...슬쩍 고개를 돌리면서 키타카미한테 보이지 않게 윙크를 하는 모습은... 이 녀석이 절대 만만찮은 녀석이라는 걸 확실히 인지시켜줬다. 아까 징징거린 것도 어느정도는 연기였던건가...
...물론 온갖 이상한 옷으로 코스프레를 강요당해오고 있는 저 녀석이 보인 반응이, 마냥 거짓말은 아닌 거 같지만. 그래도 역시 마음을 놓긴 위험한 녀석이랄까...
"아무튼, 벌금으로 아카네 쨩의 네코미미 메이드 일수를 줄여줘서 고마워, 푸우 쨩!"
"...뭐..."
...다음 휴일 때 다시 재개할 탐사에서, 다시금 내가 쏘는 걸 전제로 바카네 녀석의 코스프레 벌칙이 조금 줄어들긴 했다. 21일은 애매하게 잘리니까, 6일 정도 줄여서 3주정도만 하랬나.
"......"
...아니, 고작 6일 줄은 거에 고마워할 정도로 길다니, 좀 너무한거 아니냐고.
"자, 그럼 아카네 쨩 먼저 가볼게! 다들 조심히 들어가라구!"
...어쨌든 상쾌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노노하라 아카네도 자리를 떠났다.
물론, 미즈는 키타카미가 오늘의 활동 종료를 선언하자마자 바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갔지만.
그렇게 역 앞에는 나와 키타카미, 단 둘만 남게 되었다.
"실망이야, 푸우 쨩!"
...그렇게 대뜸 말을 꺼내는 키타카미에게, 나는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일 수 밖에 없었다. 아니, 진짜 어처구니 없다고 애초에.
"아니, 대체 뭐가."
"푸우 쨩, 오늘 뭐 한거 없는거지?"
"...뭐, 다들 그렇지 않나."
"그래선 안된다구!"
...볼을 잔뜩 부풀려보이고 있는 걸 봐도, 별 감흥은 없다. 아니, 애초에 말이지.
"그렇게 말하는 넌 어떤데? 뭐 재밌는 거라도 발견한 거 있어?"
...그렇게 퉁명스럽게 내뱉고서 키타카미를 본 나는 바로 후회할 수 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는 뭔가 반 정도는 장난스럽게 말하던 반응이었는데, 내가 저렇게 말하니까 얼굴의 표정이 사라지고 볼을 부풀리고 있던 것도 그대로 풀면서...
"......"
고개를 숙이며 아랫입술을 깨무는... 뭔가, 지금까지 봐왔던 반응과는 너무 달라서 내심 당황했다.
...뭔가 수습은 해야했다.
"...뭐어, 하루 사이에 그런 재밌는걸 바로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 무방비 하겠냐."
...내 말에 고개를 든 키타카미는 사납게 나를 노려보더니 고개를 휙 돌릴 뿐이었다.
"...학교에서, 반성회야."
...항상 방글거리는 얼굴만 보여서 몰랐지만, 저 녀석... 정색하니까 상당히 위압감이 느껴진다. 뭔가 해야하지 않나, 해서 불러보려 했지만 저 말만 남기고는 바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내가 뭐 실수한건가..."
...뭔가 매우매우 찜찜한 느낌이 차올랐지만...
...에이, 몰라. 일단 돌아가자. 안 그래도 마지막에 죽어라 뛰어서 피곤하다고...
>>+3까지 다이스 체크.
체크 값은 80 입니다.
그렇게 녹초가 되어서 피곤한 몸을 겨우겨우 이끌고 집에 도착했다. 그나마 토요일이니까, 내일은 휴대폰 전원을 적당히 내려놓고 집에서 얌전히 쉬면 회복되겠지. 키타카미든 바카네든 누가 됐든 절대로 방해하지 못하게 완전히 잠수를 타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갔다. 그래, 내친김에 지금 당장 휴대폰 전원을 꺼두도록 할까.
그렇게 생각하며 신발을 벗기도 전에 그렇게 휴대폰을 꺼냈는데-
"푸우 쨩-!!"
"...하다못해 언니라고 불러라."
...거실에서 튀어나오면서 휙 달려드는 미라이 녀석을 가볍게 손을 뻗어 이마를 짚으며 껴안지 못하게 막았다.
"땀났으니까 붙지마."
...일단 이것도 이거지만... 이 녀석, 달라붙어서는 '...푸우 쨩은 오늘도 여전하구나...' 같은 화나는 말을 덧붙이니까 말이지. 쥐어박을 힘도 없으니 그냥 미리 컷하는게 편하다. 버둥거리다 말고 코를 벌름거리며 냄새를 맡고는 바로 얼굴을 찌푸리는 걸 보니 잘했다는 생각 절반, 반대로 이녀석한테 헤드락이라도 걸어버릴까 하는 생각이 절반.
"...우와, 땀냄새! 바로 샤워... 아 그렇지 참!"
...되도 않는 잔소리를 하려다 말고 동생 녀석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푸우 쨩, 손님이 왔어!"
"...? 뭐?"
...무슨 소리야?
"푸우 쨩이랑 같은 반이라고 그러던데?"
...잠깐, 잠깐만.
...뭔가 이상한데. 일단... 치하나 아리가 왔다? 아니, 그 둘만이 아니라. RED단의 그 누가 왔든... 미라이가 '같은 반이라던데'라는 식으로 말할 리는 없다.
물론, 미라이가 물론 사람 얼굴을 한번 보고 바로 외울 정도는 아니긴 하지만. 치하나 아리는 오랫동안 봐왔으니 저런 식으로 말할리가 없고, RED 단의 다른 멤버는... 방금 다들 녹초가 되어서 돌아갔고. 키타카미는 뭔가 화가 나서 돌아갔으니 갑자기 나를 앞질러서 우리 집에 와있을 리도 없고.
...아니 그럼 대체 누구야.
"지금 거실에 있어!"
...뭐 그건 잘 알겠다만... 같은 반, 이랬으니... 그리고 내 주소를 알만한 사람을 또 추려본다면. 남은 후보는 단 한 명.
벌컥.
"아, 푸우 쨩. 일찍 왔네?"
"타나카..."
...우리 반의 모범 그 자체이신 반장 님이 여긴 어쩐 일일까.
"어머, 땀 많이 흘렸네. 일단 씻고 나올래?"
"...아니 뭐. 잠깐 정도는 괜찮아."
네가 얼마나 기다렸는지도 모르고 말이지.
그렇게 덧붙이니 손사레를 치는 타나카였지만, 나도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가볍게 흔들어보이고 쇼파에 털썩 주저 앉았다.
"그래서 어쩐 일이야? 갑자기 연락도 없이."
"음...그게. 이번 주에 이래저래 쉬기도 하고, 뭔가 푸우 쨩을 중심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잖아?"
"...뭐 그랬지."
...새삼스레 되짚어보니 멘탈에 타격이 다시 돌아오는 느낌이다.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내 표정을 쭉 살피며, 타나카 코토하는 다시 말했다.
"그래서 그... 내가 학기 초에 푸우 쨩한테 키타카미 씨를 부탁한다고 한거 때문에 그런게 아닌가 해서 말야."
"...요컨데, 상태 확인?"
"아니 뭐, 그렇게 삭막한 발상은 아니야."
...꽤나 퉁명스럽게 대답한거 같은데, 가시돋힌 말에도 별로 아랑곳하지 않고 저렇게 사근사근하게 말하는 걸 보면 저 녀석이 얼마나 성실한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미안해."
"...? 뭐가?"
"거의 억지에 가까운 부탁을 해버렸잖아. 그래서 그 바니걸부터-"
"...그 얘기는 하지 마라 제발..."
"...아, 미안."
...사과하는 척 하면서 누구 멘탈을 또 흔들어 놓을 셈이냐.
