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대를 향해 걸었다. 녀석은 고민도 하지 않고 테이블에 옷걸이들을 척척 쌓는다. 골라낼 것을 잡는 것도 거침없다. 그렇게 선별이 끝나고, 최종적으로 머리 속에서 승인이 난 옷들은 타인의 손을 한번 거친다. 목적이 하나뿐인 짧은 대화는 연극 대본의 마지막 한 장을 뽑아내듯이 영수증이 기계 너머에서 빠져나오며 완전히 끝이 난다.
"아스카쨩, 지금은 몇시지?"
벽 한켠의 아날로그 시계의 초침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안의 톱니바퀴가 오퍼레이션에 맞추어 돌아가듯이, 어릴 적 배운 지식이 기계의 작동원리처럼 바로 작용되어 눈에 들어온다. 헌데 왜 나에게?
"오후... 3시."
"이 가게는 몇시에 열어?"
"그건... 쇼윈도에 적혀있을까. 9시라고 되어있네. 컴플레인이라도 넣으려는건가."
"아니, 돌아오지 않아."
"....무엇을 말하려는거지?"
"치마가 든 봉투에는 영수증이 있었지. 아스카쨩의 옷들은 그렇게 구분해서 넣어줄게. 그동안 영수증을 잘 봐."
"...응."
계산대 옆의 테이블에 소지품을 올려두었다. 영수증에서 볼 것은 무엇이 있을까. 카드의 번호? 결제된 금액? 카드 소지자의 이름? 평소에는 생각도 않고 무시하던 것들인데. 지금 이 순간 신경을 쓴다고 해도 그런 것들이 중요할 리가 없다. 왜냐하면, 카드가 작동한 원리는 생각했던 것과 같을테니까. 그러니 소지자의 이름도 번호도 같을 것이다. 금액은 물론 아까 확인을 했었다.
그럼...
"......시키."
"응."
"이 영수증은...."
기계란 것들은 전부 그렇다. 정직하게 입력된 그대로의 것들을 행할 뿐이다. 그러니까 고장이 나지 않는 한 잘못된 것을 할 리는 없다.
그것들은, 그렇게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함으로서 존재의 가치를 입증한다. 그것이 기계다.
시간 또한 마찬가지다. 아날로그 시계 또한 읽는 것이 어렵지 않듯이 어째서 그렇게 디자인되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움직여. 그게 전부. 모래시계조차 할 수 있는 것을, 조금 더 정교한 장치로 옮겨두었을 뿐.
이 세상의 시계들은 시차로 인해 가리키는 방향은 다를지언정, 분단위, 초단위의 오차가 있을지언정, 주어진 만큼의 순간이 지나면 움직인다. 그것이 시간의 '사이'.
그러나 어찌된건지, 시키의 영수증과 나의 영수증에는 굉장한 사이가 있었다.
"이 영수증은 다른 시간대에서 프린트된걸로 되어있어. JST와 다른 표준시간의 차이 같은게 아니야. 이건..."
배터리 바의 붉은 선은 세계를 이어주는 실 따위가 아니라 가까운 녹다운을 의미한다. [서비스 없음]이라는 하얀 글씨가 선명했다.
잠금을 해제한다. 그러나 내게 통제권은 없다. 남의 집 문의 잠금을 푼다고 해도 그 집안의 사정을 속속들이 파헤쳐볼 수는 없듯이. 무엇이 있는지 불을 켜고 물건 하나하나를 확인해야하듯이. 그런 긴밀한 수색작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정밀한 기계장치는 어두웠다. 화면의 밝기조차 다른 태양의 빛을 받아 조절되어 있기에 그런걸까.
"라인의 전화라면 할 수 있을까?"
"......아니. 이전에도 이것저것 살펴보았지만... 메세지만이 보내졌다고 뜰 뿐이야. 그래서 음성녹음을 남겨두었지."
"메세지가 보내졌다면, '읽음'은?"
"그야 표시될 리가 없잖아. 보내졌다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보내지지 않은 걸테지."
"응, 확실히 '읽음' 표시는 나오지 않았어. 하지만 보내졌다고 나온다면, 보내진게 분명해. 마치 이 카드의 정보처럼."
".....그 메세지의 알림을 보고도 프로듀서는, 아예 읽지조차 않았다는 건가?"
"알림은 왔을거야. 하지만 읽지 못한거지. 사람은 잠을 자면서 스마트폰을 확인할 수는 없잖아?"
"......."
"프로듀서는 라인의 알림은 커녕, 아침의 알람도 듣지 못한거야. 왜냐! 그 곳은 아직 아침일테니. 영수증의 시간은 틀리지 않았어. 오히려 JST의 표준을 따르고 있겠지. '그 곳'으로 얘기하자면 말이야. 아스카쨩은 그러니까, 공간 뿐만 아니라 시간의 흐름마저 거스르는 전이를 하고 있던게 아닐까? 공간의 흐름이 흐트러지면서 그 쪽의 시간에 문제가 생겼다거나, 아스카쨩이 순리대로 살고 있어야할 세계에 아스카쨩이 빠지게 되면서 시계의 부품이 하나 사라진 것처럼 망가지게 되었다거나."
순리대로.....
....망가졌다... 라고.
"표시된 시간은 가게가 오픈하기도 전. 뭐, 주인이 부지런하다면 오픈 준비 시간 정도 되려나? 그런 시간에 영수증이 출력될 리는 없으니까... 그 경위까지야 모르겠지만."
"그럼... 프로듀서가 이 메세지를 본다면, 응답할 수도 있다는...."
"그것까지는 모르겠어. 그냥 생각이야. 처음에 아스카쨩이 내게 온 것부터 말이 되는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지금까지의 얕은 앎으로 말이 된다고 받아들여버리면, 나중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리잖아?"
"어차피 할 수 있는게 없다는건 마찬가지란 소리군."
"냐하하, 그러게. 처음부터 시키쨩이 할 수 있었던 건 아무것도 없었어. 망상병의 치한으로 오해하고 콩밥을 먹일 생각을 했을 때부터 말이야."
"그렇게 심하게 생각했었다고?"
"어째서? 콩밥은 건강하잖아?"
"....건강한걸로 따지면 두부도 건강하지."
"그런가! 나쁜 짓을 하면 건강한 음식을 먹는구나. 그럼 아스카쨩도 조금 더 나쁜 짓을 하는 편이 좋겠어. 안 그래도 이세계에 와 있는데 몸보신이라도 잘 해야지."
벤치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걷는다. 실종이다. 자아의 실종이다. 같은 곳을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점차 축적되는 기분이었다. 녀석에게 말하자, 저녁을 먹을까? 라는 이른 제안을 해왔고, 마침 보이던 간이 도시락 식당으로 걸어갔다. 가볍게 고른 식당임에도 불구하고 식당의 내부는 일본 특유의 정서로 가득한 것으로. 불편할 정도로 작고, 그럼에도 소박하고, 정겨운, 그런 느낌이다. 아는 사람들도 모르게 훌쩍 지구 반대편으로 떠난 녀석은 일본을 그리워했던 걸까, 어릴 적을 그리워했던 걸까. 그런건 알 수 없었지만 작은 선택이라도 그 정취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정작 녀석은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도 신경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거기선 없는 것들도 있거든. 토루코 라이스의 케챱 스파게티, 부끄러운 메이드 복장을 입고 돌아다니는 웨이트리스들. 그런 것들은 역시나 일본이야."
"아, 왕코소바 말이지? 응, 그렇네. 사실 생각이 나지는 않았어. 먹게 된다면야 먹겠지, 이 정도. 일부러 도쿄의 중심지에 방을 잡았는걸.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굉장히 들떴어."
"...티켓은 편도였나?"
"응!"
"지나치게 해맑잖아."
"그럼 안 돼?"
"돌아가는 곳이 없다는건 그런거야."
란코가 떠올랐다.
내가 그리워했던 란코와, 긴 옷이 가득했던 시키의 캐리어. 아무도 모르게 온 여행의 경위...
"그건, 딱히 내가 없어져도 세상이 발작하지는 않겠구나~라는걸 확인받기 위해서였어. 다른 의도가 있던건 아니야."
"시키."
"시키쨩은 하고 싶은걸 하고 싶으니까. 하고 싶은 것을 하는건 재미있으니까. 그래서 멋대로 비행기 티켓을 끊고, 최고급 호텔에 방을 잡아뒀어. 최고급 호텔이라면 어디라도 상관없었지만 연고가 없는 곳이라면 도쿄였지. 그래, 향기를 맡아보지도 않은 곳. 그 곳이라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 하고 싶은걸 찾아낼지도 몰라."
".....그래. 그럼, 하고 싶은건 찾았어?"
"응."
"......."
"엉망진창으로 아프고 싶어. 자기 자신을 고문하는거야,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녀석이 간직했던, 태어난 상태 그대로의 귀는 지금껏 무엇을 들으며 자랐던걸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늘은 붉음을 품고 있었다.
[어린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주세요]라는 기계적인 음성이 어디선가 들려올 것만 같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한번 이쪽 세계의 아스카를 보고 싶어."
"응? 죽었잖아, 아스카는. 혹시 아스카쨩, 오컬트 쪽에 관심있다거나?"
"그런게 아냐. '아스카'가 이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그 흔적을 보고 싶어. 없을까? 묘비나 납골당에라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더 이상 이 세계의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눈을 가리고, 환상으로 속이고, 남은 자의 일들을 남겨둘 수는 없어. 의도치 않은 첫 만남, 그 때도 나는 도망쳤다. 너무나 그리웠던 첫번째의 대화에서도 나는 도망쳤다. 첫 한번을 했다면, 그 뒤로는 쉽다. 아니, 그 뒤로도 계속 같지 않으면 안 돼. 계속 외면하고, 또 외면하다가 결국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기는 싫다. 이미 매듭이 풀리기 시작한 실은 다시 꿰메어나가야 흠집이 되지 않아. 서툴더라도 직접 해야해.
너를 더 망가트리고 싶지 않아.
"그 애라면.... 알기는 하겠네."
"응."
"그걸 알려줄거라고 생각해?"
"그건 내일 확인할 문제겠지."
"내일?"
"오늘은 너와 내가 보낼 시간이잖아."
".....그렇구나."
"그렇구나는 무슨. 남의 전화에 끼어들어서 먼저 말한게 누구였지."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시키쨩의 전화였어. 칸자키 란코도 그걸 알면서 전화를 했다는건 내게 직접 이야기하기 위함이었겠지. 아마 그 애는 나를 방바닥에 떨어진 레고 정도의 취급을 하고 있을거야. 밟으면 아프니까 피해가야하는 귀찮은 레고블럭. 그 애는 고스로리 인형옷을 잔뜩 갖춘 미니어처 옷장을 향해 아장아장 걸어가고 있단 말이지. 블럭이 방해물인건 당연해."
"그럴 리가 없잖아?"
"아니란 말이야?"
"제대로 대화를 해보지도 않은 너한테 전화를 하진 않을걸. 란코는 그렇게 뻔뻔하고 붙임성이 좋지는 않아."
호텔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공원이 있었다. 동전을 던지면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분수가 있었기에 잠시 멈췄다. 낮과 밤이 뒤바뀌는 시간, 물은 지상의 색을 남김없이 투영하고 있다. 그 바닥에 들어찬 인간의 욕망들만큼의 성과를 과시하듯 이룩한 그들의 문명을 말이다.
"소원을 이뤄지는 분수구나, 뻔한 마케팅 상품이네. 유일신 카코님을 배신하고 이런 이단을 믿는거야? What a shame, 아스카쨩."
"....어느새 카코 씨의 광신도가 되어있군, 너는."
"그것보단, 그냥 노는게 좋은거야. 재밌으니까. 그래서 아스카쨩은, 소원 빌거야?"
"현금은 중요하니까 그런 짓은 하지 않을거야. 공상할 의지도 없이 낙하하는 물방울의 덧없음을 구경하는거다. 그래, 단지 그런거야."
"분수가 예쁘다고 솔직하게 말해주면 좋을텐데."
"너는? 소원을 빌건가?"
"뇌물이나 받는 분수보다 이쪽 세계의 카코님을 찾는 편이 간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진심이냐."
"허튼 말은 하지 않는다, 그것이 시키쨩."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는 헛소리군."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몸은 솔직한걸. 흥미가 동한것 같다는 눈동자야. 시키쨩이 잘못본걸까? 사실은 저 분수 아래에 가라앉은 동전들이 탐나는걸까?"
"탐날까보냐. 그런 꺼림칙한 돈은 깨끗한 상자에 포장해서 준대도 사양이야. 타인의 염원이 깃들어있다거나 하는 미신적인 이유는 제쳐두더라도 위생적으로도 적절치 못하다고. 물의 표면을 바라봐도 자신의 상이 아니라 버려진 동전들이 쌓여있을 뿐이지. 그런 불온함을 담은 파문 안으로 손을 뻗을 수 있을까?"
"물은 아무 죄가 없어. 좀 더럽긴 하겠지만."
"그게 죄야."
"물이 저지른 것이 아닌데도?"
"......."
