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오래되지 않은 습관이 있다. 눈을 감은 채 이런저런 그림들을 떠올려 보는 것은 무료한 시간을 죽이기에 좋았다. 십 분, 십오 분, 서류를 정리하기에도, 판촉 진행상황을 알아보기도 애매할 때면 어김없이 머리속엔 백지가 펼쳐졌다. 프로듀서는 애매한 시간들이 많은 직업이었기에 이런 습관을 가지게 된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갖고 싶은 것들, 하고 싶은 것들, 해야 하는 것들, 떠올릴 만한 것들은 셀 수 없이 많다. 내 상상은 그 중에서도 일어나기 힘든 일들로 넘실댔다. 해외 출장을 가는 도중 비행기 안에서 개 한 마리가 뛰어다닐 때 소심한 초짜 수의사는 어떤 기분이 들지, 혹은 9회 말 2아웃의 상황에, 등 뒤 3루에 주자를 둔 투수의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할 지 상상해본다. 어떤 상상은 스스로 생각해도 꽤 기가막힌 이야기거리같았다.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혼자서 이야기에 푹 빠져 있노라면 지하철 너댓정거장 정도 지나치는 것은 흔했다.
상상은 즐겁지만, 난 한 번 머리속에 담았던 이야기는 그대로 잊어버린다. 나는 작가도 아닌데다, 이런 상상은 뻐근한 머리속을 쉬어주는 정도면 그만이었다. 있지도 않은 일로 눈 앞의 일을 놓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엔 이상하리만치 집착하게 되는 장면이 있다. 가능성이 희박한 허무맹랑한 장면도 아닐 뿐더러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도 아니었다.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직접 겪은 일이었고, 공상이나 가정이라 말하기 전에 분명한 기억이었다.
짧은 봄비에 젖은 벚꽃잎이 맑게 갠 허공으로 하나 둘 떨어지던 모습을 떠올리면 시죠 타카네를 만나게 된 날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감성적인 사람이 아닌 나에게도 그 날의 공원은 아주 특별한 인상을 남길 수 밖에 없었다. 푸른 언덕길 주위에 흐드러진 꽃의 아름다움과, 차갑고 상쾌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감수성이든, 인간성이든, 시들시들했던 나의 마음에 시원하게 물을 부어 주는 것 같았다. 공원 구석구석의 모든 것이 눈길을 끌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들은 꽤나 진부한 것들이었다. 자연과 꽃이 아름다운 곳은 그 곳 말고도 얼마든지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풍경이 나를 이렇게 골몰하게 만든 이유는 분명히 시죠 타카네가 그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언덕길을 오르며 안주머니를 뒤졌다. 사람 알아보는데 자신이 없어 사진을 꺼내들었지만, 의미 없는 일이었다. 이런 곳에서 풍성한 은발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긴 시죠 타카네의 모습은 돋보일 수 밖에 없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 풍경과는 전혀 다르고, 또 동시에 그 풍경에 누구보다 어울리는 사람은 시죠 타카네 외엔 없을 것 같았다. 그 순간은 매말랐던 나의 감각들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해 주었다. 당연하게 느껴졌던 많은 것들이 새로웠다. 피부에 닿는 공기도 색다르게 느껴졌고, 손에 쥔 사진의 감촉도 새로웠다. 모든 감각이 낯설고, 또렷하고 또 날카로웠다. 의심할 여지없이 신선한 감각이었지만 그 감각이 어떤 기분에서 피어났는지는 아직도 확신할 수 없다.
