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걸 알람 소리로 설정해 뒀는지는 모르겠지만 765 올스타즈의 이 명곡은 나한테는 소음이나 다름없었다. 다름아닌 이게 알람소리라서 그런 거다.몇 번이고 들어도 좋은 노래라지만 그걸 몇백 번씩 듣는다고 생각해 보라고.
하여튼 일어나서 씻기는 해야 한다. 765 올스타즈라는 것도 남의 일이다. 나는 346 프로덕션의 프로듀서인걸. 머리까지 전부 다 만진 다음에 거울에 대고 할 수 있다 세 번을 외치면 출근 준비는 완료이다. 짜증나는 소리지만 M@STERPIECE가 내 잠을 깨운 건 확실하겠다.
몇 번이나 전철 카드를 찍었는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까 잔액이 떨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기도 한데. 또 몇 번이나 이 전철의 4호차를 탄 건지도 모르겠다. 아이돌을 프로듀스하는 건 익숙해지면 그렇게나 권태로운 거였나.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도 긴장감은 없다. 오늘도 무사히. 그런 생각 뿐이고 딱히 어디론가 더 나아가고 싶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순식간에 전철은 회사 근처 역에 도착한다. 많은 사람들이 황급히 뛰어서 가지만 나는 좀 여유롭다. 대부분의 회사가 9시 출근이라서 그런가. 애초에 내가 담당하는 친구가 정시 출근 같은 건 가볍게 씹어먹는 친구니까 조금 늦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인기척이 드문 회사 복도를 가로질러 내 사무실의 문을 연다.
일정이라면 내가 항상 일 주일 전에 전부 공동 일정표에 기록해 놓는다. 기록한 다음 치히로 씨도 함께 확인하는 식이다. 그리고 안즈와 키라리에게도 스케쥴을 전달하고 서로 확인한다.
P "안즈, 키라리. 미안. 내가 스케쥴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서..."
안즈 "엥? 어제 전부 공유한 거 아니었어?"
키라리 "P 쨩, 어제는 키라리한테 전화까지 했다궁? 키라리 초 초 설렜어☆"
P "에?"
치히로 "실수로 일정을 지우거나 한 건 아닐까요?"
P "아뇨. 지워지면 공유되는 일정도 같이 지워지겠죠."
치히로 "흐음..."
안즈 "뭐 딱히 상관없지 않아? 우리가 알면 됐지."
키라리 "P 쨩. 역시 너무 피곤했던 걸까나?"
P "끙... 그랬던 걸까."
일정이 사라졌다. 어제가 기억나지 않는다. 과로 등으로 인해서 기억이 완전히 날아가 버리는 일은 다반사라지만 나는 카페인을 과다섭취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늦잠을 잤으면 잤지 잠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련의 일들은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프로듀스를 하면서 이런 적이 있었나. 있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P "그래. 일단 가자."
안즈 "에에... 이럴 땐 '좀 쉬어야겠어. 다들 쉬자.'라고 말할 때가 아냐?"
P "무슨 소리야. 빨리 가자."
키라리 "안즈쨩 오늘도 열심히 하자니이☆"
12:00 PM, 방송국
P키라리 ""안녕하세요!""
안즈 "안녕... 하세요..."
PD "하하. 여전히 의욕 없구만 안즈 쨩."
안즈 "진심으로 나가면 진심이니까 걱정 마십쇼-"
P "예의바르게 해야지!"
PD "예이 예이. 그럼 안키라 둘만 믿겠다구."
키라리 "준비 오케이~ 키라리 기대돼 기대돼☆"
F "순서대로 리허설 가겠습니다~"
P "네!"
12:40 PM, 리허설 중
L O V E 큐트큐트 안즈쨩☆
제대로 할 때는 제대로인지 느낌은 괜찮다. 다만 날아가 버린 어제의 기억이 심하게 신경쓰인다. 일을 정말로 열심히 한 거라면 그건 프로듀서로서 영광의 상처 비스무리한 거겠지만 일정도 날아가 버리고... 생각이 지나친가. 그냥 내가 실수를 한 걸로 치면 되는 건데.