"있잖아, 역시 뛰어들어보기 전까지는 몰라."
"뭐?"
물에 뛰어든다.
그건.....
"아스카쨩이 그랬잖아, 솜사탕을 보면 만지고 싶다는 감상을 말해주면서. 솜사탕은, 움켜쥐기 전까지는 푹신한 솜처럼 부드러울줄 알았겠지? 사실은 끈적하고 달라붙기만 할텐데 말이야. 하지만 만져보고 싶다는 마음과 만지고 나서의 찝찝함은 절대 가짜가 아니야."
"잠깐, 시키."
"충동은 이기려하는게 아니야. 지금 바로 하지 않으면 어느날 불쑥 두통으로 찾아와버릴지도 모른다고. 사실은 뛰어들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지?"
"위험한 소리에 위험한 눈빛을 하고 있잖아."
"어딜 봐서~?"
....녀석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고양이같이 말려들어간 입꼬리는 더 장난스럽게, 입술에서 나오는 말들은 소리 없이 위험하게. 멈춰야하는데 발은 야속하게도 멈추지 않는다. 계속해서 뒷걸음질로, 다급한 사고회로에 고장난 시계처럼-
+1~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는 주사위에서 두표 먼저 나온 쪽으로.
1~50 방어 성공
51~100 너의 눈동자에 빠지고 싶어
....겨우 멈추기에 성공해서, 수면으로 넘어가는 대신 가장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우선 안전거리는 확보다. 그러니까, 조금 앉아있어도 괜찮겠지. 분수 소리가 듣기 좋으니.
"너도 앉지 않을래?"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네. 비켜줄래?"
"내 옆에 앉으면 되지 않나."
"하지만, 조금이라도 아스카쨩이 따뜻하게 데워둔 자리에 앉고 싶은걸."
"네가 살고 있는 계절이 여름이란걸 망각하고 있나보군. 비키기야 하겠지만."
"뜨거운 것과 따뜻한 건 달라. 아스카쨩은 태양이 아니잖아?"
"아아, 그러네. 그랬다면 이미 타오르고 있었을거야. 지근거리에서는 받아줄 생명이 없어서 아득한 공간에서 홀로."
"그러다 외로움에 질려서 결국 지나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취미를 가지게 되는거야? 응큼해."
"유해하게 해석하지 마."
"동화는 유해한 것이 아니었어? 구두에 발을 맞추기 위해 발 뒤꿈치를 자르는 사칭범의 신데렐라. 성격 나쁜 난쟁이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영영 가시덩쿨을 해메게 된 왕자. 그리고 또 뭐가 있었더라, 아! 금발 페티쉬 근친범을 피해 도망나온 공주님도 있었지."
"그건.... 그건, 그게 결국은 인간들이 원하는 동화의 결말이라는 거다. 동화를 듣고 자란 우리는 늘 마음 속에 동화를 품고 있지."
"예를 들면?"
"그 모든 파국의 근간은 권선징악이 아니던가. 인간은 모두 제각기 가진 삶이란 이야기의 주인공이야. 싫든 좋든, 그건 정할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지. 신데렐라는 주인공이 되기 위해 비참한 시중을 들었었나. 모친이란 인물은 엑스트라가 되기 위해 악행을 일삼았나. 아니,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야. 생명이 부여된 순간부터 죽음을 맞이하는 때까지. 그렇게 결말이 없는 이야기를 해메는거야. 동화로 학습된 희망을 갖고. 자신은 특별하고, 다를 것이리라 믿고 살아가. 거친 해일이 와도 물러서겠지. 괜찮을거야. 그렇게."
오래오래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좋겠는데, 슬슬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렇게. 써나가는 거야, 자신만의 동화를."
"응응. 그런거야, 아스카쨩은?"
"어리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뭐 어때? 그런 생각이라면, 이럴 때만 할 수 있는 생각이라 멋진거야. 그렇지 않다면, 아스카쨩은 나이를 초월해서 미래의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거고. 한마디로 에스퍼!"
화보 촬영을 하는 것처럼 세심하게 옷을 갖춰입는다. 화장실에서 나왔더니 녀석도 옷을 갈아입은 채였다.
"아스카쨩 아스카쨩, 같이 사진 찍자~"
"옷을 입힌 것은, 그러려고...?"
"아니, 아스카쨩을 놀리고 싶었거든. 하지만 이왕 예쁘게 꾸민 기념으로 사진으로 남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사진은 순간을 담아내는 수단. 과거에는 영혼을 가두는 도구라고도 했다.
그러고보니 아직은 녀석과 함께 찍은 사진이 없었다. 지갑에 간직한 사진은 다른 세계의 것이니.
"좋아."
녀석은 즐거이 필터를 골랐다. 이 현실의 색감과 감각이 전부 무너지도록. 내가 보는 녀석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닌데, 카메라를 통해서는 다른 일면으로 남아 찍힌다. 영혼을 가둔다는 속설은 거짓이다. 이 곳에 존재하는 영혼은, 그것보다 큰 무언가다.
"자, 치즈. 아! 잘 찍혔당. 이거 란코쨩한테도 보내줄까?"
"그게 무슨..."
"냐하하, 폰은 내 손에 있는데 무슨 수로 막으려고~?"
사진으로 기록된 소소한 역사에도 남지 않을 고군분투는 수마가 순식간에 덮쳐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녀석도 나도, 완전히 지쳐서 침대에 녹아내렸다. 아직도 녀석의 머리카락에는 물기가 남아있었다. 머리를 댄 자리의 시트에는 수채화의 번짐처럼 자욱이 남았다. 문질러 닦아도 없어지지 않을 터였다.
"-- 사거리에 있는 백화점 앞이래. 만날 곳."
"전문을 들으려면 한달은 걸리겠군."
참 빨리도 말한다. 눈이 감겨올 때가 되서야 들었다.
"어제가 지나갔으니까야."
"12시 1분이라도 되나?"
"응, 정답. 똑똑하네에."
"....넌 뭘 할거지?"
"그냥 구경. 백화점은 넓고 잃어버릴 길은 많잖아? 하지만 걱정 마, 원래 자리로 돌아올게. 그렇지 않으면 아스카쨩이 찾을 수 없을테니까."
"소통할 수 없는 소통기구를 비꼬는건가."
"아니, 소통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라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응."
녀석은 란코와의 불화를 예견하고는 그런 말을 했음이 틀림 없다.
나로서는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없는 문제였다.
란코는 머리를 높게 올려 묶고, 흰 색의 블라우스와 분홍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귀를 뚫었던건지 금색과 분홍색이 섞인 하트 모양의 피어스도 하고 왔다. 붉은 눈동자는 어느 무언가를 찾는 듯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깍지를 낀 두 손은, 꼭 기도하는 것처럼 가슴에 붙이고.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기에 서둘러 백화점 매장의 유리창을 보고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그리고는, 다가간다.
얼마나 오래 되었을까. 내 의지로 란코를 보는 것은...
"....오랜만인가...?"
약품 냄새, 하얀 바탕, 환기되지 않은 닫힌 공간- 그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은 란코를 만나고, 이야기하고, 만지는 것은, 실로 오래 된 일이었다.
".......!"
....하지만 이건, 그 란코가 아니야.
"아스카쨩...”
같은 목소리로 같은 이름을 부르고 있지만, 그녀가 부르는 건 나의 이름이 아니다.
나를 보고 있지만, 나를 보는게 아니야.
기만적이게도, 나 역시 그렇겠지.
"..보고 싶었어, 아스카쨩..."
그러나 그 어떤 시간도 란코가 내게 안기는 것을 막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1~ 투표.
1. 안아주고 싶어
2. ....그게 1분이라도, 더 이상 가면을 쓰고 싶지 않아.
란코는 생각했던 것보다 말랐다. 원래 이랬던걸까, 아니면 그 사건 이후로 야윈걸까. 문득 생각이 났다. 나는 한번도 란코를 안았던 적이 없었다. 버스 안에서 잠들어 서로에게 기대는 정도가 몸을 맞대는 것의 최대치였다.
왜?
언젠가 한번은, 기뻐서 주체하지 못했을 때가, 그리고 그것을 나누고 싶었을 때가 있었을텐데....
그건...
"....아스카쨩..?"
아이돌이 되고 난 후였다.
란코는 그 자리에 없었다.
아이돌이라는 것도 불확실한 미래로의 탈출이 아니었던가. '우상'이 되는 것은 결코 쉬이 오를 탑이 아니다. 명료하지 않은 운이란 것에 하는 베팅. 일상을 저버릴 정도의 전율.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의 비일상. 프로듀서의 명함이 그 세계의 초대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그 때 이후로 돌아왔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란코."
"......."
병원 침대에 누워있던 란코는 안을 수 없었어.
실체 없는 몽상이라 부른다면 그게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란코를 그런 신기루로 속이고 있을 뿐. 그건... 부정할 수 없다.
"....미안해. 고백하지 않은 것이 있어."
"자, 잠깐, 아스카쨩..."
"나는, 네가 아는 '아스카'가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야.....?"
"....사람은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가. 그런 선택들이, 그리고 선택을 하지 않은 선택들은 무한으로도 표현하지 못할 정도의 수의 세계로 갈라진다고 누군가는 말했었지."
"......."
"나의 세계와 너의 세계가 어떤 갈래에서 분화되었는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너와 '아스카'가 나누었던 환희의 색채 같은 것을, 나는 몰라. 결국 나는 란코를..."
말을 이어나가기가, 아니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모든 것을 쏟아내고 나자 주변이 온통 물결처럼 일렁이는 것 같았다.
그러게, 나는 왜 이러고 있을까. 어째서, 생각했던 것은 하지도 못한 채 부서져내리게 두었을까. 너를 위해서라고, 너의 일상을 지켜주고 싶다고 세치 혀로 자신을 세뇌시키고, 꼭 옳은 일을 하는 것처럼 위선에 차있었을까.
"울고 싶고, 물어보고 싶고, 따지고 싶은건.. 난데.."
품 안에서 떨어진 란코와 나의 사이에 허망한 바람이 불었다. 혼자로는 서 있을 수 없어. 하지만 란코에게 의지할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란코의 앞에 될 수 있는 최대치의 한계선 안에서 진실되게 존재하는 것 뿐.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것이나, 눈가가 쓰라리는 것은, 내가 이 곳에 니노미야 아스카로서 서 있다는 것의 징표일까? 그렇지 않다면, 나는...
"...화내고 싶은 건, 그러고 싶은 건... 난데..."
"........."
"그러지도 못하게..."
"....미안해, 란코."
"으으...."
란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잘 만든 도자기인형처럼 깨끗했던 얼굴이 꼭 깨어질 것 같다고, 외람된 생각이지만 그렇게 여겨질 정도로. 보석같은 눈물을 소매 끝으로 아무렇게나 닦으며, 란코는 그렇게.. 목 놓아 울었다.
소리가 멈췄다. 시선을 피하고 싶게 하던 괴로운 표정이, 귀를 울리던 울음소리가 멎었다. 란코는 더는 울지 않고, 손으로 카페를 가리켰다. 장소를 옮기는 것이 좋을 것이라 판단한거다. 란코가 먼저 걸어가고, 나는 죄인처럼 란코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란코가 직접 나를 잡아 옆에 세웠다. 같이 걷자고는 말하지 않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사이라면 같이 걷자고 권유하는 쪽이 오히려 어색하다. 그런데 나란히 걷고 있음에도 어째서, 나는 란코의 입에서 '같이 걷자'는 말을 해주기를 원하는걸까.
란코의 옆에 있는 '나'는 가장 오차가 없는 그대로의 자신이기를 계속해서 확인받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테니까....
...나는, 이런 것이 무섭다.
카페는 백화점의 소유이기에 카페 본연의 맛보다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으로 포커스가 맞추어졌다. 이전의 세계에서도 길을 오며가며 간혹 봤었던 곳이다. 야외에 가짜 야자수와 상아색의 동상들과 함께 가든용 테이블을 둔, 백화점의 내부만큼이나 인간의 활기로 가득한 곳. 지금의 나는 속할 수 없는 의지가 여백을 전부 메우고 있다. 란코도 같은 것을 느낀건지 눈물자국으로 얼룩진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내 몫의 의자를 빼두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도.
아, 내가 알던 란코라면 '영혼의 공명'이라 말하겠지. 환한 미소와 함께 말이다.
"고마워, 란코."
"......"
"......"
그러면서도 본인 몫의 의자는 빼지 않는 것이... 겹쳐보인다고나 할까. 란코다웠다.
"...고마워, 아스카쨩."
조그마한 목소리도 란코였다.
"아니야."
그래, 그렇지만 아니다.
서로가 아는 서로가 아니다.
내가 기대하는 너는 이 곳에 없고, 네가 기대하는 나 또한 이 곳에는 없어.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는 너는, 잘 정돈된 말을 건네지 못한 내가 전하려 했던 나의 현실을 - 그 의미를 이해했을까....
그저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라고, 그만 이기적인 마음을 먹어버린다. 내가 알던 란코를 이 세계의 란코에게서 보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감각으로 보아 자연스러운 일임을- 그 것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을 손에 쥐어주고서 곧바로 앗아가버린 이. 나의 죄로 인해 헤식은 란코를 바라만 보는 것은, 할 수 없다.
