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

[마코토] Dear my star, Dear my princ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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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20, 2012 01:40에 작성됨.

나는 오타쿠다. 아니, 오타쿠였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오타쿠란, 왜 그런지 꼭 안경을 쓰고 엄청 뚱뚱하거나 반대로 비쩍 말랐으며, 항상 혼자 다니거나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끼리 몰려다니고 음침한 분위기로 뭘 혼자 중얼거린다거나 하는 이미지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아, 물론 피규어나 캐릭터 관련 굿즈는 필수로 가지고 다니고 말이지.

 

하지만 요즘 오타쿠들은 의외로 사회적응도 잘하며, 많은 일반인 친구와도 사귀고 있고, 건강상태에 특별한 이상이 있지도 않다.

그리고 그러한 오타쿠가 바로 나였다. 교우관계나 성적도 나쁘지 않고, 안경을 쓰지도 않았으며 뚱뚱하거나 마르지도 않은 적당한 체격의 적당한 고등학생 남자아이. 하지만 내 방안에는 피규어가 가득, 브로마이드가 가득, 애니 방영 편성표는 언제나 중요체크.

 

그런 내 생활을 바꾼 건 어느 날 점심시간에 어떤 녀석이 가져온 아이돌 소속사의 포스터였다.

 

“이거 보라고. 여기 비록 엄청 작은 소속사이긴 해도 보석들이 엄청 많다니까.”

 

라며 포스터를 펼친, 자칭 아이돌 전문가 녀석의 주위로 반에 남아있던 남자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오오. 여기 금발머리 쩔어. 얘 이름 뭐냐?”

 

“야. 미키쨩은 건들지 마. 이 몸이 먼저 찍었다. 어디서 보는 눈은 있어가지고.”

 

“난 여기 리본 달고 있는 애 마음에 든다. 이름이… 아마미 하루카? 이름도 예쁘네.”

 

“난 여기 얘가 낫다. 치하야.”

 

“임마, 여자는 가슴이야. 그 옆에 아즈사 씨나 봐라.”

 

먹던 밥도 내팽개치고 몰려드는 녀석들을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현실의 여자 따윈 아무래도 부질없다. 특히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저런 아이돌들은 특히. 저런 포스터에서는 물론 웃고 있겠지만, 실상은 하나같이 가식덩어리들이겠지. 뻔하잖아.

 

“야, 너도 보지 그러냐.”

 

“난 그다지 관심 없거든.”

 

“그러지 말고 얼굴이나 보라니까. 니가 물고 빨고 하는 2D 여자애들보다 이쪽이 훨씬 낫다.”

 

무시하고 있자니 계속 귀찮게 굴 것 같아 어쩔 수 없이 시선만 돌려 흘끔 봤다. 사진 속에 있는 12명의 소녀들은 내가 예상했던 대로 식상한 웃음을 흘리며 나름대로의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이런 거에 내가 흥미를 가질 리가 없잖아?

 

그때까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파이팅 포즈를 취하듯 주먹을 불끈 쥐며 웃고 있는, 상당히 짧은 숏컷에 미소년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짧은 머리의 소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이 애는 이름이 뭐야?”

 

내가 그 소녀를 가리키며 포스터의 주인에게 묻자, 그 녀석을 포함한 모두는 기겁을 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뭐, 뭐야, 너.”

 

“설마 그쪽 취향이었냐?”

 

“…그쪽 취향이라니 뭔 소리래.”

 

“얘는 아무리 봐도 남자잖아!”

 

“여자애잖아.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너희들이야말로.”

 

“거 참 취향 독특한 놈일세. 얘는 생긴 게 하도 남자 같아서 팬들도 여성 팬들밖에 없는 애라고. 근데 진짜 얘가 이중에서 제일 나아보이냐? 이 많은 보석들 중에서?”

 

“그렇다니까. 이름이나 말해봐.”

 

“키쿠치 마코토.”

 

“그래……. 알았어.”

 

사실 내 2D 취향은 얌전한 숙녀의 이미지. 실제 취향대로였다면 난 그 마코토라는 아이돌의 옆에 위치한 갈색 단발의 여자아이를 골랐으리라. 하지만 실제로 내 눈을 확 잡아끈 소녀는 바로 키쿠치 마코토였다. 이름도 꽤 남자 같다. 라고 그때는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내 취향은 현실의 여자보다는 2D에 더 가까웠고, 키쿠치 마코토라는 이름은 점차 내 머릿속에서 지워져갔다.

