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

[하루치하, 애니마스] 이사 첫날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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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21, 2013 22:39에 작성됨.

    이사 첫날밤

    저녁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자정이 넘어서도 그치지 않았습니다. 쏟아지는 차가운 비가 창문을 세차게 때렸고, 깜깜한 거리의 희미한 가로등 불이 물방울 들에 맺혔습니다. 나무 아래, 지붕 밑, 외진 골목 할 것 없이 온통 찬 겨울비를 맞았습니다. 따뜻해야 할 방안의 공기도 촉촉하고 차가웠습니다.

    겨울의 밤은 빨리 찾아옵니다. 이삿짐을 다 들여놓기 무섭게 차가운 바람이 벽을 타고 스며들었고, 하루카와 치하야는 짐도 다 못 푼 썰렁한 방에서 꼼짝없이 밤 을 맞이해야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불과 베개만 꺼내 이른 잠을 청했습니다. 방바닥의 찬 기운이 얇은 이불을 뚫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침대를 놓을 생각에 두꺼 운 것을 준비하지 않은 것이 아쉬웠습니다. 이불 속에 누운 채 새 집에서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하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이불이 얇긴 했다지만 방이 너 무나 차가웠습니다.

    "치하야, 왠지 춥지 않아?"

    이불 속에서 꼼짝않고 있어도 발이 시려울 정도였습니다. 추운 건 치하야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나봅니다. 치하야의 얼굴이 창백했습니다. 추운 방 안에 창을 때리는 빗소리와 보일러 연통을 때리는 빗소리가 서로 다른 둔탁함으로 울려 퍼졌습니다. 웅웅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와야 할 보일러실은 잠잠하기만 했습니다.
    "그렇네. 보일러가 안 돌아가나?"

    "어쩌지... 나 보일러 만질 줄 모르는데."

    하루카는 조그만 목소리로 말하며 치하야를 보았습니다. 치하야는 추위로 새파랗게 된 얼굴로 무척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애써서 참고 있던 모양이었나봅니다. 당장 잠이 안 오는 것도 큰 일이었지만, 하루카는 치하야가 걱정되었습니다. 차하야는 추위를 잘 탔기 때문입니다. 하루카는 시린 발을 문지르며 고민했 습니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나. 치하야는 아파도 무리해서 움직일 것 같은데.'

    그 때 하루카는 좋은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치하야, 추우면 이불 같이 덮을래? 그럼 덜 추울 것 같은데..."

    치하야는 눈을 깜빡거리더니 하루카가 젖힌 이불 속으로 말 없이 들어갔습니다. 바스락거리는 이불이 하루카의 체온으로 덥혀져 있었습니다.

    "좁지 않아?"

    "헤헤, 괜찮아. 오히려 달라붙으니까 따뜻해서 더 좋은 걸."

    한 이불 속에 들어간 하루카와 치하야는 등을 맞대고 누웠습니다. 이불이 좁다보니 발이 삐져나가기도 하고, 팔이나 손이 서로 스치기도 했지만 두 사람의 몸이 서로의 체온을 지켜주었습니다. 함께 누워있는 시간이 흐를수록 둘 사이는 온기로 더욱 채워졌습니다. 새 집의 낯선 공기 속에서 하루카는 드문드문 치하야의 냄새를 느꼈습니다. 샴푸 향기도, 치약 향기도 아닌 치하야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치하야만의 냄새를 느꼈습니다. 몸에서 풍겨오는 그런 향에 몽롱한 기분이 드는 것은 아마 치하야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습니다. 하루카는 어색하고 차갑던 방이 조금씩 안락하게 느껴졌습니다. 눈을 감으면 치하야의 숨소리가 들렸고, 눈을 떠 몸을 돌리면 치하야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루카는 소중한 친구를 이렇게 또렷하게 느낄 수 있는 것 이 무엇보다 기뻤습니다. 편안한 기분 속에서 조금씩 조금씩 잠속으로 아득하게 빠지는 기분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치하야가 무척 멀게 느껴졌던 옛날이 생각났습니다. 더없이 가까웠던 친구가 스스로를 미워하는 모습은 하루카에겐 정말 괴로웠습니다. 굳게 닫 힌 문 너머에서 치하야가 짓고 있을 표정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혔던 때의 기분은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건 치하야의 잘못이 아니야.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어.'