어떻게 해야할 지는 잘 모르겠다. 이 곳에 와서도, 이 곳에 오기 전에도 나와 인간의 사이에 있던 관계의 조각들은 그 곡절을 가늠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너를 잘 알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깊이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 상태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계속 그렇게 생각해왔다. 더 나아가지 못하고 발목이 묶여버렸다. 그런 얄팍한 내가, '그녀'의 동정動靜을 헤아릴 수는 없다... 그런건가. 그것이 진정 섭리일까.
....그렇다면, 결국은 다시 제자리군. 이래서야 성공도 실패도 하지 못하고 고장난 라디오처럼 몇번이고 같은 전파를 반복할 뿐이 아닌가.
계속 오지 않을 신호를 기다리는 채로, 두 사람은...
"너의 마음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게 알려줄 수 있을까."
"......."
"어떤 방향을 향하든, 나는 따라갈게. 나를 증오하고, 힐문하든 좋으니까..."
"...몰라, 모르겠어... 전혀 모르겠어..."
란코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무엇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면, 작은 손톱에 긁혀 조금 아플 정도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아.
"그런데.. 그러고 싶지는 않아... 아스카쨩은... 잘못한게 없잖아...?"
"란코... 그건..."
"...나, 나는, 그냥.. 아스카쨩이... 너무 보고 싶어.. 그게 다란 말이야..! 그러니까-"
+1~ 주사위로 2표 먼저 나온 쪽으로..
1~50 제발 사라져
51~100 다정하게 안아줘
아직 머리 속에 아무 것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 말에 내 발은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양 멋대로 떨어졌다. 발목을 잘라내기 전까지는 절대 멈추지 않는 빨간 구두를 신은 양, 란코에게 멈추어있던 안타까움은 저 멀리 내버려두고,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를 실종을 감행한다. 도착지가 어디든 상관 없다. 란코의 시야에서만 말끔히 사라진다면 그만이다.
스쳐지나가는 군상, 수근거리는 목소리, 웃고, 떠드는 목소리는 귀를 간지럽힐 뿐 바람처럼 멀어진다. 그저 그 전부가 한 구로 결합되어 웅웅댄다...
시끄러워.
귀의 작은 구멍을 통해 들어온 소리는 이내 꽉 막힌 텅 빈 공간 안에서 자유로이 헤엄친다. 참 열심히도, 몸을 꿈틀대면서. 그래야만 살아있을 수 있으니까, 라고는 하지만 그 공간의 주인으로서는 몸서리쳐질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다. 찢어지고, 또 울리고, 가슴을 찌른다.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똑바로 들지 않아도, 옆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이 지나쳐가고 있어도. 녀석의 작은 숨소리, 체취, 그리고... 열기가,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나는 그 장소로 단지 걸어갈 뿐이다. 우리의 발자국이 맞닿는 곳에서 무언가가 텅 빈 소리를 관통해, 이 막막한 통증을 뚫어주기를 고대하며.
"으응. 수고했어, 아스카쨩."
'그것'을 수고라고 불러도 되는 것일까.
그렇지만, 녀석은 내게 문을 열어주었다. 팔을 벌리고, 고양이같은 미소를 지으며 손짓한다.
들어가도 되는 걸까, 라는 고민을 할 작은 시간의 사이가 소멸한다. 단 0.0001초도 되지 않는 프로세스로 받아들여버린다. 아, 이제는 몸의 촉감으로 느껴진다. 충분히 가까이, 녀석은 이 곳에 있다. 마디뼈 하나하나에 와닿는 살아있는 감각이다.
열기가 몸을 꿰뚫는다.
대책없이 온도는 끓어오르고, 곧바로 갇혀있던 소리들이 와장창 깨져버린다. 공기가 얼버무리던 소리들은 그제서야 선명하게 들려왔다. 오늘은 날이 좋아, 저 빌딩은 무척이나 높구나. 그런 쓰잘데기 없는 일상의 소리들이.
"시키."
척추 부근이 살짝 움찔거렸다. 이런 나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하지만, 역시 종국엔 평소의 시키처럼 안아버린다.
"그래그래, 아스카쨩. 시키쨩이 부르고 싶으면 마음껏 불러."
시키, 시키, 시키.
아스카쨩, 아스카쨩, 아스카쨩.
같지만 다른 목소리들이 교차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 곳의 녀석을 부른다.
"나는,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니까. 그렇게 해서 시간도, 그 사이도, 감정도, 전부 부정해버렸으니까."
안식처는 없다. 조금이라도 안심할 구간이, 선택이 나에게는 없다. 녀석을 끌어안고 폭발해버릴 것 같은 마음이 내면에서 부서지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 전부.
그래, 끝을 선고받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살아가는 것만이 삶의 모든 것은 아니지 않나. 나는 분명히 존재하지 않아야할 곳에 존재하고 있다. 나를 거둬들인 것은 그녀의 선택이고, 나의 바람이다. 그건 내가 찾아낸 한 가지의 희망이다. 다만, 지금 이 곳에 존재하는 너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나를 부정한다.
우리는 이 땅을 밟고 서 있다. 흔들리는 땅이 무너지면, 그 때는 정말로 끝이 도래할 것이다.
이 순간을 잃고 싶지 않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초조해졌다. 이 품에 의존해있는만큼 짙어지는, 얼른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기운에 부정만을 담은 비겁한 언어들이 흘러나왔다. 다만 책임져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나 자신조차 믿지 못할 생각일지라도.
"냐하... 음, 왠지 단게 좀 땡기는데~"
...그래, 책임져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뭐라도 먹으러 가자! 시간은 충분하니까, 좀 추스르고 나서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
"으응? 왜 표정을 숨기려고 하는거려나? 아스카쨩. 어떻게 생각해?"
"네 판단이 그렇다면, 천재소녀 씨."
"섭섭해라. 용서받고 싶다는건, 첫날로 리셋하고 싶다는 시그널?"
"아니, 아냐. 너도 그런 것을 바라지는 않을테니."
"이름 불러줘."
"시키."
"응."
".......'응'은 무슨."
"응."
"그래."
"'그래'는 무슨."
"어떤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무엇이라도 네 대답이라면 받아들이고 싶어서다. 그거라면 납득이 되려나."
녀석은 내 어깨를 밀어냈다. 거친 동작이었음에도 힘은 조금도 실리지 않은 것처럼 부드러웠다. 표정은, 웃고 있었다. 이제까지 계속되었던 것일 수도 있고, 일순 바꾸어버린 것일 수도 있겠지.
그 때, 아침 이후로는 처음으로 제 정신인채 녀석의 얼굴을 마주했다. 단 하나의 감각만을 제외하여 전해졌던 열기는 아직도 손에 남아있는데, 시각이 수용한 초상은 그의 온도를 한층 높여버린 것 같다.
백화점을 나서 다른 땅을 밟을 때에도 시간은 충분하니까, 라는 말이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았다. 지금은 흘러가는 것 같지도 않은 시간이, 이 세계를 얼마만큼이나 변화시키고 있는걸까. 스치우는 더운 공기가 뺨이 얼얼해질 정도의 찬 바람으로 바뀔 때까지도 나는 흘러가지 않고 머물고 있을까.
발은 어지러이 길을 밟으며 어두운 곳을 피해간다. 걷지 않으면 멈추어버릴테니까. 이 하늘 아래 존재하는 내가 계속해서 머물 것임을 알지만, 아니, 알기 때문에 속도를 높이지는 않을지언정 멈추지는 않는다. 그렇게 풍경들을 떠나보냈다. 오후가 끝나가는 것과 동시에 내려가는 밝은 햇살의 커튼도, 뾰족한 빌딩도, 눈높이 안의 활기들도. 그럴 무렵 녀석이 말했다.
"우리, 길을 잃어버리고 있어."
"그런 것 같군. 나는 너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네가 그런 소리를 한다면야."
"신기하지 않아? 물건은 '잃어버렸다'로 끝이지만, 길은 계속해서 잃어버릴 수 있잖아."
"....그런가."
"동의하지 않는다는 얼굴이네."
"뭐, 잃어가는 중일 수도 있는 무언가라면 '그것'도 있으니까 말이야."
"흠.... 뭘까나? 관계? 존엄? 자신다움?"
"일종의. 그런거야. 되돌아보면 이미 잃고 난 후일수도 있지만, 잃어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할 때도 있지. 그럼, 손가락의 사이로라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어떻게든 붙들려 애를 써야해."
"잃고 싶지 않아서 안간힘을 쓰는 '그것'이 대체 뭔데?"
"인간애."
".....인본주의적이네."
"애초에 나는 인간이니까."
"동물이 비거니즘하는 소리 하네."
"그래, 그런거다."
"그러니까 자연주의자는 자연이고, 환경 운동가는 환경이고. 세상은 정말 기묘한 이야기로 가득하네~"
"몰랐다면 유감인데."
"아니, 알고 있었어. 게다가 아스카쨩을 만나면서부터 더욱 확실해졌지. 응응, 실로 세상은 기묘해!"
이 곳, 저 곳을 떠돌아다녔다. 시작한 지점에서 보였던 곳들은 전부 탐색한 것 같았다. 내가 알던 도쿄와 같은 곳이라는 것도 알아채지 못할 것 같은 싱거운 배회였다. 괜찮은 카페 같은 곳은 눈도장만을 찍고 바로 움직였다. 희한하게 녀석도, 나도 어느 곳에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멈춘 곳은 취할 것 같은 달콤함과는 거리가 먼, 열쇠가게의 앞이었다.
"있지 아스카쨩. 놀이 하나 하지 않을래?"
"무슨 놀이?"
"야생의 본능에 따라 움직여보자, 라는 놀이."
"....불안한데."
"아무튼 하겠다는거지? 그렇게 들린 것 같은데."
"....야, 시키..."
순식간이었다. 어느새 녀석은 등 뒤에 있었다. 우리는 같은 자리에 나란히 걷고 있던게 아니었나. 약간 혼란스러워질 무렵, 녀석은 손바닥으로 나의 빛을 앗아갔다. 시야 대신 나의 눈에 남은 것은, 칠흑과 조금의 온기.
"자, 뭐가 느껴져?"
"....너의 손."
"아니, 시키쨩의 손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다른 걸 생각해봐. 조금 더 멀리 있는 것들을."
"......노랫소리..."
"오."
"맞나?"
"그게 들려? 나는 안 들리는데."
"밴드 음악... 같은데. 그게 아니라면...."
"아니,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뭐든 같이 있더라도, 같은 것을 느낄 수는 없잖아. 안 그래? 그러니까, 아스카쨩의 느낌에만 온전히 집중해."
".......알았어."
"그리고 발을 뻗어. 느끼는 대로 가."
"........."
"밴드 음악이 아스카쨩을 간질이면, 그 쪽으로 가봐. 잘못 들은 걸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 막상 가까워졌을 때 별로 성에 안 차면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어. 이 놀이에서 룰은 단 하나, 보이는 것에 구속받지 않는거야."
눈을 뜨고 걷더라도 앞에 무엇이 있는지는 필히 확인을 하고 가야한다. 그냥 눈을 뜨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자세히 살펴야만 부딪히지 않고 걸어갈 수 있다. 그건 목적지를 정하든, 정하지 않든 마찬가지다.
하지만, 눈을 뜨지 않아 날뛰는 몽상들이 떳떳이 마음을 휘젓는 조마조마한 지금, 나는 내 앞의 무엇도 걱정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요구받고 있다. 이성이 아닌 욕구를 강요받고 있는 거다.
"어때? 아스카쨩의 본능은 뭐라고 말하고 있어?"
목소리가 부쩍 가까웠다.
보이는 것에 구속되지 않고 좇을만 한 것이 있을까. 설령 보이더라도 좇을 것이 없을 때도 있다. 아니, 어쩌면...
'보이기 때문에' 순수히 갈망할 수 없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달큰한 향기가 코를 찌른 것은 그 때였다.
향기와 함께 어둠에 찾아온 그 형상은, 일렁이는 구름과도 같았다. 그 바람에 망설이던 발걸음을 단번에 떼었다.
아마 가전 제품 가게에서 들려올 텔레비전의 광고 소리, 사람들의 대화 소리, 통화하는 소리 - 언어에 담긴 의미는 우리가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분하게 들려온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스쳐지나가는 것들이다. 나는, 어쩌면 없을 수도 없는 향기를 따라가고 있다. 이제는 없어져버린 향기가 있을 것 같은 곳으로 나아가다보면 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른다, 라는 것은 그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전제 또한 동반한다. 무엇 하나 선명하게 밝혀낼 수 없는 것이 미루어 생각하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눈이 가려진 지금은 미루어 생각하는 것만이 진실이다. 그림자 놀이를 감상하는 동안만은 그림자가 정말로 용사이고 또 아름다운 여인이 아닌가. 옳고 그름을 떠나 그것이 가공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이기에, 우리는 그렇게 진실을 칭한다.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간다 - 여기서 마주하는 거친 생각들은 말로, 행동으로 걸러지지 않고 느릿한 걸음으로 드러난다. 방향성은 이미 잃어버렸음에도,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눈이 잠긴 동안의 진실에 더 가까워진다.
