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곳에 힘없이 앉아있는 그 녀석의 모습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그 녀석은 별명처럼 고양이같이 온갖 곳을 쏘다녔다. 실종이라고 해도 한 곳으로 줄창 가지는 않았다. 그래도 한번이라도 갔던 곳, 두어 번 정도로 겹치는 곳 등을 차근차근 짚어가며 들인 수고는 운좋게 맞아떨어질 때가 많았고, 그런 노하우(라고 쓰고 사서 고생이라고 읽는)를 익힌 후 부터는 얌전히 기다리기보단 행동으로 나서곤 했다.
지금 향하는 이 곳은 그 기억속 매뉴얼에는 없다. 하지만, 언젠가 갔었던 곳이기에... 그리고 오늘은 한번도 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곳이기에 확신이 들었다.
신식 아파트에서 조금 더 뒤로 가서, 오래되었지만 조금 깨끗한 아파트를 지나, 가장 인기 있다는 그네조차 텅 비어있는 놀이터의 옆에는 누가 봐도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상점가가 있다. 촌스럽기 짝이 없는 곳. 옛날에는 희었을 누런 간판들은 그 세월을 짐작케 했다. 놀랍게도 아직 영업 중이다.
전에 그 녀석을 봤을 때에 녀석은 실종 중이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이런 곳에 왜 와있었는지.
다 쓰러져가는 세탁소, 부동산, 탐정 사무소(실화냐)를 지나 어느덧 구멍가게 앞이다.
그러나 곧바로 가슴이 철렁해졌다.
'임대'
....그러니까, 망했다는 거구나. 뭘 파는지도 모를 가게, 그럴만도 하지만.
그래도 이성이 이미 놓아버린, 혹시 모를 희망은 그 굳게 닫힌 문을 두드렸다. 이젠 정말로 지쳐버렸다.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비현실의 쾌감은 잠시 나를 하늘로 들어놓았다. 그러나, 녀석이 보내는 두려움에 찬 눈빛에, 다시 추락한다. 손은 아직도 그 감각을 잊지 못해 찌릿거렸다. 아프다. 점점 더 아파왔다.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오만이 잠재우지 못한 내 죄책감의 값을 나는 제대로 치루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걸까.
그 눈빛은 서서히 경멸을 담고 있었다.
"미안."
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녀석은 뒷걸음질치며 다급히 가방을 뒤졌고, 나는 직감적으로 그게 호신용 스프레이를 꺼내려는 손짓인 것을 알았다.
순진한 표정의 그 녀석이 너무 오랜만이라 눈물을 흘릴 뻔 했다. 잠시 거짓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 참던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올라 결국 금기도 깨버렸던 아까 전의 나를, 그럴듯한 포장지로 감싸 녀석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녀석은 겉모습만 보고 좋아하겠지. 그야 속은 영원히 꺼내볼 일이 없을테니.
"평소에는......"
지갑에 있는 사진 속의 우리는 정말로 행복해보였다.
".....평소의 넌 아주 개차반이었지."
"으, 으응?"
"우린 아이돌이었고."
"와우, 진도 빠르네. 못 따라가겠어!"
"그렇기 때문에 난 제멋대로인 널 수습하느라 매일 고생했고... 오늘도 실종된 널 찾으러 나왔다가...."
"문자 그대로 고생하게 된거구나."
"....그래."
"......."
그래. 딱 이 정도가 좋으려나.
쓸데없이 집중해서 이것저것 털어놓다간 너무 감정적으로 몰입해버릴거다. 그러다가 중요한 요지를 놓치고 말아. 이 녀석한테 이 세계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하지 않을까.
하지만, 어떻게?
이 세계의 녀석은 냄새를 맡지 못하고, 이 세계의 란코는 아이돌을 하고 있어.
전자의 경우에는 능력이 반대된 거고, 후자의 경우에는 굳이 얘기하자면 성향이 반대가 된거지. 두가지 케이스밖에 내 손에 없지만 그 마저도 정보가 적다. 알아낸다고 해도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고.
"음... 그 녀석은 냄새 페티쉬가 있었지. 공공장소에서조차 킁킁거리며 흥미로운 냄새를 좇아 어딘가로 멀리 가버리려고 했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군.
"게다가 쓸데없는 스킨쉽이 잦았지. 그 둘이 합쳐지면 아주 곤란했다고. 희한하게 방송에서 그런 짓거리를 해도 팬들은 좋아했지만. 꽤 인기 있었어, 그 녀석."
"재밌는데."
"이쪽의 넌 아이돌 같은건 생각해보지 않은건가."
"흠~.... 그냥 '너'라고 해도 괜찮은데. 이쪽이니 저쪽이니 복잡하잖아? 게다가 네 앞에 지금 있는건 바로 나니까."
그게 중요한건가. 의문은 들었지만 일단 맞춰주기로 했다.
"그래. 넌 아이돌 같은건 생각해보지 않은건가."
"응. 나는, 말하자면 학구파랄까. 문헌 읽기는 잘 한다고 했잖아. 학구보단 실험을 조금 더 좋아하지만."
실험이란 말에 자동적으로 몸이 반응한다. 그래. 그 녀석의 실험이라면 아주 이골이 났다. 차라리 정체불명의 실종이 나을 정도였다. 나는 그 녀석을 찾는다. 찾는 동안은 마음이 힘들지만, 찾고 나면 그 모든 것이 날아가는 느낌이 든다.
녀석은 아무 문제 없다는 듯이 환하게 웃곤 했다. 그럼, 같이 앉아 그저 시간을 보내는 거다.
다만 실험이 얽힌다면 달랐다. 녀석은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고 정신을 갉아먹었다. 아주 꼬인 성격이 아니라면 굳이 왜 이런 실험을 할까, 싶은 사소한 작은 것들에 몰두했다. 그럴 때는 나라도 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혼나는 것은 내 쪽이었다. 그 날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동생이 있는 손위형제의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녀석이 결제를 해둔 것인지, 원래 무료인건지 방 번호만 쳐도 저절로 연결이 되었다. 실험삼아 '칸자키 란코'를 구글링해본다.
칸자키 란코
가수
346 프로덕션
칸자키 란코, 가수.
프로필 사진 속 란코는 말끔히 메이크업을 한 채 웃고 있다.
영정사진과 같은 프레임이 눈 앞에 겹쳐진다. 몇번 눈을 비비자 그 환영은 사라져있었다.
"별 일이군..."
정말 여러모로.
이 곳의 란코 역시, 이 곳의 녀석과 마찬가지로 나를 모르겠지.
'평행우주'를 검색해본다.
[넓은 의미로는 다중우주를, 좁은 의미로는 양자역학의 해석 중 하나인 다세계 해석만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다세계 해석의 경우 평행세계를 마치 나무가 자라듯, 시작점은 같더라도 가지가 달라지듯 독립적으로 분화된 세계들로 본다. 이 갈라지는 시점은 현실에서 있었던 일과 다른 일이 벌어질 때 발생하는데....]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첫째, 이 곳에는 내가 존재할까. 이 곳에 내가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두 세계의 '나'가 하나의 세계에 있는 셈이 아닌가.
둘째.
란코가 아이돌을 하기로 결심한 세계
시키가 냄새를 맡지 못하는 세계
시키가 화학이 아닌 물리를 공부하는 세계
시키가 아이돌을 하지 않는 세계
이 모든게 하나의 독립된 이유에서 시작되었단 말인가.
셋째.
그 이유는 원래 세계의 '누구'로 인한 이유였는가.
가령 세계가 분화된 이유가 '란코가 아이돌을 하기로 결심했다'라면, 이 곳은 란코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세계가 되는 것인가....
애초에 '원래' 세계라는 개념은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며 흐려졌겠지... 이 세상 사람의 인구에 !를 붙인만큼 많은 세계들이 존재할텐데....
냐하. 녀석이 웃었다. 비웃는 것도 같고, 할말이 없어 대충 웃어넘기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원래 세계의 아스카쨩은 어땠어?"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바라보자면..... '아픈 아이.'"
"병약 속성?"
"아니."
녀석이 젖은 머리를 이끌고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리곤 킁킁. 하는 소리를 내며 코를 내 무릎에 쳐박고 몸을 뉘인다. 본인 입장에서는 초면인 사람이라며? 라고 간단히 지적했으나, 그 쪽의 시키쨩을 따라하고 있을 뿐이라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사춘기 특유의, 마음이 아픈 아이... 같은거."
"아아."
날 모르는 그녀는 어색하다.
이 녀석은 시키다. 그 녀석도 시키다. 손으로 녀석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면 손끝에서 사르르 부서져 금세 손가락을 벗어나는 감각까지 똑같은데, 같은 사람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있어봐야 신경만 긁고 물건을 어지럽힐 뿐이지만, 오래 키워온, 내가 사랑하는 고양이.
그리고 전에 키우던 고양이와 정확히 똑같이 생겨선 사랑스럽게 굴지만, 어딘가에서 주워왔을 뿐인 고양이.
본질적으로는 무늬의 위치까지 정확히 같은 모양에 같은 품종의 고양이지만...
주인은 알겠지. 둘은 다르다는 것을.
이런 고양이의 예를 이해할 수 있기 전까지는, 원래 세계에 남은 미련이 뭐냐는 녀석의 질문에 답할 수 없을 것이다.
"너와 같이 아이돌 활동을 한건 기폭제 역할을 했지."
"내가 그렇게 고민거리였어?"
"...모르겠어."
"아하."
"언제는 며칠간, 잘 터지는 폭탄을 만들어보겠다며 모두를 공포에 떨게 했어."
"그 쪽의 시키쨩, 아이돌이 아니라 테러리스트였구나."
"그러던 중 실험실로 날 초대했지. 오자마자 방의 중간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있는 소파에 날 앉히고 펄프가 다 가라앉은 오렌지 주스를 줬고, 나는 날도 날이니 그럭저럭 참아주려고 했어. 그런데 뜬금없이 말하더군. 내가 앉은 소파 밑에 폭탄이 있다고."
"위험하잖아, 그 녀석. 폭약 냄새라거나, 나지 않았어?"
"넌 냄새를 맡지 못해서 기준같은건 모르겠지만... 보통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걸 냄새로 알아맞히지는 못해. 아무튼 녀석은 말했어. '니 엉덩이 아래에 폭탄이 있어, 일정 시간이 지나면 터지게 해뒀지만 니가 일어나면 바로 폭발할거야' - 이러니 저러니 해도 폭발할거란 말이지만, 그나마 앉아있으면 질긴 목숨을 이어갈 수 있을거란 말이기도 해. 그 시간을 회유하는데에 쓰려고 했지만 녀석은 내 발버둥치는 모습을 더 즐기는 듯 했어. 느물거리며 내 질문을 회피하고, 녀석의 이야기만 꺼냈지. 어느새 우리의 대화는 샛길로 빠졌고 약속된 시간이 되었어. 이윽고 펑, 하는 소리가 들렸지...."
"지금 내 눈 앞의 너. 귀신인거 아니지?"
"불꽃놀이였어."
"엥?"
"별안간 커튼이 활짝 열리면서 펑, 퍼벙 하는 소리가 들리고, 눈을 뜨니까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있었어. 처음 봤을 땐 이상한 위치라고 생각했지만 그 소파가 있는 자리야말로 그걸 감상하기에 제격인 자리였던거야."
정확한 사정은 전부 털어놓지 않았지만 정황상 내가 란코를 원래 세계에서 알았다는 것은 녀석도 아는 것이다. 그것도 잘 알았다는 것을.
"네가 원래 세계에서 알던 사람들 중 가장 행방이 확실하니까."
"그건... 맞지."
본인을 포함하지 않는건, 두개의 단서를 후에 종합하길 위함이겠지.
"그 전에 네가 할 일이 있어."
"뭔데?"
"데이트 코스 짜두기."
"뭐?"
"넌 날 아는 것 같지만, 난 널 모르니까. 그런데 앞으로 우리는 협력할 관계잖아? 이런 정보의 불균형은 옳지 못하다고 봐. 옳은 주장이지? 옳소옳소~ 그러니까 내일은 '시키쨩&아스카쨩의 친해지길 바래' 프로젝트! 어디든 좋으니까 좋은 데이트 코스를 짜주길 바래. 그럼 난 이만-"
".....그건 그렇다치고, 넌 실종파가 아니었나. 무슨 코스를 짜두라는...."
"그야,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실종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알쏭달쏭한 말 한마디를 던진 녀석은 바로 드러누워 골아떨어졌다. 아니, 자는 척을 하는지 머리를 건드려도 가만히 눈을 감은 채였다.
쏴아아, 물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치카치카- 하고 양치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녀석답기도, 답지 않기도 했다. 녀석은 게으름을 피우지만 할 일에는 무시무시한 집중력을 발휘하는 녀석이니까.
조금은 더 잠에 들어있고 싶지만 녀석이 준비를 시작한 이상 나도 준비를 해야겠지. 단, 외출복을 그대로 잠옷으로 쓴 상태에서 준비라고 해봐야 양치와 세수밖에는 없다. 그러고보니 옷을 좀 사야하려나...
디저트 카페에 와서는 카운터에 있던 케이크 한조각과 괴상한 이름의 칼로리 덩어리 음료를 두잔 시켰다. 버저가 울리자 음료를 가져오는 녀석의 모습은 생소했다. 녀석은 원래의 녀석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으나, 이럴 때는 꼭 외모만 같은 쌍둥이 같았다.
손에 짐을 들고도 문을 열어주는 건 나.
스케줄 후 지쳐도 시킨 음식을 테이블로 가져오는 것도 나였다.
줄곧 그랬었던 것 같다.
언제부터였더라.
"맛있겠네. 사진 찍어둘래?"
"왜?"
"이세계의 음식인걸."
나는 웃고 말았다.
더 황당한건 내가 이 가짜 평행세계로 전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나도 납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차라리 이세계의 너를 찍겠어. 음식보단 도플갱어가 더 신기하니까."
"도플갱어라니? 둘 중 하나는 가짜란 얘기야? 무례하긴. 짝퉁 아스카 주제에."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 그리고 아직 이 세계에 또 다른 내가 있는지 확실하지도 않잖아."
"아무튼, 얼른 시키쨩과 케이크 둘 다 예쁘게 찍어줘. 이 다음에 좋게 추억할 수 있게. 내가 이 설탕 덩어리 음료를 마시며 high해지는 순간을 꼭 기록해주길 바라."
"위험하잖아. 행복해진다고 해줄래?"
"뭔 상관이람."
"약물중독 같잖아. 게다가 하이해진다는건 일시적인거에 불과하니까."
"그럼 날 지속적으로 행복하게 만들어봐."
"찍는다."
성가시는 녀석.
...내 말대로면 사람은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는게 되는군. 인생은 굴곡 없는 직선이 아니니까. 그렇다고 해도...
난 지금 꽤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더 황당한건 내가 이 가짜 평행세계로 전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나도 납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족관은 어떻게 고른거야? 첫번째 코스는 너와 시키쨩이 좋아했던 디저트 카페. 수족관도 자주 왔었나보네."
"아니, 같이 온 적은 한번도 없어."
최근은 많이 바쁘기도 했지만, 혼자서라도 수족관 같은 곳을 올 여유가 없었다.
"다만.... 오늘은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한 자리니까."
"와~ 이 물고기 예뻐."
"........"
"으응, 그래서?"
"물은 말이지. 투명하고 깊어. 높은 빌딩에서 그 아래의 세계를 내려다보면 뛰어내리고 싶은 것처럼, 푸르른 물을 보면 뛰어들어 잠기고 싶어져."
"아스카쨩도 suicidal?"
"아니, 그냥 단순한 감상이야. 폭신한 솜사탕을 보면 만지고 싶다거나, 그런 감상. 넌 그런 생각한 적 없어?"
"있었어."
"그래. 그런거지. 바다라거나, 사람이 없는 밤의 수영장의 물을 보면 모든걸 담고, 모든걸 품고, 생명을 준다는 감상에 젖게 돼. 그건 말하자면 하나의 인격체야."
쏟아져내리는 달빛을 그대로 담은 물은, 손으로 한웅큼 떠서 다시 흐르도록 내버려두더라도 그 빛을 담고 있다. 물에 쓸려간 손은 그대로 작은 물의 장막에 감싸여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 속의 생명체 - 깊은 바다의 초롱아귀든, 열대 바다의 작은 피라미들이든 본질은 같아. 우리처럼 코로 공기를 들이마셔서 호흡하는게 아니라 물에 잠겨 아가미로 호흡하지. '물 안에 살고 있다'는 디스크립션은 말로는 쉬워도 결코 간단하지 않아.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이지. 어느 날 하늘에서 헤엄치는 커다란 고래를 보게 된다면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거야. 그런 비일상을 여기선 마주하게 돼."
그리고 물은, 그들을 안전히 품어준다. 단단한 유리로 육지와의 커트라인을 그리며.
"그런 인격체에 살고 있는 그들을 보면, 묘한 감정을 느껴... 꼭, 나의 내면을 마주보고 있는 것 같은...."
"....말인 즉슨, 저들이 아스카쨩의 분신이라는 뜻?"
"조금 간추렸지만, 비슷할까나."
"냐하~ 저거랑 비슷한 생선 회로 먹어본 적 있는데."
"야."
녀석은 시키지도 않은 회 얘기에 열중했다. 미국 주방장이 어설프게 이랏샤이마세~를 외치며 녀석을 맞이했던 것부터. 스시 오마카세는 생각보다 가성비가 괜찮았다는 둥. 미국의 물가를 이해할 수 없는 내가 공감하기엔 어려운 경제 얘기로 또한번 흐름이 새더니, 다시 그 주방장으로 돌아와 회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맛있었어, 50달러의 행복~ 1인분이지만."
