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덥다며 투덜거리는 '검은색'의 혼잣말을 빼면 서로 말 없이 걸어가기를 몇 분. 극장에 도착한 '검은색'과 로코는 따로 떨어져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미즈키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여러 아이돌들에게 물어본 결과, 미즈키가 극장에 다녀간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둘은 미즈키를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극장의 어딘가에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면 벌써 극장을 나갔을 공산이 컸다. 오늘의 스케쥴이 취소된 탓에, 극장에서 나가서 어디로 향하건간에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일은 없었으니 극장을 나서는 데 거리낌 또한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다른 아이돌들의 증언에 따르면 미즈키가 극장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시간은 자신들이 도착하기 얼마 전이었기 때문에 지금 나가서 찾는다면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둘은 생각했다.
하지만 만일의 경우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검은색'과 로코는 서로가 찾아봤을 것이라고 생각해 서로 찾아보지 않았기에 그녀들이 탐색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던 극장의 무대로 가서 그곳을 같이 찾아보기로 했다.
"야! 미즈키! 너 여기 있냐?"
텅 빈 극장 내부에 '검은색'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만약 '검은색'과 미즈키가 만화 속의 등장 인물이라면 자신의 프로듀서에게서 상처를 받은 한 아이돌이 텅 빈 무대 위에 앉아서 빈 의자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고, 프로듀서가 그 아이돌을 찾아온다는 다소 클리셰같은 상황이 연출될 법 했지만, 그런 만화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으와아아아아아아!"
그 대신, 무대 뒤편에서 로코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왜! 무슨 일 있어?" '검은색'이 황급히 무대 뒤편으로 향하며 외쳤다.
"ro... roco의 art가..."
'검은색'의 눈에 보인 것은 매우 놀란 눈으로 허탈한 표정을 지은 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고 있던 로코와, 무언가를 구성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산산히 부서지고 찌그러진 채 서로를 연결했을 못들을 드러내며 자신이 어떠한 구조물이었다는 것을 겨우 주장하고 있는,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합판과 크고 작은 깡통들의 집합체였다.
"심하네."
'검은색'이 느낀, 있는 그대로의 감상이었다. 이건 좋지 않았다. 로코가 자신의 담당 아이돌은 아니었기에 별로 신경 쓰고 있지 않았던 '검은색'이었지만, 그래도 이 일 때문에 로코가 안 좋은 모습을 보인다면 다른 아이돌들도 덩달아 텐션이 내려갈 수 있었고 그것은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아이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코의 작품이었던 것에 다가가던 '검은색'의 눈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포착되었다.
"야, 로코."
"왜... 왜요?" 로코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네 작품에 쓰였던 거냐?"
'검은색'이 손으로 집어 들어올린 것은 한 장의 트럼프 카드였다. 흑백의 광대가 그려진, 조커 카드. 이상하게도 그 카드는 온전한 형체를 유지한 채 잔해 위에 놓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놓아둔 것처럼.
"아뇨. roco는 이 art에 그런 건 use하지 않았어요. 다음 stage에 decorate하려고 했던 회심의 masterpiece였는데..."
"그럼 이건, 누가 일부러 놔둔 거겠구만."
짐작가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런 일을 할 이유는 없었다.
"대체 뭔 상황이야, 이게..." '검은색'이 카드를 살펴보며 말했다.
"어? 잠깐만. 이거 뒤에 뭐가 써 있는데?"
일반적인 트럼프 카드와는 달리, 그 카드의 뒷면에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대신, 누군가가 써놓은 것으로 추정된 글이 적혀 있었다.
#23
그 카드에는 '놀래켜서 죄송합니다. 뒤를 돌아봐주세요.' 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검은색'이 카드의 지시대로 뒤를 돌아보자, 그녀들이 찾아다니던 사람이 벽면에 기대어 선 채 그림자 속에 숨어있었다.
"니가 이랬냐?"