...물론, 이 녀석에게 그런 악의가 있을거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어딘가의 단장님과는 달리 다른 사람을 휘두르거나 하는 걸 즐기거나 하진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있으니까.
>>+3까지 다이스.
1 ~ 50 : 저녁시간이 다 되어서 타나카가 이만 집에 돌아가겠다고 일어납니다.
51 ~ 100 : 어머니가 거실로 들어오시면서 타나카에게 저녁을 먹고가라고 권합니다.
추가로, 앵커의 컴마로 다음을 판정합니다.
1 ~ 50 : 푸우 쨩이 바로 욕실로 씻으러 갑니다.
51 ~ 99 & 00 : "...딱히 사과할 일은 아니니 신경쓰지 마라."
각각 2표씩 모이는 쪽으로 진행합니다.
@...좋지 않네요.
"...그래서 용건은 그게 다냐...?"
내가 뭔가 이 녀석한테 따로 더 할말이 없기도 하고. 이 녀석이 나한테 볼일이 있어서 온거면 뭔가 더 얘기하겠지, 싶어서 그렇게 물어봤는데.
"응, 뭐. 그렇지. 얼굴보고 푸우 쨩 상태 확인했으니까 됐달까."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저렇게 정리하니까 조금은 양심의 가책이 느껴진다. 아니, 그러니까 진짜로 그게 다야...?
"슬슬 저녁시간도 다 되었고, 너무 오래 있으면 폐가 되니까 이젠 돌아가볼게."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타나카...?
"어이, 타나카. 기왕 온 김에-"
"으응. 아니야. 볼 일은 다 봤고. 푸우 쨩도 빨리 씻어야 하잖아?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김에 살짝 들린거였으니까 신경쓰지 않아도 돼."
내가 뭐라도 말을 하려고 하는 걸 딱딱 칼같이 잘라버려서 어떻게 더 뭘 권할수 없었고...
...결국 그렇게 거실에서 나가서 현관으로 가는 타나카를 그냥 따라가서 배웅하는 수 밖에 없었다. 부엌을 오가면서 돌아다니던 미라이도 그 모습을 보고 졸졸 따라와서 같이 배웅한다고 그래서 혹시나 이 녀석이 어떻게 마음을 돌려줄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이 녀석, 간다는 소리 듣고도 '에~ 그러지말고~' 같은 소리 단 하나도 꺼내질 않는군...
"갑자기 와서 미안했어. 저녁 맛있게 먹고, 어머니께는 감사하고 죄송했다고 전해줘."
"...뭐, 잘 들어가라."
"바이바이~!"
...이럴 때는 치하도 함락시켰던 미라이의 천진난만함이 좀 도움이 될까 싶었는데, 타나카 쪽이 더 철벽같다는 걸 새삼스레 느낄 수 있었다. 뭐, 저녀석 말대로 씻어야 저녁을 먹을테고... 어쩔 수 없나. 그렇게 현관문이 닫히자, 에헴, 하고 거드름을 피우는 동생 녀석.
"...자, 푸우 쨩은 이제 밥 먹고 싶으면 빨랑 씻고-아파팟-!!"
...보답으로 말랑말랑한 두 뺨을 마구 잡아당겨주었다.
"...손님이 오면 좀 알려라, 이 녀석아...!!"
...놀랬잖냐!! 내 손님인데 왜 안 알리고 서프라이즈로 만드냐고?! 장난을 쳐도 정도가 있지!!
"아야야야!! 엄마-! 푸우 쨩이 괴롭혀!!"
...이크.
주방에서 불호령이 떨어지기 전에 빨리 샤워실로 도망가야겠군. 뭐, 수습은 씻고 나와서 생각하자.
그렇게 씻고, 저녁을 먹고, 지쳐서 일찍 잠드는 걸로... 심신이 시달렸던 토요일은 끝이 났다.
>>+3까지 다이스 체크.
마찬가지로 80입니다.
통과하면 일요일 이벤트가 발생, 못하면 월요일로 넘어갑니다.
월요일. 일어날 때부터 푹푹 찌는 찜통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 예감이 영 좋지 않았는데...아니나 다를까, 우리 학교의 명물인 언덕길이 시작될 때부터 때마침 점점 내리쬐기 시작하는 햇살이 열심히 협업을 시작하질 않나...
아니, '곧 있으면 장마에요~' 같잖은 홍보 따위 집어치우고 그냥 바로바로 퍼부었으면 좋을 것을... 당연하게도 갈아입을 옷같은 게 있을리도 만무한데 교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땀투성이가 되어버려서 당연히 기분은 나락. 아니, 하다못해 이 정신나간 언덕길에 에스컬레이터나 무빙워크를 설치하려는 공약 같은거 누가 걸 생각 없어? 나중에 선거권을 얻게되면 그 녀석한테 투표해줄 수도 있다고.
"...그 때에는 이미 졸업해서 상관없지 않을까?"
"...좋은 지적이야, 치하."
...자연스럽게 내 푸념에 대답해주는 치하는 정말 좋은 녀석이겠지. 되도 않는 소리라는 건 나도 알지만 짜증나서 그냥 뱉어본거라고.
"...하긴, 너도 좀 땀이 날 정도면 지금 이 날씨가 얼마나 정신 나간 건지는 알 거 같다."
저 녀석이랑 알고 지낸지도 3년이 넘는데, 방학 전에 치하가 더워하거나 땀이 나거나 한 걸 거의 본적이 없었으니까. 방학 중간에 만나면 그 때의 무더위엔 아무리 더위 저항 같은게 달린 키사라기 치하야였어도 땀범벅이 될 수 밖에 없었지만, 학교에서는 땀을 흘리거나 한걸 진짜 본적이 없다고 자신한다.
"...으으... 안되겠다..."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차갑게 식혀져있던 책상에 얼굴을 찰싹 붙혀서 열을 좀 식혀보려 했는데, 그거보다 책상이 내 열로 미지근하게 덥혀지는게 훨씬 더 빨랐다. 귀찮게 부채질 하기 싫어서 그랬지만... 별 수 없이 가방에서 책받침을 꺼내들었다. 늘상 그렇듯 시간이 남으니 치하도 적당히 내 옆에서 시간을 때우려 잠깐 온 거지.
"아, 키사라기 양."
"...타나카 씨?"
그렇게 부채질을 시작하니 타나카 코토하가 바로 교실로 들어오면서 치하를 찾...는데?
"바바 선생님이 찾으셔."
"...아. 알았어. 갈게. 잠깐 갔다올게."
...바바 선생이 치하를 찾아...?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바로 대답하는 걸 보면 치하도 알고 있던 것 같고. 그렇게 다시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보니, 치하는 이미 타나카의 뒤를 따라 교실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타나카 녀석. 토요일에 정말 단순히 그 얘기만 하고 가려고 온거였나...? 아니 그게 그렇게나 중요한 이야기였냐. ...가뜩이나 안돌아가는 머리가 더위로 맛이 간건가. 기말고사도 곧 올텐데, 수업 제대로 들으려면 좀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이렇게 적당히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하며 부채질만 반복하고 있다보니 교실 안으로 키타카미 레이카가 들어오는 걸 보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시간이 꽤 지나긴 했네. 곧 시작종 울릴 시간인거 같은데... 저 녀석, 원래 저렇게 늦게 다니지 않았던거 같다만. 아무튼 내 뒷자리에 털썩 가방을 던지고선,
"나도 부쳐줘!"
"직접 해라..."
"에~"
...입 삐죽거리지 마라. 그런다고 해줄 생각 없어. 주말에 그렇게 사람 괴롭혀 먹었으면 좀 자중해도 되지 않겠냐. 좀 적당히 만족할 줄도 알아야지.
...그렇지.
"키타카미. 너 '파랑새'라는 이야기 아냐?"
"응? 그건 왜?"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시시하긴..."