"그랬으려나? 아니려나? 어느 쪽이려나? 말했잖아, 산책 나왔다가 실종된 것 뿐이라고. 평행세계의 시키쨩은 어쩌면 알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래, 그 녀석이라면 알겠지. 내가 이 곳에 온 것도 녀석을 찾기 위해서였으니까."
"........."
"그런데, 기억이 안 나. 무엇을 파는 가게였는지, 그래서 녀석은 왜 여기 있었는지."
"알고 싶어?"
"글... 쎄. 너는 아는 것도 없으면서...."
"흐응, 아스카쨩보다는 더 많이 아는 것 같은데? 간단해, 물어보면 되잖아. 저기의 세탁소든, 탐정사무소든. 냐하! 탐정 사무소라니, 진짜 소설 같당. 물론 현실은 배 나온 중년 부부의 쌍불륜현장을 잡으러 이리저리 미행하는게 서스펜스겠지만."
확실히, 물어보면 모를 리가 없다. 건물 뿐만이 아니라 간판까지 낡았다는 것은 이 근방의 가게들이 전부 꽤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가게들이 옆 가게가 무엇을 하는 가게이고 언제쯤 들어왔다 언제 나갔는지의 사정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꿰고 있겠지.
그런데, 그것 하나 알자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어떨까. 과연 알고 싶을까.
"그래서 아스카쨩은 축축한 빨래와 범죄 예고를 알리는 초대장,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들어? 아, 그 옆에는 금은방도 있어. 괴도 시키쨩이 훔쳐갈 보석은... 삐삐! 저쪽이다~"
나는 시키의 옷자락을 잡고 가게의 코앞까지 걸어갔다. 그 때의 기억을 더듬어보려는걸까. 녀석은 가게 안에 있었나, 아니면 밖에? 안에 있었다면 무언가를 구경하고 있었을 터인데, 그 손이 무엇을 집고 있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말 눈이 멀어버린 것처럼 녀석만 좇고 있었던걸까. 그저 다시 보았다는게 대단한 안심이어서, 그래서.
"......어?"
"응?"
"누군가 있어."
틀림 없다. 무언가가 슉, 하고 움직였다. 텅 비어버린 가판대와 열려있는 찬장, 캐셔의 자리.... 어딘가에서.
"아스카쨩, 쉬잇."
"........"
왜?
"탐정은 그렇게 쉬이 자신의 위치를 밝혀서는 안 된다구."
속삭이는 바람같은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안에 사람이 있다 해도 문 밖에서 한 말을 들을 리가 없으니, 위험한 일에 휘말릴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나도 모르게 못미더운 표정으로 쏘아보자, 녀석은 또 장난스러운 미소만을 지었다.
"안에 뭐가 있는지 알고 싶어?"
".........."
"그럴 때는 정중하게 노크를 하는거야. 프라이버시는 소중하니까."
"프라이버시고 뭐고, 노크를 한다 해도 소리조차 안 날 것 같은 문이잖아. 미닫이고."
톡톡, 하고 손톱이 닿는 느낌으로 문의 재질을 가늠해보았다. 유리처럼 생겼지만 플라스틱에 가까웠다. 게다가 오래 청소를 안 해서 끈적해보이는 느낌에, 촌스러운 무늬까지.
"그러네, 미닫이네....."
".....어?"
"그래서, 미니까 열려버렸네?"
대체 이 가게는....
"냐하, 미닫이라는거 원래 다 이래? 하긴 잠금장치가 있는 미닫이문도 못 봤지만~"
문은 너무나도 쉽게 열렸다. 문을 사이에 두고 흐릿하게만 보이던 가게의 내부가 나의 현실에 들어왔다. 짙은 먼지의 향기.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은 보통 하지 않겠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나오지도 않은 채로 서 있다. 소복이 쌓인 세월의 흔적이 아무것도 없는 가게에 꾹꾹 들어차 있어 잠시 넋을 놓았다고 해야할까. 죽은 자들의 축제에 발을 딛은 것처럼, 서늘한 정적은 오히려 복작한 광경을 회고시키는 듯한 착각을 심어준다. 아니, 조금은 정겹기까지 하다.
금방이라도 나를 환영해줄것처럼.
"잠깐, 시키. 그렇게 막 들어가면...."
"아-"
멈췄다.
하나는 멈추고, 하나는 움직인다 -- 나는 그 문장에 포함되지 않았다. 시키는 멈추었다. 그러나 내가 들은 낮은 탄식은, 녀석이 아냐. 나 자신도 아니었다. 움직인 것은, '그것'이었다.
290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좁은 틈을 비집고 나갈만큼 부피에 걸맞지 않은 번민이 직접 문고리를 열고 나가면 흩어져버린다. 몇번이고 되풀이를 하고도 결국 손아귀엔 아무것도 남지 않아. 옷가지들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건?"
"사이즈는 전부 맞았어. XS, S, M이 이리저리 섞여있는데도."
"척 보면 견적이 나오거든. 화물로 부쳐도 문제 없을 기특한 사이즈랄까나. 여행갈 때 신분, 아니아니, 여권도 신경 쓸 필요 없을 정도야."
"....살인을 저지를 셈인가."
"그렇게 받아들이면 섭섭하지. 여행은 아스카쨩에게 맞춰줄 생각이었는데. 정말로 죽고 싶은거라면 정식으로 카운셀링을 요청해줘."
"죽고 싶지 않아."
"오케이, 접수되었습니다~! 그럼 가고 싶은 곳이라던가 있엉? 나는 말이지~"
+1 시키쨩이 가고 싶은 곳
+2 아스카의 대답
"나를 데리고 어떻게? 여기서의 나는 학생증이라거나, 신분을 증명할만한게 없잖아. 교통수단을 이용하려면..."
"우체국 택배 서비스를 이용하자. 박스에 넣어 부쳐버리면 끝."
"그건 확실히 편리하다만, 인간에게는 적합하지 않아."
"그랬었지, 까먹고 있었다!"
"....까먹을게 따로 있지."
"그럼 까먹을 것의 리스트는 이따가 까먹지 않도록 따로 만들어두도록 할게. 아스카쨩이 '시키 언니..'하면서 매달려서 잤던 밤의 기억이라던가."
"내가 언제."
"멀지 않은 미래에."
"차라리 소설을 쓰는 것을 추천해주고 싶군."
"리서치 페이퍼라면 맡겨줘, 소설은 무리."
"아아. 그렇겠지."
타당한 것을 끌고 오더라도 늘 이렇게 샛길로 빠져버린다. 하지만 회피를 의도하는 것이 아닌 한 녀석은 언제나 하기로 계획한 건 하고 말아. 여행이라는 것도 분명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자세하게 내 쪽에서 기정사실을 만들면 된다.
"그래, 훗카이도라면 어디를 생각하는건데?"
"시키쨩의 근원지."
"....근원지....라고."
훗카이도의 지리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니와 녀석이 무엇에 대해 말하려는 지도 알 수 없었다. 이와테 출신이 아니었던가?
"四季彩の丘."
"시키사이. ....그렇군. 사계절의 색인가. 한자는 다르지만, 읽는 방법은 같네. 이름이란 모든 것의 근원이기에 근원지라는 건가."
"응. 시키사이의 언덕은 비에이 초에 있는 꽃밭이야. 규모는 무려 도쿄 돔의 세배. 굉장하지? 아직 여름이니까 예쁘게 펴 있을거야."
"모든 것이 지는 겨울에는 하늘에서 눈꽃이 내릴테고."
"그렇게 시키(四季, 사계)의 색을 담아내겠네. 과연 시키오카의 언덕!"
"그렇지, 시키(志稀)의 색을."
"특급 열차를 타면 비행기보다 세배 느리게 도착할 수 있어."
"좋은거냐."
"아스카쨩에게는 비행기보단 열차의 티켓을 쓰는 편이 낫겠지.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말도 있잖아?"
"그러니까 좋은건지 나쁜건지 모르겠다니까. 하지만, 알았어. 선로를 따라가다보면 옳은 길이 나오겠지."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장소에 말이지."
그건 너무 당연하잖아.
"그 네벌이구나."
"이 중에서 고른다면, 응."
"어째서 전부 사지 않고?"
"적당이란 건 지켜야하지 않겠나."
옷을 손에 들고 공간 안을 다시 누비기 시작한다. 그렇게 나의 옷인가, 녀석의 옷인가도 신경 쓰지 않고 골라잡고는, 서로의 몸에 대보는 짓 등을 하며 몰지각하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후에 돌이켜보면 잠깐의 미소만이 떠오를, 아무래도 괜찮을 시간.
이제 필요한 것은 있다. 전부가 아닐지라도, 이 곳에서의 볼 일은 이제는 내려가는 장막을 멈추려 붙잡고 있는 일 뿐이다.
"있지, 우선은 내가 계산하는걸로 할까? 그야 현금은 언제라도 줄 수 있으니까."
계산대를 향해 걸었다. 녀석은 고민도 하지 않고 테이블에 옷걸이들을 척척 쌓는다. 골라낼 것을 잡는 것도 거침없다. 그렇게 선별이 끝나고, 최종적으로 머리 속에서 승인이 난 옷들은 타인의 손을 한번 거친다. 목적이 하나뿐인 짧은 대화는 연극 대본의 마지막 한 장을 뽑아내듯이 영수증이 기계 너머에서 빠져나오며 완전히 끝이 난다.
"아스카쨩, 지금은 몇시지?"
벽 한켠의 아날로그 시계의 초침을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 안의 톱니바퀴가 오퍼레이션에 맞추어 돌아가듯이, 어릴 적 배운 지식이 기계의 작동원리처럼 바로 작용되어 눈에 들어온다. 헌데 왜 나에게?
"오후... 3시."
"이 가게는 몇시에 열어?"
"그건... 쇼윈도에 적혀있을까. 9시라고 되어있네. 컴플레인이라도 넣으려는건가."
"아니, 돌아오지 않아."
"....무엇을 말하려는거지?"
"치마가 든 봉투에는 영수증이 있었지. 아스카쨩의 옷들은 그렇게 구분해서 넣어줄게. 그동안 영수증을 잘 봐."
"...응."
계산대 옆의 테이블에 소지품을 올려두었다. 영수증에서 볼 것은 무엇이 있을까. 카드의 번호? 결제된 금액? 카드 소지자의 이름? 평소에는 생각도 않고 무시하던 것들인데. 지금 이 순간 신경을 쓴다고 해도 그런 것들이 중요할 리가 없다. 왜냐하면, 카드가 작동한 원리는 생각했던 것과 같을테니까. 그러니 소지자의 이름도 번호도 같을 것이다. 금액은 물론 아까 확인을 했었다.
그럼...
"......시키."
"응."
"이 영수증은...."
기계란 것들은 전부 그렇다. 정직하게 입력된 그대로의 것들을 행할 뿐이다. 그러니까 고장이 나지 않는 한 잘못된 것을 할 리는 없다.
그것들은, 그렇게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함으로서 존재의 가치를 입증한다. 그것이 기계다.
시간 또한 마찬가지다. 아날로그 시계 또한 읽는 것이 어렵지 않듯이 어째서 그렇게 디자인되었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움직여. 그게 전부. 모래시계조차 할 수 있는 것을, 조금 더 정교한 장치로 옮겨두었을 뿐.
이 세상의 시계들은 시차로 인해 가리키는 방향은 다를지언정, 분단위, 초단위의 오차가 있을지언정, 주어진 만큼의 순간이 지나면 움직인다. 그것이 시간의 '사이'.
그러나 어찌된건지, 시키의 영수증과 나의 영수증에는 굉장한 사이가 있었다.
"이 영수증은 다른 시간대에서 프린트된걸로 되어있어. JST와 다른 표준시간의 차이 같은게 아니야. 이건..."
"......"
"아침. 너와 디저트 카페에 갔던 날의 아침이야."
"한 시간대에 두가지의 일을 하다니, 역시 아스카쨩은 대단한걸."
"그런게 아니잖아."
나.
이 세계의 오점이나 다름 없는 나. 혹은, 이 세계의 오점이 문을 열어 안내해주었던 나.
"결국은 나다. 문제가 일어났다면 그 때문이라고밖에는 말할 수 없어."
"응, 그 쪽 세계에의 도움을 요청한거나 다름 없는 일이니까."
".........."
"그 쪽 세계의 카드. 아스카쨩이 말했던 것처럼, 이 곳의 아스카쨩이 가졌던 카드는 유지되어야할 이유가 없어. 그렇다면...."
"프로세스가 되었던 것은... 그 쪽 세계의 카드라는건가. 그런데 어째서 시간에 문제가 생긴거지?"
"무언가 다르다는 것의 신호가 아닐까나. 역시 잘 모르겠지만, 그 쪽의 카드가 작동하려면 카드를 긁는 순간의 전파가 차원을 뛰어넘고 아스카쨩의 세계로 도착했다거나. 그런 이상~한 일이 일어났겠지? 아스카쨩이 이 세계로 건너왔듯이 말이야. 그저 걸어다니다가."