여전히 관객들의 얼굴들은 판에 박은 것처럼 똑같다. 내 기억 속에 있는 이미지처럼 말이다. 긴 핫피를 입거나 머리띠를 매거나 한 채로 중무장을 하고 들어오는 팬, 방송국 앞에서 나눠 주는 케미컬 라이트를 들고 있는 평상복의 관객, 평상복에 탄띠도 없지만 무언가 범상치 않은 포스를 내뿜는 팬까지. 정상적인 관객 구성이다. 키라리도 안즈도 팬들을 제대로 봐 주고 있는 것 같고 방송은 순조롭게 될 것 같았다.
PD "자 그럼 방송 시작합니다 3, 2, (1!)"
안즈와 키라리는 마지막에서 세 번째 순서. 대기실에 가 보니까 안즈는 또 지쳤는지 소파에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키라리 "안즈쨩, 역시 피곤해 보인다니이."
P "그러는 너도..."
키라리는 언제나 하이텐션인 것 같지만 잘 보면 지치거나 텐션이 낮아지는 징후가 보이는데 바로 지금에 해당했다. 입술이 살짝 일직선이 되고 전체적으로 앞쪽으로 모여 있던 얼굴 근육이 긴장을 잃고 풀어진다. 있는 대로 카메라를 클로즈업해도 알아볼 수 없는 미세한 차이였지만 내가 이 차이를 알아본 뒤로 키라리의 상태를 맞추지 못한 적이 없었다. 즉...
키라리 "P 쨩, 키라리 괜찮아!"
P "괜찮다고 말할 때가 제일 안 괜찮을 때라구."
스튜디오의 음향이 쿵쿵 울리고 있었다. 여가수의 높은 목소리가 관중들의 환호성에 섞여들어갔다.
키라리 "......"
그리고 지금. 언제나 수다스럽던 키라리가 말줄임표를 띄우는 순간.
키라리 "키라리 있지, 오늘 아침부터 쭉 이상했엉."
P "이상... 했다고?"
키라리 "아침에 일어났는데 머리가 어질~ 했던 것도 있고, 무엇보다..."
키라리 "어제 일이 전혀 기억이 안 난다니이."
P "...뭐?"
스튜디오의 소리가 또 들려왔다. 잘 들어보면 쌕쌕 자고 있는 안즈의 숨소리도 들렸다.
키라리 "안즈 쨩이 어제 방송에 나갔다고 했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니이. 기억이... 기억이 나지 않앙."
P "......"
다시 어제 일을 되짚어 보았다. 일어나고, 세수하고, 오늘도 무사히. 그리고 사무실에 출근해서 안즈와 키라리를... 안즈는 언제나처럼 늦게 출근하고 키라리는 창문을 열고 있고. 문제는 그 뒤의 기억이 완전히 새하얗다. 일정표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걸 보면 내가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던가 했다는 이야기인데 그랬다면 치히로 씨가 나한테 말을 해 줬겠지.
키라리랑 나는 별 일도 아닌데 놀라서는 거의 자빠질 뻔했다. 무대의상까지 다 갈아입은 안즈가 키라리랑 내 앞에 서 있었다.
안즈 "뭐야, 왤케 놀래?"
안즈도 혹시 어제의 기억이 없는 걸까. 아침에 머리가 어지러웠다고 했으니까 안즈도 기억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잠깐만. 어제 방송에 나갔었다고 말한 건 안즈였잖아.
P "안즈, 있지..."
키라리 "안즈 쨩 안즈 쨩! 슬슬 나갈 시간이다니이☆"
안즈 "...그러네. 두 차례 전이니까."
F "모로보시 씨 후타바 씨 최종 리허설 준비해 주세요!"
키라리 "P 쨩, 다녀올겡☆"
P "아니 나도 따라가야..."
키라리 "아, 그랬지!"
P "......"
이건 나중에 따로 만나서 이야기해야 하나.
03:40 PM, 스튜디오
안즈와 키라리의 순서는 저 뒤 쪽. 그리고 이번에는 무대 의상까지 입고 하는 최종 리허설이다. 하지만 난 아까부터 무대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앗다. 무대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계속해서 찜찜한 느낌만이 남아 있었다. 키라리는 왜 갑자기 말을 돌린 걸까. 안즈는 그러면 어제 일어난 일을 알고 있었던 걸까. 애초에 어제 일어난 일이 뭔지 모르지만 어제 아무런 일도 없었다면... 어제를 기억하는 건 무슨 소용인가.
L O V E 해피해피 키라리!