"오전이니까 애들도 많이 오는 횟집... 아니 수족관에서 그런 얘기를 너무 하는건 좋지 않을 것 같아."
"아스카쨩이 더하잖아."
우리는 조금 더 걸었다. 길게 이어진 복도는 물빛이 돌았다.
이 곳의 검푸른 하늘 안에는 작은 생명들이 날갯짓을 하며 큰 시각적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그림자가 녀석의 얼굴에 드리워지니 꼭 바다 속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즐거움에 잔뜩 커진 파란 눈동자는 오늘따라 유독 깊어보였다.
"아아, 좀 있으면 상어 수조래. 표지판에 있어. 조금만 더 가면 불가사리를 만질 수 있는 코너도 있대!"
아주 신났군.
"안 그래도 곧이야. 아, 이제..."
천장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비교적 이른 시각임에도 조그맣게 웅성대는 소리가 들리는걸 보면 확실히 상어 수조다.
수조는 거대했다.
시키는 비명을 질렀다. 란코 때문이 아니라, 갑작스레 녀석을 잡아채고 뛰기 시작한 나 때문이다.
뛰면서 - 물과 같은 공기를 거친 숨으로 들이 마쉬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물 속으로 가라앉을수록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동시에 또 다른 거품들은 생겨나는 그런 과정을 반복한다.
그러던 나를 녀석이 멈췄다.
다급한 손이 상의를 붙잡았다.
도망을 친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나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그래서 녀석의 의지를 따랐다.
"....괜찮아?"
그 목소리는 속은 셈 친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다정했다.
나는 괜찮지 않아.
하지만, 괜찮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
"왜 그랬어?"
나도 내 인격이 앞에 실체한다면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면목? 잘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은 확실히 없다.
다른 세계의 니노미야 아스카임을 증명할 자신보다도 없는게 내가 란코를 마주할 자신이다.
"떨지 마. 탓할 생각 없으니까."
"미안해."
"미안해하지도 마. 상황파악도 안 되는 주제에."
"......."
"왜 도망치고 싶었는지 생각이 나면 그 때 전부 얘기해주길 바랄게. 난 그쪽의 아스카쨩과 칸자키 란코, 그리고 이쪽의 아스카쨩과 칸자키 란코에 대한 것 중 아무것도 모르니까. 너도 이쪽의 아스카쨩이 '죽었다'는 것 때문에 지레 겁먹은 건 아닐거라고 생각하거든. 그것 자체로는, 적어도 도플갱어를 마주쳐서 죽을 일은 없어진 셈이니까. 그렇지?"
모르는 이의 죽음을 도플갱어의 법칙과 연관지어 가볍게 말하는 폼이 녀석다웠다.
그러나, 조금 솔직해지자면 나 또한 '모르는 나'의 죽음이 유감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그래서 녀석의 정의에는 약간 마음이 놓였다.
저 수조의 물고기떼가 날 비웃듯이, 혹은 경멸하듯이 바라보는 것 같다.
란코는 나를 쫓아올까.
그 때도 나는 피할까.
물고기떼는 빙글빙글 돌며 점점 다가와 내 안을 침범했다. 그리하여 나의 머리 속도 물고기떼가 만들어내는 파동처럼 빙글빙글 돌게 되었다. 작은 소용돌이는 녀석과 나와 란코를 싣고 심연 안으로 안내했다.
그런 환상이 보였다.
홀로 선 고독은 남겨진 자의 아픔보다 적다. 부등호의 입은 분명 란코를 향해 벌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소유하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
금붕어라는 작은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그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건 아니다. 밥은 제 때 줘야하고, 어항 물도 갈아줘야 한다. 그 초점없는 눈이 무엇을 더 원하는 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그들이 요구한다고 알려진 것은 잘 따라줘야한다. 그것이 바로 그를 소유한 나의 책임이니까. 그를 건져내고 돈을 내 상품으로서 그를 소유한 것은 나의 선택이니까.
학교는 거대한 둥지이다.
누군가는 탁란지라고 했었다.
나는 란코를 소유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란코의 작은 둥지는 소유하고 있었다. 란코는 나를 믿고 기꺼이 그 공간을 내어주었다. 나 또한 그 공간에 뻔뻔하게 들어가 내 손으로 란코를 붙들었다. 나는 란코의 손을 잡아 내게 기대게 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두 명의 별개의 "아픈" 아이들 따위가 아닌, 둘이 되었다.
그것을 망쳐버린 것은 나다.
책임을 미루었다.
미룰 사람이 없음에도 미루었다는 것은 곧 버렸다는 것이다.
책임을 버린 대가는 부메랑과도 같이 돌아왔다. 그 부메랑은 천천히 내 뺨을 스쳐갔다. 별로 느껴지지 않는 아픔에 나는 눈을 감았다. 부메랑은 내 피부에 닿자마자 폭발물처럼 조각나 흩어진다. 그 조각들이 다시 온다. 망가져버렸더라도 부메랑이라는 듯이.
그 조각들 중에는 란코였던 것도 있지만 아니었던 것이 훨씬 많았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런 조각들이 아닌, 란코였다.
책임은 무거웠다.
무게를 지탱하는 얇은 줄은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목을 묶어두었다. 그 때 그녀를 발견하고 들어올릴 수 있었을까? 아마 발견했어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눈이 먼 겁쟁이인 나는 그녀를 보지 못하고, 그녀의 줄은 툭 끊어졌다. 잠깐만, 무거워, 그런 말을 하며 발버둥쳤다.
아무리 그래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아서, 나는 눈을 떠 내 위의 란코를 보았다.
그녀는 조금 부어있었고 안색이 창백했다.
"어쨌든, 그래. 모른다는 것은 조금 멍청할 지도 몰라. 탓할 만한 일인지도 모르지. 다만 달리 말하면, 그저 힘이 없었던 것 뿐이야. 힘이 없으면 걷다가 픽 넘어져버려. 대개는 그런걸 탓하지 않아. 떠올리면, 무릎에 상처가 나 아픈 기억이겠지만, 그렇다고 바보 같았다며 화를 낼것도 아니야. 모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걸? 무릎의 상처를 소독하고 흉지지않게 연고를 발라주면서 하는 생각은, '그래, 앞으로는 똑바로 힘을 주고 걸어야지' 정도면 돼. 배워나가는거야."
"......"
"깊은 정도에 따라 일주일에서 한달이 걸리겠지. 연고가 안 좋으면 착색이 될 수도 있고 말이야. 피부가 희면 착색된 부위가 거슬릴 수도 있겠지. 그래도 어쩌겠어, 이미 일어난 걸. 거울을 볼 때마다 넘어졌던 기억에 아파할 수는 없잖아."
나는 할말이 없었다.
"흉터를 긴팔로 숨기고 있는 녀석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얼굴인걸?"
"그런게 아냐."
"흐흥, 이번엔 대답이 빠르네."
"......"
"넌 시키쨩한테 동정심을 가지고 있는거야?"
"....질문의 의도를 잘 모르겠어."
"Knowledge is power, Francis Bacon. 아는 것이-"
"그만해."
"흠? 이번엔 제대로 말했는데. France is bacon."
"....그러냐."
"응. 아는 것이 힘이다, 라고 프란시스 베이컨이 말했다. 베이컨이란 작자가 또 무엇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냐하."
나도 녀석이 가는 곳을 따라가며, 수족관의 생명들에 대한 적당한 반응을 했다. 불안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녀석에 맞추는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저기...."
"네?"
그러던 중 직원에게 붙잡혔다. 녀석도 그렇고 나도 불법적인 행위를 하지는 않았는데.
"그게...."
"무슨 일이죠?"
"....어, 어떤 손님이, 손님들이 이걸 두고 가신 것 같다고..."
"두고 가...?"
"네. 이 봉투.."
"봉투를 들고 온 적은 없는데요. 착각하신 것 같...."
"아, 감사합니다."
"시키?"
"내꺼야."
"아... 그래?"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네네, 감사합니다."
시키는 자연스럽게 봉투를 받아들고 꾸벅 인사까지 했다.
봉투 같은건 가져오지 않았는데....
"너, 뭐야 이게?"
"초콜릿이 들어있군. 맛있겠는걸. 그리고 메세지 카드가 있어. '아스카쨩에게'라고 적혀 있는."
".....설마 란코가?"
"응. 이걸 건네준 손님에 대해 간단하게 '누군가'라고 하거나 적당히 말할 수도 있었는데 왠지 누구인지를 숨기려 하는 것 같은 태도였어. 칸자키 란코를 알아보고, 오프를 즐기는 연예인에 대한 예의를 차려준거야. 어쩌면 저 손에 소중하게 쥐고 있는 클립보드에 칸자키 란코에게 받은 싸인이 있을 수도 있겠네. 터무니없는 짓을 한건 아냐."
"...응, 넌 그러지 않을테니까."
란코의 메세지카드는 검은 바탕에 회색 레이스를 두른 모양새였다. 하얀 펜을 평소에도 들고다니는걸까, 멋들어진 흰 글씨로 '아스카쨩에게'라고 적혀있었다. 그러고보니 란코 - 그 쪽의 란코도 수집하는 것을 좋아했다. 주로 펜과 연필들을 모았었다. 집에서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취미라고 했다. 그래서 문구점 앞을 지나갈 때 유독 나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었다. 그렇게 고민고민하다 겨우 고른 펜들로 열심히 그렸던 스케치북은 자주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종종 마음에 드는 것은 사진으로 남겨 나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란코는 그림에 꽤 재능이 있었다.
언젠가 멀리 떨어지게 되면 나에게 직접 그린 그림으로 엽서를 만들어 편지를 쓰겠다고 했었는데.
"뭐해? 안 열어보고."
"....응."
수채화도구로 그린 그림엽서들이 많으니 이때까지 사지 않았던 수채화 도구를 사서 쓸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나는, 연필로 그린 스케치나 펜화도 란코가 그렸다면 괜찮다고 했고, 란코는 웃었다.
메세지 카드 같은 것도 모았던가. 이 메세지 카드는 상당히 고급인 것 같다. 레이스도 섬세하고, 종이의 질도 좋다.
* * * * * * * *
아스카쨩에게.
아스카쨩... 맞는거지? 란코야.
어떻게 된 사정인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를 꼭 다시 만나고 싶어. 그리고 얘기하고 싶어.
시간이 된다면 이쪽의 번호로 문자를 남겨줘.
오늘 안이라면 전화도 괜찮아.
* * * * * * * *
"역시 아스카쨩도 먹고 싶었구나~ 갈까갈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까 회 얘기하면서 엄청 먹고 싶어졌어!"
녀석이 다시 그 얘기를 시작한다.
기념품 가게의 생선 인형을 들고, 중간중간 큰 소리로 웃으면서.
그 점을 빼면 시키의 웃음은 매력적이다.
냐하하- 라며 얼버무리는 듯한 말버릇이 싫지는 않지만, 그래도 정말로 웃는게 더 좋다.
근래 이런 웃음을 본 것은 드물었다. 특히 본인이 직접 이야기를 하며 웃는건...
적절한 상황과, 그 때로 돌아간 것 같은 추억의 냄새와, 약을 살짝 한 듯한 아드레날린이 섞여야 가능한 일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래서, 결국은 기숙사로 돌아왔을 때 내 룸메이트 알렉스가...."
물론 나에게 약을 했다고 고백한 적은 한번도 없다.
다만 유학 시절 입에 댔을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쪽의 사람들은 대마초, 즉 마리화나를 담배처럼 접한다. 담배와 같다는 것은 고등학생도 마음만 먹는다면 접할 수 있다는 뜻이다. 콜로라도에서 처음 합법화가 되어 그 이후로 다른 지역도 합법화가 되고 있다. 녀석이 유학을 간 것은 대도시 쪽. 건물 내부나 조금 어스레한 뒷골목에서는 그 특유의 향이 나겠지. 그럼 그 향에 이끌린 녀석은 호기심을 못 참고....
아, 정작 이 녀석은 그걸 맡지 못하려나.
가능성은 두가지이다. 이쪽의 시키는 냄새는 못 맡지만 다들 하니 한번쯤은 해봤을 것이고, 저쪽의 시키는 냄새가 좋냐 싫냐에 따라 했는지 안 했는지가 갈릴 것이다. ....그렇다면 이 녀석은 적어도 한번은 해봤다는 얘긴가?
....억측이군. 진실은 본인밖에 모르겠지.
"듣고 있어?"
"어?"
"기분 나빠..."
"...미안."
"......기분 나빠..."
"근데 왜 그 인형을 들고 계산대로 가져가면서 나한테 그런 눈빛을 하는거지?"
"냐하하- 풀어줘."
"정말로 그 멍청하게 생긴 인형을 사면 기분이 풀릴거라고 생각해?"
"음.... 아! 다시 보니 정말로 멍청하게 생겼네."
"보지도 않고 골랐군."
"응. 사실 다 멍청하게 생겨서 말이야. 뭐든 다 똑같을거라고 생각해서."
"디자인팀이 대충 만들었네."
"생기다 만 것 같아."
"텍스쳐는 그나마 네가 고른게 낫군."
"다른 것들은 뻣뻣하고.. 멍청하게 생겼더라도 질감이 좋은게 낫잖아? 근데 이것도 요즘 나오는 모찌 인형들에 비하면 부드러운것도 아니지. 오히려 화장실 매트같아."
구경에도 정신이 팔렸고 녀석이 쓸데없이 신나서 자기 얘기를 털어놓는 것도 시간이 오래 걸린 요인 중 하나였다. 그리고 또, 상상치 못한 인물과 조우했기에... 잠깐은 그 충격에 잠겨있던 것 같다.
"저녁 먹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나."
"이른 저녁도 좋지 않아? 아무데나 들어가는게 아니라 맛집을 하나 콕 집어서. 그렇게 걸어가다보면 적당히 배고픈 시간이 될거야."
"그럴지도.... 그럼 맛집을 찾자."
"우선 이 주변에 유명한 횟집은.. 냐하, 아는게 없다."
"그럼 아는것처럼 서두를 떼지 말아줄래?"
"인간은 허세를 부리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야. 아스카쨩도 그렇지 않아?"
".....가끔은."
"오오, 어떤 허세를 부려?"
"그냥.... 강한 척."
"아아, 학교에서 한 주먹 날렸구나."
"그런 물리적인 게 아냐."
란코가 자살시도한 후의 한달동안 나는 그 강한척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야 란코는 나 이외의 주변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프로듀서도, 시키도 몰랐다. 어쩌면 아직도 내가 학교에서는 혼자 다니는 고독한 부류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프로듀서는 눈치 따위 없으니까. 그리고 시키는 내 학교 생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특별히 내 귀가 시간에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로 나를 못 믿지도 않았고, 친구도 그냥 그럭저럭 사귀겠거니 생각했다. 당신들의 자식 또한 다른 자식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친구를 사귀고 중간은 가는 성적을 거두는 평범한 학교 생활을 하기를 기대한 것이다. 그 기대가 선입견이 되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부모라도 그럴 것이다.
란코는 혼수상태이다. 아파서 병원에 있다고 둘러대고, 병문안을 간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가장 친했던 친구가 자살 시도를 해서 혼수상태에요. 죄책감 때문에 가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요"라고 말하지 않아도, 병원에 간다고 하면 두말없이 허락해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란코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세계가 약속이라도 한 듯 그 날 이후로 상황들이 달라졌다. 모든 상황이 나를 겨냥하는 것 같았다. 기댈 곳은 없는데, 프로듀서도 시키도 나에게 기댔다. 그 녀석은 한층 더 제멋대로였다. 프로듀서보다 조금 더 나의 사생활에 가까이 있었던 녀석은, 내가 병원을 간다고 할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그렇다고 내 사정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전부 털어놓았다간 녀석이 무언가를 할테고, 그 무언가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철저히 무너질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있었다.
걷다가 녀석이 마음에 드는 가게가 있으면 멈췄다. 그 곳이 서점이면 하드커버 북 하나를 펼쳐 시간을 보냈고, 긴 서론을 끝낸 후 밖으로 나왔다. 아기자기한 귀걸이 가게 같은 곳도 들렀는데, 이 곳의 녀석은 아직 귀를 뚫지 않았었다. 아이돌 활동이 아니었으면 귀는 안 뚫었다는 건가. 이건 그쪽의 녀석에게 묻고 싶다.
대신 녀석은 내게 어울릴만한 귀걸이를 찾는 것에 몰두했다. 검은 색의 번개 모양 혹은 신성모독적인 십자가 귀걸이를 내 귀에 대어보고는 즐거워했다.
"미스터리 선물이야. 절대 열어보지 말기."
"...이제 눈 떠도 돼?"
"응. 검은색으로 포장된 상태니까."
"아까 보던 것들 중에서 고른건가."
"그것도 비밀이야."
"언제 열어봐?"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열고 싶을 때' 열어봐."
희한하게도 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고마워."
그렇게 헤메이다 눈에 들어오는 횟집을 보았을 때는 이미 하늘이 분홍빛으로 물들어갈 즈음이었다.
"작으면서도 귀엽다."
"작으니까 귀여운거야."
"그런가? 어쨌든 들어가보자."
뻣뻣한 천을 손으로 잡고 올리자 바로 '어서오세요!'라는 힘찬 목소리가 들렸다.
가게의 내부는 생각보다 깊었다. 나무로 된 발을 곳곳에 둘렀고, 벽에는 종종 옛스러운 봉숭아꽃 그림을 걸어두었다. 호랑가시나무의 나뭇가지도 걸려있었다. 저건 액운을 막는 용도라고 란코에게 들었다.