 

 

내가 그녀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것은 그로부터 2달이 지난, 중간고사의 마지막 날. 시험도 그럭저럭 끝났겠다. 오랜만에 ‘지르러’ 시내로 나가 항상 굿즈를 사던 단골가게로 가려는데, 그날따라 사람들이 북적였다. 사람이 많아지면 짜증만 날 뿐이라 비교적 피하는 편이지만,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발길이 그쪽으로 옮겨졌다. 무슨 이벤트라도 하는 건지, 금방 가서 뭐하는지만 보고 빠지면 되겠지.

 

거기서 내가 본 광경은 내 또래의 어째 낯익은 소녀가 급조된 작은 스테이지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었다. 마치 미소년을 연상케 하는 얼굴에 허스키하면서도 매력적인 목소리로 뭔가 낯 뜨거운 가사의 노래를 안무와 함께 열창하고 있는 소녀를, 나는 한동안 멍하니 서서 바라보았다. 그 소녀에게선 분명히 어딘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아니, 무엇보다도. 나는 지금껏 저렇게 즐겁게 노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노래가 끝난 후, 나는 홀린 듯이 원래의 목적지를 내버려두고 스테이지 뒤에 있는 CD샵으로 들어갔다.

 

“방금 부른 노래 있는 앨범 주세요.”

 

내가 그날 본 소녀가 2달 전의 그 키쿠치 마코토였으며, 그 낯 뜨겁지만 기가 막히게 좋았던 곡의 제목이 키쿠치 마코토의 대표곡이라고 할 수 있는 ‘에이전트 밤을 가다.’였음을 알게 된 건 집에 도착해 CD를 뜯어보고 난 후였다.

 

그날 이후부터 내 생활은 확실히 바뀌어갔다. 내 방을 가득 채웠던 피규어나 캐릭터 관련물품이 점점 사라져가고, 그건 키쿠치 마코토 관련물품으로 점점 바뀌어갔다. 부모님은 내 바뀐 취향에 한숨을 쉬었지만, 그래도 가상의 여자애보단 현실의 여자애가 낫겠다며 그나마 나은 반응을 보여주셨다.

 

그렇게 내가 키쿠치 마코토의 CD를 처음 산지 보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마코토의 기사가 실린(이라지만 사실은 그녀가 속한 765프로덕션 전체의 기사였다.) 잡지를 구입해 보던 와중에, 765프로의 미우라 아즈사, 호시이 미키, 키쿠치 마코토의 악수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보게 되었다.

 

엄청나게 망설였다. 당연히 가야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가도 될까 라는 마음이 함께 들었기 때문에. 물론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막상 기회가 찾아오자 뭐라고 할까, 내가 진짜 그녀를 만나도 되는 사람인지에 대한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런 기회는 자주 오는 것이 아니다. 결국 나는 당일 악수회가 열리는 곳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아직 약소규모의 프로덕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765프로였기 때문에, 악수회장에 그다지 많은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 앞에 서서도 몇 번이나 망설인 끝에 키쿠치 마코토의 줄에 합류했지만, 예상대로 남자들밖에 없는 두 사람에 비해 그녀의 줄에는 모두 여성들이 서있었고, 남자는 나 혼자라 엄청나게 얼굴이 팔렸다.

옆의 줄에 서있는 남자들이 날 가리키며 수군거리는 것도 보였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오타쿠짓으로 단련된 철면피로 이겨낼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끝은 보고 가리라.

 

앞줄이 차례차례 줄어들고, 내 차례가 다가올 때마다 왠지 모를 감정으로 인해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흥분? 기대감? 부끄러움? 뭔지는 몰랐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코미케에서 좋아하는 작가의 부스를 기다릴 때와 비슷한 느낌이라는 거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동안, 앞에 있는 사람이 세 사람, 두 사람, 한 사람으로 줄어들고 드디어 내 차례가 다가왔다. 손이 떨리는 걸 간신히 참으며 그녀의 CD를 건네주고 그녀가 CD에 사인을 해주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곧 사인을 마치고 악수를 하기 위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어……. 남성분이시네요?”

 

처음엔 그게 날 보고 하는 말인지도 몰랐다.

 

“어? 예? 아, 예! 남잔데요.”

 

돌이켜보면 내가 생각해도 멍청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몰랐을 만큼 경황이 없었다.

 

“우와-! 저, 남성 팬 분은 처음이거든요!”

 

“아, 그, 그런가요.”

