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암 갤러거는 자기가 싫어하는 것 10가지를 대라고 할 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싫다.' 딱 한마디만 하고 아무 말도 없이 있다가 잠시 후에 말 한마디를 더 이어나갔다. '그냥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10번 싫다.'
나도 비슷한 심정이다. 그냥 안나가 10번 좋다.
안나가 왜 좋나고? 이유를 찾고싶진 않다. 굳이 있다면 내 신체에서 발생하는 전기신호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런 식으로만 안나가 좋은 것에 대한 이유를 댄다면 나의 심장은 만족하지 못한다.
낙엽이 왜 떨어지는지 묻는 것에 겨울이 와서도 아니고 겨우내 내리는 눈과 함께 땅에 양분이 되기 위해서도 아닌 그냥 중력 때문이라고만 한정해버린다면 내 심장이 만족하지 못하듯이.
그래. 숨을 들이쉬고 내뱉은 뒤 다시한번 중얼거려본다. 나는 안나가 정말 좋다."
"...왜 그걸 로코 앞에서 스피킹하는 거죠."
"여기 안나가 없어서."
"바로 옆 방에 있잖아요. 안나 본인에게 가서 스피킹해주세요."
"그렇지만 무서워!!!"
"스케어리하다니요?"
"로코! 너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에 있어서 능숙해! 현학적인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다른 사람이 들으면 고개를 저을법한 내용도 그냥 다 일일이 듣고 답을 해주잖아! 우와아아앙!!!! 로코 착해!!!! 역시 예술가야!!!! 고져스한 스피릿의 소유자야!!!! 로코 좋아아아아!!!!!"
"그렇게... 뜬금없이 그렇게 로코를 칭찬해도..."
"그렇지만 안나가 좋아..."
"안나랑 함께 프렌드로 지내보고 띵킹한 건데, 안나는 다른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하는 말을 듣지 않을 매정한 퍼슨이 아니에요. 스피킹하는 사람이 프로듀서라면 더더욱."
"그건 문제가 아니야... 안나는 좋은 아이야! 내가 아까 한 말처럼 오글거리는 말을 해도 다 들어줄거야! 하지만... 내가 무서운게 문제야..."
"으으음... 프로듀서. 피어를 극복할 방법을 띵킹 안해본 건 아니잖아요."
"응. 로코 너랑 이야기하는 것도 그 방법 중 하나고."
"안나가 아닌 아더 퍼슨이랑 이야기하면서 안나랑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피어를 디크리즈한다는 거군요."
나는 그렇게 도망쳤다가 사무실로 들어가서 서류더미속에 쳐박혀 있었다. 일을 잘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벗어나서 거기 있고 싶었다. 서류더미에서 어느정도 해방되고 난 뒤엔 해가 슬슬 지고 있었다. 나는 안나가 있던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지금쯤이면 집에 갔겠지 싶어서.
"프로듀서..."
"어... 로코? 아직 안 갔어?"
"프로듀서를 웨이팅하고 있었어요."
"안나는?"
"...안나는 지금 슬리핑중이에요."
로코의 말대로 안나는 후드를 푹 뒤집어쓴채 소파에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프로듀서씨가 안나에게 아무 앤서도 없이 그냥 나가니까... 안나가 베리 새드해했어요. 안나도 겨우 용기를 냈다고 했는데..."
유리코는 워낙 소설을 좋아하기도 하고, 그만큼 소설에 대해 아는 것도 꽤 있으니 유리코라면 정확한 평론이 가능할 것 같다는 것일까. 유리코에게 한 소설의 낭독회를 하고 나서 어떤 점이 좋은지 설명도 하고 추천도 해주면 좋을 것 같다는 오퍼가 왔다.
"오오! 리사! 당신의 숨결은 마치 꽃밭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향기와도 같소..."
"아앗... 다니엘... 어찌 그런 낯부끄러운 말을..."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유리코. 안녕."
"아아아! 다니엘! 저를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리사! 나는 그대를 세상 그 누구모다 사모하고 있소!
"...유리코?"
"오오... 다니엘... 그대를 향한 나의 마음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요. 어서! 제 손을 잡아주세요!"
"아아... 리사! 아름다운 나만의 리사!"
"유리코!"
"아아아! 다니에... 우오아아ㅏ아아1!!! 프로듀서씨!!!!!"
참 빨리도 눈치챈다.
"있다면 있다고 말해주세요!!!"
"아까 전부터 말했는데."
"으으으으..."
유리코는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를 번갈아 내며 아주 낭독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괜찮아. 그만큼 책이 재미있다는 거지?"
"아... 네..."
"다행이네. 사실 오늘 아침 10시가 낭독회라서. 이정도나 몰입하고 있으면 잘 할거야."
"에, 벌써요!? 안 돼요!"
"어, 왜?"
"낭독할 부분을 아직 못 정했단 말이에요! 좋은 부분이 너무 많다고요!"
"그... 그랬구나..."
"으으음...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
유리코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이 홀로 중얼거렸다.
"그럼 이제 슬슬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으으음... 네에."
그렇게 유리코는 차에 탔지만, 차 안에서도 결정을 못 한건지 골똘히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차에서 내릴 적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하늘을 바라봤다. 낭독회 장소에 가서 서로 인사하고, 작가분과 인사도 나누고, 그리고 낭독회는 무사히 시작되나 했다.
"오오! 리사! 당신의 숨결은 마치 꽃밭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향기와도 같소..."
이런 세상에. 아까 사무소에서 연습하던 그 부분이잖아. 그 부분... 어우, 저걸 두번씩이나 듣고 있다. 유리코는 아까도 그랬듯이 책을 읽다보니 점점 더 몰입하기 시작했다.
낭독회는 점점 더 점입가경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리사의 손길은 다니엘의 얼굴을 부드럽고 천천히 훑었다! 다니엘의 거친 맥박이 서로 맞닿은 피부를 통해 리사의 손으로 이어졌다!"
"리사! 그대는 지금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소! 나의 충동이 당장 내 몸 밖을 빠져나오려고 해서 더는 못 견딜 것만 같소!"
"다니엘! 얼마든지! 당신이 펼쳐내고 싶은 모든 것을! 나에게 쏟아부어주세요!"
"아아아아!!! 다니엘은 리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리사의 입에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다니엘의 혀가 리사의 혀를 얽어왔다! 다니엘의 불타오르는 숨결이 리사의 뺨을 타고 올라갈 적, 리사는 다니엘의 숨결이 멈춘 눈동자에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서로의 혀는 더 깊이 얽혀들어가..."
"......"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다니엘은 떠나는 리사를 보며 울부짖었다."
"리사... 리사!!!"
혼돈의 낭독회를 끝내고 나자 유리코는 나를 잠시 쳐다보고는 눈을 바로 휙 돌렸다.
"...여기까지입니다."
유리코는 얼굴이 아주 하루카의 리본색만큼이나 벌개져서 사회자분께 마이크를 넘기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악! 낭독회는 끝났지만 이젠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나는 다시 한번 작가분을 찾아갔다.
"아, 하하하... 낭독회가 어땠나요."
"저... 하아. 그게 말이죠."
"......"
"굉장히...! 굉장히 만족스럽습니다! 나나오 유리코씨! 굉장히 연기를 잘하더라고요!"
에?
"저, 정말로요!?"
"네! 제 글의 감정선을 이렇게나 잘 살릴 줄은 몰랐습니다! 아이돌이라고 해서 그렇게 큰 기대는 안 했는데!"
...어떻게 호평을 얻은 거지? 문학도끼리는 무엇인가 저런 극한의 감정에 대한 공감대가 있는 걸까? 으음. 나도 어제 안나한테 오그리토그리 하는 말을 잘도 한 걸 보면 그렇게 다른 과는 아닌것 같기도 하고.
"어, 프로듀서씨, 여기 계셨...우와아아!!! 글 굉장히 잘 읽었어요!"
"아하하하! 저야말로요! 연기를 그렇게 잘 해주실줄은 몰랐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니요! 오히려 제가 감사해야죠! 근래에 읽은 소설 중에서 이렇게나 가슴뛰는 소설은 찾기 힘들었는데..."
@ 샤니는 잘 모르겠지만, 밀리에서 퍼펙트 커뮤는 일을 보내고 나서 일어나는 해프닝 중에 옳은 선택지를 고르면 발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면 코토하가 드라마 촬영을 가서 '연기를 어떻게 할지 애매한 부분이 있는데 어쩌죠?' 했을 때 세 가지 선택지가 나오는데 이 중에서 독단으로 처리하자거나 잠시 쉬자는 선택지 대신 '감독님께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한번 물어보자' 하는 선택지를 고르고 나면 퍼펙트 커뮤가 일어나는 식으로요.
그리고 이 창댓은 샤니가 아니고 밀리 창댓입니다. 밀리에서는 사무소 내의 일 뿐만이 아니라 외적인 일에 있어서도 퍼펙트 커뮤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전 밀리 인게임에서 보고 들은 것을 베이스로 해서 창댓을 쓰는 중이고요.
"원, 투, 쓰리, 포. 원, 투, 쓰리, 포."
사무실로 돌아오니 츠무기가 사무실에 내가 온 것을 눈치 못챘는지 혼자서 열심히 댄스 연습을 하고 있었다. 장하다. 넌 시어터의 자존심이야!
"원, 투 쓰리, 포, 원, 투..."
"안녕. 츠무기."
"쓰리... 우왓!? 프로듀서!? 있다면 인기척을 내 주세요!"
...유리코도 그렇고. 내가 그렇게 존재감이 없나?
"혼자서 춤 연습하고 있었어?"
"그, 그래요. 춤 연습하고 있었어요. 딱히 혼자서 들떠있었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혼자서 연습하다가 되게 삘받았구나.
"어, 프로듀서. 수염 안 깎았어요?"
"...수염 난 거 보여?"
"아주 똑똑히요."
"하하하..."
"정말! 아무리 바쁘다고는 해도 자기관리를 안 하다니! 당신은 저를 이끌어주는 사람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하는게 아닌가요?"
"하하. 관리 못해서 미안해. 사실은 어제 야근한다고 집을 못가고 사무실에서 잤거든."
"엣?"
"응. 그래서 수염을 못 깎았어."
"아... 그..."
츠무기가 내 사정을 듣고 뻘쭘해진건지 잠시동안 말이 없어졌다. 물론 순전히 일 때문만은 아니고... 그냥 개인적인 문제가 더 컸지만 그냥 이렇게만 말하고 마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다.
"저, 정말.... 그래도 자기 관리는 해야죠..."
"나도 그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프로듀서..."
츠무기는 수염이 난 내 얼굴을 바라모며 잠시 한숨을 쉬었다.
"하아. 프로듀서. 저... 아니, 저희를 위해서 무엇이든 열심히 해주시는건 기뻐요. 그런데, 프로듀서. 가끔씩 당신이 무심한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제가 말했죠?"
"응."
"프로듀서가 자기 모습도 신경쓰지 못할 만큼 바빠서 이런 몰골이 된 걸 보면 저도 속상한데, 프로듀서를 마음에 둔 다른 아이들이 얼마나 속상해할지는 생각해봤나요."
"......"
"전 제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재주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안나씨랑 로코씨는 당신이 바빠서 수염도 못 깎고 다닌다는 말을 들으면 분명 속상해할거에요."
"그렇겠지..."
"이럴 땐 저희를 위하는 것 보다는, 그냥 스스로를 위하는게 저희는 더 기쁠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 고마워."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당장 면도기랑 면도 크림을 사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바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프로듀서. 어디 가나요?"
"뭐하긴. 수염 깎아야 하는데 면도기가 없잖아. 면도기 사러 가야지."
"...기껏 제 진심을 담아 말했는데 당신은 그런 피상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이기인가요."
"그리고 올 때 안미츠도 사올게."
"아... 정말! 당신이란 사람은!"
좋은 조언을 받았으니 그 값을 줘야지. 츠무기가 아주 좋아하는 곳에서 안미츠 하나 포장해서 냉장고에 둬야겠다.
이렇게 된거 근처에 있는 적당한 편의점에 가서 일회용 면도기랑 면도크림을 사오기로 했다. 내가 야근을 또 할지는 모르겠지만, 두고두고 요긴하게 쓸 일이 없었으면 참 좋겠다. 밤샘하고 사무소 화장실에서 면도라니. 으엑.
"후아아암..."
그렇게 사무실에서 아침까지 퍼질러잤는데도 왜 이리 피곤한 건지 눈꺼풀이 감겨왔다.
제멋대로 감겨오는 눈꺼풀을 어떻게든 들어올리려고 하며 난 도로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을 바라봤는데...
"......"
안나가 다른 남자랑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멀리 있어서 잘 보이지 않고, 가게가 조명을 꺼뒀는데 밖에 햇빛이 쨍쨍해서 가게 안이 잘 안보였지만, 실루엣으로 보이는 두 사람 중 한 명은 안나고 다른 사람이 남자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괜찮...지 않아! 괜찮지 않다고! 안나는 아이돌이니 평소에 조심해야 하니 뭐니 하는 문제를 떠나서 그냥 안나를 낯선 사람이랑 방치하는건 질색이다! 나는 서둘러 도로를 건너서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그래가지고 아빠가 계산을 다 했는데..."
"아... 응..."
"......"
"어? 아! 안녕하세요!"
"아? 아아아!!!"
아! 누군가 했더니 아버님이었구나. 가게 안이 잘 안보여가지고 못 알아봤다. 깜짝 놀랐네. 하긴, 안나가 수상한 사람이랑 신나게 이야기하지는 않겠지. 그렇게 친해진 유리코나 로코랑도 처음엔 다가가기 어려워했었지. 게임이란 공감대가 있어서 맨 처음 다가간 이후로 지금처럼 친해졌고.
"지나가는 길에 우리 딸이 있길래 가서 좀 뭐라도 좀 맥일라고 그랬죠."
"아. 하하하하. 그렇군요."
"전에는 수염이 이렇게 안 길었던 것 같은데... 혹시 수염은 기르시기로 한 건가요?"
"그게... 저, 어제 집을 못 가고 사무소에서 밤새 야근을 하느라 수염을 깎을 틈이 없었습니다."
"아..."
"......"
아버님이랑 안나는 똑 닮은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슬픈 눈빛. 유리코가 라디오 생방에서 자신을 실수로 릴리나이트라고 소개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멘탈이 폭발해버리거나, 사무소의 다른 아이들이 쓰레기랑 로코아트를 착각하는 바람에 로코가 엉엉 울어버릴때 안나는 이런 눈빛을 지었다.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츠무기가 날더러 안나는 내가 이러는걸 알면 엄청 슬퍼할 거라고 했는데. 그런데 별 수 있나. 이게 현실인데. 소레가 겐지츠. 타다 소레다케.
아. 맞다. 츠무기 하니까 생각났네. 안미츠도 사가기로 했지.
"아... 아빠. 그럼... 안나, 이만 가볼게..."
"응. 잘 다녀와."
"다녀오겠습니다..."
"프로듀서씨! 고생이 많으십니다. 우리 안나가 얼마나 프로듀서씨를 입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하는지.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안나는 아버님을 향해서 연신 손을 흔들며 배웅해주었다.
"...프로듀서씨."
"응?"
"...안나 때문에, 밤 샜다는거... 진짜야...?"
"......"
"하아..."
안나는 뭔가 심경을 말로 표현하기 싫었던 건지, 한 손으론 내 손을 꼭 잡고, 다른 손으론 후드를 꾹 뒤집어쓴채 나를 따라 아무런 말도 없이 걸어가기만 했다.
"안나. 미안해."
"...미안한 건 안나에요."
"아니야. 걱정시키면 안 되는데... 아. 모르겠다. 안나. 나 지금 달달한 게 굉장히 먹고 싶은데. 지금 배불러?"
"아뇨..."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
"...팬케이크?"
"팬케이크? 좋지. 디저트 가게에. 팬케이크~ 팬팬팬케이크~ 카나의 15단 팬케이크~"
이렇게 쭉 경직되어있기도 뭐하니 카나 흉내를 내면서 노래를 불러보니 안나가 피식 웃어보였다.
"히힛..."
그러고보니 츠무기가 자주 찾던 디저트 가게가 이 근처에 있었지. 거기 가는게 좋겠다. 츠무기는 평소에 좀 맹해서 그렇지 디저트에 관해선 엄연한 미식가다. 특히 안미츠는 더더욱. 근처에 있는 디저트 가게는 한번쯤은 다 돌아봤겠지?
사무소로 돌아와서 휴게실로 갔다. 사무실 말고. 사무실같은 삭막한 곳에서 디저트를 먹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오자마자 로코가 나를 반겨주었다. 새로운 로코 아트를 만드는 중이었는지 로코 아트를 옆에 둔 채로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온지 눈치를 못 챈것 같은데... 우선 난 츠무기가 먹을 몫의 안미츠를 냉장고에 넣어뒀다. 츠무기 것이라고 포스트잇을 붙여두고.
"안녕. 로코."
"아. 프로듀서. 로코는 노 프라블럼이에요!"
그리고 오자마자 로코가 나를 반겨주었다. 새로운 로코 아트를 만드는 중이었는지 로코 아트를 옆에 둔 채로 날 흘깃 바라보면서 인사를 했다. 으음. 로코 아트 만드는 로코는 고집불통인데.
"우와! 여기 맛있어보이는 안미츠가 있네! 먹으러 올 사람 어디 없나~"
"...프로듀서. 로코 아트에 대한 패션은 디저트에 굴하지 않아요."
"로코... 안 먹을 거야...?"
"으음..."
"안 먹을거면 내가 다 먹어야지."
"으으. 로코의 패션은 강해도, 스피릿은 아직 프로듀서의 템테이션을 이기지 못할 뿐이니까요!"
"와아~"
나는 안미츠랑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앞에 내려놓았다.
"...민트초코?"
로코는 민트초코를 탐탁찮은 듯이 쳐다봤다.
"민트초코는 노노에요."
"민트초코가 왜?"
"민트와 초코의 컴비네이션은 하모니가 아니에요. 디소넌스에요."
"민트초코가 불협화음이라니. 오히려 초콜릿의 단맛과 시원한 맛이 대비가 되기 때문에 좋은 건데."
"프로듀서. 디소넌스가 물론 어필 포인트로서의 역할이 있는 건 맞아요.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필 포인트지 메인이 아니란 말이에요. 민트초코는 디소넌스가 메인이라고요. 뮤직같은 경우에도 디소넌스를 메인으로 한 경우에는 특유의 팬들이 있더라도 메인스트림의 지지를 얻긴 힘들어요."
유리코가 무언가가 하고 싶은 걸까. 뭐 아무것도 안하면 심심하다는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니까.
"음. 그럼 뭐 할까?"
"게임이라도 할까요?"
"와~ 게임!? 진실게임 할래! 나 친구들한테서 진실게임 배웠어!"
미라이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누가 반대를 할까. 아. 저 천진난만함.
"그럼 진실게임이라도 할까요?"
"그래. 그거 좋겠다."
"와아~ 미라이가~ 좋아하는 진실~ 게임~"
미라이는 아주 신나가지고 자리에서 붕붕 뛰어다닐 기세였다.
"자! 그럼, 으으음... 아! 다들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에요!?"
첫 질문부터 세게 나가는구나. 좋아하는의 의미가 라이크냐에 러브냐에 따라서 다르지만 안나랑 로코의 답은 결정되어있다. 문제는 나야...
"푸웁?!"
그런데 갑자기 먹던 안미츠를 뿜은 건 츠무기였다.
"조, 조, 좋아하는 사람!?"
"네!"
"그, 그런걸 남사시러워서 어떻게 말한다고! 내는 빠질랜다!"
"아! 전 아빠요! 프로듀서씨도 좋지만 전 아빠가 제일 좋아요!"
"엣...?"
츠무기는 러브고 미라이는 라이크로 받아들인 걸까. 미라이가 갑자기 아빠를 좋아한다고 해버리니까 츠무기는 그대로 고개를 숙이며 침몰하고 말았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
유리코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듯 하더니 답했다.
"아직 못 만나봤어요."
"못 만나봤다니?"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말로 덮어버리기에는 저의 사랑은 아직 그만큼의 꽃을 피우지 못했는걸요. 첫사랑도 만나보지 못했으니까요. 정말로, 제가 진심으로 가장 좋아한다는 말을 할 만큼 절 사랑해줄 누군가를 만난다면... 하핫, 엄청 행복할거에요! 그래요! 마치 안나랑 로코가 프로듀서씨를 만난..."
"유리코씨..."
"아, 아... 하하하."
유리코가 늪으로 빠져들어가려는 것을 어떻게든 안나가 저지했다.
"아, 아무튼! 그럼 안나쨩이랑 로코는?"
"프로듀서."
"프로듀서씨."
역시. 둘이서 타이밍을 맞추기라도 한 듯이 칼같이 대답했다.
"역시."
"말 안해도 알만하죠. 자. 그럼 프로듀서씨!"
"나?"
...그리고 결국 내 차례까 온 건가.
"...안나지?"
"오프 코스겠지만, 로코죠?"
"...노코멘트."
"에이~"
"으음..."
"그럼 대답할게. 나한테 월급주는 사장님이 제일 좋다! 됐지?"
"저, 그, 그럼. 프로듀서씨! 첫사랑은 어때요? 아니, 첫사랑은 누구에요?"
...어떻게든 회피를 해보려고 했지만 유리코가 집요하게도 물어왔다. 으음. 아, 이거 대답을 안 할 순 없는데.
"...누군가가 좋아할 만한 답을 원해? 아니면 진짜 답?"
"에이~ 진실게임이잖아요~"
"맞아요~ 어디까지나 게임인데."
"말해도 되는 거지?"
"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내 진심을 내뱉었다.
"...유키호."
"......"
"......"
세상에. 이게 그 아이스 에이지인가 하는 그건가요.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내가 생각한 것 그 이상으로 냉랭해졌다. 내가 당장 사장님한테 가서 프로듀서 그만둔다고 해도 이만큼 분위기가 싸해지진 않을 것이다.
다들 안나나 로코 중에서 한 명이 나올줄 알고 재촉을 했겠지. 근데 어떡해... 첫사랑을 말하라고 했잖아... 유키호가 너무 예뻤어...
"...안나, 삐졌어."
"프로듀서! 방금 워드는 두고볼 수 없어요! 로코는 스트라이크 할거에요!"
"...파업?"
"네! 스트라이크요! 안나도 동참해요!"
"응...!"
이런 세상에. 파업이라니. 파업이라니...
