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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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07, 2013 21:35에 작성됨.

"우리 헤어지자. 이혼해."





그것은 주말의 나들이로 전시회를 둘러보고 저녁을 외식으로 때우고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P가 하루카에게 한 말이였다.

[오오. 오늘 전시 아주 볼 게 많았지?], [그 레스토랑은 고기가 질기더라고]

라는 대사로 대체해도 위화감이 없는 말투와 분위기로.





".................."

하루카는 말이 없다. 조용히 눈을 감고 고개를 늘어뜨릴뿐.

여유로워야 할 P는 안절부절. 안절부절해야할 하루카는 느긋.

"너....너......"

그런 위화감을 참지 못했는지 P가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그만두었다.

이제는 그런 말 같은 건 의미가 없으니까.






순조로웠다.

무명의 아이돌 후보생과 초짜 프로듀서로 만난 서로는 어색한 동료에서

친한 동료로, 가벼운 애인에서 책임지는 애인으로, 그리고 결혼했다.

몰랐다. 정말로 몰랐다. 서로가 서로에게 이런 존재였는지를.

동료일때는 몰랐었던 서로가 있었고, 애인일때는 몰랐었던 서로가 있다.

그리고 그 끝은 지독히도 씁쓸하다. 언젠가 하루카가 발렌타인 때 

P에게 만들어준 카카오가 유독 많이 들어간 초콜릿처럼. 






많은 동화는 XX와 XX는 결혼해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난다.

이유는 간단하다. 결혼 이야기를 쓸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글솜씨가 뛰어난 작가일지라도, 이상적인 주인공들이 있더라도

해피엔딩을 세부적으로 묘사해낼 수 있을까? 현실의 가정을 꾸린 채로?

"................"

"..............."

결혼 4년차. 이제는 빈 집에 대고 [다녀왔습니다~]라고 하지도 않는다.

로망은 사라지고 지독한 일상만이 남아있다.

그날 밤, P와 하루카는 처음으로 다른 공간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어제는 그리도 쨍쨍했건만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시원하게 쏟아지는 것도 아닌 끈적끈적한 기분의 회색빛 비가.

"................"

P는 조용히 짐을 챙기고 있었다.

끼익.

조용하게 열리려고 애쓴 문이었지만 타고난 것은 감당 못하는 듯한 소음.

하루카가 조용히 P의 옆쪽으로 왔다.

대충대충 쓰레기처럼 캐리어에 담기던 옷들이 가지런히 정리된다.

"......................"

하루카는 말이 없었다. P도 무어라고 말하는 대신에 다른 일을 한다.

그들에게 대화는 이제 무의미한 것처럼 보였다.





"...........점심 드세요."

드디어 만 하루동안 닫힌 하루카의 입이 열렸다.

메뉴는 토마토소스 파스타. P가 가장 좋아하는 하루카의 대표 메뉴.

맛이 없다. 하루카가 만들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파스타는 다 불어터졌고 소스는 밍밍하다.

그러나 반대쪽의 그녀의 작은 입에 불어터진 파스타가 들어가는 걸 보면서

P는 조용히 접시를 비우기 시작했다.

"............안 물어봐?"

P도 문제의 발언 이후 처음으로 이야기를 했다.

"................"

하지만 하루카는 묵묵부답. 계속해서 불어터진 파스타를 입에 넣는다.

탕!

흔한 드라마의 밥상머리에서 화났을 때의 그 장면처럼

P는 밥상을 내리치면서 일어나면서 하루카를 쏘아보았다.

"..................."

그러나 하루카는 여전히 벙어리 귀머거리 아가씨처럼 식사중.

".............후우."

깊은 한숨과 함께 P는 다시 자리에 앉아서 파스타를 먹었다.

남자인 P를 생각해서 맛도 없는 주제에 넉넉히 담긴 접시를 비우고 

P는 접시를 설거지통에 넣고 설거지를 시작했다.

하루카의 먹는 속도는 이미 안중에 없다.

이내 하루카도 접시를 비우고 P에게 다가왔다.

"............P씨는 언제나 옳으니까요."

유키호도 안 낼 것 같은 꺼질 것 같은 목소리만 남겨두고 하루카는 돌아섰다.

".................."

P는 한참 멍하니 서 있다가 하루카의 접시를 씻는다.

맛없는 파스타는 설거지도 잘 되지 않았다.





"................."

하루카는 바닥에 앉아 P의 짐을 정리중이었다. 깨지기 쉬운 것들은

에어캡으로 일일히 포장하고 있었다. 하루카의 손이 한 사진 액자에서 멈춰섰다.

"................"

P와 미키가 다정하게 찍혀있는 사진. 하루카는 그 액자도 소중하게 포장을...

"네가 이걸 왜 이렇게 해!!!!"

뒤에서 지켜보던 P가 액자를 뺏어들더니 하루카를 확 밀쳤다.

하루카는 힘없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제가 뭔가 잘못했나요?"

".....대단하네. 죽어도 너는 선이고 나는 악이라 그거지?"

"......................."

P의 매도에도 하루카는 그저 P를 응시할 뿐이다.

무릎걸음으로 다가온 P가 하루카의 멱살을 잡았다.

"너 뭐하는 애야!! 말 못해? 기분나쁘잖아!! 생각 못해? 내가 널 배신했다고!!!"

"......................."

그러나 P는 끝내 하루카에게서 어떠한 말도 들을 수 없었다.






부우웅.

P의 차는 한결 빵빵해진 짐을 싣고 비오는 거리를 달리고 있었다.

"......................"

삐리리리.

"여보세요?"

"허니!!! 미키 너무 오래 기다리는거야!! 밥씨가 식어버리는거야~"

"...............알았어."

"아핫. 괜찮은거야. 오늘부터는 허니는 미키랑 평생 같이 있는거니까."

"그래. 기다리고 있어."

"응응!! 밥도, 목욕물도, 그리고 미.키.도. 기다리고 있는거야 아핫."

"..................."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들뜬 목소리를 뒤로하고 P는 전화를 끊었다.

그러다 눈길이 조수석의 글러브박스에 낀 무언가로 향했다.

"................."

P의 사진. 정확하게는 옆에 있는 누군가가 잘려 있다.

사진 속에는 끝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그녀가 머리에 항상

달고 있는 리본이 조금 잘린 채로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사진 뒤에는 이제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글씨가 조그맣게 씌여 있었다.




안녕.





달칵.

"....................."

휑한 방 문이 열린다. 하루카는 방으로 들어왔다.

이제 이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냥 텅 빈 공간이 있을 뿐이다.

하루카는 구석으로 다가가 무릎을 감싸안고 쪼그려 앉았다.




"항상 행복해야 해요. P씨."

그녀는 그 한 마디와 함께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감겨있는 두 눈에서는 끊임없는 말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오른쪽 리본이 반쯤 잘린 그녀의 사진이 있었다.


안녕.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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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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