주문 후에는 녀석답지않게 인형처럼 입을 꾹 다물고 식당 안을 구경하고 있었다. 한명도 말을 꺼내지 않아서 조금은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이럴 때는 나도 모르게 손에 잡히는 것을 만지작거리게 된다 - 그와 동시에 투박한 비닐봉지가 손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녀석도 다시 내게로 눈을 돌렸다.
"역시 신경쓰이는구나?"
아니, 그래서 그런건 아닌데.
이보다도 늘 녀석의 귓볼에 반짝거리던 그것의 부재가 내게는 조금 더 신경쓰였다. 아침까지는 발견하지도 못했던, 구멍 없이 깨끗한 귓볼이.
"....넌 귀 뚫어볼 생각은 없어?"
"어?"
"아니, 아까 그 가게에 있던 것들. 너한테도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녀석의 표정이 단박에 굳었다.
내가 무언가 잘못했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모르겠다. 내가 했던 말에 실례되는 것이 있었던가.
"냐하하.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래서 연락은 어떻게 할거야?"
연결이 부자연스럽잖아.
"..우선은, 호텔로 되돌아가면 메세지를 남겨둬야겠지. 오늘은 도망쳐버렸지만, 직접 만나서 풀어나가야 할, 그런 이야기니까. 전파를 통해 나의 목소리를 전하는 것보다도 얼굴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고 싶어."
"아아, 로맨틱하네."
"로맨틱은 무슨."
"그런 낭만을 품고 살아갈 것 같은데."
"......"
"내가 말한 그 문장, 마음에 들어할 것 같고."
"아, 그래."
"정곡이지?"
틈을 보이면 한계도 없이 장난식으로 파고들어버리는 그 녀석이 겹쳐보였다. 장난기 어린 눈동자가, 아까 어두워졌던 표정을 싹 지우고 고양이처럼 입꼬리를 마는 표정이, 전부.
귓볼에 구멍이 나 있던 그 녀석의 오만을 차곡차곡 쌓아나간 건 나일지도 모른다. 그 녀석이 굳은 표정을 지으면 녀석이 아닌 나에게서 잘못을 찾곤 했고, 판단하려 하곤 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주의를 다시 돌리려, 가상의 잘못을 메꾸려 노력하곤 했었지.
그럼 바로 잡아먹을듯이 입을 벌려 웃어버리는 녀석이 눈 앞에 있었다. 그 변덕에 나는 안심했다. 평소에는 질색을 하던 스킨십도 그 변덕이 마법이라도 되는 양 좋아졌다.
그러고보면 스킨십은 늘 그쪽에서 하곤 했었지.
친구든 아니든 스킨십을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여지껏 란코를 제외하면 없었다. 부모님도 언젠가부터 자기 전 안아주거나 집안일을 하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일을 그만두었으니. 사춘기로서 '사랑받는 아이'의 역할은 마지막을 맞이하고, 삶이란 연극에서 난 또 다른 배역을 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분투 속에서 란코를 만나고, 시키를 만난 것이다.
그리고....
"시키."
"응."
"난 널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와아. 깊어."
"....너, 아까 내가 한 질문 까먹었지."
"아니아니."
"넌 날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었잖아."
"응, 기억하고 있다니까. 내가 어떻게 대답했는지도."
"그럼 가르쳐줘."
"숙소를 제공해줬으니 빚은 청산인걸. 그것도 그쪽세계의 시키쨩이 진 빚이고."
"그건....."
"그보다 그게 왜 궁금한거야? 시키쨩은 네 눈 앞에 있는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려고 해봐. 추상적인 마음 속 그림에 사로잡히지 말고."
튀김 때와는 달리 배고픈게 우선이라 녀석이 먹는걸 보지도 않고 바로 젓가락을 들이댔다. 얇은 젓가락에 감기는 두껍고 기름진 참치살. 사람은 혀가 아니라 코로 먼저 음식을 맛본다고 하지만 회의 경우는 예외다.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으니. 그 대신, 젓가락이 촉각으로 그 두께와 부드러움을 짐작하고 맛보다도 더한 전율을 느끼게 한다.
역시나다. 입안에 들어서자마자 혓바닥의 감각이 마비되어버린다. 어금니로 깨물면 마냥 부드럽지만은 않다. 얇은 힘줄들이 느껴지고, 그 이전에 탱글거리는 식감이 있다. 그러나 뱃살이라는 특수부위는 그것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1초도 지나지 않아 사르르 녹아 달큰한 참치의 맛과 와사비의 톡 쏘는 맛이 입 안에 고스란히 남는다. 삼키는 순간은 느껴지지도 않는다.
이러한 맛의 향연이 끝나는 순간은 아쉽지도 않다. 다만 더한 감각을 갈구할 뿐이다. 먹고 있는데도 배고프다는 말은 이럴 때에 쓰는 것이겠지.
아, 실수다.
제일 기름진 것을 먼저 먹어버리면 나머지가 시시해져버린다.
이제는 어떤 것을 먹어야할까.
차라리 아예 담백한 것으로 다시 맛의 정점을 위한 건축을 시작해야하는 것일까.
"읍."
"회는 쉴새없이 몰아쳐야 제 맛이야."
그렇게 녀석에 의해 본의 아니게 근본없는 생선으로 다시 회를 향한 여정을 시작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조금은 배부르다 싶어졌을 땐 이미 직원이 비워진 그릇을 치운 후였다.
뜨거운 녹차도 전부 비워버렸다.
"냐하하~ 맛있었다."
"그러게."
"담담한 척 하지만 얼굴은 솔직한걸."
"내가 웃고 있는게 이상한가?"
"이상하진 않아. 오히려 좋지."
"그래, 고맙군."
"시키쨩도 생선을 보듯이 봐주면 좋을텐데."
이건 또 무슨 맥락이지. 생선을 보듯이라면....
".......잡아먹을듯이?"
"아니, 아까 말한거. 눈 앞의 시키쨩을 받아들이기."
"계산서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녀석도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어찌되었든, 상쾌하게 저녁을 마무리한 녀석과 나는 오늘의 마지막 여정으로 향했다.
그 쪽 세계의 시키와 내가 처음으로 섰던 무대.
지하로 향하는 허름한 돌계단에서부터 음악소리가 쿵쿵 울렸다. 포스터를 보니 무명의 밴드였다. 입장료는 내가 벌린 일이었기에 내가 계산했다. 녀석의 손목에 연보라색의 종이 팔찌를 둘러주고 나도 팔찌를 둘렀다.
열정적인 무대와 비례해서는 조금 한산해보이는 내부는 조명으로 번쩍거리고 있었다. 무대에서 바라보는 광경과는 또 달랐다. 곡 또한 커버인지 자작곡인지 잘 모르는 곡이어서 아직은 몰입이 되지 않았다. 우선은 낯설고도 익숙한 이 공간에서 안정감을 찾는게 우선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관객층부터 둘러보는 나와는 반대로...
의자를 찾지도 않고 뿌리를 박은 듯 가만히 서서 무대를 보는 녀석은, 그냥 그대로 두면 어디론가 가버릴 것 같이 보여서, 그렇다면 차라리 옆에 서서 손목을 붙들고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녀석은 여전히 멍하게 무대를 보고 있었다. 잡고있던 손을 흔들자, 그제서야 반응을 했다. 괜찮아? 라고 물었다. 대답의 대신으로 녀석은 내 어깨에 기댔다. 몸과 정신을 통채로 맡기고 있던 음성이 사라져, 더는 기댈 곳이 없다는 듯이. 힘이 쭉 빠진 것 같이, 평소보다 조금 더 무거웠다. 기절한 사람은 보통의 몸무게보다 무게가 더 나간다던 말이 생각이 났다.정말로 기절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걱정이 되었다. 이 걱정을 어떻게 덜어야할까. 어떤 방식으로 널 생각해야 무엇을 더 해야하는건지 알 수 있을까.
그냥 널 이대로 받아들일까.
기대는 것을 넘어, 품 안으로 파고들고, 허리에 팔을 두르고, 충족되지 않는 것을 채우려는 듯 점점 그 힘을 조여오는 널.
네가 원했던 것처럼.
녀석은 자세를 고쳐 섰다. 맞잡은 손은 놓고 싶을 정도로 뜨거웠다. 내 손에서도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다시, 드럼 소리와 함께 연주가 시작된다. 둥, 둥, 둥, 하고 조명이 색색깔로 변모할 때마다 바닥도 같이 덜컹거렸다. 아니, 기분 탓일까. 단순히 기분 탓이라 치더라도 나는 무대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나와는 다르게 녀석은 지나치게 음악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곡이 끝나도, 그 다음 곡이 끝나도, 계속 계속.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고 마지막 무대가 끝나도, 녀석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밴드의 보컬이 무어라 인사를 하며 호응을 유도한다. 박수는 나왔지만, 앵콜 요청은 나오지 않았다. 밴드는 그대로 무대의 뒤로 떠나간다. 조명이 밝아진다. 직원들이 털레털레 걸어나와서는 무대 장비를 치우기 시작한다. 우리는 "좋은 록이었어" 따위의 흔하디 흔한 평가를 하며 걸어가는 무리를 따라 밖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올렸다.
"아스카쨩도 록 장르의 음악을 했다고 했지."
"깊게 파고든건 아니었어. 아이돌은 아티스트라기보단, 작곡가에게서 곡을 받아 그 곡으로 노래를 할 뿐이니까."
"하지만, 그 쪽의 아이돌들은 맞춤형으로 노래를 만든다며. 노래하고 싶은 것에 대하여."
"....그건 그렇지만."
"아스카쨩은 무엇에 대해 하고 싶었어?"
"존재 증명."
"......."
"'나는 여기에 있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어."
"응."
"이 인류의 속에서 방황하는 나. 내가 무엇인지 나도 몰라도, 그래도, 부딪히고, 발견해가며 계속 괴로워하는 나. 그 모든 '나'는 어째서 존재하는가. 어째서 나는 계속 부딪히는가. 그런 '나'가 이 곳에 존재한다는 그런 메세지를 말하는거지. '아픈 아이'인 나에게, 그리고 다른 '아픈 아이'에게 말이야. 그러나 그리 노래한 곳에서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건가. 내가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는, 그 곡은 존재하지 않고. 우스운 일이군."
"아스카쨩이 말하는 존재 증명은 아스카쨩 자신에게의 존재 증명? 아니면 그 존재를 타인에게서 증명받고 싶어하는건가?"
"....둘 다....일까."
"그렇구나."
"응. 결국은 '우리들'에게 전하는 메세지니까."
"나는 아스카쨩에게, 아스카쨩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사람이야?"
"......"
"아니, 그런 사람이었었나?"
"그런건... 생각해보지 않았어."
"아, 그래."
우리가 만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어제까진 완전히 초면의 타인이었다.
".....그 존재 증명이란 거. 모두가 하고 있는 것 같아."
"응?"
"너도 - 아스카쨩도. 밴드의 보컬도, 기타도, 드럼도, 베이스도, 심지어는 트라이앵글 치던 사람도."
"그런 셈인가."
"그 쪽의 시키쨩도."
녀석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호텔로 돌아와서 녀석은 바로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스마트폰은 나에게 맡기고. 일련의 행동은 같지만 데자뷰는 아니다. 생소함은 완전히 잠식되었으며 패닉이 아니라 기묘한 두근거림이 머리에서 발끝까지를 순회하고 있었다.
란코. 나야. 아스카.
한 자 한 자, 로마자에서 변환을 시키고는 눈을 감았다.
란코에게서 답문이 올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까. 만날 장소는? 만난다면... 만날 시간은?
그러고보니 녀석은 호텔에서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빠른 시일 내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럼 내 행선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개운행."
"머리나 제대로 말리시지."
"싫은데에."
"그럼, 나왔으니까 나도 샤워하러 들어갈게."
"아, 옷 필요하지 않아?"
"....그러네."
또다시 신세를 진다. 녀석이 옷가방에서 옷을 가져오는동안 나는 세안을 했다. 비누거품에 차가운 물을 끼얹으며 전부 씻겨가기를 원했지만 란코에게 문자를 보냈다는 것이 짐처럼 마음속에 남아 자꾸만 생각이 났다.
"자, 여기."
"고마워."
"어차피 다시 물에 적셔질 운명이지만, 세수 다 했으니까 예의상 수건으로 얼굴 닦아줄게."
수건이 얼굴을 닦기엔 과하게 크고 도톰한데다가, 손 힘 자체도 어린 아이가 하는 것처럼 거칠었다.
"눈물나게 고맙군."
"냐하하."
"그럼 이제 나가서 머리나 말려."
"싫다니까."
녀석은 5분동안 말장난같은 실랑이를 벌이고 나서야 간신히 나가주었다.
그러고보니 많은 것을 한 하루였다.
마음의 빚은 몰라도, 피로만큼은 물줄기에 씻겨나가주었으면.
그리고 자고 일어나면 모든게...
급하게 남아있던 비누거품의 흔적을 씻어버리고 큰 수건으로 대충 몸을 감싸 샤워부스의 밖으로 나갔다. 문자메세지가 와 있다. 저장되어있지 않은 번호다. 그러나 란코의 번호는 아까 저장해두지 않았다. 란코일 수도 있다. 그 쪽의 세계에서 처음으로 전화번호를 교환했던 교문 앞에서 란코는, 그 때마저 쭈뼛거리고 있었다. 아직은 서로와 보낸 시간이 많지 않을 때였다. 그 이후로 나는 란코의 전화번호를 기억할 일이 없었다. 이름으로 저장된 번호의 데이터가 있으니까, 번호를 외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러니 이건 낯선 번호다. 처음 전화번호를 교환했을 때만큼이나.
그 번호 아래의 메세지는.
'지금, 전화...해도 돼?'
한동안 매일 전화했었던 번호가, 전화해도 되냐는 메세지가 너무나도 낯설다.
나는 시키의 스마트폰을 두 손으로 쥐고, 키패드의 의미없는 자동완성을 하고 지우는 행위를 반복하며 생각에 빠져있었다.
"아스카쨩."
"야."
"어머, 수건 차림으로 바닥에 앉아있는거야? 추우면 감기걸릴텐데~"
....녀석이 화장실을 써야했던건지 들어오고야 말았다.
"뭘 감상하고 있는거람. 보니까 시키쨩한테는 그렇게 간섭했던 머리도 아스카쨩은 말리지 않고 있네. 급하게 뛰쳐나온 거려나? 아니면, 시키쨩에겐 그저 트집을 잡고 싶었던걸까? 노농. 그런 가능성은 생각할 수가 없어."
"어째서지."
"아스카쨩은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덤으로, 문자 입력창에 이상한 말을 쓰고 있기도 하고."
"자동완성이야."
"그래, 그렇겠지. 문자가 뭐라고 왔길래 고민중이야? 사실은 널 깊이 사랑하고 있었어, 라던가? 으흥, 죽다 살아난 친구에게 보내기에는 좀 과격한 문자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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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녀석이 일방적인 잘못을 저지르고, 내가 그것에 대해 반감을 표시하면, 그 녀석이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펼치며 나를 중2병 어린 애로 만들어버리는 일련의 과정이 연속될 뿐이다. 말하자면 내가 일방적으로 패배하는 것이다.
짜증나는 일이지만 그 녀석은 나보다 한수 위다.
뒤늦게 반박할 말이 떠올라 후회를 하는 나.
그 자리에서 떠오르더라도 차라리 굽히고 마는 나.
모든 것은 이 관계에서 그 녀석은 아쉬울게 전혀 없고 나는 아쉬울게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녀석은 '실제로' 나보다 한수 위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그 날 그 녀석은 분명히 선을 넘었다.
젠장, 대체 어디로 간거냐.
길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내 눈에는 오직 그 녀석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 녀석은 거리에 없었기에 길에는 아무 사람이 없었다.
무식하게 달려나가는 내 몸에 아무도 부딪히지 않았으니 그런 셈 쳐도 되는거겠지.
사람 없는 거리는 점점 어두워져간다. 그럼에도 자연이 주는 빛은 완전히 떨어지지 않아 밤을 비추기 위한 가로등은 그저 거추장스러운 구조물로서의 역할만이 남았다. 아쉽게 어둡고, 아쉽게 밝다.
오마가토키라고 하던가. 낮과 밤의 경계선. 무언가 일어나는 시간. 무언가, 그 무언가가 일어난다면 제발 그놈의 엿같은 실종을 숨 쳐쉬듯이 계속하는 그 새끼를 찾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잠시 멈춰서서, 숨을 고르며 간절히 빈다.
천지신명님, 부처님, 하느님, 카코님, 제발.
그 녀석이 옛날에 갔던 곳. 생각났다.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곳에 힘없이 앉아있는 그 녀석의 모습이 번개처럼 뇌리를 스쳤다.
그 녀석은 별명처럼 고양이같이 온갖 곳을 쏘다녔다. 실종이라고 해도 한 곳으로 줄창 가지는 않았다. 그래도 한번이라도 갔던 곳, 두어 번 정도로 겹치는 곳 등을 차근차근 짚어가며 들인 수고는 운좋게 맞아떨어질 때가 많았고, 그런 노하우(라고 쓰고 사서 고생이라고 읽는)를 익힌 후 부터는 얌전히 기다리기보단 행동으로 나서곤 했다.
지금 향하는 이 곳은 그 기억속 매뉴얼에는 없다. 하지만, 언젠가 갔었던 곳이기에... 그리고 오늘은 한번도 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곳이기에 확신이 들었다.