".......응."
"아, 그래. 혹시 그 쪽의 세계는 이 쪽 세계보다 조금 느리게 돌아가고 있는게 아닐까? 어쨌거나 다른 세계니까."
"나와 란코.... ......아무튼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봤을 때, 시간은 같이 흘러가고 있었어. 적어도 내가 이 세계에 오기 전까지의 시간은."
"응응. 그럼 '넘어옴'으로 인해서 무언가가 엇나가기라도 한걸까?"
"이 세계에 그런 규칙같은게 있는지도 불분명한걸. 애초에 일어난 일을 생각해봐도 말이야..."
"스프레이를 뿌린 건 미안했어. 지금 눈은 어때?"
"......네가 그 녀석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정도다."
"냐햐, 괜찮구나. 그러니까 화학을 좋아하는 쪽의 생체병기 시키쨩 말이지?"
"생체병기라는 말은 안 했어."
"그럼 성격이 개차반에 철면피라고 했었나?"
".....그렇게까지 말했었던가?"
"응, 그랬었어."
"......아아, 이젠 모르겠어."
"조금 쉬어, 아스카쨩."
녀석은 내 몫의 옷이 든 봉투를 들었다.
풍경이 울리고, 문이 열린다.
바깥의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다. 밝고, 화창하다. 마치 여우비가 내릴 것처럼 눈이 부셨다.
+2 다음... 상황
녀석은 군말없이 나를 따라 앉았다. 벤치는 해에 물들어 따뜻했다.
"아 참, 그렇지. 아스카쨩. 스마트폰 들고 왔으면 한번 켜볼래? 핫스팟으로 연결시켜줄테니까. 확인해볼게 있어."
"....."
가방의 맨 아래에 누워있기만 하던 스마트폰이다. 꼭 나의 것으로 확인하려는 거라면...
배터리는 가만히 두었다간 꺼지기 일보 직전. 하지만 짧은 시간 정도라면 괜찮을 것이다.
+2 시키쨩이 할 것은...
잠금을 해제한다. 그러나 내게 통제권은 없다. 남의 집 문의 잠금을 푼다고 해도 그 집안의 사정을 속속들이 파헤쳐볼 수는 없듯이. 무엇이 있는지 불을 켜고 물건 하나하나를 확인해야하듯이. 그런 긴밀한 수색작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정밀한 기계장치는 어두웠다. 화면의 밝기조차 다른 태양의 빛을 받아 조절되어 있기에 그런걸까.
"라인의 전화라면 할 수 있을까?"
"......아니. 이전에도 이것저것 살펴보았지만... 메세지만이 보내졌다고 뜰 뿐이야. 그래서 음성녹음을 남겨두었지."
"메세지가 보내졌다면, '읽음'은?"
"그야 표시될 리가 없잖아. 보내졌다고 나오지만, 실제로는 보내지지 않은 걸테지."
"응, 확실히 '읽음' 표시는 나오지 않았어. 하지만 보내졌다고 나온다면, 보내진게 분명해. 마치 이 카드의 정보처럼."
".....그 메세지의 알림을 보고도 프로듀서는, 아예 읽지조차 않았다는 건가?"
"알림은 왔을거야. 하지만 읽지 못한거지. 사람은 잠을 자면서 스마트폰을 확인할 수는 없잖아?"
"......."
"프로듀서는 라인의 알림은 커녕, 아침의 알람도 듣지 못한거야. 왜냐! 그 곳은 아직 아침일테니. 영수증의 시간은 틀리지 않았어. 오히려 JST의 표준을 따르고 있겠지. '그 곳'으로 얘기하자면 말이야. 아스카쨩은 그러니까, 공간 뿐만 아니라 시간의 흐름마저 거스르는 전이를 하고 있던게 아닐까? 공간의 흐름이 흐트러지면서 그 쪽의 시간에 문제가 생겼다거나, 아스카쨩이 순리대로 살고 있어야할 세계에 아스카쨩이 빠지게 되면서 시계의 부품이 하나 사라진 것처럼 망가지게 되었다거나."
순리대로.....
....망가졌다... 라고.
"표시된 시간은 가게가 오픈하기도 전. 뭐, 주인이 부지런하다면 오픈 준비 시간 정도 되려나? 그런 시간에 영수증이 출력될 리는 없으니까... 그 경위까지야 모르겠지만."
"그럼... 프로듀서가 이 메세지를 본다면, 응답할 수도 있다는...."
"그것까지는 모르겠어. 그냥 생각이야. 처음에 아스카쨩이 내게 온 것부터 말이 되는 건 하나도 없었으니까. 지금까지의 얕은 앎으로 말이 된다고 받아들여버리면, 나중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해할 수 없게 되어버리잖아?"
"어차피 할 수 있는게 없다는건 마찬가지란 소리군."
"냐하하, 그러게. 처음부터 시키쨩이 할 수 있었던 건 아무것도 없었어. 망상병의 치한으로 오해하고 콩밥을 먹일 생각을 했을 때부터 말이야."
"그렇게 심하게 생각했었다고?"
"어째서? 콩밥은 건강하잖아?"
"....건강한걸로 따지면 두부도 건강하지."
"그런가! 나쁜 짓을 하면 건강한 음식을 먹는구나. 그럼 아스카쨩도 조금 더 나쁜 짓을 하는 편이 좋겠어. 안 그래도 이세계에 와 있는데 몸보신이라도 잘 해야지."
"아아, 그러냐. 바라는게 그거라면 얼마든지 해주지."
+1~2 다음 상황, 이야기거리, 혹은... 무언가
시키: 죽었잖아 여기의 아스카. 혹시 I see dead people?
아스카: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죽어서 묻힌 곳. 한번 보고싶어. 없나? 묘비나 사진이라도 있겠지
정작 녀석은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도 신경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거기선 없는 것들도 있거든. 토루코 라이스의 케챱 스파게티, 부끄러운 메이드 복장을 입고 돌아다니는 웨이트리스들. 그런 것들은 역시나 일본이야."
"하긴 그렇겠군."
"음식이라고 하면 이와테 현의 '그것'도 있지 않나. 그릇을 잔뜩 쌓아두면서 먹는..."
"아, 왕코소바 말이지? 응, 그렇네. 사실 생각이 나지는 않았어. 먹게 된다면야 먹겠지, 이 정도. 일부러 도쿄의 중심지에 방을 잡았는걸. 그래서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동안에도 굉장히 들떴어."
"...티켓은 편도였나?"
"응!"
"지나치게 해맑잖아."
"그럼 안 돼?"
"돌아가는 곳이 없다는건 그런거야."
란코가 떠올랐다.
내가 그리워했던 란코와, 긴 옷이 가득했던 시키의 캐리어. 아무도 모르게 온 여행의 경위...
"그건, 딱히 내가 없어져도 세상이 발작하지는 않겠구나~라는걸 확인받기 위해서였어. 다른 의도가 있던건 아니야."
"시키."
"시키쨩은 하고 싶은걸 하고 싶으니까. 하고 싶은 것을 하는건 재미있으니까. 그래서 멋대로 비행기 티켓을 끊고, 최고급 호텔에 방을 잡아뒀어. 최고급 호텔이라면 어디라도 상관없었지만 연고가 없는 곳이라면 도쿄였지. 그래, 향기를 맡아보지도 않은 곳. 그 곳이라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 하고 싶은걸 찾아낼지도 몰라."
".....그래. 그럼, 하고 싶은건 찾았어?"
"응."
"......."
"엉망진창으로 아프고 싶어. 자기 자신을 고문하는거야,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녀석이 간직했던, 태어난 상태 그대로의 귀는 지금껏 무엇을 들으며 자랐던걸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늘은 붉음을 품고 있었다.
[어린이들은 집으로 돌아가주세요]라는 기계적인 음성이 어디선가 들려올 것만 같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 한번 이쪽 세계의 아스카를 보고 싶어."
"응? 죽었잖아, 아스카는. 혹시 아스카쨩, 오컬트 쪽에 관심있다거나?"
"그런게 아냐. '아스카'가 이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그 흔적을 보고 싶어. 없을까? 묘비나 납골당에라도 있지 않을까?"
+1~ 투표.
1. 아나스타샤
2. 란코
"어떻게 찾을지는, 란코에게 부탁할거야."
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쯤은.
하지만, 더 이상 이 세계의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눈을 가리고, 환상으로 속이고, 남은 자의 일들을 남겨둘 수는 없어. 의도치 않은 첫 만남, 그 때도 나는 도망쳤다. 너무나 그리웠던 첫번째의 대화에서도 나는 도망쳤다. 첫 한번을 했다면, 그 뒤로는 쉽다. 아니, 그 뒤로도 계속 같지 않으면 안 돼. 계속 외면하고, 또 외면하다가 결국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기는 싫다. 이미 매듭이 풀리기 시작한 실은 다시 꿰메어나가야 흠집이 되지 않아. 서툴더라도 직접 해야해.
너를 더 망가트리고 싶지 않아.
"그 애라면.... 알기는 하겠네."
"응."
"그걸 알려줄거라고 생각해?"
"그건 내일 확인할 문제겠지."
"내일?"
"오늘은 너와 내가 보낼 시간이잖아."
".....그렇구나."
"그렇구나는 무슨. 남의 전화에 끼어들어서 먼저 말한게 누구였지."
"엄밀히 말하자면 그건 시키쨩의 전화였어. 칸자키 란코도 그걸 알면서 전화를 했다는건 내게 직접 이야기하기 위함이었겠지. 아마 그 애는 나를 방바닥에 떨어진 레고 정도의 취급을 하고 있을거야. 밟으면 아프니까 피해가야하는 귀찮은 레고블럭. 그 애는 고스로리 인형옷을 잔뜩 갖춘 미니어처 옷장을 향해 아장아장 걸어가고 있단 말이지. 블럭이 방해물인건 당연해."
"그럴 리가 없잖아?"
"아니란 말이야?"
"제대로 대화를 해보지도 않은 너한테 전화를 하진 않을걸. 란코는 그렇게 뻔뻔하고 붙임성이 좋지는 않아."
"구멍가게의 딱풀처럼?"
"....그런건 접착성이라고 하겠지."
"냐하, 알아알아. 아스카쨩은 농담을 잘 이해하지 못하네."
"어디까지가 농담이지?"
"전부 다?"
"'모든 영국인들은 다 거짓말쟁이다'....인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3 자, 오늘을 마무리하자. 호텔로 돌아가기 전 갈 곳은...
"소원을 이뤄지는 분수구나, 뻔한 마케팅 상품이네. 유일신 카코님을 배신하고 이런 이단을 믿는거야? What a shame, 아스카쨩."
"....어느새 카코 씨의 광신도가 되어있군, 너는."
"그것보단, 그냥 노는게 좋은거야. 재밌으니까. 그래서 아스카쨩은, 소원 빌거야?"
"현금은 중요하니까 그런 짓은 하지 않을거야. 공상할 의지도 없이 낙하하는 물방울의 덧없음을 구경하는거다. 그래, 단지 그런거야."
"분수가 예쁘다고 솔직하게 말해주면 좋을텐데."
"너는? 소원을 빌건가?"
"뇌물이나 받는 분수보다 이쪽 세계의 카코님을 찾는 편이 간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진심이냐."
"허튼 말은 하지 않는다, 그것이 시키쨩."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는 헛소리군."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몸은 솔직한걸. 흥미가 동한것 같다는 눈동자야. 시키쨩이 잘못본걸까? 사실은 저 분수 아래에 가라앉은 동전들이 탐나는걸까?"
"탐날까보냐. 그런 꺼림칙한 돈은 깨끗한 상자에 포장해서 준대도 사양이야. 타인의 염원이 깃들어있다거나 하는 미신적인 이유는 제쳐두더라도 위생적으로도 적절치 못하다고. 물의 표면을 바라봐도 자신의 상이 아니라 버려진 동전들이 쌓여있을 뿐이지. 그런 불온함을 담은 파문 안으로 손을 뻗을 수 있을까?"
"물은 아무 죄가 없어. 좀 더럽긴 하겠지만."
"그게 죄야."
"물이 저지른 것이 아닌데도?"
"......."
"있잖아, 역시 뛰어들어보기 전까지는 몰라."
"뭐?"
물에 뛰어든다.
그건.....
"아스카쨩이 그랬잖아, 솜사탕을 보면 만지고 싶다는 감상을 말해주면서. 솜사탕은, 움켜쥐기 전까지는 푹신한 솜처럼 부드러울줄 알았겠지? 사실은 끈적하고 달라붙기만 할텐데 말이야. 하지만 만져보고 싶다는 마음과 만지고 나서의 찝찝함은 절대 가짜가 아니야."
"잠깐, 시키."
"충동은 이기려하는게 아니야. 지금 바로 하지 않으면 어느날 불쑥 두통으로 찾아와버릴지도 모른다고. 사실은 뛰어들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지?"
"위험한 소리에 위험한 눈빛을 하고 있잖아."