...키타카미의 시선이 슬슬 날카로워지는 것 같아서 앞으로 몸을 돌렸고, 다행히도 바로 바바 선생이 들어와 조회가 시작되었다.
...아침에 그렇게 시작해서 그랬던 건지 몰라도, 불만이 가득하다는 걸 적극적으로 어필하는 키타카미의 그 기운? 같은 것에 통 압박을 받아서... 수업이 끝나는 게 이렇게나 기다렸던 적이 없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종례가 끝나자마자 바로 잽싸게 짐을 챙긴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예부실로 피난을 가버렸다.
>>+3까지 다이스.
지금 문예부실에 이미 와있는 사람은?
1 ~ 50 : 치즈 언니
51 ~ 100 : 바카네
2표 먼저 모인 쪽으로 갑니다
+)미즈는 기본 옵션입니다(...)
문예부실에서 미즈가 언제나처럼 독서를 하고 있는 모습은 뭔가... 이 방에 포함된 기본 옵션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 모습이 있어야 이 방 같은 느낌? 이라고 표현해야할까. 나도 상당히 빨리 온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미즈 녀석은 당연히 여기에 있을거란 생각이 기본적으로 머리 한구석에 박혀있었다는 이야기다.
...자, 그럼 그렇지 않은 쪽에게 말을 걸어볼까.
"넌 또 왜 오늘따라 이렇게 일찍 와있는거냐, 바카네."
"야호~ 푸우 쨩~ 일찍왔네~"
...이 녀석, 뭔가 반응이...
>>+3까지 다이스.
1 ~ 50 : ...국어책 읽기에 가까운, 뭔가 피곤한 반응.
51 ~ 100 : ...주말에 잘 쉰건가, 묘하게 텐션이 더 높아보이는구만.
...저 바보 녀석의 텐션이 묘하게도 높은 걸 보니, 주말에 아주 잘 쉰 모양이다. 저 머리색처럼 마치 농구공마냥 통통 튀는 텐션에 두드려 맞는 기분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월요일 방과후 정도 밖에 안되었는데 그렇게 축 처지는 상태라니, 그럼 앞으로 남은 4일은 어쩌려는거냐구!"
"...네 덕분에 더 암담해졌다."
"정말?"
굳이 또 1주일이 막 시작된 참이라는 걸 일깨워주다니, 거참 고맙기도 하지.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 녀석, 내가 물어본건 대답도 안하네. 지난주에는 항상 키타카미가 들어오고 난 다음에야 오던 녀석이, 오늘은 나보다도 빨리 오고.
"...그나저나, 넌 왜 일찍 와있냐고."
"종례가 일찍 끝나서? 그러는 푸우 쨩은?"
재차 캐물어보니 별 거 아닌 이유를 별 거 아니라는 듯 대답하고는 바로 리시브를 돌려준다. 나도 뭐...
"나라고 다르겠냐. 일찍 끝났으니 일찍 온거지."
미즈도 이미 와있는걸 보면... 그냥 전체적으로 1학년들만 일찍 끝난건가? 물론 미즈가 없는 이 방의 풍경 같은건 상상도 안갈 수준이라고 아까 이미 말하긴 했지만.
한편 내 대답을 들은 바카네는 눈을 굴리면서 입을 삐죽이더니-
"푸우 쨩. 그럼 말이지-"
>>+3까지 다이스.
2표 먼저 모인 쪽으로!
1 ~ 80 : "-1학년이랑 달리 2학년은 오래 걸리는 거려나?"
81 ~ 100 : "-근데 레이카 쨩은?"
"-레이카 쨩은?"
"...하?"
갑자기 그 녀석은 왜 찾냐?
"아니, 푸우 쨩이랑 같은 반이잖아. 같이 끝났을텐데, 같이 안 온 거양?"
...물끄러미 날 들여다보며 물어보는 바카네 녀석. 아니, 그렇게 물어봐도 말이지.
조금 부담스러워서 녀석의 시선을 피하면서 적당히 대꾸했다.
"...글쎄다. 난 수업 끝나자마자 곧장 뒤도 안돌아보고 여기로 왔다만. 뭐 좀 있으면 오겠지."
내가 애초에 그 녀석이랑 그렇게까지 친한 것도 아니라서 별로 알 바도 아니라고.
"흐음."
"...왜 그러냐."
"푸우 쨩, 잠깐 이야기 좀 할까낭?"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서 문예부실에서 나가는 바카네 녀석...의 뒤를 순순히 따라갈 수 밖에 없었다.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아까까지랑 똑같이 밝았지만, 저 녀석... 순간적으로 움츠러들 정도로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푸우 쨩은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전에 그 저녁 때, 학교에 와서 음료수 하나씩 뽑아서 이야기를 나누던 그 벤치. 낮에도 인적이 드문 이 곳까지 다시 와서 빙글 돌면서 노노하라 아카네가 꺼낸 이야기는 심드렁했지만, 가느다랗게 된 눈에서 쏘아지는 눈빛은... 마치 다른사람이라도 된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아카네 쨩이 늘어놓는 이야기가 얼마나 허풍스러운지, 아카네 쨩도 잘 알지만 말이지. 그래도 푸우 쨩은 바로 겪어봤잖아?"
아카네 쨩이 하는 일에 대해서 알고 있잖아.
가볍게 덧붙인 이야기는, 말하는 저 태도랑 비교하면 참으로 무겁기 그지 없었다.
...뭐, 그랬지. 그랬지만, 그 때 넌 이렇게도 말했다.
"...키타카미 레이카는 상식적인 인간이라 별 문제가 없을거라고도 그랬잖아."
"그야 그렇겠지?"
"그럼-"
"-그럼?"
내 말을 그대로 되물어보면서 압박하는 바카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위축되거나 할 이유 같은건 어디에도 없다. 이런다고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거였으면, 이 녀석이랑 그 저녁 때 여기 나왔을 때 진즉 무슨 일이 일어나고도 남았을거다. 또, 내 추측이 맞다면... 이 녀석이 말한 대로 뒤에 조직이 움직이고 있다면, 내가 뭐 어떻게 노노하라 아카네에게 태도를 취하느냐가 내 처우에 크게 좌우되지도 않을거고.
그래서 그냥 생각난 대로 이야기해줬다.
"그럼 별로 친하지도 않은 녀석이랑 데면데면한게 크게 문제되는 행위냐?"
"뭐, 인간 관계 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지."
"...인간 관계 상으로?"
...굳이 저렇게 강조하는 이유가 뭐냐.
"말했잖아? 그 때 푸우쨩이랑 같이 간 곳은 레이카 쨩의 '여드름'같은 거라고."
"...어이."
...설마...
내 표정을 본 바카네가 피식 웃으면서 표정을 조금 풀곤 다시 평소의 경망스러운 어조로 돌아오며 말했다.
"자, 어차피 아카네 쨩은 또 일하러 가봐야해서, 이야기를 길게 하진 못한다구. 그래서 빠르게 얼굴만 비추고 가려고 일찍 온 거였어. 그럼 아카네 쨩이 지금 굳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
저 녀석이 말하는 '일'이 뭔지... 이 시점에서도 모른다고 하면 진짜 눈치가 동생 녀석 만도 못하게 없는 셈이겠지.
성큼성큼 다가와서 조용히 귓가에 속삭이는 바카네... 아니, 노노하라 아카네는.
"...레이카 쨩을 좀 소중히 대해주라구."
'신님' 일지도 모르니까~
"자, 그럼 아카네 쨩은 일이 있어서 먼저 갔다고 대충 둘러대줘~ 부탁할게! 푸우 쨩!!"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그 분위기 그대로, 총총걸음으로 멀어져갔다.
...소중히 대해주라고 해도 대체, 내가 뭘 어쩌라는거냐. 뭐 어떻게 둥가둥가 하라는 거냐고.