신식 아파트에서 조금 더 뒤로 가서, 오래되었지만 조금 깨끗한 아파트를 지나, 가장 인기 있다는 그네조차 텅 비어있는 놀이터의 옆에는 누가 봐도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상점가가 있다. 촌스럽기 짝이 없는 곳. 옛날에는 희었을 누런 간판들은 그 세월을 짐작케 했다. 놀랍게도 아직 영업 중이다.
전에 그 녀석을 봤을 때에 녀석은 실종 중이었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이런 곳에 왜 와있었는지.
다 쓰러져가는 세탁소, 부동산, 탐정 사무소(실화냐)를 지나 어느덧 구멍가게 앞이다.
그러나 곧바로 가슴이 철렁해졌다.
'임대'
....그러니까, 망했다는 거구나. 뭘 파는지도 모를 가게, 그럴만도 하지만.
그래도 이성이 이미 놓아버린, 혹시 모를 희망은 그 굳게 닫힌 문을 두드렸다. 이젠 정말로 지쳐버렸다.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저기...."
"음?"
"거기 문 닫았어."
그건 나도 알-
".....하하."
찾았다.
웃음이 나왔다. 바보같이 화도 나지 않았다.
"....누구?"
아하, 그렇게 나오시겠다?
천진난만한 표정에 기가 찼다. 아무리 이번엔 내가 심한 말을 했다지만....
넌, 저번도 그 저번도, 그 저번에도 처음이 아니었잖아.
난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제는 네가 처음일 차례 아닐까. 네가 처음으로 나를 존중해주면 안 되는걸까.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아아, 내가 미안해. 아까 심한 말 한건. 그래도 오후 스케줄까지 펑크 내고 탈주한 개노답 공주님을 어떻게든 수습하고 찾으러 온 사람한테 이러는건 좀 심하다는 생각 안 들어?"
"....미안. 니가 뭐라는지 잘 모르겠어."
"시키, 정말이지 이건 하나도 재미없-"
잠깐.
저 녀석, 왜 이렇게 덤덤한거지?
연기라고 하기엔, 평소 그 녀석의 연기처럼 얄밉지가 않잖아.
아아, 드디어 미친건가. 어리광을 너무 받아주다보니 본성마저 망각한건가. 하지만 저 녀석이 그 정도로 귀엽지는 않아.
"........"
"....난 가볼게."
"가지마."
"왜?"
"젠장.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거냐?"
"음... 나와 초면인 니가 어떻게 짐작한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천재인건 맞아서 한번 본 사람은 기억하거든. 기억 상실증은 안 걸렸고. 냐하하-"
욕 나온다. 이 녀석 정말 상황파악을 이렇게 못하는건가?
"특히, 너처럼-"
아아, 이 뒤에 할 말도 알아. 기억상실증은 무슨, 젠장할. 평소와 똑같은 소리를 지껄이는구만.
"특이한 냄새를 가진-"
"특이하게 생긴-"
""엥?""
레퍼토리가 바뀌었나?
"아니, 농담하지 마. 평소랑 같잖아."
"....초면이라서 평소라는 건 잘 모르겠는데, 구면이었어도 모를거야."
"그게 무슨 뜻이지?"
"나, 냄새를 못 맡거든."
뭐?
"가지가지 한다."
"너야말로 가지가지 한다. 초면인 사람 붙잡아놓고 이런 희한한 얘기를 늘어놓는 사람 처음 봐! 도를 믿습니까? 도, 우리 빵집 시식해보세요~도 아니고. 도대체 뭘 원하는거야? 그러고보니 아까 공주님이라고 했었지? 아! 맞춰볼게. Princess diary* 놀이?"
머리가 멍해졌다.
이건 눈치를 떠나서... 몰카라고 해도 그 얄미운 녀석이 이렇게까지 결백을 연기할 수 있을까.
정말 날 모르는 애 같잖아.
저렇게 떠들어대는건 녀석 답지만....
그래, 날 모르는 녀석 같다.
(*: 21세기의 평범한 소녀가 어느날 어떤 왕국의 공주님으로 밝혀져 궁중 생활을 하게 되는 영화)
그 녀석은 내가 어떤 방법으로 녀석을 엿먹일지 생각하는 와중에도 중얼중얼 떠들어댔다.
+2 그래, 이 방법을 써보자
...이게 안된다면 미리 챙기고 있던, 시키가 질색하는 향의 향수를...
사실, 너를 보자마자 웃었던 그 순간부터 참을 수 없었어.
죄책감은 너의 오만이 해결해주겠지.
".....정신 차려."
짜악.
손바닥의 아릿한 감각이 저릿거릴 때쯤 녀석의 얼굴은 완전히 돌아가 있었다.
비현실의 쾌감은 잠시 나를 하늘로 들어놓았다. 그러나, 녀석이 보내는 두려움에 찬 눈빛에, 다시 추락한다. 손은 아직도 그 감각을 잊지 못해 찌릿거렸다. 아프다. 점점 더 아파왔다.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오만이 잠재우지 못한 내 죄책감의 값을 나는 제대로 치루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걸까.
그 눈빛은 서서히 경멸을 담고 있었다.
"미안."
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녀석은 뒷걸음질치며 다급히 가방을 뒤졌고, 나는 직감적으로 그게 호신용 스프레이를 꺼내려는 손짓인 것을 알았다.
내가 아는 녀석이라면.....
아니, 내가 아는 "나를 아는 녀석"이라면....
호신용 스프레이를 꺼내지는 않을텐데....
....잠깐.
"너, 정말로 냄새를 못 맡-"
"미친 새끼야!"
아니, 저건 호신용 스프레이가 아ㄴ
..........
....등이 따갑다.
여기는 어디지? 아까는 분명...
"너, 깨어났네. 기절해서 놀이터로 끌고왔어.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갈 수는 없으니까. 계속 관찰하고 있었어. 지갑을 뒤지거나 하려는 수상한 사람은 없었어."
기절...이라. 그랬었지. 분명 기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말이지.
"....시키?"
"역시 아까 그거 잘못 들은건 아니었구나. 그냥 도망치려다 번뜩, 생각 났어. 너 아까 날 시키라고 불렀었지. 그래서, 음... 궁금해서. 계속 옆에있었어."
"너 누구야."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너, 누구야. 누군데 날 알아?"
일어나자마자 머리가 아파왔다.
지갑......
...지갑에는, 녀석과 내가 찍은 사진이 있다.
녀석에게는 줄곧 비밀로 해뒀지만.
"돈이 많더라."
"그게 중요하냐?"
"중요하지. 날강도는 아니라는 지표니까."
"등신아. 보려면 제대로 봐."
나는 녀석이 내 지갑을 멋대로 뒤졌다는 것에는 아무런 참견도 하지 않고, 친절히 지갑을 열어 그 사진을 보여줬다.
".....와우."
저 반응은 진짜다.
"우리, 친구 사이?"
".........."
"이건... 정말로..... ......나 정말로 기억 상실 같은건가? 아니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럴 리가 없지, 빌어먹을."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람."
"그건.... 내가 묻고 싶어. 여긴 꿈 속인가."
"네 꿈 속 인물 A로 끝날 인생 아냐, 시키쨩의 인생은."
"그래, 나도 이거 꿈 아닌거 알아. 진짜.... 짜증나게 현실같으니까."
도플갱어? ....도플갱어라는건가?
그거, 정확히 뭐지? 퇴치법은? 있나?
아니, 도플갱어는 완전히 비과학적이잖아.
"나, 네 가방 좀 더 볼래."
"....그러든지."
"짚이는게 있어."
"뭐가?"
"일단 니 가방부터 좀 뒤져보고. 그러면서 질문 좀 할게. 너, 칸자키 란코라고 아니?"
+2 란코는....
란코는 한달 전 자살을 시도했다.
만약 란코가 조금만 더 치밀했더라면 윗 문장에서 "을 시도"라는 세 글자는 빠졌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래, 다행히도 란코는 완벽하지 못했다.
란코는 지금도 완벽하지 못하다. 내가 앞에 있어도 알아보지 못하고, 말을 해도 듣지 못한다. 뺨을 쓰다듬어도 계속 같은 표정으로 꿈을 헤메겠지. 그 작은 몸을 끌어안아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지독한 저주에 걸린 숲 속의 공주처럼, 고요히 잠들어있을 것이다.
그 원인은...
"그야, 유명인이니까 알거라고 생각했어."
"유명인?"
"아이돌도 유명인이잖아?"
".....아이돌..."
"흐흥, 그래 그래, 아이돌보다는 인디밴드라는건가. 옷차림으로 짐작은 했지만."
"아니, 란코는 절대 아이돌은....."
"왜지?"
"...그럴 애가 아니니까."
란코는 소심했다. 언제나 다른 사람만을 따랐다.
지독할 정도로 착하고 배려심이 많았다.
목소리는 언제나 기어들어갔다.
그러나 란코를 점점 알아갈수록 그게 다가 아니라는걸 알게되었다.
란코는 누구보다 자기주장이 강했다. 그걸 내세우지 않고 홀로 조용히 품고 있을 뿐이었다. 종종, 나와 단 둘이 있을 때만 그것을 용기 내어 말하곤 했다. 그리고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우리는 학교라는 거대한 둥지 안의 별종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아웃사이더였다. 그러나 신경쓰지 않았다. 아니, 실은 신경이 쓰였지만, 신경쓰지 않으려했다. 그래서였을까.
란코를 알게 되고 함께 보낸 1년은 꽤 괜찮았다. 란코 없이 학교를 다녔던 다른 날들보다 괜찮았다. 아파서 나오지 않았을 때 홀로 먹은 점심은, 란코를 알기 전 홀로 먹은 점심보다 배로 고독했다. 차라리 먹지 않는 편이 나을 정도로.
그 때 알았다. 둘은 홀로보다 불안정했다.
겨울방학의 어느 날, 나는 그 불안한 세계에 안녕을 고했다. 학교에 가는 날도 있었지만 가지않는 날이 더 많았다. 생각보다 스케줄은 바빴고 - 같은 유닛의 그 녀석은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정말 신경쓰지 않게 될 수 있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것이 비극의 씨앗이었다.
내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둘은 둘이었다. 홀로보다도 불안정한, 둘. 100이 0의 존재로 인해 일이 아닌 백을 나타내듯이, 나의 무존재로 인해 란코도 둘이었다.
정확히는 '홀로가 된 둘'이었다.
머리가 다시 아파왔다.
"흠.... 그래. 역시나-라고 하기엔 역시 믿을 수 없지만... 아무튼 즐거운 결론 도출 시간입니다!"
"...."
"첫째! 난 너를 모른다! 그런데 넌 나를 안다? 그리고 사진이라는 증거도 있지. 날짜도 친절히 찍혀있네. 그런데 저런. 이거 작년 내 생일이거든? 내 생일 날 나는 내 집에 콕 박혀있었어. 뭐 이것만 보면 오히려 니가 날 미쳤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는데."
"........."
"둘째! 칸자키 란코는 틀림없는 아이돌이야. 좀 더 번화가로 가면 광고도 보일걸? 그런데 넌 칸자키 란코를 모르는 것도 아니고, '란코는 아이돌 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컨셉충 컨셉도 너무 지나치단 말이지~"
"......"
아, 그래. 뭔지 알아. 무슨 말 하려는지 알겠어.
"그리고 니 가방에서...."
"그만...."
"....괴로워보이네."
"......"
"응~ 가만히 있던 시키쨩도 깜짝 놀랐는데 넌 어련하겠어. 평행세계의 아가씨."
.....그래.
정말, 정말,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인거 아는데....
만의하나....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보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어.
"젠장."
"정말 신기하네. 냐하하. 혼란스러울텐데, 너네 세계 얘기나 해봐. 어쩌다 이렇게 된건지라거나. 생각이 좀 정리될지도 모르잖아. ....그렇지. 너랑 나, 무슨 사이였어? 사진 보면 무슨, 세상에서 제일 친한 친구 같던데."
+1~ 다음 연재까지 투표입니다
1. 사실대로 말하자
2. 선동과 날조
말해 뭐해. 위로받기 위해 구걸하지않아.
"오오~ 역시!"
"역시는 무슨. 그 사진 찍을 때만 말하는거야. 평소에는...."
"평소에는?"
순진한 표정의 그 녀석이 너무 오랜만이라 눈물을 흘릴 뻔 했다. 잠시 거짓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고 참던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올라 결국 금기도 깨버렸던 아까 전의 나를, 그럴듯한 포장지로 감싸 녀석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녀석은 겉모습만 보고 좋아하겠지. 그야 속은 영원히 꺼내볼 일이 없을테니.
"평소에는......"
지갑에 있는 사진 속의 우리는 정말로 행복해보였다.
".....평소의 넌 아주 개차반이었지."
"으, 으응?"
"우린 아이돌이었고."
"와우, 진도 빠르네. 못 따라가겠어!"
"그렇기 때문에 난 제멋대로인 널 수습하느라 매일 고생했고... 오늘도 실종된 널 찾으러 나왔다가...."
"문자 그대로 고생하게 된거구나."
"....그래."
"......."
그래. 딱 이 정도가 좋으려나.
쓸데없이 집중해서 이것저것 털어놓다간 너무 감정적으로 몰입해버릴거다. 그러다가 중요한 요지를 놓치고 말아. 이 녀석한테 이 세계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하지 않을까.
하지만, 어떻게?
이 세계의 녀석은 냄새를 맡지 못하고, 이 세계의 란코는 아이돌을 하고 있어.
전자의 경우에는 능력이 반대된 거고, 후자의 경우에는 굳이 얘기하자면 성향이 반대가 된거지. 두가지 케이스밖에 내 손에 없지만 그 마저도 정보가 적다. 알아낸다고 해도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이 없고.
"어린 애 장난은 안 해. 이미 유행 지났잖아, 그런 가짜 오컬트. 게다가 민폐라고."
"흐응."
"나는 그냥 너를 찾으러 밖으로 나와서... 네가 있을만한 곳을 전부 가봤어. 그런데도 넌 없었지."
그러고보니 거리에는 이상하게 사람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원래 그런 거리였었나. 하도 숨이 차게 뛰어다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렇게하다 얻어걸리곤 했는데 오늘은 그러지 못했지. 정말로 고양이 같은 녀석. 높은 곳에도 따뜻한 곳에도 안 보이니 길을 잃었나 했지. 네 녀석이 늘 하는 짓이다만, '실종'이란건."
그러다 매뉴얼의 모든 곳을 돌았을 때가....
아, 오마가토키다.
"자포자기하고 멈춰섰을 때는 해가 어슴푸레하게 지고 있었지. 그 불완전한 밤에서 난 눈을 감았어. 주의를 완전히 놓은 무방비한 상태라면 그 때였을거다. 그렇게 눈을 감고, 기도했지. 천지신명님, 부처님, 하느님, 카코님에게."
"카코님?"
"우리 아이돌 사무소의 행운녀. 그렇게 갑자기 사이비 보듯이 하지 말아줘."
"아아."
"그러고나니... 머리 속에 네 녀석을 봤던 장소가 떠오르더군. 우리가 만났던 그 닫힌 구멍가게 말이야."
"그랬구나. 잠시 생각할 시간을 줘."
"...응."
"그나저나 넌 평소 말하는 것도 굉장히 시적이구나?"
젠장. 이 녀석 또....
"멋지네. ....난 그런거 잘 못하거든."
.....어?
"문학은 진작에 때려쳤어. 문헌이라면 보지만. 넌 문학 같은것도 잘할 것 같아."
"칭찬....으로 듣지."
"칭찬이야. 냐하하-"
"...아."
내 이름을 모르는 너는 참으로 신선했다.
"내 이름은 아스카. 니노미야 아스카."
"그렇군. 이미 알겠지만 나는 시키. 료우기 시키다."
"이치노세가 아니야?"
"응, 정답이야. 아스카쨩."
...장난기는 여전한가.
"오늘은 거처가 없지? 그쪽 세계에선 내가 신세를 좀 진 모양이니 오늘만이라도 도와주도록 할게."
"....그거 고맙군."
"자자, 그럼 내가 묵고 있는 오성급 호텔로 방랑하는 널 안내하노라."
"호텔?"
"응. 잠시 초호화 여행 중이라고나 할까? 이 세계에선 여권도 없을 네가 들으면 부러워 미칠 것 같아서, 아까는 일부러 얘기하지 않았어."
"......"
"농담인데 그렇게 경멸하는 눈빛으로 보지 말아줄래?"
"....그것도 그렇지만, 이런 도시 구석탱이에 오성급 호텔이 있을 리가 없잖아. 아니면 너...."
"응! 잠시 산책 나온 틈에 실종해버린 것입니다- 냐하하-"
어이, 천재소녀. 이쪽 세계의 너도 너만큼이나 골 때리는 모양이야.
여행이라하면... 아직 유학 중인건가. 그보다 유학 중에 온거면 부모님 집에 묵는 것이 정상 아닌가.
"아무튼 가자. 이미 어둡지만, 그보다 더 어두워질 수도 있잖아. 걸으면서 시키쨩, 시키쨩 얘기 해줄테니까. 아스카쨩도 그쪽의 시키쨩에 대한 얘기를 해줘."
+1 아스카가 말한 저쪽 시키에 대한 정보
+2~3 시키가 말한 이쪽 시키에 대한 정보
@ ...뭐죠, 저 무시무시한 성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군.
"게다가 쓸데없는 스킨쉽이 잦았지. 그 둘이 합쳐지면 아주 곤란했다고. 희한하게 방송에서 그런 짓거리를 해도 팬들은 좋아했지만. 꽤 인기 있었어, 그 녀석."
"재밌는데."
"이쪽의 넌 아이돌 같은건 생각해보지 않은건가."