"어딜 봐서~?"
....녀석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고양이같이 말려들어간 입꼬리는 더 장난스럽게, 입술에서 나오는 말들은 소리 없이 위험하게. 멈춰야하는데 발은 야속하게도 멈추지 않는다. 계속해서 뒷걸음질로, 다급한 사고회로에 고장난 시계처럼-
+1~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는 주사위에서 두표 먼저 나온 쪽으로.
1~50 방어 성공
51~100 너의 눈동자에 빠지고 싶어
"안 돼?"
"당연하지."
....겨우 멈추기에 성공해서, 수면으로 넘어가는 대신 가장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우선 안전거리는 확보다. 그러니까, 조금 앉아있어도 괜찮겠지. 분수 소리가 듣기 좋으니.
"너도 앉지 않을래?"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네. 비켜줄래?"
"내 옆에 앉으면 되지 않나."
"하지만, 조금이라도 아스카쨩이 따뜻하게 데워둔 자리에 앉고 싶은걸."
"네가 살고 있는 계절이 여름이란걸 망각하고 있나보군. 비키기야 하겠지만."
"뜨거운 것과 따뜻한 건 달라. 아스카쨩은 태양이 아니잖아?"
"아아, 그러네. 그랬다면 이미 타오르고 있었을거야. 지근거리에서는 받아줄 생명이 없어서 아득한 공간에서 홀로."
"그러다 외로움에 질려서 결국 지나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취미를 가지게 되는거야? 응큼해."
"유해하게 해석하지 마."
"동화는 유해한 것이 아니었어? 구두에 발을 맞추기 위해 발 뒤꿈치를 자르는 사칭범의 신데렐라. 성격 나쁜 난쟁이에게 시비를 걸었다가 영영 가시덩쿨을 해메게 된 왕자. 그리고 또 뭐가 있었더라, 아! 금발 페티쉬 근친범을 피해 도망나온 공주님도 있었지."
"그건.... 그건, 그게 결국은 인간들이 원하는 동화의 결말이라는 거다. 동화를 듣고 자란 우리는 늘 마음 속에 동화를 품고 있지."
"예를 들면?"
"그 모든 파국의 근간은 권선징악이 아니던가. 인간은 모두 제각기 가진 삶이란 이야기의 주인공이야. 싫든 좋든, 그건 정할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지. 신데렐라는 주인공이 되기 위해 비참한 시중을 들었었나. 모친이란 인물은 엑스트라가 되기 위해 악행을 일삼았나. 아니, '그렇게 만들어졌을' 뿐이야. 생명이 부여된 순간부터 죽음을 맞이하는 때까지. 그렇게 결말이 없는 이야기를 해메는거야. 동화로 학습된 희망을 갖고. 자신은 특별하고, 다를 것이리라 믿고 살아가. 거친 해일이 와도 물러서겠지. 괜찮을거야. 그렇게."
오래오래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좋겠는데, 슬슬 돌아가고 싶어졌다.
"....그렇게. 써나가는 거야, 자신만의 동화를."
"응응. 그런거야, 아스카쨩은?"
"어리기에 할 수 있는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뭐 어때? 그런 생각이라면, 이럴 때만 할 수 있는 생각이라 멋진거야. 그렇지 않다면, 아스카쨩은 나이를 초월해서 미래의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거고. 한마디로 에스퍼!"
"........그럴지도 모르겠군."
"응? 아스카쨩 정말로 에스퍼?"
"아니.... 만약 그랬다면 이미 네 마음을 읽고서는 정신이 나아갈 방향을 잃었겠지."
"뭐야, 시키쨩 마음 읽고 싶어?"
그런 식으로 말하니까 이상하게 들리잖아.
"아니, 보이는 걸로 충분해."
"그래?"
"그래."
"그렇구나!"
"지금이 좋아."
"슬슬 돌아갈까?"
서서히 밝혀지는 공원의 가로등을, 그리고 불빛을 등지고 걸어간다. 분수는 이미 멎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차게 식은 자리와 떠나는 뒷모습이 기억을 건드린다. 내가 버린. 녀석이 버린 자리.
찢어지는 음성.
넌 뭐라고 했었지.
나는 뭐라고 했었지.
어떤 말이 가장 깊은 상처를 남길까.
그런 것을 고민하게 만든 것은 너일까, 나일까. 무엇이 옳았던걸까.
그 때의 넌 나에게서 떠나고 싶어했을까.
"....같이 가."
"응? 안 오고 있었어?"
"....반딧불을 찾고 있었어."
할 말이 없었기에, 아무런 말이나 골랐다.
"보이지 않는걸 찾고 있구나. 쓸데없이."
"그래, 그러네."
"그러고보니 아까, 칸자키 란코에게서 문자가 왔었어."
드라이기의 소리가 소음에 불과해질 무렵 녀석이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방향을 틀자, 온풍에 날리는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거울에 투두둑 붙어버렸다. 그런데도 아직 마주하기는 어렵다.
".......뭐라고?"
"칸자키 란코한테서 문자가 왔었다고. 전화를 하고 싶다는데. 아, 만날 수 있는 시간도 적어뒀어. 철저한걸. 역시 프로 아이돌다워. 칭찬한다고 보내주는게 좋을까?"
"아니, 그러지 마."
물론 란코는 꼼꼼하긴 하지만, 그건 잘못하면 미움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상상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런 어프로치를 해오는 것은 역시, '그것'이다.
"전화는... 하지 못하겠다고 해.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으니까."
"뭘?"
"........"
내일은 녀석도 같이. 그 점을 고려하고 란코는 나에게 전화를 하려고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녀석이 무슨 생각으로 란코를 보고싶은 건지는 솔직히 전혀 짐작가는 바가 없어. 하지만, 내가 란코에게 고백하려는 것은 란코와 나만의 것.
...이야기해두는 편이 좋겠지.
+1~2 어떤 식으로 이야기하는게 좋으려나.. (자유 앵커, 적당히 채택)
+3 시키쨩의 대답
"......"
녀석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휘젓다가 대답했다.
"오케이! 같이 놀자!"
"....둘이 해결할 문제야. 오랜만이기도 하고...."
"흐음. 오랜만이라는건 이해해. 하지만 정말로 이상하네, 칸자키 란코와 한 통화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던거야?"
"란코는 내가 이 세계의 아스카인걸로 알고 있어."
"그게, 큰 차이점을 만들어?"
"아주 큰 차이점이지."
철거 직전의 유원지에서 그녀는 란코의 손을 품었다. 추상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필름의 세계를 공유하고, 알 수 없는 비밀을 속삭였다. 홀로가 아닌 하나의.
그러나 그게 큰 차이를 만드는게 아니었다.
내가 놓은 것을, 그녀는 놓지 않았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세계가 그녀의 선택이 되었다.
그것은....
".....이 곳의 그녀는 란코를 내버려두지 않았으니까."
'니노미야 아스카'는 죽었어.
나는 불필요한 혼란을 야기했고, 그것에 대해 책임을 질 의무가 있다. 경멸 섞인 시선이 나를 심판해주기를 원한다. 그리고 대답해주기를 원한다. 그 대답을 란코에게서 듣고 싶었다.
"결말을 지을 시간을 줘."
녀석은 웃었다.
"알았어."
머리카락이 완전히 마르고 있었다. 바스락거릴 정도가 되어버려 오프로 밀었다. 이제는 옷을 입어야하는데...
"그럼, 시키쨩은 뭘 하고 있을까? 아스카쨩 때문에 뭘 할지 모르게 되어버렸으니 책임져! 네, 알겠습니다 시키님! 오늘 사온 팔랑팔랑한 드레스를 입어볼까나~"
"...내 대답까지 해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럼 명령이야. 입어볼래?"
.....아무래도 오늘 밤은 녀석의 요구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군.
그래, 미안하다고.
+1 내일 아침, 란코와 만날 장소는
+2 시키쨩은 어디에 가있을까?
+3 무엇을 할까?
"아스카쨩 아스카쨩, 같이 사진 찍자~"
"옷을 입힌 것은, 그러려고...?"
"아니, 아스카쨩을 놀리고 싶었거든. 하지만 이왕 예쁘게 꾸민 기념으로 사진으로 남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사진은 순간을 담아내는 수단. 과거에는 영혼을 가두는 도구라고도 했다.
그러고보니 아직은 녀석과 함께 찍은 사진이 없었다. 지갑에 간직한 사진은 다른 세계의 것이니.
"좋아."
녀석은 즐거이 필터를 골랐다. 이 현실의 색감과 감각이 전부 무너지도록. 내가 보는 녀석은 전혀 그런 것이 아닌데, 카메라를 통해서는 다른 일면으로 남아 찍힌다. 영혼을 가둔다는 속설은 거짓이다. 이 곳에 존재하는 영혼은, 그것보다 큰 무언가다.
"자, 치즈. 아! 잘 찍혔당. 이거 란코쨩한테도 보내줄까?"
"그게 무슨..."
"냐하하, 폰은 내 손에 있는데 무슨 수로 막으려고~?"
사진으로 기록된 소소한 역사에도 남지 않을 고군분투는 수마가 순식간에 덮쳐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녀석도 나도, 완전히 지쳐서 침대에 녹아내렸다. 아직도 녀석의 머리카락에는 물기가 남아있었다. 머리를 댄 자리의 시트에는 수채화의 번짐처럼 자욱이 남았다. 문질러 닦아도 없어지지 않을 터였다.
"-- 사거리에 있는 백화점 앞이래. 만날 곳."
"전문을 들으려면 한달은 걸리겠군."
참 빨리도 말한다. 눈이 감겨올 때가 되서야 들었다.
"어제가 지나갔으니까야."
"12시 1분이라도 되나?"
"응, 정답. 똑똑하네에."
"....넌 뭘 할거지?"
"그냥 구경. 백화점은 넓고 잃어버릴 길은 많잖아? 하지만 걱정 마, 원래 자리로 돌아올게. 그렇지 않으면 아스카쨩이 찾을 수 없을테니까."
"소통할 수 없는 소통기구를 비꼬는건가."
"아니, 소통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라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응."
녀석은 란코와의 불화를 예견하고는 그런 말을 했음이 틀림 없다.
나로서는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없는 문제였다.
".......자, 아스카쨩."
"그래."
"잘 자."
"모닝, 아스카쨩. 어제 미리 외출복으로 갈아입어둬서 편하지 않아?"
"아아, 그래. 너의 선견지명이 나를 구했어. 덧붙여 약속 시간이 언제인지 가르쳐주지 않은 것에도 감사를 표하지."
"지금 뛰어가면 늦지 않을거야. 하지만 20초 뒤에 뛰어가면 약속에 늦을지도. 삐- 삐- 삐- 시키 타이머 작동합니다- 이-십-초-"
"네가 내 알람이었으면 진작에 부숴버렸을거야."
"삐- 17초-"
정신 없이 준비해서 '다녀와'라는 인사를 듣고 뛰기 시작했으나, 정작 약속 시간은 정확히 언제인지 듣지 못했다.
설마 속은 건가, 싶었지만 백화점의 앞에 란코가 보였기에 안심했다.
두려움이 아닌 안심이다.
그 무엇보다 나는 녀석이 제일 두려운걸지도 모른다.
+2 우선은 숨을 조금 고르고, 란코에게 다가간다. 제일 처음 할 말 / 행동은....
+3 다음 상황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기에 서둘러 백화점 매장의 유리창을 보고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그리고는, 다가간다.
얼마나 오래 되었을까. 내 의지로 란코를 보는 것은...
"....오랜만인가...?"
약품 냄새, 하얀 바탕, 환기되지 않은 닫힌 공간- 그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은 란코를 만나고, 이야기하고, 만지는 것은, 실로 오래 된 일이었다.
".......!"
....하지만 이건, 그 란코가 아니야.
"아스카쨩...”
같은 목소리로 같은 이름을 부르고 있지만, 그녀가 부르는 건 나의 이름이 아니다.
나를 보고 있지만, 나를 보는게 아니야.
기만적이게도, 나 역시 그렇겠지.
"..보고 싶었어, 아스카쨩..."
그러나 그 어떤 시간도 란코가 내게 안기는 것을 막기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1~ 투표.
1. 안아주고 싶어
2. ....그게 1분이라도, 더 이상 가면을 쓰고 싶지 않아.
왜?
언젠가 한번은, 기뻐서 주체하지 못했을 때가, 그리고 그것을 나누고 싶었을 때가 있었을텐데....
그건...
"....아스카쨩..?"
아이돌이 되고 난 후였다.
란코는 그 자리에 없었다.
아이돌이라는 것도 불확실한 미래로의 탈출이 아니었던가. '우상'이 되는 것은 결코 쉬이 오를 탑이 아니다. 명료하지 않은 운이란 것에 하는 베팅. 일상을 저버릴 정도의 전율.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의 비일상. 프로듀서의 명함이 그 세계의 초대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그 때 이후로 돌아왔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란코."
"......."
병원 침대에 누워있던 란코는 안을 수 없었어.
실체 없는 몽상이라 부른다면 그게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란코를 그런 신기루로 속이고 있을 뿐. 그건... 부정할 수 없다.