'검은색'이 표정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때까지도 자신의 작품이었던 것을 보며 비탄에 빠져 있던 로코는, 그제서야 그곳에 자기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요. 그것을 모아놓은 것은 제가 맞지만, 부순 것은 제가 아닙니다." 미즈키가 앞으로 걸어나오며 말했다.
"그럼 설명해 봐." 하지만 '검은색'은 미즈키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데?"
"실은, 저도 어떻게 된 건지 알지 못합니다. ……우물쭈물." 미즈키가 그녀 특유의 말투로 말을 흐렸다. "조용한 곳에서 생각을 하고 싶어 이곳에 왔을 때는 이미 산산히 부서져 있었습니다."
증거는 없었지만, 정말로 그녀가 한 짓이었다면 단순한 메세지 하나 때문에 자신과 연관지을 수 있는 트럼프 카드를 사용하는 불필요한 짓은 하지 않을 것 같았기에 '검은색'은 일단 그녀의 말을 믿어주기로 했다.
하지만 트럼프 카드에 대한 의문점은 아직 남아있었다.
"이건 뭔데, 그럼?"
"아, 그건 부서진 한다 씨의 작품을 한데 모으던 도중 두 분이 오시는 소리를 듣고 극적인 등장을 연출해보고자… 놀라셨나요?"미즈키가 대답했다.
"당연히 놀랐지!"
'검은색'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녀의 행동이 다소 엉뚱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검은색'은 그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하곤 했지만, 가끔은 지금처럼 '검은색'의 상식을 초월하거나 어이를 상실하게 할 때가 있었다.
"그럼, roco의 art는 mizuki가 이렇게 만든 게 아니라는 거죠?"
"네. 한다 씨의 작품이 이렇게 된 것은 정말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미즈키는 언제나의 무표정을 유지하며 말했지만, 그녀의 말에서는 유감스러운 감정이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알겠어요. 그거면 됐어요." 로코가 고개를 수그리며 말했다. "정말 오래 걸렸는데…"
미즈키와 로코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검은색'은 이 일의 뒷처리를 고민하고 있었다. 미즈키를 찾은 것은 좋았지만, 일이 늘어나버려서 지금은 그렇게 좋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사과는 나중에 하고 우선 로코부터 신경써야 할 것 같았지만, 가면을 쓰고 아첨하는 것이 익숙한 '검은색'이라도 그런 일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일단 이거나 좀 치울까." 그래서, 그녀는 귀찮은 일을 먼저 해결한 다음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기로 했다.
#24
"아, 맞다!" 로코가 말했다.
방금 전까지도 침울해져있던 로코였지만, 평소대로의 쾌활한 자칭 아티스트로 돌아온 그녀에게서는 자신의 작품이 파괴되었을 때 그녀가 보였던 절망과 슬픔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눈에서는 도전 정신으로 감싸인, 예술가의 열망을 닮은 빛이 보이고 있었다.
로코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도 전에 부서져버진 자신의 작품을 보았을 때, 그녀는 당연스럽게도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이미 없어진 작품을 재현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작품을 다시 만들어낼 수는 있었다. 그녀가 미즈키를 찾은 이유도 그녀의 도움을 받아 더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녀에게 존재하는 아티스트로서의 열망은 그녀를 비극적인 형상이 되어버린 작품을 보고 좌절하는 대신 그것을 뛰어넘는 작품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이겠다는 오기와 비슷한 창작의 욕구를 품도록 만들었고, 그 욕구는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 폭발하듯 맴돌며 그녀에게 영감을 주고 있었다.
때로는 파괴가 창조의 어머니가 되는 법이다.
"request하고 싶은 게 있어요, mizuki!"
"리퀘스트?"
"네!"
로코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설명 속에는 사무실에서 자신이 미즈키를 찾는 이유를 말할 때는 분명 그녀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아이디어들이 들어있었다.
"야 임마? 이거나 치우자니까? 내 말 안 들리냐?" 그런 창작의 흐름에서 빠져 있던 '검은색'이 대화를 시작한 둘을 보며 재촉했다.