배어나온 땀에 끈적끈적해졌던 사진의 감촉이 갑자기 선명하게 느껴졌다. 놀라며 손을 움켜쥘 땐 종이 구겨는 소리까지 들렸다. 감았던 눈을 떴을 때도 꿈에서 막 깬 것 같이 몽롱한 기분이었다. 아직도 필름의 촉감이 생생한 왼손이 잡지사에서 받은 샘플 사진을 구겨 쥐고 있었다. 들고 있던 사진이 잠결에 꿈 속에 나타났던 모양이었다. 잠꼬대로 이상한 소리라도 했을까봐 머쓱한 기분으로 표지 디자이너를 슬쩍 보았다. 디자이너는 성격도 외모만큼이나 바싹 마른 사람이었다. 내가 무슨 헛소리라도 했다간 구박이란 구박은 다 받고 촬영도 늦어질 게 불보듯 뻔했다. 시죠 타카네를 싣고 싶다고 부탁한 건 잡지사 쪽임에도 이렇게 눈치만 보고 있게 된 신세가 불편했다. 구겨진 사진을 펴며 눈치를 살폈지만 디자이너는 나한테까지 잔소리를 할 틈이 없어 보였다. 촬영팀 모두가 울상이었다. 일이 시작된지 6시간이나 지났는데도 호통에서 힘이 빠지지 않았다. 그래도 막바지 작업이었다. 모두들 일이 끝나고 디자이너 뒷얘기를 안주삼아 시원하게 한 잔 할 생각으로 열심히 버티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한다. 얘기했던거 하나라도 빼먹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줄 알아!"
제일 크게 혼난 조명 담당은 바짝 긴장했지만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비록 졸긴 했지만 나 역시 언제 어디서 충돌이 일어날지 모르는 이런 일은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으로 한가지였다. 다들 제자리에서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주문만 넣던 디자이너도 카메라를 들었다. 난 한시라도 빨리 멀게만 느껴지는 철문을 열고 아이스 커피라도 사 먹고 싶은 생각에 몸이 들썩거렸다. 감독이 신호를 넣었고, 조명이 맞춰졌고, 셔터는 눌리기 직전이었다.
"디자이너 님. 잠시만요."
군소리 없이 촬영에 임하던 시죠 타카네가 디자이너를 불렀다.
조금 불안해보이기도 하고 아쉬워 보이기도 하는 표정이었다. 촬영하는 동안 타카네가 어떻게 있었는지 문득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기억 나는 건 촬영장의 불편한 분위기밖에 없었다. 의상을 바꿨거나 컨셉을 어떻게 잡았는지는 기억이 났지만 타카네가 어떤 기분이나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모호했다. 프로듀서로서 이래도 되는 건가. 나는 자책으로, 촬영팀은 긴장으로 찬 물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뭔가요, 시죠 씨?"
존칭은 붙였지만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디자이너도 피곤한 건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카메라를 쥔 손이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검지손가락은 셔텨 누르듯이 카메라 몸통만 두드리고 있었다.
"마지막 사진이 표지가 아닌 지면에 실리는 것이라면, 여기선 제가 원하는 의상으로 갈아입어도 되련지요."
"지금 준비도 다 끝났는데 그런 소리를 하면..."
"무척이나 흥미로운 의상을 보아서 그렇습니다. 염치 불구하고, 부탁드립니다."
타카네의 말투가 단호했다. 이런 돌발적인 모습을 종종 보아온 나도 의아한 기분이 드는데, 처음 만나 본 촬영팀이 얼마나 당황스러울지 조금 걱정도 되었다. 눈치만 보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다.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지시하신 내용도 충실히 반영된 것 같은데요. 한 장 정도는 저희 생각을 반영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날 노려보던 디자이너는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촬영팀에겐 말도 안 하고 손짓만으로 중지를 알렸다. 타카네는 꾸벅 인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가 버렸지만, 남아있게 된 나는 눈치를 몇 배로 살피게 되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입을다문,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주위에서 스텝들은 안절부절 못하고 무슨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또 무슨 터무니없는 일을 하진 않을까 하고 조마조마하게 앉아 있는 사이에 타카네가 돌아왔다. 타카네를 본 디자이너의 입에선 큰 소리가 터져나왔다. 다들 고함인 줄만 알고 디자이너를 돌아보았다가, 타카네를 보곤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상한 개구리같이 생긴 인형옷을 입고, 한 팔엔 인형옷 머리를 낀 채 도도한 표정을 짓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시죠씨... 진짜 그걸 입고 찍으려고요?"