"....미안해. 고백하지 않은 것이 있어."
"자, 잠깐, 아스카쨩..."
"나는, 네가 아는 '아스카'가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이야.....?"
"....사람은 수많은 선택을 하며 살아가. 그런 선택들이, 그리고 선택을 하지 않은 선택들은 무한으로도 표현하지 못할 정도의 수의 세계로 갈라진다고 누군가는 말했었지."
"......."
"나의 세계와 너의 세계가 어떤 갈래에서 분화되었는지는 알 수 없어. 하지만... 너와 '아스카'가 나누었던 환희의 색채 같은 것을, 나는 몰라. 결국 나는 란코를..."
말을 이어나가기가, 아니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모든 것을 쏟아내고 나자 주변이 온통 물결처럼 일렁이는 것 같았다.
"......란코를...."
+1~3 란코의 반응+주사위.. 가장 낮은 수로.
"왜... 아스카쨩이 우는거야..."
"......."
그러게, 나는 왜 이러고 있을까. 어째서, 생각했던 것은 하지도 못한 채 부서져내리게 두었을까. 너를 위해서라고, 너의 일상을 지켜주고 싶다고 세치 혀로 자신을 세뇌시키고, 꼭 옳은 일을 하는 것처럼 위선에 차있었을까.
"울고 싶고, 물어보고 싶고, 따지고 싶은건.. 난데.."
품 안에서 떨어진 란코와 나의 사이에 허망한 바람이 불었다. 혼자로는 서 있을 수 없어. 하지만 란코에게 의지할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란코의 앞에 될 수 있는 최대치의 한계선 안에서 진실되게 존재하는 것 뿐. 가슴 속에서 올라오는 것이나, 눈가가 쓰라리는 것은, 내가 이 곳에 니노미야 아스카로서 서 있다는 것의 징표일까? 그렇지 않다면, 나는...
"...화내고 싶은 건, 그러고 싶은 건... 난데..."
"........."
"그러지도 못하게..."
"....미안해, 란코."
"으으...."
란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잘 만든 도자기인형처럼 깨끗했던 얼굴이 꼭 깨어질 것 같다고, 외람된 생각이지만 그렇게 여겨질 정도로. 보석같은 눈물을 소매 끝으로 아무렇게나 닦으며, 란코는 그렇게.. 목 놓아 울었다.
우리는 누구도 홀로 서 있을 수 없었지만, 누구도 서로에게 기댈 수 없었다.
"내가, 정말... 미안..."
+3 다음... 상황.
란코의 옆에 있는 '나'는 가장 오차가 없는 그대로의 자신이기를 계속해서 확인받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을테니까....
...나는, 이런 것이 무섭다.
카페는 백화점의 소유이기에 카페 본연의 맛보다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으로 포커스가 맞추어졌다. 이전의 세계에서도 길을 오며가며 간혹 봤었던 곳이다. 야외에 가짜 야자수와 상아색의 동상들과 함께 가든용 테이블을 둔, 백화점의 내부만큼이나 인간의 활기로 가득한 곳. 지금의 나는 속할 수 없는 의지가 여백을 전부 메우고 있다. 란코도 같은 것을 느낀건지 눈물자국으로 얼룩진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내 몫의 의자를 빼두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도.
아, 내가 알던 란코라면 '영혼의 공명'이라 말하겠지. 환한 미소와 함께 말이다.
"고마워, 란코."
"......"
"......"
그러면서도 본인 몫의 의자는 빼지 않는 것이... 겹쳐보인다고나 할까. 란코다웠다.
"...고마워, 아스카쨩."
조그마한 목소리도 란코였다.
"아니야."
그래, 그렇지만 아니다.
서로가 아는 서로가 아니다.
내가 기대하는 너는 이 곳에 없고, 네가 기대하는 나 또한 이 곳에는 없어.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는 너는, 잘 정돈된 말을 건네지 못한 내가 전하려 했던 나의 현실을 - 그 의미를 이해했을까....
".....응."
"........왜... 말하지 않았어...?"
'왜'라는 질문을 마지막 숨이 차오를 때까지도 계속할 나는, 정작 이유도 없이 잘못을 행했다.
왜.
"....미안해."
"......."
"......."
"그러니까... 아스카쨩은... 아무것도 모르는..거야?"
"이쪽 세계에 대해서는..."
"....그렇구나.. 혹시, 어쩌다 그렇게 된건지 얘기해줄 수 있어...?"
"......미안. 나도 도저히 모르겠어."
"아, 아니...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하고 마지막 말을 삼키는 란코.
어느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스카'의 죽음.
내가 란코에게 물을 수도, 란코가 나에게 물을 수도 없는 것.
그러나, 여태까지의 정보로 미루어보아 그것은 아마 부정할 수 없는 진짜다.
란코가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스카쨩..."
란코가 나를 부른다.
".......나, 어떡해....?"
'란코'는, 나를 잡는다.
....그리고 나는....
+1~2 다음 상황, 혹은 란코에게 해줄 말 / 행동..
+3~ ....에 대한 투표. (1 / 2 / 1+2)
그저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라고, 그만 이기적인 마음을 먹어버린다. 내가 알던 란코를 이 세계의 란코에게서 보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감각으로 보아 자연스러운 일임을- 그 것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이루어질 수 없는 희망을 손에 쥐어주고서 곧바로 앗아가버린 이. 나의 죄로 인해 헤식은 란코를 바라만 보는 것은, 할 수 없다.
어떻게 해야할 지는 잘 모르겠다. 이 곳에 와서도, 이 곳에 오기 전에도 나와 인간의 사이에 있던 관계의 조각들은 그 곡절을 가늠할 수 없는 것들 투성이다.
너를 잘 알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깊이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 상태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계속 그렇게 생각해왔다. 더 나아가지 못하고 발목이 묶여버렸다. 그런 얄팍한 내가, '그녀'의 동정動靜을 헤아릴 수는 없다... 그런건가. 그것이 진정 섭리일까.
....그렇다면, 결국은 다시 제자리군. 이래서야 성공도 실패도 하지 못하고 고장난 라디오처럼 몇번이고 같은 전파를 반복할 뿐이 아닌가.
계속 오지 않을 신호를 기다리는 채로, 두 사람은...
"너의 마음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게 알려줄 수 있을까."
"......."
"어떤 방향을 향하든, 나는 따라갈게. 나를 증오하고, 힐문하든 좋으니까..."
"...몰라, 모르겠어... 전혀 모르겠어..."
란코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무엇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면, 작은 손톱에 긁혀 조금 아플 정도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아.
"그런데.. 그러고 싶지는 않아... 아스카쨩은... 잘못한게 없잖아...?"
"란코... 그건..."
"...나, 나는, 그냥.. 아스카쨩이... 너무 보고 싶어.. 그게 다란 말이야..! 그러니까-"
+1~ 주사위로 2표 먼저 나온 쪽으로..
1~50 제발 사라져
51~100 다정하게 안아줘
"......."
"그러지 않으면... 못된 마음을 먹을 것 같아... 나."
란코는, 그녀도 간신히 숨을 붙잡고 있으면서도, 내 뺨을 부드러이 쓸어주었다.
"걱정, 하게 해서 미안해.. 아스카쨩.... 나는...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란코."
"응? 제발... 뒤 돌아보지 말고 가줘... 나를... 더 흔들어놓지 마."
원래 없던 사람처럼....
죽은 그녀처럼....
"....'친구'로서 마지막 부탁이야, 아스카쨩."
아직 머리 속에 아무 것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그 말에 내 발은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양 멋대로 떨어졌다. 발목을 잘라내기 전까지는 절대 멈추지 않는 빨간 구두를 신은 양, 란코에게 멈추어있던 안타까움은 저 멀리 내버려두고,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를 실종을 감행한다. 도착지가 어디든 상관 없다. 란코의 시야에서만 말끔히 사라진다면 그만이다.
스쳐지나가는 군상, 수근거리는 목소리, 웃고, 떠드는 목소리는 귀를 간지럽힐 뿐 바람처럼 멀어진다. 그저 그 전부가 한 구로 결합되어 웅웅댄다...
시끄러워.
귀의 작은 구멍을 통해 들어온 소리는 이내 꽉 막힌 텅 빈 공간 안에서 자유로이 헤엄친다. 참 열심히도, 몸을 꿈틀대면서. 그래야만 살아있을 수 있으니까, 라고는 하지만 그 공간의 주인으로서는 몸서리쳐질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다. 찢어지고, 또 울리고, 가슴을 찌른다.
그래도 가야만 해.
가야할 곳에 도달할 때까지 멈춰서는 안 된다.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시키."
".....아스카쨩? 나, 방금 왔는데. 혼자인거야?"
가둬진 소리는 여전히 내 안에서만 움직이고 있다. 어지러워, 빙빙 돈다.
"안색이 안 좋은데. 시키쨩의 부축 필요해? 어떻게 된거야?"
"....끝이야."
한 가지 위안은, 기어코 주저앉기 전에 찾아냈다는 건가. 찾아낸건지, 내게 온건지.
"전부?"
".....아니. 전부는... 아니야."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고개를 똑바로 들지 않아도, 옆에는 여전히 수많은 사람이 지나쳐가고 있어도. 녀석의 작은 숨소리, 체취, 그리고... 열기가,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나는 그 장소로 단지 걸어갈 뿐이다. 우리의 발자국이 맞닿는 곳에서 무언가가 텅 빈 소리를 관통해, 이 막막한 통증을 뚫어주기를 고대하며.
"으응. 수고했어, 아스카쨩."
'그것'을 수고라고 불러도 되는 것일까.
그렇지만, 녀석은 내게 문을 열어주었다. 팔을 벌리고, 고양이같은 미소를 지으며 손짓한다.
들어가도 되는 걸까, 라는 고민을 할 작은 시간의 사이가 소멸한다. 단 0.0001초도 되지 않는 프로세스로 받아들여버린다. 아, 이제는 몸의 촉감으로 느껴진다. 충분히 가까이, 녀석은 이 곳에 있다. 마디뼈 하나하나에 와닿는 살아있는 감각이다.
열기가 몸을 꿰뚫는다.
대책없이 온도는 끓어오르고, 곧바로 갇혀있던 소리들이 와장창 깨져버린다. 공기가 얼버무리던 소리들은 그제서야 선명하게 들려왔다. 오늘은 날이 좋아, 저 빌딩은 무척이나 높구나. 그런 쓰잘데기 없는 일상의 소리들이.
"시키."
척추 부근이 살짝 움찔거렸다. 이런 나를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이. 하지만, 역시 종국엔 평소의 시키처럼 안아버린다.
"그래그래, 아스카쨩. 시키쨩이 부르고 싶으면 마음껏 불러."
시키, 시키, 시키.
아스카쨩, 아스카쨩, 아스카쨩.
같지만 다른 목소리들이 교차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 곳의 녀석을 부른다.
"시키.... 나는...."
+1~ 투표.
1. 돌아가야만 해
2. 용서받고 싶어
"......."
"나의 존재를. 이 세계로부터."
".....왜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나는,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니까. 그렇게 해서 시간도, 그 사이도, 감정도, 전부 부정해버렸으니까."
안식처는 없다. 조금이라도 안심할 구간이, 선택이 나에게는 없다. 녀석을 끌어안고 폭발해버릴 것 같은 마음이 내면에서 부서지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 전부.
그래, 끝을 선고받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살아가는 것만이 삶의 모든 것은 아니지 않나. 나는 분명히 존재하지 않아야할 곳에 존재하고 있다. 나를 거둬들인 것은 그녀의 선택이고, 나의 바람이다. 그건 내가 찾아낸 한 가지의 희망이다. 다만, 지금 이 곳에 존재하는 너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 나를 부정한다.
우리는 이 땅을 밟고 서 있다. 흔들리는 땅이 무너지면, 그 때는 정말로 끝이 도래할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지? 그저 끌려가기만을 기다리는 건, 전혀 녹록치 않아...."
+2 시키쨩의 대답
"냐하... 음, 왠지 단게 좀 땡기는데~"
...그래, 책임져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뭐라도 먹으러 가자! 시간은 충분하니까, 좀 추스르고 나서 생각해도 좋지 않을까?"
"......"
"으응? 왜 표정을 숨기려고 하는거려나? 아스카쨩. 어떻게 생각해?"
"네 판단이 그렇다면, 천재소녀 씨."
"섭섭해라. 용서받고 싶다는건, 첫날로 리셋하고 싶다는 시그널?"
"아니, 아냐. 너도 그런 것을 바라지는 않을테니."
"이름 불러줘."
"시키."
"응."
".......'응'은 무슨."
"응."
"그래."
"'그래'는 무슨."
"어떤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무엇이라도 네 대답이라면 받아들이고 싶어서다. 그거라면 납득이 되려나."
녀석은 내 어깨를 밀어냈다. 거친 동작이었음에도 힘은 조금도 실리지 않은 것처럼 부드러웠다. 표정은, 웃고 있었다. 이제까지 계속되었던 것일 수도 있고, 일순 바꾸어버린 것일 수도 있겠지.