안즈는 언제 자고 있었냐는 듯이 활발하게 무대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문제는 없다. 방송국 사람들도 뉴스도 아무런 일이 없었다면 어제는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이라고 봐야 했다. 단지 나와 키라리가 기억을 하지 못했던 것일 뿐 내가 프로듀스를 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단지 찜찜한 것이고 단지 왜 그런지 알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사소한 고민을 한다고 해서 오늘 일에 지장이 생기는 것도 아닐 것이다.
F "수고하셨습니다!"
키라리 "수고 수고☆"
안즈 "헥... 이걸 또 해야 한다니..."
키라리 "프랙티스 메이크스 퍼펙트! 다니이."
안즈 "문자 쓰네 키라리..."
P "수고했어. 본 무대도 이것처럼 하면 돼."
거짓말이다. 생각을 하느라 무대를 제대로 볼 수 있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원래 둘은 괜찮았으니까 아마 괜찮을 것이다. 걱정할 것은 없을 것이다.
PD "가사 한 소절 전체를 빼먹으셨는데. 전체적으로도 멍하니 뭔가가 빠져 있는 느낌이었어요."
설마 내가 그 때 키라리한테 그냥 얼버무려서 생긴 문제인가. 다시 텐션을 회복시키고 내보냈어야 했나.
P "제가 키라리하고 말해 보겠습니다."
03:55 PM, 대기실
키라리 "......"
안즈 "본 공연 때 실수 안 하면 되지."
아니나다를까 대기실에 들어가자마자 키라리와 안즈가 그 얘기를 하고 있었다.
키라리 "P, P 쨩..."
안즈 "에헤이 참. 괜찮다니까 그러네."
P "키라리."
키라리 "P 쨩 미안해? 키라리 실수해 버려서..."
P "이런 일 쯤이야. 본방 때 실수 안 하면 돼."
하지만 무슨 실수를 했는지 전혀 본 적이 없다. 어느 가사를 실수한 건지, 그 때 안무는 어땠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전체적으로 축 처져 있었다는 평가도 나는 알 길이 없다. 안즈도 키라리도 모두 잘 했다라고, 일반적인 평가를 내릴 수밖에는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평소까지 잘 하다가 갑자기 어제의 기억을 통째로 날려버리지 않나, 공연에서 실수한 것도 완전히 놓치지 않나, 안키라 유닛을 톱까지 올린 프로듀서의 이름이 울 것이다... 별로 신경은 쓰지 않지만.
하지만 여전히 키라리의 얼굴은 텐션이 떨어진 그대로였다. 일직선이 되어버린 입, 풀어진 얼굴 근육. 항상 얼굴에 힘을 주고 있다는 건 키라리는 언제나 무리를 하고 있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안즈 "...그래. 실수하면 안즈가 어떻게든 은퇴 각을 잡을 테니까."
키라리 "안즈 쨩, 그래도 은퇴는 아직이다니☆"
안즈 "으으... 인세 생활은 멀고 멀도다..."
P "좋아. 그럼 녹화까지는 시간이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안무 좀 맞춰 보고 가자."
안즈 "에에... 몇 번이나 한 곡인데..."
P "Practice makes perfect!"
안즈 "오 발음 좋아."
그래. 이럴 때는 프로듀서인 내가 중심을 잡아 줘야 한다. 연습을 하면 어떻게든 텐션은 높아지겠지. 쓸데 없는 고민을 하느라 결국 이런 결과를 낳았지 않은가.
키라리 "그럼 그럼 P쨩, 실수한 부분 잘 봐 줘라니이."
P "응! 처음부터 끝까지 봐 주겠어!"
05:35 PM, 생방송 직전
F "5분 뒤에 안키라 들어갑니다!"
안즈 "후아... 이제 좀 잘 수 있겠군..."
연습은 모두 끝났다. 키라리가 실수했다는 부분도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연습 중에는 실수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몇십 번이나 했던 곡이니까. 아마 오늘도 잘 할 것이고, 내일도 잘 할 것이다. 내 마음은 다시 평소의 마음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오늘도 무사히, 내일도 잘 하겠지. 별 일 없을 것이다.
F "30초 뒤에 안키라 들어갑니다!"
키라리 "P 쨩! 키라리 다녀올게!"
안즈 "별 일 없을 거라구."
P "응! 다녀와!"
F "안키라 들어갑니다 5, 4, 3, (2,) (1!)"