치즈 언니도, 미즈도, 바카네 녀석도 죄다 키타카미 녀석이 뭔가 특별하네 어쩌네 하고 있고...
...아니 물론 바카네... 노노하라 아카네가 보여준 그 광경이 무슨 속임수거나 사기거나 할 가능성이 없다는 건 이미 겪어본 나 자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잘 알고 있는데...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겠거니 받아들이긴 해야겠다...고 생각은 해봤다만.
그게 적당히 머리로 '어쩔 수 없으니 그런걸로 치고 넘어가자'인 것과, 정말 완벽히 받아들여진 것과는 천지차이인 거다.
그나마 바카네는 나한테 이렇게 보여준게 있으니 내가 도저히 저 녀석 말을 부정하고 무시할 수가 없지만... 저 녀석만 저런 식의 주장을 하고 있는게 아니다보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지만.
...아니 저 아무 생각 없어보이는 민폐녀가 대체 뭐 대단하다고 그렇게 떠받들어줘야 하냔 말이다...
그리고 그게 왜 하필 나한테 온거냐고. 왜.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프다. 그냥 적당히, '키타카미의 심기를 좀 덜 건드리도록 노력하자' 정도로 정리하도록 하자. 그거면 충분하겠지. 왜 적당히 조용히 다니려던 고교 생활이 어째서 이렇게 입시 말고도 신경쓰고 거슬리는게 넘쳐나야 하는거냐.
그렇게 한껏 투덜거리며 계단을 걸어올라가던 중...
>>+3까지 다이스. 2표 먼저 모인 쪽으로.
1 ~ 70 : "푸우 쨩...?" "...치즈 언니? 지금 끝났나..."
71 ~ 100 : "푸우 쨩?" "...타나카?"
"푸우 쨩...?"
"치즈 언니?"
...생각해보면 같은 반인 키타카미나, 꽤 활발하게 돌아다녀서 종종 마주치는 바카네 녀석과는 달리 치즈 언니는 학년마저 달라서인지 복도에서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지금 끝난건가요?"
"네에. 선생님께서 물어보실 게 있다고 하셔서 조금 늦어졌사와요. 푸우 쨩은...?"
...새삼스럽지만 이 사람, 세레브였지. 주변에서 누가 괴롭히지 않으면 이렇게 기품있게, 차분하게 말 잘하는데...
그런데 그 누군가를 보러 가는 길이지 지금.
...아무튼 뭐, 지금 물어본 질문에 딱히 숨기거나 할 필요는 없으니까.
"바카네랑 잠깐 이야기 좀 하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 녀석, 오늘 아르바이트 일이 있다고 먼저 간다네요."
...그 일이라는 게 도저히 그 누구라도 상상할 수 없는 기상천외한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런 사실을 빼놓고 생각하면 거짓말은 하나도 하지 않은 순수한 진실이다.
아무튼 별 다르게 특별한 말을 하진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노노하라 씨가요...?"
"...? 네."
"그런가요..."
...뭔가...치즈언니가 바카네를 신경쓰는 듯한 느낌이...?
"...뭔가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어요?"
"...네?"
바로 냉큼 물어보니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되물어보는...건 뭐, 평범한 반응이긴 한데.
"아니, 뭔가... 바카네 녀석한테 그렇게 신경써주거나 하는 건 지금 처음 보는 거 같아서요."
잘 생각해보면, 미즈든, 바카네든... 치즈 언니가 신경써주고 나처럼 친하게 다가가는 걸 본 적은 없다. 키타카미 녀석이야 매번 휘두르니 어쩔 수 없을거고.
이런 분위기, 전에도 느꼈던거 같아서 한번 물어봤지만 그 때도 적당히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얼버무렸지. 그야 저 두 녀석의 정체? 를 생각한다면야 껄끄럽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은 들지만.
내가 아까 물어본 거에 딱히 대답은 하지 않는 치즈 언니. 전에 말한 그 '금지사항'에 걸리는 걸 수도 있고, 말하기도 껄끄러운 걸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토요일날 했던 이야기 말이죠."
"네? 네."
"한 가지, 물어봐도 되나요."
"...그, 아시겠지만..."
"알아요. 꼭 대답을 들으려고 하는 건 아니니까."
...이런 상황-키타카미에게 붙들려오는 상황-이 될 걸 알았나, 같은 건 바보같은 질문일거다. 보나마나 금지사항 같은 비슷한 걸로 암시를 걸 때, 기억을 못하게 되는 식으로 키타카미와 직접 대면하게 되는 사실 자체를 모르게 해놨을 거란 추측까진 가능하다.
그래도 하나, 궁금한건.
"...RED단이란 이 단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
"지극히 개인적으로요. 치즈 언니의 생각은 어떤가 해서."
>>+3까지 다이스.
1 ~ 80 : "금지사항입니다."
81 ~ 100 : "...금지사항, 이어요."
@아 너무 늦어졌다...
"금지사항입니다."
"...그렇겠죠..."
물론 기대는 안했는데. 그래도 저 대답은 참 칼같이 나오는구만.
"그, 미안해요."
"아뇨, 예상은 했으니까요."
철저히 일적인 관계...인가. 그럴거라 생각은 했지만... 막상 그렇다 느껴지니 조금 씁쓸하긴 하다.
"저... 그럼 갈까요?"
"아. 그러죠."
계속 서있을 수도 없으니. 치즈 언니의 권유에 따라 같이 문예부실 쪽으로 걸어갔다. 그냥 그거 말고는 오늘 무슨 일이 있으셨나를 가볍게 물어봤고, 학년이 올라가니 수업이 좀 어렵다...정도의 가벼운 일상 대화를 나누면서 문예부실에 다시 돌아왔는데.
"자, 그럼..."
"...엥?"
가방을 내려놓고 바로 하나 둘 옷을 벗기 시작하는 치즈 언니...?
"잠시만요, 갑자기 옷은 왜 벗으시는 거에요?!"
"어, 키타카미 씨가 부실에서는 메이드 복을 입고 있으라고 하셔서...?"
"그걸 곧이곧대로 따르냐고요?!"
"그래도..."
"아니 됐으니까요! 다시 옷 입어요!"
...아니, 이런건 왜 굳이 고지식하게 또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까... 설마 저게 마음에 들었다던가 그런건 아닐...텐데...
...사실 상상 이상으로 잘 어울리긴 했어서 혼자 독백하는 것도 조금 머뭇거려지긴 했다. 그래. 사실 메이드든 웨이트리스든 뭐든, 저렇게 키든 몸매든 괜찮으면 입히지 않는게 잘못이라는 식의 논리를 펼쳤던 키타카미를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것만 같은 느낌이라서.
...하지만 이딴 소리, 절대 입밖에 내진 않겠다. 난 키타카미와 달라.
그렇게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단장석에 앉아 책상 위에 어느덧 문예부실 비품처럼 거치되어있는 내 노트북을 켰다. 사이트를 뭔가 더 만들어보라고 키타카미 녀석이 지시는 하긴 했으니 HTML 에디터를 켜보기라도 하려는 생각이지. 하지만 이런 허접한 사이트에, 뭘 하려는지도 잘 모르겠는 목적을 위해 뭘 어떻게 발전시켜야하는 지는 도저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에디터를 키고 나면 항상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하다가 탄식 끝에 파일을 닫기만 하는 패턴의 반복이 이어질 뿐이었다. 매번 이럴거면 차라리 신경 쓰지 않으면 편하지 않을까 생각도 들지만, 어차피 한가하니까 말이지.
"으으..."
그렇게 팔짱을 끼고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며 신음하던 내 앞에 찻잔이 놓였다.
"차 좀 드시고 하셔요."
"아, 감사합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다소곳히 쟁반을 들고 방긋 웃고 있는 치즈 언니가 눈에 들어왔다. 저 기품있는 미소와 다소곳한 행동에서...