"아니다. 그냥 맘대로 해라. 늦게 하건 빨리 하건 상관 없겠지. 나도 농땡이나 피울란다."
하지만 재촉도 잠시, '검은색'은 자기도 쉴 거라고 말하면서 정말로 쉴 만한 곳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렵지 않게 앉을 만한 곳을 찾아낼 수 있었고, 그녀는 그 즉시 정장 바지가 더러워지는 것 따위 상관없는 것처럼 먼지 쌓인 기자재 위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고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둘의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다.
빠르게 치워야 한다는 것처럼 말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는 둘을 재촉하지 않고 오히려 느긋하게 쉬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미즈키와 로코는 자신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방해하지 않으려는 것으로 해석했지만, 사실은 달랐다. 그녀는 그저 귀찮은 일을 미루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검은색이 재촉을 그만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검은색'은 자신이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면 저 둘이 그것을 곧장 알아차리고 자신을 도와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들이 솔선수범하는 것도 아닌데 자기가 먼저 나서서 잔해를 치우기는 귀찮아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잔해를 치우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만 미룰 수는 있었다. 그리고 귀찮은 일은 또 있었다. '검은색'은 미즈키에게 사과하고 나면 바로 사무실로 다시 돌아가야 할 처지였다. 물론 그것은 그녀가 다시 업무에 파묻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기에 오늘처럼 여러 군데에서 깨지고 기분을 잡친 그녀에게 일상적이고 귀찮은 업무들은 전혀 환영할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녀들이 먼저 대화를 시작한 것을 보고 잔해를 정리하고 미즈키에게 사과한 뒤 로코의 볼일을 해결해주고 사무실에 간다는 차례를 바꿔, 사무실에 가는 것을 늦추려고 한 것이었고 정말로 단지 그뿐이었다. 그녀의 행동이 언제나 그랬듯이, 그 사소한 행동은 그녀 자신을 위한 행동이었지 다른 사람들을 위한 행동이 전혀 아니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요. "
"roco는 magic으로 art를 express하는 것에 emphasis를 주고 싶은데, 좋은 생각이 있나요?"
"마술로 작품을 표현한다… 어려운 일이로군요."
그렇게 '검은색'이 본의아니게 배려로 가장된 농땡이를 피우고 있을 때에, 미즈키와 로코는 본격적으로 콜라보레이션의 첫 단계에 들어가고 있었다.
#25
한편, 배가 고파진 '하얀색'은 사무실 바로 아래층에 있는 타루키정으로 가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평소같았다면 바쁜 일상에 치이느라 간편하게 때웠겠지만 그 날은 유난히 스케줄표에 공백이 많았기에 여유가 있어, '하얀색'은 조금 사치를 부려보기로 했다.
사치라고 해도 고급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와 와인 한 잔을 즐기는 것이 아닌 영양이 걱정되는 편의점 도시락이나 빵으로 때우는 식사 대신 제대로 된 식사를 즐길 뿐이었다.
'하얀색'이 그런 호화로운 식사를 할 형편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모처럼 생긴 여유에 검소한 사치를 부린 이유는 일의 압박감에서 벗어나 여유를 즐기며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었을 뿐이지, 그런 고급진 식사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기도 했고 겸사겸사 신세를 지고 있는 곳의 매출을 조금이나마 올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26
"자네도 왔는가?"
'하얀색'이 한창 식사를 하던 도중, 그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사장님."
타카기 준지로. 그가 몸담은 765 프로덕션의 사장.
옆 테이블에 먹다 남은 음식이 담긴 그릇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밥을 먹던 도중 '하얀색'을 발견하고 말을 걸어온 것이리라.
식사에 열중하느라 직장 상사에게 먼저 인사하기는커녕 그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사장이 사원에게 먼저 인사하게 만들다니. '하얀색'에게 이 상황은 정말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괜찮네, 괜찮아."
물론 타카기 사장은 그런 것을 크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하얀색'에겐 상대가 자신의 실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보다 자신이 무례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상대가 괜찮을지라도,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27
"최근 일하는건 좀 어떤가?"
