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전부터 병원 천장 아래에서 무의식의 세계에 살아가는 란코가 아니라, 진짜 세계에서 숨쉬며 살아가는 란코에게.
....진짜 세계라.
기괴한 말이다. 이게 진짜면, 내가 여태 살아왔던 세계는 무엇이며, 이게 가짜라면, 지금 내가 숨쉬는 공간은 무어란 말인가.
가짜라거나 진짜라거나, 그런 경계조차 없고, 나는 그러한 기우를 깨달을 감각도 없다.
단지 란코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아플 정도로 두근거린다는 것만이,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의 전부다.
드디어 액정에서 손가락이 떨어졌다. 시스템상으로는 이미 전화가 걸린 것이다.
뚜르르 소리가 연속해서 났다.
덜컥 불안해짐과 동시에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이대로 란코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
작은 신음, 혹은 탄식 소리가 들렸다.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입을 틀어막는 란코의 버릇이다. 그런 작은 소리까지 전부 너무나 귀에 익은 소리이다. 이 전화 너머에서 란코도, 내 목소리를 들으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세계의 나도 이 세계의 란코가 그렇듯 다른 세계의 자신과 같은 말투, 버릇, 목소리를 가지고 있을까.
문득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손에 필요 이상으로 힘이 들어간다.
- "아스카..."
"........."
- "아스카쨩......."
란코가 나를 부른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차마 마주하지 못했던 감정이 망각이란 한 겹을 들춰내고 자신을 드러낸다.
란코가 혼수상태에 빠지고 나서는 처음으로.
아니, 란코와 마주친 이래로 처음이었다.
그리움이었다.
란코가 보고싶지 않을 리가 없었다.
"란코."
이 이름을 다시 부르고 싶을 때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어야 했다. 그것이 치졸한 자책감 때문에 나의 생각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조차 부정당해왔던 것이다.
조금 지나고 나서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울음을 참고 있는게 아닐까. 그 음성이 너무도 간절해서, 순간적으로 내가 꼭 환상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을 했다. 나 자신인데도.
"아니. 아니야."
- "......다행이다...."
".....응."
- "진짜, 진짜 다행이다...."
란코가 울었다.
꾹꾹 참고 있다가 비로소 터트린 듯이, 너무도 서럽게.
".....괜찮아."
뭐가 괜찮은지 나 스스로도 모르면서 이런 말을 할 자격이 될까. 란코와의 통화가 길어질수록 알고 싶지 않은 나 자신의 결함을 너무도 깊게 알아버린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끊어버리고 싶지도, 소리를 꺼두고 싶지도 않다. 내 말 한마디에 더욱 괴롭게 흐느끼는 란코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계속 스마트폰을 귀에만 대고 있어 통화 시간도, 실제 시간도 못 본지 꽤 되었다. 그런 시간 감각이 사라질 때 쯤 란코가 숨소리를 고르는게 들렸다. 조금은 진정이 된거겠지.
- "아스카쨩?"
"응, 아직 있어."
- "...고마워..."
그건 내가 할 말이었다.
- "저기.... 아스카쨩......어떻게 된거야....?"
"........"
이것 또한.
감상에 젖어 처음 전화번호를 받게 된 경황을 잊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내가 알 수가 없다. 이 세계의 나는 나와 이름과 외모만 같지 무엇이 다를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 세계의 내가 죽었다면 이미 장례식이 치뤄지고 무덤에 묻히거나 화장이 되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세계에선 이방인이다. 교묘한 속임수로 바꿔치기 된 마술의 장난감 같은 존재. 그게 나의 현 위치다. 나의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는 내 의지로 이 마술쇼 따위에 동원된게 아니었으니.
그러니 이 일이 일어난 원흉도.... 나에게 물어본대도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내가 물어봐야할 것이었다. 만약 그 곳에 있다면, 신에게.
그렇다고 란코가 진실이라 믿고 있을 거짓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죽은 내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라는 것을.
이 세계의 나는 죽은 것이 분명했다. 란코의 입으로 그렇게 나왔다면 확실하다. 만약 행방불명이라면 '죽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납치 범죄의 희생양으로 추정되는 것이라면 모를까.
목적도, 결과도 양쪽에게 쓰리기만 할 거짓말은 처음부터 선택지가 못 되었다.
그럼 진실을 말할까?
....아니... 그건 더더욱 아니다. 우선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경위부터가 너무 복잡하다. 아마 이쪽 세계의 란코는 모를 '시키'라는 존재가 둘이나 등장하고, 나와 시키가 어떤 관계였는지, 어째서 나는 시키를 쫓고 있었는지, 그러다 갑자기 시키를 만나고, 가까워지기를 바란다는 목적으로 데이트 코스 - 시키가 처음 명명했던 이름이 어째서 데이트 코스였던거지? - 를 만들었는데, 그 데이트 코스라는게 란코가 갔던 수족관이었고, 나는 그 쪽 세계의 란코에게 가진 어떠한 감정 때문에 이쪽의 란코와 만나기를 두려워했으며, 그래서 도망쳤고....
.....혼란스럽다. 이런걸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게다가 말하고 난 다음에는 또 어떤 반응일지...
- "....아스카쨩. 아직 있는거 맞지..?"
"응..."
- "아스카쨩이... 맞는거지?"
이쪽의 란코가 바라는 아스카는 아니려나. 그 쪽의 란코도 이런 나를 바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름만으로 묻는다면 아스카가 맞다. 아스카. 니노미야 아스카.
"응."
- "....그렇다면.... 아무래도 상관 없어."
"........"
- "그냥... 조금만 더, 이렇게 있어줘.... 부탁이야."
란코...
"계속 있을게. 잠들 때까지 계속."
- ".......그렇게 말하면 나 안 잘지도 몰라."
처음으로 웃음이 나왔다.
또 기억이 났다. 애초에 란코의 얘기를 꺼낸 것은 이 쪽의 그 녀석이었다. 단서를 찾을 수 있을거란 이유로 제안했었지. 그런데 이 상태로는 단서를 찾기는 커녕 내 자신을 숨기려 아둥바둥 노력해야할 판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그렇게, 조금 먼 길을 걸어가게 된다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쩐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녀석은 지금 스마트폰도 없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살짝 문을 여니 어스름한 빛이 새어들어왔다. 녀석은 작은 불 하나만을 키고 침대에 엎어져 있었다. 자는걸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은 내 쪽이군.
- "수족관에서 보았던?"
"맞아."
- "역시 그렇구나......"
묘하게 주눅들어보이는 목소리다. 이 곳의 나도 저 쪽에서 그랬듯이 란코와 가까운 사이였다면, 란코가 모르는 내 친구가 있다는 것은 조금 섭섭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란코에게서 도망치다시피 했었고.
"....아까는 미안."
- "응? 아, 아냐! 나는... 아스카쨩을 다시 볼 수 있게 된것만 해도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방금 건 다급하게 말해놓고도 혼자 부끄러워했으려나. 잠깐 말이 없는 것을 보니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란코가 귀여워 웃음이 나면서도, '다시 본다'는 말에는 양심이 찔려 아려왔다. 일부러 속이려 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내가 '그 아스카'가 아니라는 것은 밝혀야할까. 아니, 그러려면 모든 것을 설명해야한다. 다시 그 과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답답해진다.
란코의 반응 같은것을 보면 우리는 여기서도 꽤나 가까운 사이였겠지. 처음 란코가 아이돌이 되었다는 것을 듣고서는 성향이 완전히 다른 사람인가, 싶었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란코와 내가 친해지게 된 계기가 같다면 아마 그 이후의 일도 비슷할 것이다. 그러다 나는 아이돌이 되기를 결심하지 않았을까. 그 마음만 비밀로 품고 데뷔하기 전에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거나. 아마 란코는 나의 죽음과 숨겨두었던 욕망 - 꿈이라고 해야할까? 어쨌든, 그것을 마주하고 아이돌의 길을 생각했을지도. 전부 되는대로 끼워맞춘 것에 불과하지만.
마지막의 추측은 제외하고 생각해보자. '나와 란코는 같은 방식으로 가까워졌을 것이다'라는 전제에 대해서. 그렇다면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놀러갔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그것이 맞다면. 나의 죽음을 제외하고는, 그 이전의 일은 그쪽이 세계와 다르지 않다면?
나는 어쩌면... 정말로 란코가 바라왔던 '그 아스카'일지도 모른다.
그래. 이건 시험이다.
어떤 화학반응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나름의 이론과 가설을 세워두었고, 그것의 지극히 일부만을 간단히 알아보는 정도의 것이다. 잘못되더라도 빠져나갈 구멍도 있다. 그를 앞에 두고 실험자는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란코. 저번에 같이 유원지에 갔을 때, 기억 나?"
란코의 생일에 우리는 함께 철거 직전의 유원지에 갔었다.물론 철거 직전이라는 것은 도착을 하고서야 알았다.
놀이기구들의 벗겨진 페인트 자국 등의 흔적에 당황했었지만,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고 옅은 구름이 바람결을 따라 몰려올수록 하나 둘 불은 켜지고, 결국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던 그 날.
만약 그 날이 같다면 다른 날들도.
- ".....그걸 어떻게 잊겠어?"
....맞을까?
"무섭지 않았어?"
다시 한번. 만약 그 날이 맞다면 놀이기구의 안전성에 대한 의심에 관하여, 그 날이 아니라면 롤러코스터 궤도의 극심한 커브에 대해서 얘기할 것이다.
- "....조, 조금은. 그래도... 나중에는 정말 좋았어."
이건 좀 애매한데. 어느 쪽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힌트가 있다면...
란코는 그 때의 기억에 잔뜩 몰입해서 열심히 그 날의 일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팝콘을 사러 갔다가 오늘이 마지막 장사라던 아주머니의 한 마디에 문득 눈물이 날 뻔했다는 사소한 부분까지. 놀랍게도 그 사소한 부분들은 내가 기억하는 편린들과도 일치했다. 바이킹 옆자리에는 벨트가 끊어져 있었고, 기다리는 줄에서 우리 앞에 문신을 한 민소매 남자 무리들이 솜사탕을 들고 수줍게 서 있었고.
- ".....그러다 완전히 해가 졌을 때는..."
란코는 들뜨면 목소리 톤이 완전히 올라가버린다. 작게 소곤소곤 말하면서도 목소리는 한껏 올라가 있다. 지금도 그랬다.
- "나무들에도 막 조명이 걸려있고!"
"아, 맞아."
- "놀이기구들도 불이 켜지니까 엄청 예뻐서~"
그래서 그럴 예정이 없었는데도 신이 나서는 폐장 직전까지 놀았던가, 그랬을 것이다. 다음 날에 근육통으로 죽도록 고생할 건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 ".....그래서, 마지막에는 관람차에 탔었잖아."
다리도 아파왔고, 줄도 없고 돌아가는 시간도 긴 관람차의 줄에 섰었지. 막상 타보니까 평판처럼 지루하지는 않았다. 전혀. 스릴이라면 오래된 놀이기구라 그런지 투둑, 끼익, 그런 소리가 나서 웬만한 롤러코스터보다도 긴장감이 넘쳤고, 야경도 예뻤다.
- "엄청 떨렸어..."
"나도."
- "응? 아스카쨩이?"
"....티는 안 내려했지만..."
사실은 롤러코스터도 좀 무섭다. 바이킹처럼 중력이 느껴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만 타는 순간만큼은 시원해서 괜찮으니 티를 잘 안 낼 뿐이다.
그런데 오래 된 관람차는 조금 다른 종류의 무서움이다. 란코가 너무 불안해하길래 담담한 척을 한 거다.
".....중요한건 그게 아니니까."
- "으, 응! 그치! .....야경도 정말 예뻤고.... 그래서..."
그래서 란코가 엄청 사진을 찍었었다. 맞은 편에서 내 사진도 몇장 찍어주었고, 유원지의 풍경도 계속 찍었다.
그런데 내려와서 보니까 다 흔들린데다 엉망이었지. 너무 못 나와서 오히려 엄청 웃게 되었다. 그렇게 서로 사진을 보내주고...
아니, 당황하지 말자.
사소한 부분은 조금씩 다를 수도 있으니까. 머리를 쓰다듬는건... 란코의 머리에 뭐가 붙어있거나, 그래서 정리해준게 아닐까. 손을 잡는건, 평소라면 전혀 안 할 행동이지만 같이 어딘가로 갈 때는 손을 잡고 가기도 한다. 내가 란코를 이끌고 어디를 가거나, 드물지만 란코가 어디를 가야할 때는 나를 이끌고 가기도 했다.
...그런데 가만히 있을 뿐인 관람차 안에서 왜 굳이 그럴까.
게다가 나와 란코는 맞은 편에 앉아있었는데, 란코의 말을 들으면 꼭 나란히 앉아서, 그것도 붙어서 앉아있는 그림이 그려진다.
- "...우리, 나중에 다시 놀이공원에 가자. 그곳은 이미 철거됐지만..."
"으, 응. 재밌겠다."
- "응! 그리고, 다 놀고 나면 그 때처럼 우리집에 와서 자고 가는거야...!"
.....그랬던가.
- "그 때, 집에 아무도 없었으니까..."
아무도 없는 집에서....
.....생각의 방향을 틀자. 관람차에서 단 둘이 앉아있는데 하필 나란히 앉아서 손을 잡을 수도 있는거다. 그게 봄이 된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니까 밤에는 약간 쌀쌀했을거다. 손이 차니까 손을 잡고 있을 수도 있다. 보통은 한 손을 친구의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남겨두지 않고, 두손을 다 붙잡고 있거나 옷 안에 넣었을테지만, 란코의 머리카락에 뭐가 붙어있어서 신경이 쓰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집이라면....
- "야식도 만들어먹고!"
그래. 역시 이거지.
내 자신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부끄러웠다.
- "있잖아, 놀이공원하니까... 학교 끝나고 가던 아파트 앞 놀이터 생각 나. 한동안 안 갔었는데...."
"아, 사람이 없어서 자주 갔었잖아. 그러면서 시간을 때우다가 가끔은 예매도 없이 영화관에 들어가. 상영한지 오래 된 영화 티켓을 바로 사서 텅 빈 중앙 좌석에 앉아서..."
- "응, 맞아!!"
다시 예전 이야기로 돌아왔다. 전화를 하고 있었던 것은 같지만 잠시동안 다른 곳에 갔다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가, 가끔 좀 이상한 장면이 나오면 부끄러웠지만..."
아니, 잠깐? 이상한 장면... 란코가 말하는 목소리나 내용을 봐서는...
"로맨스...니까?"
로맨스 영화의 러브신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외국의 영화라면 로맨스가 아니더라도 그런 류의 장면은 종종 나오기도 한다. 그러니 꼭 로맨스가 아니라도...
- "으, 으응. 나라마다 조금씩 그런 기준이 다르니까... 그럴수밖에 없겠지...?"
...그럴 수도 있겠지만, 로맨스가 맞았다.
그러니까...
내가 상영 기간이 길어졌던 영화를 선택하는데 굳이 란코와 볼 영화로 로맨스를 골랐다는건가. 국적도 가리지 않고.
이 곳의 나는.....
....영화의 취향이 달랐던걸까. 아마 취향이 다른 것 정도의 변화는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조금씩 다 그 쪽의 세계와 다른 것들이 있으니까.
얼굴이 보이지 않는 통화인데도 옷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다.
- "...응."
이후로도 대화의 내용이 지나치게 매끄럽게 그런 쪽으로 넘어가곤 했다.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아 혼란스러웠으나, 한가지만은 확실해졌다. 나는.. 그 쪽 세계에서 달라졌던 1년, 이 곳에서는 내가 얼만큼을 잃어버렸는지 모를 1년동안 란코에게만은 '다른' 아스카가 되어있었다는 것.
즉, 지금의 나는 란코의 '아스카'가 아니라는 것이다.
- "그래서 아스카쨩..."
점점 밤의 어둠은 짙어졌고 나도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란코의 말에도 내 기억을 바탕으로 적당히 맞추어주었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자각은 불가능했다. 나는 란코의 손에 이끌려 내가 모르는 나의 체험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벌써 새벽이네."
- "으응..."
"졸려?"
- "....조금."
"그럼, 잘까?"
- ".......다시 만날거라고 약속해줘."
"......."
- "잘 모르겠더라도 지금은 그럴거라고... 해줘. 그래야 잘 수 있을 것 같아..."
만약 옆에 있었더라면 이렇게 불안해하지 않았을까.
"응."
- "그럼... 이제 누워서 자려고 해볼테니까, 전화는 아스카쨩이 끊어줘. 아무 때라도 괜찮아."
"응, 그럴게."
- "잘 자...."
"잘 자, 란코."
스마트폰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고, 한동안 이불이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숨소리만이 들리겠지만, 나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란코가 아직 화면을 보고, 내가 끊지 않았다는 것을 보며 안심하고 잘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리자 그제서야 전화를 끊었다. 몇시간만 더 있으면 빛이 뜨고 아침이 밝아오겠지.
머리는 반쯤 말라 있었다. 이 정도면 수건을 깔고 잔다면 베개가 축축해지진 않을 것이다. 녀석에게 잔소리를 한 주제에. 아침에 놀림받으려나.
......그만 자자.
"세계라는 것. 우선 란코는 내가 기억하는 그 쪽 세계의 란코와 크게 다르지 않아. 친해지게 된 경로도 같고. 즉,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란코의 성향이 완전히 바뀌어버려서 아이돌을 하게 되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렇다고 모든게 그 쪽 세계처럼 흘러가지는 않았지. 나는 내가 아이돌이 되기 전에 죽었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몰라. 그건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으니까. 란코가 내 장례식에 왔다거나, 납골당을 찾았다거나 하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음..."