 

“저기저기. 제가 직접 팬 분에게 이런 말 하는 것도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제 팬이 되시기로 한 이유가 뭐에요?”

 

너무나도 천진난만한 표정에, 나는 이유를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포스터에서 처음 봤는데 예쁘다 싶어서…….”

 

“예쁘다고요? 정말이죠?”

 

“네에…….”

 

내 긍정에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뒤를 향해 외쳤다.

 

“아싸-! 이것 보라구요, 프로듀서! 저도 충분히 남성 팬 분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니까요!”

 

그녀의 외침에 뒤에 서있던, 척 보기에도 엘리트 회사원같은 모습의 남자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그가 마코토의, 765프로의 프로듀서 같았다.

 

“알았으니까 어서 진행이나 해.”

 

“아차차. 그렇지. 정말 고마워요. 000씨라고 하셨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아……. 네……. 저야말로…….”

 

마코토는 나에게 있어서는 완벽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혹시라도 손바닥에 땀이 흘렀는지 모르니 바지춤으로 쓱 닦고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어째서인지 살짝 굳은살이 있는 그녀의 손바닥은, 그때까지 몽롱한 기분이었던 나에게 현실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때까지 아이돌이라는 건 저 멀리서 빛나는, 손을 뻗어도 닿을 리가 없는 별일뿐이라고, 그래서 ‘스타’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의 별은 이렇게 가까운 곳에, 행여 팔을 뻗으면 닿을지도 모르는 곳에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 정도로 가식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모습 그대로의 키쿠치 마코토라는 아이돌은, 나에게 있어 처음으로 스타가 아닌 나와 같은 또래의 소녀라는 느낌을 가지게 했다.

 

그 만남이 있던 이후로 나는 그나마 남아있던 캐릭터 관련 굿즈들을 전부 팔아버리고 그 돈으로 그녀의 CD를 몇 장씩 사버렸다. 그런 점에 있어서는 아직 오타쿠답다고 할 수 있겠지만, 어찌됐든 키쿠치 마코토라는 이름의 별이 지금보다 더 빛날 수 있도록,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내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기 때문에. 물론 이런다고 그녀가 알아줄 리는 없지만, 그녀가 제대로 된 스테이지에서 빛날 수 있다면 나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런 내 노력 덕분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녀의 CD를 대량구입하게 된 이후로 그녀는 엄청난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녀가 공연하는 라이브의 규모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져갔고, TV에서도 그녀의 이름이 나오는 횟수가 늘어났다. 사람들이 ‘왕자님 같은 여자아이’ 키쿠치 마코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내 귀에 들릴 때면, 그날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정도였다. 그동안 나는 그녀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갔다가 운이 좋아 몇 번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물론 그런 행운이 있었던 날은 밤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다. 다른 이들은 그녀를 왕자님이라고 칭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녀의 이미지는 궁궐을 막 나온 공주님이었다. 키쿠치 마코토는 765프로의 누구보다 더 소녀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걸 아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그녀의 랭크가 점점 오르고, 그녀의 팬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녀는 더 이상 나만의 공주님이 아니게 되었다. 그녀가 매스컴에 노출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가 알게 될수록, 그녀의 겉모습에 숨겨진 소녀심을 간파하는 팬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의 갭에 많은 남성팬 들이 열광했다.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공허감이 생겨났다. 이유는 나조차도 알지 못했다. 여하튼 확실한 것 하나는 내가 생각하고 있던 상황과는 어딘가 반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버라이어티 쇼에 출연해 치마를 입고 부끄러운 대사를 말하는 마코토, 음악프로그램에서 여성스러운 노래를 부르는 마코토, 내가 알고 있는 마코토라면 필시 이런 것을 원하고 있었으리라. 그렇다면 필시 나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룬 그녀에게 응원을 보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나만이 알고 있던, 별을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장소를 빼앗긴 기분이라고 해야 할지.

 

그렇게 내가 갈팡질팡하고 있는 와중에, 나는 우연히 765프로 아이돌들의 악수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행사에 참여하는 아이돌은 요즘 주가를 올리고 있는 후타미 자매와 가나하 히비키, 그리고 키쿠치 마코토. 날짜는 내가 처음 그녀와 악수를 한지 딱 1년이 되는 바로 그 날. 그리고 오늘이었다.

시간상으로는 늦지 않는다. 나는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않고 거의 본능적으로 행사장으로 향했다.