MC "인기가 식을 줄 모릅니다. 음원 파괴자 안키라입니다. <LET's GO HAPPY!>"
26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P "젠장!"
누가 이걸 알람 소리로 설정해 뒀는지는 모르겠지만 765 올스타즈의 이 명곡은 나한테는 소음이나 다름없었다. 다름아닌 이게 알람소리라서 그런 거다.몇 번이고 들어도 좋은 노래라지만 그걸 몇백 번씩 듣는다고 생각해 보라고.
하여튼 일어나서 씻기는 해야 한다. 765 올스타즈라는 것도 남의 일이다. 나는 346 프로덕션의 프로듀서인걸. 머리까지 전부 다 만진 다음에 거울에 대고 할 수 있다 세 번을 외치면 출근 준비는 완료이다. 짜증나는 소리지만 M@STERPIECE가 내 잠을 깨운 건 확실하겠다.
몇 번이나 전철 카드를 찍었는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까 잔액이 떨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기도 한데. 또 몇 번이나 이 전철의 4호차를 탄 건지도 모르겠다. 아이돌을 프로듀스하는 건 익숙해지면 그렇게나 권태로운 거였나.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도 긴장감은 없다. 오늘도 무사히. 그런 생각 뿐이고 딱히 어디론가 더 나아가고 싶다거나 하는 것도 아니다.
순식간에 전철은 회사 근처 역에 도착한다. 많은 사람들이 황급히 뛰어서 가지만 나는 좀 여유롭다. 대부분의 회사가 9시 출근이라서 그런가. 애초에 내가 담당하는 친구가 정시 출근 같은 건 가볍게 씹어먹는 친구니까 조금 늦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인기척이 드문 회사 복도를 가로질러 내 사무실의 문을 연다.
P "좋은 아침."
키라리 "앗, P쨩! 좋은 아침 좋은 아침☆"
역시나 키라리가 아침 일찍 와서는 창문을 열고 있었다.
P "으허엄... 안즈는?"
키라리 "안즈 쨩 아직도 전화를 안 받는다니이... 키라리가 집에 가 볼까나?"
P "아니 됐어. 오늘은 아침 일찍 일도 아니구."
키라리 "P쨩 P쨩!"
P "응 왜?"
키라리 "어제 키라리, 기억나?"
P "어제?"
(와쿠와쿠)
어제.
어제...
어제도 M@STERPIECE를 들으면서 일어나고 거울을 보면서 할 수 있다, 전철 4호차, 전철 카드, 뛰어나가는 사람들. 바뀌는 일이 없는 일상이었다. 출근해서 창문을 여는 키라리를 만나고, 분명...
안즈 "안녕..."
키라리 "안즈 쨩!"
안즈 "으아아... 오늘도 일어나기 힘들었어..."
키라리 "10시까지 안 오면 찾아갈 생각이었다니이☆"
안즈 "제발 그것만은 참아 줘 키라리 ..."
분명 안즈가 늦었지만 제 발로 걸어서 출근하고.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면서 키라리가 호들갑을 떨었던 것 같다. 물론 해는 제대로 동쪽에서 떴지만 안즈가 일찍 출근하는 건 대단한 일이다.
치히로 "안즈 쨩?!"
치히로 씨도 놀라고. 하지만 안즈는 이내 사무실 한구석에 있는 토끼 쿠션에 철퍼덕 드러눕더니 게임기를 꺼내 게임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키라리 "응응 P쨩? 어제 키라리 어땠어?"
아 맞아.
P "어제... 어제... 키라리는..."
>>+3: 어제 키라리는
1. 무척 좋았어!
2. 사실 기억이 잘 안 나.
P "기억이 안 나."
키라리 "...그래?"
명백하게 나보다도 더 큰 그 덩치가 움츠러드는 것이 보인다.
키라리 "P쨩, 무리하면 안 돼?"
P "응?"
키라리 "그거야 P쨩, 요즘 계속 일만 한다니이. 키라리가 어제..."
키라리 "......"
키라리가 갑자기 말을 멈춘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이다.
P "?"
키라리 "......"
안즈 "키라리. 어제 안즈랑 같이 음악방송에 출현했었잖아."
키라리가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려는 순간 안즈가 불쑥 게임기 너머로 말했다.