순수하다는건 엄청난 힘이다. 미라이의 천진난만함이 괴력난신이 되어 날 휘둘렀다. 아. 오자마자 안미츠 먹는다고 수염을 안 깎았구나...
결국 난 수염도 깎으러 가고 안나와 로코의 분노로부터 몸을 피할 겸 해서 도망칠 수 밖에 없었고, 그날 로코랑 안나는 파업을 명목으로 모든 레슨을 빠졌다.
다음 날. 안나는 아직도 잔뜩 삐졌는지 볼을 부풀린 채로 내가 왔음에도 인사도 안하고 게임만 하고 있었다.
"안나. 안녕,"
"......"
"아직 화났어?"
"...몰라요."
"으음."
"...흥."
"안나. 소원 하나 들어줄게. 아무거나 원하는거 있으면 하나 들어줄게. 그러니까 화 풀어."
소원 이야기가 나오자 안나는 게임기를 끄고 내쪽으로 왔다.
"안나의 소원...?"
"응."
"...안나의 머릿속에 있던 소원은, 프로듀서씨가... 이미 다 이뤄줬는걸."
안나는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렇지만..."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안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직, 한 가지 소원이 있어요..."
고개를 든 안나는 나를 바라보며 내 손을 잡았다.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안나..."
안나의 소원. 안나의 소원은 날 보고 사랑해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도 말하고 싶다. 나도 안나를 사랑한다고 진심으로 말하고 싶다. 내 진심을 끌어내 본다. 끌어내 봤다. 하지만 내 영혼은 한번도 안나와 로코가 나에게 준 가르침을 실현해 본 적이 없다. 이번에도 뒤를 돌아보면 안 되는 순간에 에우리디케를 두고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게 남은 건 끔찍한 진실이었다. 내 영혼의 그릇이 그 정도라는 진실.
아무 말이 안 나온다.
아무 성과도 없으니까 갑자기 눈 앞에 있던 안나가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세상에 나혼자만 남아버린 느낌이다. 그 말을 나오게 하려고, 그 한마디를 나오게 하려고 힘을 썼는데, 그 힘이 어딘가로 새버린 건지 갑자기 무엇인가를 필사적으로 막고 있던 제방이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린 느낌이다.
대체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다면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왜 나는 두렵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 자신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히고 있을까? 내가 조금 더 용기를 내야 안나가 행복한데. 이런 이기적인 사람이 있나. 내가 기생충과 다를 게 뭘까.
나는 바보다. 나는 이기적인 놈이다. 아. 그냥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사라지고 싶다. 그냥 나도 상처받지 않고 나 때문에 다른 누군가도 상처받지 않는 아무것도 없는 공허 속으로 내 존재가 깔끔하게 사라지면 좋겠다.
나는 그렇게나 사랑받았음에도 사랑하는 법을 깨우치지 못했다. 그냥 같이 있어주는게무슨 사랑이란 말인가. 그냥 먹을 것을 사주는게 무슨 사랑이란 말인가. 두려워서 문을 걸어잠그고 있는 놈이 어떻게 사랑을 운운한단 말일까. 내가 이런 사람인줄 내가 애초에 알았다면 안나의 곁에 다가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안나의 곁에 있는 행복을 누려선 안 됐고 안나는 나같은 사람과 어울려서 불행해져선 안 됐다.
안나는 잘못한 게 없다. 그런데 왜 나같은 사람과 함께 있는 걸까.
"...미안해. 안나."
"...프로듀서씨."
"안나... 도무지 아무 말도 안 나와. 난 바보인가봐."
"...바보 아니에요. 로코한테 들어서 알아요... 프로듀서씨는... 그냥 겁이 날 뿐이에요."
"맞아. 겁이 나. 엄청 나. 신기하다? 다 괜찮은데, 안나한테 고백하려고만 하면 몸이 굳어서 아무것도 못 하겠어. 나 이상한 사람인가봐. 지금 당장 좋아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지금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
"나중이라도 괜찮아... 그치만... 나중에라도... 좋아한다고 해줘요...?"
"...응!"
"프로듀서씨... 약속했어요... 안나랑, 약속한거야..."
"응."
"...안 지키면 어떻게 할거야?"
"퇴사할거야."
"......"
너무 파격적인 공약이었는지 안나는 말이 없었다.
잠깐 탁류에 휩쓸려 가라앉는 바람에 약간 밑바닥으로 내려갔다왔지만 다시 올라왔다. 정신 차려. 난 불행한 사람이 아니야. 난 절대 불행한 사람이 아니야. 날 불행하게 만드는 건 나야. 내가 불행하면 안나도 불행해져. 잊지 마.
내가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건 상관없지만 나 때문에 안나가 불행해지면 안 된다.
+2 로코는 프로듀서가 멘탈을 잠시 놓았던걸 눈치챈다 못챈다
1~50 눈치챈다
50~99 못챈다
100 갑자기 닌자가 나타난다
안나. 안나에게 고맙다. 그냥 안나가 있어주는게 고맙다. 그냥 태어나줘서 고맙다. 코토하가 메구미한테 태어나줘서 고맙다고 했었는데. 아. 행복하고 싶다. 안나는 행복 그 자체지만... 행복의 존재만으로는 내가 행복해지기엔 부족한 걸까.
로코도 만나봐야 하는데. 난 로코가 있을만한 곳을 찾아 돌아다녔다. 로코가 로코아트를 만들거나 로코 아트를 만들 영감을 찾을만한 곳. 사무실, 휴게실, 로비엔 로코가 없었다. 그렇다면...
"......"
역시 로코는 옥상에 있었다. 로코는 날 분명히 봤지만 못 본체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 안녕 로코?"
"오! 후아유? 아이 돈 노우 후유아!"
"저, 로코..."
"됐어요! 로코는 지금 베리 앵크리에요!"
"미안. 화 풀어."
"흥."
"...원하는 거 있으면 하나 들어줄게."
"로코의 위시? 노 땡스에요! 로코는 로코 아트를 메이킹하는데 다른 사람의 레이버를 제멋대로 이용하는 악덕 아티스트가 아니에요!"
"그럼 그냥 곁에 있게만이라도 해줘."
"...그건 파서블이에요."
나는 로코의 곁에 있었다. 로코가 로코 아트를 만드는 걸 그저 보고만 있었다.
로코 아트는 평소의 로코가 만드는 것 보다 좀 더... 삐뚤빼뚤해보였다. 확실히 그랬다. 로코 아트는 보통 로코 아트가 사고로 인해서 망가지거니 뒤틀려버리지 않는 이상 보통은 정갈하게 나뒀다.
그래. 정갈하다. 그냥 사물을 나열한 게 아니다. 로코랑 같이 있던 게 얼마인데. 난 안다고.
하지만, 이번 로코 아트는 정갈한 모양새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로코가 삐뚤빼뚤한 모양새의 아트를 만들거나, 아니면 나 때문에 집중을 못 하고 있는 거겠지. 어쩌면 둘 다일수도.
"프로듀서."
"...응."
"퍼스트 러브가 유키호라고 한 리즌이 뭐에요? 와이?"
"그냥 첫사랑이 유키호라서 그렇게 대답했어."
"...지금은 로코를 훨씬 더 러브하는 거 맞죠?"
"물론."
"만약 폴스라면요?"
"사직서 낼거야."
"...그렇게 나오면 로코도 딱히 디나이하지 않을 거에요."
로코는 로코 아트를 두고 내게 다가왔다.
"그럼. 프로듀서. 로코를 러브한다는 것을 프루브해주세요."
"어떻게?"
"으음 지금 타임이... 벌써 애프터눈이네요. 그럼 나우부터 이브닝까지 로코의 곁에만 있어주세요."
"물론."
"...도큐먼트를 어드저스트하러 가지도 말고, 인에비터블한 일이 아니면 로코의 곁에서 떠나지 말아주세요. 평소엔 안나에게 가는 것까진 얼라우해줬겠지만, 이번엔 낫 얼라우드에요. 로코에게만 있어주세요."
"응..."
"...떙스에요."
로코는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다시 로코아트를 만들러 갔다. 그리고 나선 그저 아무 말도 없이 로코 아트를 만들고 있었다. 난 로코랑 그렇게 붙어있었음에도 로코가 해설해주지 않는 이상 로코 아트가 무엇을 표현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로코가 나와의 관계가 그 정도 관계라고밖에 안 되는 건가 하고 실망하는 건 싫어서 로코가 설명을 해줄 때마다 그런 거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정말 이번에도 그렇게만 하면 난 좋은 사람으로 남겠지. 하지만, 좋은 사람으로만 남고 말 거야.
고민하고 있던 난 로코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로코의 곁에 다가가면 내가 방해만 될 것 같았다. 로코가 작업 장소를 옮기려고 로코 아트를 슬슬 정리하고 있을 떄 조차도.
"프로듀서?"
"응?"
"...로코의 곁에 있어주세요."
"아, 응."
난 로코를 따라서 휴게실로 내려갔다. 로코는 로코 아트를 구석에 잘 갈무리했다. 그 구석에는 아직 만들다 만 로코아트가 가득했다. 몇 개는 먼지가 끼여 있었다. 하지만, 로코가 저렇게 구석에 방치되어 있는 로코 아트를 버린 일은 없었다. 언젠가는 먼지를 털고 보수해서 꼭 내놓았기 때문이다.
로코는 캔버스를 펼치고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붓을 들 기미는 보이지도 않고 지긋이 날 바라보았다.
"안되겠어요. 하트에 프로듀서만 가득해서 프로듀서의 포트레이트를 드로하고 싶었는데, 프로듀서를 프로듀서로서 드로하지 못할 것 같아요."
"나를 나로서 그리지 못하다니?"
"프로듀서. 로코가 아직도 앵그리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가만히 있는 거에요?"
"...응."
"로코는 이제 더이상 앵그리하지 않아요..."
로코는 내게 달려와서 내 손을 꼬옥 잡았다.
"모처럼의 오포튜니티인데. 로코 아트에도 컨센트레이션이 안 됐어요. 로코의 하트에 프로듀서 뿐이었거든요. 그러다보니 프로듀서가 보링할 것 같아서 프로듀서를 리터럴리 프로듀서로만 그린 드로잉을 프레젠테이션 하고 싶었는데... 잘 안 돼서 속상했던 거에요."
"난 로코가 날 그려주기만 하면 기쁠 것 같은데."
"하지만 프로듀서를 러버로서 그린 그림은 너무 많아서... "
"난 한번도 못 본것 같은데. 보여줄래?""
"네? 웨잇이에요! 그건 프레젠테이션 못 해요!"
"어째서?"
"...부끄러워요."
...아. 로코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럽다고 했고 난 그대로 쓰러질뻔한 것을 참아냈다. 아. 로코가 너무나도 진심이라서 영어 쓰는 것도 잊어버리다니. 흑흑.
"아, 그. 에, 엠베레싱! 엠베레싱해요!"
"아무튼 안 되는 거니?"
"네! 로코의 스킬이 더 늘어서 프로듀서에게 프레젠트해도 괜찮을 만한 드로잉을 그리는 데 성공하면 보여줄 수 있지만... 아직은 아니에요."
"아깝네."
"아직은 러프한 결과물이에요."
"러프가 말 그대로의 러프야? 아니면 거칠단 뜻이야?"
"노코멘트에요."
로코는 노코멘트라고만 하고 내 품에 뛰어들어서 날 껴안았다. 로코의 북슬북슬한 머리의 감촉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저 폭신해보이는 머리의 감촉이 좋았다. 머리를 무의식적으로 쓰다듬으니 로코는 순간 흠칫했지만, 그저 내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프로듀서. 프롬 나우 온, 로코는 더이상 투데이의 드로잉을 하긴 글른 것 같아요. 그냥... 그냥 계속 프로듀서를 스테어링하다 보니까 프로듀서의 곁에만 있고 싶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굿이네요."
자. 꽁냥꽁냥 했으니 이제 일하러 갑니다. 야근한 프로듀서를 다음날 아침에 누가 꺠우러 올까요?
1~33 성실하게 아침일찍 도착한 사요코
34~66 성실하게 프로듀서보다 일찍 일어난 미사키씨
67~99 성실하게 아침일찍 도착한 코토하
100 그냥 피핀 이타바시
그래도 안나랑 로코는 내 자신작을 안 남기고 싹싹 긁어먹어줬다. 아. 고마워라. 아무튼 밥상을 정리하고, 우미랑 츠무기가 떠나고 나서 안나랑 로코만 남았다.
"......"
"......"
안나는 게임하고 있고, 로코는 로코 아트에 대해 고민하느라 어색한 침묵이 감돌고 있다. 으. 지금 말해야겠지.
"으음, 혹시 둘 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응..."
"로코도요."
"그럼 혹시 그... 영화라도 보러 갈래?"
좋아. 이 수가 틀어진다면 당장 프로듀서 그만두고 머리깎고 스님이랑 같이 도 닦으러 간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전 이 속세의 짐을 벗어지고 떠납니다.
"로코는 노 프라블럼이에요!"
"으으음..."
예스! 로코는 환영하는 눈치다1
"끄응..."
안나는 잘 모르겠다.
"다른 건... 안 돼...?"
"다른 거?"
"프로듀서씨... 시간 나면... 같이 게임 하고 싶었는데..."
"으으으으음..."
게임인가. 영화인가. 으으으음... 일단 무슨 게임인지 한번 물어보고 나서 결정을 해야겠다.
"무슨 게임 하려고 했어?"
"온라인 게임..."
"온라인 게임이면 자주 하는 그 rpg게임 말이야?"
"응..."
아... 나 그거 계정도 안 만들었는데. 난 온라인 rpg 게임은 취향에 영 안 맞는다. 그리고 온라인 게임보다 인디게임을 좋아하기도 하고. 하지만 안나가 하는 거라면? 음.
"안나. 안나는... 그... 로코랑 같이 무비를 보러 가는게 별로에요...?"
"그런 게 아니야... 그렇지만... 프로듀서씨랑은, 같이 게임이 하고 싶어서..."
아. 아. 안돼. 이러다가 뭔가 흐름이 그려진다고.
내가 계정도 안 만들었다는 것을 안 안나는 친절하게 내가 계정을 만드는 시간동안 계속 기다려주겠지. 계정을 만들면? 난 초보니까 지루하고 실질적으로 쓸모있지도 않은 튜토리얼이 엄청 길겠지.
보통 튜토리얼에 멀티플레이어로 누군가가 끼어들지 못하게 하니까 그 튜토리얼이 끝나는 동안 안나는 계속 혼자 있겠지? 그렇게 튜토리얼이 끝난다면? 일련의 과정 때문에 이미 시간이 다 지난 이후다.
안나는 거기다가 말 그대로 탑랭커다. 안나랑 같이 예전부터 파티를 돌았던 고인물인 유리코가 안나의 실체를 보고 나서 자신의 게임 닉네임을 밝히기 이전에 감탄부터 하고 본 수준이다. 그야말로 천외천이요. 만인지상이다.
그런 안나가 자기가 평소에 도는 던전에 쌩뉴비인 나를 입장시킨다? 던전의 기본 권장 레벨 때문에 난 입장부터 못 할 것이다. 그럼 안나가 초보자용 던전에 나와 함께 입장한다? 키보드키 하나 눌렀는데 화면에 있는 몹이 싹 죽어있을 것이다.
그럼 키보드키 하나 눌렀는데 몹이 싹 죽어버린 안나도 재미가 없고, 아무것도 못하는데 고인물의 진기명기를 구경만 하는 나도 재미가 없을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
그래서 영화를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데. 흑흑. 안나가 그래도 게임을 하고 싶다면... 그래도 가야 하나?
"저... 안나."
"응?"
"로코는 그래도 게임보다는 무비가 더 좋은 것 같아요."
"왜?"
"그냥... 로코의 필링이 그렇다고 하고 있어요. 프로듀서는 테이크 섬 레스트를 하고 싶을 거에요. 벗, 게임을 하면 여러 프로세스를 거치고 에포트를 인풋해야 하잖아요? 무비라면 그런 것들이 없어도 시팅해서 무비를 워칭하기만 하면 되지만요. 그래서... 무비 쪽이 프로듀서가 좀 더 덜 타이어드 하지 않을까 싶어서..."
"으응..."
안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을 하는 듯 싶더니 갑자기 볼을 부풀리며 로코의 볼을 쿡쿡 찔렀다.
"하여튼... 로코는 치사해... 안나가 영화를 보러 갈 수 밖에 없게 하고..."
"우우. 그만 포킹해요."
"응... 그래. 그럼 있다가, 영화, 보러 가자?"
예이!!!
좋다. 그럼 남은 시간 동안 월급루팡해야지. 월급루팡이 왜이렇게 당당하냐고? 블랙기업에서 그정도는 괜찮잖아.
난 프로젝트 기획서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대충 타자를 치는둥 마는둥 열심히 월급루팡질을 했다. 리츠코가 나를 좀 많이 째려보긴 했지만... 생각해보니까 리츠코도 아이돌 그만두고 나면 그 뒤에 전향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겠지? 좋아. 누군가는 블랙기업을 부담해야 한다. 플라잉 더치맨의 선원이 되어라.
물론 농담이다. 그래도... 킹치만 솔직히 아깝잖아. 아이돌로 활동할 수 있는데 안 하는건 아깝잖아. 솔직히 코토리씨도 지금 아이돌이 아닌 게 아까워 죽겠고 미사키씨도 아이돌이 아닌게 아까워 죽겠는 마당에.
"프로듀서. 잠깐만 쉬고 일한다더니 계속 집중력이 흐트려지는게 눈에 보이거든요?"
"잠깐이란건 상대적인 개념이걸랑요. 너의 잠깐과 나의 잠깐이 좀 다를 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2시간은 잠깐이란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데요? 2시간 전에도 이러고 있더니 지금도 계속 이러고 있기에요?"
"웨딩 화보 촬영 스케줄이 하고 싶단 말이지? 그래. 얼마든지 시켜줄게."
"프로듀서?"
"알고 보니 웨딩 화보가 아니라 수영복 화보였구나?"
"프~로~듀~서~?"
어, 음. 내가 내면의 귀신 중사를 깨우고 만 건가.
"잠깐 이쪽으로 오실래요?"
귀신 중사의 분노를 산 난 결국 진실의 방에 끌려가고 말았다...
그래도 설교 듣는동안 일은 안했다. 월급루팡은 순조롭습니다 사장님. 히히히히히히. 안나랑 로코랑 영화보러 갈 생각을 하니까 웃음이 절로 나온다.
"...하여간 참. 할 때는 잘 하는 사람인데 왜 저러고 있는 건지."
"할 때 할 수 있기 위해서 힘을 비축해둬야 하는 거야."
"말은 또 잘해요. 에휴."
리츠코는 투덜투덜대면서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음. 퇴근 시간까지 정확히 5분 남았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지. 그렇게 내 몸속에 카즈의 정신이 약 5분동안 깃들어 있었다.
"으으으으... 으어! 끝났다!"
오예ㅋㅋㅋㅋ 좋다ㅋㅋㅋㅋ 당장간다ㅋㅋㅋㅋ
"프로듀서씨..."
"프로듀서! 웨이팅하고 있었어요!"
사무실 문을 열고 보니 바로 문앞에서 안나랑 로코가 기다리고 있었다. 음. 그냥 안에 들어와도 되는데...
"기다리고 있었구나."
"오브코스죠!"
"저... 빨리, 가자?"
안나랑 로코는 날 기다려줬다. 심심했을텐데. 물론 나도 같이 지루했던 터라 안나와 로코를 데리고 어서 빨리 잰걸음으로 극장을 나서며 차에 탔다. 걸어가는걸 더 좋아해서 영화관까지 같이 걸어가고 싶긴 하지만, 거리가 안 되니까.
"대, 댓츠 오케이에요! 쏘리라니. 안나가... 프로듀서를 러브한다는건 알고 있으니까..."
"......"
"네, 넥스트 타임에 같이 플레이해요!"
"응..."
로코는 아무 말 없이 물러갔다. 딱히 이렇다 할 작별인사도 없이. 의례적인 몸짓도 없이...
미안해. 그렇지만... 아니야. 내가 할 말이 있겠니. 그냥 미안해.
"저, 프로듀서씨."
"응."
"안나네 집... 어딨는지, 알죠?"
알고 있다. 물론 알고 있고 말고. 잘 알고 있다. 그 안에 들어가보았냐 하면 들어가도 봤다. 하지만 지금의 문제는 별개다. 별개의 문제라고... 왜일까. 안나랑 둘이서만 함께 있으면 나는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다.
로코가 그럴때 옆에 있어주지만... 결국 그게 내 문제를 해결해주는 건 아니니까. 로코도. 로코도 힘들텐데. 얼마든지 자기 몫을 주장하려면 주장할테고 떼를 쓰려면 썼을 텐데. 그냥 비켜줬으니까. 하아. 이번엔 실수하고 싶지 않아.
잘 해낼 수 있을까.
"당연히 알지."
"그럼... 가자?"
"응."
나랑 안나는 함께 짐까지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빛으로 가득한 밤의 길거리가 참 서늘하게 느껴진다. 안나도, 나도, 딱히 아무런 말이 없어서였을까. 안나가 이런저런 말을 먼저 거는 편이 아니라서 말이 없는 걸까. 아니면 내가 말주변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아무 말이 없는 걸까.
아니야. 그게 무슨 상관이야. 둘 다 무슨 상관이야. 지금까지가 어땠는진 안 중요하다. 이제 알겠다. 왜 거리는 빛으로 가득해도 서늘했던 것인지. 나는 내 옆을 나란히 걸어가는 사람의 손을 마주잡고 있지 않았으니까.
안나는 지금까지 많이 기다려왔겠지. 응. 정말로 많이 기다렸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같은 상황에서도 기다리게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나는 안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안나는 내 손을 잡아주었다.
"프로듀서씨..."
안나는 집에 도착할 때 까지 꼬옥 잡고 있었다.
"저, 그, 어서 오세요."
그리고... 도착했다. 안나네 집이다.
안나는 스스로를 밖으로 꺼내기 힘들어하는 아이였다. 아이돌에 대한 이야기, 그 외 여러가지 일에 대한 상담 차 여기 방문해서 차 한잔 얻어마셨을 때도 안나는 아버님 옆에 꼬옥 붙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안나는 지금 나에게 자신이 꺼낼 수 없는 것은 가릴지라도, 꺼낼 수 있는 건 거진 다 꺼내서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전부일지도 모른다. 내 마음은 밖에 드러나 있을까.