 

행사가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후타미 자매에게도, 가나하 히비키에게도, 그리고 그녀에게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줄이 이어져 있었다. 1년 전에는 분명 청일점이었건만, 지금은 그녀의 줄에 서 있는 남성 팬들도 엄청나게 많았다. 그 사이에서 1년 전보다 더 머리를 기른 그녀는 자신에게 악수를 청하는 팬들에게 웃음을 머금으며 응대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나는 잡힐 듯 말 듯 가까이에서 빛나던 별과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더 이상 나만의 별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함께 보는 별이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분명 이것을 바랐을 터, 어째서 이렇게 허전해지는 걸까.

 

그렇게 그녀의 빛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며, 나는 그대로 발길을 돌려 나가려고 했다.

 

“어? 아! 000씨!! 000씨 맞으시죠!!”

 

1년 전과 똑같이, 그녀가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은 나에게서 현실감을 앗아가 버렸다.

나는 놀란 토끼눈을 하고(아마 그랬을 것이다.), 천천히 그녀 쪽을 돌아보았다. 나와 그녀의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역시!’라고 외치며 미소 지었다. 그때와는 머리카락의 길이만 다를 뿐, 모든 것이 똑같았다.

 

“오실 줄 알았어요. 기다렸다구요.”

 

기다렸다고…?

 

“죄송하지만, 잠깐 양보 좀 부탁드릴게요. 이 분은 저에게 있어서 특별한 분이에요. 제 진짜 모습을 알아준 첫 번째 팬 분이니까요.”

 

그녀의 한 마디에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사람들이 갈라졌다. 나는 마치 구름다리를 걷는 기분으로 그 사이를 걸어갔다.

 

그녀를 처음 만난 그때처럼 남자답게, 하지만 누구보다도 여자답게 씩 웃으면서, 그녀는 내가 조심스럽게 내민 신곡 CD에 사인을 해주었다. 그녀가 사인을 한 다음 악수를 청하는 그 짧은 시간동안, 나는 그녀에게 해줄 수십, 수백 가지의 말들을 떠올렸지만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했다.

 

“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앞으로도, 응원해주실 거죠?”

 

“네……. 네. 끝까지. 마코토 씨가 무얼 하든 간에 끝까지 응원할게요.”

 

“헤헹. 그거, 저와의 약속이에요?”

 

그녀가 내민 것은 악수를 하려고 내미는 손이 아니었다. 그녀가 내민 것은 주먹에 새끼손가락을 편, 약속을 하려고 내미는 손이었다.

나는 한심하게도 1년 전과 마찬가지로, 손바닥에 흐르는 땀을 바지춤에 닦은 후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자, 약속!”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별은 손에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있다. 하지만 그 별을 정말 손에 쥐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빛나지 않게 될 테고 그건 이미 별이 아니게 되어버린다고. 난 애초에 그녀가 빛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처음 그녀의 팬이 되기로 했을 때 생각했던 것처럼 그녀의 모든 매력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해주어야 한다고. 그게 내가 할 일이라고.

 

그녀에게 있어서 더 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니더라도 좋다. 그저 별을 쫒는 사람들 중에 한 명이라고 해도 좋다. 키쿠치 마코토라는 이름의 별이 조금이라도 더 빛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하지만 그날 그녀가 나에게만 보여줬던 미소는 아무래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어디보자……. 대충 다 썼군.”

 

내 마음을 차곡차곡 담아둔 종이를 접어 봉투 안에 넣었다. 옆에는 세 살배기 딸이 언제쯤 놀아줄 거냐고 칭얼댄다.

 

“아빠랑 같이 놀고 싶어?”

 

“응!”

 

“안 그래도 아빠 지금 갈 곳이 있는데, 그럼 같이 나갈까? 올 때 아이스크림 사줄게.”

 

“아쮸쿠림? 우와아-! 같이 갈래!”

 

좋다고 안겨드는 딸아이를 안아들며, 나는 편지가 든 봉투를 집어 들었다.

보내는 사람은 물론 나. 받는 사람은 키쿠치 마코토.

내 생에 첫 팬레터를 바로 어제 은퇴를 선언한, 이제 삼십 줄이 되었음에도 그때와 전혀 변하지 않은 소녀 같은 웃음을 짓던 그녀에게 보낸다.

지금까지 감사했다고, 그때 했던 약속은 지켰노라고, 그리고 앞으로도 응원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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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지만 어제 생일이셨던 모 회원분께 바칩니다.

어째 망한 것 같지만... 용서하세요.

[이 게시물은 에아노르님에 의해 2013-06-07 00:11:12 창작글판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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