"흠~.... 그냥 '너'라고 해도 괜찮은데. 이쪽이니 저쪽이니 복잡하잖아? 게다가 네 앞에 지금 있는건 바로 나니까."
그게 중요한건가. 의문은 들었지만 일단 맞춰주기로 했다.
"그래. 넌 아이돌 같은건 생각해보지 않은건가."
"응. 나는, 말하자면 학구파랄까. 문헌 읽기는 잘 한다고 했잖아. 학구보단 실험을 조금 더 좋아하지만."
실험이란 말에 자동적으로 몸이 반응한다. 그래. 그 녀석의 실험이라면 아주 이골이 났다. 차라리 정체불명의 실종이 나을 정도였다. 나는 그 녀석을 찾는다. 찾는 동안은 마음이 힘들지만, 찾고 나면 그 모든 것이 날아가는 느낌이 든다.
녀석은 아무 문제 없다는 듯이 환하게 웃곤 했다. 그럼, 같이 앉아 그저 시간을 보내는 거다.
다만 실험이 얽힌다면 달랐다. 녀석은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고 정신을 갉아먹었다. 아주 꼬인 성격이 아니라면 굳이 왜 이런 실험을 할까, 싶은 사소한 작은 것들에 몰두했다. 그럴 때는 나라도 답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혼나는 것은 내 쪽이었다. 그 날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동생이 있는 손위형제의 기분을 느꼈던 것 같다.
"롤러코스터의 원리라던가."
"......재밌는걸 하는군."
"물리학이란 대개 재밌는 실험을 하는 법이지."
"물리...."
"응. physics. 왜? 그쪽의 난 아스카쨩과 함께 문학의 세계를 탐구했었어?"
"아니, 화학을 했지. 녀석 자체가 생화학병기였어."
"냐하하, 너야말로 재밌잖아."
"농담 아냐."
"응응, 그래. 언젠가 만나보고 싶은걸, 그 쪽의 시키쨩."
"그러게. 하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아. 평행세계의 내가 좋아했던 사람을 만나, 평행세계의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
"좋아했던 사람이라니, 내 얘길 듣긴 한 건가. 우린 아주 사이가 나빴다니까."
"그 정도는 알 수 있어."
모호한 대답이다. 뭘 알수 있다는 건지...
더 물어봤자 피곤해지겠지. 그만두자.
우리는 조금 더 걷다가 호텔에 도착했다. 눈에 익은 지리는 아니었다. 애초에 이쪽 동네에는 잘 오지 않거니와, 이런 호텔에 올 일은 더더욱 없으니까. 이왕 올 거라면 원래 잘 알던 거리에서 내가 왔던 세계의 흔적을 찾고 싶었는데....
"여기야. 호텔 방. 뭘 생각하고 있는거야?"
"....아무것도. 넌, 여기서 어느정도 머물 계획이야?"
"호텔에선 사흘 정도.... 응. 근데 일본에는 조금 더 있고 싶어."
"부모님 집은 안 가?"
"몰래 온 거라서 말이야."
아, 그런가. 참 쉬운 대답이군.
"그래서, 호텔 방에 대한 감상은?"
"능력 좋네."
"자, 다시 한번 천재소녀라고 불러보시지."
"오만하긴."
"저기, 넌 저 쪽의 시키쨩과 친하기 때문에 내가 편하게 느껴질 수는 있겠지만, 난 널 오늘 처음 본거거든. 조금만 더 다정하게 굴어줬으면 하는데."
"...그것도 일리가 있군."
"샤워하고 올게. 그동안 상황 파악 좀 하고 있어. 내 물건을 뒤지던가."
"그것 참 고마운 제안인데."
"알면 됐어."
+1~2 무엇을 할까 (생각해볼거리 같은 것을 적어도 괜찮습니다.)
우선은 그것을 먼저 체크해....
[서비스 없음]
......
아, 그래. 이제서야 차츰 안대가 벗겨지는 느낌이군. 알고 있으면서도 「그럴리가」라고 이성이 계속 부정해왔어. 하지만 이런 도심지에서 서비스 없음이 뜨는 것은, 이성이 충분히 납득 가능한 데이터겠지.
다만, 알림만 확인하고 그대로 읽지 않은 프로듀서의 라인은 그대로 알림창에 있어. 완전히 기능이 마비된 것이 아니라는 거지.
충전기도 같은 것이겠지. 충전을 할 수 있다면, 아마 계속해서 저쪽 세계와 연결을 할 수 있다는 의미.
라인을 이용하면 보이스로 대화하는 것도 가능할거야.
녀석이 결제를 해둔 것인지, 원래 무료인건지 방 번호만 쳐도 저절로 연결이 되었다. 실험삼아 '칸자키 란코'를 구글링해본다.
칸자키 란코
가수
346 프로덕션
칸자키 란코, 가수.
프로필 사진 속 란코는 말끔히 메이크업을 한 채 웃고 있다.
영정사진과 같은 프레임이 눈 앞에 겹쳐진다. 몇번 눈을 비비자 그 환영은 사라져있었다.
"별 일이군..."
정말 여러모로.
이 곳의 란코 역시, 이 곳의 녀석과 마찬가지로 나를 모르겠지.
'평행우주'를 검색해본다.
[넓은 의미로는 다중우주를, 좁은 의미로는 양자역학의 해석 중 하나인 다세계 해석만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다세계 해석의 경우 평행세계를 마치 나무가 자라듯, 시작점은 같더라도 가지가 달라지듯 독립적으로 분화된 세계들로 본다. 이 갈라지는 시점은 현실에서 있었던 일과 다른 일이 벌어질 때 발생하는데....]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첫째, 이 곳에는 내가 존재할까. 이 곳에 내가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두 세계의 '나'가 하나의 세계에 있는 셈이 아닌가.
둘째.
란코가 아이돌을 하기로 결심한 세계
시키가 냄새를 맡지 못하는 세계
시키가 화학이 아닌 물리를 공부하는 세계
시키가 아이돌을 하지 않는 세계
이 모든게 하나의 독립된 이유에서 시작되었단 말인가.
셋째.
그 이유는 원래 세계의 '누구'로 인한 이유였는가.
가령 세계가 분화된 이유가 '란코가 아이돌을 하기로 결심했다'라면, 이 곳은 란코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세계가 되는 것인가....
애초에 '원래' 세계라는 개념은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며 흐려졌겠지... 이 세상 사람의 인구에 !를 붙인만큼 많은 세계들이 존재할텐데....
....생각할수록 손해라는 느낌이 드는군. 누군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것 같아.
아무것도 없다니...
..어쩌면 서비스상의 문제일지도 모르겠군. 소통하는 쪽의 애플리케이션이니 수신이 제한이 되었을지도 몰라. 그래도 혹시 모르니 메세지는 남겨두는게 좋겠지.
보이스가 담은 나의 기록은, 프로듀서에게 보내둘 예정이다.
'20XX년 X월 X일 X시. 도쿄 XX호텔. 아스카, 니노미야 아스카다. 믿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모든 것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며.....'
.......
....
"후아~ 개운하다. 좀 어때, 아스... 아스카쨩?"
"울고 싶어."
"어머~ 울면 안 되는데? 울면 산타할아버지가 아스카쨩네 집만 스킵해버린다?! 진정하라구, 진정."
"아아, 그럼 이대로 크리스마스까지 기다리면 맘 좋은 산타 나부랭이가 잘도 사필귀정을 외치며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겠군."
"정답~"
그 녀석은 의도한건지 내 쪽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어대곤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그러고보니 오늘은 한 침대를 쓰겠군.
"그런데 너,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거야?"
녀석이 한 거라곤 믿을 수 없는 바보같은 질문에 나는 덜 마른 머리카락이 침대를 적시는 것에 아무 지적도 하지 못한채 녀석을 멍하게 바라보았다.
"원래 세계에 있는 남아있는 미련이 뭐야? 가족? 친구? 아이돌? 전 남자친구? 사회에서의 스테이터스?"
말문이 막혔다.
"전 남자친구 같은건 없었어."
"아, 그래."
"그리고 그렇게 누우면 시트가 축축해지잖아?"
"니가 잘 자리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다만."
+2 다음... 상황
"......솔직히, 그렇게 물어보니 당장 생각나는 건 없어."
냐하. 녀석이 웃었다. 비웃는 것도 같고, 할말이 없어 대충 웃어넘기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원래 세계의 아스카쨩은 어땠어?"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바라보자면..... '아픈 아이.'"
"병약 속성?"
"아니."
녀석이 젖은 머리를 이끌고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리곤 킁킁. 하는 소리를 내며 코를 내 무릎에 쳐박고 몸을 뉘인다. 본인 입장에서는 초면인 사람이라며? 라고 간단히 지적했으나, 그 쪽의 시키쨩을 따라하고 있을 뿐이라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사춘기 특유의, 마음이 아픈 아이... 같은거."
"아아."
날 모르는 그녀는 어색하다.
이 녀석은 시키다. 그 녀석도 시키다. 손으로 녀석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면 손끝에서 사르르 부서져 금세 손가락을 벗어나는 감각까지 똑같은데, 같은 사람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있어봐야 신경만 긁고 물건을 어지럽힐 뿐이지만, 오래 키워온, 내가 사랑하는 고양이.
그리고 전에 키우던 고양이와 정확히 똑같이 생겨선 사랑스럽게 굴지만, 어딘가에서 주워왔을 뿐인 고양이.
본질적으로는 무늬의 위치까지 정확히 같은 모양에 같은 품종의 고양이지만...
주인은 알겠지. 둘은 다르다는 것을.
이런 고양이의 예를 이해할 수 있기 전까지는, 원래 세계에 남은 미련이 뭐냐는 녀석의 질문에 답할 수 없을 것이다.
"너와 같이 아이돌 활동을 한건 기폭제 역할을 했지."
"내가 그렇게 고민거리였어?"
"...모르겠어."
"아하."
"언제는 며칠간, 잘 터지는 폭탄을 만들어보겠다며 모두를 공포에 떨게 했어."
"그 쪽의 시키쨩, 아이돌이 아니라 테러리스트였구나."
"그러던 중 실험실로 날 초대했지. 오자마자 방의 중간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 있는 소파에 날 앉히고 펄프가 다 가라앉은 오렌지 주스를 줬고, 나는 날도 날이니 그럭저럭 참아주려고 했어. 그런데 뜬금없이 말하더군. 내가 앉은 소파 밑에 폭탄이 있다고."
"위험하잖아, 그 녀석. 폭약 냄새라거나, 나지 않았어?"
"넌 냄새를 맡지 못해서 기준같은건 모르겠지만... 보통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걸 냄새로 알아맞히지는 못해. 아무튼 녀석은 말했어. '니 엉덩이 아래에 폭탄이 있어, 일정 시간이 지나면 터지게 해뒀지만 니가 일어나면 바로 폭발할거야' - 이러니 저러니 해도 폭발할거란 말이지만, 그나마 앉아있으면 질긴 목숨을 이어갈 수 있을거란 말이기도 해. 그 시간을 회유하는데에 쓰려고 했지만 녀석은 내 발버둥치는 모습을 더 즐기는 듯 했어. 느물거리며 내 질문을 회피하고, 녀석의 이야기만 꺼냈지. 어느새 우리의 대화는 샛길로 빠졌고 약속된 시간이 되었어. 이윽고 펑, 하는 소리가 들렸지...."
"지금 내 눈 앞의 너. 귀신인거 아니지?"
"불꽃놀이였어."
"엥?"
"별안간 커튼이 활짝 열리면서 펑, 퍼벙 하는 소리가 들리고, 눈을 뜨니까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있었어. 처음 봤을 땐 이상한 위치라고 생각했지만 그 소파가 있는 자리야말로 그걸 감상하기에 제격인 자리였던거야."
"......."
"그 날은 내 생일이었어."
"........"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이해를 못하겠어."
".......나도."
"그 뒤에 시키쨩은 뭐라고 했어?"
"'우리, 이렇게 앉아서 얘기해본것도 오랜만이지 않아?'라고."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해?"
"확신할 수 있어."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야."
"토하고 와."
"이런 대화를 주고 받았던거구나."
"네가 더 심했어."
"널 도와줄게."
".....원래 세계로 가는 것?"
"응. 우선은 단서를 모으자. 칸자키 란코를 찾아가는거야."
"........."
정확한 사정은 전부 털어놓지 않았지만 정황상 내가 란코를 원래 세계에서 알았다는 것은 녀석도 아는 것이다. 그것도 잘 알았다는 것을.
"네가 원래 세계에서 알던 사람들 중 가장 행방이 확실하니까."
"그건... 맞지."
본인을 포함하지 않는건, 두개의 단서를 후에 종합하길 위함이겠지.
"그 전에 네가 할 일이 있어."
"뭔데?"
"데이트 코스 짜두기."
"뭐?"
"넌 날 아는 것 같지만, 난 널 모르니까. 그런데 앞으로 우리는 협력할 관계잖아? 이런 정보의 불균형은 옳지 못하다고 봐. 옳은 주장이지? 옳소옳소~ 그러니까 내일은 '시키쨩&아스카쨩의 친해지길 바래' 프로젝트! 어디든 좋으니까 좋은 데이트 코스를 짜주길 바래. 그럼 난 이만-"
".....그건 그렇다치고, 넌 실종파가 아니었나. 무슨 코스를 짜두라는...."
"그야,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실종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알쏭달쏭한 말 한마디를 던진 녀석은 바로 드러누워 골아떨어졌다. 아니, 자는 척을 하는지 머리를 건드려도 가만히 눈을 감은 채였다.
+1~3 시키가 자는 사이 데이트(?) 코스를 짜보자. 같이 할만한 것들을 적어주세요
새벽부터 나의 얼굴을 가격하는 녀석의 주먹에 눈을 떴다.
"기지개가 너무 격한거 아닌가?"
".....누구세요...."
"모르는 척 해도 소용 없어."
"냐하. 아스카쨩, 좋은 아침이다냥-."
"말투까지 고양이가 되기로 한거냐."
"다른 어디가 고양이같은데?"
"......여러 부분."
"정말 신기하다니까."
뭐가? 라고 묻기도 전에, 녀석은 이불을 나에게 밀어둔채 화장실로 직행했다.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데이트 코스는 생각해뒀어?"
"아, 응."
"그래. 준비할게."
"이런 꼭두새벽부터?"
"이를수록 좋잖아? 사람도 없고."
쏴아아, 물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치카치카- 하고 양치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녀석답기도, 답지 않기도 했다. 녀석은 게으름을 피우지만 할 일에는 무시무시한 집중력을 발휘하는 녀석이니까.
조금은 더 잠에 들어있고 싶지만 녀석이 준비를 시작한 이상 나도 준비를 해야겠지. 단, 외출복을 그대로 잠옷으로 쓴 상태에서 준비라고 해봐야 양치와 세수밖에는 없다. 그러고보니 옷을 좀 사야하려나...
"아스카쨩, 코디해줄까?"
"네 옷으로?"
"흐흥, 아이돌 출신이라 이런 평범한 옷은 못 입겠다는건가? 그런게 아니라면 사양할 필요 없어. 어제는 먼저 자버려서 아스카쨩이 샤워 후에 뭘 입든 신경도 안 썼지만, 오늘은 같이 외출을 할테니 신경 쓸 여유가 있단 말이야."
"....너만 괜찮다면."
"호오."
"그런데, 민소매는 없는건가? 그쪽 세계의 넌 그런.. 뭐랄까, 노출이 많은 옷을 좋아했었는데."
"그거, 아스카쨩 취향?"
"내 옷 취향을 말한게 아니잖아."
".....시키쨩은 민소매 잘 안 입어."
"이런 부분까지 다른건가."
"아니, 좋아하긴 하지만-... 밖에서는 아무래도."
녀석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소매를 걷어올렸다.
녀석의 팔은 여고생의 가느다란 팔에 있으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할 세세한 흉터들로 가득했다. 내 미간의 찌푸림을 오해했는지, 녀석은 혀를 한번 찼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주목받는건 싫어."
".....그렇군. 어쩌다가 이렇게 된거지?"
+2 시키의 대답
녀석은 잠시 뜸을 들인다.
"자해라면 자해고... 그런게 있었어."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 녀석의 얼굴에 란코가 겹쳐보였다.
두렵다.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건가."
"매순간 했지. 냐하하."
"......."
"너도 외톨이, 나도 외톨이. 그러니까 말해주는거야. 어디가서 떠벌리는게 취미일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진 않으니까 안심해."
"안심할 수 있을리가."
"내가 그렇게 관종으로 보였었어? 슬프다, 흑흑."
"아니, 그런게 아니라......"
더 적절한 말을 찾는 중 녀석은 어느새 옷을 척척 꺼내놓아 이미 나의 코디를 정한 참이었다.
"이 청바지의 체인은, 아스카쨩이 좋아할 것 같아서. 그리고 티셔츠는 검은색으로."
"...신경 써줘서 고맙군."
옷가지를 챙겨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옷은 꼭 맞지는 않았지만, 옷감이 부드럽고 좋은 향이 났다.
녀석에게 물어보고 싶은게 있었으나 구태여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 쪽 세계의 시키도 그런 생각을 했었을까, 라는...
+1~2 디저트 카페로 가는동안 생기는 일 / 얘기거리
"그래서 첫번째 코스는 디저트 카페야?"
"그 녀석도 이런 디저트류는 좋아했으니까. 아마 여자아이들은 대부분 그럴거라고 생각하지만."
"응응."
"오프 때는 종종 이렇게 갔었어. 내가 케이크 하나를 시키면 녀석이 아메리카노..."
"의외네. 아스카쨩, 아메리카노 좋아하지 않아? 아, 그것도 나눠먹는건가?"
앗, 이건....
