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

하루카 : 프로듀서, 오늘 뭔가 예정이라도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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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19, 2013 15:05에 작성됨.

  왱알앵알 왱알앵알…….

  창 밖에서 새 울음소리가 들린다. 멍한 얼굴로 시계를 보니 어제와 같은 기상시각이다. 오늘은 조금 늦게까지 자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반쯤 젖혀진 커튼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어오고 있는 탓도 있으리라. 오래간만에 쉬는 날이니 잠을 만끽해보겠다는 계획은 커튼을 제대로 치지 않은 탓으로 날아가 버렸다.

  잠깐 망연하고 있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사람의 생체시계는 햇빛을 받으면 리셋된다. 이제 다시 잠든다고 하더라도 머리만 무거워질 뿐이다. 미련은 남지만 어쩔 수 없지. 하루가 길어졌다고 생각하는 편이 마음이 편하다.

  홈 바에서 생수를 꺼내 들이켰다. 살얼음이 낀 차가운 액체가 단숨에 목구멍을 타고 흘러간다. 

  “큭…….”

  머리가 찡하고 울려서 잠시 얼굴을 찌푸렸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이 냉장고는 설정보다 더 강하게 동작하고 있다. 지금까진 한여름이고 워낙 바빠서 집에 있는 시간도 많지 않아서 그냥 두었는데, 이젠 정말 손을 써야 할 것 같다. 

  「웃우- 메일 왔어요, 프로듀서!」

  765프로덕션의 아이돌을 데리고 휴대전화 벨소리를 녹음한 것이 2주 전이다. 팬도 별로 없는 사무소에서 이런 거 만든다고 과연 팔리겠는가 반신반의하면서도, 이런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사무소가 버틸 수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시작한 일이다. 계약을 제의한 회사에서 ‘아이돌을 직접 데리고 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녹음만 해서 보내주세요’ 라고 말해줬기 때문에 작업 중간중간에 짬짬이 작업했다.

  그런데, 의외로 매상이 호조를 기록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이쪽이 지금까지 필사적으로 찾아다녔던 공연이나 오디션보다 이득이 크다. 사무소의 경영난은 해결되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지만, 지금까지 해왔던 것은 뭐였나 싶어 허탈하다. 대부분이 이제 갓 데뷔했을 뿐인 E랭크니까 어쩔 수 없나.

  보낸이 : 하루룽
  제목 : 프로듀서, 오늘 뭔가 예정이라도 있으신가요?
  내용 : 저, 그, 저랑 영화라도 보러 가지 않으실래요? 아, 물론 프로듀서가 괜찮으시다면/// 이란 거지ㅏ만요// 에헤ㅎᅟᅦᆺ

  아, 하루카도 오늘 오프였지. 그동안 휴일이 없었으니까.

  메일을 보낸 것은 사무소 유일의 D랭크 아이돌, 아마미 하루카였다. 얼마 전까지는 765프로의 모든 행사에 참가하느라 제법 바빴을 것이다. 휴일도 없이 무리하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벤트 주최측에서 하루카의 출연을 요구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한번도 힘든 기색을 내비치지 않고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 주었다.

  그러던 것이, 벨소리가 잘 팔리면서 사무소의 다른 아이돌들에게도 행사가 들어오고 있다. 직장인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있는 건 야요이 버전이고, 그 다음이 이오리였나. 의외로 하루카 버전의 순위는 낮았다. 

  뭐 어쨌든, 다른 아이돌들의 인지도가 높아지는 것은 좋은 일이고 하루카의 부담이 줄어든 것도 좋은 일이다. 그렇게 노력했던 춤이나 노래랑은 상관없이 인기를 얻고 있는 건 기뻐해도 좋은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숨통이 트였다. 사무소도, 하루카도. 

  하루카는 요즘 레슨에 집중하고 있다. 행사에 참가하느라 연습도 제대로 할 수 없었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위를 노릴 수 있을 것이다.

  ‘프로듀서 씨는 어떤 목표를 갖고 계세요?’
  ‘하루카를 톱 아이돌로 만들거야.’
  ‘에? 토, 톱 아이돌 말인가요?’

  이런 얘기를 해놓고는 지금까지 행사만 여기저기 돌려댔으니, 하루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역시 말만 앞서는 아저씨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음……. 영화인가. 확실히 사무소에서 새로 나온 영화를 보고 싶다고 다른 아이돌들과 얘기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분명히 빈민가에서 태어나서 노래로 구걸하던 아이가 한물간 프로듀서를 만나서 톱 아이돌이 된다는 줄거리였던 것 같다. 그런 일이 가능하겠냐 말도 안 되잖아 싶지만 의외로 여고생들에게는 통하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제목 : 아~ 미안
  내용 : 오늘 그녀하고 데이트거든, 영화는 다음에 보도록 하자?

  거절했다. 그런 비현실적인 영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간만에 쉬는 날이니 그동안 바빠서 제대로 보지도 못한 애니들을 감상해야지. 후후후……. K쨩, 오늘은 나랑 데이트야?
[이 게시물은 에아노르님에 의해 2013-06-07 00:02:31 창작글판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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