"역시 '무슨 기준'으로 이 두 세계가 공존하는가 - 그런걸 논하는건 아직은 넌센스라고 생각해. 어떻게 내가 이 세계로 오게 되었는지도 풀리지 않을 미스테리고. 내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거나, 다른 세계로 넘어가거나 하는 변수가 생길 수도 있어.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이지. 다만, 그런 근본적인 문제들을 제쳐둔다고 해도..."
"......."
"...이 모든걸 존재하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네."
"칸자키 란코가 생각보다 개차반이었어?"
"진지하게 얘기를 하면 듣는 법이 없군."
"아니, 다 들었는뎅."
"...그래."
"허투루 들은 적 없어. 시키쨩이 의문이 생긴걸 물어봤을 뿐이야."
"응."
"아스카쨩."
"응?"
"머리 진짜 웃기다."
"....정리하고 오지. 그럼 되겠어?"
"웅."
하여간.
거울 앞에 서서 빗으로 대충 빗고, 에쿠스테 부분은 땋아서 정리한다. 이참에 양치와 세안으로 아침의 의무까지 마무리했다. 모든 것을 마치고 뒤를 돌아보니 녀석은 어제 밤처럼 벌러덩 누워있었다. 그러고보니, 스마트폰은 아직 화장실 안에 있었다. 확인할게 전혀 없는건가? 연락 올 사람이라거나.
"다 했어."
호텔에서 떠나고 나면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건가. 아니면 달리 머물 곳이 있는건가. 내가 없었다면 녀석은 오랜만에 돌아온 일본에서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
그렇게 우리는 란코의 프로덕션으로 가기로 했다. 이렇게 하더라도 란코를 만날 수 있을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냥 가고 보는거다. 즉, 나와 녀석은 아이돌을 한번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 스케줄 근처를 배회하는 팬들과 다를게 없는 것이다. 란코와 조금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점 빼곤.
아니.. 막상 란코와 만나도 문제인가.
“아침은 저기로 어때?”
“편의점?”
“응응. 시키쨩이 없을동안 일본의 간편식품은 얼마나 발전했는지 궁금해서 못 배기겠어.”
“그렇겠군. 그럼 가볼까.”
그 쪽의 녀석이야 바쁜 스케줄로 플라스틱 냄새가 난다며 투정을 부리더라도 편의점 음식으로 때울 때가 종종 있었지만, 이 쪽의 녀석은 이제 막 비행기에서 내린 셈이다. 이런 사소한 것이라도 일본에 와서 해보고 싶었던 걸지도.
“실례~. 아, 저기 딸기가 통채로 들어간 샌드위치가 있어.”
“그러네. 난 밥 종류만 먹어봐서 저런 샌드위치류는 맛이 어떨지 보장하지 못하겠어.”
“딸기 맛 아닐까?”
“..그야 그렇지만.”
하기야 녀석에게 편의점 음식 특유의 냄새나 맛을 설명해도 잘 모르겠지.
“아, 이것도 맛있어보이는데. 난 이거.”
“나는 그냥 삼각김밥으로 할래.”
“재미없네.”
“수년간 쌓인 편의점 경험으로 도출해낸 결과다.”
“참 똑똑해, 우리 아스카쨩.”
“..이리로 줘. 내가 계산할게.”
“호오, 신분은 없어도 돈은 있다는건가?”
“그렇게 말하면 삶을 살아갈 의지가 팍 꺾여버리는데.”
“와, 무서운 협박인걸. 계속 살아가줘, 아스카쨩.”
“죽기 전까지는 살 예정이야.”
“이미 죽어본 사람처럼 태연하네. 어디 열 있어?”
“그 둘에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건데?”
녀석은 내 옆에 착 붙어서 농담같은 말들을 계속 속삭여댔고, 나는 편의점 직원의 싸한 시선이 두려워 녀석을 무시하려했으나, 결국은 나를 이기지 못하고 받아치고 말았다. 두 소녀가 수상한 신분과 죽음과 삶에 대해 탁구공을 주고받듯이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해준 직원은 과연 프로였다.
녀석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이 길은 내가 아는 길이기도 했다. 호텔에서 빠져나오고, 편의점을 들르고 어쩌다보니 지나치게 눈에 익은 길로 들어섰다. 아직은 많이 뜨겁지 않은 아침의 햇살까지 길을 밝혀준다.
그러고보니 나는 그 녀석을 끝내 찾지 못했다. 만약에 찾았다면, 내가 지금 걸어가는 이 길과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녀석과 함께. 늘 그렇듯이 금세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던 녀석은, 아마 프로덕션의 앞에서 개미의 숨소리보다도 작은 목소리로 '고마워'라고 속삭였을 것이다. 그러면 난 미소 짓지 않도록 갖은 생각을 머리 속으로 끌어당기며 하늘을 볼 것이다. 하늘의 색은 푸른 밤일까, 아니면 지금과 같은 아침의 흐린 빛일까.
'시키'는 내 옆에 있다. 그러나 그 녀석은 아니다.
같지만 다르다. 그러나 다르다기엔 같다.
설명조차 하기 전에 끊어졌다. 너무 빠른 대답은 나를 놀리려는 투도 아니었고, 착각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야 시키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고양이 귀에 과하게 집착해서 말투까지 고양이를 흉내내는 미쿠만큼은 아이돌을 하고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나 둘 바뀐게 아니라는건가.
"다른 사람은?"
"...요시노. 요리타 요시노."
미쿠가 아니라면 이 쪽도 아닐 가능성이 높다.
"으응, 역시 모르겠네. 다른 사람은?"
".....글쎄."
"그럼, 아스카쨩의 친구들은 전부 일반인인가봐. 정말로 아포칼립스 같다!"
"그렇게 신나게 얘기할 일이 아니야."
"그런가아. 하긴, 두 사람 다 아스카쨩을 모르겠지. 아이돌 활동으로 만난 사이니까. 시키쨩도 아스카쨩을 몰랐고, 그렇다면 마에카와 누구누구와 요리타 뭐시기 또한 아스카쨩을 모를 가능성이 높아."
"마에카와 미쿠와 요리타 요시노다."
"그거나 그거나. 그래서 심란해?"
"....뭐랄까, 그냥 상상이 안 되네. 아이돌이 되지 않은 두 사람의 모습은. 프로덕션에 가면 두 사람의 모습이 없을 거라는 것도...."
"그보다, 우선은 프로덕션 안에는 못들어가겠지."
"...그렇기도 하고."
"그러고보니 아스카쨩, 저번에 말한 '사무소의 행운녀'라는 사람은 누구야?"
"응? 아, 그러네. 그 사람도 아이돌이었어. 타카후지 카코라는, 본명인지 가명인지도 모를 이름의."
풀어서 얘기하면 매, 후지산, 가지. 어느 의미로든 지나치게 의도된 것 같던 사람.
"....역시 모르겠어."
"그럼.... 됐어. 아이돌을 하고 있지 않은가보군."
"흠, 이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런 코멘트가 없네? 위급상황에 신과 동급으로 찾을만큼의 어마어마한 구세주인줄 알았더니."
"달리 말하면, 나는 아무런 종교도 믿지 않아. 따라서 하느님이나 부처님이나, 카코 씨나 내겐 별 다를바 없는 존재라는거지. 카코 씨는 불가해할 정도의 행운의 소유자야. 점쟁이처럼 의미 모를 속담 같은걸 대화 도중에 던지지도 않고, 예지몽을 꾸었다거나 부러 거짓을 부풀려 관심을 받아먹으려는 부류도 아니지. 그런데 정말로 순수하게 운이 좋다고. 하는 선택 하나 하나가 전부 그녀에게는 '옳은거야'."
"흐음...."
"그러니, 카코 씨 역시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무슨 일을 하든 어떻게든 할거라는 믿음이지. 평소 성격에 빗대면 오히려 아이돌보다는 조용히 지내는 느낌의 직업이 어울리기도 하고."
"아스카쨩이 그 정도로 미신에 푹 빠질 정도면, 정말로 운이 좋은가보네."
"우리 사무소의 최대 미스터리는 카코 씨와 너였어."
"냐하하, 그래? 그 카코님과 동급이라니 시키쨩 부끄러워~"
"너, 미쿠나 요시노 씨는 아무렇게나 불러놓고 카코 씨는 어째서 '카코님'이지."
"천벌 받기는 싫거든."
"아아, 그래. 너도 나 못지 않게 미신에 푹 빠진 모습이군."
"그렇다기보단 아스카쨩에 대한 믿음에 푹 빠져있지."
"......"
"신기하지 않아? 아스카쨩."
"....뭐가 말이지?"
"시키쨩을 찾고 싶다고 카코님에게 빈 소원, 정말로 이루어졌잖아. 시키쨩과 시키쨩, 조금은 다르지만."
".....그런 뜻이 아니야. 아무튼 미쿠는, 나와 다르게 오디션을 보고 들어왔어. 처음부터 아이돌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거다."
평범한 여자아이의 동경이라는 거겠지.
"미쿠의 아이돌 컨셉은 '고양이'... 정말 과하다 싶을 정도로 고양이 컨셉에 집착했어. 매일매일 새로 보는 고양이 귀를 머리에 붙이고 나왔지. 머리띠일 때도, 고정시키는 핀일 때도 있었어. 어떻게 붙였는지 모를 꼬리도 하고. 어미에는 항상 '냥'을 붙였어."
"고양이라...."
"뭐, 그정도일까. 아이돌 일에 굉장히 진지하고, 고양이 컨셉을 유지한다는 것. 종종 시키와도 비교되고는 했어."
"응? 나랑?"
"...아무래도 너도 고양이스러운 면이 있으니까. 미쿠와는 달리 얼굴도 소위 말하는 '고양이상'이기도 하고."
"그렇구나. 아스카쨩은 혹시 고양이 페티쉬? 혹시 요시노라는 아이도 고양이 캐릭터?!"
"두 사람밖에 되지 않는 인간관계, 그것도 친구관계로 한 사람을 도착증으로 만들어버리다니 하여튼 넌 보통이 아니군."
"칭찬 고맙다냥."
"칭찬 아니야. 그리고 그런 어미는 붙이지 않아도 돼. 무엇보다도 요시노 씨는 고양이 캐릭터가 아냐."
"쳇, 아쉬워라."
대체 뭐가 아쉽다는건지.
그 쪽 세계의 미쿠와 시키는 전혀 친하지 않았다. 둘은 정 반대의 성향이었다. 녀석이 일방적으로 붙어서 미쿠를 귀찮게 할 뿐이었다. 그러면 미쿠 예능방송의 버릇이 몸에 베어서 츳코미를 했고, 녀석은 또 다른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말꼬리를 잡아 바보 만담을 이어갔다. 그러나 둘은 절대 따로 만나는 법이 없었다. 철저한 아이돌 동료 사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이.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은 미쿠가 아닌 또 다른 타겟을 찾았다. 그리고 그 타겟은 매번 바뀌었다. 출연할 예정인 예능 방송이나, 앞으로 할 유닛 활동의 멤버에 따라서. 미쿠는 그런 비즈니스 관계에 대해서는 불만을 표하지 않았지만 툭하면 실종이나 하는 녀석의 프로 의식을 탐탁치 않아했다.
둘은 친할 리가 없었다.
요시노 씨와는 잘 모르겠지만서도.
"요시노 씨는 굉장히 귀여운 외모로..."
"고양이 콜렉터가 아니면 미소녀 콜렉터라던가."
"아이돌인 이상 외모를 보고 뽑는게 당연하지 않을까. 그런 아이돌 동료들이니 당연히."
"칸자키 란코도 꽤나 생겼던걸."
"어떻게든 한건을 잡고 말겠다는 태도군."
"그야 재밌으니까~ 그리고 아스카쨩이 외모적인 부분을 언급한건 처음인 것 같아서야. 내가 예쁘다거나, 귀엽다거나, 사랑스럽다거나, 구름 가득한 밤하늘을 비춰주는 달빛 같다거나, 그런 말은 해준 적 없잖아? 시키쨩도 한 미모 하는데 말이지.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드는거야? 응응, 실망이야."
"마지막 건 외모와는 상관 없는 것 같은데."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어쨌든, 보통은 일상생활에서 그런 류의 말을 아무렇게나 던지지는 않잖아."
"그런가."
"......나라고 타인과의 교류가 활발한 편은 아니었지만."
"나도."
"......"
"......."
"....그래서 요시노씨는..."
"응...."
"어른스럽고, 전통복을 즐겨 입었어. 취미는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는 것. 그리고 미쿠처럼 말투가 특이했는데... 조금 옛날 말투라고 해야할까. 꼭 신령님같은 말투를 썼어. 또, 소라고둥을 부는 것을 좋아했고."
346프로덕션은 과연 이곳에서도 대기업이었다. 건물의 모습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견고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어쩐지 눈이 따가웠다. 건물 표면에 반사된 빛 때문은 분명히 아니었다. 건물 앞의 흡연실에서 새어나간 담배연기 때문도 아니었고.
"아스카쨩?"
"....응?"
"아이돌이야."
"그야 프로덕션이니까 물론... ...잠깐, 무슨 아이돌?"
"아나스타샤라는 아이돌. 명단에 있었어."
"아나스타샤 씨가..."
"오, 아는 사람?"
"...면식은 있었지. 그 쪽 세계에서."
"그렇지만 이쪽에서는 모른다... 겠지?"
"응."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어쩐지 아나스타샤 씨가 아는 체를 해올 것 같은 기분에 순간적으로 그녀의 앞으로 걸어갔다. 갑작스레 눈이 맞았다. 아나스타샤 씨의 눈이 놀란 듯이 커졌다. 그녀의 따뜻함과 맞지 않는 차가운, 푸른색의 눈동자는 나를 똑바로 향했다.
아니... 단순히 그런 기분에 휩싸였을 뿐인가.
아나스타샤 씨는 왜 나를 아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그 하얀 손을 내게 뻗어오는걸까.
이 세계의 아나스타샤 씨가 나를 안다는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왜....?
...손이 잡혔다. 물론 아나스타샤 씨가 아니었다.
그건 그 녀석의 손이었다.
조금 투박하고, 마른 감촉의.
설마 란코를 통해서라거나... 란코도 아이돌이니까... 무언가 접점이....
....아니, 하지만 란코가 죽었다는 '친구'를 아나스타샤 씨에게 보여줬을 리가. 아이돌이 된 이후에는 이미 세상에 없는 존재인데... 란코가 그럴 리가 없어.
혹시나 어제 나를 만나고 나서라도....
"......흑....."
자, 잠깐. 아나스타샤 씨... 혹시 지금 우는건가?
"...괜찮으세요?"
녀석이 대신 아나스타샤 씨에게 말을 걸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선은...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아나스타샤 씨는 나를 알고 있다. 분명히 아스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네.... 죄, 죄송합니다... 못 알아보고 실례를.."
"아니, 맞아요."
".....네?"
"아스카, 맞습니다. 니노미야 아스카."
".........."
아나스타샤 씨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저...."
"....아스카."
"......."
"정말로.... 아스카...."
아나스타샤 씨의 머리 속에서 어떤 생각들이 떠오르고 있을지 나는 몰랐다. 녀석도, 나도 이 세계의 '아스카'가 어떤 일을 저지르고 다녔는지는 알 리가 없다. 따라서 혼란스러워 할 아나스타샤 씨의 앞에서 우리는 제 3자처럼 멀뚱히 서있기밖에 할 일이 없었다.
"...쌍둥이?"
"아니요."
"이 곳은, 꿈 속인가요?"
"아니요..."
".......환생...!"
"아니에요."
".....도플갱어...."
"........."
도플갱어라..
그렇게 본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막은 조금 다르지만, 그렇다고 "아니에요"라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저, 정말로 도플갱어....?"
"그게...."
"아아-..."
"괘, 괜찮으세요 아나스타샤 씨!?"
....초현실적 현상을 마주하고 휘청거리던 아나스타샤 씨를 녀석이 겨우 잡았다.
이젠 어떻게 해야하지.
아니, 그보다도...
오히려 이게 더 나은 방향일 수도 있다. 나는 도플갱어. 그러니까 이 쪽의 아스카의 사정 같은건 모른다. 아예 초면부터 이렇게 하는게 수월하겠지. 아나스타샤 씨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아나스타샤 씨는 여기서는 할 얘기가 아닌 것 같다며 기숙사 쪽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준 것은 선글라스와 마스크, 그리고 후드가 달린 자켓이었다. 머리카락이 너무 띄니 배려해준 것일까. 아나스타샤 씨와 같이 다닌다는 사실로 받는 시선 외의 다른 시선은 보이지 않았다.
끔찍하게 조용한 프로덕션의 복도 안에서,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녀석마저 잠자코 프로덕션의 내부를 감상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 씨는 무엇보다도 빠른 걸음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우리도 그에 맞춰 걸었다.
"어, 아냐쨩!"
"아- 미호, 안녕하세요."
그러다 마주친 사람은 코히나타 미호였다. 기숙사 쪽에서 방금 나온 것 같았다. 이 곳의 나와는 아는 사이일까.
"저기, 이 분들은?"
"...아는 사람..."
"친구에요."
가끔 지나치게 정직한 면이 있는 아나스타샤 씨를 대신해 급하게 말했다. 그런다고는 해도 도플갱어 같은 소리를 하지는 않을텐데, 괜히 나섰나. 친구의 기숙사를 방문하는데 선글라스에, 마스크에, 뒤집어쓴 후드까지. 안 그래도 수상할 곳 투성이인데.
"아냐쨩 학교 친구시구나! 우와, 학교 친구를 데리고온건 처음 봐요."
"..친해진지 얼마 안 되서요?"
"아아, 그렇구나~. 앗,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네, 감사합니다."
...다행히 번거로운 일은 피했군.
아나스타샤 씨의 방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여 조금 더 걸었다.