...쓸데없이 예리하기나 하고 말이야.
"차는...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아아, 그러니까 물에 맛을 입힌걸 좋아하지 않는거구나? 아니면.. 향이려나."
"뭐, 그런거지."
"요컨대 써서 못먹는건 아니라는거구나."
".........."
"그래서 그쪽의 시키쨩은 아메리카노를 좋아해?"
화제가 비교적 덜 골치아픈 것으로 넘어갔다.
녀석은 좋은 향에 환장하는 냄새패치 오타쿠였기 때문에 커피향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쪽의 시키는...
"넌? 좋아했었어?"
"아, 좋아했었지. 지금은 그냥 달콤한게 좋아."
....냄새를 못 맡게된 것은 후천적인 건가.
".....나도야, 그냥 달콤한게 좋아."
"호오오오."
"아메리카노는 써서 못 마셔."
녀석은 멈춰서서 별안간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래의 녀석과 달리 비웃음과 같은 의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게 그렇게 웃긴건가."
"응, 웃겨. 순수하게 웃겨."
"참 순수한 인간이군."
구형 차 한 대가 쇼와 시절의 노래를 최대볼륨으로 틀어놓고 도로를 무지막지한 속도로 달리며 우리를 지나가던 때였다.
"아스카쨩은 아이돌일 때, 어떤 노래를 불렀어?"
"어떤 노래냐하면.... 록 장르일까."
"음. 옷차림으로 미루어봐서는 펑크일까."
"글쎄...."
"그나저나, 아이돌 노래라 하면 펑퍼짐한 미니드레스를 입고 'I need you~ I want you~ love you baby~' 따위의 장르라고 알고 있었는데."
"우리 사무소는 그렇지 않았어. 물론 그런 류의 노래를 부르는 '정통파'도 있기는 했지만, 개성적인 사람이 많아서 말이야. 야구 팬이어서 야구 응원가로 CD 데뷔를 한 사람도, 줄리아나 도쿄를 동경해 디스코 풍의 노래로 CD 데뷔를 한 사람도 있었지."
"와, 그건 흥미롭네. 개개인의 특성에 맞춘 노래라.... 그럼 가사도?"
"응. ....많은게 변하지 않았다면 이 곳에도 우리 사무소가 있을거야. 길거리에서 들릴만한게 아닌 마이너 노래라 아마 너처럼 아이돌에 관심이 없다면 모를 수도 있겠지."
"사무소 이름이 뭔데?"
"346 프로덕션."
"그건 칸자키 란코의 소속사야."
"...........뭐?"
"확실해."
녀석은 나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듯 한동안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란코의 불안을 피해 도망친 곳이 346 프로덕션에서의 아이돌인 '나'였으니까.
손에 짐을 들고도 문을 열어주는 건 나.
스케줄 후 지쳐도 시킨 음식을 테이블로 가져오는 것도 나였다.
줄곧 그랬었던 것 같다.
언제부터였더라.
"맛있겠네. 사진 찍어둘래?"
"왜?"
"이세계의 음식인걸."
나는 웃고 말았다.
더 황당한건 내가 이 가짜 평행세계로 전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나도 납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차라리 이세계의 너를 찍겠어. 음식보단 도플갱어가 더 신기하니까."
"도플갱어라니? 둘 중 하나는 가짜란 얘기야? 무례하긴. 짝퉁 아스카 주제에."
"그런 의도는 아니었어. 그리고 아직 이 세계에 또 다른 내가 있는지 확실하지도 않잖아."
"아무튼, 얼른 시키쨩과 케이크 둘 다 예쁘게 찍어줘. 이 다음에 좋게 추억할 수 있게. 내가 이 설탕 덩어리 음료를 마시며 high해지는 순간을 꼭 기록해주길 바라."
"위험하잖아. 행복해진다고 해줄래?"
"뭔 상관이람."
"약물중독 같잖아. 게다가 하이해진다는건 일시적인거에 불과하니까."
"그럼 날 지속적으로 행복하게 만들어봐."
"찍는다."
성가시는 녀석.
...내 말대로면 사람은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는게 되는군. 인생은 굴곡 없는 직선이 아니니까. 그렇다고 해도...
난 지금 꽤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더 황당한건 내가 이 가짜 평행세계로 전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나도 납득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족관으로 걸어가는동안 문득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시선 걱정 없이 거리를 걸어보는구나.
이런 태평한 생각을 할 시국은 아니지만, 다른 생각을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1~2 수족관에서 생길 일 / 얘기거리
"나이차이 생각보다 있구나. 숫자로 보니까 조금 놀랐어."
"뭐....."
"그래서, 수족관은 어떻게 고른거야? 첫번째 코스는 너와 시키쨩이 좋아했던 디저트 카페. 수족관도 자주 왔었나보네."
"아니, 같이 온 적은 한번도 없어."
최근은 많이 바쁘기도 했지만, 혼자서라도 수족관 같은 곳을 올 여유가 없었다.
"다만.... 오늘은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한 자리니까."
"와~ 이 물고기 예뻐."
"........"
"으응, 그래서?"
"물은 말이지. 투명하고 깊어. 높은 빌딩에서 그 아래의 세계를 내려다보면 뛰어내리고 싶은 것처럼, 푸르른 물을 보면 뛰어들어 잠기고 싶어져."
"아스카쨩도 suicidal?"
"아니, 그냥 단순한 감상이야. 폭신한 솜사탕을 보면 만지고 싶다거나, 그런 감상. 넌 그런 생각한 적 없어?"
"있었어."
"그래. 그런거지. 바다라거나, 사람이 없는 밤의 수영장의 물을 보면 모든걸 담고, 모든걸 품고, 생명을 준다는 감상에 젖게 돼. 그건 말하자면 하나의 인격체야."
쏟아져내리는 달빛을 그대로 담은 물은, 손으로 한웅큼 떠서 다시 흐르도록 내버려두더라도 그 빛을 담고 있다. 물에 쓸려간 손은 그대로 작은 물의 장막에 감싸여 반짝반짝 빛이 난다.
"그 속의 생명체 - 깊은 바다의 초롱아귀든, 열대 바다의 작은 피라미들이든 본질은 같아. 우리처럼 코로 공기를 들이마셔서 호흡하는게 아니라 물에 잠겨 아가미로 호흡하지. '물 안에 살고 있다'는 디스크립션은 말로는 쉬워도 결코 간단하지 않아.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것들이지. 어느 날 하늘에서 헤엄치는 커다란 고래를 보게 된다면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거야. 그런 비일상을 여기선 마주하게 돼."
그리고 물은, 그들을 안전히 품어준다. 단단한 유리로 육지와의 커트라인을 그리며.
"그런 인격체에 살고 있는 그들을 보면, 묘한 감정을 느껴... 꼭, 나의 내면을 마주보고 있는 것 같은...."
"....말인 즉슨, 저들이 아스카쨩의 분신이라는 뜻?"
"조금 간추렸지만, 비슷할까나."
"냐하~ 저거랑 비슷한 생선 회로 먹어본 적 있는데."
"야."
녀석은 시키지도 않은 회 얘기에 열중했다. 미국 주방장이 어설프게 이랏샤이마세~를 외치며 녀석을 맞이했던 것부터. 스시 오마카세는 생각보다 가성비가 괜찮았다는 둥. 미국의 물가를 이해할 수 없는 내가 공감하기엔 어려운 경제 얘기로 또한번 흐름이 새더니, 다시 그 주방장으로 돌아와 회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맛있었어, 50달러의 행복~ 1인분이지만."
"오전이니까 애들도 많이 오는 횟집... 아니 수족관에서 그런 얘기를 너무 하는건 좋지 않을 것 같아."
"아스카쨩이 더하잖아."
우리는 조금 더 걸었다. 길게 이어진 복도는 물빛이 돌았다.
이 곳의 검푸른 하늘 안에는 작은 생명들이 날갯짓을 하며 큰 시각적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그림자가 녀석의 얼굴에 드리워지니 꼭 바다 속을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즐거움에 잔뜩 커진 파란 눈동자는 오늘따라 유독 깊어보였다.
"아아, 좀 있으면 상어 수조래. 표지판에 있어. 조금만 더 가면 불가사리를 만질 수 있는 코너도 있대!"
아주 신났군.
"안 그래도 곧이야. 아, 이제..."
천장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비교적 이른 시각임에도 조그맣게 웅성대는 소리가 들리는걸 보면 확실히 상어 수조다.
수조는 거대했다.
상어는 산책하듯 헤엄쳤다.
그 움직임은 슬로모션처럼 작고 느렸다. 몸이 아닌 움직임이 육중하다는건 이런 말일까.
움직임에 압도 당해 한동안 멈춰있었다.
녀석도 그런 듯 했다.
"응."
"........"
"왜 말을 안 해?"
잠깐.
방금 그 사람은....
내가 녀석을 보려했던 시선 끝에는...
...봐서는 안 될 사람을 본 것 같았다.
"아스카쨩. 괜찮아?"
"시키."
"응."
"칸자키 란코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나?"
"무슨 그런 질문을... 회색 머리에, 눈은 빨ㄱ... ....아. 뭐야? 여기 있기라도 한거야?"
나는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망쳐야 할 것 같았다.
무엇을 생각할 수 없을만큼 사고회로가 정지되어 있다. 단 한가지 떠오른 단어가 '도망'이었다.
비상구 표시의 초록색이 왼쪽에 보였다.
"잠깐, 아스카.... 어디로 가는거야."
"지금은.. 모르겠어."
"그럼 놔줘. 비상구로 가서 뭐하게?"
"....."
그건 그랬다.
순간적으로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을만큼. 내가 놀랍도록 당황해있었다.
나는 녀석을 놓았고, 이번에는 녀석이 내 손목을 잡았다.
"정신 차려."
"........."
"전의 세계에서 무슨일이 있었길래-"
"혼수상태야."
"아, 그래."
"......"
"....그래서?"
"........."
더는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고개를 숙였다.
"너도 나 놔줘."
"...알겠어."
녀석은 그대로 내 손을 놓았다.
그 때였다.
"아.... 아스카쨩....?"
두근거렸다.
공기에서도 호흡할수 없을정도로 두근거렸다.
물에 뛰어들고 싶었다.
+2 란코가 한 말 / 반응
란코는 파들거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내 옆의 시키는 안중에도 없는 듯 했다.
"....죽은 아스카쨩이 어떻게...."
뭐?
이 세계의 난, 죽은건가?
"저기-"
+1~ 주사위 두표 먼저
1~50 도망
51~99 납득
뛰면서 - 물과 같은 공기를 거친 숨으로 들이 마쉬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물 속으로 가라앉을수록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동시에 또 다른 거품들은 생겨나는 그런 과정을 반복한다.
그러던 나를 녀석이 멈췄다.
다급한 손이 상의를 붙잡았다.
도망을 친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나는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그래서 녀석의 의지를 따랐다.
"....괜찮아?"
그 목소리는 속은 셈 친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다정했다.
나는 괜찮지 않아.
하지만, 괜찮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 않아.
"왜 그랬어?"
나도 내 인격이 앞에 실체한다면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면목? 잘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은 확실히 없다.
다른 세계의 니노미야 아스카임을 증명할 자신보다도 없는게 내가 란코를 마주할 자신이다.
"떨지 마. 탓할 생각 없으니까."
"미안해."
"미안해하지도 마. 상황파악도 안 되는 주제에."
"......."
"왜 도망치고 싶었는지 생각이 나면 그 때 전부 얘기해주길 바랄게. 난 그쪽의 아스카쨩과 칸자키 란코, 그리고 이쪽의 아스카쨩과 칸자키 란코에 대한 것 중 아무것도 모르니까. 너도 이쪽의 아스카쨩이 '죽었다'는 것 때문에 지레 겁먹은 건 아닐거라고 생각하거든. 그것 자체로는, 적어도 도플갱어를 마주쳐서 죽을 일은 없어진 셈이니까. 그렇지?"
모르는 이의 죽음을 도플갱어의 법칙과 연관지어 가볍게 말하는 폼이 녀석다웠다.
그러나, 조금 솔직해지자면 나 또한 '모르는 나'의 죽음이 유감스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그래서 녀석의 정의에는 약간 마음이 놓였다.
저 수조의 물고기떼가 날 비웃듯이, 혹은 경멸하듯이 바라보는 것 같다.
란코는 나를 쫓아올까.
그 때도 나는 피할까.
물고기떼는 빙글빙글 돌며 점점 다가와 내 안을 침범했다. 그리하여 나의 머리 속도 물고기떼가 만들어내는 파동처럼 빙글빙글 돌게 되었다. 작은 소용돌이는 녀석과 나와 란코를 싣고 심연 안으로 안내했다.
그런 환상이 보였다.
홀로 선 고독은 남겨진 자의 아픔보다 적다. 부등호의 입은 분명 란코를 향해 벌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소유하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
금붕어라는 작은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그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건 아니다. 밥은 제 때 줘야하고, 어항 물도 갈아줘야 한다. 그 초점없는 눈이 무엇을 더 원하는 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그들이 요구한다고 알려진 것은 잘 따라줘야한다. 그것이 바로 그를 소유한 나의 책임이니까. 그를 건져내고 돈을 내 상품으로서 그를 소유한 것은 나의 선택이니까.
학교는 거대한 둥지이다.
누군가는 탁란지라고 했었다.
나는 란코를 소유하려 하지는 않았지만, 란코의 작은 둥지는 소유하고 있었다. 란코는 나를 믿고 기꺼이 그 공간을 내어주었다. 나 또한 그 공간에 뻔뻔하게 들어가 내 손으로 란코를 붙들었다. 나는 란코의 손을 잡아 내게 기대게 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두 명의 별개의 "아픈" 아이들 따위가 아닌, 둘이 되었다.
그것을 망쳐버린 것은 나다.
책임을 미루었다.
미룰 사람이 없음에도 미루었다는 것은 곧 버렸다는 것이다.
책임을 버린 대가는 부메랑과도 같이 돌아왔다. 그 부메랑은 천천히 내 뺨을 스쳐갔다. 별로 느껴지지 않는 아픔에 나는 눈을 감았다. 부메랑은 내 피부에 닿자마자 폭발물처럼 조각나 흩어진다. 그 조각들이 다시 온다. 망가져버렸더라도 부메랑이라는 듯이.
그 조각들 중에는 란코였던 것도 있지만 아니었던 것이 훨씬 많았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런 조각들이 아닌, 란코였다.
책임은 무거웠다.
무게를 지탱하는 얇은 줄은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목을 묶어두었다. 그 때 그녀를 발견하고 들어올릴 수 있었을까? 아마 발견했어도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눈이 먼 겁쟁이인 나는 그녀를 보지 못하고, 그녀의 줄은 툭 끊어졌다. 잠깐만, 무거워, 그런 말을 하며 발버둥쳤다.
아무리 그래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아서, 나는 눈을 떠 내 위의 란코를 보았다.
그녀는 조금 부어있었고 안색이 창백했다.
또, 눈은 감겨있었고.... 숨은 얕았다.
"난 란코를 외면했어."
"방금?"
".....그렇기도 하지만."
".....그런데 외면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어."
"Knowledge is power, France is bacon."
"어?"
"아는 것은 힘이다, 프랑스는 베이컨이다."
"....뒤는 프란시스 베이컨을 인용했다는 뜻이 아니던가?"
"웅."
"......."
"어쨌든, 그래. 모른다는 것은 조금 멍청할 지도 몰라. 탓할 만한 일인지도 모르지. 다만 달리 말하면, 그저 힘이 없었던 것 뿐이야. 힘이 없으면 걷다가 픽 넘어져버려. 대개는 그런걸 탓하지 않아. 떠올리면, 무릎에 상처가 나 아픈 기억이겠지만, 그렇다고 바보 같았다며 화를 낼것도 아니야. 모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걸? 무릎의 상처를 소독하고 흉지지않게 연고를 발라주면서 하는 생각은, '그래, 앞으로는 똑바로 힘을 주고 걸어야지' 정도면 돼. 배워나가는거야."
"......"
"깊은 정도에 따라 일주일에서 한달이 걸리겠지. 연고가 안 좋으면 착색이 될 수도 있고 말이야. 피부가 희면 착색된 부위가 거슬릴 수도 있겠지. 그래도 어쩌겠어, 이미 일어난 걸. 거울을 볼 때마다 넘어졌던 기억에 아파할 수는 없잖아."
나는 할말이 없었다.
"흉터를 긴팔로 숨기고 있는 녀석이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얼굴인걸?"
"그런게 아냐."
"흐흥, 이번엔 대답이 빠르네."
"......"
"넌 시키쨩한테 동정심을 가지고 있는거야?"
"....질문의 의도를 잘 모르겠어."
"Knowledge is power, Francis Bacon. 아는 것이-"
"그만해."
"흠? 이번엔 제대로 말했는데. France is bacon."
"....그러냐."
"응. 아는 것이 힘이다, 라고 프란시스 베이컨이 말했다. 베이컨이란 작자가 또 무엇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냐하."
"너도 힘이 없군."
"곧 넘어지겠지?"
"벽을 잡고 기대있어."
"오, 좋은 방법인걸."
"내가 벽이야?"
"벽보다 아스카쨩이 더 힘이 있을 것 같아서."
"....잘못 봤군."
"어라? 초등교육조차 이수하지 않은 벽보다도 모르는게 많은거야?"
"초등학교에서는 그리 많은걸 배우지 않아."
"그래?"
"응."
"역시 초등학교에 안 가길 잘했네."
"너, 안 갔어?"
"응."
"......후회 돼?"
"아니?"
"아, 그렇군. 대답이 빠른걸."