...아까 철회시키지 말고 그냥 메이드 복을 입게 내버려 뒀으면 참 좋았겠다는 글러먹은 생각이 들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키타카미 녀석... 패션 센스는 꽤 뛰어나니까 말이지.
"감사합니다."
치즈 언니는 미즈한테도 차를 주었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대답하는 미즈였지만 치즈 언니는... 아까 나와는 달리 미소가 조금 불안? 해보인달까.
뭐...아무려면 어떠랴.
그런 생각과 함께 미즈의 옆에 앉아서 후후 불어가며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결국 이 날, 키타카미는 동아리 방에 나타나지 않았다.
오늘은 또 빨리왔구만. 조회 전에 뒷자리에 말을 거니, 입을 삐죽이 내밀고 있던 키타카미는 콧방귀를 뀌면서 대꾸했다.
"흥-이다. 그거, 혼자서 했다구."
"혼자서 뭘...?"
"주말에 갔던 코스, 싹 다 돌아봤으니까!"
"...아, 그런거였나."
"괜히 여러명이서 가면 집중력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까 그냥 혼자 갔어!"
...거참 기특한 생각이긴 한데, 그런건 좀 알려주고 하지 그러냐. 네가 늦게라도 와서 왜 없냐 어쩌냐 할까봐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좀 생각해주면 안되겠냐.
"빠뜨린게 있을까 싶었는데 말이지...으음..."
"...무슨 범행현장이냐고."
형사도 범인도 아니면서 굳이 다시 찾아가는 건 뭐라고 해야할 지 모르겠다. 뭐, 신기한거 찾는다는 입장을 잘 생각하면 형사 비슷한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으으...더워... 하복, 그냥 먼저 입으면 안되는걸까나~"
"...기간이 정해져있으니 별수 있냐."
"그치만 더운데~!"
그 텐션을 조금이라도 어찌하면 좀 열이 덜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확실히 이 녀석 근처에 있으면 나까지 괜히 더워지는 느낌도 들고.
...그래서.
"키타카미."
"응? 왜?"
"전에도 말했던 것 같지만, 찾아낼 수도 없는 수수께기 같은건 포기하고, 평범한 고등학생다운 놀이를 개척해보는 건 어떠냐...?"
...솔직히 이런 말 꺼내는게 좋은 건지 잘 생각은 안가는데, 그래도 누군가는 해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충동적으로 꺼낸 말인데...
의외로 키타카미는 얌전히 책상에 엎드려있는 그대로 축 늘어진 텐션으로 대답해서, 조금 놀라고 말았다.
"고등학생다운 놀이는 뭔데...?"
...더워서 그런지 힘이 빠진 느낌이구만.
"뭐... 넌 이쁘게 생겼으니까, 멋진 남자라도 찾아서 시내 산책같은거 같이하던가. 데이트도 되고 일석이조잖아?"
"시내 산책보단 등산이 좋은데..."
"등산이든 산책이든 걔랑 가라고. 네 그 이상한 성격 좀만 숨기면, 남자 구하는 정도야 쉬울거 아냐."
...그러자 콧방귀를 뀌며 차갑게 대답하는 키타카미.
"흥. 연애같은건 아무래도 상관 없어. 연애 감정 같은거, 일시적인 변덕일 뿐인걸. 정신병이랑 다를거 없어."
아니, 내가 보기엔 네 쪽이 더 정신...
...생각해보니, 이녀석이 텐션이 좋든 어쨌든 저렇게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건 이게 처음인거 같다.
대답을 않고 있으니 창밖으로 멍하니 시선을 던지고 있던 키타카미가 다시 무기력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있지, 나도 가끔은 그렇게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런 순간적인 변덕으로 귀찮은 짐을 짊어질 정도로 바보는 아닌걸."
...아니었냐, 같은 말도 하지 말자.
"그리고 단장인 내가 남자 사냥 같은거나 하고 있으면, RED단은? 만든지도 얼마 안됐는데?"
"뭐... 적당한 놀이 동아리로 바꾸면 되지 않을까. 그러면 사람들도 모일거야."
"그건 싫어."
단칼에 거절당했다.
"그런게 재미 없으니까 RED단을 만든건데, 수수께끼의 전학생 같은 거랑 간판 아가씨도 모아놨는데.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야? 으으... 화끈한 사건 하나쯤 일어나지 않으려나..."
책상 위에 뒹굴뒹굴하면서 저렇게 푸념하는 키타카미는... 꽤 신선했다. 평소같이 앞뒤 안가리고 급발진해서 민폐를 끼쳐대는 것보다는 훨씬 귀엽고 말이지. 하는 족족 기행이니까 남자들이 죄다 피한다지만, 얼굴은 미인이고. 진짜 얼굴 값 못하는 녀석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조회시간부터 그렇게 책상에서 고개를 뗄 생각이 없어보이던 키타카미는 그렇게 오전 수업시간 대부분을 누워서 잠에 빠져서 보내버렸다. 정말 웃기게도, 앞에선 수업 들어오는 교사들 눈치를 봐서 뭐하다 싶으면 깨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단 한번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
...우연이겠지, 이거? 바카네 녀석이 했던 말 때문에 이런 사소한 것도 괜히 신경쓰이게 된단 말야...
사실 신경이 곤두섰던건, 열심히 졸던 키타카미 때문 만은 아니었다.
키타카미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던 이유도 그 신경이 곤두선 이유에서 연결이 되긴 한다. 아침에 등교하면서, 내 신발장에서 발견된 쪽지 하나.
'방과 후 사람들이 나가고 나면, 1학년 5반 교실로 와.'
...라는 내용의 쪽지가, 아무리 봐도 여자애의 글씨로 적혀있었다.
...이건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거지?
일단,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 때 책갈피에 적혀있던 미즈의 글씨와는 확연하게 다른 걸 나라도 알 수 있는 정도였으니까. 미즈의 글씨는 뭔가 꼭 활자를 찍어내는 듯 기계처럼 깔끔한 느낌이었지만, 지금 이 쪽지에 적힌 글씨는 딱 보기에도 여고생이 썼을법한 동글동글한 느낌. 그리고 미즈가 굳이 신발장에 메시지를 넣는 방법 같은걸 쓸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럼 바카네 일까? 아니,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일축할 수 있다. 바카네라면 키타카미처럼 과감하게 행동할테지. 대놓고 찾아와서 끌고가던, 약속을 잡던 하면 했겠지, 이렇게 대충 찢어놓은 노트 조각에 시간도 정확히 안 잡힌 약속 같은 건 할 이유가 없다. 같은 이유로 치즈 언니도 각하. 치즈 언니라면 오히려 정중히 편지지와 봉투를 준비했을거란 느낌.
...다음은, 아리와 치하...일 가능성인데.
...내가 이 둘 글씨를 못알아 볼리는 없다. 더군다나 아리 녀석이 바꿔 쓰려고 하는 글씨도 몇 번을 봤었기에 아리 녀석이 치하를 어떻게 포섭해서 치하에게 대신 필체를 바꿔가며 쓰게 했다던가? 하면 가능성이 좀 있을지도 모르겠다.
"...퍽이나."
...치하가 아리 녀석한테, 뭐하러 그런 부탁을 고분고분히 들어주겠는가. 그럴 가능성이 전무하다. 그래도 그나마, 뭔가 혹하는 조건을 걸었다면야 가능성이 있기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키타카미 일까, 같은건... 아닐거다.
아침에 물어본건 다 저 녀석을 떠보기 위함도 있었는데, 뭔가 장난을 치려해서 다 계획을 짜놨는데 저렇게까지 축 처져서 내리 잠이나 자고 있을 녀석이 아니다. 저게 다 연기? 그럴 리가.