미쿠도 기숙사에서 지냈었는데, 당연하지만 미쿠의 방은 없겠지. 방의 문 앞에 걸린 팻말에 미쿠의 고양이 모양 자석처럼 눈에 띄는 모양은 없었다. 그러다 복도에서 오른쪽으로 꺾여지는 방향에, 말 발굽처럼 생긴 무언가가 걸려있는 방이 있었다.
"여기에요."
"....실례하겠습니다."
아나스타샤 씨의 방은 아나스타샤 씨 본인만큼이나 깨끗이 정돈되어있었다. 희거나, 푸르다. 커튼도 침대의 커버도 전부 같은 곳에서 산 것 같은 통일감이 느껴졌다. 벽에는 야광 별 스티커 같은 것을 붙여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았다. 책상에는 탁상 시계와 러시아어로 적힌 책, 그리고 밤하늘이 그려진 부드러운 천이 있다.
그 쪽 세계에서도 한번도 들어오지 않았던 방.
...이 쪽의 아스카라면, 어땠을까.
"방 좋은걸~"
처음 만났을 때는 존댓말로 일관하던 녀석이 별안간 편히 말하며 러그에 철푸덕 앉았다. 아나스타샤 씨는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시키도 아나스타샤 씨가 마음에 들었는지 경계를 풀고 서서히 러그에 잠식되어 부드러운 인조털에 몸을 뉘이고 있었다. ....이 경우에는, 방이 마음에 든건가.
"그래서.... 아스카."
아나스타샤 씨가 결심에 가득 찬 목소리로 불렀다. 이야기가 시작되려는 것이다.
"응."
나 또한, 평정심을 지키도록 노력하자. 이 세계에. '아스카'에게 다가가기 위하여, 진실을 찾아내기 위하여.
"아스카는.... 어떻게 생겨난건가요?"
"푸훕."
"?.... 시키, 괜찮나요?"
"으응. 시키쨩은 괜찮아. 저기 표정을 보면 아스카쨩이 괜찮지 않은 것 같은데."
"....."
녀석은 바닥에 한쪽 뺨을 대고 누운 자세로 잘도 웃었다. 평범하게 밝힐 수도 있었는데, 쓸데 없는 포인트에 웃음이 터져버린 녀석과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나스타샤 씨의 시너지에 잠시 머리가 찌릿거렸다.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겠지."
"...혼돈이란 어머니와, 폭풍이란 아버지 한가운데서...?"
"아니, 그런게..... 귀신이라던가 유령이라던가, 그런 비현실적인게 아니야."
"그런....... 그렇다면 어떻게...?"
"나는..."
"........"
"다른 세계의 아스카."
말했다.
분명 아나스타샤 씨는, 전통적인 도플갱어 속 괴이처럼 어느날 내가 완전한 상태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확실히 하나의 인간이란 존재다. 세상에 태어나고 십여년 간 살아온 인생이란게 있는.
'아스카'와는 다르지만, 엄연히 세계에 그 존재를 드러낸 아스카.
이 세계의 일원에게 받아들여지고, 그 일원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설령 내가 거짓된 아스카로서 비춰진대도 변하지 않는다.
"나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웠어. 어떤 경위로 이 세계에 오게 된건지는. 아나스타샤 씨에게는 더 힘들겠지."
"....하지만, 괜찮아요. 귀신, 아니야. 그러니까 더 무섭지 않아요."
"무서웠다는 소린가..."
"솔직해질게요..."
아나스타샤 씨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그제야 대화없이 걸어갔던 시간이 이해가 되었다. 이 곳의 아스카는 더 이상 세상에 없다. 그런데 갑작스레 나타난, 그녀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등장해 도플갱어라고 한다면, 그건 그녀를 알던 아나스타샤 씨의 입장에서는 두려울 수밖에.
그러나 아나스타샤 씨는 '아스카'와 깊이 연관되어 있던 사이로는 보이지 않아.
원래 세계를 기준으로 생각해봐도, 나는 아나스타샤 씨를 아이돌이 된 이후로 비로소 구면이 되었다. 아이돌도 되지 않은 이 세계의 내가 아나스타샤 씨를 알 리가.
"....저기, 질문, 있어요."
"응, 아나스타샤 씨."
".......시키 씨는, 실제, 존재하는 사람인가요?"
"환각인줄 알았던거야?!"
"....솔직해질게요..."
"푸흡."
아나스타샤 씨의 질문은 이번엔 녀석의 허를 찔렀다. 그러니 내가 웃을 차례인가.
"저기, 시키쨩은 '진짜'거든? 말랑말랑한 살도 부드러운 머리카락도 이 안에 흐르고 있는 선홍빛의 피와 펄떡이는 심장까지 전부 진짜야. 어디 한번 느껴보시지."
"정말, 말랑말랑, 합니다."
그걸 또 만져보냐.
잠시 후 아나스타샤 씨는 고개를 숙였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으응, 괜찮아."
"....종합하면, 시키 씨는 이 세계의 사람. 아스카는 저쪽의 세계... 어딘지 모를 곳에서 넘어온 사람. 그리고, 아스카 씨는 이 곳에 오자마자 시키 씨를 만났고, 서로 협력하는 사이의 비지니스 관계, 군요."
조금은 공격적이게 들리는 '끌려왔다'라는 표현이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조종할 수 없는 어떤 다른 영역의 것이었기에.
"그런데... 아나스타샤 씨. 도대체 이 세계에서의 나는 어떻게 알게된거지? 아이돌은 하지 않았을텐데."
"....아, 그렇군요. 모르는 것이, 당연하겠군요...... 저의 프로듀서 씨, 아스카를 스카우트-하려 했었습니다."
"응? 길거리 캐스팅?"
"아나스타샤 씨의 프로듀서가?"
"네. 저도, 스카우트 받았습니다. 길거리에서."
....나의 프로듀서는 아닌건가.
나는 너를 모르는데, 너는 나를 안단 말인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프로듀서와 처음 만났을 때가. 그 때의 나는 이렇게 말했었지. 아이돌이라는 단어를 난생 처음 들어본 사람처럼, 나는 서툴게 반문했다. 그러자 프로듀서는 명함을 내주며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모르지, 하고.
그 말은 어찌된 영문인지조차 모르겠지만, 당시의 내게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위안이었다.
진로라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을 저주스럽고도 축복받은 일직선의 청춘길에서 비로소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거다.
"그렇지만.... 아스카. 스카우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디션장에도, 없었습니다."
"....흔들리지 않았다는건가."
"네. 저의 프로듀서 씨는... 곧 인사이동이 예정되어있었습니다. 신인 아이돌, 원했습니다."
"......."
".....그는, 급했습니다. 연습생 중에서 찾지 못했기에. 저와 고민거리를 이야기하다가, 아스카를 발견하고, 곧바로 스카우트를 시도했어요. 저는, 아이돌로서, 인기 적지 않았어요. 저와 함께 있으면 아스카의 스카우트가 조금 더... 쉬울거라고 했어요."
아나스타샤 씨는 저쪽 세계에서도 이미 인기가 많은 아이돌이었으니까..
통상적으로 스카우트에 대한 신뢰를 얻으려면 확실히 인기 아이돌과 동행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게다가 담당 프로듀서라면.
"....그래서 저는, 아스카, 알아요."
"그 뒤로 프로듀서는? 아나스타샤 씨의 담당 프로듀서가 아니게 된건가."
"네. 그리고.... 새로운 프로젝트, 했지만... 잘 되지 못했어요. ......그리고 프로듀서를 그만두셨어요. 하지만, 그동안의 실적으로 사무원으로..."
"아아."
"프로듀서를 좋아했어?"
녀석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나스타샤 씨는 조금은 쓸쓸하게, 조금은 쑥스러운 듯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예. 라고 대답했다.
허나 고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아나스타샤 씨는 일본어의 구사력이 줄곧 일본에서 자란 사람과는 차이가 있지만 말을 논리정연하게 함에 있어서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단순히 스카우트할 대상을 만난 것이었다면, 아까의 그 눈물을 참는 것 같던 목소리는 대체 무엇이었나. 아나스타샤 씨와 아나스타샤 씨의 프로듀서 이야기는 어디까지였을까. 초면인 내가 감히 그 영역을 탐구하려 든다면, 어떤 선까지가 침범이고 어떤 선까지가 타당할까.
그리움을 잃은 그녀에게.
".....저, 잠시만 자리를 비울게요. 차, 가져옵니다."
"아아, 응."
아나스타샤 씨는 입꼬리만 살짝 움직여 미소를 보이고, 곧바로 방을 떴다. 프로듀서의 이야기를 한 것에 조금 감상적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걸음소리는 일반적인 걸음 속도와 다르지 않다. 공용 탕비실은 기숙사의 중앙. 복도를 꺾어 걸음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 나는 녀석을 일으켜세웠다. 아예 눈까지 감고 러그에서 도도한 안주인 고양이처럼 뒹굴고 있는.
"시키."
"으응, 아스카쨩."
"이 곳의 나를 잃은 건 프로듀서에게 큰 타격이었을까?"
".....물론 스카우트하려던 아이가 갑자기 죽었다면 찝찝하기야 하겠지만. 글쎄? 고작 아이돌, 아니, 그냥 일반인 한명인데. 그런데도 아나스타샤가 얘기하는걸 보면 큰 타격이었던 것처럼 느껴졌어."
"그래. 그 전에, 스카우트 제안을 모두 거절한 일반인 신분 소녀의 행방에 그리 깊게 접근하지 않았다면 사망 소식을 아는 것도 무리야. 게다가 전 담당 아이돌, 즉 아나스타샤 씨도 이 일을 알고 있지. 죽음, 혹은 목격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했던게 아닐까."
"호오, 살인의 가능성까지 생각하는거야?"
"....말은 했지만 그렇게까진 생각하지 않았어."
"응, 뭐 그럴거라고 생각해~ 그런데 말야, 너의 프로듀서는 전에 아나스타샤를 담당했었어?"
"인사이동은 흔하니까 가능성이 제로라고는 볼 수 없겠지...그러나 내가 프로듀서를 만났을 때 프로듀서는 혼자였어. 확실히 인기 아이돌과 동행하는건 본인의 능력을 증명하는 일이야. 만약 프로듀서가 그렇게 간절했더라면, 이미 담당에서 손을 뗐더라도 옛정을 말미암아 아나스타샤 씨에게 부탁하지 않았을까."
"....홍차냄새가 나."
"어?"
"그리고, 독 냄새도."
"........."
독.....?
아나스타샤 씨가?
녀석이 그렇게 말한다면 틀림없....
"잠깐. 너 냄새 못맡잖아."
"발걸음 소리로 유추해낸 가벼운 서프라이즈 조크. 냐하하~"
".....입 닫고 다시 눕기나 해."
"네~에."
곧이어 아나스타샤 씨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찻잔 세 잔이 놓인 트레이를 들고서.
"차, 드세요. 괜찮으시다면."
"잘 마실겡~"
깊은 갈색을 띄는 찻물에서는 진한 얼그레이의 향이 났다.
.......정말로 홍차여서 조금은 두려워졌다.
그녀는 조각을 하듯이 정성 들인 각도로 엉겨붙은 설탕덩어리들을 깎아내렸다. 거침 없이, 그러나 움직임이 조잡하지는 않게, 깔끔히 설탕을 반투명한 찻물에 떨어뜨린다. 높은 온도의 표면에 닿자마자 덩어리는 분해되어 찻잔의 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눈 앞에서는 사라져간다. 흰 우유까지 곁들여진다면 그 누구도 녹아내렸던 달콤함의 흔적을 찾지 못하게 되겠지.
아나스타샤 씨는 그 작업을 녀석을 위해 한번 더 반복했다. 녀석은 그 결실을 식히지도 않고 단숨에 마셔버린다.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데메테르가 지하세계의 음식에 대해 경고했듯이. 아나스타샤 씨가 문을 열고 나갔을 때와, 다시 들어왔을 때의 방은 두 개의 다른 방이다. 홍차의 향기라는 수를 씀으로서 공기의 흐름을 혼란 시킨 것이다.
묻어두었던 진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아나스타샤 씨는 진심으로 걱정한다. 그럴수록 나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최악의 인간이 되어버려.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어. 아아. 손댈 수 없는 나약함이 타인에게 기생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끝내주게 무기력한 기분이다. 더는 돌아갈 수 없다. 그 이전의 방에도, 나의 인생이 각인되었던 세계에도.
지난 날의 모든 것은 환상이었다. 이 곳의 아스카라는 인간은 철저히 고립되어있다. 복도를 걸었을 때의 악세서리들은 족쇄가 아닌 보호막. 아나스타샤 씨의 단순한 질문이 그것을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렸다. 침묵은 닻이 바닥을 향해 침몰하는 만큼이나 길었다. 아니, 실제로는 얼마 흐르지 않았나. 아나스타샤 씨의 표정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아나스타샤 씨가 만약에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순리처럼 살 수 있었더라면. 아나스타샤 씨는 추억을 잃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언제까지고 꿈에 빠져있을 수 있었을까.
아나스타샤 씨는.
나는.
아나스타샤 씨는....
"냐하하... 글쎄? 잘 모르겠어. 여행은 곧 끝나긴 할텐데. 시키쨩은 미국에 돌아가서 할일이 있긴 하거든."
두려웠다.
나는 이 대답을 듣고도 타성을 이겨낼 수 있을까.
"하지만, 평행세계라는 건 너무 흥미롭잖아? 으응, 간만에 두근거릴지도 몰라. 그러니까, 조금은 변덕을 부려보고 싶을까나~"
"......"
"그렇군요...."
다행이었다. 나의 벽은, 견고히 버텨주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자신만큼은.
...그러나, 눈을 감으면 나의 몸은 무중력처럼 떠다닌다. 이상하게 초조하다. 그 상태에서, 나는 공기 속을 떠다니며 방랑한다. 흔히 하늘을 나는 것과도 같은 기분이라면 들뜨고 설레는 어설픈 느낌이라 한다. 그러나 설렘이라기에는 죄책감이 들어 좋지 않고, 불안하다기엔 지나치게 고양된 감정이다. 더 눈을 감고 있다가는 우주 속에서 미아가 될 것 같았다.
목소리가 밝았다. 어제와는 다르게 녀석이 빤히 보고 있었기에 신경이 조금 더 쓰였다. 미소를 지으려 했다가도, 그냥, 왠지 모르게 저지하게 되었다.
- "저기, 오늘은... 뭐해?"
".....사실은, 346 프로덕션에 갔었어."
아나스타샤 씨를 만났다는 사실은 묻지 않았다면 얘기하지 않는게 좋겠지. 이유는 무엇이라고 하면 괜찮게 들릴지 고민이었다. 나는 이 곳에서 아이돌을 하지 않은 채로 죽었으니까, 그렇게 잃어버린 나의 흔적을 프로덕션에서 찾으려 했다면 란코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게다가 아나스타샤 씨에게는 진실을 말했고. 한심하게도 란코를 어떻게 대해야할지의 대책은 아직 모른다.
- "응? ...호, 혹시.. 나를 보려고..."
물론 그것도 있었지.
.....그런데 란코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오해한 것 같다. 어쩔줄 몰라할 란코의 모습이 눈에 선명했다.
그 때였다. 오른쪽 귀에 다른 음성이 들려온 것은. 또, 그와 동시에 볼에 다른 온기가 찰싹 붙어버린 것은. 물론 이런 짓을 할 사람은 녀석밖에는 없다. 잔뜩 긴장하며 처음으로 날개를 펼쳤던 언덕의 낭떠러지가 사실은 지상에서 5cm밖에는 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아버린 어린 새의 여린 마음과도 같이, 나는 웃음섞인 한숨으로 탄식했다.
"냐하하, 미안미안. 아스카쨩은 이 시키쨩하고 선약이 있어서 말이지."
......들리고 있었던건가. 아니, 내가 말한 내용으로라도 유추할 수 있었겠지. 내가 어떤 말을 했었더라?
그런데, 선약이라고?
"내일은 어려울 것 같은데, 가능한 시간대를 대충이라도 보내주면 우리도 맞춰볼게~"
- "아, 그, 네에..?"
"응, 그러는 편이 좋겠지? 서로의 스케줄을 존중해준다~ 그런거야. 친구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않겠어?"
- ".....네...? 그렇긴 하지만..."
"그럼 나중에 보자~ 바이바이."
"........"
"..........끊어버렸다-"
"끊어버렸다-라고 말한다고 깔끔히 해결된게 아니거든."
"용건은 확실히 전했으니까 괜찮아."
녀석은 나에게서 떨어짐과 동시에, 음성 또한 가져가버렸다. 제멋대로인 것은 하루이틀 겪는게 아니지만, 무언가 지나치게 급하게 종료된게 아닌가. 상황을 차분히 정리할 틈조차 없었다. 생각해보자. 란코는 내일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고, 녀석은 나와의 선약이 있다며 그 말을 받았다. 그리곤 시간이 언제가 괜찮은지를 보내주면 우리가 맞춘다....라.
우리라는건.
"너도 란코를 만나게?"
"당연한 말씀."
그야 녀석의 입장에서는 당연한가...
"있지, 아스카쨩."
"응."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게 된다면, 여행을 떠나자."
그러고보니 일본에 다시 온건 여행 목적이라 했었지.
"어디로 말이지?"
"어디로 갈까나.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가버릴까? 봄바람은 꽃향기를 싣고, 여름바람은 시키쨩과 아스카쨩을 싣고. 가을바람은 낙엽을 싣고. TV는 사랑을 싣고."
장난식으로 하는 말이겠지만 반은 진실이었다. 공상이란 것을 전제로 만약 속의 최악의 경우까지 가지 않더라도 느낄 수 있다. 녀석은 사람과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는 증거를 상처가 되지 않을 선에서 여과없이 보였다. 그런데 가린 눈의 감각을 잊고 촉감으로 나의 위치를 파악하려 애쓸 때, 녀석은 항상 나의 앞에 있다. 눈을 뜨고 말을 건네면 어느새 녀석의 형상은 사라지고 드넓은 푸른 들판이 보인다. 그렇게 이름도 없고, 길도 없는 곳을 나아갈 강함이 떨리는 다리에 힘을 실어준다.
