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닛곡의 연습을 끝으로 프로덕션에서의 볼일이 끝났던 나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시간은 막 노을이 산봉오리 너머로 굴러갈 무렵, 한가했지만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었다. 냉장고는 적당하고 지갑은 얇았다. 누군가는 그토록 원하는 인세 라이프를 살고 있는데 살아보니 생각보다 힘겹다.
그런 나를 붙잡은 것은 프로덕션의, 사람들. 전 직장 동료라고 하기에는 복귀를 준비 중이고 현재 직장 동료라고 하기에는 복귀를 준비 중이니까 적당히 부를 호칭이 없다. 친구, 라고 하기에는 반년도 더 넘게 보지 못한 사람끼리 친구라 부를 수 있을까. 연락이야 종종 하긴 했지만.
커피는 진한 커피와 연한 커피가 있다. 그건 사람 머리도 마찬가지라서 진한 갈색머리가 있고 연한 갈색 머리가 있다. 그렇게 말하면 다 똑같은 갈색에 연하고 진하고가 어디 있냐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보면 안다. 내 눈앞에 있으니까.
그녀들은 자신들의 스케줄이 오랜만에 공백이라고 한다. 한쪽은 레슨이 있긴 했지만 그건 나와 같은 유닛 레슨이었고, 내가 끝났을 때 같이 끝났으니 이후에 스케줄이 없다면 공백인 건 맞겠지. 아무튼, 그녀들도 나도 이후에 할 일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꼭 같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이유가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는 왜 발을 끊은 지 반년도 더 넘은 주점에 있는 걸까. 이젠 술도 마시면 안 되는 몸인데. 텅 빈 유리잔을 쳐다보고 있자니 여기는 튀김이 맛있다면서 먹고 싶은 튀김이 있냐고 물어왔다. 가만 있자 내가 먹으면 안 되는 튀김이, 많네. 많다. 하지만 사양이 사양으로 받아들여질 것 같지 않아 그녀가 좋아하던 것을 주문했다. 그 사이 취향이 바뀌었다면 미안하지만.
그러고 보면 새해가 밝던 날 이 멤버로 전골을 먹기도 했었네. 그때 마셨었던 맥주 맛있었는데. 또 마시고 싶지만, 그녀들 앞에 놓인 커다란 잔에 술이 부어지는 모습에 절로 군침이 돌았다. 어차피 월요일까지 할 일도 없고 마셔도 되지 않을까. 아, 의사 선생님이 화내려나.
가만 생각해보니 그녀들을 내 친구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 같았다. 나이를 숨길 필요 없었고, 그래서 다 같이 시간이 나면 나이를 숨기지 않았던 장소를 함께 들락거렸으니까. 친구라고는 할 수 없지만 술친구라고는 불러도 되려나. 물어보면 동의하겠지만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굳이 말하진 않았다.
그래, 긴장이 풀리지 않았던 그 순간에는 말할 필요 없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고로 술이란 녀석 앞에서는 마신 사람이든 마시지 않은 사람이든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처음에는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오지만 조금만 지나면 정색을 해버리니까.
처음에는 내가 복귀하고 나면의 일들에 관해 떠들었다. 화보 촬영, 꽤 괜찮지. 평생 입어보지도 못하고 입어볼 생각도 못해봤던 옷들을 입어볼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돌아오는 것도 좋고. 하지만 돌아오는 것을 따지자면 역시 그라비아 촬영이려나. 조금 부끄럽긴 했지만 그것만큼 짭짤한 것도 없었지. 다시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나조차도 볼 때마다 종종 소름이 돋는 수술 자국을 촬영하겠다는 사람은 아마 없겠지.
그녀들도 술과 안주를 즐기며 웃음꽃을 피웠다. 그런데 최근 들어 느끼는 거지만 봄이 너무 짧다. 꽃은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했고 분위기는 헬륨이 가득 찬 풍선처럼 점차 가라앉았다.
성우 활동, 분명 재밌겠지. 그것만큼 내가 원했던 것도 없었다. 내 목소리로 연기한 캐릭터가 아이들의 환호성을 받는다면 그건 마치 나를 향한 것 같기도 하고, 게다가 최근에는 성우가 직접 참여하는 이벤트도 많아져서 팬들과 직접 소통하며 인지도도 쌓고 팬들과의 유대감도 더 굳건히 할 수 있으니까.
음반 활동, 분명 보람찰 거야. 즐거운 일이겠지. 그것이야말로 아이돌의 백미이니까. 아이돌을 목표로 열심히 달리고 있는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생각한다. 다른 누구의 노래도 아닌 자신의 노래를 부른다. 지하의 좁은 스테이지도 길거리도 아닌 제대로 된 무대에서 춤춘다. 그리고 나를 좋아해주는 팬들과, 그렇지 않더라도 무대를 즐길 마음으로 가득한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 있다는 점은 정말이지 최고다.
