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하야「올리비아를 들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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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6-30, 2013 20:14에 작성됨.

문득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바라본 탁상시계는 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주변이 이렇게 어두컴컴하니 필시 새벽 2시 30분일 거라고 생각하며,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일단은 목이 말랐으니까.

자기 전의 일이 기억에 없다. 어쩐지 머리는 멍한 것과 뒤죽박죽인 것의 중간 상태라고 해야 할까, 일단 둘 중에 그 어느 쪽이든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곧바로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냉수를 쭉 들이켰더니 냉기가 머릿속까지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덕분일까, 흐릿했던 머릿속은 이내 차차 선명해져갔다.

그랬구나. 오늘, 아니, 어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다시 침대로 돌아간 내 시야에 잡힌 것은 탁자 위에 있는 한 장의 CD.
CD를 집어든 나는 그 옆에 있는 CD 플레이어에 그 CD를, 내가 부른 노래의 CD를 집어넣고 재생시켰다.


마음에 드는 노래를 나 혼자 들어봤어요
올리비아는 쓸쓸한 마음을 달래주기에…


‘올리비아를 들으면서’를 들으면서, 나는 머릿속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오는 단편적인 기억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올리비아를 들으면서를 들으면서? 푸훗, 어째 어감이 재미있네. 

오늘 분명히 평소처럼 사무소에 출근하고, 오전에 하루카와 마코토 두 사람과 함께 보컬 레슨을, 오후에는 신곡 홍보 차 버라이어티 프로 녹화…. 녹화가 예정보다 일찍 끝나서 저녁에 분명히….
무엇을 했었던 걸까. 
바로 그 공백이 너무나도 신경 쓰였다.


자스민차는 잠을 유혹하는 약
나답게 하루를 끝내고 싶은 이런 밤


“프로듀서….”

불현 듯 그의 얼굴이 생각나 나도 모르게 그의 이름을 읊조려봤다.
그리고 모든 것이 생각나버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쉰다. 아아, 어째서 생각해내고 말았던 것일까. 이럴 땐 내 성격이 정말 원망스럽다.

그래, 어제는 바로 그와 이별한 날이었다. 
이제 그를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만났을 때에는 이런 날이 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Making good things better
아니에요 끝난 일에 시간을 더해갈 뿐
너무나 지쳐있던 그대여 내 환상을 사랑했나요


16세의 아이돌 키사라기 치하야가 20세가 되던 해의 생일, 그는 먼저 내게 고백해왔다. 나 역시 거절할 필요가 없었다. 그때 당시의 그는 나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이 되어버렸기에, 나를 더 높은 곳으로 날수 있게 해준 나의 날개와도 같은 사람이었기에.

하지만 이젠 끝났다. 내 날개 역시 이대로 꺾어지게 되는 것일까. 
물론 이런 일로 노래를 포기할 수는 없다. 노래는 내 삶의 모든 것, 유우에 대한 죄책감이 사슬이 되어 나를 묶었을 때도, 그리고 그로 인해 그 사슬에서 자유로워진 지금도 그것만은 변함이 없다.
나는 노래해야만 한다.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 키사라기 치하야는 그를 위해 노래하게 되는 것일까. 이래서야 유우 때와 비슷하게 되어버려.
하지만 지금의 기분은 그때와는 사뭇 다를지도 모르겠다. 하늘에서 그가 지켜봐주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사슬이라기엔 너무 따스한 느낌이네, 라고 애써 나를 진정시켜본다.

문득 창밖으로 바라본 밤하늘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발길이 베란다 쪽으로 향했다.


잠들지 못하는 밤은 별을 세어봐요
빛의 선을 따라가면 떠오르는 그대의 얼굴

그와 함께 한 첫 데이트에서, 그는 별들을 가리키며 ‘저 별들을 이어보라고, 딱 치하야 너 같은데. 별자리 같이 말이야.’라고 애써 생각해낸 것 같지만 나조차도 어이가 없었던 말을 했던 적이 있었지. 후훗, 생각해보면 그 사람도 참 감정표현에 서투른 사람이었다. 물론 나만큼은 아니었지만.

하지만 지금은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을지도. 
별들 사이에 그의 얼굴이 보였기에, 나는 황급히 커튼을 쳐버렸다. 


생일에는 카틀레야를 잊을 수 없어요
다정한 사람이었던 것 같지만 끝이에요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것은 활짝 핀 카틀레야 화분. 
네 스무 번째 생일에 내게 고백하면서 준 선물.
더 이상 그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았기에, 그에 대한 생각을 지우려 시선을 피하면 그곳에는 어김없이 그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이 있었다. 
아아, 삭막했던 나의 집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었던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늦은 밤의 전화, 당신이 걸었죠 할 얘기는 아무 것도 없어요
Making good things better
사랑은 사라졌어요 두 번 다시 걸지 말아요
너무나 지쳐있던 그대여 내 환상을 사랑했나요


부재중 전화 네 통, 모두 그에게서 온 전화이다. 
그가 생전에 건 마지막 전화를, 나는 왜 받지 못했던 걸까.
그가 마지막으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지금은 어느 것에 대한 답도 얻을 수 없다. 
결국 난 지금껏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내고야 말았다. 


만났을 때에는 이런 날이 오리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Making good things better
아니에요 끝난 일에 시간을 더해갈 뿐
너무나 지쳐있던 그대여 내 환상을 사랑했나요


이제 그만 눈물을 그치자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눈을 떴을 때부터 한참은 지난 뒤였다.   
눈물을 닦기 위해 휴지를 찾던 중, 내 앞으로 쪽지가 하나 툭 떨어졌다.
나를 아직까지 ‘치하야쨩’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단 둘 뿐. 그 중에서도 이 글씨체라면 하루카다.

나는 조심스레 쪽지를 들어 써져있는 내용을 읽었고….

“큿…?”



“나 참, 어이가 없네. 요약하자면, 저녁에 그 바보랑 별 것도 아닌 일로 싸운 다음, 하루카랑 같이 자기 집에서 술을 잔뜩 퍼마시고는 새벽에 깨서 그 녀석이 죽은 줄 알고 대성통곡을 하느라 얼굴이 그 모양 그 꼴이 됐단 말이야?”

“미, 미나세 씨….”

“바보 아냐?”

“…….”

“지금 당장 화보 촬영이랑 잡지 인터뷰 있는데 어떻게 할 거야? 그 팅팅 부어오른 눈으로!”

“그래도 귀엽잖아.”

“귀여운 거랑은 별개잖아! 애초에 넌 대체 무슨 일로 치하야랑 싸웠던 거야?”

“…생각해보면 별 거 아니긴 했는데, 그렇게까지 화가 났었을 줄은.”

“별 게 아니라니…! 프로듀서?”

“아, 응…. 미안해, 치하야.”

“그나저나 하루카, 대체 둘이서 얼마나 마셨기에 치하야가 그런 얼토당토않은 착각을 하게 된 거니?”

“에…. 맥주 세 캔이었을 걸요.”

“치하야….”

“그, 그래서 대체 무슨 일로 싸운 건데?”

“보고 있었어….”

“무슨 소리야?”

“프로듀서가…. 보고 있었어….”

“그러니까 무엇을?”

“아즈사 씨의 그라비아 화보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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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모레 있을 72절 헌정글을 미리 올립니다.
그날 제가 동원훈련이라....

72절이라고 해도 그쪽 네타는 안 넣으려 노력했는데 결국은 넣게 되어버렸네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치하야가 이렇게 귀여운 아이라는 걸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진지하면서도 어딘가 살짝 어긋나 버린다는 것이 치하야의 매력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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