안나는 정말 나랑 게임만 하고 싶어서 부른 걸까?
그 의문이 드는 순간. 또다른 의문이 생긴다. 내 마음은 정말 품어도 되는 마음일까.
불안하다. 나는 고결한 애정의 소유자인 척 하지만 사실 내가 안나에게 품은 감정에 정신적 유대고 나발이고가 없다면. 그럼 그냥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지고 싶어할 뿐이잖아.
안나의 방에선 안나의 냄새가 났다. 냄새. 냄새... 냄새는 너무 변태같은 단어다. 갑작스레 내가 안나한테 품은 모든 마음과 생각이 전부 다 뒤틀리고 배배꼬인 무언가로만 느껴질 것 같다. 난 결국 이렇게 될 줄 알고 안나를 스카웃한걸까. 한 사람을 나만 바라보게 한 뒤, 결국 내 손으로 꽈악 움켜쥐고 싶어서?
그래. 단어를 바꾼다면? 향취? 후각적 이미지? 아니야. 안나는 지금 게임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나는 그런 것에 먼저 감각을 옮긴 시점에서 단어 따위를 바꿔봐야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내가 나를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내가 그런 이기적인 감정따위를 가진 사람이라 해도 안나는 착하다. 안나는 그런 나라도 받아들여줄 것이다. 그럼 난? 안나가 나에게 그런 감정을 나에게 가지고 있다면 난 어떡하지? 안나가 나만을 원한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아니, 대답할 순 있을까? 내가 나도 모르게 도망쳐버리면 어떡하지.
"프로듀서씨. 그..."
세팅이 끝난 안나는 아무런 말 없이 토끼 스티커가 붙은 키보드를 가리켰다.
유리코가 폎소에 놀러와서 게임을 해서일까. 이미 둘이서 게임을 할 수 있는 세팅이 갖춰져 있었다. 나는 뉴비가 올드비와 함께 온라인 rpg 게임을 할 때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을 생각했다.
계정 만드는데 시간 걸리고, 튜토리얼 끝나는데 시간 걸리고, 난 안나가 도는 던전에 레벨이 안 맞아서 못 들어가고, 결국 안나와 나는 안나가 스킬 하나만 날리면 화면 안의 모든 몹이 죽는 초보자용 던전만 돌고...
그 일련의 과정은, 정말 내가 생각한 것과 똑같이 진행되었다.
"프로듀서씨."
"응."
"이제 나머지 스탯은 전부 다 민첩에 몰아주면 돼."
그래도 게임을 하는 중이라서 내면의 긴장이 풀린 걸까. 안나는 말을 더듬지 않았다. 시간도 어느새 꽤나 흘러갔다. 잠시 핸드폰을 켜 보니, 시간을 알려주는 문자판의 앞자리는 이미 십의 자리가 아닌 일의 자리를 표시하고 있었다.
"슬슬 늦었네. 으... 피곤해..."
"그럼 여기까지 할까?"
"프로듀서씨."
"응."
"여기서... 자고 가도 괜찮아요."
"......"
부모님한테 어떻게 이야기할지 생각해뒀니라고 물어볼까 했지만, 난 그 질문을 집어넣았다. 어차피 그 질문은 피하기 위한 질문이니까.
"안나. 정말 괜찮아?"
"프로듀서씨라면."
나라면...
"엄마랑 아빠... 내일 오후에 올 거에요."
"안나..."
"응?"
"......"
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걸 보고 나서야 안나는 안심한 듯이 웃어보였다. 세팅했던 걸 정리하고, 안나는 이도 닦고 세수도 할 겸 해서 화장실로 갔다. 바닥에 누워서 천장을 좀 바라보던 순간,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려왔다.
안나가 나랑 있어서 기쁘다고 해줬다. 지금 내 기분을 말로 정리할 수 있을까. 없지. 당연히 없다. 안나는 날 믿어주고 있었다. 나보다도 더욱. 나는 나를 못 믿는데 말이지. 안나의 앞에만 있으면 너무 작아진다.
"저, 프로듀서씨도... 이 닦을래?"
"으, 응."
나는 이를 닦으러 갔다. 나나 안나나 씻지는 못했다. 씻긴 뭘 씻어. 어떻게 씻는다고. 이 닦고 세수나 하고 마는 거지. 면도는 내일 사무실에 가서 해야지. 이를 닦고 오니 안나는 이미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저, 프로듀서씨..."
"응?"
"어... 음..."
안나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자신이 누운 침대 옆 부분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고 있었다. 같이 자자니...
"안 돼."
"프로듀서씬, 안나랑 같이 자는 거... 싫어...?"
"내가 이상한 짓이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 그래도오..."
"......"
결국 나는 안나 곁에 가서 누웠다. 침대 옆의 벽에는 이런저런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안나가 곁에 두고 사용하며 생활의 일부가 모든 것이 나에게도 보여지고 공유된다. 안나가 매일 자는 침대는 이런 느낌이구나, 안나가 덮는 이불은 이런 느낌이구나, 안나가 이런 느낌이구나...
그리고, 지금까지 애써 맡아보려 하지 않았던 안나의 냄새가, 더 진하게 강해져서 내 곁을 맴돌기 시작했다. 내가 피하지 못하도록. 안나의 모든 형상과 향취와 촉감이 너무나도 생생하고 적나라하게 스며들어온다. 정말 괜찮은 걸까.
두 사람이 같이 누워있기엔 침대가 좁아서 잘못하면 내 몸이 안나랑 맞닿아버릴것만 같다.
"안나."
"......"
"자...?"
"......"
안나는 피곤했던 건지 금세 잠들어버렸다. 고개를 돌려서 안나의 자는 모습을 보고, 내 뇌리에 각인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서 나는 하염없이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그랬다간 잠이 완전히 달아날 것 같았다.
불이 꺼진 방 안 천장은 검은 색이었다. 내가 눈을 감고 있어도 똑같은 검은 색이 보였다. 눈꺼풀 어떻게든 정신이 멍해질 때 까지 내리잡아도 눈 앞에 보이는 건 여전히 검은 색이었다.
"후암..."
눈이 뜨였을 땐 제법 밖이 밝아와 있었다. 하늘은 검은 색에서 진한 검푸른색이 되어 있었다. 난 아무 일도 없이 나는 안나의 모든 것에 감싸인 채로 잠에 들었던 것이다. 다행인 걸까.
아니라는 생각이 머릿속 가득히 차올랐다. 갑자기 내가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는 나쁜 사람인 것만 같아서. 안나에게는 흑심만 가득 품고 있으면서 방어기제로 그걸 숨기고 가만히 있던 것만 같다.
여기 있어서는 안 될 것 같다. 당장 여기서 빠져나가야만 할 것 같다. 내가 안나같은 빛나는 아이와 어울리는 사람인가는 둘째치더라도, 지금은 나랑 함꼐 있을 때 안나가 행복할지 몰라도, 앞으로도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하면 아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서고, 내가 일어서느라 난장판이 된 이불을 다시 고스란히 정리해서 안나에게 덮어줬다.
"가지 마...요..."
그 순간, 안나가 날 잡아왔다.
"안나 곁에... 있어 줘요..."
"안나, 일어났어?"
"으으응... 가지 마요..."
"안나아..."
안나는 날 도망가지 못하게 막는다. 도망가지 못하게...
난 도망치려 했어. 난 정말 도망갈 생각만 하고,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질책에 정작 당사자는 돌아보지도 않는, 그런 이기적인 사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내가 안나의 성실한 애인이 될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안 갈게..."
"프로듀서씨이..."
나는 다시 이불에 들어가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1 프로듀서는 지각했나요?
1~50 아뇨
51~100 예
+2 프로듀서가 안나네 집에서 자고 온 걸 들켰나요?
1 미사키 코토리 포함 54명
2~33 0명
34~66 1명에게
69~99 2명에게
100 미사키 코토리에 타카기 사장까지 포함한 55명
그렇게 안나랑 나는 아침까지 잘 잤다. 푹 자니까 뭔가 더 나아진 느낌이 드는 것 같진 않지만... 도망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았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그래. 낫다는 느낌이 아니다. 확실히 더 낫다.
안나랑 나는 같이 극장에 출근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아, 안녕~"
"프로듀서! 굿 모닝이에요!"
"......"
다들 날 반갑게 맞이해줬다. 어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들 날 반갑게 맞이해줬지만... 유리코는 아니었다. 유리코는 뭔가 날 보면서 얼굴을 게슴츠레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다. 들켰다. 난 망했다.
이대로 타카기 사장님이랑 코토리씨랑 미사키씨한테 소문이 다 나서 얼마 안가선 저잣거리에서 내가 얼굴을 들 때마다 '어머어머 저 사람이 담당 아이돌한테 손을 댔대요!' 소리가 들리겠지.
온 언론에 내 얼굴이 다 대서특필 되고 말 거야! '속보 N모 사무소의 프로듀서가 아이돌과 부적절한 관계 가져' 소리가 나고 말겠지. 나는 안나랑 그저 하룻밤 잔 것 밖에 없지만!
사내에 있는 모든 아이돌들한테도 경멸당하고 말 거야! 로코는 안 그럴 거라고 믿지만! 다른 아이들은 모두 날 경멸하고 말 거야!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가 있지? 하면서!
후우. 침착하자. 왜 망상을 시작해. 내가 유리코냐.
"저, 유리코?"
"히익!?"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아, 아니에요. 오, 오히려 좋은 일일지도 모를...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 오히려 좋다니.
"...유리코씨?"
"아, 에, 아, 안나쨩?"
"프로듀서씨가... 유리코씨랑... 뭔가 이야기가 하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아, 그, 으으으으..."
"유리코. 잠깐만 사무실로 와 줄래?"
"네에..."
유리코는 고개를 숙인 채 사무실로 따라왔다.
"그, 유리코."
"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언제 알았어?"
"언제 알았냐뇨!?"
"......"
"아, 그, 그게... 뭘 알았냐고 묻는 건가요?"
"안나랑 나랑 같은 방에서..."
"...히익! 지, 진짜였어요!?"
"알고 싶으면 안나한테 물어봐."
"그, 에, 그, 프로듀서씨랑 안나쨩이랑 같이 들어왔고... 그리고... 안나쨩이 요새 프로듀서씨 이야기를 엄청 많이 했단 말이에요? 저랑 같이 있거나 게임 할 때도? 그, 그런데, 오늘 아침 프로듀서씨랑 안나쨩이랑 같이 출근했고, 안나쨩은 무지무지 기뻐 보이고... 또... 그... 아... 으..."
"말 그대로에요. 그, 빛나 보이는 표정이 있어요. 안나쨩이 염원하던 레어 무기의 재료를 얻거나, 로코쨩이 로코 아트를 완성할 때 보여주는 그런 표정 말이에요. 프로듀서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그, 그 표정이 너무 빛나 보이고 행복해 보이고... 그... 뭔가 저도 거기에 홀릴 것 같아서, 프로듀서씨에게 저도 모르게 막 빠져버리고 말 것 같고... 그..."
"결국 행동이랑 표정만 보고도 알았다는 거구나."
책 많이 읽어서 관찰력이 좋은 건가?
"그, 그렇지만! 그, 정말로! 정말로 행복해보이는 표정이었다니까요!? 둘이서 어떤 일을 했길래 이렇게나 서로 행복해보일까! 어떤 일을 했길래!? 서로 같은 곳에서 함께 있으면!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들끓는 애인끼리! 서로 손도 잡고! 입맞춤도 하고! 그리고. 그리고오... 그...!"
"유리코씨... 거기까지 해..."
"히이이이익! 안나쨩! 거기 있었어?!"
"다.. 듣고 있었어..."
"아! 안나쨩! 그, 그런 게 아니라! 내 말은...!"
"그리고... 유리코씨... 프로듀서씨의 웃는 모습이 너무 환해서 빠져버릴 것 같다고 했지...?"
"아! 그, 그건! 그!"
"사랑하는 건 자유니까... 유리코씨 보고... 그런 생각을 가지지 말란 말은... 안 할거야..."
세리카는 갔고, 이제 방에 있는 사람이라곤 나랑 로코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로코도 나도 모르는 듯 해서 나는 로코의 이름을 불렀고 로코도 나의 이름을 불렀다. 로코는 조각칼에서 손을 놨지만,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나는 로코가 못 보게 고개를 숙인 채로 로코의 이름을 속으로 말해본다. 로코. 로코. 로코...
"뭔가 로코에게 머스트 스피크 해야만 하는 이슈가 있는 거에요?"
말해야만 하는 것? 있다. 당연히 있고 말고. 아니. 사실 없을지도 모르지. 아니, 모르지가 아니라 그냥 없었다. 모르겠다. 로코는 어제 그냥 쿨하게 넘겨줬지만, 난 여기서 등을 보이기엔 내 마음은 너무나도 로코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말해야만 하는 무언가가 없는지 있는지에 대댭해야 할까. 나는 그냥 로코랑 함께 있고 싶을 뿐인데. 그게 다인데. 그냥 지금은 둘이서만 같이 있고 싶다는 한 마디에 로코는 괜찮다고 해 줄까.
"나도 잘 모르겠네. 그냥 지금은 둘이서만 있고 싶었어."
"프로듀서..."
"로코."
내가 안나에게 가진 마음이 각별하다고 해서,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할 만큼 안나를 소중히 여긴다고 해서, 로코에게 가진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커졌으면 커졌겠지. 난 안나랑 로코가 둘 다 좋다.
나라는 인간은 얼마나 이기적인지. 로코는 얼마나 꾸욱 참고 안나에게 나를 양보해줬을텐데. 그런데, 안나와 로코와 내가 셋이서 함께 있다면 서로가 모두 행복할 거란 생각이 든다.
삼각관계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닌데도. 삼각관계가 보통 한 사람을 나머지 두 사람이 좋아해서 생기는 것임을 알면서도. 나는 둘 모두가 좋다. 둘 모두를 원한다. 내가 안나와 로코 모두를 위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로코."
"......"
"I love you."
"...엣?"
나는 아무런 샐각도, 지체도 없이 로코에게 내 마음을 내뱉었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말 중에서 최선일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무선 말부터 하고 이렇게 말하면 로코가 내 마음을 알아줄 거라고 믿고 있을 뿐이다.
"프로듀서...?"
"로코."
"...지금 와서 갑자기 로코를 러브한다고요?"
"방금 말했듯이, 아이 러브 유."
"......"
로코는 아무 말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좋아해. 로코. 좋아해."
"프로듀서어..."
"그냥. 그 말이 하고 싶었어. 그게 다야. 그 말만 들어줬으면 했어."
나는 옳은 말을 한 걸까. 그러한 의문이 드는 시점에서 긍정적인 대답은 나오지 않을 것만 같다.
나의 눈은 로코만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로코의 눈동자는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199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그냥... 그냥 안나가 좋다.
리암 갤러거는 자기가 싫어하는 것 10가지를 대라고 할 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싫다.' 딱 한마디만 하고 아무 말도 없이 있다가 잠시 후에 말 한마디를 더 이어나갔다. '그냥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10번 싫다.'
나도 비슷한 심정이다. 그냥 안나가 10번 좋다.
안나가 왜 좋나고? 이유를 찾고싶진 않다. 굳이 있다면 내 신체에서 발생하는 전기신호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런 식으로만 안나가 좋은 것에 대한 이유를 댄다면 나의 심장은 만족하지 못한다.
낙엽이 왜 떨어지는지 묻는 것에 겨울이 와서도 아니고 겨우내 내리는 눈과 함께 땅에 양분이 되기 위해서도 아닌 그냥 중력 때문이라고만 한정해버린다면 내 심장이 만족하지 못하듯이.
그래. 숨을 들이쉬고 내뱉은 뒤 다시한번 중얼거려본다. 나는 안나가 정말 좋다."
"...왜 그걸 로코 앞에서 스피킹하는 거죠."
"여기 안나가 없어서."
"바로 옆 방에 있잖아요. 안나 본인에게 가서 스피킹해주세요."
"그렇지만 무서워!!!"
"스케어리하다니요?"
"로코! 너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에 있어서 능숙해! 현학적인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다른 사람이 들으면 고개를 저을법한 내용도 그냥 다 일일이 듣고 답을 해주잖아! 우와아아앙!!!! 로코 착해!!!! 역시 예술가야!!!! 고져스한 스피릿의 소유자야!!!! 로코 좋아아아아!!!!!"
"그렇게... 뜬금없이 그렇게 로코를 칭찬해도..."
"그렇지만 안나가 좋아..."
"안나랑 함께 프렌드로 지내보고 띵킹한 건데, 안나는 다른 누군가가 필사적으로 하는 말을 듣지 않을 매정한 퍼슨이 아니에요. 스피킹하는 사람이 프로듀서라면 더더욱."
"그건 문제가 아니야... 안나는 좋은 아이야! 내가 아까 한 말처럼 오글거리는 말을 해도 다 들어줄거야! 하지만... 내가 무서운게 문제야..."
"으으음... 프로듀서. 피어를 극복할 방법을 띵킹 안해본 건 아니잖아요."
"응. 로코 너랑 이야기하는 것도 그 방법 중 하나고."
"안나가 아닌 아더 퍼슨이랑 이야기하면서 안나랑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피어를 디크리즈한다는 거군요."
"응. 그런데 그걸론 안 되는 것 같아서."
"로코가 헬프해드릴까요?"
"응!!!"
"베리 굿이에요! 그러면 프로듀서..."
프로듀서의 피어 극복을 위한 로코의 솔루션
+2
"다른 사람이랑 이야기하는 걸로 부족하다면 다른 사람도 안나와 함께 있으면 된다?"
"오브코스에요! 이번 경우엔 다른 사람이 로코고요!"
"으음... 알았어."
나는 로코와 함께 안나가 있는 방으로 갔다.
"아. 안녕하세요... 프로듀서씨."
"안녕. 안나."
"...로코한테는 인사 안 해주는 건가요."
"...거기 있었어?"
"안나! 너무해요!"
"푸훗..."
안나는 로코를 놀려먹으면서 살짝 웃었다. 흑흑. 너무 고귀한 웃음이다. 아직 대회는 시작도 안했건만 내가 그대로 녹아서 대화를 못할 위기에 처해버린 것 같다.
"저... 로코. 어제... 안나가 아이템 선물 준거... 봤어?"
"아이템이요?"
"......"
"아, 그... 아 그게! 리멤버했어요! 소드 오브 에볼루션...? 아무튼 그거랑..."
"그건... 저번주에 준 거잖아..."
"쏘리에요! 어제는 로코 아트에 컨센트레이션한다고 컴퓨터를 안 켰어요!"
"...게임이 귀찮은 거야?"
"노에요! 하지만 로코 아트는 삘이 왔을 때 컴플리트 하고 싶어서..."
"으으... 오늘은 와 줄거지?"
"아, 네!"
"그리고 어제 말이야... 내가 유리코씨의 서포트 없이... 혼자서 마수의 제왕 던전 중심부에 있는 보스를 잡으러 갔는데..."
...그 후로 안나랑 로코는 둘이서 같이 하던 게임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모르는 게임이었다.
"역시 안나는 프로페셔널이네요... 그리고. 아!"
"......"
이제야 이쪽을 보는구나. 로코는 게임 이야기를 주구장창 하다가 겨우 여기 온 목적을 떠올린건지 나를 바라보고 겸연쩍은 듯이 웃어보였다. 하지만 괜찮다. 그만큼 안나가 매력적이라는 거지.
"아! 맞다! 프로듀서!"
+3까지 로코가 프로듀서에게 이야기할 토픽을 정해주세요!
"안나 생일? 음..."
"로코의 생일날엔 그레이트한 프레젠트를 줬잖아요!"
"로코... 프로듀서씨가 준 근사한 선물이라고 해도..."
"으음! 프로듀서씨가 준 건 단순한 피죤 모양 스태츄가 아니에요! 그 스태츄는 프로듀서가 로코 아트에 대한 언더스탠드가 뛰어나다는 것을프루브하는 거에요!"
"그렇지. 그래서 안나 생일때도 좋아하는 걸 주고 싶어서. 혹시 받고 싶은 선물 같은 거 있어?"
"선물..."
선물이란 말을 듣고 안나는 후드를 머리에 쓰고 고개를 숙인 뒤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로코는 안나가 고개를 숙인 틈을 타서 날 힘껏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말을 하라고. 그치만... 역시 어려웠다.
"으음... 안나는... 갑자기 선물 같은걸 생각해보라고 해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프로듀서씨랑 같이 있는 시간이 더 있으면 좋겠다고 해야 할까..."
"......"
"저, 프로듀서?"
"...안나, 저 그게. 그, 있잖아."
"프로듀서씨...?"
"그, 어라... 그 그게... 그게 말이야..."
"에휴."
내가 버벅이는걸 보자 로코는 한숨을 쉬었다.
"안나. 프로듀서는 안나를 러브하는 거에요."
"앗... 로코! 잠깐만...!"
"......"
"안나는 프로듀서를 좋아하나요?"
"응."
...아주 약간의 뜸도 들이지 않고 안나의 대답이 너무 빨리 나왔다.
"프로듀서씨... 안나가 프로듀서씨를 싫어했다면... 이렇게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았을 거에요..."
후드 너머의 안나는 웃고 있었다. 날 보면서 안나는 웃어주었다.
"...그리고 사실, 프로듀서씨가 안나를 좋아한다는 거... 안나... 알고 있었어요..."
"...엣?"
"프로듀서씨가... 아까 전에 옆 방에서 로코랑 한 이야기... 다 들렸어요..."
"...전부 다?"
안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세살에. 흑역사를 실시간으로 낭독하고 있었어! 난 망했어! 으흑흑흑!
"부탁이야! 그건 잊어줘!"
"저... 프로듀서씨... 나름 유리코씨 같아서... 뭔가 안나는 하기 어려운 말도 잘 쓰고... 멋진 고백이라 생각헀어요..."
"으아아아!"
나는 당장 그 자리를 도망쳐나왔다.
"있잖아요. 안나는 프로듀서가 안나를 러브한단걸 알고 있었어요?"
"응..."
"있잖아요. 프로듀서는 안나한테 프로포즈하는게 스케어리하다고 했어요."
"...들었어. 안나도... 사실은 마찬가지야... 지금도 심장이 막 뛰어서 이상해질 것 같아..."
"저, 프로듀서가 런어웨이 해버렸잖아요. 안나. 만약 원 아워 레이터... 아니. 투모로우에라도 프로듀서를 다시 만난다면 아까처럼 프로듀서를 러브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무리야. 지금 이렇게 있는 것도 벅찬걸... 안나도 겨우 용기를 낸 건데... 프로듀서씨는 도망쳐버려서..."