나는 어떨지 몰라도 두 사람만큼은 즐거웠어야 할 술자리에 내 눈물이 섞여들어가니 술도 안주도 밍밍해졌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도 침울해하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을 텐데 맛도 그저 그런 음식을 먹은 침울한 사람들의 심정은 어떻게 헤아려야 할까. 봄은 어느새 가고 시린 가을이 찾아왔다. 겨울이 되기 전에 우린 발자국을 새겼다.
돌아온 집은 보일러를 틀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겨울이 무르익은 상태였다. 토끼도 동면을 하던가. 왠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잠을 자기에는 애매한 시간, 적당한 시간이 될 때까지 천장만 바라봤던 것 같다.
각오는 하고 있었다. 내 한숨과 눈물로 얼룩진 말을 안쓰럽게 쳐다보던 사람들이 날 염려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을 리가 없다. 실제로도 그런 것 같고. 그것이 신경 쓰여 레슨에 집중하지도 못했다. 그녀가 어떤 말을 하든 나는 담담히 받아들일 셈이었다.
그러나 예상 외로 그녀는 나를 꾸짖지도 격려하지도 않았다. 전혀 그리지 못하던 풍경을 제시했다. 그녀는 내일 있을 자신의 미니 라이브에 와달라고 했다. 음, 내일 미니 라이브도 있는 사람이 전혀 상관 없는 레슨을 위해 시간을 썼다는 거네. 단지 그것만으로도 굉장하다고 느꼈다. 역시 톱 중의 톱은 다르다는 걸까. 아니, 어쩌면 내 열등감일지도 모르지.
그보다, 너무 갑작스러운걸. 다음 주도 아니고 바로 내일이라니. 내일은 확실히 아무 일정도 없는 한가한 날이긴 하니 라이브를 보러 갈 수 야 있지만, 아무 일정도 없는 한가한 날이기 때문에 친구와 만나기로 한 날이기도 하다. 둘 다 해내자고 결심하면 해낼 수야 있겠지만 왠지 그러면 어느 쪽도 중간을 가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역시 한쪽을 포기해야겠네.
이럴 때는 먼저 잡은 약속을 우선시하는 게 정답이라 생각한다. 직진 깜빡이를 켠 차가 갑자기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꺾어버렸을 때 교통사고가 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무슨 바람이 분 걸까. 그녀는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았고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는 모양이다. 그런 게 있다면 바로 말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렇게 말하면 내일 라이브에서 들어야 할 말이라며 꽁꽁 감춘다. 두 손을 모아 안에 있는 것을 보이지 않게 하는 어린아이. 베시시 웃지는 않지만 따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린아이답게, 결코 고집을 꺾지 않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무슨 이야기가 나오든 담담히 받아들일 준비를 항상 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까. 갑작스런 전화에도 뚜렷한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친구를 보면 있는 것 같다. 내 사과에 그녀는 괜찮다고 말했는데 오히려 반기는 것도 같았다. 그녀는 내가 동료의 미니 라이브에 가는 것도 아이돌로 복귀하기 위한 준비의 일환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지만 딱히 맞다는 생각도 들지 않아 적당히 대꾸했다.
이런 친구를 둔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겠지. 자기보다 타인을 위한다는 것은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다. 그 호의를 아무 대가도 없이 받기만 한다는 것에 옆구리가 근질거렸고, 죄책감도 들었다. 이렇게나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왜 열심히 달리지 못하는 걸까. 어쩌면 안하는 걸지도.
그건 그렇고, 그녀는 왜 느닷없이 나를 라이브에 끌고 가려 하는 걸까.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었길래. 바로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흔히 드라마에서 보이는 스케일 큰 격려일지도. 모르겠다. 깊게 생각할 필요 없이 내일이면 알게 되겠지... 티켓은, 일반석으로 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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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해야지 어쩌겠어. 무대에 오르려면, 다시 아이돌 업계로 복귀하려면,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수록, 나는 정말로 복귀하고 싶은 걸까, 따라오는 건 엇박자 투성이의 목소리. 입 밖으로 내면 어떻게 될까 그런 의문이 돌림노래처럼 따라온다.
근데 내가 그걸 잊어버렸다.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막 떠난 버스가 아니라 제트기 수준으로 멀어져가서 달리는 것으로는 쫓아갈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붙잡은 것은 프로덕션의, 사람들. 전 직장 동료라고 하기에는 복귀를 준비 중이고 현재 직장 동료라고 하기에는 복귀를 준비 중이니까 적당히 부를 호칭이 없다. 친구, 라고 하기에는 반년도 더 넘게 보지 못한 사람끼리 친구라 부를 수 있을까. 연락이야 종종 하긴 했지만.