    하루카는 열심히 치하야를 달랬지만, 치하야는 위로를 받을 여유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열심히 달래면 달랠수록, 그리고 치하야가 아파 하는 모습을 보면 볼수록 점점 치하야와 멀어질 것 같아서 하루카는 무척 무서웠습니다. 지나간 일이었지만, 하루카는 지금도 가슴이 아팠습니다. 코가 시큰해졌습 니다. 하지만 이제 눈물은 넘치지 않는다는 것이 기뻤습니다.

    살짝 고개를 돌려 등 뒤의 치하야를 보니, 어깨가 오르내리는 모습이 느리고 규칙적이었습니다.

    "치하야, 자?"

    "...아니. 잠이 안 와?"

    하루카의 물음에 치하야가 몸을 움직이며 대답했습니다. "응... 몸은 피곤하고 졸리기도 한데 잠들려면 깨어버려" 하루카도 몸을 완전히 돌려 비스듬하게 누웠습니다. 마주본 치하야의 얼굴에선 잠기운이 느껴졌습니다. 깨웠나 싶어 하루카는 괜스래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여러 모습의 고마운 마음이 떠올라 웃었습니다.

    "어서 자지 않으면 내일 짐 정리 고될거야."

    "그치? 치하야 짐도 그렇지만 내 짐이 꽤 많으니까."

    "이사할 땐 버릴 물건은 확실히 버렸어야지."

    "그치만 아깝고 아쉬운걸... 나중에 보면 다 추억거리고..."

    치하야의 옳은 소리에 하루카는 대꾸할 말이 없습니다. 재밌는 표정을 지었는지 치하야가 하루카의 얼굴을 보며 웃었습니다.

    "그래도 오래 걸리진 않을거야. 혼자서 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치? 헤헤, 고마워 치하야."

    하루카와 치하야는 함께 눈을 감았습니다. 그렇게 잠을 청한지 5분도 안되었을 때, 하루카가 눈을 반짝 뜨고 치하야를 불렀습니다.

    "치하야, 등 돌려 볼래?"

    "응?"

    치하야는 갑작스런 부탁에 아주 조금 의아했지만, 이유를 듣지 않고 하루카가 말한대로 등을 돌리고 누웠습니다. 하루카는 눈 앞의 까맣고 긴 머리카락을 잠깐 쓰다듬더니 치하야의 목 아래와 어깨 위로 팔을 둘렀습니다. 이불 밖으로 잠깐 꺼내놓은 사이에 식은 하루카의 살결이 차가웠습니다. 치하야는 몸이 움츠러들었지 만 체온이 익숙해질 때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하루카는 치하야에게 고개를 파묻고 잠을 청했습니다. "헤헤. 이렇게 자자, 치하야." "하루카도 정말, 이러면 잠들기 불편하잖아." 치하야의 머리카락과 목덜미에서 풍기는 깊은 향기에 머리가 아찔아찔하고 어지러웠습니다. 왠지 모르게 가슴도 콩닥콩닥 뛰었습니다. 하루카는 왠지 뛰는 가 슴을 치하야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마조마한 나머지 오히려 가슴이 더 세차게 두근거렸습니다. 하루카가 두근거리고 있다는 게 들킨건지, 치하야 가 후훗, 하고 콧소리를 내며 웃었습니다. 자신을 꼭 안은 팔 위로 치하야가 손을 얹었습니다. 하루카는 치하야의 가늘고 따뜻한 손이 기분 좋았습니다.

    "잘 자, 하루카."

    "응, 잘 자 치하야."

    차가운 방 안에서 둘은 추위도 느끼지 않고 깊게 잠들었습니다.
[이 게시물은 에아노르님에 의해 2013-06-07 00:07:14 창작글판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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