키라리 "아, 아아! 그랬었어! 키라리랑 안즈 쨩, 무척 반짝거렸다니이☆"
치히로 "좋은 아침입니다!"
P "엇... 그러고 보니 치히로 씨. 늦으셨네요."
치히로 "아하하하... 네. 전철을 중간에 잘못 타서..."
P "그 꼼꼼한 치히로 씨가 예외네요."
이 사람은 센카와 치히로 씨. 언제나 성분 불명의 에너지 드링크를 들고 오는데 그 드링크가 효과 하나는 죽이는... 어시스턴트보다는 약사에 가까운 사람이다. 물론 내가 받은 느낌이 그렇다는 얘기고 실제로는 사무 일을 도맡아서 하니까 나한테는 무척 중요한 사람이다.
치히로 "오늘따라 뭔가 어질어질해서..."
키라리 "에에? 치히로도 그랬어?"
치히로 "그랬다니 뭔가요?"
키라리 "키라리도 오늘 아침에, 피잉 하고 살짝 어지러웠어."
안즈 "아, 그거 안즈도."
키라리 "안즈 쨩, 그거 저혈압이 아닐까나?"
안즈 "그러는 키라리도 어디 몸이 안 좋은 거 아냐?"
치히로 "병원에 가 봐야 할까요?"
안즈 "에에... 안즈 귀찮은데..."
키라리 "키라리들은 아이돌이니까 몸이 재산이다니이."
치히로 "흐음..."
P "좋아. 그러면 가볍게 검사를 받고 레슨 가 보도록 하자."
치히로 "네? 레슨요?"
P "어, 아닌가요?"
치히로 "날짜를 보세요."
P "날짜..."
생각해 보니까 오늘이 언제인지도 확인하지 않고 왔다. 물론 스케줄이야 휴대폰에 전부 저장되어 있으니까 확인만 하면 되지만... 어디 보자. 오늘이...
P "8월 22일."
치히로 "프로듀서님도 참. 22일에는 음악방송 출연이 있다고요?"
P "음악 방송이라. 어제 했는데요?"
치히로 "네. 안즈 쨩이랑 키라리 쨩, 요즘 잘 팔리는걸요? 프로듀서님이 따온 일이잖아요."
나도 참. 일에 파묻혀서 살다 보니까 별 걸 다 까먹는 모양이다.
키라리 "안즈 쨩, 모두 안즈 쨩을 기다리고 있다구?"
모두가 안즈를 기다리고 있다. 맞는 말이다. 나름 잘 팔리는 아이돌인 것도 맞고 함부로 변장 없이 출근했다간 금방 인파에 휩쓸리기 십상인 것도 맞다. 하지만 뭔가가 안즈에게는 있다. 똑같이 출근을 하더라도 모두가 안즈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무엇을 하더라도.
안즈 "뭔 소리야... 그네들은 그냥 앞에서 여자애가 춤추기만 하면 되거든..."
P "그 사람들은,"
키라리 "그 사람들은 안즈 쨩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다니이."
안즈 "......"
키라리 "안즈 쨩. 안즈 쨩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오늘도 텐션 채워서 가는거양!"
안즈 "...알았어..."
P "키라리."
키라리 "키라리 잘 했지 P쨩?"
안즈 "멋진 말 할 기회 뺏겨서 아쉽겠수다."
P "요 녀석이."
안즈 "으아악! 상사에 의한 폭력이다!"
치히로 "슬슬 가실 시간이네요."
P "에?"
치히로 "녹화가 오후 4시니까요. 지금 안 가면..."
나는 황급히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8월 22일 일정. 오후 4시에...
>>+3: 일정표에는
1. 음악방송 녹화 4시
2. 음악방송 녹화 6시
3. 아무 것도 없다
일정이라면 내가 항상 일 주일 전에 전부 공동 일정표에 기록해 놓는다. 기록한 다음 치히로 씨도 함께 확인하는 식이다. 그리고 안즈와 키라리에게도 스케쥴을 전달하고 서로 확인한다.
P "안즈, 키라리. 미안. 내가 스케쥴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서..."
안즈 "엥? 어제 전부 공유한 거 아니었어?"
키라리 "P 쨩, 어제는 키라리한테 전화까지 했다궁? 키라리 초 초 설렜어☆"
P "에?"
치히로 "실수로 일정을 지우거나 한 건 아닐까요?"