너의 현실은 나의 허상에 있어서 눈이 부신 환상이다.
그것만을 믿고 거짓된 서약에 동의를 한 나는, 모르는 새에 했다 하더라도 변명할 수 없는 몸이겠지.
녀석이 살벌한 웃음을 띄고 옷을 찾으러 갈 때, 나는 잡화 코너를 살펴봤다. 저런걸 누가 쓸까 싶은 생일파티용 의 분홍색 펠트모자부터 무난한 야구모자가 벽에 걸려 있고, 스카프나 악세서리, 가방도 여러종류다.
여행이라면 더플백보다는 캐리어일까. 꼼꼼히 종류를 살펴본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잠금장치는 있는지, 그리고 지퍼는 잘 열리는지. 이왕이면 바퀴는 네개가 달린 쪽이 좋은데. 조건을 전부 갖춘 것은 아리스토캣 그림이 크게 그려진, 꼭 미쿠나 들 것 같은 캐리어 뿐이었다. 색상은 나쁘지 않지만.... 고양이인가.
그나저나 지갑의 현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까.
카드는, 잘 모르겠다. 아버지의 명의로 된 카드니까. 쓸 수 있다면 어떻게 되는거지? 그 쪽의 아버지께 청구가 되는건가? 이 세계에서 결제된건데?
녀석은 여전히 옷구경에 빠져있고...
.....실험 삼아 하나만 시도해볼까.
"포인트카드는 있으세요?"
"아니요."
결국은, 해보기로 했다.
+1~ 과연 주사위는 아스카 아버지를 살릴 것인가 아니면 아스카를 살릴 것인가. 2표 먼저 나오는 쪽으로.
1~50 어림도 없지
51~100 ...?!
녀석이 처음 가리켰던 코너의 가죽치마.
있으나마나한 화폐가치의, 있으나마나한 일상적인 아이템.
벌써 계산대까지 와버렸다. 결과는 단 둘 뿐. 자, 이 카드는 이 세계에서는 어떠한 가치가 부여되었지. 그 세계에서처럼, 세상에서 숭배받을 존재일까?
"어? 아스카쨩, 벌써 계산?"
"시, 시키. 그 손에 들린건..."
"냐하하~ 좀 많지? 어쩌다보니까 아스카쨩한테 입히면 예쁠 것 같은 드레스들이 한 코너에 몰려있었거든. 그래서 전부 가져와버렸어! 눈치 채고 도망가려는 건 아닐까 했었는데, 그건 아닌 것 같네. 얼른 영수증이랑 치마 받아. 직원분이 곤란해하시잖아? 시키쨩은 상식적이라 이런건 또 못 넘어간단 말이지~"
영수증?
.......그렇다면....
"...결제된건가요?"
"네."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묻고 싶은 듯한 얼굴로 대답하는 직원.
카드를 도로 받고, 비닐봉투에 영수증과 함께 든 치마도 받아들었지만, 대체 뭐가 어떻게 된건지 모르겠는 쪽은 나다.
존재하는 카드번호? 이 쪽의 나도 아버지께 카드를 받았던걸까. 카드칩과 번호같은건 같을테고. 그런데 죽은 딸의 카드를 정지하지 않고 그대로 둔건가. 처분하지 못하고, 이제는 아버지가 쓰고 있는건가.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만....
"오래 걸려."
"...저기, 시키."
"그 카드, 됐네?"
"........"
"이 쪽의 아스카쨩도 같은 카드를 쓰고 있었던걸까. 뭐랄까, 기묘하네. 아니, 전말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기묘하지는 않지만... 그럼 정리하지 않았던 카드의 카드값은 이 쪽의 아스카쨩네에 청구되는걸까나?"
"그게, 그걸 잘 모르겠어. 쓰는 사람이 없는 카드를 계속 유지했던 것도, 보통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아서."
"재수 없을까봐?"
"재수가 없는 것보다는... 죽은 딸의 유품이기는 하지만, 카드는 카드잖아. 굳이 계속 유지시킬 필요는 없다는거지."
"그렇기는 해."
"....어쨌든 이 카드는 쓰지 않는 편이 좋겠어."
"만약 그 쪽 세계의 아스카쨩네에 청구된다면?"
"그럴 수가 있을까 싶은데. ....행방불명된 딸의 카드에서 나간 카드값이 죽은 딸의 카드에서 나간 카드값보다는 나으려나."
그럴 기분은 아니었지만 우선은 눈에 보이는게 옷밖에 없었다. 그것 말고는 다음에 무엇을 해야할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녀석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이 입을 벙긋하다가, 내 손에서 비닐봉투를 가져가고는 나를 탈의실에 밀어넣었다. 작은 면적에 비해 소름끼치게 여성스러운 문까지 닫는다. 이 문은 어째서 손잡이까지 하트 모양인건가.
...그건 그렇고 전부 '팔랑팔랑'한 것밖에는 없잖아. 그 말이 이런 뜻이었군. 가장 위에 있는 꽃 패턴이 가득한 쉬폰 드레스를 들자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이런 혼란 속에 계속 있는 것보다는 허무함을 고르는 편이 좋겠지.
허물을 벗듯이 녀석의 옷을 벗는다. 사이즈가 맞지 않는 성가신 것을 빼고는 속옷까지 전부 녀석의 것이다. 이렇게 거울로 보니 얼마나 이 상황이 우스운지 체감이 되었다. 점점 이렇게 스며드는 것일까. 이 세계에, 내가.
"응응. 냄새를 맡고 싶어. 전지전능하지 못한 아스카쨩이지만, 그래도 말에는 힘이 있다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면 정말로 이루어질지도~"
"아니, 냄새를 맡아서 뭐하게?"
"카페에 가면 진한 커피향이 나잖아? 그렇게 좋은 공간에 있는데 모든 감각으로서 느끼지 못하면 손해란 말이지. 사실은 인형놀이가 아니라 책을 블록삼아 탑을 쌓으면서 자란 시키쨩은 이런 기분이 처음이라 좀 더 진하게 취해있고 싶어. 촉감이라던가, 공간감이라던가, 향기라던가."
"그 말은 나를 인형으로 보고 있다는건가."
"Non, 다만 5살짜리 여자아이가 예쁜 프랑스인형을 손때탈까 애지중지하며 갖고 노는 그 순간만큼 이 순간을 즐기고 있단 말이야. 에스테틱은 중요한 가치니까."
"...그래, 인간은 누구나 탐미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야생의 사냥감을 쫓듯이 태어날 때부터 각인된 본능에 이끌려 여흥거리를 잔뜩 집어온건가. 그저 옷걸이가 필요했던 것 뿐이군."
"어머, 착각이야. 아스카쨩이 떠오르는 옷이 아니었다면 처음부터 들고오지 않았어. 그렇지 않으면 아스카쨩의 말대로 의미가 없잖아? 칭찬으로 듣지. 냐하~ 고마워 아스카쨩."
"혼자 질문하고 혼자 대답하지 마."
"어째서?"
".....그렇지만, 칭찬으로 듣도록 하지. 그 대신 유희는 너 혼자만의 것이 아니란걸 유념해두는게 좋을거야."
"응?"
"전부 골라줄테니 기대하시지."
"아아, 그런거였어? 노 프라블럼. 그런데 레이스와 리본이 잔뜩 달린 앙큼한 소녀풍 속옷은 좀 피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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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전부터 병원 천장 아래에서 무의식의 세계에 살아가는 란코가 아니라, 진짜 세계에서 숨쉬며 살아가는 란코에게.
....진짜 세계라.
기괴한 말이다. 이게 진짜면, 내가 여태 살아왔던 세계는 무엇이며, 이게 가짜라면, 지금 내가 숨쉬는 공간은 무어란 말인가.
가짜라거나 진짜라거나, 그런 경계조차 없고, 나는 그러한 기우를 깨달을 감각도 없다.
단지 란코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아플 정도로 두근거린다는 것만이,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의 전부다.
드디어 액정에서 손가락이 떨어졌다. 시스템상으로는 이미 전화가 걸린 것이다.
뚜르르 소리가 연속해서 났다.
덜컥 불안해짐과 동시에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이대로 란코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
- .......여, 여보세요...
받았다.
어떻게 하지?
난 이제.... 어떡하지?
- "저기...."
"란코..."
-...........
작은 신음, 혹은 탄식 소리가 들렸다.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고 입을 틀어막는 란코의 버릇이다. 그런 작은 소리까지 전부 너무나 귀에 익은 소리이다. 이 전화 너머에서 란코도, 내 목소리를 들으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세계의 나도 이 세계의 란코가 그렇듯 다른 세계의 자신과 같은 말투, 버릇, 목소리를 가지고 있을까.
문득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스마트폰을 들고 있는 손에 필요 이상으로 힘이 들어간다.
- "아스카..."
"........."
- "아스카쨩......."
란코가 나를 부른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차마 마주하지 못했던 감정이 망각이란 한 겹을 들춰내고 자신을 드러낸다.
란코가 혼수상태에 빠지고 나서는 처음으로.
아니, 란코와 마주친 이래로 처음이었다.
그리움이었다.
란코가 보고싶지 않을 리가 없었다.
"란코."
이 이름을 다시 부르고 싶을 때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어야 했다. 그것이 치졸한 자책감 때문에 나의 생각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조차 부정당해왔던 것이다.
조금 지나고 나서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울음을 참고 있는게 아닐까. 그 음성이 너무도 간절해서, 순간적으로 내가 꼭 환상이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을 했다. 나 자신인데도.
"아니. 아니야."
- "......다행이다...."
".....응."
- "진짜, 진짜 다행이다...."
란코가 울었다.
꾹꾹 참고 있다가 비로소 터트린 듯이, 너무도 서럽게.
".....괜찮아."
뭐가 괜찮은지 나 스스로도 모르면서 이런 말을 할 자격이 될까. 란코와의 통화가 길어질수록 알고 싶지 않은 나 자신의 결함을 너무도 깊게 알아버린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끊어버리고 싶지도, 소리를 꺼두고 싶지도 않다. 내 말 한마디에 더욱 괴롭게 흐느끼는 란코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 "아스카쨩?"
"응, 아직 있어."
- "...고마워..."
그건 내가 할 말이었다.
- "저기.... 아스카쨩......어떻게 된거야....?"
"........"
이것 또한.
감상에 젖어 처음 전화번호를 받게 된 경황을 잊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내가 알 수가 없다. 이 세계의 나는 나와 이름과 외모만 같지 무엇이 다를지 모르는 사람이었다. 이 세계의 내가 죽었다면 이미 장례식이 치뤄지고 무덤에 묻히거나 화장이 되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 세계에선 이방인이다. 교묘한 속임수로 바꿔치기 된 마술의 장난감 같은 존재. 그게 나의 현 위치다. 나의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는 내 의지로 이 마술쇼 따위에 동원된게 아니었으니.
그러니 이 일이 일어난 원흉도.... 나에게 물어본대도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내가 물어봐야할 것이었다. 만약 그 곳에 있다면, 신에게.
이 세계의 나는 죽은 것이 분명했다. 란코의 입으로 그렇게 나왔다면 확실하다. 만약 행방불명이라면 '죽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납치 범죄의 희생양으로 추정되는 것이라면 모를까.
목적도, 결과도 양쪽에게 쓰리기만 할 거짓말은 처음부터 선택지가 못 되었다.
그럼 진실을 말할까?
....아니... 그건 더더욱 아니다. 우선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경위부터가 너무 복잡하다. 아마 이쪽 세계의 란코는 모를 '시키'라는 존재가 둘이나 등장하고, 나와 시키가 어떤 관계였는지, 어째서 나는 시키를 쫓고 있었는지, 그러다 갑자기 시키를 만나고, 가까워지기를 바란다는 목적으로 데이트 코스 - 시키가 처음 명명했던 이름이 어째서 데이트 코스였던거지? - 를 만들었는데, 그 데이트 코스라는게 란코가 갔던 수족관이었고, 나는 그 쪽 세계의 란코에게 가진 어떠한 감정 때문에 이쪽의 란코와 만나기를 두려워했으며, 그래서 도망쳤고....
.....혼란스럽다. 이런걸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게다가 말하고 난 다음에는 또 어떤 반응일지...
- "....아스카쨩. 아직 있는거 맞지..?"
"응..."
- "아스카쨩이... 맞는거지?"
이쪽의 란코가 바라는 아스카는 아니려나. 그 쪽의 란코도 이런 나를 바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름만으로 묻는다면 아스카가 맞다. 아스카. 니노미야 아스카.
"응."
- "....그렇다면.... 아무래도 상관 없어."
"........"
- "그냥... 조금만 더, 이렇게 있어줘.... 부탁이야."
란코...
"계속 있을게. 잠들 때까지 계속."
- ".......그렇게 말하면 나 안 잘지도 몰라."
처음으로 웃음이 나왔다.
또 기억이 났다. 애초에 란코의 얘기를 꺼낸 것은 이 쪽의 그 녀석이었다. 단서를 찾을 수 있을거란 이유로 제안했었지. 그런데 이 상태로는 단서를 찾기는 커녕 내 자신을 숨기려 아둥바둥 노력해야할 판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그렇게, 조금 먼 길을 걸어가게 된다면..
..그렇게 되더라도 괜찮지 않을까.
어차피 어느 세계가 가짜고 진짜인지도 모르는 환상 속에서 살고 있는데.
+1 이 시각 시키쟝은....
+2 다음 상황 / 장면 / 란코와의 대화거리 등
만약 이렇게 역는게 안 된다면 놀러간 장소나 시간이 아스카가 겪은거랑 똑같다는 것으로...
"아... 응. 지금 같이 지내고 있는 친구 거야. 스마트폰을 못 쓰게 되서..."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쩐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녀석은 지금 스마트폰도 없이 무엇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살짝 문을 여니 어스름한 빛이 새어들어왔다. 녀석은 작은 불 하나만을 키고 침대에 엎어져 있었다. 자는걸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은 내 쪽이군.
- "수족관에서 보았던?"
"맞아."
- "역시 그렇구나......"
묘하게 주눅들어보이는 목소리다. 이 곳의 나도 저 쪽에서 그랬듯이 란코와 가까운 사이였다면, 란코가 모르는 내 친구가 있다는 것은 조금 섭섭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란코에게서 도망치다시피 했었고.
"....아까는 미안."
- "응? 아, 아냐! 나는... 아스카쨩을 다시 볼 수 있게 된것만 해도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
방금 건 다급하게 말해놓고도 혼자 부끄러워했으려나. 잠깐 말이 없는 것을 보니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란코가 귀여워 웃음이 나면서도, '다시 본다'는 말에는 양심이 찔려 아려왔다. 일부러 속이려 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적어도... 내가 '그 아스카'가 아니라는 것은 밝혀야할까. 아니, 그러려면 모든 것을 설명해야한다. 다시 그 과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답답해진다.
란코의 반응 같은것을 보면 우리는 여기서도 꽤나 가까운 사이였겠지. 처음 란코가 아이돌이 되었다는 것을 듣고서는 성향이 완전히 다른 사람인가, 싶었지만 그것도 아닌 것 같다. 란코와 내가 친해지게 된 계기가 같다면 아마 그 이후의 일도 비슷할 것이다. 그러다 나는 아이돌이 되기를 결심하지 않았을까. 그 마음만 비밀로 품고 데뷔하기 전에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거나. 아마 란코는 나의 죽음과 숨겨두었던 욕망 - 꿈이라고 해야할까? 어쨌든, 그것을 마주하고 아이돌의 길을 생각했을지도. 전부 되는대로 끼워맞춘 것에 불과하지만.
마지막의 추측은 제외하고 생각해보자. '나와 란코는 같은 방식으로 가까워졌을 것이다'라는 전제에 대해서. 그렇다면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놀러갔을 가능성도 있다. 만약 그것이 맞다면. 나의 죽음을 제외하고는, 그 이전의 일은 그쪽이 세계와 다르지 않다면?
나는 어쩌면... 정말로 란코가 바라왔던 '그 아스카'일지도 모른다.
그래. 이건 시험이다.
어떤 화학반응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나름의 이론과 가설을 세워두었고, 그것의 지극히 일부만을 간단히 알아보는 정도의 것이다. 잘못되더라도 빠져나갈 구멍도 있다. 그를 앞에 두고 실험자는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란코. 저번에 같이 유원지에 갔을 때, 기억 나?"
란코의 생일에 우리는 함께 철거 직전의 유원지에 갔었다.물론 철거 직전이라는 것은 도착을 하고서야 알았다.
놀이기구들의 벗겨진 페인트 자국 등의 흔적에 당황했었지만,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고 옅은 구름이 바람결을 따라 몰려올수록 하나 둘 불은 켜지고, 결국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던 그 날.
만약 그 날이 같다면 다른 날들도.
- ".....그걸 어떻게 잊겠어?"
....맞을까?
"무섭지 않았어?"
다시 한번. 만약 그 날이 맞다면 놀이기구의 안전성에 대한 의심에 관하여, 그 날이 아니라면 롤러코스터 궤도의 극심한 커브에 대해서 얘기할 것이다.
- "....조, 조금은. 그래도... 나중에는 정말 좋았어."
이건 좀 애매한데. 어느 쪽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말이 아닌가.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힌트가 있다면...
- ".....최고의 생일이었어....."
.....그 날이 맞다!
아주 약간이지만 마음이 놓였다.
- "으응, 아스카쨩 덕분이잖아?"
".....비록 철거 직전이었지만."
- "중요한건 그게 아니니까!"