매우 흔한 질문이 던져졌다.
직장 상사가 흔히 던지는 질문이었지만, '하얀색'은 타카기 사장에 한해서는 질문을 던진 진의를 알 수 없었다.
타카기 사장은 그런 흔한 질문마저 진심으로 하곤 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상투적인 질문이라도 그의 입에서 나온 이상 정말로 일하는 것이 힘들지는 않은지, 불편한 점은 없는지 알아보기 위한 진솔한 질문일 가능성이 차고 넘쳤다.
하지만 '하얀색'에게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상투적인 질문이었건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본 질문이었건, '하얀색'이 취할 행동은 하나였다.
자신이 생각하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
"힘듭니다. 아이돌은 많고, 일손은 적고, 누님은 절 갈구고. 리츠코가 잘 해주고 있긴 하지만 힘들 수밖에 없죠."
"역시 그런가."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자신에게 질문한 사람이 자신이 힘든 점을 어필했을 때 불편하데 여길 것 같은 사람이었다면 '하얀색'은 상투적으로 응대하며 힘든 점을 숨겼을 것이다.
'하얀색'은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남들을 불편하게 할 만한 일은 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이 착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지만 타카기 사장은 그런 일로 불편해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이 점은 말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얀색'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래도 보람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34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theater로 가지 않았을까요?" 로코가 말했다.
"극장?"
일리 있는 말이었다.
"뭐, 가볼까."
+2 '검은색'과 로코 양은 극장에서 마카베 양을 찾을 수 있을까요?
+3 찾을 수 있었다면, 찾고 난 뒤의 상황. 찾을 수 없었다면, 극장에서 생길 일.
덥다며 투덜거리는 '검은색'의 혼잣말을 빼면 서로 말 없이 걸어가기를 몇 분. 극장에 도착한 '검은색'과 로코는 따로 떨어져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미즈키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여러 아이돌들에게 물어본 결과, 미즈키가 극장에 다녀간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둘은 미즈키를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극장의 어딘가에 숨어있는 것이 아니라면 벌써 극장을 나갔을 공산이 컸다. 오늘의 스케쥴이 취소된 탓에, 극장에서 나가서 어디로 향하건간에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일은 없었으니 극장을 나서는 데 거리낌 또한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다른 아이돌들의 증언에 따르면 미즈키가 극장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시간은 자신들이 도착하기 얼마 전이었기 때문에 지금 나가서 찾는다면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둘은 생각했다.
하지만 만일의 경우라는 것이 있었기 때문에, '검은색'과 로코는 서로가 찾아봤을 것이라고 생각해 서로 찾아보지 않았기에 그녀들이 탐색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던 극장의 무대로 가서 그곳을 같이 찾아보기로 했다.
"야! 미즈키! 너 여기 있냐?"
텅 빈 극장 내부에 '검은색'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만약 '검은색'과 미즈키가 만화 속의 등장 인물이라면 자신의 프로듀서에게서 상처를 받은 한 아이돌이 텅 빈 무대 위에 앉아서 빈 의자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고, 프로듀서가 그 아이돌을 찾아온다는 다소 클리셰같은 상황이 연출될 법 했지만, 그런 만화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으와아아아아아아!"
그 대신, 무대 뒤편에서 로코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왜! 무슨 일 있어?" '검은색'이 황급히 무대 뒤편으로 향하며 외쳤다.
"ro... roco의 art가..."
'검은색'의 눈에 보인 것은 매우 놀란 눈으로 허탈한 표정을 지은 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서고 있던 로코와, 무언가를 구성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은 산산히 부서지고 찌그러진 채 서로를 연결했을 못들을 드러내며 자신이 어떠한 구조물이었다는 것을 겨우 주장하고 있는,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합판과 크고 작은 깡통들의 집합체였다.
"심하네."