그 외에 뭔가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으면 강제로 끌고 나가면 나갔겠지.
그런고로... 남은건-
"제 3의 인물...인가."
...근데 이것도 좀 웃기는게. 대체 나한테 뭐가 있다고 이렇게 몰래 불러내려는 건가. 내가 남자라면 러브레터라도 가능성이 있었을거라 생각하는데 말야... 상대가 여자일거라 생각은 들지만, 혹시나 여자가 아니라면, 적어도 남자라면 굳이 글씨를 여자처럼 바꿔가며 쓸 이유가 없고...
...모르겠다.
그렇게 종례까지 끝나고, 나는 학교 안을 쭉 돌아다녔다. 키타카미는 몸이 안좋다는 소리를 하고 일찍 귀가했고... 여기에서 용의 선상에서는 자연히 빠지게 되었다.
아무튼 이렇게 말은 했으니 문예부실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일찍 돌아가도 된다고 안내는 가능하겠구만. 이건 기특하게 생각해주자.
그런 고로, 저 방과후 약속에 가기 전에 일단 문예부실부터 가서 안내부터 해둘까. 괜히 먼저 교실에 돌아가서 아무도 없는 와중에 혼자 기다리고 있는 건 좀 화나는 일이니까 말이지. 적당히 문예부실에서 시간을 때우고 가서 교실을 살펴본 뒤,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집에 가면 그만이다.
그렇게 행동지침을 정하고 문예부실에 도착했고...
>>+3까지 다이스.
+1은 미즈, +2는 치즈 언니, +3은 바카네의 유무입니다. 체크 값을 통과하면 이미 문예부실에 와있고, 못하면 뭐...
각각 체크 값은 50, 60, 70입니다!
"...응?"
정말 놀랍게도, 문예부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야, 왜 아무도 없어."
뭔가, 여기에 항상 사람이 있던 풍경만 생각해서 그런가. 이렇게 텅 비어있는 건 단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바카네든 키타카미든 누구 하나 시끄럽게 굴고 있거나, 키타카미가 치즈 언니를 괴롭...아니, 이건 됐고.
하다못해 다 없더라도... 미즈는 늘 그랬듯 앉아서 책을 읽고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항상 머리 한구석엔 있던거 같다. 그런 기대가 충족되지 않아서인가, 굉장히 공허하게 느껴졌다. 각자 이것저것 자기 짐꾸러미를 갖다놓은 게 있었지만, 그건 결국 그 주인이 있어야 의미가 있다는 걸까.
...뭔 또 감상적인 소리냐. 아직 중2병이냐고.
스스로 생각해봐도 어이가 없어지는 사고의 흐름에 피식 웃고는 세차게 고개를 저어버리며 적당히 단장석에 몸을 던졌다. 키타카미가 없을 때, 노트북을 이쪽에 거치해놔서 여기서 사이트 작업을 한답시고 항상 앉긴 했으니까. 핑계삼아 노트북이라도 키고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가 그 쪽지인지 뭔지가 누가 친 장난인지 확인만 하고 집에 돌아가면 그만이다. 하루정도는 다들 어쩌다보니 안 모일수도 있는거고. 이런 흐름이 쭉 이어지면 이런 민폐스러운 모임도 자연히 흐지부지 되어서 끝날수도 있고 말이지.
"...흠..."
턱을 괸채로, HTML 편집기를 열고 스크롤만 올렸다 내렸다 반복. 이 사이트도 적당히 핑계대가며 손 안대다보면 흐지부지하는데에 한몫 하려나? 아니면 난 뭔가 최선을 다했다는 의미로 뭐라도 건드려봐야하나.
별 의미도, 뭔가 시도하지도 않을 고민을 하면서 스크롤만 까딱이기를 수십분.
...역시, 오늘은 아무도 안올 모양이다.
"이럴줄 알았으면 치하랑 아리 녀석하고 같이 일찍 돌아갈걸 그랬나."
어차피 장난일거라 생각하면서 뭘 기대해서 남은건지. 스스로도 잘 이해 안되지만, 어쨌든 남아서 시간 보냈으니 확인은 해야겠지. 그렇게 결정하고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볼일도 없고. 일찍 확인하고 적당히 돌아가자고.
...그런데 생각해보니 항상 내가 먼저 나가서 몰랐는데, 문예부실 문은 잠그고 가야하나? 아니면 걍 냅둬도 되나?
...굉장히 귀찮아서 신경 끄고 냅두자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여기에 있는 가장 값나가는 물건이 내가 가져온 노트북이라서 문 단속은 하고 가야할 것 같다. 열쇠는... 미즈가 가지고 있나? 그런데 미즈가 지금 없으니...
...열쇠는 교무실에 물어봐야겠군.
교무실은 1학년 5반 교실을 지나가면 있으니까. 그래, 교실 확인만 먼저 하고 난 다음 열쇠를 받아서 다시 돌아와 문을 잠그고 열쇠를 반납하고 집에 돌아가면 되겠구만.
"...거, 더럽게 번거롭네."
마음같아서는 신경 끄고 싶은데 말야. 그냥 돌아가기는 역시 찜찜하잖아, 젠장.
...까먹지말고, 내일이라도 미즈한테 물어봐서 열쇠가 있으면 스페어키를 좀 받아두도록 하자.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결정을 내린 나는, 문예부실 문을 닫고 다시 교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렇게 다시 돌아간 교실에는...
>>+3까지 다이스.
1 ~ 80 : "...타나카?"
81 ~ 100 : "...미즈? 네가 왜 여깄어?"
2표 먼저 나온 쪽! 입니다!!
"...타나카?"
누가 거기에 있다 해도 딱히 놀랄 건 없었지만... 타나카 코토하가 있으리라고는 상상치 못했다.
"늦었네, 푸우 쨩."
생긋 웃으면서 말하는 그 모습은 아침에 반에서 마주쳐서 인사를 건내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다만 위화감이 느껴지는 건... 저 녀석이 굳이 나한테 신발장에 편지를 남겨 방과후에 남게 해서 만나는 등의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할 정도로 생경한 사이가 아니란 말이지.
평소와 같이 단정히 정리된 생머리를 흔들어 다시 정리하면서, 타나카 코토하는 평소같지 않게 교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다소곳하게 행동하던 녀석답지 않은 행동이 괜히 거슬린다.
"뭐하고 있어? 안 들어오고."
...교실 한가운데로 걸어가면서 그렇게 말하는 타나카에게 이끌리기라도 한듯, 나는 자연스럽게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편지는 네가 보낸거냐?"
"응. 뜻밖이었어?"
...그걸 몰라서 묻냐? 할말이 있으면 여느때처럼 적당히 불러내서 말하든, 아니면 적당히 메일을 보내면 될걸 갖다가 대체 뭐길래 편지 같은걸 은밀하게 주고 그러는 거냐.
"무슨 일이냐, 라는 거 얼굴에 다 보이네? 푸우 쨩."
키득거리면서 말하는 타나카 코토하는 아까 종례 때까지의 그 모습과 전혀 다를게 없어 보이는데...
무언가가 다르다는 위화감이 느껴진다.
"응, 뭐... 볼일이 있어서, 겠지? 조금 묻고 싶은게 생겨서 말야."
그렇게 말하고는, 타나카는 발걸음을 떼서 얼굴을 내 얼굴 바로 앞으로 가져왔다.
"푸우 쨩은 혹시, '하지 않고 후회하기보다는 하고선 후회하는 게 낫다'는 말. 어떻게 생각해?"
"...갑자기 그런건 왜 물어보고 있냐."
"글쎄? 궁금해서 그렇지 않을까? 아무튼, 푸우 쨩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 궁금해."
...무슨 진로 고민 같은 거라도 있는 건가?
"...잘은 모르겠다만... 말 그대로의 의미이지 않겠냐."