"...응, 그랬지."
란코는 그 때의 기억에 잔뜩 몰입해서 열심히 그 날의 일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팝콘을 사러 갔다가 오늘이 마지막 장사라던 아주머니의 한 마디에 문득 눈물이 날 뻔했다는 사소한 부분까지. 놀랍게도 그 사소한 부분들은 내가 기억하는 편린들과도 일치했다. 바이킹 옆자리에는 벨트가 끊어져 있었고, 기다리는 줄에서 우리 앞에 문신을 한 민소매 남자 무리들이 솜사탕을 들고 수줍게 서 있었고.
- ".....그러다 완전히 해가 졌을 때는..."
란코는 들뜨면 목소리 톤이 완전히 올라가버린다. 작게 소곤소곤 말하면서도 목소리는 한껏 올라가 있다. 지금도 그랬다.
- "나무들에도 막 조명이 걸려있고!"
"아, 맞아."
- "놀이기구들도 불이 켜지니까 엄청 예뻐서~"
그래서 그럴 예정이 없었는데도 신이 나서는 폐장 직전까지 놀았던가, 그랬을 것이다. 다음 날에 근육통으로 죽도록 고생할 건 꿈에도 모르고 말이다.
- ".....그래서, 마지막에는 관람차에 탔었잖아."
다리도 아파왔고, 줄도 없고 돌아가는 시간도 긴 관람차의 줄에 섰었지. 막상 타보니까 평판처럼 지루하지는 않았다. 전혀. 스릴이라면 오래된 놀이기구라 그런지 투둑, 끼익, 그런 소리가 나서 웬만한 롤러코스터보다도 긴장감이 넘쳤고, 야경도 예뻤다.
- "엄청 떨렸어..."
"나도."
- "응? 아스카쨩이?"
"....티는 안 내려했지만..."
사실은 롤러코스터도 좀 무섭다. 바이킹처럼 중력이 느껴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다만 타는 순간만큼은 시원해서 괜찮으니 티를 잘 안 낼 뿐이다.
그런데 오래 된 관람차는 조금 다른 종류의 무서움이다. 란코가 너무 불안해하길래 담담한 척을 한 거다.
".....중요한건 그게 아니니까."
- "으, 응! 그치! .....야경도 정말 예뻤고.... 그래서..."
그래서 란코가 엄청 사진을 찍었었다. 맞은 편에서 내 사진도 몇장 찍어주었고, 유원지의 풍경도 계속 찍었다.
그런데 내려와서 보니까 다 흔들린데다 엉망이었지. 너무 못 나와서 오히려 엄청 웃게 되었다. 그렇게 서로 사진을 보내주고...
- "....계속 손을 잡고. 아무것도 안 하고 창 밖을 보고 있었잖아."
응?
- "아스카쨩이 계속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잠깐?
내가 그랬다고?
아니, 우리가?
사소한 부분은 조금씩 다를 수도 있으니까. 머리를 쓰다듬는건... 란코의 머리에 뭐가 붙어있거나, 그래서 정리해준게 아닐까. 손을 잡는건, 평소라면 전혀 안 할 행동이지만 같이 어딘가로 갈 때는 손을 잡고 가기도 한다. 내가 란코를 이끌고 어디를 가거나, 드물지만 란코가 어디를 가야할 때는 나를 이끌고 가기도 했다.
...그런데 가만히 있을 뿐인 관람차 안에서 왜 굳이 그럴까.
게다가 나와 란코는 맞은 편에 앉아있었는데, 란코의 말을 들으면 꼭 나란히 앉아서, 그것도 붙어서 앉아있는 그림이 그려진다.
- "...우리, 나중에 다시 놀이공원에 가자. 그곳은 이미 철거됐지만..."
"으, 응. 재밌겠다."
- "응! 그리고, 다 놀고 나면 그 때처럼 우리집에 와서 자고 가는거야...!"
.....그랬던가.
- "그 때, 집에 아무도 없었으니까..."
아무도 없는 집에서....
.....생각의 방향을 틀자. 관람차에서 단 둘이 앉아있는데 하필 나란히 앉아서 손을 잡을 수도 있는거다. 그게 봄이 된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니까 밤에는 약간 쌀쌀했을거다. 손이 차니까 손을 잡고 있을 수도 있다. 보통은 한 손을 친구의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 남겨두지 않고, 두손을 다 붙잡고 있거나 옷 안에 넣었을테지만, 란코의 머리카락에 뭐가 붙어있어서 신경이 쓰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집이라면....
- "야식도 만들어먹고!"
그래. 역시 이거지.
내 자신이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부끄러웠다.
- "있잖아, 놀이공원하니까... 학교 끝나고 가던 아파트 앞 놀이터 생각 나. 한동안 안 갔었는데...."
"아, 사람이 없어서 자주 갔었잖아. 그러면서 시간을 때우다가 가끔은 예매도 없이 영화관에 들어가. 상영한지 오래 된 영화 티켓을 바로 사서 텅 빈 중앙 좌석에 앉아서..."
- "응, 맞아!!"
다시 예전 이야기로 돌아왔다. 전화를 하고 있었던 것은 같지만 잠시동안 다른 곳에 갔다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가, 가끔 좀 이상한 장면이 나오면 부끄러웠지만..."
아니, 잠깐? 이상한 장면... 란코가 말하는 목소리나 내용을 봐서는...
"로맨스...니까?"
로맨스 영화의 러브신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외국의 영화라면 로맨스가 아니더라도 그런 류의 장면은 종종 나오기도 한다. 그러니 꼭 로맨스가 아니라도...
- "으, 으응. 나라마다 조금씩 그런 기준이 다르니까... 그럴수밖에 없겠지...?"
...그럴 수도 있겠지만, 로맨스가 맞았다.
그러니까...
내가 상영 기간이 길어졌던 영화를 선택하는데 굳이 란코와 볼 영화로 로맨스를 골랐다는건가. 국적도 가리지 않고.
이 곳의 나는.....
....영화의 취향이 달랐던걸까. 아마 취향이 다른 것 정도의 변화는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조금씩 다 그 쪽의 세계와 다른 것들이 있으니까.
- "...그래도 손을 꼭 잡고 영화를 보고 있다보면..."
그 놈의 망할 손.
+2 다음.. 상황
그러자 아스카는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서 이야기 주제를 돌린다.
"........"
- "..........아스카쨩..."
거의 울 것 같아.
"....응."
- "....."
"다... 다른 이야기를 할까."
얼굴이 보이지 않는 통화인데도 옷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는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다.
- "...응."
이후로도 대화의 내용이 지나치게 매끄럽게 그런 쪽으로 넘어가곤 했다.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아 혼란스러웠으나, 한가지만은 확실해졌다. 나는.. 그 쪽 세계에서 달라졌던 1년, 이 곳에서는 내가 얼만큼을 잃어버렸는지 모를 1년동안 란코에게만은 '다른' 아스카가 되어있었다는 것.
즉, 지금의 나는 란코의 '아스카'가 아니라는 것이다.
- "그래서 아스카쨩..."
점점 밤의 어둠은 짙어졌고 나도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란코의 말에도 내 기억을 바탕으로 적당히 맞추어주었고,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자각은 불가능했다. 나는 란코의 손에 이끌려 내가 모르는 나의 체험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벌써 새벽이네."
- "으응..."
"졸려?"
- "....조금."
"그럼, 잘까?"
- ".......다시 만날거라고 약속해줘."
"......."
- "잘 모르겠더라도 지금은 그럴거라고... 해줘. 그래야 잘 수 있을 것 같아..."
만약 옆에 있었더라면 이렇게 불안해하지 않았을까.
"응."
- "그럼... 이제 누워서 자려고 해볼테니까, 전화는 아스카쨩이 끊어줘. 아무 때라도 괜찮아."
"응, 그럴게."
- "잘 자...."
"잘 자, 란코."
스마트폰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리고, 한동안 이불이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숨소리만이 들리겠지만, 나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란코가 아직 화면을 보고, 내가 끊지 않았다는 것을 보며 안심하고 잘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리자 그제서야 전화를 끊었다. 몇시간만 더 있으면 빛이 뜨고 아침이 밝아오겠지.
머리는 반쯤 말라 있었다. 이 정도면 수건을 깔고 잔다면 베개가 축축해지진 않을 것이다. 녀석에게 잔소리를 한 주제에. 아침에 놀림받으려나.
......그만 자자.
+1~2 아침이 밝았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당연하게도 까이겠죠?
시키 : 란코 프로덕션에 가보는거 어때?
@오늘부터 정주행 했습니다
"기지개가 너무 격한거 아냐?"
"하아~ 잘 잤다. 아스카쨩도 잘 잤어?"
"말 돌리지 말고."
옆구리에 느껴지는 강력한 타격감에 눈을 떴다.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벌써 깨어버린 것 같다. 다시 잠으로 돌아가기에는 이미 망한 느낌이다. 녀석이 나를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니.
"옷이 샤워가운이네."
"문제있어?"
"아마 어제 밤 늦게까지 통화하다가 너무 졸려서 입을 옷을 찾지 못하고 샤워가운 대충 걸치고 잔거겠지."
"......."
"그리고 머리는..."
아.
"와~ 완전 새집이잖아? 어제 결국 그냥 잤구나? 시키쨩한텐 잔소리 일색이더니 아주 내로남불이양~ 그치?"
잠도 얼마 못자서 머리가 멍한 상태에서 빠르게 말을 해대니 정신이 없었다.
"뭐라고?"
"내로남불이라고.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로맨스.....
.....어제의 일이 기억나려고 한다.
"시키, 나 머리 아파."
"아스카쨩도 말을 잘 돌리네."
"후우. 알았어, 미안해."
"사과를 바란건 아니었는데."
"....그래."
"진짜 많이 피곤한가보네?"
".....그래봐야 전화만 했지만. 괜찮아."
"아, 그렇지. 어땠어? 결국은 아스카쨩이 걱정했던대로 스파크가 파바박! 터져서 밤새 격렬하게 싸웠다거나?"
"왜 그렇게 격정적인 걸 좋아하는거냐 넌. 그리고 그런 걱정 한 적 없어."
"냐하하. 그래서, 어땠어?"
+1~ 투표..!
1. 알지 못했던 관계에 대하여
2. 세계에 대한 생각에 대하여
...1은 뭔가 꺼내기 부끄러울 것 같다고 느낄법도...
"응응."
"일단... 더는 무섭다곤 생각하지 않아."
"호오."
"그런데... 알 것 같다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칸자키 란코 말이야?"
"세계라는 것. 우선 란코는 내가 기억하는 그 쪽 세계의 란코와 크게 다르지 않아. 친해지게 된 경로도 같고. 즉,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란코의 성향이 완전히 바뀌어버려서 아이돌을 하게 되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렇다고 모든게 그 쪽 세계처럼 흘러가지는 않았지. 나는 내가 아이돌이 되기 전에 죽었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몰라. 그건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으니까. 란코가 내 장례식에 왔다거나, 납골당을 찾았다거나 하는 확실한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음..."
"역시 '무슨 기준'으로 이 두 세계가 공존하는가 - 그런걸 논하는건 아직은 넌센스라고 생각해. 어떻게 내가 이 세계로 오게 되었는지도 풀리지 않을 미스테리고. 내가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거나, 다른 세계로 넘어가거나 하는 변수가 생길 수도 있어.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이지. 다만, 그런 근본적인 문제들을 제쳐둔다고 해도..."
"......."
"...이 모든걸 존재하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네."
"칸자키 란코가 생각보다 개차반이었어?"
"진지하게 얘기를 하면 듣는 법이 없군."
"아니, 다 들었는뎅."
"...그래."
"허투루 들은 적 없어. 시키쨩이 의문이 생긴걸 물어봤을 뿐이야."
"응."
"아스카쨩."
"응?"
"머리 진짜 웃기다."
"....정리하고 오지. 그럼 되겠어?"
"웅."
하여간.
거울 앞에 서서 빗으로 대충 빗고, 에쿠스테 부분은 땋아서 정리한다. 이참에 양치와 세안으로 아침의 의무까지 마무리했다. 모든 것을 마치고 뒤를 돌아보니 녀석은 어제 밤처럼 벌러덩 누워있었다. 그러고보니, 스마트폰은 아직 화장실 안에 있었다. 확인할게 전혀 없는건가? 연락 올 사람이라거나.
"다 했어."
호텔에서 떠나고 나면 다른 지역으로 떠나는건가. 아니면 달리 머물 곳이 있는건가. 내가 없었다면 녀석은 오랜만에 돌아온 일본에서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
"....오늘은 무슨 계획 있어?"
"칸자키 란코의 프로덕션에 가볼래?"
"...그럴까."
저렇게 엎드려 누워서 꼼짝도 안 하는 상태에서, 갑자기 닥친 질문에도 나에 대한 대답을-
.....어?
"잠깐, 란코 프로덕션에 가자고?"
"응. 어디로 가는지 알아. 방금 대답은 가자는 거였지? 시키쨩 준비할게."
+2 다음...상황
아니.. 막상 란코와 만나도 문제인가.
“아침은 저기로 어때?”
“편의점?”
“응응. 시키쨩이 없을동안 일본의 간편식품은 얼마나 발전했는지 궁금해서 못 배기겠어.”
“그렇겠군. 그럼 가볼까.”
그 쪽의 녀석이야 바쁜 스케줄로 플라스틱 냄새가 난다며 투정을 부리더라도 편의점 음식으로 때울 때가 종종 있었지만, 이 쪽의 녀석은 이제 막 비행기에서 내린 셈이다. 이런 사소한 것이라도 일본에 와서 해보고 싶었던 걸지도.
“실례~. 아, 저기 딸기가 통채로 들어간 샌드위치가 있어.”
“그러네. 난 밥 종류만 먹어봐서 저런 샌드위치류는 맛이 어떨지 보장하지 못하겠어.”
“딸기 맛 아닐까?”
“..그야 그렇지만.”
하기야 녀석에게 편의점 음식 특유의 냄새나 맛을 설명해도 잘 모르겠지.
“아, 이것도 맛있어보이는데. 난 이거.”
“나는 그냥 삼각김밥으로 할래.”
“재미없네.”
“수년간 쌓인 편의점 경험으로 도출해낸 결과다.”
“참 똑똑해, 우리 아스카쨩.”
“..이리로 줘. 내가 계산할게.”
“호오, 신분은 없어도 돈은 있다는건가?”
“그렇게 말하면 삶을 살아갈 의지가 팍 꺾여버리는데.”
“와, 무서운 협박인걸. 계속 살아가줘, 아스카쨩.”
“죽기 전까지는 살 예정이야.”
“이미 죽어본 사람처럼 태연하네. 어디 열 있어?”
“그 둘에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건데?”
녀석은 내 옆에 착 붙어서 농담같은 말들을 계속 속삭여댔고, 나는 편의점 직원의 싸한 시선이 두려워 녀석을 무시하려했으나, 결국은 나를 이기지 못하고 받아치고 말았다. 두 소녀가 수상한 신분과 죽음과 삶에 대해 탁구공을 주고받듯이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해준 직원은 과연 프로였다.
“..생각외로 맛있는걸, 이 프렌치 토스트. 아스카쨩은?”
“그냥 그래.”
“수년간 쌓인 경험으로 도출한 그저 그런 맛이구나.”
“때론 그저 그런게 최선의 선택이니까.”
“냐하, 그런가.”
너무나도 익숙하다면, 당연한건가.
녀석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이 길은 내가 아는 길이기도 했다. 호텔에서 빠져나오고, 편의점을 들르고 어쩌다보니 지나치게 눈에 익은 길로 들어섰다. 아직은 많이 뜨겁지 않은 아침의 햇살까지 길을 밝혀준다.
그러고보니 나는 그 녀석을 끝내 찾지 못했다. 만약에 찾았다면, 내가 지금 걸어가는 이 길과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녀석과 함께. 늘 그렇듯이 금세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던 녀석은, 아마 프로덕션의 앞에서 개미의 숨소리보다도 작은 목소리로 '고마워'라고 속삭였을 것이다. 그러면 난 미소 짓지 않도록 갖은 생각을 머리 속으로 끌어당기며 하늘을 볼 것이다. 하늘의 색은 푸른 밤일까, 아니면 지금과 같은 아침의 흐린 빛일까.
'시키'는 내 옆에 있다. 그러나 그 녀석은 아니다.
같지만 다르다. 그러나 다르다기엔 같다.
그런 모든 것을 생각 않기엔 시키는 이미 도를 지나쳤다.
+1~2 프로덕션으로 가는동안 얘깃거리 / 생길 일
"기분 이상하겠다."
"어?"
"이 곳의 넌 아이돌이 아니니까. 지금 이렇게 간다고 해도 그 곳에 소속되어있지는 않겠지."
"......응."
길을 걸어가며 어렴풋이 느껴오던걸 콕 집어서 얘기해주는군.
"아이돌 시키쨩도 없을테고, 또 누가 없을까나? 칸자키 란코 말고 다른 아이돌들은 찾아봤어?"
"그러고보니... 그런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
"아포칼립스 발발 후의 세계 같네. 이젠 정말 남은 사람을 찾는게 더 신기할지도 몰라."
"어떤 사람들은 변하지 않고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 그렇다고 해도 나를 알아보지는 못하겠지만."
"으응. 뭐. 마음이 찢어지겠네."
"그렇지는 않을걸. 용케도 아직 그러지 않았으니 말이야."
"요컨대 아이돌 동료 중에서는 시키쨩을 가장 좋아했다는 말이구낭~"
"........"
그러니 마음이 찢어지려면 녀석과 처음 대면했을 때였어야 한다는거지. 분함과 혼란스러움이 더 컸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낄 수도 없었지만. 아까부터 정곡만을 찌르는 녀석이 거슬리면서도 그게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이건 그냥 성숙하지 못한 나의 내면의 문제니까.