그녀들은 자신들의 스케줄이 오랜만에 공백이라고 한다. 한쪽은 레슨이 있긴 했지만 그건 나와 같은 유닛 레슨이었고, 내가 끝났을 때 같이 끝났으니 이후에 스케줄이 없다면 공백인 건 맞겠지. 아무튼, 그녀들도 나도 이후에 할 일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꼭 같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이유가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새해가 밝던 날 이 멤버로 전골을 먹기도 했었네. 그때 마셨었던 맥주 맛있었는데. 또 마시고 싶지만, 그녀들 앞에 놓인 커다란 잔에 술이 부어지는 모습에 절로 군침이 돌았다. 어차피 월요일까지 할 일도 없고 마셔도 되지 않을까. 아, 의사 선생님이 화내려나.
그래, 긴장이 풀리지 않았던 그 순간에는 말할 필요 없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고로 술이란 녀석 앞에서는 마신 사람이든 마시지 않은 사람이든 조심해야 한다. 그것은 처음에는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오지만 조금만 지나면 정색을 해버리니까.
그녀들도 술과 안주를 즐기며 웃음꽃을 피웠다. 그런데 최근 들어 느끼는 거지만 봄이 너무 짧다. 꽃은 겨울을 맞이할 준비를 했고 분위기는 헬륨이 가득 찬 풍선처럼 점차 가라앉았다.
음반 활동, 분명 보람찰 거야. 즐거운 일이겠지. 그것이야말로 아이돌의 백미이니까. 아이돌을 목표로 열심히 달리고 있는 이들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생각한다. 다른 누구의 노래도 아닌 자신의 노래를 부른다. 지하의 좁은 스테이지도 길거리도 아닌 제대로 된 무대에서 춤춘다. 그리고 나를 좋아해주는 팬들과, 그렇지 않더라도 무대를 즐길 마음으로 가득한 사람들을 즐겁게 할 수 있다는 점은 정말이지 최고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데, 어째서 나는, 그 두 개만큼은 하고 싶지 않은 걸까.
난, 정말로 아이돌이 하고 싶은 걸까. 그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걸까.
돌아온 집은 보일러를 틀어놓지 않았기 때문에 겨울이 무르익은 상태였다. 토끼도 동면을 하던가. 왠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잠을 자기에는 애매한 시간, 적당한 시간이 될 때까지 천장만 바라봤던 것 같다.
하지만 봄도, 여름도, 가을도 끝난다. 겨울도 반드시 끝난다. 그러면 새싹은 다시 핀다는 것을, 언제나처럼 약을 먹고 잠들어버린 나는 모르고 있었다.
누군가가 쳐다본다는 건 그 사람이 날 염려한다 하는 것이라 해도 영 달갑지가 않네. 레슨이 끝나면 곧장 돌아가려 했다. 그런 나를 붙잡은 것은 레슨 내내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던 그녀였다.
그러나 예상 외로 그녀는 나를 꾸짖지도 격려하지도 않았다. 전혀 그리지 못하던 풍경을 제시했다. 그녀는 내일 있을 자신의 미니 라이브에 와달라고 했다. 음, 내일 미니 라이브도 있는 사람이 전혀 상관 없는 레슨을 위해 시간을 썼다는 거네. 단지 그것만으로도 굉장하다고 느꼈다. 역시 톱 중의 톱은 다르다는 걸까. 아니, 어쩌면 내 열등감일지도 모르지.
이럴 때는 먼저 잡은 약속을 우선시하는 게 정답이라 생각한다. 직진 깜빡이를 켠 차가 갑자기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꺾어버렸을 때 교통사고가 날 확률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무슨 바람이 분 걸까. 그녀는 좀처럼 고집을 꺾지 않았고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무슨 이야기가 나오든 담담히 받아들일 준비를 항상 하고 있는 사람이 있으까. 갑작스런 전화에도 뚜렷한 감정 표현을 하지 않는 친구를 보면 있는 것 같다. 내 사과에 그녀는 괜찮다고 말했는데 오히려 반기는 것도 같았다. 그녀는 내가 동료의 미니 라이브에 가는 것도 아이돌로 복귀하기 위한 준비의 일환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지만 딱히 맞다는 생각도 들지 않아 적당히 대꾸했다.
그건 그렇고, 그녀는 왜 느닷없이 나를 라이브에 끌고 가려 하는 걸까.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었길래. 바로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흔히 드라마에서 보이는 스케일 큰 격려일지도. 모르겠다. 깊게 생각할 필요 없이 내일이면 알게 되겠지... 티켓은, 일반석으로 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