"그럼 말야, 만약에 말인데... 현 상태를 유지한다면 더욱 악화될 뿐이란 걸 알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좋은 방향으로 돌릴 수 있을지 알 수 없을 때. 푸우 쨩이라면 어떻게 할 거야?"
"뭐야, 그게?"
...뭔가 진로상담 같은 게 맞을 거란 느낌이 슬슬 들고 있다. 아니, 잘 생각해보면 저 타나카가 굳이 남몰래 불러내는 것도 그렇고. 저렇게 굳이 빙빙 돌려서 물어보는 식이라면... 대놓고 진로 상담을 해오면 나한테 폐가 되지 않을까, 부담스럽지 않을까 해서 배려하는 것일 가능성이 있다. 타나카 코토하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고.
...본인이 직접 솔직히 밝히기 전에 내가 먼저 '진로 상담 얘기 아니냐'라고 하는 건, 저 녀석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 될테니... 짐짓 모른척 해줘야겠군.
"...뭐, 일본 경제에 대한 이야기야?"
...되도 않는 소리라는 듯 빙긋 웃으면서 무시하는 타나카. 그래, 흰소리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고...
...아무튼 대답하라는 거냐. 조금 고민해본 끝에 생각을 정리해서 말해보았다.
>>+3까지 다이스.
푸우 쨩의 대답은?
1 ~ 80 : "일단 뭐든 상관 없으니 바꿔보려고 하지 않을까." "...그럴수도 있겠지?"
81 ~ 100 : "어떤게 더 좋은지 모르는 상황이면, 바꾸지 않는 이유가 있지 않겠냐? 악화되기만 해도, 현상태 유지가 가장 그걸 완화시키는 거라서 현상유지를 시키는 걸지도 모르잖냐." "......"
언제나처럼 2표 먼저 나온쪽!
@ 중요한 기점이에요!
...그냥 상식적인 선에서 대답을 하자면...
"일단 뭐든 상관 없으니 바꿔보려고 하지 않을까?"
뒷짐을 지고 서있던 타나카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마주친 시선에서는 저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현재 상태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테니까, 라는 거야?"
"비슷하지."
"...역시 그게 보통의 대답이려나..."
뭔가 방금과는 달리 다른 사람의 대답을 바라는 말이 아니다. 그냥 스스로 정리하려는 혼잣말.
"...그렇지만 윗선에 있는 사람들은 급작스러운 변화 같은 걸 받아들이지 못하는데, 현장은 시시각각 변해가니까 말이지. 윗사람들처럼 태평하게 손놓고 수수방관하고 있으면 점점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갈 것 같은데, 그럼 독단적으로라도 강경한 조치를 취해봐도 좋지 않을까?"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고 있는 타나카는... 일전에 나에게 키타카미의 케어를 맡기던 것처럼, 오늘 점심 메뉴는 그저 그랬다는 식의 뉘앙스로 말하고 있었다. 무슨 소리일지 모를 소리를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타나카에게서 이질감이 느껴진다.
...그렇지. 지금 반 어디에 아리가 숨어서 내 반응 같은걸 몰래 찍고있거나 한건 아닐까. 어디, 청소 용구함이나 교탁 밑... 아리의 몸집이 작은걸 생각하면 어느 쪽이든 가능성이 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관찰 대상에게 나는 이제 질려버렸어. 그러니까..."
무슨 직감같은 거라도 있었을까. 반을 두리번거리다 말고 살짝 뜸을 들이는 타나카가 신경쓰여서 우연찮게 시선을 던지니 내 두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눈을 빛내고 있는 타나카가-
"푸우 쨩을 죽인 뒤에, 키타카미 레이카가 어떻게 나올지를 봐야겠어."
-뒤에 숨기고 있던 오른손을 재빠르게 휘둘렀다.
"...?!"
정말, 거의 무의식 적으로 뒤로 물러서자 방금 전까지 내 목이 있던 공간을 빛이 반사되는 무언가로 타나카가 갈라버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평소와 같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면서 타나카 코토하는 오른손을 가볍게 위아래로 흔들어보였다. 그래, 평소와 같은 미소로. 하지만 그 오른손에 쥐어져있는 물건은... 여고생이 쥐고있기에는 너무나도 무시무시한 군용나이프처럼 보였다. 단순히 모형일거라 일축하기엔 예사롭게 빛나는 금속의 반사광이나, 그걸 흔들고 있는 타나카의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이 절대 마츠다 아리사가 꾸민 몰래카메라 따위가 아닐거란 확신을 실어주고 있었다.
저런걸 어떻게, 저렇게나 가볍게 휘두를 수 있을까. 저런 상대에게서 처음 일격을 피한건 정말 요행에 지나지 않았다. 한발짝 물러섰다고는 하지만, 엉겁결에 몸을 뒤로 뺀것이었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균형을 잃고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상황이었고... 그동안 알고 있던 것과 현재 상황의 미스매칭으로 인해 멍청히 얼어붙은 채로 타나카의 모습을 올려다보고 있었을 뿐. 양 옆에 여느 때처럼 잘 정렬되어있는 책상 덕분에 옆으로 피할 길 따위는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 양 손으로 바닥을 밀며 튀어오르듯 일어나 뒤로 재빠르게 물러났다.
타나카는 그런 나를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을 뿐, 굳이 쫓아오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조금 거리가 멀어지자, 그제서야 현실감이 돌아오며 공포감과 황망함이 뒤섞인채로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대체 뭐야. 왜 이런 상황이 된거냐. 왜 내가 타나카가 휘두르는 나이프의 표적이 되어야 하는 거냐고... 잠깐, 방금 타나카가... 뭐라고 했었지? 날 죽인다고? 왜, 아니 대체 왜?!
"ㄴ, 농담은 그만하라고...!"
...갑작스러운 상황변화와 너무 많은 정보량에 뇌가 맛이 갔는지, 가까스로 나온 말은 고작 이 정도였다. 하지만 무슨 말이라도 해야한다는 생각으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위험하잖아! 그거, 진짜가 아니더라도 겁먹고 다칠 수도 있잖냐! 그러니까 슬슬 그만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이해하고 싶지 않았기에 나온 발악같은 말.
...이게 이해 되는 녀석이 있다면 좀 나와봐. 대타출동을 허락할테니까. 체력 1/4정도는 내준다고 젠장. 기왕이면 설명도 곁들여줬으면 좋겠지만.
"응? 농담인 것 같아?"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술을 삐죽이는 저 모습은 내가 알던 타나카 코토하가 맞는데. 왜 저 녀석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있는 저 오른손에 들린 저 물건은 왜 저렇게나 미스 매치인거냐고. 태연한 저 표정이 더 공포다. 차라리 무언가 감정적으로 폭발하거나, 이런 낌새가 미리 느껴졌던 대상이었다면 차라리 '그럴지도 모른다'하고 이정도로 공포를 느끼진 않았을 지도 모르지. 정말, 15년정도 살아오면서 지금처럼 공포를 느낀 적은 없다.
"흐음... 죽는게 싫은건가? 살해당하고 싶지 않아?"
"...?"
"나는 유기 생명체의 죽음에 대한 개념이 잘 이해가 안 가서."
...저 녀석... 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냐...?
영문 모를 말을 하면서 진심을 담아 칼을 휘둘러 대는 동급생이라니. 그리고 그것도, 나랑 뭔가 감정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진흙탕 개싸움을 해서 앙심을 품은 것도 아니라, 정말 평소 원만하게 지내온 성실한 반장이 내게 칼을 휘둘러대다니...!
야, 다시한번 말한다. 이딴 상황이 진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고 생각 할 수 있는 놈 있으면 나와서 나랑 교체해. 대타출동을 허락한다고!
"...이해도 안 가고, 웃음도 안 나와. 그 위험한 물건은 슬슬 치워둬."
"응, 그건 안될거 같아."