"네, 부탁드립니다."
진지하게 대답하고 인형 머리를 쑥 써버리는 바람에 감독은 숨이 넘어갈 것 같이 웃어댔다. 겨우 카메라를 잡고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숨 못 쉬게 빡빡한 촬영이 그렇게 끝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개구리 옷이 이상하게 취향에 맞았는지 디자이너는 그 뒤로도 혼자 피식피식 웃곤 했다.
"타카네, 촬영 수고 많았어. 오늘은 유난히 빡빡했지?"
차로 돌아가는 길에 타카네와 아이스 커피를 하나씩 사 들었다. 걸으면서도 빨대에서 입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이런 아이돌을 프로듀스 할 수 있게 된게 뿌듯했다.
"후후, 분명히 긴 촬영이었지만 괜찮았답니다. 오히려 프로듀서께서 곤란하셨던 것 같네요. 갑자기 변덕을 부려 폐를 끼쳤습니다."
"아냐, 어차피 잡지사에서 취재하려는건 네가 어필하고 싶은 것들이었을테니까, 오히려 저쪽도 기뻐하지 않았을까?"
"그러면 저로선 기쁠 따름이지요."
건물을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나는 반도 못 마신 커피를 타카네는 이미 다 비워 버렸다. 시럽을 잔뜩 넣은 단맛을 느끼며 걷고 있자니 타카네가 뒤쳐진게 느껴졌다.
"타카네, 왜 그래?"
타카네는 입구 앞 쓰레기통에서 빈 커피컵을 들고 있었다. 내가 부르자 살짝 당황하며 얼음 하나를 입에 넣더니 컵을 버렸다. 얼음을 먹을까 말까 고민했던 것 같다. 뒤처진 만큼 서둘러 종종거리며 달려왔다. 고고한 인상과 언행과는 다르게 종종 보이는 이런 모습은 내가 타카네를 프로듀스 할때 가장 신경쓰는 점이기도 했다.
"타카네, 그런데 그 개구리 옷은 대체 뭐야?"
걸으며 묻는 나를 타카네가 돌아보았다.
"게롭파."
타카네는 볼 한 쪽에 얼음을 물고 있었다. 안 그래도 엉뚱한 말이 발음이 뭉개져서 더 엉뚱하게 들렸다. 커피를 머금고 있어서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타카네는 이렇게나 기묘한 아이돌이었다.
24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8 : 현재 일정(라이브, 녹화 등)
제일 크게 혼난 조명 담당은 바짝 긴장했지만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비록 졸긴 했지만 나 역시 언제 어디서 충돌이 일어날지 모르는 이런 일은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으로 한가지였다. 다들 제자리에서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주문만 넣던 디자이너도 카메라를 들었다. 난 한시라도 빨리 멀게만 느껴지는 철문을 열고 아이스 커피라도 사 먹고 싶은 생각에 몸이 들썩거렸다. 감독이 신호를 넣었고, 조명이 맞춰졌고, 셔터는 눌리기 직전이었다.
"디자이너 님. 잠시만요."
군소리 없이 촬영에 임하던 시죠 타카네가 디자이너를 불렀다.
"뭔가요, 시죠 씨?"
존칭은 붙였지만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디자이너도 피곤한 건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카메라를 쥔 손이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검지손가락은 셔텨 누르듯이 카메라 몸통만 두드리고 있었다.
"마지막 사진이 표지가 아닌 지면에 실리는 것이라면, 여기선 제가 원하는 의상으로 갈아입어도 되련지요."
"지금 준비도 다 끝났는데 그런 소리를 하면..."