P "아뇨. 지워지면 공유되는 일정도 같이 지워지겠죠."
치히로 "흐음..."
안즈 "뭐 딱히 상관없지 않아? 우리가 알면 됐지."
키라리 "P 쨩. 역시 너무 피곤했던 걸까나?"
P "끙... 그랬던 걸까."
일정이 사라졌다. 어제가 기억나지 않는다. 과로 등으로 인해서 기억이 완전히 날아가 버리는 일은 다반사라지만 나는 카페인을 과다섭취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늦잠을 잤으면 잤지 잠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련의 일들은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프로듀스를 하면서 이런 적이 있었나. 있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P "그래. 일단 가자."
안즈 "에에... 이럴 땐 '좀 쉬어야겠어. 다들 쉬자.'라고 말할 때가 아냐?"
P "무슨 소리야. 빨리 가자."
키라리 "안즈쨩 오늘도 열심히 하자니이☆"
12:00 PM, 방송국
P키라리 ""안녕하세요!""
안즈 "안녕... 하세요..."
PD "하하. 여전히 의욕 없구만 안즈 쨩."
안즈 "진심으로 나가면 진심이니까 걱정 마십쇼-"
P "예의바르게 해야지!"
PD "예이 예이. 그럼 안키라 둘만 믿겠다구."
키라리 "준비 오케이~ 키라리 기대돼 기대돼☆"
F "순서대로 리허설 가겠습니다~"
P "네!"
12:40 PM, 리허설 중
L O V E 큐트큐트 안즈쨩☆
제대로 할 때는 제대로인지 느낌은 괜찮다. 다만 날아가 버린 어제의 기억이 심하게 신경쓰인다. 일을 정말로 열심히 한 거라면 그건 프로듀서로서 영광의 상처 비스무리한 거겠지만 일정도 날아가 버리고... 생각이 지나친가. 그냥 내가 실수를 한 걸로 치면 되는 건데.
PD "좋습니다. 관객들 입장시킬게요!"
P "휴우..."
여전히 관객들의 얼굴들은 판에 박은 것처럼 똑같다. 내 기억 속에 있는 이미지처럼 말이다. 긴 핫피를 입거나 머리띠를 매거나 한 채로 중무장을 하고 들어오는 팬, 방송국 앞에서 나눠 주는 케미컬 라이트를 들고 있는 평상복의 관객, 평상복에 탄띠도 없지만 무언가 범상치 않은 포스를 내뿜는 팬까지. 정상적인 관객 구성이다. 키라리도 안즈도 팬들을 제대로 봐 주고 있는 것 같고 방송은 순조롭게 될 것 같았다.
PD "자 그럼 방송 시작합니다 3, 2, (1!)"
안즈와 키라리는 마지막에서 세 번째 순서. 대기실에 가 보니까 안즈는 또 지쳤는지 소파에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키라리 "안즈쨩, 역시 피곤해 보인다니이."
P "그러는 너도..."
키라리는 언제나 하이텐션인 것 같지만 잘 보면 지치거나 텐션이 낮아지는 징후가 보이는데 바로 지금에 해당했다. 입술이 살짝 일직선이 되고 전체적으로 앞쪽으로 모여 있던 얼굴 근육이 긴장을 잃고 풀어진다. 있는 대로 카메라를 클로즈업해도 알아볼 수 없는 미세한 차이였지만 내가 이 차이를 알아본 뒤로 키라리의 상태를 맞추지 못한 적이 없었다. 즉...
키라리 "P 쨩, 키라리 괜찮아!"
P "괜찮다고 말할 때가 제일 안 괜찮을 때라구."
스튜디오의 음향이 쿵쿵 울리고 있었다. 여가수의 높은 목소리가 관중들의 환호성에 섞여들어갔다.
키라리 "......"
그리고 지금. 언제나 수다스럽던 키라리가 말줄임표를 띄우는 순간.
키라리 "키라리 있지, 오늘 아침부터 쭉 이상했엉."
P "이상... 했다고?"
키라리 "아침에 일어났는데 머리가 어질~ 했던 것도 있고, 무엇보다..."
키라리 "어제 일이 전혀 기억이 안 난다니이."
P "...뭐?"
스튜디오의 소리가 또 들려왔다. 잘 들어보면 쌕쌕 자고 있는 안즈의 숨소리도 들렸다.