"으으으음."
"그리고... 로코도 프로듀서씨를... 좋아하잖아."
"그건 그렇지만... 로코는 프로듀서 곁에 늘 붙어있어서 러브에 대한 갈증이 좀 덜하거든요. 안나는 프로듀서랑 별로 같이 있지 못했잖아요. 새드에요. 로코는 프로듀서도 안나도 좋아요."
"...안나도."
"그냥 둘 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베리 해피하지만, 그래도 안나나 프로듀서나 둘 다 더 해피해질 수 있다면 로코도 더 해피하고 좋을텐데..."
"로코..."
"네."
"프로듀서씨... 그래도 조금 있다가 다시 돌아오겠지?"
+2까지 주사위값이 75 이하일시 프로듀서는 퇴근헀습니다
"프로듀서..."
"어... 로코? 아직 안 갔어?"
"프로듀서를 웨이팅하고 있었어요."
"안나는?"
"...안나는 지금 슬리핑중이에요."
로코의 말대로 안나는 후드를 푹 뒤집어쓴채 소파에 눈을 감고 누워있었다.
"프로듀서씨가 안나에게 아무 앤서도 없이 그냥 나가니까... 안나가 베리 새드해했어요. 안나도 겨우 용기를 냈다고 했는데..."
"......"
"프로듀서의 펄트는 아니에요. 안나도 프로듀서만큼이나 스케어리하다고 말했고요. 하지만... 안나는... 하트에 조금은 스크래치가 났을 거에요."
로코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로코는 안나도 프로듀서도 모두 해피하면 좋겠어요. 안나는 로코의 둘도 없는 프렌드고, 프로듀서는 로코의 둘도 없는 러버에요. 그래서 로코는 둘 다 해피하면 좋겠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그렇지만... 지금은 프로듀서도 안나도 해피하지 못한걸요."
"...미안해."
"로코는 괜찮아요. 쏘리라는 말은 안나를 위해 아껴주세요."
"그렇지. 안나한테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데."
"저. 프로듀서, 프로듀서도 안나한테 꼭 전하고 싶은 썸띵이 있을 게 아니에요.:
"응."
"...안나가 슬리핑 하는 틈에라도 안나에게 전해주세요. 안 그러면 로코는... 속상할 거에요."
"...하아. 안나. 좋아해... 엄청 좋아해... 무진장 좋아해... 미안해."
안나는 아직도 눈을 감은 채 조용한 숨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내가 안나한테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다니.
"뭔가 더 할 말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생각이 안 나."
"이정도면 오케이에요. 프로듀서의 필링이 충분이 느껴졌어요."
"안나한테는 진심으로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어. 그런데, 그게 어렵더라. 내 진심이 겨우 이정도라는 생각이 들면. 안나에게 보여주기에는 너무 모자란 것이 아닌가 싶어서..."
"안나도 프로듀서를 러브한다고 했는데. 프로듀서가 할 수 있는 베스트를 다한다면 괜찮은 거 아닐까요."
"...나는 아니야. 내가 가진 것을 다 주는걸론 부족해.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그 이상의 것을 주고 싶어. 안나니까."
"으음... 그래요. 언더스탠더블이에요."
"하아... 로코. 미안. 이런 식으로라도 털어놓으면 더 나아질 줄 알았는데... 괜히 너한테만 징징댄것 같네."
"아까 전에 말했잖아요? 프로듀서는 로코의 러버라고. 프로듀서라면 얼마든지 오케이인걸요."
"그렇지만... 오늘은 더이상 이야기할 기분이 아니야. 그래도 고마워. 그럼 오늘은 이만 남은 일 마저 하러 갈게."
"네에. 프로듀서. 너무 새드해하지 말아요. 다 잘 될거에요."
"그래. 땡쓰에요. 로코씨."
"...안나. 들었죠?"
"프로듀서씨..."
"프로듀서씨도 그냥 스케어리할 뿐이에요."
"...알고 있었어."
"안나..."
"그래서... 속상해."
"안나. 그래도 댓츠 오케이에요. 하트비트는 바디 안에 가둘 수 없거든요."
"음... 로코는, 먼저 프로듀서씨한테... 고백헀었지..."
"코렉트에요. 로코도 프로듀서에게 프로포즈하기 전까진 하트비트를 바디 안에 가두고만 있었는데. 프로듀서도 비슷한 심정이었을 거에요. 프로듀서라면 하트비트가 프리해지면 훨씬 해피하단 것도 알 거에요."
"...하아."
아무래도 오늘 안에 이걸 끝내긴 글렀다. 아니. 평소대로라면 진작 끝냈겠지만, 그냥 오늘은 끝내고 싶지가 않다. 무언가 붙들고 있는 것이라도 있어야지. 그저 나 혼자만 남게되면 너무 우울한 기분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소파에서 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안나가 누웠던 자리에서 나도 누워본다. 내 손바닥을 두 눈 앞에 대서 형광등을 꺼본다. 그렇게 형광등을 끄고 나는 잠에 들었다.
프로듀서는 야근을 하다 뻗었습니다. 다음 날 먼저 프로듀서를 깨우러 갈 사람은?
1~50:로코
50~99:미사키씨
100:일을 하는 도중이 아님에도 프로듀서를 위해 온 스위치를 각성한 안나
+1
"으으응..."
"설마 밤 샜나요?"
"아으... 꺠우지ㅁ... 아."
잠에 취해서 빈둥빈둥거리다가 여기가 순간 사무실이라는 것을 잊고 말았다. 눈 앞에 보이는 미사키씨는 날 측은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동정이 경멸이나 무시보다 더 마음 아프게 느껴질 때가 있다. 바로 이런 때다.
앗. 아아. 그, 안녕하세요."
"있잖아요. 저만으로는 일손이 좀 부족할 수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래도 무리하는 건 안 좋다고 생각해요."
"아... 아하하. 그런 건 아니고요. 신경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아까 잠꼬대한 건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이런 세상에. 내가 미쳤지. 사무실에 있으니 괜찮겠지 싶어서 누운 놈이 설정했던 알람도 못 듣고 그대로 퍼질러 자다니. 나는 황급히 화장실로 가서 세수부터 했다.
시즈카나 모모코같이 똑부러진 애들이 내가 못미더운 모습을 보일때 틱틱대고 뭐라고 하는 건 괜찮았지만 안나나 로코가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측은해하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러고보니 어제 면도를 안 했던가? 세수를 하고 나니까 면도를 이틀 좀 걸렀다고 수염이 스리슬쩍 자라기 시작한게 눈에 밟혔다. 망했다. 오늘 이런 꼴로 밖에 나가면 765의 프로듀서놈은 면도도 안하고 다니는 놈이라고 모두가 수근댈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점심시간때 일회용 면도기랑 면도크림을 사서 사무실에 좀 놔둬야겠다. 오늘 쓸 것도 있지만, 다음에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으니까.
화장실을 나서기 전에 나는 잠시 문 앞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일을 하러 갈 마음의 준배를 했다. 일단 지금 난 엄연히 출근한 거니까.
"돌리랑 도트가 제일 좋아~ 돌리랑 도트가 제일 좋아~"
그리고 나오자마자 로비 한가운데에서 레이카가 기묘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 프로듀서씨! 안녕하세요!
"안녕. 레이카."
"어제 잠을 잘 못잤어요?"
"...응? 아. 어."
"뭔가 되게 피곤해 보이는 눈치거든요. 로코쨩한테 좀 전해줄까요? 프로듀서씨가 피곤해보이니까 뭔가 피로회복에 도움되는 로코 아트가 있으면 좋을것 같다고!"
"...로코 아트는 자양강장제가 아니야."
"피로회복에 도움이 되는 로코 아트가 아니라면 혈액순환에 도움이 되는 로코 아트는 어떤가요?"
"로코 아트는 건강식품이 아니야."
"아깝네요~ 피곤할 때 유용하게 쓰고 싶었는데~ 뿌뿌~"
좀 피곤하긴 했지만... 그래도 레이카랑 이런저런 대화를 하니까 약간 마음이 편해진 것 같다. 그래. 어디보자. 오늘 가장 일찍 잡힌 스케줄은...
스케줄과 아이돌을 써주세요!
+2
"이게 뭐야, 15금 소설 낭독ㅎ... 뭐?"
유리코는 워낙 소설을 좋아하기도 하고, 그만큼 소설에 대해 아는 것도 꽤 있으니 유리코라면 정확한 평론이 가능할 것 같다는 것일까. 유리코에게 한 소설의 낭독회를 하고 나서 어떤 점이 좋은지 설명도 하고 추천도 해주면 좋을 것 같다는 오퍼가 왔다.
"오오! 리사! 당신의 숨결은 마치 꽃밭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향기와도 같소..."
"아앗... 다니엘... 어찌 그런 낯부끄러운 말을..."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유리코. 안녕."
"아아아! 다니엘! 저를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리사! 나는 그대를 세상 그 누구모다 사모하고 있소!
"...유리코?"
"오오... 다니엘... 그대를 향한 나의 마음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어요. 어서! 제 손을 잡아주세요!"
"아아... 리사! 아름다운 나만의 리사!"
"유리코!"
"아아아! 다니에... 우오아아ㅏ아아1!!! 프로듀서씨!!!!!"
참 빨리도 눈치챈다.
"있다면 있다고 말해주세요!!!"
"아까 전부터 말했는데."
"으으으으..."
유리코는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를 번갈아 내며 아주 낭독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괜찮아. 그만큼 책이 재미있다는 거지?"
"아... 네..."
"다행이네. 사실 오늘 아침 10시가 낭독회라서. 이정도나 몰입하고 있으면 잘 할거야."
"에, 벌써요!? 안 돼요!"
"어, 왜?"
"낭독할 부분을 아직 못 정했단 말이에요! 좋은 부분이 너무 많다고요!"
"그... 그랬구나..."
"으으음...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
유리코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이 홀로 중얼거렸다.
"그럼 이제 슬슬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으으음... 네에."
그렇게 유리코는 차에 탔지만, 차 안에서도 결정을 못 한건지 골똘히 고민하는 표정을 짓다가 차에서 내릴 적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 하늘을 바라봤다. 낭독회 장소에 가서 서로 인사하고, 작가분과 인사도 나누고, 그리고 낭독회는 무사히 시작되나 했다.
"오오! 리사! 당신의 숨결은 마치 꽃밭에서 흘러나오는 감미로운 향기와도 같소..."
이런 세상에. 아까 사무소에서 연습하던 그 부분이잖아. 그 부분... 어우, 저걸 두번씩이나 듣고 있다. 유리코는 아까도 그랬듯이 책을 읽다보니 점점 더 몰입하기 시작했다.
낭독회는 점점 더 점입가경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리사의 손길은 다니엘의 얼굴을 부드럽고 천천히 훑었다! 다니엘의 거친 맥박이 서로 맞닿은 피부를 통해 리사의 손으로 이어졌다!"
"리사! 그대는 지금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소! 나의 충동이 당장 내 몸 밖을 빠져나오려고 해서 더는 못 견딜 것만 같소!"
"다니엘! 얼마든지! 당신이 펼쳐내고 싶은 모든 것을! 나에게 쏟아부어주세요!"
"아아아아!!! 다니엘은 리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리사의 입에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다니엘의 혀가 리사의 혀를 얽어왔다! 다니엘의 불타오르는 숨결이 리사의 뺨을 타고 올라갈 적, 리사는 다니엘의 숨결이 멈춘 눈동자에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서로의 혀는 더 깊이 얽혀들어가..."
"......"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다니엘은 떠나는 리사를 보며 울부짖었다."
"리사... 리사!!!"
혼돈의 낭독회를 끝내고 나자 유리코는 나를 잠시 쳐다보고는 눈을 바로 휙 돌렸다.
"...여기까지입니다."
유리코는 얼굴이 아주 하루카의 리본색만큼이나 벌개져서 사회자분께 마이크를 넘기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악! 낭독회는 끝났지만 이젠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나는 다시 한번 작가분을 찾아갔다.
"아, 하하하... 낭독회가 어땠나요."
"저... 하아. 그게 말이죠."
"......"
"굉장히...! 굉장히 만족스럽습니다! 나나오 유리코씨! 굉장히 연기를 잘하더라고요!"
에?
"저, 정말로요!?"
"네! 제 글의 감정선을 이렇게나 잘 살릴 줄은 몰랐습니다! 아이돌이라고 해서 그렇게 큰 기대는 안 했는데!"
...어떻게 호평을 얻은 거지? 문학도끼리는 무엇인가 저런 극한의 감정에 대한 공감대가 있는 걸까? 으음. 나도 어제 안나한테 오그리토그리 하는 말을 잘도 한 걸 보면 그렇게 다른 과는 아닌것 같기도 하고.
"어, 프로듀서씨, 여기 계셨...우와아아!!! 글 굉장히 잘 읽었어요!"
"아하하하! 저야말로요! 연기를 그렇게 잘 해주실줄은 몰랐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니요! 오히려 제가 감사해야죠! 근래에 읽은 소설 중에서 이렇게나 가슴뛰는 소설은 찾기 힘들었는데..."
으으음. 어쨌든 잘됐다! 아주 잘됐어! 와! 퍼펙트 커뮤니케이션!
나는 약간의 데미지를 입은 듯한 기분이지만 아무튼 괜찮다.
데미지를 입은 프로듀서가 사무실로 돌아와서 멍하니 있을 적 만날 사람은?
+2
세상에나! 뜬금없이 시즈카였습니다!
예를 들면 코토하가 드라마 촬영을 가서 '연기를 어떻게 할지 애매한 부분이 있는데 어쩌죠?' 했을 때 세 가지 선택지가 나오는데 이 중에서 독단으로 처리하자거나 잠시 쉬자는 선택지 대신 '감독님께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한번 물어보자' 하는 선택지를 고르고 나면 퍼펙트 커뮤가 일어나는 식으로요.
그리고 이 창댓은 샤니가 아니고 밀리 창댓입니다. 밀리에서는 사무소 내의 일 뿐만이 아니라 외적인 일에 있어서도 퍼펙트 커뮤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전 밀리 인게임에서 보고 들은 것을 베이스로 해서 창댓을 쓰는 중이고요.
"원, 투, 쓰리, 포. 원, 투, 쓰리, 포."
사무실로 돌아오니 츠무기가 사무실에 내가 온 것을 눈치 못챘는지 혼자서 열심히 댄스 연습을 하고 있었다. 장하다. 넌 시어터의 자존심이야!
"원, 투 쓰리, 포, 원, 투..."
"안녕. 츠무기."
"쓰리... 우왓!? 프로듀서!? 있다면 인기척을 내 주세요!"
...유리코도 그렇고. 내가 그렇게 존재감이 없나?
"혼자서 춤 연습하고 있었어?"
"그, 그래요. 춤 연습하고 있었어요. 딱히 혼자서 들떠있었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혼자서 연습하다가 되게 삘받았구나.
"어, 프로듀서. 수염 안 깎았어요?"
"...수염 난 거 보여?"
"아주 똑똑히요."
"하하하..."
"정말! 아무리 바쁘다고는 해도 자기관리를 안 하다니! 당신은 저를 이끌어주는 사람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하는게 아닌가요?"
"하하. 관리 못해서 미안해. 사실은 어제 야근한다고 집을 못가고 사무실에서 잤거든."
"엣?"
"응. 그래서 수염을 못 깎았어."
"아... 그..."
츠무기가 내 사정을 듣고 뻘쭘해진건지 잠시동안 말이 없어졌다. 물론 순전히 일 때문만은 아니고... 그냥 개인적인 문제가 더 컸지만 그냥 이렇게만 말하고 마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다.
"저, 정말.... 그래도 자기 관리는 해야죠..."
"나도 그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프로듀서..."
츠무기는 수염이 난 내 얼굴을 바라모며 잠시 한숨을 쉬었다.
"하아. 프로듀서. 저... 아니, 저희를 위해서 무엇이든 열심히 해주시는건 기뻐요. 그런데, 프로듀서. 가끔씩 당신이 무심한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제가 말했죠?"
"응."
"프로듀서가 자기 모습도 신경쓰지 못할 만큼 바빠서 이런 몰골이 된 걸 보면 저도 속상한데, 프로듀서를 마음에 둔 다른 아이들이 얼마나 속상해할지는 생각해봤나요."
"......"
"전 제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재주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안나씨랑 로코씨는 당신이 바빠서 수염도 못 깎고 다닌다는 말을 들으면 분명 속상해할거에요."
"그렇겠지..."
"이럴 땐 저희를 위하는 것 보다는, 그냥 스스로를 위하는게 저희는 더 기쁠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 고마워."
그래. 이렇게 된 이상 당장 면도기랑 면도 크림을 사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바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 프로듀서. 어디 가나요?"
"뭐하긴. 수염 깎아야 하는데 면도기가 없잖아. 면도기 사러 가야지."
"...기껏 제 진심을 담아 말했는데 당신은 그런 피상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이기인가요."
"그리고 올 때 안미츠도 사올게."
"아... 정말! 당신이란 사람은!"
좋은 조언을 받았으니 그 값을 줘야지. 츠무기가 아주 좋아하는 곳에서 안미츠 하나 포장해서 냉장고에 둬야겠다.
프로듀서가 면도기와 안미츠를 사러 간 동안 생긴 일은?
내일 퀴즈가 있으므로 퀴즈 끝날때까지 찬 앵커만큼 반영하겠습니다.
이렇게 된거 근처에 있는 적당한 편의점에 가서 일회용 면도기랑 면도크림을 사오기로 했다. 내가 야근을 또 할지는 모르겠지만, 두고두고 요긴하게 쓸 일이 없었으면 참 좋겠다. 밤샘하고 사무소 화장실에서 면도라니. 으엑.
"후아아암..."
그렇게 사무실에서 아침까지 퍼질러잤는데도 왜 이리 피곤한 건지 눈꺼풀이 감겨왔다.
제멋대로 감겨오는 눈꺼풀을 어떻게든 들어올리려고 하며 난 도로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을 바라봤는데...
"......"
안나가 다른 남자랑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멀리 있어서 잘 보이지 않고, 가게가 조명을 꺼뒀는데 밖에 햇빛이 쨍쨍해서 가게 안이 잘 안보였지만, 실루엣으로 보이는 두 사람 중 한 명은 안나고 다른 사람이 남자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괜찮...지 않아! 괜찮지 않다고! 안나는 아이돌이니 평소에 조심해야 하니 뭐니 하는 문제를 떠나서 그냥 안나를 낯선 사람이랑 방치하는건 질색이다! 나는 서둘러 도로를 건너서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그래가지고 아빠가 계산을 다 했는데..."
"아... 응..."
"......"
"어? 아! 안녕하세요!"
"아? 아아아!!!"
아! 누군가 했더니 아버님이었구나. 가게 안이 잘 안보여가지고 못 알아봤다. 깜짝 놀랐네. 하긴, 안나가 수상한 사람이랑 신나게 이야기하지는 않겠지. 그렇게 친해진 유리코나 로코랑도 처음엔 다가가기 어려워했었지. 게임이란 공감대가 있어서 맨 처음 다가간 이후로 지금처럼 친해졌고.
"지나가는 길에 우리 딸이 있길래 가서 좀 뭐라도 좀 맥일라고 그랬죠."
"아. 하하하하. 그렇군요."
"전에는 수염이 이렇게 안 길었던 것 같은데... 혹시 수염은 기르시기로 한 건가요?"
"그게... 저, 어제 집을 못 가고 사무소에서 밤새 야근을 하느라 수염을 깎을 틈이 없었습니다."
"아..."
"......"
아버님이랑 안나는 똑 닮은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슬픈 눈빛. 유리코가 라디오 생방에서 자신을 실수로 릴리나이트라고 소개하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멘탈이 폭발해버리거나, 사무소의 다른 아이들이 쓰레기랑 로코아트를 착각하는 바람에 로코가 엉엉 울어버릴때 안나는 이런 눈빛을 지었다.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츠무기가 날더러 안나는 내가 이러는걸 알면 엄청 슬퍼할 거라고 했는데. 그런데 별 수 있나. 이게 현실인데. 소레가 겐지츠. 타다 소레다케.
아. 맞다. 츠무기 하니까 생각났네. 안미츠도 사가기로 했지.
"아... 아빠. 그럼... 안나, 이만 가볼게..."
"응. 잘 다녀와."
"다녀오겠습니다..."
"프로듀서씨! 고생이 많으십니다. 우리 안나가 얼마나 프로듀서씨를 입이 마르고 닳도록 칭찬하는지.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안나는 아버님을 향해서 연신 손을 흔들며 배웅해주었다.
"...프로듀서씨."
"응?"
"...안나 때문에, 밤 샜다는거... 진짜야...?"
"......"
"하아..."
안나는 뭔가 심경을 말로 표현하기 싫었던 건지, 한 손으론 내 손을 꼭 잡고, 다른 손으론 후드를 꾹 뒤집어쓴채 나를 따라 아무런 말도 없이 걸어가기만 했다.
"안나. 미안해."
"...미안한 건 안나에요."
"아니야. 걱정시키면 안 되는데... 아. 모르겠다. 안나. 나 지금 달달한 게 굉장히 먹고 싶은데. 지금 배불러?"
"아뇨..."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
"...팬케이크?"
"팬케이크? 좋지. 디저트 가게에. 팬케이크~ 팬팬팬케이크~ 카나의 15단 팬케이크~"
이렇게 쭉 경직되어있기도 뭐하니 카나 흉내를 내면서 노래를 불러보니 안나가 피식 웃어보였다.
"히힛..."
그러고보니 츠무기가 자주 찾던 디저트 가게가 이 근처에 있었지. 거기 가는게 좋겠다. 츠무기는 평소에 좀 맹해서 그렇지 디저트에 관해선 엄연한 미식가다. 특히 안미츠는 더더욱. 근처에 있는 디저트 가게는 한번쯤은 다 돌아봤겠지?
즉, 츠무기가 즐겨찾는 가게는 검증된 맛집이란 소리였다.
"안녕하세요~"
"안나. 팬케이크 먹는다고 했지? 그럼 5단 팬케이크 하나랑 민트초코 아이스크림 미디엄 사이즈로 하나 주세요."
"아. 저, 손님. 민트초코는 그저께부로 메뉴에서 제외됐어요."
"민트초코가... 없다고요?"