"으응? 부끄러워? 어차피 그 시키쨩이 이 시키쨩도 아닌데?"
그래, 그래, 네 말이 다 맞는 말이다.
"안 부끄러워. 그리고...."
+1~ 투표입니다
1. ".....나, 다른 친한 아이돌 동료들도 있었거든." 와! 인싸!
2. "그냥 친해질 수 있을만큼 같이 많이 활동했던게 그 쪽의 시키 하나였을 뿐이야." ....야무...
와! 회전목마!
@쓰는 사이에 인양이..?!
"....나, 다른 친한 아이돌 동료들도 있었거든."
"호오. 그래?"
이미 들켜버린 주제에 허세를 부려본대도 어느 쪽에게도 이득은 되지 않겠지만. 녀석은 여유로이 웃으며 내게 한발짝 걸어왔고, 나는 한발짝 물러났다.
"...정말이야."
"그렇지만, 시키쨩을 가장 좋아했다며."
"'좋아한다'따위의 유동적인 감정으로 동료들과의 사이를 구분짓는건 넌센스라고 생각해."
"그렇다는군요, 아스카쨩. 아스카쨩은 어떻게 생각해?"
"다른 사람 대하듯이 하지마."
"네에네에. 그래서 아스카쨩은 누구누구랑 친했어? 시키쨩도 그 쪽의 프로덕션에 대해서 공부 조금 했으니까, 말해주면 누가 아이돌을 하고 있을지 얘기해줄게~"
".......그럼, 그러지."
+1~2 아스카가 말하는 시키 제외 아스카와 친했던 아이돌+주사위. 주사위가 50 이상이면 아이돌을 하고 있습니다.
"응, 몰라."
설명조차 하기 전에 끊어졌다. 너무 빠른 대답은 나를 놀리려는 투도 아니었고, 착각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야 시키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고양이 귀에 과하게 집착해서 말투까지 고양이를 흉내내는 미쿠만큼은 아이돌을 하고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나 둘 바뀐게 아니라는건가.
"다른 사람은?"
"...요시노. 요리타 요시노."
미쿠가 아니라면 이 쪽도 아닐 가능성이 높다.
"으응, 역시 모르겠네. 다른 사람은?"
".....글쎄."
"그럼, 아스카쨩의 친구들은 전부 일반인인가봐. 정말로 아포칼립스 같다!"
"그렇게 신나게 얘기할 일이 아니야."
"그런가아. 하긴, 두 사람 다 아스카쨩을 모르겠지. 아이돌 활동으로 만난 사이니까. 시키쨩도 아스카쨩을 몰랐고, 그렇다면 마에카와 누구누구와 요리타 뭐시기 또한 아스카쨩을 모를 가능성이 높아."
"마에카와 미쿠와 요리타 요시노다."
"그거나 그거나. 그래서 심란해?"
"....뭐랄까, 그냥 상상이 안 되네. 아이돌이 되지 않은 두 사람의 모습은. 프로덕션에 가면 두 사람의 모습이 없을 거라는 것도...."
"그보다, 우선은 프로덕션 안에는 못들어가겠지."
"...그렇기도 하고."
"그러고보니 아스카쨩, 저번에 말한 '사무소의 행운녀'라는 사람은 누구야?"
"응? 아, 그러네. 그 사람도 아이돌이었어. 타카후지 카코라는, 본명인지 가명인지도 모를 이름의."
풀어서 얘기하면 매, 후지산, 가지. 어느 의미로든 지나치게 의도된 것 같던 사람.
"....역시 모르겠어."
"그럼.... 됐어. 아이돌을 하고 있지 않은가보군."
"흠, 이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런 코멘트가 없네? 위급상황에 신과 동급으로 찾을만큼의 어마어마한 구세주인줄 알았더니."
"달리 말하면, 나는 아무런 종교도 믿지 않아. 따라서 하느님이나 부처님이나, 카코 씨나 내겐 별 다를바 없는 존재라는거지. 카코 씨는 불가해할 정도의 행운의 소유자야. 점쟁이처럼 의미 모를 속담 같은걸 대화 도중에 던지지도 않고, 예지몽을 꾸었다거나 부러 거짓을 부풀려 관심을 받아먹으려는 부류도 아니지. 그런데 정말로 순수하게 운이 좋다고. 하는 선택 하나 하나가 전부 그녀에게는 '옳은거야'."
"흐음...."
"그러니, 카코 씨 역시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무슨 일을 하든 어떻게든 할거라는 믿음이지. 평소 성격에 빗대면 오히려 아이돌보다는 조용히 지내는 느낌의 직업이 어울리기도 하고."
"아스카쨩이 그 정도로 미신에 푹 빠질 정도면, 정말로 운이 좋은가보네."
"우리 사무소의 최대 미스터리는 카코 씨와 너였어."
"냐하하, 그래? 그 카코님과 동급이라니 시키쨩 부끄러워~"
"너, 미쿠나 요시노 씨는 아무렇게나 불러놓고 카코 씨는 어째서 '카코님'이지."
"천벌 받기는 싫거든."
"아아, 그래. 너도 나 못지 않게 미신에 푹 빠진 모습이군."
"그렇다기보단 아스카쨩에 대한 믿음에 푹 빠져있지."
"......"
"신기하지 않아? 아스카쨩."
"....뭐가 말이지?"
"시키쨩을 찾고 싶다고 카코님에게 빈 소원, 정말로 이루어졌잖아. 시키쨩과 시키쨩, 조금은 다르지만."
그러고보니 정말이었다.
"설명하려 했더니 끊었으면서."
"그건 빠른 팩트체크를 위해. 우선 마에카와 쨩부터 시작할래?"
"네가 붙이는 호칭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군."
"마에카와 뭐뭐라거나, 뭐시기가 더 좋을까?"
".....그런 뜻이 아니야. 아무튼 미쿠는, 나와 다르게 오디션을 보고 들어왔어. 처음부터 아이돌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거다."
평범한 여자아이의 동경이라는 거겠지.
"미쿠의 아이돌 컨셉은 '고양이'... 정말 과하다 싶을 정도로 고양이 컨셉에 집착했어. 매일매일 새로 보는 고양이 귀를 머리에 붙이고 나왔지. 머리띠일 때도, 고정시키는 핀일 때도 있었어. 어떻게 붙였는지 모를 꼬리도 하고. 어미에는 항상 '냥'을 붙였어."
"고양이라...."
"뭐, 그정도일까. 아이돌 일에 굉장히 진지하고, 고양이 컨셉을 유지한다는 것. 종종 시키와도 비교되고는 했어."
"응? 나랑?"
"...아무래도 너도 고양이스러운 면이 있으니까. 미쿠와는 달리 얼굴도 소위 말하는 '고양이상'이기도 하고."
"그렇구나. 아스카쨩은 혹시 고양이 페티쉬? 혹시 요시노라는 아이도 고양이 캐릭터?!"
"두 사람밖에 되지 않는 인간관계, 그것도 친구관계로 한 사람을 도착증으로 만들어버리다니 하여튼 넌 보통이 아니군."
"칭찬 고맙다냥."
"칭찬 아니야. 그리고 그런 어미는 붙이지 않아도 돼. 무엇보다도 요시노 씨는 고양이 캐릭터가 아냐."
"쳇, 아쉬워라."
대체 뭐가 아쉽다는건지.
그 쪽 세계의 미쿠와 시키는 전혀 친하지 않았다. 둘은 정 반대의 성향이었다. 녀석이 일방적으로 붙어서 미쿠를 귀찮게 할 뿐이었다. 그러면 미쿠 예능방송의 버릇이 몸에 베어서 츳코미를 했고, 녀석은 또 다른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말꼬리를 잡아 바보 만담을 이어갔다. 그러나 둘은 절대 따로 만나는 법이 없었다. 철저한 아이돌 동료 사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이.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은 미쿠가 아닌 또 다른 타겟을 찾았다. 그리고 그 타겟은 매번 바뀌었다. 출연할 예정인 예능 방송이나, 앞으로 할 유닛 활동의 멤버에 따라서. 미쿠는 그런 비즈니스 관계에 대해서는 불만을 표하지 않았지만 툭하면 실종이나 하는 녀석의 프로 의식을 탐탁치 않아했다.
둘은 친할 리가 없었다.
요시노 씨와는 잘 모르겠지만서도.
"요시노 씨는 굉장히 귀여운 외모로..."
"고양이 콜렉터가 아니면 미소녀 콜렉터라던가."
"아이돌인 이상 외모를 보고 뽑는게 당연하지 않을까. 그런 아이돌 동료들이니 당연히."
"칸자키 란코도 꽤나 생겼던걸."
"어떻게든 한건을 잡고 말겠다는 태도군."
"그야 재밌으니까~ 그리고 아스카쨩이 외모적인 부분을 언급한건 처음인 것 같아서야. 내가 예쁘다거나, 귀엽다거나, 사랑스럽다거나, 구름 가득한 밤하늘을 비춰주는 달빛 같다거나, 그런 말은 해준 적 없잖아? 시키쨩도 한 미모 하는데 말이지.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드는거야? 응응, 실망이야."
"마지막 건 외모와는 상관 없는 것 같은데."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잖아?"
"....어쨌든, 보통은 일상생활에서 그런 류의 말을 아무렇게나 던지지는 않잖아."
"그런가."
"......나라고 타인과의 교류가 활발한 편은 아니었지만."
"나도."
"......"
"......."
"....그래서 요시노씨는..."
"응...."
"어른스럽고, 전통복을 즐겨 입었어. 취미는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주는 것. 그리고 미쿠처럼 말투가 특이했는데... 조금 옛날 말투라고 해야할까. 꼭 신령님같은 말투를 썼어. 또, 소라고둥을 부는 것을 좋아했고."
"346프로덕션은 무슨 기인들만 모아둔 것 같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요시노 씨는 스카우트되었다고 들었어."
"데뷔 시기는?"
"내가 들어오고... 두 기수쯤 지나서였을까. 잘은 기억이 안 나지만."
"그렇구나. 만약 그쪽과 이쪽 세계가 같은 맥락으로 흘러간다면, 아스카쨩이 아이돌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어떤 사건으로, 요시노란 아이도 아이돌이 되지 않은 걸지도. 칸자키 란코와 너는 여기서도 같은 학교에서 만난 친구 사이였잖아? 그러니까..."
친구 사이라는 말이 걸렸다.
같이 만나면 로맨스 영화만을 보는 사이는... 친구 사이라 할지라도, 평범한 친구 사이는 아닐 것이다. 아무리 양보해서 부정한다 하더라도 일반적인 친구는 아니다. 조금은 그 궤도를 벗어나 있다.
녀석은 아직 그 사실을 모르지.
"...마에카와 쨩도, 그런 식으로 거슬러올라가 보면 되지않을까나."
"그건 무리야. 미쿠는 소위 말하는 개국공신이거든. 프로덕션의 초기부터 데뷔해서 활동하고 있었어."
"그럼 중간에 아이돌을 그만뒀다거나? 아이돌 일에 진지하다고 했으니까 그 쪽이 더 가능성이 낮을까."
"....잘 모르겠어. 아이돌 일에 진지했던 건 맞지만, 초기부터 활동해왔었고.... 그 쪽 세계에서 미쿠는 조금 지쳐있었거든."
연예계란 곳도 꿈 하나만으로 버티기에는 가혹한 곳이니까. 특히 미쿠는 초기 멤버라는 부담감이 더욱 컸던 것 같다. 새로운 아이돌들에게 밀리지 않으면서, 선배의 모습과 신선한 모습을 둘 다 보여줘야했던 미쿠는 잠시 아이돌로서의 미쿠를 내려놓는다며 휴가를 신청하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현재의 아이돌 명단에 그 애가 없는건, 그만뒀다는걸로 설명할 수 있으려나. 찾아보면 아이돌로 활동했었던 기록이 나올지도."
"...아마도. 우선은 계속 프로덕션으로 가보자."
"......"
어쩐지 눈이 따가웠다. 건물 표면에 반사된 빛 때문은 분명히 아니었다. 건물 앞의 흡연실에서 새어나간 담배연기 때문도 아니었고.
"아스카쨩?"
"....응?"
"아이돌이야."
"그야 프로덕션이니까 물론... ...잠깐, 무슨 아이돌?"
"아나스타샤라는 아이돌. 명단에 있었어."
"아나스타샤 씨가..."
"오, 아는 사람?"
"...면식은 있었지. 그 쪽 세계에서."
"그렇지만 이쪽에서는 모른다... 겠지?"
"응."
그렇게 대답은 했지만 어쩐지 아나스타샤 씨가 아는 체를 해올 것 같은 기분에 순간적으로 그녀의 앞으로 걸어갔다. 갑작스레 눈이 맞았다. 아나스타샤 씨의 눈이 놀란 듯이 커졌다. 그녀의 따뜻함과 맞지 않는 차가운, 푸른색의 눈동자는 나를 똑바로 향했다.
아니... 단순히 그런 기분에 휩싸였을 뿐인가.
아나스타샤 씨는 왜 나를 아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그 하얀 손을 내게 뻗어오는걸까.
이 세계의 아나스타샤 씨가 나를 안다는건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왜....?
...손이 잡혔다. 물론 아나스타샤 씨가 아니었다.
그건 그 녀석의 손이었다.
조금 투박하고, 마른 감촉의.
그렇게 시선과 주목이 분산된 그 때, 아나스타샤 씨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1~ 투표.
1. "아스카....?"
2. "...저기, 혹시, 란코의...."
어?
".....아스카 씨....인가요?"
아나스타샤 씨가 나를 안다고.....?
이건 무슨 일이지?
설마 란코를 통해서라거나... 란코도 아이돌이니까... 무언가 접점이....
....아니, 하지만 란코가 죽었다는 '친구'를 아나스타샤 씨에게 보여줬을 리가. 아이돌이 된 이후에는 이미 세상에 없는 존재인데... 란코가 그럴 리가 없어.
혹시나 어제 나를 만나고 나서라도....
"......흑....."
자, 잠깐. 아나스타샤 씨... 혹시 지금 우는건가?
"...괜찮으세요?"
녀석이 대신 아나스타샤 씨에게 말을 걸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선은...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아나스타샤 씨는 나를 알고 있다. 분명히 아스카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네.... 죄, 죄송합니다... 못 알아보고 실례를.."
"아니, 맞아요."
".....네?"
"아스카, 맞습니다. 니노미야 아스카."
".........."
아나스타샤 씨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저...."
"....아스카."
"......."
"정말로.... 아스카...."
아나스타샤 씨의 머리 속에서 어떤 생각들이 떠오르고 있을지 나는 몰랐다. 녀석도, 나도 이 세계의 '아스카'가 어떤 일을 저지르고 다녔는지는 알 리가 없다. 따라서 혼란스러워 할 아나스타샤 씨의 앞에서 우리는 제 3자처럼 멀뚱히 서있기밖에 할 일이 없었다.
"...쌍둥이?"
"아니요."
"이 곳은, 꿈 속인가요?"
"아니요..."
".......환생...!"
"아니에요."
".....도플갱어...."
"........."
도플갱어라..
그렇게 본다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막은 조금 다르지만, 그렇다고 "아니에요"라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저, 정말로 도플갱어....?"
"그게...."
"아아-..."
"괘, 괜찮으세요 아나스타샤 씨!?"
....초현실적 현상을 마주하고 휘청거리던 아나스타샤 씨를 녀석이 겨우 잡았다.
이젠 어떻게 해야하지.
아니, 그보다도...
오히려 이게 더 나은 방향일 수도 있다. 나는 도플갱어. 그러니까 이 쪽의 아스카의 사정 같은건 모른다. 아예 초면부터 이렇게 하는게 수월하겠지. 아나스타샤 씨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2 다음 상황... (란코 난입 제외)
끔찍하게 조용한 프로덕션의 복도 안에서,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녀석마저 잠자코 프로덕션의 내부를 감상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샤 씨는 무엇보다도 빠른 걸음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우리도 그에 맞춰 걸었다.
"어, 아냐쨩!"
"아- 미호, 안녕하세요."
그러다 마주친 사람은 코히나타 미호였다. 기숙사 쪽에서 방금 나온 것 같았다. 이 곳의 나와는 아는 사이일까.
"저기, 이 분들은?"
"...아는 사람..."
"친구에요."
가끔 지나치게 정직한 면이 있는 아나스타샤 씨를 대신해 급하게 말했다. 그런다고는 해도 도플갱어 같은 소리를 하지는 않을텐데, 괜히 나섰나. 친구의 기숙사를 방문하는데 선글라스에, 마스크에, 뒤집어쓴 후드까지. 안 그래도 수상할 곳 투성이인데.
"아냐쨩 학교 친구시구나! 우와, 학교 친구를 데리고온건 처음 봐요."
"..친해진지 얼마 안 되서요?"
"아아, 그렇구나~. 앗,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네, 감사합니다."
...다행히 번거로운 일은 피했군.
아나스타샤 씨의 방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하여 조금 더 걸었다.
미쿠도 기숙사에서 지냈었는데, 당연하지만 미쿠의 방은 없겠지. 방의 문 앞에 걸린 팻말에 미쿠의 고양이 모양 자석처럼 눈에 띄는 모양은 없었다. 그러다 복도에서 오른쪽으로 꺾여지는 방향에, 말 발굽처럼 생긴 무언가가 걸려있는 방이 있었다.
"여기에요."
"....실례하겠습니다."
아나스타샤 씨의 방은 아나스타샤 씨 본인만큼이나 깨끗이 정돈되어있었다. 희거나, 푸르다. 커튼도 침대의 커버도 전부 같은 곳에서 산 것 같은 통일감이 느껴졌다. 벽에는 야광 별 스티커 같은 것을 붙여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걸려있지 않았다. 책상에는 탁상 시계와 러시아어로 적힌 책, 그리고 밤하늘이 그려진 부드러운 천이 있다.