'검은색'이 느낀, 있는 그대로의 감상이었다. 이건 좋지 않았다. 로코가 자신의 담당 아이돌은 아니었기에 별로 신경 쓰고 있지 않았던 '검은색'이었지만, 그래도 이 일 때문에 로코가 안 좋은 모습을 보인다면 다른 아이돌들도 덩달아 텐션이 내려갈 수 있었고 그것은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아이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코의 작품이었던 것에 다가가던 '검은색'의 눈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포착되었다.
"야, 로코."
"왜... 왜요?" 로코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네 작품에 쓰였던 거냐?"
'검은색'이 손으로 집어 들어올린 것은 한 장의 트럼프 카드였다. 흑백의 광대가 그려진, 조커 카드. 이상하게도 그 카드는 온전한 형체를 유지한 채 잔해 위에 놓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놓아둔 것처럼.
"아뇨. roco는 이 art에 그런 건 use하지 않았어요. 다음 stage에 decorate하려고 했던 회심의 masterpiece였는데..."
"그럼 이건, 누가 일부러 놔둔 거겠구만."
짐작가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런 일을 할 이유는 없었다.
"대체 뭔 상황이야, 이게..." '검은색'이 카드를 살펴보며 말했다.
"어? 잠깐만. 이거 뒤에 뭐가 써 있는데?"
일반적인 트럼프 카드와는 달리, 그 카드의 뒷면에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대신, 누군가가 써놓은 것으로 추정된 글이 적혀 있었다.
+3 그 카드에 써 있던 글은...
음, 이거 얀데레 루트 같은데...
후, 역시 이렇게 묘사하면서 쓰기는 좀 힘드네요.
그 카드에는 '놀래켜서 죄송합니다. 뒤를 돌아봐주세요.' 라는 글이 쓰여 있었다.
'검은색'이 카드의 지시대로 뒤를 돌아보자, 그녀들이 찾아다니던 사람이 벽면에 기대어 선 채 그림자 속에 숨어있었다.
"니가 이랬냐?"
'검은색'이 표정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때까지도 자신의 작품이었던 것을 보며 비탄에 빠져 있던 로코는, 그제서야 그곳에 자기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요. 그것을 모아놓은 것은 제가 맞지만, 부순 것은 제가 아닙니다." 미즈키가 앞으로 걸어나오며 말했다.
"그럼 설명해 봐." 하지만 '검은색'은 미즈키가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데?"
"실은, 저도 어떻게 된 건지 알지 못합니다. ……우물쭈물." 미즈키가 그녀 특유의 말투로 말을 흐렸다. "조용한 곳에서 생각을 하고 싶어 이곳에 왔을 때는 이미 산산히 부서져 있었습니다."
증거는 없었지만, 정말로 그녀가 한 짓이었다면 단순한 메세지 하나 때문에 자신과 연관지을 수 있는 트럼프 카드를 사용하는 불필요한 짓은 하지 않을 것 같았기에 '검은색'은 일단 그녀의 말을 믿어주기로 했다.
하지만 트럼프 카드에 대한 의문점은 아직 남아있었다.
"이건 뭔데, 그럼?"
"아, 그건 부서진 한다 씨의 작품을 한데 모으던 도중 두 분이 오시는 소리를 듣고 극적인 등장을 연출해보고자… 놀라셨나요?"미즈키가 대답했다.
"당연히 놀랐지!"
'검은색'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녀의 행동이 다소 엉뚱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검은색'은 그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하곤 했지만, 가끔은 지금처럼 '검은색'의 상식을 초월하거나 어이를 상실하게 할 때가 있었다.
"그럼, roco의 art는 mizuki가 이렇게 만든 게 아니라는 거죠?"
"네. 한다 씨의 작품이 이렇게 된 것은 정말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미즈키는 언제나의 무표정을 유지하며 말했지만, 그녀의 말에서는 유감스러운 감정이 확실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알겠어요. 그거면 됐어요." 로코가 고개를 수그리며 말했다. "정말 오래 걸렸는데…"
미즈키와 로코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검은색'은 이 일의 뒷처리를 고민하고 있었다. 미즈키를 찾은 것은 좋았지만, 일이 늘어나버려서 지금은 그렇게 좋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사과는 나중에 하고 우선 로코부터 신경써야 할 것 같았지만, 가면을 쓰고 아첨하는 것이 익숙한 '검은색'이라도 그런 일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일단 이거나 좀 치울까." 그래서, 그녀는 귀찮은 일을 먼저 해결한 다음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기로 했다.