아. 민초. 민초의 한이여! 민트초코의 난이여! 쫓고 쫓기는게 민초의 생. 사는 것이 전쟁 민초의 희생 내 삶은 날개가 부러진 새... 아니야. 민트초코 아이스크림만 없을 수도 있지! 민트초코 라떼는 있을 거야!
"저... 그럼 민트초코 라떼는요?"
"아... 라떼도..."
방금전에 한 말 취소. 맛집같은 소리 하네. 민초도 없는 곳이 무슨 맛집이냐!? 민초단 동지인 세리카가 알면 분통을 터트릴 것이다!
"음. 그럼 5단 팬케이크 하나랑 바닐라 아이스크림 미디엄 사이즈로 하나 주세요."
"5단 팬케이크 하나랑 바닐라 아이스크림 하나 맞으시죠? 결제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무튼 그건 그거고 다 먹고 나면 츠무기 줄 안미츠나 하나 사가야지. 어디 보자. 안미츠가... 그냥 적당한 거... 어? 세일 중? 고급 안미츠가 웬일로 세일 중이었다. 그래도 비싼건 매한가지지만, 지금 아니면 언제 이런거 사보나?
츠무기가 엄청 좋아하겠지? 그리고 하나 더 사서 나랑 애들이랑 나눠먹어야겠다. 선착순으로. 물론 1순위는 이미 도착한 안나다.
+3까지 안나와 디저트를 먹으면서 할 대화를 정해주세요!
"주문하신 5단 팬케이크랑 바니라 아이스크림 나왔습니다~"
"예, 잘먹겠습니다."
"잘먹겠습니다..."
안나랑 나는 팬케이크를 하나씩 집어서 입에 넣었다.
...어우 달아.
아니, 이건 좀 많이 달다. 시럽이 달짝지근한게 아니라 그냥 걸쭉한 설탕물을 입에서 머금는 기분이다. 츠무기가 여기서 안미츠를 자주 먹을텐데. 츠무기는 좀 단 편이 취향인건가? 이 잘 닦으라고 그래야지. 안그럼 이 다썩겠다.
물론 츠무기한테 이 잘 닦으라고 그러면 '당신은 제가 이 닦는 것도 잊어버리고 살 만큼 칠칠치 못한 사람으로 보이는 건가요?' 하면서 성화를 내겠지만... 솔직히 그만큼 칠칠치 못한 사람인걸 어떡해.
아미랑 마미가 가끔 몰래 야금야금 츠무기가 사온 디저트를 훔쳐먹는데도 츠무기는 혼자 그 둘이 범인인 걸 모르고 있다. 심지어 미라이조차도 자기 디저트 빼앗아먹는 범인은 아는데 츠무기만 모른다.
그런데 걱정이 안 될리가.
"으음..."
안나는 저렇게 단 팬케이크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맛있게 오물거리고 있었다. 아 귀엽다. 귀여운데...
"저... 프로듀서씨... 맛 없어...?"
"아, 그건 아니고. 그냥... 시럽이 좀 많이 다네. 으, 민트초코 먹고 싶다."
민트초코가 좋은 이유가 바로 이점이다. 한가지 맛만 있으면 질리지. 그런데 민트초코는 시원한 민트가 초콜릿의 단맛을 환기해주니까 얼마나 좋아? 왜 피자나 치킨같은 기름진 음식과 콜라를 곁들여 먹을까? 그것은 그 둘의 기름진 맛과 콜라의 톡쏘는 맛의 대비 때문이다.
"민트초코? 으음... 말만 들어봤는데... 맛있어?"
"어? 응."
"안나도... 같이 먹을까...?"
"그래? 그럼 가는 길에 하나 사갈까?"
"으음... 응."
오예.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에 민트초코 라떼까지 사가야지. 안나한테만 디저트를 사주면 다들 삐질 테니까. 특히 로코가. 으음. 로코 하니까 갑자기 뭔가 생각나는 게 있는데...
"그러고보니까 갑자기 궁금한 게 있는데."
"어떤 거...?"
"유리코가 좋아 로코가 좋아?"
"유리코씨."
...생각치 못한 단호한 대답이다.
"왜?"
"유리코씨가 게임 더 잘해... 로코는 게임도 아티스틱하게 한다고 하면서... 이상한 짓만 해... 검사로 지능만 찍었어..."
아. 답답할만 하다. 힘법사도 아닌 지능검사는 처음 듣는데. 인텔리전스 테스트가 아닌 인텔리전스 소드맨...
"그리고... 로코는 치사해."
"치사하다니?"
"그... 맨날 로코아트 만든다고... 프로듀서씨 불러서 둘이서만 같이 있고... 치사해."
"아..."
미안...
"미안해."
"...괜찮아요. 안나는 알고 있는걸요. 안나가 프로듀서씨를 좋아하는 만큼... 프로듀서씨도... 안나를 좋아하잖아..."
"......"
갑자기 분위기가. 지금 입에 들어간 팬케이크보다 더 달달해졌다. 너무 달달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아니, 모르겠는게 아니라 그냥 아무런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이런 달콤함은 싫지 않으니까 함부로 삼키지 말고 당분간은 입안에 머금고 싶었다.
"...그리고 유리코씨는 안나한테 정말 여러가지를 알려줬어요. 유리코씨가 없었으면... 안나는 무지 힘들었을 거에요."
"그렇구나..."
"...가장 큰 이유는 로코보다는 유리코씨랑 더 일찍 친해져서지만."
뭐야. 그럼 선착순이었잖아. 그럼 유리코나 로코보다도 가장 먼저 안나를 만난 사람인 내가 자연스럽게 1등이겠군. 아싸. 신난다.
난 달디 단 시럽을 꼴깍 삼키고 바닐라 아이스크림도 맛있게 먹었다. 다 먹고 나서 세일중인 고-급 안미츠도 두 개 사갔고. 하나는 다같이 나눠먹을 거고 하나는 츠무기 것이다. 그리고! 다른 디저트 가게에 들러서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에 라떼까지도 사왔다!
사무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참으로 가볍게 느껴진다!
+2까지 사무소로 돌아간 프로듀서랑 안미츠를 나눠먹을 아이돌을 정해주세요! 다수도 괜찮습니다!
로코랑 츠무기는 제외입니다. 왜냐면 앵커에 언급이 없었어도 등장시킬 거였거든요.
그리고 오자마자 로코가 나를 반겨주었다. 새로운 로코 아트를 만드는 중이었는지 로코 아트를 옆에 둔 채로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온지 눈치를 못 챈것 같은데... 우선 난 츠무기가 먹을 몫의 안미츠를 냉장고에 넣어뒀다. 츠무기 것이라고 포스트잇을 붙여두고.
"안녕. 로코."
"아. 프로듀서. 로코는 노 프라블럼이에요!"
그리고 오자마자 로코가 나를 반겨주었다. 새로운 로코 아트를 만드는 중이었는지 로코 아트를 옆에 둔 채로 날 흘깃 바라보면서 인사를 했다. 으음. 로코 아트 만드는 로코는 고집불통인데.
"우와! 여기 맛있어보이는 안미츠가 있네! 먹으러 올 사람 어디 없나~"
"...프로듀서. 로코 아트에 대한 패션은 디저트에 굴하지 않아요."
"로코... 안 먹을 거야...?"
"으음..."
"안 먹을거면 내가 다 먹어야지."
"으으. 로코의 패션은 강해도, 스피릿은 아직 프로듀서의 템테이션을 이기지 못할 뿐이니까요!"
"와아~"
나는 안미츠랑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앞에 내려놓았다.
"...민트초코?"
로코는 민트초코를 탐탁찮은 듯이 쳐다봤다.
"민트초코는 노노에요."
"민트초코가 왜?"
"민트와 초코의 컴비네이션은 하모니가 아니에요. 디소넌스에요."
"민트초코가 불협화음이라니. 오히려 초콜릿의 단맛과 시원한 맛이 대비가 되기 때문에 좋은 건데."
"프로듀서. 디소넌스가 물론 어필 포인트로서의 역할이 있는 건 맞아요.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필 포인트지 메인이 아니란 말이에요. 민트초코는 디소넌스가 메인이라고요. 뮤직같은 경우에도 디소넌스를 메인으로 한 경우에는 특유의 팬들이 있더라도 메인스트림의 지지를 얻긴 힘들어요."
"민트초코가 얼마나 좋은데!"
"퍼스널 테이스트의 매터지만, 로코는 스위트 인그리디언트들이 뮤추얼하게 엮인 하모니를 선호한다고요. 에밀리가 리커멘드하는 그린 티 파르페같은 것들 말이에요."
"으음..."
"로코... 주는 대로 먹어..."
서로 다투는 걸 보다 못한 안나가 로코에게 면박을 주었다.
"예스에요..."
안나가 나서니까 로코는 결국 꼬리를 말고 안미츠를 집어서 먹기 시작했다. 그래도 비싼 값은 하는지 양은 꽤나 넉넉했다. 한 여섯 명이서 먹어도 충분할 것 같았다.
그렇게 양이 많은 걸 왜 츠무기한테 통째로 줬냐고? 그만큼 좋아하신다는 거지. 타카네 말고 누가 그걸 한번에 먹는다고. 두고두고 먹겠지.
...아미랑 마미한테는 냉장고에 있는 츠무기 안미츠 건드리지 말라고 해야겠다. 혹시 모르니까 리츠코한테도 아미랑 마미가 냉장고에 있는 거 건드리지 말게 하라고 말해두고.
"아, 안녕하세요. 프로듀서."
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마침 츠무기가 왔다.
"안녕하세요..."
"아! 츠무기! 나이스 타이밍이에요! 프로듀서가 딜리셔스한 안미츠를 사왔어요!"
"안미츠...?"
안미츠가 있다는 말을 듣자마자 츠무기는 날 쨰려봤다. 아니. 안미츠 좋아하니까 사왔는데 왜?
"...다들 같이 안미츠를 먹는데도 저한테는 일부러 아무 말도 안 한 건가요?"
"냉장고에 봐봐."
"네?"
츠무기는 내 말을 듣고 냉장고를 열어봤다.
"어!? 이거... 이건 모듬 안미츠 중에서도..."
"왜. 그게 거기서 제일 맛있는 거야?"
"물론이죠! 아, 그... 고맙습니다...!"
'저... 정말! 미리 말을 해달란 말이에요! 괜히 제가 나쁜 사람 같잖아요!' 라고 할 줄 알았는데. 웬일로 순순히 고맙다고 해줬다. 으으으. 난 츤츤거리는 츠무기가 좋단 말이야.
"...그, 냉장고에 있다고 미리 말씀을 해주시지."
"말할 틈을 안 줬잖아."
"그, 그건..."
츠무기는 얼굴을 붉힌 채로 곁에 와서 앉았는데, 안미츠를 하나 집어가지고 먹진 않고 좀 쳐다보았다.
"세일 중이라서 샀는데 그렇게 좋아할 줄은 몰랐어."
"세일 중이라고요? 언제까지요!?""
"...그건 모르겠습니다요."
"저 오늘 일찍 퇴근해도 될까요?"
"왜?"
"문 닫기전에 얼른 거기 얼른 가서 하나 좀 사두려고요."
"냉장고에 이미 하나 있는데?"
"하나론 부족해요! 거기에 집에 있는 것도 아니고 사무실에 있는 거잖아요! 누가 훔쳐먹을지 어떻게 알아요!? 지금같은 기회를 놓쳐선 안 된다구요!"
...계속 느끼는 거지만 너도 안미츠에 참 진심이구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프로듀서씨."
누가 여기서 안미츠 먹는다고 소문이라고 냈는지 이번엔 미라이랑 유리코가 찾아왔다.
"아. 마침 잘 왔어! 안미츠 같이 먹을래?"
"이건 제가 진심으로 추천하는 메뉴랍니다. 좀 고급이거든요."
"츠무기씨가 추천하는 거라고요? 맛있겠네요!"
"고급? 와~ 고급~ 고그읍~"
아. 미래 귀여운.
안미츠를 두고 다들 어떤 걸즈 토크를 할지 정해주세요!
+2까지
츠무기 "푸웁??!"
안나 "안나는... 프로듀서, 좋아해...?"
로코 "로코도예요!"
미라이, 유리코 "그건 말 안해도 알아"
유리코가 무언가가 하고 싶은 걸까. 뭐 아무것도 안하면 심심하다는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니까.
"음. 그럼 뭐 할까?"
"게임이라도 할까요?"
"와~ 게임!? 진실게임 할래! 나 친구들한테서 진실게임 배웠어!"
미라이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누가 반대를 할까. 아. 저 천진난만함.
"그럼 진실게임이라도 할까요?"
"그래. 그거 좋겠다."
"와아~ 미라이가~ 좋아하는 진실~ 게임~"
미라이는 아주 신나가지고 자리에서 붕붕 뛰어다닐 기세였다.
"자! 그럼, 으으음... 아! 다들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에요!?"
첫 질문부터 세게 나가는구나. 좋아하는의 의미가 라이크냐에 러브냐에 따라서 다르지만 안나랑 로코의 답은 결정되어있다. 문제는 나야...
"푸웁?!"
그런데 갑자기 먹던 안미츠를 뿜은 건 츠무기였다.
"조, 조, 좋아하는 사람!?"
"네!"
"그, 그런걸 남사시러워서 어떻게 말한다고! 내는 빠질랜다!"
"아! 전 아빠요! 프로듀서씨도 좋지만 전 아빠가 제일 좋아요!"
"엣...?"
츠무기는 러브고 미라이는 라이크로 받아들인 걸까. 미라이가 갑자기 아빠를 좋아한다고 해버리니까 츠무기는 그대로 고개를 숙이며 침몰하고 말았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
유리코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듯 하더니 답했다.
"아직 못 만나봤어요."
"못 만나봤다니?"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말로 덮어버리기에는 저의 사랑은 아직 그만큼의 꽃을 피우지 못했는걸요. 첫사랑도 만나보지 못했으니까요. 정말로, 제가 진심으로 가장 좋아한다는 말을 할 만큼 절 사랑해줄 누군가를 만난다면... 하핫, 엄청 행복할거에요! 그래요! 마치 안나랑 로코가 프로듀서씨를 만난..."
"유리코씨..."
"아, 아... 하하하."
유리코가 늪으로 빠져들어가려는 것을 어떻게든 안나가 저지했다.
"아, 아무튼! 그럼 안나쨩이랑 로코는?"
"프로듀서."
"프로듀서씨."
역시. 둘이서 타이밍을 맞추기라도 한 듯이 칼같이 대답했다.
"역시."
"말 안해도 알만하죠. 자. 그럼 프로듀서씨!"
"나?"
...그리고 결국 내 차례까 온 건가.
"...안나지?"
"오프 코스겠지만, 로코죠?"
"...노코멘트."
"에이~"
"으음..."
"그럼 대답할게. 나한테 월급주는 사장님이 제일 좋다! 됐지?"
"저, 그, 그럼. 프로듀서씨! 첫사랑은 어때요? 아니, 첫사랑은 누구에요?"
...어떻게든 회피를 해보려고 했지만 유리코가 집요하게도 물어왔다. 으음. 아, 이거 대답을 안 할 순 없는데.
"...누군가가 좋아할 만한 답을 원해? 아니면 진짜 답?"
"에이~ 진실게임이잖아요~"
"맞아요~ 어디까지나 게임인데."
"말해도 되는 거지?"
"네~"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내 진심을 내뱉었다.
"...유키호."
"......"
"......"
세상에. 이게 그 아이스 에이지인가 하는 그건가요.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내가 생각한 것 그 이상으로 냉랭해졌다. 내가 당장 사장님한테 가서 프로듀서 그만둔다고 해도 이만큼 분위기가 싸해지진 않을 것이다.
다들 안나나 로코 중에서 한 명이 나올줄 알고 재촉을 했겠지. 근데 어떡해... 첫사랑을 말하라고 했잖아... 유키호가 너무 예뻤어...
"...안나, 삐졌어."
"프로듀서! 방금 워드는 두고볼 수 없어요! 로코는 스트라이크 할거에요!"
"...파업?"
"네! 스트라이크요! 안나도 동참해요!"
"응...!"
이런 세상에. 파업이라니. 파업이라니...
순수하다는건 엄청난 힘이다. 미라이의 천진난만함이 괴력난신이 되어 날 휘둘렀다. 아. 오자마자 안미츠 먹는다고 수염을 안 깎았구나...
결국 난 수염도 깎으러 가고 안나와 로코의 분노로부터 몸을 피할 겸 해서 도망칠 수 밖에 없었고, 그날 로코랑 안나는 파업을 명목으로 모든 레슨을 빠졌다.
다음날 화난 안나랑 로코를 풀어주기 위해서 프로듀서는 무엇을 할까요?
1 그랜절
2~50 반나절간 프로듀서 독점권
51~99 소원 들어주기
100 플라잉 도게자
+1은 안나 +2는 로코입니다
다음 날. 안나는 아직도 잔뜩 삐졌는지 볼을 부풀린 채로 내가 왔음에도 인사도 안하고 게임만 하고 있었다.
"안나. 안녕,"
"......"
"아직 화났어?"
"...몰라요."
"으음."
"...흥."
"안나. 소원 하나 들어줄게. 아무거나 원하는거 있으면 하나 들어줄게. 그러니까 화 풀어."
소원 이야기가 나오자 안나는 게임기를 끄고 내쪽으로 왔다.
"안나의 소원...?"
"응."
"...안나의 머릿속에 있던 소원은, 프로듀서씨가... 이미 다 이뤄줬는걸."
안나는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렇지만..."
고개를 숙이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안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직, 한 가지 소원이 있어요..."
고개를 든 안나는 나를 바라보며 내 손을 잡았다.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안나..."
안나의 소원. 안나의 소원은 날 보고 사랑해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도 말하고 싶다. 나도 안나를 사랑한다고 진심으로 말하고 싶다. 내 진심을 끌어내 본다. 끌어내 봤다. 하지만 내 영혼은 한번도 안나와 로코가 나에게 준 가르침을 실현해 본 적이 없다. 이번에도 뒤를 돌아보면 안 되는 순간에 에우리디케를 두고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내게 남은 건 끔찍한 진실이었다. 내 영혼의 그릇이 그 정도라는 진실.
아무 말이 안 나온다.
아무 성과도 없으니까 갑자기 눈 앞에 있던 안나가 어딘가로 사라져버리고 세상에 나혼자만 남아버린 느낌이다. 그 말을 나오게 하려고, 그 한마디를 나오게 하려고 힘을 썼는데, 그 힘이 어딘가로 새버린 건지 갑자기 무엇인가를 필사적으로 막고 있던 제방이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린 느낌이다.
대체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다면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일까? 왜 나는 두렵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 자신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히고 있을까? 내가 조금 더 용기를 내야 안나가 행복한데. 이런 이기적인 사람이 있나. 내가 기생충과 다를 게 뭘까.
나는 바보다. 나는 이기적인 놈이다. 아. 그냥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사라지고 싶다. 그냥 나도 상처받지 않고 나 때문에 다른 누군가도 상처받지 않는 아무것도 없는 공허 속으로 내 존재가 깔끔하게 사라지면 좋겠다.
나는 그렇게나 사랑받았음에도 사랑하는 법을 깨우치지 못했다. 그냥 같이 있어주는게무슨 사랑이란 말인가. 그냥 먹을 것을 사주는게 무슨 사랑이란 말인가. 두려워서 문을 걸어잠그고 있는 놈이 어떻게 사랑을 운운한단 말일까. 내가 이런 사람인줄 내가 애초에 알았다면 안나의 곁에 다가가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안나의 곁에 있는 행복을 누려선 안 됐고 안나는 나같은 사람과 어울려서 불행해져선 안 됐다.
안나는 잘못한 게 없다. 그런데 왜 나같은 사람과 함께 있는 걸까.
"...미안해. 안나."
"...프로듀서씨."
"안나... 도무지 아무 말도 안 나와. 난 바보인가봐."
"...바보 아니에요. 로코한테 들어서 알아요... 프로듀서씨는... 그냥 겁이 날 뿐이에요."
"맞아. 겁이 나. 엄청 나. 신기하다? 다 괜찮은데, 안나한테 고백하려고만 하면 몸이 굳어서 아무것도 못 하겠어. 나 이상한 사람인가봐. 지금 당장 좋아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지금이 아니라도 괜찮아요."
"......"
"나중이라도 괜찮아... 그치만... 나중에라도... 좋아한다고 해줘요...?"
"...응!"
"프로듀서씨... 약속했어요... 안나랑, 약속한거야..."
"응."
"...안 지키면 어떻게 할거야?"
"퇴사할거야."
"......"
너무 파격적인 공약이었는지 안나는 말이 없었다.
잠깐 탁류에 휩쓸려 가라앉는 바람에 약간 밑바닥으로 내려갔다왔지만 다시 올라왔다. 정신 차려. 난 불행한 사람이 아니야. 난 절대 불행한 사람이 아니야. 날 불행하게 만드는 건 나야. 내가 불행하면 안나도 불행해져. 잊지 마.
내가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건 상관없지만 나 때문에 안나가 불행해지면 안 된다.
+2 로코는 프로듀서가 멘탈을 잠시 놓았던걸 눈치챈다 못챈다
1~50 눈치챈다
50~99 못챈다
100 갑자기 닌자가 나타난다
로코도 만나봐야 하는데. 난 로코가 있을만한 곳을 찾아 돌아다녔다. 로코가 로코아트를 만들거나 로코 아트를 만들 영감을 찾을만한 곳. 사무실, 휴게실, 로비엔 로코가 없었다. 그렇다면...
"......"
역시 로코는 옥상에 있었다. 로코는 날 분명히 봤지만 못 본체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 안녕 로코?"
"오! 후아유? 아이 돈 노우 후유아!"
"저, 로코..."
"됐어요! 로코는 지금 베리 앵크리에요!"
"미안. 화 풀어."
"흥."
"...원하는 거 있으면 하나 들어줄게."
"로코의 위시? 노 땡스에요! 로코는 로코 아트를 메이킹하는데 다른 사람의 레이버를 제멋대로 이용하는 악덕 아티스트가 아니에요!"
"그럼 그냥 곁에 있게만이라도 해줘."
"...그건 파서블이에요."
나는 로코의 곁에 있었다. 로코가 로코 아트를 만드는 걸 그저 보고만 있었다.
로코 아트는 평소의 로코가 만드는 것 보다 좀 더... 삐뚤빼뚤해보였다. 확실히 그랬다. 로코 아트는 보통 로코 아트가 사고로 인해서 망가지거니 뒤틀려버리지 않는 이상 보통은 정갈하게 나뒀다.