"무척이나 흥미로운 의상을 보아서 그렇습니다. 염치 불구하고, 부탁드립니다."
타카네의 말투가 단호했다. 이런 돌발적인 모습을 종종 보아온 나도 의아한 기분이 드는데, 처음 만나 본 촬영팀이 얼마나 당황스러울지 조금 걱정도 되었다. 눈치만 보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다.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지시하신 내용도 충실히 반영된 것 같은데요. 한 장 정도는 저희 생각을 반영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날 노려보던 디자이너는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촬영팀에겐 말도 안 하고 손짓만으로 중지를 알렸다. 타카네는 꾸벅 인사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가 버렸지만, 남아있게 된 나는 눈치를 몇 배로 살피게 되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입을다문,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주위에서 스텝들은 안절부절 못하고 무슨 말도 못 하고 있었다. 또 무슨 터무니없는 일을 하진 않을까 하고 조마조마하게 앉아 있는 사이에 타카네가 돌아왔다. 타카네를 본 디자이너의 입에선 큰 소리가 터져나왔다. 다들 고함인 줄만 알고 디자이너를 돌아보았다가, 타카네를 보곤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상한 개구리같이 생긴 인형옷을 입고, 한 팔엔 인형옷 머리를 낀 채 도도한 표정을 짓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했다.
"시죠씨... 진짜 그걸 입고 찍으려고요?"
"네, 부탁드립니다."
진지하게 대답하고 인형 머리를 쑥 써버리는 바람에 감독은 숨이 넘어갈 것 같이 웃어댔다. 겨우 카메라를 잡고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숨 못 쉬게 빡빡한 촬영이 그렇게 끝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개구리 옷이 이상하게 취향에 맞았는지 디자이너는 그 뒤로도 혼자 피식피식 웃곤 했다.
차로 돌아가는 길에 타카네와 아이스 커피를 하나씩 사 들었다. 걸으면서도 빨대에서 입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이런 아이돌을 프로듀스 할 수 있게 된게 뿌듯했다.
"후후, 분명히 긴 촬영이었지만 괜찮았답니다. 오히려 프로듀서께서 곤란하셨던 것 같네요. 갑자기 변덕을 부려 폐를 끼쳤습니다."
"아냐, 어차피 잡지사에서 취재하려는건 네가 어필하고 싶은 것들이었을테니까, 오히려 저쪽도 기뻐하지 않았을까?"
"그러면 저로선 기쁠 따름이지요."
건물을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했다. 나는 반도 못 마신 커피를 타카네는 이미 다 비워 버렸다. 시럽을 잔뜩 넣은 단맛을 느끼며 걷고 있자니 타카네가 뒤쳐진게 느껴졌다.
"타카네, 왜 그래?"
타카네는 입구 앞 쓰레기통에서 빈 커피컵을 들고 있었다. 내가 부르자 살짝 당황하며 얼음 하나를 입에 넣더니 컵을 버렸다. 얼음을 먹을까 말까 고민했던 것 같다. 뒤처진 만큼 서둘러 종종거리며 달려왔다. 고고한 인상과 언행과는 다르게 종종 보이는 이런 모습은 내가 타카네를 프로듀스 할때 가장 신경쓰는 점이기도 했다.
"타카네, 그런데 그 개구리 옷은 대체 뭐야?"
걸으며 묻는 나를 타카네가 돌아보았다.
"게롭파."
타카네는 볼 한 쪽에 얼음을 물고 있었다. 안 그래도 엉뚱한 말이 발음이 뭉개져서 더 엉뚱하게 들렸다. 커피를 머금고 있어서 웃음을 참느라 힘들었다. 타카네는 이렇게나 기묘한 아이돌이었다.
>>18 타카네에게 키워드를 두 개 제시해주세요.
>>21 키워드를 한 개 제시해주세요.
>> 이래도 되는 건가.
발판이다나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