+3 다음 상황.
"미즈키 언니! 로코가 request하고싶은게 있어요!"
(이러쿵저러쿵)
언제 그랬냐는듯 기운을 차린듯 하다.
"아, 맞다!" 로코가 말했다.
방금 전까지도 침울해져있던 로코였지만, 평소대로의 쾌활한 자칭 아티스트로 돌아온 그녀에게서는 자신의 작품이 파괴되었을 때 그녀가 보였던 절망과 슬픔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의 눈에서는 도전 정신으로 감싸인, 예술가의 열망을 닮은 빛이 보이고 있었다.
로코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도 전에 부서져버진 자신의 작품을 보았을 때, 그녀는 당연스럽게도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이미 없어진 작품을 재현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작품을 다시 만들어낼 수는 있었다. 그녀가 미즈키를 찾은 이유도 그녀의 도움을 받아 더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녀에게 존재하는 아티스트로서의 열망은 그녀를 비극적인 형상이 되어버린 작품을 보고 좌절하는 대신 그것을 뛰어넘는 작품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이겠다는 오기와 비슷한 창작의 욕구를 품도록 만들었고, 그 욕구는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서 폭발하듯 맴돌며 그녀에게 영감을 주고 있었다.
때로는 파괴가 창조의 어머니가 되는 법이다.
"request하고 싶은 게 있어요, mizuki!"
"리퀘스트?"
"네!"
로코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설명 속에는 사무실에서 자신이 미즈키를 찾는 이유를 말할 때는 분명 그녀의 머릿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아이디어들이 들어있었다.
"야 임마? 이거나 치우자니까? 내 말 안 들리냐?" 그런 창작의 흐름에서 빠져 있던 '검은색'이 대화를 시작한 둘을 보며 재촉했다.
"아니다. 그냥 맘대로 해라. 늦게 하건 빨리 하건 상관 없겠지. 나도 농땡이나 피울란다."
하지만 재촉도 잠시, '검은색'은 자기도 쉴 거라고 말하면서 정말로 쉴 만한 곳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어렵지 않게 앉을 만한 곳을 찾아낼 수 있었고, 그녀는 그 즉시 정장 바지가 더러워지는 것 따위 상관없는 것처럼 먼지 쌓인 기자재 위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고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 둘의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다.
빠르게 치워야 한다는 것처럼 말했던 것과는 달리, 그녀는 둘을 재촉하지 않고 오히려 느긋하게 쉬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미즈키와 로코는 자신들이 이야기하는 동안 방해하지 않으려는 것으로 해석했지만, 사실은 달랐다. 그녀는 그저 귀찮은 일을 미루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검은색이 재촉을 그만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검은색'은 자신이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면 저 둘이 그것을 곧장 알아차리고 자신을 도와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들이 솔선수범하는 것도 아닌데 자기가 먼저 나서서 잔해를 치우기는 귀찮아서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잔해를 치우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만 미룰 수는 있었다. 그리고 귀찮은 일은 또 있었다. '검은색'은 미즈키에게 사과하고 나면 바로 사무실로 다시 돌아가야 할 처지였다. 물론 그것은 그녀가 다시 업무에 파묻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기에 오늘처럼 여러 군데에서 깨지고 기분을 잡친 그녀에게 일상적이고 귀찮은 업무들은 전혀 환영할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녀들이 먼저 대화를 시작한 것을 보고 잔해를 정리하고 미즈키에게 사과한 뒤 로코의 볼일을 해결해주고 사무실에 간다는 차례를 바꿔, 사무실에 가는 것을 늦추려고 한 것이었고 정말로 단지 그뿐이었다. 그녀의 행동이 언제나 그랬듯이, 그 사소한 행동은 그녀 자신을 위한 행동이었지 다른 사람들을 위한 행동이 전혀 아니었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네요. "
"roco는 magic으로 art를 express하는 것에 emphasis를 주고 싶은데, 좋은 생각이 있나요?"