그래. 정갈하다. 그냥 사물을 나열한 게 아니다. 로코랑 같이 있던 게 얼마인데. 난 안다고.
하지만, 이번 로코 아트는 정갈한 모양새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번엔 로코가 삐뚤빼뚤한 모양새의 아트를 만들거나, 아니면 나 때문에 집중을 못 하고 있는 거겠지. 어쩌면 둘 다일수도.
"프로듀서."
"...응."
"퍼스트 러브가 유키호라고 한 리즌이 뭐에요? 와이?"
"그냥 첫사랑이 유키호라서 그렇게 대답했어."
"...지금은 로코를 훨씬 더 러브하는 거 맞죠?"
"물론."
"만약 폴스라면요?"
"사직서 낼거야."
"...그렇게 나오면 로코도 딱히 디나이하지 않을 거에요."
로코는 로코 아트를 두고 내게 다가왔다.
"그럼. 프로듀서. 로코를 러브한다는 것을 프루브해주세요."
"어떻게?"
"으음 지금 타임이... 벌써 애프터눈이네요. 그럼 나우부터 이브닝까지 로코의 곁에만 있어주세요."
"물론."
"...도큐먼트를 어드저스트하러 가지도 말고, 인에비터블한 일이 아니면 로코의 곁에서 떠나지 말아주세요. 평소엔 안나에게 가는 것까진 얼라우해줬겠지만, 이번엔 낫 얼라우드에요. 로코에게만 있어주세요."
"응..."
"...떙스에요."
로코는 그 말 한마디를 남기고 다시 로코아트를 만들러 갔다. 그리고 나선 그저 아무 말도 없이 로코 아트를 만들고 있었다. 난 로코랑 그렇게 붙어있었음에도 로코가 해설해주지 않는 이상 로코 아트가 무엇을 표현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로코가 나와의 관계가 그 정도 관계라고밖에 안 되는 건가 하고 실망하는 건 싫어서 로코가 설명을 해줄 때마다 그런 거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도, 정말 이번에도 그렇게만 하면 난 좋은 사람으로 남겠지. 하지만, 좋은 사람으로만 남고 말 거야.
고민하고 있던 난 로코를 물끄러미 바라보고만 있었다. 로코의 곁에 다가가면 내가 방해만 될 것 같았다. 로코가 작업 장소를 옮기려고 로코 아트를 슬슬 정리하고 있을 떄 조차도.
"프로듀서?"
"응?"
"...로코의 곁에 있어주세요."
"아, 응."
난 로코를 따라서 휴게실로 내려갔다. 로코는 로코 아트를 구석에 잘 갈무리했다. 그 구석에는 아직 만들다 만 로코아트가 가득했다. 몇 개는 먼지가 끼여 있었다. 하지만, 로코가 저렇게 구석에 방치되어 있는 로코 아트를 버린 일은 없었다. 언젠가는 먼지를 털고 보수해서 꼭 내놓았기 때문이다.
로코는 캔버스를 펼치고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붓을 들 기미는 보이지도 않고 지긋이 날 바라보았다.
"안되겠어요. 하트에 프로듀서만 가득해서 프로듀서의 포트레이트를 드로하고 싶었는데, 프로듀서를 프로듀서로서 드로하지 못할 것 같아요."
"나를 나로서 그리지 못하다니?"
"프로듀서. 로코가 아직도 앵그리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가만히 있는 거에요?"
"...응."
"로코는 이제 더이상 앵그리하지 않아요..."
로코는 내게 달려와서 내 손을 꼬옥 잡았다.
"모처럼의 오포튜니티인데. 로코 아트에도 컨센트레이션이 안 됐어요. 로코의 하트에 프로듀서 뿐이었거든요. 그러다보니 프로듀서가 보링할 것 같아서 프로듀서를 리터럴리 프로듀서로만 그린 드로잉을 프레젠테이션 하고 싶었는데... 잘 안 돼서 속상했던 거에요."
"난 로코가 날 그려주기만 하면 기쁠 것 같은데."
"하지만 프로듀서를 러버로서 그린 그림은 너무 많아서... "
"난 한번도 못 본것 같은데. 보여줄래?""
"네? 웨잇이에요! 그건 프레젠테이션 못 해요!"
"어째서?"
"...부끄러워요."
...아. 로코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럽다고 했고 난 그대로 쓰러질뻔한 것을 참아냈다. 아. 로코가 너무나도 진심이라서 영어 쓰는 것도 잊어버리다니. 흑흑.
"아, 그. 에, 엠베레싱! 엠베레싱해요!"
"아무튼 안 되는 거니?"
"네! 로코의 스킬이 더 늘어서 프로듀서에게 프레젠트해도 괜찮을 만한 드로잉을 그리는 데 성공하면 보여줄 수 있지만... 아직은 아니에요."
"아깝네."
"아직은 러프한 결과물이에요."
"러프가 말 그대로의 러프야? 아니면 거칠단 뜻이야?"
"노코멘트에요."
로코는 노코멘트라고만 하고 내 품에 뛰어들어서 날 껴안았다. 로코의 북슬북슬한 머리의 감촉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저 폭신해보이는 머리의 감촉이 좋았다. 머리를 무의식적으로 쓰다듬으니 로코는 순간 흠칫했지만, 그저 내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프로듀서. 프롬 나우 온, 로코는 더이상 투데이의 드로잉을 하긴 글른 것 같아요. 그냥... 그냥 계속 프로듀서를 스테어링하다 보니까 프로듀서의 곁에만 있고 싶어요."
"나도 마찬가지야."
"굿이네요."
자. 꽁냥꽁냥 했으니 이제 일하러 갑니다. 야근한 프로듀서를 다음날 아침에 누가 꺠우러 올까요?
1~33 성실하게 아침일찍 도착한 사요코
34~66 성실하게 프로듀서보다 일찍 일어난 미사키씨
67~99 성실하게 아침일찍 도착한 코토하
100 그냥 피핀 이타바시
+2
일은 해도 쌓여있고 안해도 쌓여있다. 사무실에 있는 내 일감은 그대로였다. 다행이다. 면도기를 사둬서. 면도기를 유용하게 쓰지 않기를 그렇게나 바라고 있었건만... 결국 쓸 일이 오고야 마는구만.
나는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눈은 점점 침침해져갔지만 감기지는 않았다. 저녁은 밤이 되고 밤은 새벽이 되었지만 새벽이 오고 나서도 잠은 오지 않았다. 잠이 안 온다는 것은 그만큼의 피로가 내 몸에 쌓여갔다는 것이다.
...뭔가 모 정치인 같은 이상한 말들만 하고 있다. 그 사람이 누구냐고? 그걸 설명하는 것 자체가 섹시하지 않네요. 아. 이대로 잠을 안 자다가는 내일을 그르칠 것만 같아서 난 하던 것만 마무리하고 컴퓨터를 껐다.
낮에 다른 내 담당 아이돌들은 소파에 앉아서 쉬지만, 난 밤에 그 소파에 누워서 잠을 청했다.
"으으으..."
아침이 되니 머리가 띵한채로 눈이 절로 떠진다. 아직 창문 너머로 햇살이 안 들어오는 걸 봐서 이른 아침 같은데... 불이 꺼져있는걸 보니 누군가가 오진 않은 것 같다.
"으어어응거어억.... 아으아아아윽..."
난 으어어억하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폈다. 내가 기지개를 피면서 괴상한 소리를 내는 취미가 있는 건 아니지만 몽롱한 채로 몸을 깨우려고 팔을 뻗으면 저절로 이상한 소리가 난다. 으어어어어억.
"아. 안녕하세요. 프로듀서."
아니 잠깐. 누가 있었어? 아니 누가 있는 줄 알았으면 그렇게 오두방정떨면서 일어나진 않았지! 아아악! 창피해! 잠은 제대로 깼지만... 창피해!
"어, 응... 사요코. 안녕."
사무실에 온 사람은 사요코였다. 어쩜 저렇게 성실할까. 사요코는 내가 영 시원찮은 모습을 보였어도 늘 그랬듯이 기운이 넘쳐보였다. 이것이 열혈인가. 지진이 일어나도 인자기의 옆에 있으면 살아남을 수 있고 온세계가 빙하기 속에 휩싸여도 사요코 옆에 있으면 따뜻하다.
"밤 샜어요?"
"하하하..."
츠무기한테 자기 몸좀 챙기라는 말까지 들었는데 대뜸 대놓고 그래 나 밤샜다고 하기는 좀 그래서 나는 그냥 웃으면서 얼버무렸다.
"그... 사요코. 언제 왔어?"
"10분 전쯤에요."
"나 그 때도 자고 있었어?"
"네. 그런데 자는 모습이 엄청 편해 보이고, 프로듀서씨가 피곤한 것 같아서 왠지 깨우면 안 될것 같았어요."
"하하하... 뭔가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네."
"꼴사납다뇨. 저한테 한계일 때 쉬는 건 자연스러운 거라고 했잖아요. 잠깐 쉬는 것과 아예 멈추는 건 다르다는 걸 프로듀서가 가르쳐 줬는걸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자는 모습이 꼴사나웠을 것 같다고 한 이야기였지만.
...설마 나 머리 북북 긁으면서 잔 건 아니겠지?
"아무튼 사요코. 아침부터 무슨 일이야?"
"일찍 일어난 김에 레슨 좀 하려고 왔어요! 마침 저한테 오늘 스케줄도 있다고 했었잖아요!"
스케줄이라, 오늘 사요코한테 스케줄이 분명히 있었지. 오후 두시였는데. 지금이 몇시인 핸드폰을 켜서 시계를 보니 여섯시 반이었다.
여섯시 반?
아니...
"...그거 오후 두시에 있는거 아니었어?"
"그렇지만 가는 길이 멀어서 적어도 정오엔 출발해야 하니까요."
"지금 여섯시 반인데?"
"네. 저도 이렇게 일찍 일어날줄은 몰랐는데, 눈이 오늘따라 일찍 떠지더라고요. 그런데 공부는 손에 안 잡힐 것 같고 딱히 할 것도 생각이 안 나서..."
"그래서 무작정 온 거야?"
"네!"
당당하다. 정말 당당하다. 안나나 로코가 이만큼 부지런한 애였으면 난 온 몸이 안 남아났을 것이다. 으으. 담당 아이돌이 부지런한거랑 내가 밍기적거리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나 싶겠지만 그래도 한심한 프로듀서가 될 순 없잖아.
"밥은 먹었어?"
"어... 아직이요."
"음. 그럼 사요코, 부모님은 지금 너 사무소에 있는 거 알아?"
"아직 주무셔서 먼저 나간다고 책상에 메모 붙이고 왔어요."
으으음... 괜찮을까.
"그래도 전화 한 통 정도는 하는 게 어때?"
"음. 프로듀서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그럼 잠시만요."
사요코는 잠깐 사무실 밖으로 나가서 전화를 좀 하다 왔다.
"네. 미리 왔다고 말씀드렸어요. 저보고 힘내래요."
지금 상황에서 굳이 더 힘내라고까지는 안 해도 될 것 같긴 하지만...
"음... 사요코. 아직 밥 안 먹었다고 했지?"
"네."
사요코는 생글생글 웃다가 아침밥 이야기가 나오니 갑자기 눈빛이 굳었다.
"아침밥 하니까... 프로듀서. 혹시 인스턴트나 아니면 무슨 이상한 걸로만 때운 건 아니죠?"
"아니. 굶으면 굶었지."
"굶는 건 더하잖아요..."
"으음."
그래도 내가 요리를 못하는 건 아니야. 나름 자취맨인데...
"탕비실에 뭐 여러가지 있을텐데. 사요코. 그럼 내가 밥 해줄까?"
"진짜요?"
"응. 그래도 나름 요리를 못한다고 생각하진 않거든."
프로듀서의 요리 실력은?
1:미나코가 억울하게 희생된 요리재료의 복수를 하러 올 맛
2~21:아니 쫌
22~44:음...
45~66:오~
67~88:우와...!
89~99:이거 진짜 맛있어요!
100:둘이먹다 둘다 쓰러질 맛
+2
"오. 그럴싸해 보이네요. 그럼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난 내 자신작을 젓가락으로 한움큼 집어서 먹었다. 음. 역시 맛있다. 이게 요리지. 내 자신작이라고. 음음.
그리고 사요코도 내 자신작을 한 젓가락 집었다. 집고 맛을 보는데...
"......"
입에 넣자마자 사요코의 표정이 한 순간에 굉장히 심각해졌다. 당장 아이돌을 그만둬야 할 일이 생겨도 이렇게까지 심각한 표정을 지을까 싶을 정도로. 아니, 맛있기만 한데. 왜.
"......"
"사요코?"
"...프로듀서."
"응."
"...매일 이런거 먹고 사는 거에요?"
"응!"
"프로듀서어..."
그 말 한마디에 사요코는 굉장히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왜 날 무슨 아프리카의 결식 아동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는 건데. 아니, 이정도면 괜찮잖아. 더한것도 얼마나 많이 해먹었었는데.
"그냥... 그냥 뭐라도 좀 사드세요."
"왜?"
"사드세요. 제발..."
"아니 왜. 내 요리가 어때서? 왜 날 그렇게 불쌍한 눈으로 바라보냐고."
"인스턴트는 건강에 나빠도 적어도 맛은 좋지만 이건 맛도 안좋고 건강에도 나쁠 것 같다고요."
"뭐...라고?"
"...프로듀서, 미나코한테 말해둘게요. 이런거 먹지 말고 제대로 된 끼니를..."
"오~ 안녕하세요~ 프로듀서씨! 사요코도 있네?"
마침 타이밍 좋게 레이카가 왔다. 레이카라면 그래도 솔직한 감상을 말해주겠지. 아니, 못 먹을건 아니잖아. 왜 그렇게 못 먹을거라도 되는 듯이 그러는데.
"오! 뭔가요 이건!?"
"레이카! 마침 잘 왔어! 내가 마침 요리를 했거든? 자. 내 자신작이야."
"...별로 추천은 못 드리겠네요."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해지는데~ 냠!"
레이카도 내 자신작을 젓가락으로 한움큼 집어서 먹었다.
"으음~"
레이카는 눈을 감고 웃는 표정으로 내 요리를 천천히 음미했다. 그래. 저렇게 음미하고 있는데 맛있다고 해주겠지. 분명.
"와! 정말로 맛 없어요! 제 실패작보다 맛 없는건 여자력 야끼소바 말고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보다 맛없는걸 먹어보는건 이걸로 두번째네요!"
"그런 식으로 경쾌하게 사람을 디스하지 말란 말이야."
"저도 나름 많이 양보한 거에요! 순간적으로 속에서 뭔가 올라오는 바람에 구토듀서씨라고 부를 뻔했는데 그래도 그 정도까진 아닌것 같아서 좀 참은 거에요!"
구토듀서씨...
"사요코쨩! 이거 지금 버리고 올까요?"
"당장요."
"왜!? 아니 아깝게 그걸 왜 버려! 그냥 내가 먹을게!"
"먹지 마요! 이런거 먹으면 몸 상해요!"
"아니! 내 요리가 독극물이야!?"
"독극물보다 더 맛없을걸요."
"......"
레이카는 당장 발빠르게 나서서 내 자신작을 버리러 갔고, 난 허망한 눈빛으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프로듀서."
"응?"
"...아니에요. 힘내세요."
스케줄 장소로 출발할 시간이 될 때까지도 사요코의 침통한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사요코의 스케줄은 무엇일까요?
+2
"아. 안녕."
"안녕. 아리사!"
"프로듀서씨! 사요코씨! 안녕하세요오!!"
아리사는 늘 그랬듯이 기운이 넘친다. 텐션으로만 따지면 시어터의 열혈 투탑중 한명인 사요코보다도 우위에 있지 않을까? 어쩌면 우미보다도 텐션이 넘치는 것처럼 보일때도 있고.
"우와아아!! 사요코씨의 풀죽은 표정! 오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요!? 일단 사진부터 찍고!!!"
그래. 저런게 문제지.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요 하는 물음, 그런데 사진촬영을 좀 곁들인. 저런게 카메라맨의 숙명인가 좋은 사진감을 발견하면 그 사진감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니 일단 찍는다?
"아니... 그냥. 환상이 좀 깨질 일이 있었어."
"환상이 꺠지다뇨?"
"난 프로듀서씨가 친절하고 살림도 혼자 한다길래 꽤나 가정적인 남자일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고요!? 설마 그렇게 친절하면서도 따뜻한 프로듀서씨의 안에 냉혹한 본성이 숨겨져 있었다? 프로듀서씨!!! 무슨 일인가요!?!?"
"그런 건 아니고... 아침에 요리를 해서 줬는데 맛이 심각하게 없대. 내 자신작이었는데..."
"아."
그랬더니 갑자기 아리사가 정색했다. 아니. 왜. 왜 정색하는데. 아리사가 정색하는건 흔치 않았다. 전에 졸리다고 할 때 농담삼아 무릎베게 해준다고 했을때 정색하면서 '그다지 내키지 않는데요' 했을 때 이후로 얼마만인가.
"...프로듀서씨가 미각치인건 공공연한 비밀 아니었나요?"
"뭐?"
"에?"
"말 그대로에요. 아리사는 봤어요..."
아리사는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정말로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모모코한테 꾸지람을 들었을 떄도 이만큼 심각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던 아리사 아주 심각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무슨 이야기인지 들어나 보자.
"프로듀서씨가 사무실에서 주먹밥을 하나 꺼내먹고 있었거든요. 저는 그냥 평범한 주먹밥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사실?"
"그 뒤로 우미쨩이 한 말을 들었어요. 프로듀서가 스페셜 여자력 주먹밥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
"그거 우미가 만든거였어?"
"네."
"...몰랐는데. 그냥 맛있기만 하더만."
"......"
"으음..."
아리사와 사요코는 더욱 더 표정이 굳어갔다.
"괘,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마, 맞아! 우미의 요리실력이 더 나아졌을 수도 있잖아? 하하하..."
"아리사가 우미밍한테 부탁해서 하나 먹어봤어요."
"......"
"어떤 면에선 프로듀서씨가 존경스럽더라고요."
"그만 해. 그만. 알았어! 그래 나 요리 못한다! 됐냐!?"
흥. 그렇게 놀려먹으니까 좋더냐. 나 삐졌어.
"저. 타카야마 사요코씨. 마츠다 아리사씨. 이제 들어가실게요."
이렇게 있다가는 내 미각에 대한 원초적인 의문을 품을 뻔했지만 때마침 스탭 분들이 와주었다.
진행은 순조롭게 되었다. 사요코는 축 쳐져있었지만 일이 시작되자마자 언제 그렇게 처져있었냐는듯 자신감이 만반이었고. 아리사는 스스로는 자기가 프로가 아니니 아리사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느니 했지만 지금의 모습을 보면 프로가 맞았다.
토크쇼의 토픽을 정해주세요!
+2
이탈리아 요리랑 프랑스 요리라. 사실 난 둘 다 모른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와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은 알지만. 그냥 와인 넣으면 프랑스 요리고 파스타 면 넣으면 이탈리아 요리 아닌가? 애초에 구라파 요리라는걸 접할 기회가 얼마나 있다고.
쉽게 접할만한 외국 요리라곤 죄다 미국 요리가 아닌가. 맥도날드와 KFC에 불만이 있어요? 캘리포니아로 오십시오.
"프랑스 요리 대 이탈리아 요리요?"
"네. 아리사씨. 혹시 아는 이탈리아 요리 하나 있나요?"
"피자요!"
"피자 말고요."
"스파게티."
"구체적인 이름을 대주세요. 까르보나라 같은 거요."
"음... 감바스 알 아히요?"
"......"
요리의 요자도 모르는 내가 감바스 알 아히요가 스페인 요리라는 건 아는데.
"빈센조 까사노?"
"......"
음. 아리사가 실수했다. 저건 명백한 실수다. 그냥 모른다고 하지. 저 방송국에서 알아서 잘 살려주겠지."
"...외국 요리같은건 잘 모르겠고 그냥 패밀리 레스토랑 음식이 좋아요."
"그, 그렇군요. 사요코씨는요?"
"으음, 그게..."
사요코도 덩달아서 좀 당황한 건지 말꼬리를 약간 늘리기 시작했다.
"저. 일본 사람들은 자신의 요리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건가요?"
한 외국인 패널이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고 생각하는데요."
"오! 역시! 역사와 전통이 있으니까 자신의 요리를 경시하지 않는다는 거군요! 이야! 대단해요!!!"
그 외국인 패널은 눈을 부릅뜨고 이마를 탁 쳤다. 눈치를 채고 일부러 오버액션응 해준 거겠지? 약간 막막할 듯 했던 분위기가 어떻게든 잘 풀어졌고 다시 진행도 원활하게 되었으니까.
촬영은 어떻게든 무사히 끝났다. 나는 그 외국인 패널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전하고 사요코랑 아리사를 데리러 갔고.
"아리사. 괜찮아?"
"아리사는 이제부터 감바스 알 아리사에요..."
"빈센조 아리사는 아니고?"
"정마아알!!!"
"하하. 사요코. 괜찮아?"
"글쎼요."
"내가 예상 하나 해볼까? 아무리 실수를 했어도 방송에 나올 결과물은 내가 아침에 해줬던 요리 맛보단 괜찮을거야."
"그거 자신작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내가 맛있게 먹었던 그게 우미의 여자력 요리라는 걸 듣고 나니까 내 미각에 대한 재고를 좀 해야겠더라고."
미안하다 우미야.
"자. 기운 내. 모르는게 나쁜 건 아니잖아."
"으으, 그건 괜찮겠지만 실수한 건 괜찮지가 않잖아요.'
"그걸 그렇지만..."
"이미 일어난 일을 어떻게 한단 말이니. 자. 일단 타자."
난 사요코랑 아리사를 우선 차에 태우고 사무실로 가기 시작했다.
"고생한 기념으로 원하는 거 있으면 하나 들어줄게."
"므므... 그렇다면 하루카씨의 은밀한 사진 하나...!"
"안됩니다! 땡!"
"힝. 이럴 줄 알았어요."
"그냥 지금은 뭐라도 먹고 싶은 기분이에요.
"으음."
에이. 까짓거 이렇게 된 거 차 돌리지 뭐. 나는 사요코랑 아리사랑 밥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
"......"
휴게실에 있던 안나랑 로코는 내가 돌아오자마자 날 쨰려보고 있었다.
동네사람들! 이 프로듀서가 자기 담당돌들을 내비두고 밥을 먹고 왔댑니다! 안나랑 로코는 무엇을 할까요?