키라리 "안즈 쨩이 어제 방송에 나갔다고 했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니이. 기억이... 기억이 나지 않앙."
P "......"
다시 어제 일을 되짚어 보았다. 일어나고, 세수하고, 오늘도 무사히. 그리고 사무실에 출근해서 안즈와 키라리를... 안즈는 언제나처럼 늦게 출근하고 키라리는 창문을 열고 있고. 문제는 그 뒤의 기억이 완전히 새하얗다. 일정표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걸 보면 내가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던가 했다는 이야기인데 그랬다면 치히로 씨가 나한테 말을 해 줬겠지.
키라리 "그래서 P 쨩이 기억이 안 난다고 했을 때 있지, 키라리 조금 놀랐어."
P "...미안..."
키라리 "P 쨩도, 기억이 안 나는 거야?"
P "......"
>>+3: 뭐라고 말해야 할까?
1. 응. 나도 기억이 안 나.
2.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닐 거야.
키라리 "역시 이상하지 이상하지?"
P "그러게. 하지만..."
안즈 "하지만 뭐?"
키라리랑 나는 별 일도 아닌데 놀라서는 거의 자빠질 뻔했다. 무대의상까지 다 갈아입은 안즈가 키라리랑 내 앞에 서 있었다.
안즈 "뭐야, 왤케 놀래?"
안즈도 혹시 어제의 기억이 없는 걸까. 아침에 머리가 어지러웠다고 했으니까 안즈도 기억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잠깐만. 어제 방송에 나갔었다고 말한 건 안즈였잖아.
P "안즈, 있지..."
키라리 "안즈 쨩 안즈 쨩! 슬슬 나갈 시간이다니이☆"
안즈 "...그러네. 두 차례 전이니까."
F "모로보시 씨 후타바 씨 최종 리허설 준비해 주세요!"
키라리 "P 쨩, 다녀올겡☆"
P "아니 나도 따라가야..."
키라리 "아, 그랬지!"
P "......"
이건 나중에 따로 만나서 이야기해야 하나.
03:40 PM, 스튜디오
안즈와 키라리의 순서는 저 뒤 쪽. 그리고 이번에는 무대 의상까지 입고 하는 최종 리허설이다. 하지만 난 아까부터 무대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앗다. 무대와 아무런 상관이 없었지만 계속해서 찜찜한 느낌만이 남아 있었다. 키라리는 왜 갑자기 말을 돌린 걸까. 안즈는 그러면 어제 일어난 일을 알고 있었던 걸까. 애초에 어제 일어난 일이 뭔지 모르지만 어제 아무런 일도 없었다면... 어제를 기억하는 건 무슨 소용인가.
L O V E 해피해피 키라리!
안즈는 언제 자고 있었냐는 듯이 활발하게 무대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문제는 없다. 방송국 사람들도 뉴스도 아무런 일이 없었다면 어제는 아무런 일이 없었던 것이라고 봐야 했다. 단지 나와 키라리가 기억을 하지 못했던 것일 뿐 내가 프로듀스를 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단지 찜찜한 것이고 단지 왜 그런지 알고 싶을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사소한 고민을 한다고 해서 오늘 일에 지장이 생기는 것도 아닐 것이다.
F "수고하셨습니다!"
키라리 "수고 수고☆"
안즈 "헥... 이걸 또 해야 한다니..."
키라리 "프랙티스 메이크스 퍼펙트! 다니이."
안즈 "문자 쓰네 키라리..."
P "수고했어. 본 무대도 이것처럼 하면 돼."
거짓말이다. 생각을 하느라 무대를 제대로 볼 수 있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원래 둘은 괜찮았으니까 아마 괜찮을 것이다. 걱정할 것은 없을 것이다.
P "네!"
03:50 PM, 무대 뒤편
P "무슨 일이시죠?"
PD "그... 모로보시 씨가 방금 무대에서 실수를 크게 하셨는데 괜찮을까요?"
P "네?"
PD "가사 한 소절 전체를 빼먹으셨는데. 전체적으로도 멍하니 뭔가가 빠져 있는 느낌이었어요."
설마 내가 그 때 키라리한테 그냥 얼버무려서 생긴 문제인가. 다시 텐션을 회복시키고 내보냈어야 했나.
P "제가 키라리하고 말해 보겠습니다."
03:55 PM, 대기실
키라리 "......"