숙제 제출해야하니까 빨리 공책 넘겨줘, 라는 말을 할 때와 똑같은 표정으로 웃어보이면서 타나카는 다시 한 번 말했다.
"나, 정말로 네가 죽길 바라고 있으니까."
칼을 허리춤에 쥐어서 체중을 실은 자세로 달려드는 타나카. 굉장히 잽쌌지만, 이번에는 거리가 있었기에 나한테도 여유가 있었다. 타나카가 땅을 박차기 전에 먼저 튕겨지듯 도망치며 교실에서 빠져나가-려다가 문이 열리지 않아 그대로 부딪히고 말았다.
"어?"
입 밖으로 나온 얼빠진 소리에, 등 뒤에서 타나카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분명 본래라면 문이 있어야할 복도쪽 교실 벽을 망연히 살펴보고 있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시멘트로 잘 발라 덮어놓은 것처럼. 본래 그런 모양이었다는 듯 문은 오간데 없이 사라져 있었다.
"말도 안돼..."
타박, 타박. 작은 발소리와 함께 등 뒤로 다가오는 목소리.
"소용 없는 짓이야. 이 공간은 지금 나의 정보 제어 하에 있으니까. 탈출구는 진즉 봉쇄해뒀어."
정보 제어...?
"아주 간단한 일이야. 이 건조물의 분자 결합 정보를 조금만 조작하면 바로 바꿀 수 있으니까. 지금 이 교실은 밀실이야. 나갈 수도, 들어갈 수도 없어."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느낌과 함께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전까지 교실에 드리우던 저녁 노을도 전부 사라졌고, 운동장 쪽으로 난 창문도 모두 콘크리트 벽으로 바뀌어 있었다. 어느샌가 켜져있던 형광등이 차갑게 늘어선 책상 표면을 비추고 있었다.
"...거짓말...이지...?"
타나카와 벽을 번갈아 바라보는 내 모습에, 타나카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했다.
"...넌 대체 뭐야..."
벽은 벽일 뿐이었다. 내가 어딘가 잘못 되었나 싶어 몇 번을 살펴보았는데도, 내 시야에, 촉감에, 유리창도 문도 원래 없었던 것처럼. 말끔히 사라진 쪽이 현실이니 받아들이라는 듯.
이윽고 천천히 발걸음을 떼기 시작한 타나카가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고, 벽에 문이 없다는 사실을 마침내 인정하기로 한 나는 어떻게든 책상사이로 빠져나가 타나카에게서 조금이라도 멀어지기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타나카는 일직선으로 날 향해 다가오는데 책상들이 저 녀석을 자연스레 배려하듯 그 진로에서 비켜주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내가 물러나는 쪽에는 책상이 무리지으며 지나갈 수 없도록 모여들고 있었다.
이런 불리한 조건에서 이뤄지던 술래잡기는, 교묘히 배치되는 책상들로 인해 내가 교실 구석으로 몰리며 슬슬 끝을 보이기 시작했고...
...나는 옆에 잡히는 의자를 들어 있는 힘껏 타나카에게 내던졌다.
하지만.
"소용 없다고 했잖아."
용케도 잘 던져졌다 싶었던 의자는 타나카의 코 앞에서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옆으로 내팽개쳐졌다.
...뭐냐고 저거. CG야? 무슨 초능력 배틀물이라도 되는거냐?
"지금 이 교실은 모두 내 뜻대로 움직이고 있다니까?"
"잠깐. 잠깐, 잠깐, 스톱! 정지! 타임!!"
되도 않는 말을 해봤지만 타나카는 멈추지 않고 다가오고 있었다.
날 죽이고 키타카미 레이카가 어떻게 나올지를 보겠다니. 대체 키타카미 녀석이 뭐길래. 인기는 참 더럽게도 많네.
"...아, 그렇지. 처음부터 이렇게 할 걸 그랬나봐."
작게 손뼉을 치며 나온 타나카의 말과 함께 나는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ㅇ, 어이! 이런 법이 어딨어! 이건 반칙이야!!"
다리도, 손도, 고개도, 그 어떤 것도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말은 대체 어떻게 나올 수 있었던 걸까. 딱 턱, 그리고 혀만이 멀쩡히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전율했다. 눈도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서 마주 보이는 타나카의 시선은... 한결같이 평온해서.
그 겝에서 느껴지는 공포감에 잡아먹힐것만 같았다.
"푸우 쨩이 죽으면 키타카미 레이카가 어떤 행동이든 보일거고... 아마 커다란 정보 폭발을 관측할 수 있을거야. 다신 없을 기회야."
"난 모르는 일이라고!!"
"그럼, 안녕."
손을 움직여 나이프를 다시 고쳐잡는 타나카. 지금 어디를 노리고 있는 걸까. 목의 경동맥? 심장? 알기라도 하면 조금은 마음의 준비... 같은게 되겠냐! 눈도 마음대로 감을 수 없고! 아니 이런 경우가 어디있냐고 도대체!!!
무정하게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내리쳐지는 나이프. 그리고-
>>+3까지 다이스.
1 ~ 80 : ...미즈...?!
81 ~ 100 : @ㄴㅇㄱ
2표 먼저 나온 쪽으로 갑니다.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굉음. 거대하고 단단한 무언가가 박살나며 쏟아지는 것 같은 소리가.
눈앞에 떨어지는 부스러기, 주먹만한 크기, 내 머리만한 크기의 콘크리트 파편. 그리고 폭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하는 비 같은 느낌의 흰색 가루. 뭔 운동회의 장애물 달리기 사탕 같은 꼴이 되었겠구만.
아마도 나한테 달려들고 있었을 타나카도 분명 똑같이 가루 범벅이 되었겠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아서 확인을...
...어라, 움직이네?
고개를 들어보니, 확인할 수 있었다.
내 목에 닿기 직전이었던 칼끝과, 칼을 쥔채로 그대로 멈춰있는 타나카와, 놀라있는 타나카의 얼굴.
그리고 타나카의 칼끝을 움켜쥐고 있는... 마카베 미즈키의 맨손이.
언제 나타났는지도 모를 미즈...아니, 마카베는, 원래부터 있었던 것마냥 타나카와 내 사이에 서서 나를 등지고 서있었다.
"...하나하나의 프로그램이 약하네요."
참 현실성 없는 상황인데, 마카베의 저 무미건조해보이는 목소리는 내가 늘상 들어 친숙한 일상의 목소리라서 위화감이 느껴진다.
"천장 부분의 공간 폐쇄도, 정보 봉쇄도 너무 물러요. 그래서 저에게 들키고, 침입을 허락한거죠."
"방해할 생각이야?"
놀란 표정은 오간데 없이, '숙제 제출 안할거야?'같은 느낌으로 말하는 타나카는 참으로 태연해보였다.
...사실 지금 이 상황이 전부 꿈이고 현실이 아니라는 듯, 참으로 믿기지 않게도 현실성이 떨어지게 하는 일상적인 목소리라서...
...나도 이젠 내가 뭐라는지 모르겠다.
"이 인간이 살해당하면 틀림없이 키타카미 레이카가 움직일거야. 더 큰 정보를 얻기 위해선 그 방법 밖에 없어."
"...당신은 제 지원 역할이에요."
...전혀 미동도 없이 차분한 목소리인걸 보면, 보이지 않아도 분명 마카베의 표정은 늘 그랬듯 무표정할거라 단언한다.
"독단적인 행동은 허락되지 않았어요. 제 명령에 따르세요."
"...싫다면?"
"정보통합을 해제하겠습니다."
"어디 해보시지. 여기선 내가 유리해. 이 교실은 내 정보 제어 공간이니까."
차분한 목소리와는 달리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눈빛의 타나카.
"...정보 통합 해제를 신청합니다."
>>+1 다이스.
81이 넘으면 성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