+2까지 자유앵커
@ 못 썼던건 중간고사 때문이었지만 돌아온 건 중간고사 1주일 후네요. 항상 감사합니다.
금방이라도 무슨 말을 하고 싶다는 듯이 쳐다보지만, 업무의 일환이라는 것을 아는 모양인지 별 말은 하지 않는다.
"저, 안나?"
"......"
"로코?"
"......"
아. 이러면 나가린데.
"정말. 자기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사무소에 내버려두고 다른 사람들이랑 밥을 먹으러 가다니.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이지..."
"이미 양심에 찔려서 아무말도 못하고 있는데 이렇게 확인사살을 다 해주다니. 그래. 참 고맙기도 해라."
어째서인지 안나와 로코랑 함께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츠무기가 한 마디를 걸어왔다.
"그, 밥은 잘 먹었어?"
"안... 먹었어요..."
"프로듀서가 올 때까지 웨이트하고 있었다구요."
세상에. 이건 내가 봐도 선 넘었는데. 지금 당장 그랜절을 박아야 하나? 이 프로듀서 아우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 그럼 지금이라도 같이 뭐 먹으러 갈까?"
"프로듀서... 밥 먹었잖아... 이미 배부를 거 같은데..."
"노 땡스에요. 로코는 안나랑 같이 런치 타임을 가질 테니까 프로듀서는 그냥 하던 워크 계속 해도 돼요."
으으으으음...
"프로듀서! 안녕!"
뭔가 머릿속이 고민으로 가득 차던 와중에 활기찬 목소리가 사무실을 맴돌았다. 그래. 이런 고민따윈 한꺼번에 날려버릴 활기찬 목소리 말이다.
"안녕! 안나! 로코! 츠무기!"
"안녕... 하세요..."
"아! 우미! 굿 애프터눈이에요!"
"아. 안녕하세요."
"오늘은 수업이 일찍 끝났어! 일찍 끝났다기보단 나머지 시간은 동아리 시간인데 오늘은 좀 일찍 가야한다고 말하니까 그냥 보내준 거긴 하지만."
"으음. 프로듀서. 투데이의 스케줄에 우미도 포함되어 있는 거에요?"
"아니. 그냥 트레이닝이 더 하고 싶어서 왔는데?"
역시. 열혈. 우미 하면 열혈. 으으음. 그래. 우미를 보니까 한번 더 요리에 좀 도전하고 싶은데.
"저. 안나. 로코. 그럼 내가 뭐라도 좀 해줄까?"
"...?"
"해주다뇨?"
"뭐긴 뭐야. 요리지."
이번엔 잘 나왔을까?
1 우미 "으윽... 이게 요리...?"
2~10 어... 음... 어...
11~30 나름 아침에 한 것에 비해선 장족의 발전.
31~50 오.
51~70 오!
71~90 맛있다!
90~99 미나코 "제자로 받아주세요!"
100 만들던 도중 간을 보던 프로듀서가 맛이 너무 좋아서 쓰러짐
+2까지 최댓값이에요
@종강. 신나는 종강. 우리가 부르짖는 그이름 종강.
우미가 눈을 빛내면서 말해봤다.
"도전이라고 해야 하나?"
음. 이렇게 기대를 받은 이상 실패하면 안 될텐데. 보통 누군가가 위기에 몰렸을 땐 과거회상을 해서 도움을 얻곤 했었지. 그래. 나만의 힘으로 안되는 일이 있을 때. 이럴 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럼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 일단 요리 잘하는 미나코. 미나코가 나한테 뭐라고 했었더라?
'왓호이~!'
아니. 말고.
'프로듀서씨! 너무 일만 하면 건강 상해요! 살이 홀쭉해진다구요!"
음. 다른 누군가로 넘어가보자. 요리를 누가 잘했더라...? 아. 카오리가 요리 잘했던 것 같은데. 카오리씨...
'와타시가이마~ 데키루코토~'
소레와 우타우코토... 아니. 아니. 그럼 카오리 말고 다른 누군가? 누군가? 누군가>누구가>뿌뿌카? 그래. 두음법칙상 뿌뿌카 너로 정했다. 뿌뿌카가 요리할 때 뭐라고 했었더라.
'요리엔 화력이 제일 중요하죠!'
그래! 집밥의 달인 뿌뿌카 선생님은 말했다. 자신의 요리는 50퍼센트의 확률로 성공하며 요리는 화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흐으으음."
가스레인지를 바라보면서 생각한다. 요리를 수학적으로 접근하면 어떨까? 약불이 1, 중불이 2, 강불이 3이라고 치면, 약불에서 6분을 데운 것과 중불에서 3분을 운 것과 강불에서는 2분만 데운 것은 똑같이 6이 된다.
그래. 그럼 재료를 다 강불에서 2분씩 데우자.
"......"
"오! 프로듀서! 불을 강하게 하는구나! 나도 요리할때 저렇게 하는 편이야!"
아. 실수했구나.
아무튼 그 뒤로 황급히 불을 줄이고 나서 어찌저찌 촥촥촥 부글부글 와장창 우당탕탕 해가지고 안나랑 로코 줄 한 끼를 완성했다. 집에선 그런거 신경 안쓰고 막해먹었는데.
"자! 여기 대령했습니다."
와. 짝짝짝. 나는 깜찍하고 귀여운 심사위원들한테 내 자신작(?)을 넘겼다. 옆에 있던 우미랑 츠무기도 좀 같이 들었고.
"......"
그리고 안나와 로코의 표정이... 뭔가... 오묘하다.
"으음..."
"뭔가 좀... 앰비벌런트한 테이스트에요."
"맞아... 맛 없는건 아닌데... 맛있다고 하기엔 더 아닌..."
"으음."
"난 좋다고 생각해!"
"그래도 생각보단 괜찮네요. 혼자 살다보면 요리같은 거에도 익숙해지는 걸까요..."
흑흑. 고마워라. 다들 친절해. 아침의 사건 때문에 자신감이 그냥 수직하락했는데 그래도 다들 날 칭찬해주다니.
나름 좋은 말이 나왔으니 그래도 아침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 인가?
"......"
"......"
그런데 나름 좋은 말이 나온 것 정도로는 안 될텐데. 으으으음. 기분을 확실히 풀어주려면... 마침 오늘은 나름대로 여유도 있겠다. 그래. 셋이서 영화라도 보러 가야 하나.
영화를 보러 간다는 말에 둘의반응은?
+3까지 자유앵커
@ 왜 프로듀서는 요리치란 말입니까.
"......"
"......"
안나는 게임하고 있고, 로코는 로코 아트에 대해 고민하느라 어색한 침묵이 감돌고 있다. 으. 지금 말해야겠지.
"으음, 혹시 둘 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
"응..."
"로코도요."
"그럼 혹시 그... 영화라도 보러 갈래?"
좋아. 이 수가 틀어진다면 당장 프로듀서 그만두고 머리깎고 스님이랑 같이 도 닦으러 간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전 이 속세의 짐을 벗어지고 떠납니다.
"로코는 노 프라블럼이에요!"
"으으음..."
예스! 로코는 환영하는 눈치다1
"끄응..."
안나는 잘 모르겠다.
"다른 건... 안 돼...?"
"다른 거?"
"프로듀서씨... 시간 나면... 같이 게임 하고 싶었는데..."
"으으으으음..."
게임인가. 영화인가. 으으으음... 일단 무슨 게임인지 한번 물어보고 나서 결정을 해야겠다.
"무슨 게임 하려고 했어?"
"온라인 게임..."
"온라인 게임이면 자주 하는 그 rpg게임 말이야?"
"응..."
아... 나 그거 계정도 안 만들었는데. 난 온라인 rpg 게임은 취향에 영 안 맞는다. 그리고 온라인 게임보다 인디게임을 좋아하기도 하고. 하지만 안나가 하는 거라면? 음.
"안나. 안나는... 그... 로코랑 같이 무비를 보러 가는게 별로에요...?"
"그런 게 아니야... 그렇지만... 프로듀서씨랑은, 같이 게임이 하고 싶어서..."
아. 아. 안돼. 이러다가 뭔가 흐름이 그려진다고.
내가 계정도 안 만들었다는 것을 안 안나는 친절하게 내가 계정을 만드는 시간동안 계속 기다려주겠지. 계정을 만들면? 난 초보니까 지루하고 실질적으로 쓸모있지도 않은 튜토리얼이 엄청 길겠지.
보통 튜토리얼에 멀티플레이어로 누군가가 끼어들지 못하게 하니까 그 튜토리얼이 끝나는 동안 안나는 계속 혼자 있겠지? 그렇게 튜토리얼이 끝난다면? 일련의 과정 때문에 이미 시간이 다 지난 이후다.
안나는 거기다가 말 그대로 탑랭커다. 안나랑 같이 예전부터 파티를 돌았던 고인물인 유리코가 안나의 실체를 보고 나서 자신의 게임 닉네임을 밝히기 이전에 감탄부터 하고 본 수준이다. 그야말로 천외천이요. 만인지상이다.
그런 안나가 자기가 평소에 도는 던전에 쌩뉴비인 나를 입장시킨다? 던전의 기본 권장 레벨 때문에 난 입장부터 못 할 것이다. 그럼 안나가 초보자용 던전에 나와 함께 입장한다? 키보드키 하나 눌렀는데 화면에 있는 몹이 싹 죽어있을 것이다.
그럼 키보드키 하나 눌렀는데 몹이 싹 죽어버린 안나도 재미가 없고, 아무것도 못하는데 고인물의 진기명기를 구경만 하는 나도 재미가 없을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다.
그래서 영화를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한 건데. 흑흑. 안나가 그래도 게임을 하고 싶다면... 그래도 가야 하나?
"저... 안나."
"응?"
"로코는 그래도 게임보다는 무비가 더 좋은 것 같아요."
"왜?"
"그냥... 로코의 필링이 그렇다고 하고 있어요. 프로듀서는 테이크 섬 레스트를 하고 싶을 거에요. 벗, 게임을 하면 여러 프로세스를 거치고 에포트를 인풋해야 하잖아요? 무비라면 그런 것들이 없어도 시팅해서 무비를 워칭하기만 하면 되지만요. 그래서... 무비 쪽이 프로듀서가 좀 더 덜 타이어드 하지 않을까 싶어서..."
"으응..."
안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을 하는 듯 싶더니 갑자기 볼을 부풀리며 로코의 볼을 쿡쿡 찔렀다.
"하여튼... 로코는 치사해... 안나가 영화를 보러 갈 수 밖에 없게 하고..."
"우우. 그만 포킹해요."
"응... 그래. 그럼 있다가, 영화, 보러 가자?"
예이!!!
좋다. 그럼 남은 시간 동안 월급루팡해야지. 월급루팡이 왜이렇게 당당하냐고? 블랙기업에서 그정도는 괜찮잖아.
프로듀서가 월급루팡을 하는 동안 뭔가 특별한 일이?
1 쿠로이 사장
2~80 안 일어난다
81~99 일어난다
100 타카기 사장
+2까지 최댓값
난 프로젝트 기획서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대충 타자를 치는둥 마는둥 열심히 월급루팡질을 했다. 리츠코가 나를 좀 많이 째려보긴 했지만... 생각해보니까 리츠코도 아이돌 그만두고 나면 그 뒤에 전향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겠지? 좋아. 누군가는 블랙기업을 부담해야 한다. 플라잉 더치맨의 선원이 되어라.
물론 농담이다. 그래도... 킹치만 솔직히 아깝잖아. 아이돌로 활동할 수 있는데 안 하는건 아깝잖아. 솔직히 코토리씨도 지금 아이돌이 아닌 게 아까워 죽겠고 미사키씨도 아이돌이 아닌게 아까워 죽겠는 마당에.
"프로듀서. 잠깐만 쉬고 일한다더니 계속 집중력이 흐트려지는게 눈에 보이거든요?"
"잠깐이란건 상대적인 개념이걸랑요. 너의 잠깐과 나의 잠깐이 좀 다를 뿐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2시간은 잠깐이란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데요? 2시간 전에도 이러고 있더니 지금도 계속 이러고 있기에요?"
"웨딩 화보 촬영 스케줄이 하고 싶단 말이지? 그래. 얼마든지 시켜줄게."
"프로듀서?"
"알고 보니 웨딩 화보가 아니라 수영복 화보였구나?"
"프~로~듀~서~?"
어, 음. 내가 내면의 귀신 중사를 깨우고 만 건가.
"잠깐 이쪽으로 오실래요?"
귀신 중사의 분노를 산 난 결국 진실의 방에 끌려가고 말았다...
그래도 설교 듣는동안 일은 안했다. 월급루팡은 순조롭습니다 사장님. 히히히히히히. 안나랑 로코랑 영화보러 갈 생각을 하니까 웃음이 절로 나온다.
"...하여간 참. 할 때는 잘 하는 사람인데 왜 저러고 있는 건지."
"할 때 할 수 있기 위해서 힘을 비축해둬야 하는 거야."
"말은 또 잘해요. 에휴."
리츠코는 투덜투덜대면서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나는? 음. 퇴근 시간까지 정확히 5분 남았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지. 그렇게 내 몸속에 카즈의 정신이 약 5분동안 깃들어 있었다.
"으으으으... 으어! 끝났다!"
오예ㅋㅋㅋㅋ 좋다ㅋㅋㅋㅋ 당장간다ㅋㅋㅋㅋ
"프로듀서씨..."
"프로듀서! 웨이팅하고 있었어요!"
사무실 문을 열고 보니 바로 문앞에서 안나랑 로코가 기다리고 있었다. 음. 그냥 안에 들어와도 되는데...
"기다리고 있었구나."
"오브코스죠!"
"저... 빨리, 가자?"
안나랑 로코는 날 기다려줬다. 심심했을텐데. 물론 나도 같이 지루했던 터라 안나와 로코를 데리고 어서 빨리 잰걸음으로 극장을 나서며 차에 탔다. 걸어가는걸 더 좋아해서 영화관까지 같이 걸어가고 싶긴 하지만, 거리가 안 되니까.
"그럼 무슨 영화 볼까?"
+1 안나가 보고 싶어하는 영화
+2 로코가 보고 싶어하는 영화
+3 1~50 안나가 보고싶은걸 본다 51~100 로코가 보고싶은걸 본다
안나가 고른 영화는 무려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이었다.
으윽... 워크래프트... 가로쉬... 깐포지드... 시공조아... 머리가... 따람라! 인간들을 몰아내자! 트루 호드 만세! 가로쉬님이 겉은 바삭 속은 촉촉이냐?
기각이다. 아무리 안나라도 안 돼.
"으음."
"안 돼...?"
"로코는 뭐 보고 싶어?"
"로코는 디스 포스터에 굿 필링이 드는 거에요!"
로코는 그렇게 말하며 한 포스터를 가리켰다. 제목.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데어 윌 비 블러드는 봤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안 봤는데... 그래도 안톤 쉬거는 안다. 예전 영화긴 하지만 재개봉으로 상영한다고 한다. 으음. 이런저런 소문은 많이 들었는데.
근데 애초에 저거 청불이잖아. 안나나 로코가 봐도 괜찮은 거 맞아? 특히 로코. 로코는 감수성이 워낙 예민해서 피튀기는거 보면 밤에 잠도 못 잘텐데.
"그치만, 안나는... 게임 영화가 좋은걸..."
게임 원작 영화는 거의 다 망했지. 이번에 짐 캐리가 나온 소닉 영화 빼고. 절대 내가 그걸 재밌게 봐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고.
"흐으으음... 그렇지만 저 무비는 보링해보이는걸요."
역시 로코는 영잘알이다.
"그렇지만... 로코가 원트 투 워치한다고 해서 무작정 워치할 순 없잖아요. 프로듀서. 프로듀서가 디사이드해주실래요?"
으으음. 그래도 청불은 좀 아닌 것 같은데.
워크래프트... 워크래프트...?
스랄! 니가 날 바삭하게 만들었다! 아니. 니 속살이 촉촉한 거다. 뒤쪽에 적이다! 측면을 사수하라! 정령들이 자네를 파괴할걸세! 자연이 그대를 거부하리라! korean heroes 불만이 있어요? 항상 감사하십시오 korean heroes.
그래. 그냥 워크래프트만 아니면 뭐든 괜찮아...
"으으음. 이번엔 로코가 보고 싶은거 보러 가자."
"핏..."
이런... 안나가 삐졌나.
"그럼 대신 내일은 같이 게임하자."
"정말...?"
"약속."
난 안나한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안나도 새끼손가락을 걸어줬고... 흑흑흑흑.
아무튼 이렇게 된거 영화를 볼 땐 뭣이 중헌디? 바로 팝콘과 콜라지. 난 안나와 로코 몫까지 해서 팝콘과 콜라를 들고 갔다.
자리에 앉고. 팝콘과 콜라도 나눠주고. 이런저런 광고도 나오고. 영화는 적막한 분위기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사막에서 사람이 나오고... 안톤 쉬거도 나오고... 그리고... 음... 사람 죽고... 그리고...
"으, 으음... 으?"
"음냐... 음..."
"으으으응..."
다같이 졸았다...!
실컷 졸아버린 프로듀서는 이제 무엇을 할까요?
+2까지 자유앵커
PC방으로 가서 히오스 3인큐(이건 막 지껄인것이니 앵커가 아니어도)
+1
"저, 안나, 로코. 일어나."
"으으으..."
"엄마... 깨우지 마..."
"엄마?"
"어. 로코. 나는 엄마가 아닌데."
이런 세상에. 프로듀서 마망이라니. 그리고 영어도 안 쓰는걸 보면 피곤하긴 했나보다.
"어, 엣? 우왓! 프로듀서! 안나! 로코는 아무말도 안 했, 아니! 세이 낫띵! 세이 낫띵 했어요!"
미안하지만 다 들었어. 아무튼 엄마 찾는 로코 덕에 다들 잠이 확 깼다.
"영화는 재밌었어?"
"모르겠어..."
"로코는 중간에 슬립해버린 거에요..."
으음. 뭐 어때. 그냥 됐지. 내일 안나랑 게임하기로 했는데. 그럼 내일은 오늘 안한 일을 다 해둬야겠지...
"저... 프로듀서씨."
"응?"
"내일, 같이 게임... 하자고 했잖아요."
"응."
"...12시가 지나기만 하면 내일이죠?"
"을?"
설마.
"그러니까, 그, 돌아가서 게임을 12시 너머까지 같이 하자는 말이니."
"......"
안나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오늘... 부모님 안 오시는데..."
아니야.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됐어. 나는 아직 아무런 준비도 안 됐다고. 내가 계정을 만들었느니 마니의 그런 문제가 아니야... 아. 왜. 왜 이 자리가 갑자기 두렵고 떨리지?
그렇지만 거절하는건 더 싫어...
"저, 로코도 조인해도 될까요?"
"음..."
"그, 어, 안나가 낫 라이클리 하면 로코는..."
"아, 아, 음..."
1 일리단 스톰레이지
2~50 로코... 미안.
51~99 같이... 하자?
100 짐 레이너
더 많은쪽 두개로 갑니다
"....."
"미안해..."
로코가 거절을 당했다. 안나랑 나랑 둘이서만. 안나랑 나랑 둘이서만...
"대, 댓츠 오케이에요! 쏘리라니. 안나가... 프로듀서를 러브한다는건 알고 있으니까..."
"......"
"네, 넥스트 타임에 같이 플레이해요!"
"응..."
로코는 아무 말 없이 물러갔다. 딱히 이렇다 할 작별인사도 없이. 의례적인 몸짓도 없이...
미안해. 그렇지만... 아니야. 내가 할 말이 있겠니. 그냥 미안해.
"저, 프로듀서씨."
"응."
"안나네 집... 어딨는지, 알죠?"
알고 있다. 물론 알고 있고 말고. 잘 알고 있다. 그 안에 들어가보았냐 하면 들어가도 봤다. 하지만 지금의 문제는 별개다. 별개의 문제라고... 왜일까. 안나랑 둘이서만 함께 있으면 나는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다.
로코가 그럴때 옆에 있어주지만... 결국 그게 내 문제를 해결해주는 건 아니니까. 로코도. 로코도 힘들텐데. 얼마든지 자기 몫을 주장하려면 주장할테고 떼를 쓰려면 썼을 텐데. 그냥 비켜줬으니까. 하아. 이번엔 실수하고 싶지 않아.
잘 해낼 수 있을까.
"당연히 알지."
"그럼... 가자?"
"응."
나랑 안나는 함께 짐까지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빛으로 가득한 밤의 길거리가 참 서늘하게 느껴진다. 안나도, 나도, 딱히 아무런 말이 없어서였을까. 안나가 이런저런 말을 먼저 거는 편이 아니라서 말이 없는 걸까. 아니면 내가 말주변이 좋은 편이 아니라서 아무 말이 없는 걸까.
아니야. 그게 무슨 상관이야. 둘 다 무슨 상관이야. 지금까지가 어땠는진 안 중요하다. 이제 알겠다. 왜 거리는 빛으로 가득해도 서늘했던 것인지. 나는 내 옆을 나란히 걸어가는 사람의 손을 마주잡고 있지 않았으니까.
안나는 지금까지 많이 기다려왔겠지. 응. 정말로 많이 기다렸을 거야. 그러니까, 지금같은 상황에서도 기다리게 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나는 안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안나는 내 손을 잡아주었다.
"프로듀서씨..."
안나는 집에 도착할 때 까지 꼬옥 잡고 있었다.
"저, 그, 어서 오세요."
그리고... 도착했다. 안나네 집이다.
안나는 스스로를 밖으로 꺼내기 힘들어하는 아이였다. 아이돌에 대한 이야기, 그 외 여러가지 일에 대한 상담 차 여기 방문해서 차 한잔 얻어마셨을 때도 안나는 아버님 옆에 꼬옥 붙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안나는 지금 나에게 자신이 꺼낼 수 없는 것은 가릴지라도, 꺼낼 수 있는 건 거진 다 꺼내서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 어쩌면 전부일지도 모른다. 내 마음은 밖에 드러나 있을까.
안나는 정말 나랑 게임만 하고 싶어서 부른 걸까?
그 의문이 드는 순간. 또다른 의문이 생긴다. 내 마음은 정말 품어도 되는 마음일까.
불안하다. 나는 고결한 애정의 소유자인 척 하지만 사실 내가 안나에게 품은 감정에 정신적 유대고 나발이고가 없다면. 그럼 그냥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지고 싶어할 뿐이잖아.