안즈 "본 공연 때 실수 안 하면 되지."
아니나다를까 대기실에 들어가자마자 키라리와 안즈가 그 얘기를 하고 있었다.
키라리 "P, P 쨩..."
안즈 "에헤이 참. 괜찮다니까 그러네."
P "키라리."
키라리 "P 쨩 미안해? 키라리 실수해 버려서..."
P "이런 일 쯤이야. 본방 때 실수 안 하면 돼."
하지만 무슨 실수를 했는지 전혀 본 적이 없다. 어느 가사를 실수한 건지, 그 때 안무는 어땠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전체적으로 축 처져 있었다는 평가도 나는 알 길이 없다. 안즈도 키라리도 모두 잘 했다라고, 일반적인 평가를 내릴 수밖에는 없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평소까지 잘 하다가 갑자기 어제의 기억을 통째로 날려버리지 않나, 공연에서 실수한 것도 완전히 놓치지 않나, 안키라 유닛을 톱까지 올린 프로듀서의 이름이 울 것이다... 별로 신경은 쓰지 않지만.
키라리 "......"
P "괜찮다니깐."
나는 키라리의 등을 팍 쳤다. 기다란 다리와 함께 허리도 쫙 펴졌다.
P "설령 본방 때 실수한다고 하더라도..."
키라리 "키라리 있지."
P "...응?"
키라리 "키라리가 안즈 쨩이랑 데뷔할 때부터, 안즈 쨩한테 말한 게 있다니이."
P "응. 분명..."
키라리 "'실수해도 괜찮다니. 다음부터 잘 하면 괜찮 괜찮☆' 이라고."
키라리 "그런데 오늘 키라리 조금 이상했어."
키라리 "...실수하면 안 된다고."
키라리 "실수하면 안즈 쨩도 P 쨩도 모두 실망할 거라고 생각했어."
P "키라리..."
키라리 "아하하, 키라리 오늘 왜 이러는 걸까나... 안즈 쨩이랑 즐겁게 해피해피하게 가자니☆"
하지만 여전히 키라리의 얼굴은 텐션이 떨어진 그대로였다. 일직선이 되어버린 입, 풀어진 얼굴 근육. 항상 얼굴에 힘을 주고 있다는 건 키라리는 언제나 무리를 하고 있다는 뜻일지도 몰랐다.
안즈 "...그래. 실수하면 안즈가 어떻게든 은퇴 각을 잡을 테니까."
키라리 "안즈 쨩, 그래도 은퇴는 아직이다니☆"
안즈 "으으... 인세 생활은 멀고 멀도다..."
P "좋아. 그럼 녹화까지는 시간이 있으니까 마지막으로 안무 좀 맞춰 보고 가자."
안즈 "에에... 몇 번이나 한 곡인데..."
P "Practice makes perfect!"
안즈 "오 발음 좋아."
그래. 이럴 때는 프로듀서인 내가 중심을 잡아 줘야 한다. 연습을 하면 어떻게든 텐션은 높아지겠지. 쓸데 없는 고민을 하느라 결국 이런 결과를 낳았지 않은가.
키라리 "그럼 그럼 P쨩, 실수한 부분 잘 봐 줘라니이."
P "응! 처음부터 끝까지 봐 주겠어!"
05:35 PM, 생방송 직전
F "5분 뒤에 안키라 들어갑니다!"
안즈 "후아... 이제 좀 잘 수 있겠군..."
연습은 모두 끝났다. 키라리가 실수했다는 부분도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연습 중에는 실수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몇십 번이나 했던 곡이니까. 아마 오늘도 잘 할 것이고, 내일도 잘 할 것이다. 내 마음은 다시 평소의 마음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오늘도 무사히, 내일도 잘 하겠지. 별 일 없을 것이다.
F "30초 뒤에 안키라 들어갑니다!"
키라리 "P 쨩! 키라리 다녀올게!"
안즈 "별 일 없을 거라구."
P "응! 다녀와!"
F "안키라 들어갑니다 5, 4, 3, (2,) (1!)"
MC "인기가 식을 줄 모릅니다. 음원 파괴자 안키라입니다. <LET's GO HAPPY!>"
시작했다.
>>+3: P는 공연이 끝나고 나서
1. 고깃집으로 간다
2. 라멘집으로 간다
음.... 2로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