"마술로 작품을 표현한다… 어려운 일이로군요."
그렇게 '검은색'이 본의아니게 배려로 가장된 농땡이를 피우고 있을 때에, 미즈키와 로코는 본격적으로 콜라보레이션의 첫 단계에 들어가고 있었다.
+2 시점 변경, 어느 쪽?
+3 그곳의 상황.
한편, 배가 고파진 '하얀색'은 사무실 바로 아래층에 있는 타루키정으로 가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평소같았다면 바쁜 일상에 치이느라 간편하게 때웠겠지만 그 날은 유난히 스케줄표에 공백이 많았기에 여유가 있어, '하얀색'은 조금 사치를 부려보기로 했다.
사치라고 해도 고급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와 와인 한 잔을 즐기는 것이 아닌 영양이 걱정되는 편의점 도시락이나 빵으로 때우는 식사 대신 제대로 된 식사를 즐길 뿐이었다.
'하얀색'이 그런 호화로운 식사를 할 형편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모처럼 생긴 여유에 검소한 사치를 부린 이유는 일의 압박감에서 벗어나 여유를 즐기며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었을 뿐이지, 그런 고급진 식사를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기도 했고 겸사겸사 신세를 지고 있는 곳의 매출을 조금이나마 올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3 다음 상황.
이, 이 창댓이 있다는 걸 잊고 있었...
"자네도 왔는가?"
'하얀색'이 한창 식사를 하던 도중, 그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사장님."
타카기 준지로. 그가 몸담은 765 프로덕션의 사장.
옆 테이블에 먹다 남은 음식이 담긴 그릇이 있는 것으로 보아 밥을 먹던 도중 '하얀색'을 발견하고 말을 걸어온 것이리라.
식사에 열중하느라 직장 상사에게 먼저 인사하기는커녕 그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사장이 사원에게 먼저 인사하게 만들다니. '하얀색'에게 이 상황은 정말로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먼저 인사드렸어야 했는데."
"괜찮네, 괜찮아."
물론 타카기 사장은 그런 것을 크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하얀색'에겐 상대가 자신의 실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보다 자신이 무례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상대가 괜찮을지라도,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3 다음 상황.
어차피 인양되어도 앵커는 달리지 않겠지만…….
이런거 누가 본다고…….
상투적인 질문 같지만, 이 분에 한해선 그런지 어떤지 진의를 읽을 수 없어..
"최근 일하는건 좀 어떤가?"
매우 흔한 질문이 던져졌다.
직장 상사가 흔히 던지는 질문이었지만, '하얀색'은 타카기 사장에 한해서는 질문을 던진 진의를 알 수 없었다.
타카기 사장은 그런 흔한 질문마저 진심으로 하곤 하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상투적인 질문이라도 그의 입에서 나온 이상 정말로 일하는 것이 힘들지는 않은지, 불편한 점은 없는지 알아보기 위한 진솔한 질문일 가능성이 차고 넘쳤다.
하지만 '하얀색'에게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상투적인 질문이었건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본 질문이었건, '하얀색'이 취할 행동은 하나였다.
자신이 생각하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
"힘듭니다. 아이돌은 많고, 일손은 적고, 누님은 절 갈구고. 리츠코가 잘 해주고 있긴 하지만 힘들 수밖에 없죠."
"역시 그런가."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자신에게 질문한 사람이 자신이 힘든 점을 어필했을 때 불편하데 여길 것 같은 사람이었다면 '하얀색'은 상투적으로 응대하며 힘든 점을 숨겼을 것이다.
'하얀색'은 착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남들을 불편하게 할 만한 일은 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이 착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지만 타카기 사장은 그런 일로 불편해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이 점은 말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얀색'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래도 보람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3 다음 상황.
그만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