안나의 방에선 안나의 냄새가 났다. 냄새. 냄새... 냄새는 너무 변태같은 단어다. 갑작스레 내가 안나한테 품은 모든 마음과 생각이 전부 다 뒤틀리고 배배꼬인 무언가로만 느껴질 것 같다. 난 결국 이렇게 될 줄 알고 안나를 스카웃한걸까. 한 사람을 나만 바라보게 한 뒤, 결국 내 손으로 꽈악 움켜쥐고 싶어서?
그래. 단어를 바꾼다면? 향취? 후각적 이미지? 아니야. 안나는 지금 게임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나는 그런 것에 먼저 감각을 옮긴 시점에서 단어 따위를 바꿔봐야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내가 나를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내가 그런 이기적인 감정따위를 가진 사람이라 해도 안나는 착하다. 안나는 그런 나라도 받아들여줄 것이다. 그럼 난? 안나가 나에게 그런 감정을 나에게 가지고 있다면 난 어떡하지? 안나가 나만을 원한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아니, 대답할 순 있을까? 내가 나도 모르게 도망쳐버리면 어떡하지.
"프로듀서씨. 그..."
세팅이 끝난 안나는 아무런 말 없이 토끼 스티커가 붙은 키보드를 가리켰다.
유리코가 폎소에 놀러와서 게임을 해서일까. 이미 둘이서 게임을 할 수 있는 세팅이 갖춰져 있었다. 나는 뉴비가 올드비와 함께 온라인 rpg 게임을 할 때 일어나는 일련의 과정을 생각했다.
계정 만드는데 시간 걸리고, 튜토리얼 끝나는데 시간 걸리고, 난 안나가 도는 던전에 레벨이 안 맞아서 못 들어가고, 결국 안나와 나는 안나가 스킬 하나만 날리면 화면 안의 모든 몹이 죽는 초보자용 던전만 돌고...
그 일련의 과정은, 정말 내가 생각한 것과 똑같이 진행되었다.
"프로듀서씨."
"응."
"이제 나머지 스탯은 전부 다 민첩에 몰아주면 돼."
그래도 게임을 하는 중이라서 내면의 긴장이 풀린 걸까. 안나는 말을 더듬지 않았다. 시간도 어느새 꽤나 흘러갔다. 잠시 핸드폰을 켜 보니, 시간을 알려주는 문자판의 앞자리는 이미 십의 자리가 아닌 일의 자리를 표시하고 있었다.
"슬슬 늦었네. 으... 피곤해..."
"그럼 여기까지 할까?"
"프로듀서씨."
"응."
"여기서... 자고 가도 괜찮아요."
"......"
부모님한테 어떻게 이야기할지 생각해뒀니라고 물어볼까 했지만, 난 그 질문을 집어넣았다. 어차피 그 질문은 피하기 위한 질문이니까.
"안나. 정말 괜찮아?"
"프로듀서씨라면."
나라면...
"엄마랑 아빠... 내일 오후에 올 거에요."
"안나..."
"응?"
"......"
난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는걸 보고 나서야 안나는 안심한 듯이 웃어보였다. 세팅했던 걸 정리하고, 안나는 이도 닦고 세수도 할 겸 해서 화장실로 갔다. 바닥에 누워서 천장을 좀 바라보던 순간,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려왔다.
"......"
"프로듀서."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다.
1 사실 로코인척 한 타카기 사장
2~20 담담함
21~40 말하는 중간에 숨을 많이 고르고 말을 더듬고 잘 못함
41~60 간헐적인 훌쩍임
61~80 흑흑흑흑
81~99 엉엉엉엉
100 사실 로코인척 한 쿠로이 사장
+2
"저, 안나랑... 그..."
"응. 잘 있었어."
"안나는 해피해요?"
"모르겠어."
모르겠다. 안나는 나랑 있는 순간이 진심으로 좋은 걸까.
"프로듀서. 로코도 무슨 워드를 말해야할진 모르겠지만... 그래도, 안나는 이 순간을 계속 웨이팅해온 거에요."
"...나도 알아."
"로코의 필링이 굿이냐고 하면... 아니에요. 절대로. 프로듀서의 보이스를 들으면 그 자리에서 크라이해버리지 않을까 하는 띵킹도 했어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
"안나가 로코보다 프로듀서를 더 오래 전부터 러브해왔는걸요."
안나가 로코보다 날 더 오래 좋아해왔다라. 으으.
"로코도 양보하고 싶진 않아요. 그렇지만 어째서일지 투나잇은 안나가 해피하기만 하면 오케이일 것만 같아요. 그래서... 그냥 알고 싶었어요. 안나는 해피한지."
"어, 프로듀서씨...? 전화 왔어...?"
"응. 로코한테. 바꿔줄까?"
"응..."
"에, 프로듀서? 웨잇이에요!"
"저, 로코? 무슨 일이야...?"
"으음..."
"그, 삐졌어...?"
"아니... 하아. 예스에요. 그렇지만, 투데이는 안나가 해피하면 전부 오케이에요. 네거티브한 필링도 다 포겟할 거에요."
"고마워..."
"저, 안나. 해피해요?"
"무지무지. 프로듀서씨가 옆에 있어서... 엄청 기뻐..."
"굿이네요."
"응... 로코. 잘 자."
"안나도요."
"프로듀서씨..."
안나는 다시 핸드폰을 내게 줬다.
"으음. 프로듀서, 굿나잇이에요."
"응응. 로코. 잘 자..."
그렇게 전화는 끊겼다. 안나는 이미 잘 채비를 마쳤고. 나는... 모르겠다. 진짜로 안나랑 하룻밤 자고 가겠지.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아무 일도...
1~33 프로듀서가 자다가 새벽에 깬다
34~66 안나가 자다가 새벽에 깬다
67~99 둘 다 자다가 새벽에 깬다
100 아무 일도... 없었다!
2표 먼저 나온쪽으로 갑니다
"저, 프로듀서씨도... 이 닦을래?"
"으, 응."
나는 이를 닦으러 갔다. 나나 안나나 씻지는 못했다. 씻긴 뭘 씻어. 어떻게 씻는다고. 이 닦고 세수나 하고 마는 거지. 면도는 내일 사무실에 가서 해야지. 이를 닦고 오니 안나는 이미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저, 프로듀서씨..."
"응?"
"어... 음..."
안나는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자신이 누운 침대 옆 부분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고 있었다. 같이 자자니...
"안 돼."
"프로듀서씬, 안나랑 같이 자는 거... 싫어...?"
"내가 이상한 짓이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 그래도오..."
"......"
결국 나는 안나 곁에 가서 누웠다. 침대 옆의 벽에는 이런저런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안나가 곁에 두고 사용하며 생활의 일부가 모든 것이 나에게도 보여지고 공유된다. 안나가 매일 자는 침대는 이런 느낌이구나, 안나가 덮는 이불은 이런 느낌이구나, 안나가 이런 느낌이구나...
그리고, 지금까지 애써 맡아보려 하지 않았던 안나의 냄새가, 더 진하게 강해져서 내 곁을 맴돌기 시작했다. 내가 피하지 못하도록. 안나의 모든 형상과 향취와 촉감이 너무나도 생생하고 적나라하게 스며들어온다. 정말 괜찮은 걸까.
두 사람이 같이 누워있기엔 침대가 좁아서 잘못하면 내 몸이 안나랑 맞닿아버릴것만 같다.
"안나."
"......"
"자...?"
"......"
안나는 피곤했던 건지 금세 잠들어버렸다. 고개를 돌려서 안나의 자는 모습을 보고, 내 뇌리에 각인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아서 나는 하염없이 천장만을 바라보았다. 그랬다간 잠이 완전히 달아날 것 같았다.
불이 꺼진 방 안 천장은 검은 색이었다. 내가 눈을 감고 있어도 똑같은 검은 색이 보였다. 눈꺼풀 어떻게든 정신이 멍해질 때 까지 내리잡아도 눈 앞에 보이는 건 여전히 검은 색이었다.
"후암..."
눈이 뜨였을 땐 제법 밖이 밝아와 있었다. 하늘은 검은 색에서 진한 검푸른색이 되어 있었다. 난 아무 일도 없이 나는 안나의 모든 것에 감싸인 채로 잠에 들었던 것이다. 다행인 걸까.
아니라는 생각이 머릿속 가득히 차올랐다. 갑자기 내가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는 나쁜 사람인 것만 같아서. 안나에게는 흑심만 가득 품고 있으면서 방어기제로 그걸 숨기고 가만히 있던 것만 같다.
여기 있어서는 안 될 것 같다. 당장 여기서 빠져나가야만 할 것 같다. 내가 안나같은 빛나는 아이와 어울리는 사람인가는 둘째치더라도, 지금은 나랑 함꼐 있을 때 안나가 행복할지 몰라도, 앞으로도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앞으로도 누군가에게 행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하면 아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서고, 내가 일어서느라 난장판이 된 이불을 다시 고스란히 정리해서 안나에게 덮어줬다.
"가지 마...요..."
그 순간, 안나가 날 잡아왔다.
"안나 곁에... 있어 줘요..."
"안나, 일어났어?"
"으으응... 가지 마요..."
"안나아..."
안나는 날 도망가지 못하게 막는다. 도망가지 못하게...
난 도망치려 했어. 난 정말 도망갈 생각만 하고,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질책에 정작 당사자는 돌아보지도 않는, 그런 이기적인 사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내가 안나의 성실한 애인이 될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안 갈게..."
"프로듀서씨이..."
나는 다시 이불에 들어가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1 프로듀서는 지각했나요?
1~50 아뇨
51~100 예
+2 프로듀서가 안나네 집에서 자고 온 걸 들켰나요?
1 미사키 코토리 포함 54명
2~33 0명
34~66 1명에게
69~99 2명에게
100 미사키 코토리에 타카기 사장까지 포함한 55명
+3 만약 들켰다면 누구에게? (최대 2명까지)
51~100 토모카
안나랑 나는 같이 극장에 출근했다.
"안녕하세요."
"아, 안녕...하세요."
"아, 안녕~"
"프로듀서! 굿 모닝이에요!"
"......"
다들 날 반갑게 맞이해줬다. 어제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들 날 반갑게 맞이해줬지만... 유리코는 아니었다. 유리코는 뭔가 날 보면서 얼굴을 게슴츠레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다. 들켰다. 난 망했다.
이대로 타카기 사장님이랑 코토리씨랑 미사키씨한테 소문이 다 나서 얼마 안가선 저잣거리에서 내가 얼굴을 들 때마다 '어머어머 저 사람이 담당 아이돌한테 손을 댔대요!' 소리가 들리겠지.
온 언론에 내 얼굴이 다 대서특필 되고 말 거야! '속보 N모 사무소의 프로듀서가 아이돌과 부적절한 관계 가져' 소리가 나고 말겠지. 나는 안나랑 그저 하룻밤 잔 것 밖에 없지만!
사내에 있는 모든 아이돌들한테도 경멸당하고 말 거야! 로코는 안 그럴 거라고 믿지만! 다른 아이들은 모두 날 경멸하고 말 거야!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가 있지? 하면서!
후우. 침착하자. 왜 망상을 시작해. 내가 유리코냐.
"저, 유리코?"
"히익!?"
"무슨 안 좋은 일 있어?"
"아, 아니에요. 오, 오히려 좋은 일일지도 모를...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 오히려 좋다니.
"...유리코씨?"
"아, 에, 아, 안나쨩?"
"프로듀서씨가... 유리코씨랑... 뭔가 이야기가 하고 싶어하는 것 같은데..."
"아, 그, 으으으으..."
"유리코. 잠깐만 사무실로 와 줄래?"
"네에..."
유리코는 고개를 숙인 채 사무실로 따라왔다.
"그, 유리코."
"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언제 알았어?"
"언제 알았냐뇨!?"
"......"
"아, 그, 그게... 뭘 알았냐고 묻는 건가요?"
"안나랑 나랑 같은 방에서..."
"...히익! 지, 진짜였어요!?"
"알고 싶으면 안나한테 물어봐."
"그, 에, 그, 프로듀서씨랑 안나쨩이랑 같이 들어왔고... 그리고... 안나쨩이 요새 프로듀서씨 이야기를 엄청 많이 했단 말이에요? 저랑 같이 있거나 게임 할 때도? 그, 그런데, 오늘 아침 프로듀서씨랑 안나쨩이랑 같이 출근했고, 안나쨩은 무지무지 기뻐 보이고... 또... 그... 아... 으..."
"유리코...?"
"히에엑?! 아, 그! 아! 아니에요! 그게! 그! 그. 프로듀서씨도 뭔가 표정에 풀어져있는데다가! 무지무지 표정이 빛나 보였단 말이에요!"
어? 내 표정이 빛나 보여?"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에요. 그, 빛나 보이는 표정이 있어요. 안나쨩이 염원하던 레어 무기의 재료를 얻거나, 로코쨩이 로코 아트를 완성할 때 보여주는 그런 표정 말이에요. 프로듀서가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그, 그 표정이 너무 빛나 보이고 행복해 보이고... 그... 뭔가 저도 거기에 홀릴 것 같아서, 프로듀서씨에게 저도 모르게 막 빠져버리고 말 것 같고... 그..."
"결국 행동이랑 표정만 보고도 알았다는 거구나."
책 많이 읽어서 관찰력이 좋은 건가?
"그, 그렇지만! 그, 정말로! 정말로 행복해보이는 표정이었다니까요!? 둘이서 어떤 일을 했길래 이렇게나 서로 행복해보일까! 어떤 일을 했길래!? 서로 같은 곳에서 함께 있으면!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들끓는 애인끼리! 서로 손도 잡고! 입맞춤도 하고! 그리고. 그리고오... 그...!"
"유리코씨... 거기까지 해..."
"히이이이익! 안나쨩! 거기 있었어?!"
"다.. 듣고 있었어..."
"아! 안나쨩! 그, 그런 게 아니라! 내 말은...!"
"그리고... 유리코씨... 프로듀서씨의 웃는 모습이 너무 환해서 빠져버릴 것 같다고 했지...?"
"아! 그, 그건! 그!"
"사랑하는 건 자유니까... 유리코씨 보고... 그런 생각을 가지지 말란 말은... 안 할거야..."
"에, 아, 안나쨩...?"
"그렇지만... 질 생각... 없다고?"
"으, 으으으..."
유리코는 본의아니게 선전포고를 해버렸고, 안나는 거기에 대응사격을 했다.
나는 정말 괜찮은 건가.
이제 일하러 갑니다.
+1 무슨 일?
+2 아이돌은 누구?
나무
그래. 이럴땐 도망친다! 마침 핑계도 있다. 그래도 출근을 했으니까 일을 하러 가야한다는 핑계 말이다. 핸드폰 메모장을 켜니 날 반거주는 오늘 할 일 리스트의 맨 첫번째 일은...
'로코아트 재료'
그래. 로코가 저번에 예능에서 받아온 으으음... 과제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출연자들이 무언가를 도전하는 컨셉의 예능에서 얼마 안 가 예능에서 로코가 로코 아트를 하나 선보이기로 했었다.
로코는 이번에 우드로 된 로코 아트를 선보인다고 했다. 그러니까 조각용 목재가 필요하겠지? 음... 기왕 재로도 사오는 김에 기분도 좀 달래주는게 좋겠지. 어젠 괜찮은듯이 통화했지만 분명 속상할거야.
"유리코씨... 그래도 임자 있는 사람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유혹하려고 들 줄 몰랐어..."
"아, 그, 나는 정말로 그런 의도가 아니고!"
"어, 난 일이 있어서 잠깐 밖에 좀 갔다올게."
답례 인사가 들리지도 않을 만큼 난 빨리 나갔다.
"아! 프로듀서씨! 안녕하세요!
"안녕! 세리카!"
세리카! 우리 사무소에 꿈과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공신이다. 일등공신이 아니고 왜 그냥 공신이나고? 일등공신은 당연히 안나와 로코니까.
그리고 세리카는 민트초코를 좋아한다. 따라서 시어터 내의 대표적인 맛잘알이다. 아니라고? 민초의 멋짐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
"혹시 일하러 가세요?"
"응."
"무슨 일인가요?"
"로코 아트 재료 사러 가는데. 로코가 이번에 예능에서 로코 아트를 선보이기로 했거든."
"혹시 저도 같이 가도 되나요? 오늘 학교는 쉬는 날인데 레슨 같은 것도 딱히 없고 해서..."
아. 세리카. 대견하다. 흑흑. 대견해.
"물론이지."
"와아!"
저 순수한 미소를 보라. 세라키네 아버님 심정이 이해가 된다. 저렇게 금지옥엽으로 키운 딸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생채기 하나라도 나면? 나라도 그 돌부리를 오함마로 작살을 내놓을 거다.
아무튼 살 곳은 미리 알아놨다. 로코가 자주 가는 곳. 당연히 학교에서 학교 비품을 써서 하는 게 아니면 로코 아트는 사비를 들여서 만들어진다. 예술에 쓸 돈이 어디서 솟아나오나? 그래서 로코가 아이돌을 하는 거지.
의상을 만들거나 기존 의상에 좀 로코나이즈를 하는건 우리 회서 경비를 써서 로코 아트를 하는 거라고 봐야 할까...? 뭐 미사키씨도 도움이 많이 된다고 해주니까 괜찮곘지.
그런데 안나랑 모모코 옷을 너무 총천연색으로 바꾼건 좀 그랬어. 아무리 로코라도 좀.
"음,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아. 조금만 있으면 되는데... 자. 여기야."
이런저런 전문적인 미술 용품을 파는 가게에 도착을 해가지고 조각용 목재 달라고 하고 사가지고 그냥 나왔다. 조각칼같은 용품은 로코가 가지고 있다.
세리카가 친히 대동해서 간 것 치고는 너무 금방 끝난 감이 있지만. 장보기란건 으레 그렇지.
"프로듀서씨! 제가 들어드릴까요?"
"좀 무겁지 않을까?"
"괜찮아요! 으음. 끄으으응..."
세리카는 어린 여자애가 들기엔 나름 무거운 조각용 목재를 끙끙대면서 들려고 했다. 흑흑. 안 그래도 돼...
"그냥 내가 들고 갈게."
"네에..."
그렇게 장을 좀 짧게 보고 오니 문 앞에서 로코가 기다리고 있었다.
"프로듀서! 웨이팅하고 있었어요! 세리카! 굿 모닝이에요!"
"아! 로코씨! 안녕하세요!"
난 조각용 목재를 로코 아트 작업장... 이라고 해도 그냥 용도가 없어서 놔두는 이지만. 아무튼. 거기다가 옮겨뒀다. 로코는 목재를 바라보면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이윽고 조각칼을 들고 세심히 나무에 손을 댔다.
"우와! 이건 뭔가요?"
"세리카! 워치 아웃이에요! 데인져러스해요!"
"어, 데인져러스요?"
"아, 그러니까! 잘못하면 아야! 해요!"
아. 귀여워. 로코 친절해. 영어를 쓰다가 세리카가 모르겠디고 하니까 그냥 아야 한다라니...
"네? 으음... 그러면, 어, 음."
"수고했어. 세리카. 이만 가도 괜찮아."
"아! 네! 프로듀서씨!"
그렇게 로코랑 나만 둘이 남았다.
+1 로코에게 뭐라고 할까
+2 로코의 마음은 얼마나 움직였는가
세이 폴 유!
"프로듀서."
세리카는 갔고, 이제 방에 있는 사람이라곤 나랑 로코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로코도 나도 모르는 듯 해서 나는 로코의 이름을 불렀고 로코도 나의 이름을 불렀다. 로코는 조각칼에서 손을 놨지만, 뒤를 돌아보진 않았다. 나는 로코가 못 보게 고개를 숙인 채로 로코의 이름을 속으로 말해본다. 로코. 로코. 로코...
"뭔가 로코에게 머스트 스피크 해야만 하는 이슈가 있는 거에요?"
말해야만 하는 것? 있다. 당연히 있고 말고. 아니. 사실 없을지도 모르지. 아니, 모르지가 아니라 그냥 없었다. 모르겠다. 로코는 어제 그냥 쿨하게 넘겨줬지만, 난 여기서 등을 보이기엔 내 마음은 너무나도 로코에게 달라붙어 있었다.
말해야만 하는 무언가가 없는지 있는지에 대댭해야 할까. 나는 그냥 로코랑 함께 있고 싶을 뿐인데. 그게 다인데. 그냥 지금은 둘이서만 같이 있고 싶다는 한 마디에 로코는 괜찮다고 해 줄까.
"나도 잘 모르겠네. 그냥 지금은 둘이서만 있고 싶었어."
"프로듀서..."
"로코."
내가 안나에게 가진 마음이 각별하다고 해서,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할 만큼 안나를 소중히 여긴다고 해서, 로코에게 가진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커졌으면 커졌겠지. 난 안나랑 로코가 둘 다 좋다.
나라는 인간은 얼마나 이기적인지. 로코는 얼마나 꾸욱 참고 안나에게 나를 양보해줬을텐데. 그런데, 안나와 로코와 내가 셋이서 함께 있다면 서로가 모두 행복할 거란 생각이 든다.
삼각관계라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닌데도. 삼각관계가 보통 한 사람을 나머지 두 사람이 좋아해서 생기는 것임을 알면서도. 나는 둘 모두가 좋다. 둘 모두를 원한다. 내가 안나와 로코 모두를 위해줄 수 있다면 좋겠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로코."
"......"
"I love you."
"...엣?"
나는 아무런 샐각도, 지체도 없이 로코에게 내 마음을 내뱉었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말 중에서 최선일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무선 말부터 하고 이렇게 말하면 로코가 내 마음을 알아줄 거라고 믿고 있을 뿐이다.
"프로듀서...?"
"로코."
"...지금 와서 갑자기 로코를 러브한다고요?"
"방금 말했듯이, 아이 러브 유."
"......"
로코는 아무 말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좋아해. 로코. 좋아해."
"프로듀서어..."
"그냥. 그 말이 하고 싶었어. 그게 다야. 그 말만 들어줬으면 했어."
나는 옳은 말을 한 걸까. 그러한 의문이 드는 시점에서 긍정적인 대답은 나오지 않을 것만 같다.
나의 눈은 로코만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로코의 눈동자는 오직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1 로코가 할 말
+2 로코는 기분이 상했나?
1 7첩반상했다
2~33 안 상했고 그냥 프로포즈에 감동했다
34~66 안나에게 속으로 삐질만큼 상했다
67~99 당장 안나에게 달려가서 펑펑 울고 싶을ㄷ만큼 상했다
100 사농공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