그 쪽 세계에서도 한번도 들어오지 않았던 방.
...이 쪽의 아스카라면, 어땠을까.
"방 좋은걸~"
처음 만났을 때는 존댓말로 일관하던 녀석이 별안간 편히 말하며 러그에 철푸덕 앉았다. 아나스타샤 씨는 신경쓰지 않는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아스카 씨도, 편하게 앉으세요. ....차라도..?"
"아니아니, 나는 괜찮아."
"저도."
"그럼..."
아나스타샤 씨도 앉았다.
"....아스카 씨의, 도플갱어 씨..."
".....그냥 아스카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아, 네."
"아나스타샤 씨, 여기 선글라스랑..."
"아, 네. 감사합니다."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스카쨩, 존댓말을 쓰는 건 신선하네."
"신선한 것을 좋아하신다면, 과일이 있습니다."
"...아니, 그런 뜻으로 한 얘기는 아닐텐데요."
"시키쨩한테는 반말을 넘어 막말을 하는데 말이야. 너무 슬픈걸."
".....보통, 도플갱어는, 원본과 성격이 반대라고 하죠."
그거 무슨 의미야.
"그보다도, 말을 편하게 하시는게... 저도 마음이 편합니다."
"아... 그럼..."
"기다렸다는 듯이 덥썩 무는구나. 와오! 월척!"
"시끄러."
"봤지? 아나스타샤 씨. 얘가 이런다니까."
"사이, 좋으시네요."
"...그런가."
"후훗."
아나스타샤 씨는 처음으로 웃었다.
시키도 아나스타샤 씨가 마음에 들었는지 경계를 풀고 서서히 러그에 잠식되어 부드러운 인조털에 몸을 뉘이고 있었다. ....이 경우에는, 방이 마음에 든건가.
"그래서.... 아스카."
아나스타샤 씨가 결심에 가득 찬 목소리로 불렀다. 이야기가 시작되려는 것이다.
"응."
나 또한, 평정심을 지키도록 노력하자. 이 세계에. '아스카'에게 다가가기 위하여, 진실을 찾아내기 위하여.
"아스카는.... 어떻게 생겨난건가요?"
"푸훕."
"?.... 시키, 괜찮나요?"
"으응. 시키쨩은 괜찮아. 저기 표정을 보면 아스카쨩이 괜찮지 않은 것 같은데."
"....."
녀석은 바닥에 한쪽 뺨을 대고 누운 자세로 잘도 웃었다. 평범하게 밝힐 수도 있었는데, 쓸데 없는 포인트에 웃음이 터져버린 녀석과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나스타샤 씨의 시너지에 잠시 머리가 찌릿거렸다.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겠지."
"...혼돈이란 어머니와, 폭풍이란 아버지 한가운데서...?"
"아니, 그런게..... 귀신이라던가 유령이라던가, 그런 비현실적인게 아니야."
"그런....... 그렇다면 어떻게...?"
"나는..."
"........"
"다른 세계의 아스카."
말했다.
분명 아나스타샤 씨는, 전통적인 도플갱어 속 괴이처럼 어느날 내가 완전한 상태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확실히 하나의 인간이란 존재다. 세상에 태어나고 십여년 간 살아온 인생이란게 있는.
'아스카'와는 다르지만, 엄연히 세계에 그 존재를 드러낸 아스카.
이 세계의 일원에게 받아들여지고, 그 일원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설령 내가 거짓된 아스카로서 비춰진대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난 도플갱어 같은게 아냐. 여전히 아스카. 니노미야 아스카다."
아나스타샤 씨는 침묵했다.
"괜찮습니다. 아니, 그것 말고는, 설명되지 않으니까요. 확실히, 빠르게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나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웠어. 어떤 경위로 이 세계에 오게 된건지는. 아나스타샤 씨에게는 더 힘들겠지."
"....하지만, 괜찮아요. 귀신, 아니야. 그러니까 더 무섭지 않아요."
"무서웠다는 소린가..."
"솔직해질게요..."
아나스타샤 씨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는 그제야 대화없이 걸어갔던 시간이 이해가 되었다. 이 곳의 아스카는 더 이상 세상에 없다. 그런데 갑작스레 나타난, 그녀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등장해 도플갱어라고 한다면, 그건 그녀를 알던 아나스타샤 씨의 입장에서는 두려울 수밖에.
그러나 아나스타샤 씨는 '아스카'와 깊이 연관되어 있던 사이로는 보이지 않아.
원래 세계를 기준으로 생각해봐도, 나는 아나스타샤 씨를 아이돌이 된 이후로 비로소 구면이 되었다. 아이돌도 되지 않은 이 세계의 내가 아나스타샤 씨를 알 리가.
"....저기, 질문, 있어요."
"응, 아나스타샤 씨."
".......시키 씨는, 실제, 존재하는 사람인가요?"
"환각인줄 알았던거야?!"
"....솔직해질게요..."
"푸흡."
아나스타샤 씨의 질문은 이번엔 녀석의 허를 찔렀다. 그러니 내가 웃을 차례인가.
"저기, 시키쨩은 '진짜'거든? 말랑말랑한 살도 부드러운 머리카락도 이 안에 흐르고 있는 선홍빛의 피와 펄떡이는 심장까지 전부 진짜야. 어디 한번 느껴보시지."
"정말, 말랑말랑, 합니다."
그걸 또 만져보냐.
잠시 후 아나스타샤 씨는 고개를 숙였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으응, 괜찮아."
"....종합하면, 시키 씨는 이 세계의 사람. 아스카는 저쪽의 세계... 어딘지 모를 곳에서 넘어온 사람. 그리고, 아스카 씨는 이 곳에 오자마자 시키 씨를 만났고, 서로 협력하는 사이의 비지니스 관계, 군요."
"비즈니스라는 말은 안 해도 돼."
"예."
+1~3 아스카 / 시키가 아나스타샤에게 할 질문들 혹은 얘깃거리.
"응."
조금은 공격적이게 들리는 '끌려왔다'라는 표현이 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조종할 수 없는 어떤 다른 영역의 것이었기에.
"그런데... 아나스타샤 씨. 도대체 이 세계에서의 나는 어떻게 알게된거지? 아이돌은 하지 않았을텐데."
"....아, 그렇군요. 모르는 것이, 당연하겠군요...... 저의 프로듀서 씨, 아스카를 스카우트-하려 했었습니다."
"응? 길거리 캐스팅?"
"아나스타샤 씨의 프로듀서가?"
"네. 저도, 스카우트 받았습니다. 길거리에서."
....나의 프로듀서는 아닌건가.
나는 너를 모르는데, 너는 나를 안단 말인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프로듀서와 처음 만났을 때가. 그 때의 나는 이렇게 말했었지. 아이돌이라는 단어를 난생 처음 들어본 사람처럼, 나는 서툴게 반문했다. 그러자 프로듀서는 명함을 내주며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모르지, 하고.
그 말은 어찌된 영문인지조차 모르겠지만, 당시의 내게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의 위안이었다.
진로라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을 저주스럽고도 축복받은 일직선의 청춘길에서 비로소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거다.
"그렇지만.... 아스카. 스카우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디션장에도, 없었습니다."
"....흔들리지 않았다는건가."
"네. 저의 프로듀서 씨는... 곧 인사이동이 예정되어있었습니다. 신인 아이돌, 원했습니다."
"......."
".....그는, 급했습니다. 연습생 중에서 찾지 못했기에. 저와 고민거리를 이야기하다가, 아스카를 발견하고, 곧바로 스카우트를 시도했어요. 저는, 아이돌로서, 인기 적지 않았어요. 저와 함께 있으면 아스카의 스카우트가 조금 더... 쉬울거라고 했어요."
아나스타샤 씨는 저쪽 세계에서도 이미 인기가 많은 아이돌이었으니까..
통상적으로 스카우트에 대한 신뢰를 얻으려면 확실히 인기 아이돌과 동행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게다가 담당 프로듀서라면.
"....그래서 저는, 아스카, 알아요."
"그 뒤로 프로듀서는? 아나스타샤 씨의 담당 프로듀서가 아니게 된건가."
"네. 그리고.... 새로운 프로젝트, 했지만... 잘 되지 못했어요. ......그리고 프로듀서를 그만두셨어요. 하지만, 그동안의 실적으로 사무원으로..."
"아아."
"프로듀서를 좋아했어?"
녀석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나스타샤 씨는 조금은 쓸쓸하게, 조금은 쑥스러운 듯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예. 라고 대답했다.
"프로듀서인 프로듀서 씨를, 정말로 좋아했어요."
그리움을 잃은 그녀에게.
".....저, 잠시만 자리를 비울게요. 차, 가져옵니다."
"아아, 응."
아나스타샤 씨는 입꼬리만 살짝 움직여 미소를 보이고, 곧바로 방을 떴다. 프로듀서의 이야기를 한 것에 조금 감상적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걸음소리는 일반적인 걸음 속도와 다르지 않다. 공용 탕비실은 기숙사의 중앙. 복도를 꺾어 걸음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 나는 녀석을 일으켜세웠다. 아예 눈까지 감고 러그에서 도도한 안주인 고양이처럼 뒹굴고 있는.
"시키."
"으응, 아스카쨩."
"이 곳의 나를 잃은 건 프로듀서에게 큰 타격이었을까?"
".....물론 스카우트하려던 아이가 갑자기 죽었다면 찝찝하기야 하겠지만. 글쎄? 고작 아이돌, 아니, 그냥 일반인 한명인데. 그런데도 아나스타샤가 얘기하는걸 보면 큰 타격이었던 것처럼 느껴졌어."
"그래. 그 전에, 스카우트 제안을 모두 거절한 일반인 신분 소녀의 행방에 그리 깊게 접근하지 않았다면 사망 소식을 아는 것도 무리야. 게다가 전 담당 아이돌, 즉 아나스타샤 씨도 이 일을 알고 있지. 죽음, 혹은 목격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했던게 아닐까."
"호오, 살인의 가능성까지 생각하는거야?"
"....말은 했지만 그렇게까진 생각하지 않았어."
"응, 뭐 그럴거라고 생각해~ 그런데 말야, 너의 프로듀서는 전에 아나스타샤를 담당했었어?"
"인사이동은 흔하니까 가능성이 제로라고는 볼 수 없겠지...그러나 내가 프로듀서를 만났을 때 프로듀서는 혼자였어. 확실히 인기 아이돌과 동행하는건 본인의 능력을 증명하는 일이야. 만약 프로듀서가 그렇게 간절했더라면, 이미 담당에서 손을 뗐더라도 옛정을 말미암아 아나스타샤 씨에게 부탁하지 않았을까."
"....홍차냄새가 나."
"어?"
"그리고, 독 냄새도."
"........."
독.....?
아나스타샤 씨가?
녀석이 그렇게 말한다면 틀림없....
"잠깐. 너 냄새 못맡잖아."
"발걸음 소리로 유추해낸 가벼운 서프라이즈 조크. 냐하하~"
".....입 닫고 다시 눕기나 해."
"네~에."
곧이어 아나스타샤 씨가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찻잔 세 잔이 놓인 트레이를 들고서.
"차, 드세요. 괜찮으시다면."
"잘 마실겡~"
깊은 갈색을 띄는 찻물에서는 진한 얼그레이의 향이 났다.
.......정말로 홍차여서 조금은 두려워졌다.
"아.... 그래서 마시지 않는건가요?"
"아, 아니, 뭐."
차마 독이 들었을까봐 용기가 나지 않았다는 헛소리는 할 수 없었다.
"그럼, 밀크티로 바꾸어드릴게요."
".....고마워."
"시키쨩도 부탁할게."
"네, 이리로 주세요."
아나스타샤 씨는 친절하다. 철저히 타인이기에 아무런 속내 없이 친절만을 베풀 수 있는 것이다. 어느 감정으로부터 속박되어있지 않은 그 거리. 유일한 연결고리는 아나스타샤 씨가 보았던 나의 찰나.
"아스카, 설탕은 한스푼?"
"두스푼으로..."
"네."
아나스타샤 씨는 그 작업을 녀석을 위해 한번 더 반복했다. 녀석은 그 결실을 식히지도 않고 단숨에 마셔버린다.
분위기는 반전되었다. 데메테르가 지하세계의 음식에 대해 경고했듯이. 아나스타샤 씨가 문을 열고 나갔을 때와, 다시 들어왔을 때의 방은 두 개의 다른 방이다. 홍차의 향기라는 수를 씀으로서 공기의 흐름을 혼란 시킨 것이다.
1. 그러나 아나스타샤 씨는 입을 열었다.
2. 그리고 아나스타샤 씨는 입을 열었다.
"시키 씨, 그리고 아스카 씨."
"응."
"이제는 무엇을 하실 생각인가요?"
"........"
"시키 씨의 여행이 끝나도, 아스카는 돌아가지 못한다면...."
묻어두었던 진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아나스타샤 씨는 진심으로 걱정한다. 그럴수록 나 자신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최악의 인간이 되어버려.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어. 아아. 손댈 수 없는 나약함이 타인에게 기생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끝내주게 무기력한 기분이다. 더는 돌아갈 수 없다. 그 이전의 방에도, 나의 인생이 각인되었던 세계에도.
지난 날의 모든 것은 환상이었다. 이 곳의 아스카라는 인간은 철저히 고립되어있다. 복도를 걸었을 때의 악세서리들은 족쇄가 아닌 보호막. 아나스타샤 씨의 단순한 질문이 그것을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렸다. 침묵은 닻이 바닥을 향해 침몰하는 만큼이나 길었다. 아니, 실제로는 얼마 흐르지 않았나. 아나스타샤 씨의 표정은 어떤 의미일까.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아나스타샤 씨가 만약에 그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순리처럼 살 수 있었더라면. 아나스타샤 씨는 추억을 잃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언제까지고 꿈에 빠져있을 수 있었을까.
아나스타샤 씨는.
나는.
아나스타샤 씨는....
....시키는?
+2 시키쨩의 대답
하지만 평행세계라는 건 너무 흥미로우니까... 조금은 변덕을 부려보고 싶을지도~
두려웠다.
나는 이 대답을 듣고도 타성을 이겨낼 수 있을까.
"하지만, 평행세계라는 건 너무 흥미롭잖아? 으응, 간만에 두근거릴지도 몰라. 그러니까, 조금은 변덕을 부려보고 싶을까나~"
"......"
"그렇군요...."
다행이었다. 나의 벽은, 견고히 버텨주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자신만큼은.
...그러나, 눈을 감으면 나의 몸은 무중력처럼 떠다닌다. 이상하게 초조하다. 그 상태에서, 나는 공기 속을 떠다니며 방랑한다. 흔히 하늘을 나는 것과도 같은 기분이라면 들뜨고 설레는 어설픈 느낌이라 한다. 그러나 설렘이라기에는 죄책감이 들어 좋지 않고, 불안하다기엔 지나치게 고양된 감정이다. 더 눈을 감고 있다가는 우주 속에서 미아가 될 것 같았다.
+1~ 주사위 2표 먼저..!
1~50 어?
51~100 ...아무튼 아나스타샤 씨, 오늘은 고마웠어.
"...아무튼 아나스타샤 씨. 오늘은 고마웠어."
"아, 이제 가시나요..?"
"아스카쨩이 그렇다네? 뭔가 뒤가 구린걸. 킁킁- 아~ 아무 냄새도 안 나!"
"그야... ....뭐 됐어. 설거지는 내가 하지."
"아.... 아니에요. 제가, 할 수 있어요. 차 대접은 여러 번 해봤으니까.... 기분 좋아지는 일이에요. 설거지도."
"....고마워, 아나스타샤 씨.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 시키 씨. 전화번호, 주세요. 스케줄이 바쁘지 않을 때를 알려드릴게요. 도움이나, 대화가 필요할 때는 연락해요."
"글쎄, 귀신에게 전화번호가 있을까?"
"네..?!"
"뭐, 농담이지만. 나는 사지절단 상태라도 살아있을 자신이 있거든. 그렇다고 해도 수상한 방랑인을 기숙사의 방으로 들이다니 베짱이 좋네, 아나스타샤 군. 그게 도플갱어 따위의 심령현상이든 약물과다의 부작용인 환각이든."
"........"
"자, 여기. 시키쨩의 전화번호야. 만나서 반가웠어. 또 이야기할 수 있으면 일본에서 보자."
".....네, 시키 씨."
"...안녕, 아나스타샤 씨."
녀석은 다시 프로덕션의 복도로 돌아올 때까지 꽤나 날이 서 있었다.
"...이렇게 다녀도 괜찮으려나."
"왜? 얼굴이 보여서? 그런거라면 시키쨩이 가려줄게."
"잠깐, 안으면 걸을 수가 없잖아. 그리고 에쿠스테도 어떻게 할 수 없고."
"이래서 눈치가 빠른 아스카쨩은 싫다니까."
"어디 다른 평행세계에서 눈치가 없고 머리가 빈 니노미야 아스카를 찾아보시지."
"어라. 그거 쉬울까? 흐흥, 차라리 빛의 속도를 넘어 이동해볼까나? 그럼 어린 시절의 새하얀 모찌같은 귀여운 아스카쨩을 볼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때는 내가 널 못 알아볼 차례인가."
"괜찮아, 새끼오리는 처음 본 사람을 엄마로 인식하게 된다니까. 시키마마가 예쁘게 보살펴줄게?"
"납치범을 어머니로 둔 적은 없어."
"걱정 마, 그 사실조차 까먹게 해줄테니."
우리는 프로덕션을 나왔다. 내부에선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녀석이 미인이고, 나 또한 에쿠스테라는 특징이 있으니 독특한 조합을 호기심 있게 바라보는 시선들은 있었지만.
"....이젠 뭘 하면 좋을까."