녀석을 흉내내듯 답하자 녀석은 고양이같은 입꼬리를 실룩이며 말했다.
"학교는 싫어. 초등학교의 시간을 빼더라도 이미 너무 많이 했으니까."
나도 녀석이 가는 곳을 따라가며, 수족관의 생명들에 대한 적당한 반응을 했다. 불안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녀석에 맞추는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저기...."
"네?"
그러던 중 직원에게 붙잡혔다. 녀석도 그렇고 나도 불법적인 행위를 하지는 않았는데.
"그게...."
"무슨 일이죠?"
"....어, 어떤 손님이, 손님들이 이걸 두고 가신 것 같다고..."
"두고 가...?"
"네. 이 봉투.."
"봉투를 들고 온 적은 없는데요. 착각하신 것 같...."
"아, 감사합니다."
"시키?"
"내꺼야."
"아... 그래?"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되세요."
"네네, 감사합니다."
시키는 자연스럽게 봉투를 받아들고 꾸벅 인사까지 했다.
봉투 같은건 가져오지 않았는데....
"너, 뭐야 이게?"
"초콜릿이 들어있군. 맛있겠는걸. 그리고 메세지 카드가 있어. '아스카쨩에게'라고 적혀 있는."
".....설마 란코가?"
"응. 이걸 건네준 손님에 대해 간단하게 '누군가'라고 하거나 적당히 말할 수도 있었는데 왠지 누구인지를 숨기려 하는 것 같은 태도였어. 칸자키 란코를 알아보고, 오프를 즐기는 연예인에 대한 예의를 차려준거야. 어쩌면 저 손에 소중하게 쥐고 있는 클립보드에 칸자키 란코에게 받은 싸인이 있을 수도 있겠네. 터무니없는 짓을 한건 아냐."
"...응, 넌 그러지 않을테니까."
란코의 메세지카드는 검은 바탕에 회색 레이스를 두른 모양새였다. 하얀 펜을 평소에도 들고다니는걸까, 멋들어진 흰 글씨로 '아스카쨩에게'라고 적혀있었다. 그러고보니 란코 - 그 쪽의 란코도 수집하는 것을 좋아했다. 주로 펜과 연필들을 모았었다. 집에서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취미라고 했다. 그래서 문구점 앞을 지나갈 때 유독 나에게 눈빛으로 신호를 보냈었다. 그렇게 고민고민하다 겨우 고른 펜들로 열심히 그렸던 스케치북은 자주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종종 마음에 드는 것은 사진으로 남겨 나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란코는 그림에 꽤 재능이 있었다.
언젠가 멀리 떨어지게 되면 나에게 직접 그린 그림으로 엽서를 만들어 편지를 쓰겠다고 했었는데.
"뭐해? 안 열어보고."
"....응."
수채화도구로 그린 그림엽서들이 많으니 이때까지 사지 않았던 수채화 도구를 사서 쓸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하면 나는, 연필로 그린 스케치나 펜화도 란코가 그렸다면 괜찮다고 했고, 란코는 웃었다.
* * * * * * * *
아스카쨩에게.
아스카쨩... 맞는거지? 란코야.
어떻게 된 사정인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너를 꼭 다시 만나고 싶어. 그리고 얘기하고 싶어.
시간이 된다면 이쪽의 번호로 문자를 남겨줘.
오늘 안이라면 전화도 괜찮아.
* * * * * * * *
번호는 안쪽에 조그맣게 적혀있었다.
"이쪽의 손글씨는 꽤나 귀엽네... 아스카쨩과 꽤 친했었나봐."
"다른게 크게 변하지 않았다면, 나는 전의 세계와 같은 중학교를 갔을거야."
"거기서 칸자키 란코를 만난거구나."
"응. 여기서도... 아마 그래서일거야."
"친한친구였던거지?"
"...응."
"번호라면 나중에 내 폰을 쓰게 해줄게."
어느새 우리는 통로의 끝에 서있었다.
"기념품 살래? 이런걸 가져가면 그쪽세계에서도 기념이 될테니까. 어쩌면 이쪽의 물가가 그쪽보다 쌀수도 있어. 그럼 이득이야."
"..촌스러운 티셔츠들과 인형.... 대체 뭘 사라는건가."
"말 조심해, 직원이 듣고 있을지도 몰라. 메세지카드를 건네줄지도 모르지. '너 시끄러'- 그렇게 써진."
"그러진 않을거라고 생각하는데."
"열쇠고리라면 어때?"
"왜 자꾸 사라는거야?"
"지갑에 돈이 많길래? 팍팍 써줘야지."
"아아, 그걸 또 기억하는군."
"냐하하."
+1~2 수족관 구경을 마치며 / 다음 장소로 이동하며 생길 일 혹은 얘깃거리들.
"응. 괜찮겠네."
"역시 아스카쨩도 먹고 싶었구나~ 갈까갈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아까 회 얘기하면서 엄청 먹고 싶어졌어!"
녀석이 다시 그 얘기를 시작한다.
기념품 가게의 생선 인형을 들고, 중간중간 큰 소리로 웃으면서.
그 점을 빼면 시키의 웃음은 매력적이다.
냐하하- 라며 얼버무리는 듯한 말버릇이 싫지는 않지만, 그래도 정말로 웃는게 더 좋다.
근래 이런 웃음을 본 것은 드물었다. 특히 본인이 직접 이야기를 하며 웃는건...
적절한 상황과, 그 때로 돌아간 것 같은 추억의 냄새와, 약을 살짝 한 듯한 아드레날린이 섞여야 가능한 일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래서, 결국은 기숙사로 돌아왔을 때 내 룸메이트 알렉스가...."
물론 나에게 약을 했다고 고백한 적은 한번도 없다.
다만 유학 시절 입에 댔을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쪽의 사람들은 대마초, 즉 마리화나를 담배처럼 접한다. 담배와 같다는 것은 고등학생도 마음만 먹는다면 접할 수 있다는 뜻이다. 콜로라도에서 처음 합법화가 되어 그 이후로 다른 지역도 합법화가 되고 있다. 녀석이 유학을 간 것은 대도시 쪽. 건물 내부나 조금 어스레한 뒷골목에서는 그 특유의 향이 나겠지. 그럼 그 향에 이끌린 녀석은 호기심을 못 참고....
아, 정작 이 녀석은 그걸 맡지 못하려나.
가능성은 두가지이다. 이쪽의 시키는 냄새는 못 맡지만 다들 하니 한번쯤은 해봤을 것이고, 저쪽의 시키는 냄새가 좋냐 싫냐에 따라 했는지 안 했는지가 갈릴 것이다. ....그렇다면 이 녀석은 적어도 한번은 해봤다는 얘긴가?
....억측이군. 진실은 본인밖에 모르겠지.
"듣고 있어?"
"어?"
"기분 나빠..."
"...미안."
"......기분 나빠..."
"근데 왜 그 인형을 들고 계산대로 가져가면서 나한테 그런 눈빛을 하는거지?"
"냐하하- 풀어줘."
"정말로 그 멍청하게 생긴 인형을 사면 기분이 풀릴거라고 생각해?"
"음.... 아! 다시 보니 정말로 멍청하게 생겼네."
"보지도 않고 골랐군."
"응. 사실 다 멍청하게 생겨서 말이야. 뭐든 다 똑같을거라고 생각해서."
"디자인팀이 대충 만들었네."
"생기다 만 것 같아."
"텍스쳐는 그나마 네가 고른게 낫군."
"다른 것들은 뻣뻣하고.. 멍청하게 생겼더라도 질감이 좋은게 낫잖아? 근데 이것도 요즘 나오는 모찌 인형들에 비하면 부드러운것도 아니지. 오히려 화장실 매트같아."
"제발 목소리 좀 낮춰주세요...."
"아, 죄송..."
"죄송합니다."
구경에도 정신이 팔렸고 녀석이 쓸데없이 신나서 자기 얘기를 털어놓는 것도 시간이 오래 걸린 요인 중 하나였다. 그리고 또, 상상치 못한 인물과 조우했기에... 잠깐은 그 충격에 잠겨있던 것 같다.
"저녁 먹기까지는 시간이 좀 남았나."
"이른 저녁도 좋지 않아? 아무데나 들어가는게 아니라 맛집을 하나 콕 집어서. 그렇게 걸어가다보면 적당히 배고픈 시간이 될거야."
"그럴지도.... 그럼 맛집을 찾자."
"우선 이 주변에 유명한 횟집은.. 냐하, 아는게 없다."
"그럼 아는것처럼 서두를 떼지 말아줄래?"
"인간은 허세를 부리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야. 아스카쨩도 그렇지 않아?"
".....가끔은."
"오오, 어떤 허세를 부려?"
"그냥.... 강한 척."
"아아, 학교에서 한 주먹 날렸구나."
"그런 물리적인 게 아냐."
란코가 자살시도한 후의 한달동안 나는 그 강한척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야 란코는 나 이외의 주변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프로듀서도, 시키도 몰랐다. 어쩌면 아직도 내가 학교에서는 혼자 다니는 고독한 부류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프로듀서는 눈치 따위 없으니까. 그리고 시키는 내 학교 생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특별히 내 귀가 시간에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로 나를 못 믿지도 않았고, 친구도 그냥 그럭저럭 사귀겠거니 생각했다. 당신들의 자식 또한 다른 자식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친구를 사귀고 중간은 가는 성적을 거두는 평범한 학교 생활을 하기를 기대한 것이다. 그 기대가 선입견이 되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부모라도 그럴 것이다.
란코는 혼수상태이다. 아파서 병원에 있다고 둘러대고, 병문안을 간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가장 친했던 친구가 자살 시도를 해서 혼수상태에요. 죄책감 때문에 가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아요"라고 말하지 않아도, 병원에 간다고 하면 두말없이 허락해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란코에 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세계가 약속이라도 한 듯 그 날 이후로 상황들이 달라졌다. 모든 상황이 나를 겨냥하는 것 같았다. 기댈 곳은 없는데, 프로듀서도 시키도 나에게 기댔다. 그 녀석은 한층 더 제멋대로였다. 프로듀서보다 조금 더 나의 사생활에 가까이 있었던 녀석은, 내가 병원을 간다고 할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그렇다고 내 사정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전부 털어놓았다간 녀석이 무언가를 할테고, 그 무언가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철저히 무너질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있었다.
무엇이 두려웠을까.
녀석은 이미 날 망가뜨리고 있었는데.
"네가 나 외의 사람들 중 란코에 대해 안 첫 사람이야."
"와우! 그렇구나."
"그쪽...에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어."
"그게 강한척이라는거야?"
"응."
"아, 표정이 어두워보이네. 괜찮아, 시키쨩이 안아줄게."
"....그럴 필요 없어."
녀석은 이상하게 내 말을 흉내내며 웃었다.
그래. 웃긴 쪽은 나다. 그럴 이유도 없는데 표정까지 굳어져서 피해버렸다. 비웃어야 마땅해. 내가 왜 그랬을까...
라고 변명처럼 운을 떼고 다시금 과거에 대한 생각 속으로 들어가려던 나를, 녀석이 감싸안았다. 잔뜩 흉터져있을 팔로. 있는 힘껏 힘을 주어서.
"괜찮아~ 괜찮아~ 거리 한복판에서 안기는건 부끄러운게 아니야."
"그런거 아냐."
"뭘 자꾸 아니래? 그럼 말을 확실히 해줘."
"...아무튼 아니라니까..."
"흐흥. 역시 거리 한복판에서 안기는건 애같아서 싫다고 생각하는거지?"
"....."
물론 아니다.
그래도 침묵했다.
"그럼, 냄새 페티쉬는 없지만 쓸데없이 스킨쉽이 잦은 시키쨩이 멋대로 해버렸다고 하면 부끄럽지 않지? 그러니까 밀쳐내지는 말고, 얌전한 고양이처럼 있어줘. 쓰다듬어줄테니까."
"밀쳐낼 생각 없었어."
"그래그래, 착하지."
애완묘 취급은 짜증났지만, 그 모든걸 덮어버릴 정도로 비일상은 좋았다.
그렇기도 하고, 점점 길거리에 사람들이 많아졌다.
정말로 녀석이 말한 이유가 현실이 된 것이었다.
애같다고 생각하는 것도 애같지만....
어떻게 자연스럽게 그만두자고 해야 하는걸까. 이 각도에선 녀석의 얼굴도 볼 수 없다.
"저기.. 시키."
"응?"
".....그게...."
꼬르륵.
"풉."
"......."
녀석은 아주 자연스럽게 나를 놓고 자지러지게 웃기 시작했다.
아아, 정말 끝내주는 타이밍이군.
애완묘 취급에 이어 애 취급을 받지 않아 그 점에서는 아무런 타격감이 없다는 걸 위로 삼도록 하자.
"그럼 갈까?"
"그래."
"....잠깐. 우리, 아직 맛집을 찾지 않았어."
"...그러고보니 그랬지."
"아스카쨩이 힘든 일을 털어놓으며 펑펑 우는 바람에...."
"야."
"안 그랬어?"
"그런 신파극따위 안 찍었다고."
"그래, 그럼 맛집이나 찾자."
녀석은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래서, 연락할거야?"
"응."
"그래."
"지금은 말고. 조금 더 하루의 끝같은 시간에...."
"왜냐면 지금은 밥을 먹어야하니까?"
"....그렇다고 치지."
"으음... 앱에서 딱 끌리는 맛집은 없어보이니...이럴 때는,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에 가본다, 랄까나."
"장난하냐?" 그렇게 찾아놓고.
"아앙, 그래도 아무데나 갈 수는 없잖아."
"아무데나 가자는 말을 돌려 말하는거 아니었어?"
"그렇게 들리려나? 그거랑은 조금 다른데. 아, 그래. 네가 보았던 시키쨩의 '실종'이라고 해둘까. 아까 얘기했던 그 집도 그렇게 찾았거든."
"실종....이라."
"응. 길 잃은 널 주운것도 실종 덕분이었잖아. 그러니 이번에도 비틀거리는 감을 믿고 전진-"
"부탁이니 고양이 대하듯 말하지 말아줘."
"냐하하."
"...고양이 같은 녀석."
"얌전한 고양이? 야옹~"
"아니, 얌전하지는 않고...."
그런데, 뭔가가 걸리는데.
아까부터 원래의 시키에게 하듯 계속 틱틱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녀석이 그럴 짓만 골라하는 것도 아닐텐데. 이 곳의 녀석은 그쪽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그런데도.
'....조금만 더 다정하게 굴어줬으면 하는데.'
....그렇게 말해놓고선...
심경의 변화가 있다는건가. 이쪽도 내가 조금 더 편해졌다거나.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실종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래, 그런말도 했었지.
오늘 계획을 짜두라는 말도 요컨대 그 소리였다.
그건 무슨 뜻일까.
그쪽의 녀석이라면 나를 데리고도 실종이란 것을 하곤 했다.
이쪽의 녀석은 타인과의 실종을 싫어하는건가.
아니, 그런데도 방금은 실종을 제안해왔다. 처음부터 단어로 설명하지는 않았어도.
"시키."
"왜?"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뜬금없는 질문이네."
"생각해본 결론이야."
"그 생각의 흐름을 나도 좀 따라갈수 있게 해줘."
"말로 꺼내기엔, 자의식 과잉같으니까."
"자기객관화를 아주 잘하고 있네."
"아이돌로 생활하려면 그럴수밖에."
"조금 슬픈걸. 아, 그래서 질문이 뭐였지?"
".....나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2 시키쨩의 대답
녀석은 처음과 같은 표정으로 나를 본다. 눈은 크게 뜨고, 입은 양옆으로 주욱 늘어져있다. 입꼬리의 방향은 조금 올라가 있다. 나도 지지 않아. 눈도 피하지 않을거야. 내가 눈을 돌리면 넌 또 농담처럼 웃을테니까. 내 말이 틀렸나?
"네가 나를 생각하는 것과 비슷할거야"
"어?"
"...응, 아마 그럴걸?"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어떻게 알고?"
"귀여운 소리를 하네, 아스카쨩. 본인부터 모르면서."
"......."
생각해보니 그랬다.
나는 내가 이 녀석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건지 잘 몰랐다.
"그러면 말이지, 슬슬 가자. 시키쨩과 아스카쨩의 행방불명이야."
"....그러도록 하지."
걷다가 녀석이 마음에 드는 가게가 있으면 멈췄다. 그 곳이 서점이면 하드커버 북 하나를 펼쳐 시간을 보냈고, 긴 서론을 끝낸 후 밖으로 나왔다. 아기자기한 귀걸이 가게 같은 곳도 들렀는데, 이 곳의 녀석은 아직 귀를 뚫지 않았었다. 아이돌 활동이 아니었으면 귀는 안 뚫었다는 건가. 이건 그쪽의 녀석에게 묻고 싶다.
대신 녀석은 내게 어울릴만한 귀걸이를 찾는 것에 몰두했다. 검은 색의 번개 모양 혹은 신성모독적인 십자가 귀걸이를 내 귀에 대어보고는 즐거워했다.
"미스터리 선물이야. 절대 열어보지 말기."
"...이제 눈 떠도 돼?"
"응. 검은색으로 포장된 상태니까."
"아까 보던 것들 중에서 고른건가."
"그것도 비밀이야."
"언제 열어봐?"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열고 싶을 때' 열어봐."
희한하게도 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고마워."
그렇게 헤메이다 눈에 들어오는 횟집을 보았을 때는 이미 하늘이 분홍빛으로 물들어갈 즈음이었다.
"작으면서도 귀엽다."
"작으니까 귀여운거야."
"그런가? 어쨌든 들어가보자."