그 때, 아침 이후로는 처음으로 제 정신인채 녀석의 얼굴을 마주했다. 단 하나의 감각만을 제외하여 전해졌던 열기는 아직도 손에 남아있는데, 시각이 수용한 초상은 그의 온도를 한층 높여버린 것 같다.
"아스카쨩."
"........."
"역시, 먹으러 가자?"
"...응."
마치 의견을 묻는 듯한 어투였지만, 가장 확신에 찬 한마디였다.
발은 어지러이 길을 밟으며 어두운 곳을 피해간다. 걷지 않으면 멈추어버릴테니까. 이 하늘 아래 존재하는 내가 계속해서 머물 것임을 알지만, 아니, 알기 때문에 속도를 높이지는 않을지언정 멈추지는 않는다. 그렇게 풍경들을 떠나보냈다. 오후가 끝나가는 것과 동시에 내려가는 밝은 햇살의 커튼도, 뾰족한 빌딩도, 눈높이 안의 활기들도. 그럴 무렵 녀석이 말했다.
"우리, 길을 잃어버리고 있어."
"그런 것 같군. 나는 너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네가 그런 소리를 한다면야."
"신기하지 않아? 물건은 '잃어버렸다'로 끝이지만, 길은 계속해서 잃어버릴 수 있잖아."
"....그런가."
"동의하지 않는다는 얼굴이네."
"뭐, 잃어가는 중일 수도 있는 무언가라면 '그것'도 있으니까 말이야."
"흠.... 뭘까나? 관계? 존엄? 자신다움?"
"일종의. 그런거야. 되돌아보면 이미 잃고 난 후일수도 있지만, 잃어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할 때도 있지. 그럼, 손가락의 사이로라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어떻게든 붙들려 애를 써야해."
"잃고 싶지 않아서 안간힘을 쓰는 '그것'이 대체 뭔데?"
"인간애."
".....인본주의적이네."
"애초에 나는 인간이니까."
"동물이 비거니즘하는 소리 하네."
"그래, 그런거다."
"그러니까 자연주의자는 자연이고, 환경 운동가는 환경이고. 세상은 정말 기묘한 이야기로 가득하네~"
"몰랐다면 유감인데."
"아니, 알고 있었어. 게다가 아스카쨩을 만나면서부터 더욱 확실해졌지. 응응, 실로 세상은 기묘해!"
"그 말은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데."
"왜? 시키쨩 기묘해?"
"그렇다기보다는, 네가 내 주변의 것들과 만나서 일으키는 화학반응이 기묘하지."
"그럴까냥? 아스카쨩의 주변이라면, 이런 곳이나 이런 곳?"
"자, 잠깐. 간지럽히지 마."
"흐흥, 싫은데~? 어디 반격해보시지?"
"있지 아스카쨩. 놀이 하나 하지 않을래?"
"무슨 놀이?"
"야생의 본능에 따라 움직여보자, 라는 놀이."
"....불안한데."
"아무튼 하겠다는거지? 그렇게 들린 것 같은데."
"....야, 시키..."
순식간이었다. 어느새 녀석은 등 뒤에 있었다. 우리는 같은 자리에 나란히 걷고 있던게 아니었나. 약간 혼란스러워질 무렵, 녀석은 손바닥으로 나의 빛을 앗아갔다. 시야 대신 나의 눈에 남은 것은, 칠흑과 조금의 온기.
"자, 뭐가 느껴져?"
"....너의 손."
"아니, 시키쨩의 손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다른 걸 생각해봐. 조금 더 멀리 있는 것들을."
"......노랫소리..."
"오."
"맞나?"
"그게 들려? 나는 안 들리는데."
"밴드 음악... 같은데. 그게 아니라면...."
"아니,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뭐든 같이 있더라도, 같은 것을 느낄 수는 없잖아. 안 그래? 그러니까, 아스카쨩의 느낌에만 온전히 집중해."
".......알았어."
"그리고 발을 뻗어. 느끼는 대로 가."
"........."
"밴드 음악이 아스카쨩을 간질이면, 그 쪽으로 가봐. 잘못 들은 걸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 막상 가까워졌을 때 별로 성에 안 차면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어. 이 놀이에서 룰은 단 하나, 보이는 것에 구속받지 않는거야."
눈을 뜨고 걷더라도 앞에 무엇이 있는지는 필히 확인을 하고 가야한다. 그냥 눈을 뜨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자세히 살펴야만 부딪히지 않고 걸어갈 수 있다. 그건 목적지를 정하든, 정하지 않든 마찬가지다.
하지만, 눈을 뜨지 않아 날뛰는 몽상들이 떳떳이 마음을 휘젓는 조마조마한 지금, 나는 내 앞의 무엇도 걱정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요구받고 있다. 이성이 아닌 욕구를 강요받고 있는 거다.
"어때? 아스카쨩의 본능은 뭐라고 말하고 있어?"
목소리가 부쩍 가까웠다.
보이는 것에 구속되지 않고 좇을만 한 것이 있을까. 설령 보이더라도 좇을 것이 없을 때도 있다. 아니, 어쩌면...
'보이기 때문에' 순수히 갈망할 수 없는게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달큰한 향기가 코를 찌른 것은 그 때였다.
향기와 함께 어둠에 찾아온 그 형상은, 일렁이는 구름과도 같았다. 그 바람에 망설이던 발걸음을 단번에 떼었다.
"네~ 아스카쨩 호가 지금 드디어 출발했습니다~ 칙칙폭폭."
"'아스카쨩 호'가 어떻게 칙칙폭폭이야."
"우주선이 어떻게 소리를 내는지 모르는걸. 그러는 아스카쨩은 알아?"
"피슝....이라거나. 아무튼 칙칙폭폭은 아니지 않을까."
"냐하하~ 그래그래, 피슝으로 하자. 그런데 함장, 아스카쨩 호는 어디로 가는거야?"
".....높은 곳으로."
그럴지도 모른다, 라는 것은 그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전제 또한 동반한다. 무엇 하나 선명하게 밝혀낼 수 없는 것이 미루어 생각하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눈이 가려진 지금은 미루어 생각하는 것만이 진실이다. 그림자 놀이를 감상하는 동안만은 그림자가 정말로 용사이고 또 아름다운 여인이 아닌가. 옳고 그름을 떠나 그것이 가공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이기에, 우리는 그렇게 진실을 칭한다.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길을 걸어간다 - 여기서 마주하는 거친 생각들은 말로, 행동으로 걸러지지 않고 느릿한 걸음으로 드러난다. 방향성은 이미 잃어버렸음에도,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눈이 잠긴 동안의 진실에 더 가까워진다.
란코. 미쿠. 고양이. 시키. 프로듀서. '나'. 생일. 세계. 돈. 병원. 란코. 학교. 카코. 놀이터. 시키. 타격. 후각. 고통. 행복. 죽음. 존재. 꽃밭. 열차....
순서 없는 잡념들이 머리 속을 비집고 들어온다. 얼핏 연결고리라곤 없어보이는 짧은 단어들이 허공을 떠돌다, 맞물리고, 묻어간다. 전부 생각해오던 것들이다. 생각하지 않으려 생각해오던, 그런 사념들이 들먹거렸다.
하지만, 다시 한번 향기를 맡았을 때는 그 모든 것이 무뎌졌다.
우리는 걷고 있지 않았고, 잠시간 침묵을 나눴다.
"지금은?"
"안 나."
"..꽤나 어두워지긴 했지만, 갑자기 빛을 보면 놀랄 수도 있으니까 미리 예고할게. 3초 후에 손을 뗄거야."
"응."
"3."
"......."
"2."
".........."
"1."
"..........어?"
내 눈 앞에 보인 것은...
낡은 구멍가게였다.
"왜 여기로 왔을까."
"그러게.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아스카쨩이라도 냄새만으로 디저트카페를 찾기는 무리였네."
".....알고 있었어?"
"티 나던걸. 왜 알지 못해야하는지를 모르겠어."
녀석은 고개를 가게 쪽으로 돌렸다. '임대'라는 푯말이 붙어있기는 하지만, 누가 정말로 이런 곳을 임대하려고는 할까 의심스러운 외관이다. 누가 봐도 20세기, 그것도 버블 무렵의 구멍가게처럼 보이는데...
"시키."
"왜?"
"우리 처음 만났을 때."
"아아, 아스카쨩한테 뺨맞았을 때?"
".......그건 미안해."
"그래서 그 때, 왜?"
"가게 문을 두드리는 나한테, 여기는 닫았다고 했잖아."
"......그랬었나?"
"응. 그랬었지. 그 말은, 너는 닫히기 전의 이 가게를 알았다는 뜻이었나?"
+1~투표, 2표 먼저.
1. Y
2. N
"...그래, 그 녀석이라면 알겠지. 내가 이 곳에 온 것도 녀석을 찾기 위해서였으니까."
"........."
"그런데, 기억이 안 나. 무엇을 파는 가게였는지, 그래서 녀석은 왜 여기 있었는지."
"알고 싶어?"
"글... 쎄. 너는 아는 것도 없으면서...."
"흐응, 아스카쨩보다는 더 많이 아는 것 같은데? 간단해, 물어보면 되잖아. 저기의 세탁소든, 탐정사무소든. 냐하! 탐정 사무소라니, 진짜 소설 같당. 물론 현실은 배 나온 중년 부부의 쌍불륜현장을 잡으러 이리저리 미행하는게 서스펜스겠지만."
확실히, 물어보면 모를 리가 없다. 건물 뿐만이 아니라 간판까지 낡았다는 것은 이 근방의 가게들이 전부 꽤나 오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가게들이 옆 가게가 무엇을 하는 가게이고 언제쯤 들어왔다 언제 나갔는지의 사정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꿰고 있겠지.
그런데, 그것 하나 알자고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어떨까. 과연 알고 싶을까.
"그래서 아스카쨩은 축축한 빨래와 범죄 예고를 알리는 초대장,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들어? 아, 그 옆에는 금은방도 있어. 괴도 시키쨩이 훔쳐갈 보석은... 삐삐! 저쪽이다~"
"진짜로 가냐."
"잡혀버렸다-..."
"......어?"
"응?"
"누군가 있어."
틀림 없다. 무언가가 슉, 하고 움직였다. 텅 비어버린 가판대와 열려있는 찬장, 캐셔의 자리.... 어딘가에서.
"아스카쨩, 쉬잇."
"........"
왜?
"탐정은 그렇게 쉬이 자신의 위치를 밝혀서는 안 된다구."
속삭이는 바람같은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안에 사람이 있다 해도 문 밖에서 한 말을 들을 리가 없으니, 위험한 일에 휘말릴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나도 모르게 못미더운 표정으로 쏘아보자, 녀석은 또 장난스러운 미소만을 지었다.
"안에 뭐가 있는지 알고 싶어?"
".........."
"그럴 때는 정중하게 노크를 하는거야. 프라이버시는 소중하니까."
"프라이버시고 뭐고, 노크를 한다 해도 소리조차 안 날 것 같은 문이잖아. 미닫이고."
톡톡, 하고 손톱이 닿는 느낌으로 문의 재질을 가늠해보았다. 유리처럼 생겼지만 플라스틱에 가까웠다. 게다가 오래 청소를 안 해서 끈적해보이는 느낌에, 촌스러운 무늬까지.
"그러네, 미닫이네....."
".....어?"
"그래서, 미니까 열려버렸네?"
대체 이 가게는....
"냐하, 미닫이라는거 원래 다 이래? 하긴 잠금장치가 있는 미닫이문도 못 봤지만~"
문은 너무나도 쉽게 열렸다. 문을 사이에 두고 흐릿하게만 보이던 가게의 내부가 나의 현실에 들어왔다. 짙은 먼지의 향기.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은 보통 하지 않겠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나오지도 않은 채로 서 있다. 소복이 쌓인 세월의 흔적이 아무것도 없는 가게에 꾹꾹 들어차 있어 잠시 넋을 놓았다고 해야할까. 죽은 자들의 축제에 발을 딛은 것처럼, 서늘한 정적은 오히려 복작한 광경을 회고시키는 듯한 착각을 심어준다. 아니, 조금은 정겹기까지 하다.
금방이라도 나를 환영해줄것처럼.
"잠깐, 시키. 그렇게 막 들어가면...."
"아-"
멈췄다.
하나는 멈추고, 하나는 움직인다 -- 나는 그 문장에 포함되지 않았다. 시키는 멈추었다. 그러나 내가 들은 낮은 탄식은, 녀석이 아냐. 나 자신도 아니었다. 움직인 것은, '그것'이었다.
홀연히 나타난 그 존재는 나의 이름을 불렀다.
나의 이름을 아는,
나의 존재를 아는,
내가 어디 귀속되어있는 지를 아는 그 존재를,
나는 안다.
그것이 얕은 앎일지라도, 나는 감히 '안다'라는 정의를 생각한다.
".....요시노 씨."
빠른 시일 내에 2부에서 뵙겠습니다. 1부에 대한 의문점이 있다면 질문을 남겨주시거나, 감상을 이야기해주셔도 괜찮으나 비공개댓글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