+2 다음 상황 / 장면..
"벨소리 태평하게 따라 부르지 말고. 네 전화잖아."
"나한테 올 전화는 그리 많지 않아. 알림음이 끊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스릴을 만끽하는게 취미라면 아스카쨩은 나한테 뭐라고 할수 있을까?"
"...글쎄. 정말 그게 취미야?"
"아니. 흠, 누군지 확인이나 해볼까~ .....아, 칸자키 란코다."
란코와의 대화는 불과 오늘 새벽에 일어난 일인데도, 아나스타샤 씨와의 대화가 길어졌기 때문인지 아득히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덜컥 겁부터 났다. 마음의 리셋이라는 거다.
"칸자키 란코가 전화를 건 사람은 아스카쨩일까, 아니면 이 시키쨩일까? 흐음, 이러니까 정말로 마마가 된 느낌. 집 전화로 서로에게 전화를 걸던 시절은 항상 부모가 전화를 받고, 누구에게 온 전화인지 확인하고서야 자식에게 넘겨줬었잖아."
"그랬던 때도 있었지."
"묘하게 초조해보이는걸."
"...곧 끊어질 것 같으니까."
"그런가..."
받았다.
녀석이 전화를 받았다. 스피커폰은 아니다. 그러니까, 스마트폰을 귀에 가까이 가져다댄다. 여기선 작은 소리도 들리지 않아. ...란코도 이 번호가 내 번호가 아니란건 알고 있으니까, 별 말은 하지 않겠지만...
"여보세요?"
- "........."
"응응. 나, 아스카쨩과 같이 다니고 있어."
- "......."
"아스카쨩을 바꿔달라고? 으응, 뭐. 그럴까나. 다음부턴 샤워를 한 후에 꼭 머리를 말리라고 나 대신 충고해주길 바라. 자, 아스카쨩. 칸자키 란코야."
".....고마워."
망설여진다. 또 다시 오른쪽 귀에 그녀의 음성을 가져다댄다. 새벽처럼. 손에 잡히는건 기계덩이일 뿐이지만, 소중히, 그녀처럼.
".....란코."
+1~2 란코가 하고 싶었던 말.
목소리가 밝았다. 어제와는 다르게 녀석이 빤히 보고 있었기에 신경이 조금 더 쓰였다. 미소를 지으려 했다가도, 그냥, 왠지 모르게 저지하게 되었다.
- "저기, 오늘은... 뭐해?"
".....사실은, 346 프로덕션에 갔었어."
아나스타샤 씨를 만났다는 사실은 묻지 않았다면 얘기하지 않는게 좋겠지. 이유는 무엇이라고 하면 괜찮게 들릴지 고민이었다. 나는 이 곳에서 아이돌을 하지 않은 채로 죽었으니까, 그렇게 잃어버린 나의 흔적을 프로덕션에서 찾으려 했다면 란코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게다가 아나스타샤 씨에게는 진실을 말했고. 한심하게도 란코를 어떻게 대해야할지의 대책은 아직 모른다.
- "응? ...호, 혹시.. 나를 보려고..."
물론 그것도 있었지.
.....그런데 란코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오해한 것 같다. 어쩔줄 몰라할 란코의 모습이 눈에 선명했다.
- "미리 연락해줬으면, 만날 수 있었을텐데......"
"으응, 그게..... 거기까진 생각을 못했어. 미안."
- "아니야...! ....기뻐. 그, 그럼 내일은 내가 아스카쨩을 찾아갈게!"
"어?"
- ".....아, 안 될까....?"
"아니... 그건 아닌데. 란코는, 바쁠 수도 있으니까."
- "조금이라면 괜찮아... 그리고, 아스카쨩이고..!"
현명한 자여, 부디 미숙하고 어리석은 나에게 힘을.
+2 아스카의 대처, 혹은 다음 상황 / 장면 등
"냐하하, 미안미안. 아스카쨩은 이 시키쨩하고 선약이 있어서 말이지."
......들리고 있었던건가. 아니, 내가 말한 내용으로라도 유추할 수 있었겠지. 내가 어떤 말을 했었더라?
그런데, 선약이라고?
"내일은 어려울 것 같은데, 가능한 시간대를 대충이라도 보내주면 우리도 맞춰볼게~"
- "아, 그, 네에..?"
"응, 그러는 편이 좋겠지? 서로의 스케줄을 존중해준다~ 그런거야. 친구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않겠어?"
- ".....네...? 그렇긴 하지만..."
"그럼 나중에 보자~ 바이바이."
"........"
"..........끊어버렸다-"
"끊어버렸다-라고 말한다고 깔끔히 해결된게 아니거든."
"용건은 확실히 전했으니까 괜찮아."
녀석은 나에게서 떨어짐과 동시에, 음성 또한 가져가버렸다. 제멋대로인 것은 하루이틀 겪는게 아니지만, 무언가 지나치게 급하게 종료된게 아닌가. 상황을 차분히 정리할 틈조차 없었다. 생각해보자. 란코는 내일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고, 녀석은 나와의 선약이 있다며 그 말을 받았다. 그리곤 시간이 언제가 괜찮은지를 보내주면 우리가 맞춘다....라.
우리라는건.
"너도 란코를 만나게?"
"당연한 말씀."
그야 녀석의 입장에서는 당연한가...
"있지, 아스카쨩."
"응."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게 된다면, 여행을 떠나자."
그러고보니 일본에 다시 온건 여행 목적이라 했었지.
"어디로 말이지?"
"어디로 갈까나. 바람을 타고 멀리멀리 날아가버릴까? 봄바람은 꽃향기를 싣고, 여름바람은 시키쨩과 아스카쨩을 싣고. 가을바람은 낙엽을 싣고. TV는 사랑을 싣고."
"이상한게 하나 있는데."
"이상한게 한둘이 아니지 않아?"
".....글쎄, 너랑 다니다보니 그런 것도 잘 모르게 되었군."
"아, 그래."
"앗."
진동음이 들렸다. 란코였다. 금방 커뮤니케이션의 원천을 봉쇄시킨 것 치고 란코는 상황의 요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몇시에서 몇시까지는 무슨 스케줄이 있고, 또 언제는 레슨이 있고. 화이트보드에 적힌 것을 그대로 찍은 사진이다.
"잘 팔리는 아이돌의 삶이란. 이 스케줄에서는 온통 분홍색으로 뒤덮은 코디의 칸자키 란코쨩이 나와서 사랑노래를 부르려나~"
"그런가..."
하기야 그럴지도 모른다. 트윈테일에, 귀여운 말투, 다정한 성격. 흔히 아이돌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리본이나 레이스도 좋아하고. 상상은 되지 않지만.
"비는 시간대라면 저녁 즈음일까. 어린 아이들이 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인걸."
"그렇게 어리지는 않아."
그런데, 아까 전화를 방해할 때 한 말이 있지 않았나. 선약이란건... 그건 무엇을 두고 말한거지. 녀석이니 별 생각 없이 말했으려나. 기억을 해보려 해도 뭘 하려고 약속했던 것은 떠오르지 않으니.
"자, 그럼 슬슬 갈까."
"응?"
"아스카쨩의 옷을 사러 말이야. 계속 시키쨩의 옷만 쓸 수는 없잖아?"
"......그렇지."
"또, 또... 옷 말고는 뭐가 필요하려나. 시키쨩의 이모셔널 서포트?"
"그렇다고 쳐두지."
+1~3 옷가게로 가면서 / 도착해서 얘깃거리들, 혹은 장면..
장난식으로 하는 말이겠지만 반은 진실이었다. 공상이란 것을 전제로 만약 속의 최악의 경우까지 가지 않더라도 느낄 수 있다. 녀석은 사람과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는 증거를 상처가 되지 않을 선에서 여과없이 보였다. 그런데 가린 눈의 감각을 잊고 촉감으로 나의 위치를 파악하려 애쓸 때, 녀석은 항상 나의 앞에 있다. 눈을 뜨고 말을 건네면 어느새 녀석의 형상은 사라지고 드넓은 푸른 들판이 보인다. 그렇게 이름도 없고, 길도 없는 곳을 나아갈 강함이 떨리는 다리에 힘을 실어준다.
너의 현실은 나의 허상에 있어서 눈이 부신 환상이다.
그것만을 믿고 거짓된 서약에 동의를 한 나는, 모르는 새에 했다 하더라도 변명할 수 없는 몸이겠지.
"부정하지 않네?"
"뭐... 그렇다고 할까. 너를 만난건 행운이라 생각해."
"......"
"왜 그렇게 보는거지."
"기분 나빠?"
"아니."
"음, 호텔이 있는 쪽이랑도 다르네."
"뭐, 그렇지. 그래도 찾아보면 작고 사람 없는 옷가게들도 있어. 저기라거나."
아무 생각 없이 미쿠가 좋아한다던 옷가게의 간판이 보여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흐음, 아스카쨩. 저런 취향?"
"무슨 취ㅎ....."
잠깐, 미쿠.
그게 레이스와 리본이 잔뜩 달린 소녀 취향 속옷 전문점이라는 말은 안 했잖아.
"오해다. 이건 미쿠의..."
"호오호오, 마에카와 미쿠쨩과는 속옷까지 본 사이구나. 그 브랜드를 알아내서 이 거리까지~"
"아니, 그런게 아니야. 여기는 프로덕션이랑 가까워서 그냥 걷다보니까..."
"응, 필사적인 변명 잘 들었어. 그러고보니 옷도 옷이지만 속옷도 필요하지 않을까냥? 그럼 저기도 들러볼까~ 어떻게 생각해?"
"...산다고 해도 저긴 아냐."
"그래? 사양할 필요 없는데."
"옷이나 사러가자."
"네에."
곤란해하고 있던 차에 적당한 곳이 보여서 급히 들어갔다. 미쿠는 선을 잘 지키는 편이라 농담을 하긴 해도 불편했던 적은 없었는데, 이번만큼은 그녀가 원망스러워졌다.
"어서오세요~"
"앗, 세일 중인 코너 발견. 시키쨩도 옷 하나 건져볼까나."
"그러던지."
"아스카쨩이 좋아하는 스타일은... 저기다! 온통 검은색에 찢어진거! 영어 문장과 프랑스어 문장들이 가득! 가죽치마도 있고, 망사스타킹도 있어."
"네가 더 신난 것 같군."
"그야 인형놀이하는 기분인걸. 아, 그렇지. 팔랑팔랑한 옷은, 입어보고 싶지 않아?"
"팔랑팔랑....?"
"조금만 기다려봐. 양손 무겁게 탈의실에 들어가게 해줄게?"
"협박인가..."
"그럴 리가."
여행이라면 더플백보다는 캐리어일까. 꼼꼼히 종류를 살펴본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만, 잠금장치는 있는지, 그리고 지퍼는 잘 열리는지. 이왕이면 바퀴는 네개가 달린 쪽이 좋은데. 조건을 전부 갖춘 것은 아리스토캣 그림이 크게 그려진, 꼭 미쿠나 들 것 같은 캐리어 뿐이었다. 색상은 나쁘지 않지만.... 고양이인가.
그나저나 지갑의 현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까.
카드는, 잘 모르겠다. 아버지의 명의로 된 카드니까. 쓸 수 있다면 어떻게 되는거지? 그 쪽의 아버지께 청구가 되는건가? 이 세계에서 결제된건데?
녀석은 여전히 옷구경에 빠져있고...
.....실험 삼아 하나만 시도해볼까.
"포인트카드는 있으세요?"
"아니요."
결국은, 해보기로 했다.
+1~ 과연 주사위는 아스카 아버지를 살릴 것인가 아니면 아스카를 살릴 것인가. 2표 먼저 나오는 쪽으로.
1~50 어림도 없지
51~100 ...?!
있으나마나한 화폐가치의, 있으나마나한 일상적인 아이템.
벌써 계산대까지 와버렸다. 결과는 단 둘 뿐. 자, 이 카드는 이 세계에서는 어떠한 가치가 부여되었지. 그 세계에서처럼, 세상에서 숭배받을 존재일까?
"어? 아스카쨩, 벌써 계산?"
"시, 시키. 그 손에 들린건..."
"냐하하~ 좀 많지? 어쩌다보니까 아스카쨩한테 입히면 예쁠 것 같은 드레스들이 한 코너에 몰려있었거든. 그래서 전부 가져와버렸어! 눈치 채고 도망가려는 건 아닐까 했었는데, 그건 아닌 것 같네. 얼른 영수증이랑 치마 받아. 직원분이 곤란해하시잖아? 시키쨩은 상식적이라 이런건 또 못 넘어간단 말이지~"
영수증?
.......그렇다면....
"...결제된건가요?"
"네."
대체 무슨 소리냐고 묻고 싶은 듯한 얼굴로 대답하는 직원.
카드를 도로 받고, 비닐봉투에 영수증과 함께 든 치마도 받아들었지만, 대체 뭐가 어떻게 된건지 모르겠는 쪽은 나다.
존재하는 카드번호? 이 쪽의 나도 아버지께 카드를 받았던걸까. 카드칩과 번호같은건 같을테고. 그런데 죽은 딸의 카드를 정지하지 않고 그대로 둔건가. 처분하지 못하고, 이제는 아버지가 쓰고 있는건가.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만....
"오래 걸려."
"...저기, 시키."
"그 카드, 됐네?"
"........"
"이 쪽의 아스카쨩도 같은 카드를 쓰고 있었던걸까. 뭐랄까, 기묘하네. 아니, 전말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기묘하지는 않지만... 그럼 정리하지 않았던 카드의 카드값은 이 쪽의 아스카쨩네에 청구되는걸까나?"
"그게, 그걸 잘 모르겠어. 쓰는 사람이 없는 카드를 계속 유지했던 것도, 보통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아서."
"재수 없을까봐?"
"재수가 없는 것보다는... 죽은 딸의 유품이기는 하지만, 카드는 카드잖아. 굳이 계속 유지시킬 필요는 없다는거지."
"그렇기는 해."
"....어쨌든 이 카드는 쓰지 않는 편이 좋겠어."
"만약 그 쪽 세계의 아스카쨩네에 청구된다면?"
"그럴 수가 있을까 싶은데. ....행방불명된 딸의 카드에서 나간 카드값이 죽은 딸의 카드에서 나간 카드값보다는 나으려나."
"어느쪽이든 정지당하겠지만."
"....응."
사라진 사람의 취급인가....
그럴 기분은 아니었지만 우선은 눈에 보이는게 옷밖에 없었다. 그것 말고는 다음에 무엇을 해야할지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녀석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이 입을 벙긋하다가, 내 손에서 비닐봉투를 가져가고는 나를 탈의실에 밀어넣었다. 작은 면적에 비해 소름끼치게 여성스러운 문까지 닫는다. 이 문은 어째서 손잡이까지 하트 모양인건가.
...그건 그렇고 전부 '팔랑팔랑'한 것밖에는 없잖아. 그 말이 이런 뜻이었군. 가장 위에 있는 꽃 패턴이 가득한 쉬폰 드레스를 들자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이런 혼란 속에 계속 있는 것보다는 허무함을 고르는 편이 좋겠지.
허물을 벗듯이 녀석의 옷을 벗는다. 사이즈가 맞지 않는 성가신 것을 빼고는 속옷까지 전부 녀석의 것이다. 이렇게 거울로 보니 얼마나 이 상황이 우스운지 체감이 되었다. 점점 이렇게 스며드는 것일까. 이 세계에, 내가.
"어?"
"으응? 싫어? 입은거 보고 싶었는데~"
이런 옷을 평소에 입어봤어야 말이지.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온전히 내 것이 될지도 모르는게 이 옷이었지만, 거울 앞의 자신은 편안한 표정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별로 상관은 없다만."
그래, 그래도 별 상관은 없다.
".....어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아스카쨩의 냄새를 맡고 싶어."
이건 또 뭔 소리야.
"응응. 냄새를 맡고 싶어. 전지전능하지 못한 아스카쨩이지만, 그래도 말에는 힘이 있다잖아? 그러니까 이렇게 말하면 정말로 이루어질지도~"
"아니, 냄새를 맡아서 뭐하게?"
"카페에 가면 진한 커피향이 나잖아? 그렇게 좋은 공간에 있는데 모든 감각으로서 느끼지 못하면 손해란 말이지. 사실은 인형놀이가 아니라 책을 블록삼아 탑을 쌓으면서 자란 시키쨩은 이런 기분이 처음이라 좀 더 진하게 취해있고 싶어. 촉감이라던가, 공간감이라던가, 향기라던가."
"그 말은 나를 인형으로 보고 있다는건가."
"Non, 다만 5살짜리 여자아이가 예쁜 프랑스인형을 손때탈까 애지중지하며 갖고 노는 그 순간만큼 이 순간을 즐기고 있단 말이야. 에스테틱은 중요한 가치니까."
"...그래, 인간은 누구나 탐미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야생의 사냥감을 쫓듯이 태어날 때부터 각인된 본능에 이끌려 여흥거리를 잔뜩 집어온건가. 그저 옷걸이가 필요했던 것 뿐이군."
"어머, 착각이야. 아스카쨩이 떠오르는 옷이 아니었다면 처음부터 들고오지 않았어. 그렇지 않으면 아스카쨩의 말대로 의미가 없잖아? 칭찬으로 듣지. 냐하~ 고마워 아스카쨩."
"혼자 질문하고 혼자 대답하지 마."
"어째서?"
".....그렇지만, 칭찬으로 듣도록 하지. 그 대신 유희는 너 혼자만의 것이 아니란걸 유념해두는게 좋을거야."
"응?"
"전부 골라줄테니 기대하시지."
"아아, 그런거였어? 노 프라블럼. 그런데 레이스와 리본이 잔뜩 달린 앙큼한 소녀풍 속옷은 좀 피해줘."
"그러니까, 내 취향 아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