뻣뻣한 천을 손으로 잡고 올리자 바로 '어서오세요!'라는 힘찬 목소리가 들렸다.
가게의 내부는 생각보다 깊었다. 나무로 된 발을 곳곳에 둘렀고, 벽에는 종종 옛스러운 봉숭아꽃 그림을 걸어두었다. 호랑가시나무의 나뭇가지도 걸려있었다. 저건 액운을 막는 용도라고 란코에게 들었다.
"저기가 느낌이 좋아."
녀석이 그랬기에 호랑가시나무 아래의 테이블에 앉았다.
주문은 모듬회와 해산물튀김이었다.
+1~2 얘깃거리 / 일어날 일 / 상황 등등
@회 먹고 싶다...
"역시 신경쓰이는구나?"
아니, 그래서 그런건 아닌데.
이보다도 늘 녀석의 귓볼에 반짝거리던 그것의 부재가 내게는 조금 더 신경쓰였다. 아침까지는 발견하지도 못했던, 구멍 없이 깨끗한 귓볼이.
"....넌 귀 뚫어볼 생각은 없어?"
"어?"
"아니, 아까 그 가게에 있던 것들. 너한테도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녀석의 표정이 단박에 굳었다.
내가 무언가 잘못했나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모르겠다. 내가 했던 말에 실례되는 것이 있었던가.
"냐하하.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래서 연락은 어떻게 할거야?"
연결이 부자연스럽잖아.
"..우선은, 호텔로 되돌아가면 메세지를 남겨둬야겠지. 오늘은 도망쳐버렸지만, 직접 만나서 풀어나가야 할, 그런 이야기니까. 전파를 통해 나의 목소리를 전하는 것보다도 얼굴을 마주보며 이야기하고 싶어."
"아아, 로맨틱하네."
"로맨틱은 무슨."
"그런 낭만을 품고 살아갈 것 같은데."
"......"
"내가 말한 그 문장, 마음에 들어할 것 같고."
"아, 그래."
"정곡이지?"
틈을 보이면 한계도 없이 장난식으로 파고들어버리는 그 녀석이 겹쳐보였다. 장난기 어린 눈동자가, 아까 어두워졌던 표정을 싹 지우고 고양이처럼 입꼬리를 마는 표정이, 전부.
귓볼에 구멍이 나 있던 그 녀석의 오만을 차곡차곡 쌓아나간 건 나일지도 모른다. 그 녀석이 굳은 표정을 지으면 녀석이 아닌 나에게서 잘못을 찾곤 했고, 판단하려 하곤 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주의를 다시 돌리려, 가상의 잘못을 메꾸려 노력하곤 했었지.
그럼 바로 잡아먹을듯이 입을 벌려 웃어버리는 녀석이 눈 앞에 있었다. 그 변덕에 나는 안심했다. 평소에는 질색을 하던 스킨십도 그 변덕이 마법이라도 되는 양 좋아졌다.
그러고보면 스킨십은 늘 그쪽에서 하곤 했었지.
친구든 아니든 스킨십을 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는 여지껏 란코를 제외하면 없었다. 부모님도 언젠가부터 자기 전 안아주거나 집안일을 하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일을 그만두었으니. 사춘기로서 '사랑받는 아이'의 역할은 마지막을 맞이하고, 삶이란 연극에서 난 또 다른 배역을 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분투 속에서 란코를 만나고, 시키를 만난 것이다.
그리고....
"시키."
"응."
"난 널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와아. 깊어."
"....너, 아까 내가 한 질문 까먹었지."
"아니아니."
"넌 날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었잖아."
"응, 기억하고 있다니까. 내가 어떻게 대답했는지도."
"그럼 가르쳐줘."
"숙소를 제공해줬으니 빚은 청산인걸. 그것도 그쪽세계의 시키쨩이 진 빚이고."
"그건....."
"그보다 그게 왜 궁금한거야? 시키쨩은 네 눈 앞에 있는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려고 해봐. 추상적인 마음 속 그림에 사로잡히지 말고."
"튀김 나왔습니다."
"....일단은 먹을까."
"그랭."
조금 떨어져있는데도 파사삭, 튀김 옷이 부서지는 소리가 선명했다. 탱글거리는 새우살의 식감도 입모양으로 그대로 전해졌다. 또 다른 한점을 들고 다시 베어물어 햄스터처럼 볼이 가득 찼다. 오물거리는 폼이 퍽이나 귀엽...
.....잠깐.
"내 새우튀김은?"
"어? .......아. 어딨지?"
"....네가 입에 물고 있네."
"이런."
"이런, 은 무슨."
그래, 다른 세계선이라고 해도 넌 이런 녀석이었지. 고작 음식갖고 이러는것도 나 자신에게 지쳤다.
"미안!"
"어?"
"....나눠먹는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건가.
"대신이라고 하긴 좀 뭐하지만 이거라도 먹을래?"
"꼬리밖에 없잖아."
"그렇다고 입 안에 있는걸 줄 수는 없으니까. 대신 오징어 튀김은 두개 먹어도 돼."
"아아, 그래. 고마워."
오징어 튀김은 꽤 많았다. 두개만 먹으면 내 쪽이 덜 먹는거다. 하지만 요지는 그게 아니지.
녀석은 슬픈 표정으로 입 안의 새우를 씹고 있었다.
애초에 새우는 먹고 싶지 않았어. 원래대로라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쉬이 입이 안 떨어졌다.
녀석이 녀석같지 않아서 나도 나같지 않았다.
나같다는게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튀김 때와는 달리 배고픈게 우선이라 녀석이 먹는걸 보지도 않고 바로 젓가락을 들이댔다. 얇은 젓가락에 감기는 두껍고 기름진 참치살. 사람은 혀가 아니라 코로 먼저 음식을 맛본다고 하지만 회의 경우는 예외다.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으니. 그 대신, 젓가락이 촉각으로 그 두께와 부드러움을 짐작하고 맛보다도 더한 전율을 느끼게 한다.
역시나다. 입안에 들어서자마자 혓바닥의 감각이 마비되어버린다. 어금니로 깨물면 마냥 부드럽지만은 않다. 얇은 힘줄들이 느껴지고, 그 이전에 탱글거리는 식감이 있다. 그러나 뱃살이라는 특수부위는 그것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1초도 지나지 않아 사르르 녹아 달큰한 참치의 맛과 와사비의 톡 쏘는 맛이 입 안에 고스란히 남는다. 삼키는 순간은 느껴지지도 않는다.
이러한 맛의 향연이 끝나는 순간은 아쉽지도 않다. 다만 더한 감각을 갈구할 뿐이다. 먹고 있는데도 배고프다는 말은 이럴 때에 쓰는 것이겠지.
아, 실수다.
제일 기름진 것을 먼저 먹어버리면 나머지가 시시해져버린다.
이제는 어떤 것을 먹어야할까.
차라리 아예 담백한 것으로 다시 맛의 정점을 위한 건축을 시작해야하는 것일까.
"읍."
"회는 쉴새없이 몰아쳐야 제 맛이야."
그렇게 녀석에 의해 본의 아니게 근본없는 생선으로 다시 회를 향한 여정을 시작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조금은 배부르다 싶어졌을 땐 이미 직원이 비워진 그릇을 치운 후였다.
뜨거운 녹차도 전부 비워버렸다.
"냐하하~ 맛있었다."
"그러게."
"담담한 척 하지만 얼굴은 솔직한걸."
"내가 웃고 있는게 이상한가?"
"이상하진 않아. 오히려 좋지."
"그래, 고맙군."
"시키쨩도 생선을 보듯이 봐주면 좋을텐데."
이건 또 무슨 맥락이지. 생선을 보듯이라면....
".......잡아먹을듯이?"
"아니, 아까 말한거. 눈 앞의 시키쨩을 받아들이기."
"계산서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녀석도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어찌되었든, 상쾌하게 저녁을 마무리한 녀석과 나는 오늘의 마지막 여정으로 향했다.
그 쪽 세계의 시키와 내가 처음으로 섰던 무대.
지하로 향하는 허름한 돌계단에서부터 음악소리가 쿵쿵 울렸다. 포스터를 보니 무명의 밴드였다. 입장료는 내가 벌린 일이었기에 내가 계산했다. 녀석의 손목에 연보라색의 종이 팔찌를 둘러주고 나도 팔찌를 둘렀다.
열정적인 무대와 비례해서는 조금 한산해보이는 내부는 조명으로 번쩍거리고 있었다. 무대에서 바라보는 광경과는 또 달랐다. 곡 또한 커버인지 자작곡인지 잘 모르는 곡이어서 아직은 몰입이 되지 않았다. 우선은 낯설고도 익숙한 이 공간에서 안정감을 찾는게 우선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관객층부터 둘러보는 나와는 반대로...
의자를 찾지도 않고 뿌리를 박은 듯 가만히 서서 무대를 보는 녀석은, 그냥 그대로 두면 어디론가 가버릴 것 같이 보여서, 그렇다면 차라리 옆에 서서 손목을 붙들고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2 다음 상황..
녀석은 여전히 멍하게 무대를 보고 있었다. 잡고있던 손을 흔들자, 그제서야 반응을 했다. 괜찮아? 라고 물었다. 대답의 대신으로 녀석은 내 어깨에 기댔다. 몸과 정신을 통채로 맡기고 있던 음성이 사라져, 더는 기댈 곳이 없다는 듯이. 힘이 쭉 빠진 것 같이, 평소보다 조금 더 무거웠다. 기절한 사람은 보통의 몸무게보다 무게가 더 나간다던 말이 생각이 났다.정말로 기절한 것은 아니지만 사실은 걱정이 되었다. 이 걱정을 어떻게 덜어야할까. 어떤 방식으로 널 생각해야 무엇을 더 해야하는건지 알 수 있을까.
그냥 널 이대로 받아들일까.
기대는 것을 넘어, 품 안으로 파고들고, 허리에 팔을 두르고, 충족되지 않는 것을 채우려는 듯 점점 그 힘을 조여오는 널.
네가 원했던 것처럼.
그런데, 그건 어떻게 하는거지.
"괜찮아?"
다시 한 번 물었다. 녀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야."
"아파?"
"응. 그렇지만 괜찮아. 이렇게 하고 있으니까."
".....그래."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야.
녀석은 어제도 그렇게 말했었다.
그쪽 세계의 시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였던 것 같다.
녀석은 자세를 고쳐 섰다. 맞잡은 손은 놓고 싶을 정도로 뜨거웠다. 내 손에서도 열이 나는 것 같았다.
다시, 드럼 소리와 함께 연주가 시작된다. 둥, 둥, 둥, 하고 조명이 색색깔로 변모할 때마다 바닥도 같이 덜컹거렸다. 아니, 기분 탓일까. 단순히 기분 탓이라 치더라도 나는 무대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나와는 다르게 녀석은 지나치게 음악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곡이 끝나도, 그 다음 곡이 끝나도, 계속 계속.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고 마지막 무대가 끝나도, 녀석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밴드의 보컬이 무어라 인사를 하며 호응을 유도한다. 박수는 나왔지만, 앵콜 요청은 나오지 않았다. 밴드는 그대로 무대의 뒤로 떠나간다. 조명이 밝아진다. 직원들이 털레털레 걸어나와서는 무대 장비를 치우기 시작한다. 우리는 "좋은 록이었어" 따위의 흔하디 흔한 평가를 하며 걸어가는 무리를 따라 밖으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올렸다.
"아스카쨩도 록 장르의 음악을 했다고 했지."
"깊게 파고든건 아니었어. 아이돌은 아티스트라기보단, 작곡가에게서 곡을 받아 그 곡으로 노래를 할 뿐이니까."
"하지만, 그 쪽의 아이돌들은 맞춤형으로 노래를 만든다며. 노래하고 싶은 것에 대하여."
"....그건 그렇지만."
"아스카쨩은 무엇에 대해 하고 싶었어?"
"존재 증명."
"......."
"'나는 여기에 있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어."
"응."
"이 인류의 속에서 방황하는 나. 내가 무엇인지 나도 몰라도, 그래도, 부딪히고, 발견해가며 계속 괴로워하는 나. 그 모든 '나'는 어째서 존재하는가. 어째서 나는 계속 부딪히는가. 그런 '나'가 이 곳에 존재한다는 그런 메세지를 말하는거지. '아픈 아이'인 나에게, 그리고 다른 '아픈 아이'에게 말이야. 그러나 그리 노래한 곳에서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건가. 내가 존재하는 이 세계에서는, 그 곡은 존재하지 않고. 우스운 일이군."
"아스카쨩이 말하는 존재 증명은 아스카쨩 자신에게의 존재 증명? 아니면 그 존재를 타인에게서 증명받고 싶어하는건가?"
"....둘 다....일까."
"그렇구나."
"응. 결국은 '우리들'에게 전하는 메세지니까."
"나는 아스카쨩에게, 아스카쨩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사람이야?"
"......"
"아니, 그런 사람이었었나?"
"그런건... 생각해보지 않았어."
"아, 그래."
우리가 만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어제까진 완전히 초면의 타인이었다.
".....그 존재 증명이란 거. 모두가 하고 있는 것 같아."
"응?"
"너도 - 아스카쨩도. 밴드의 보컬도, 기타도, 드럼도, 베이스도, 심지어는 트라이앵글 치던 사람도."
"그런 셈인가."
"그 쪽의 시키쨩도."
녀석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호텔로 돌아와서 녀석은 바로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스마트폰은 나에게 맡기고. 일련의 행동은 같지만 데자뷰는 아니다. 생소함은 완전히 잠식되었으며 패닉이 아니라 기묘한 두근거림이 머리에서 발끝까지를 순회하고 있었다.
란코. 나야. 아스카.
한 자 한 자, 로마자에서 변환을 시키고는 눈을 감았다.
란코에게서 답문이 올까.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까. 만날 장소는? 만난다면... 만날 시간은?
그러고보니 녀석은 호텔에서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빠른 시일 내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그럼 내 행선지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개운행."
"머리나 제대로 말리시지."
"싫은데에."
"그럼, 나왔으니까 나도 샤워하러 들어갈게."
"아, 옷 필요하지 않아?"
"....그러네."
또다시 신세를 진다. 녀석이 옷가방에서 옷을 가져오는동안 나는 세안을 했다. 비누거품에 차가운 물을 끼얹으며 전부 씻겨가기를 원했지만 란코에게 문자를 보냈다는 것이 짐처럼 마음속에 남아 자꾸만 생각이 났다.
"자, 여기."
"고마워."
"어차피 다시 물에 적셔질 운명이지만, 세수 다 했으니까 예의상 수건으로 얼굴 닦아줄게."
수건이 얼굴을 닦기엔 과하게 크고 도톰한데다가, 손 힘 자체도 어린 아이가 하는 것처럼 거칠었다.
"눈물나게 고맙군."
"냐하하."
"그럼 이제 나가서 머리나 말려."
"싫다니까."
녀석은 5분동안 말장난같은 실랑이를 벌이고 나서야 간신히 나가주었다.
그러고보니 많은 것을 한 하루였다.
마음의 빚은 몰라도, 피로만큼은 물줄기에 씻겨나가주었으면.
그리고 자고 일어나면 모든게...
.....역시 잘 모르겠다.
+2 다음 상황 / 장면..
급하게 남아있던 비누거품의 흔적을 씻어버리고 큰 수건으로 대충 몸을 감싸 샤워부스의 밖으로 나갔다. 문자메세지가 와 있다. 저장되어있지 않은 번호다. 그러나 란코의 번호는 아까 저장해두지 않았다. 란코일 수도 있다. 그 쪽의 세계에서 처음으로 전화번호를 교환했던 교문 앞에서 란코는, 그 때마저 쭈뼛거리고 있었다. 아직은 서로와 보낸 시간이 많지 않을 때였다. 그 이후로 나는 란코의 전화번호를 기억할 일이 없었다. 이름으로 저장된 번호의 데이터가 있으니까, 번호를 외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러니 이건 낯선 번호다. 처음 전화번호를 교환했을 때만큼이나.
그 번호 아래의 메세지는.
'지금, 전화...해도 돼?'
한동안 매일 전화했었던 번호가, 전화해도 되냐는 메세지가 너무나도 낯설다.
나는 시키의 스마트폰을 두 손으로 쥐고, 키패드의 의미없는 자동완성을 하고 지우는 행위를 반복하며 생각에 빠져있었다.
"아스카쨩."
"야."
"어머, 수건 차림으로 바닥에 앉아있는거야? 추우면 감기걸릴텐데~"
....녀석이 화장실을 써야했던건지 들어오고야 말았다.
"뭘 감상하고 있는거람. 보니까 시키쨩한테는 그렇게 간섭했던 머리도 아스카쨩은 말리지 않고 있네. 급하게 뛰쳐나온 거려나? 아니면, 시키쨩에겐 그저 트집을 잡고 싶었던걸까? 노농. 그런 가능성은 생각할 수가 없어."
"어째서지."
"아스카쨩은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덤으로, 문자 입력창에 이상한 말을 쓰고 있기도 하고."
"자동완성이야."
"그래, 그렇겠지. 문자가 뭐라고 왔길래 고민중이야? 사실은 널 깊이 사랑하고 있었어, 라던가? 으흥, 죽다 살아난 친구에게 보내기에는 좀 과격한 문자려나."
"......전화. 해도 되냐고..."
녀석이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전화. 전화... 아, 그래? 전화? 응, 그래. 뭐, 해봐. 젖은 머리가 거슬리지 않는다면."
"......."
"옷장에 샤워가운도 있더라."
"으응."
+1 망설이다 결국은 전화를 건다. 란코의 첫마디.
+2 전화의 진행 상황 / 다음 상황
@오늘 정주행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