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

노을빛에 물든 어느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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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5-18, 2013 23:03에 작성됨.

“아라~?”

긴 흑발의 여성은 평소와 같이 퇴근을 하던 길이었다. 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또 모르는 곳에 도착해 곤란함을 느끼고 있었다. 도착한 곳은 어느 언덕의 노을이 지고 있는 아름다운 동산의 벤치. 모르는 곳에 있어 곤란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름다운 풍경에 마음을 뺏긴다.
세상이 따스한 주홍빛으로 물들어간다. 구름도, 하늘도, 공원도, 도시도, 꽃도, 나무도. 하다못해 불어오는 바람에도 따스한 색이 스며있는 것 같았다.
오늘은 평소보다도 일이 빨리 끝나 집에 일찍 갈 생각이었지만 그 생각은 잊게 된다.

“가끔은 이런 것도 좋겠지.”

그리 중얼거리고서 근처 벤치에 앉는다. 어차피 걷다보면 언젠가는 집에 도착한다. 집에 가면 혼자. 가끔은 이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여기에 시원한 맥주라도 있으면 느긋하게 마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쉽네.”
“이게 필요하세요?”

그리 중얼거리자 순간 얼굴 옆에 누군가 맥주캔을 건네주었다. 갑작스런 권유에 놀랄만 하지만, 아즈사는 특유의 느긋함으로 천천히 얼굴을 돌려 상대를 보았다.

“아라- 프로듀서씨?”
“참, 평소와 다른 길로 가셔서 혹시나 해서 따라 와봤다고요.”

그리 말하면서 프로듀서는 맥주캔을 하나 상대에게 건네고서 자신 몫의 맥주캔을 땄다. 

“번거롭게 해드렸네요, 죄송해요.”

한 손으로 볼을 받치며 웃으며 사과하자 프로듀서도 마주보며 싱긋 웃었다.

“괜찮아요. 어차피 오늘은 저도 드물게 일이 일찍 끝난 날이니깐요. 거기다 이런 멋진 풍경을 아즈사씨와 같은 미인과 감상할 수 있다면 그건 아주 멋진 보상이라고요.”
 
그러면서 맥주캔을 살짝 들어올렸다. 그러자 아즈사도 맥주캔을 따고서 가볍게 건배를 했다. 가벼운 맥주캔의 울림이 노을에 섞여 고운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후후, 프로듀서씨와 이렇게 단 둘이 보내는 것도 좋네요.”

일이 끝나고서 단 둘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즈사는 그것을 자각하며 언덕에서 풍경을 보고 있었다. 서로 조급하게 입을 열어 말을 하지는 않는다. 그보다 지금의 좋은 분위기와 맥주의 가벼운 알코올에 취해 현재를 즐기고 있었다. 프로듀서가 온 순간 최소한의 곤란함도 사라져 즐겁게 지금을 보낼 수 있었다.

“아즈사씨의 길치는 어쩌면 일부러일지도 모르겠군요.”

프로듀서는 풍경을 안주삼아 맥주를 마시며 말했다. 아즈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라- 전 일부러가 아닌데요?”

아즈사의 순진한 반응에 프로듀서는 즐겁게 입을 열었다. 잔잔한 어조가 현재의 분위기에 알맞게 섞여 분위기를 깨지 않는다.

“운명의 상대를 찾기 위해서 아이돌이 되셨다고 하셨죠?”
“네.”
“그럼 그 운명의 상대를 만나기 위해, 혹은 운명의 상대가 자신을 찾게 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해서요.”
“아라-”

본인인 아즈사는 그 말에 동의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가끔은 자신이 생각해도 자신의 길치는 지나치게 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일로 일에 지각을 한 적은 없었다. 아무리 길을 잃어도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고, 가끔 정말로 곤란할 때는 늘 옆에 있는 사람이 자신을 찾아주었다.

“후후- 그럼 프로듀서씨가 제 운명의 상대인가 보네요. 늘 저를 찾아주시니 말이죠.”

아즈사는 그리 말하고서 맥주 한 모금 마신다. 시원한 맥주가 목을 넘어가는 것이 기분이 좋다. 시원한 바람에 묘한 내음이 분위기를 타며 자신들을 지나간다.
프로듀서도 한 모금 마시고서 아즈사를 보았다. 그 눈은 어쩐지 진지했다.

“그래도 되나요?”

그 동의에 아즈사는 말없이 맥주캔을 두 손으로 쥐고 풍경만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높은 건물들은 평소에는 삭막하다 생각했지만 그 유리창이 노을빛으로 변한 모습은 보기 좋았다.

“...후훗, 그럼 전 아이돌을 은퇴해야겠군요. 운명의 상대를 찾았으니 말이에요.”

노을 때문일까,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얼굴은 붉어보였다. 취할 양은 아니지만, 그래도 술이 들어갔으니 붉은 거일 수도 있다. 아니면 시원한 바람이 생각보다 차서 붉게 상기한 것일 수도 있다. 그 또한 아니면 정말 그저 노을빛과 분위기에 얼굴이 물든 것일 뿐이지도 모른다. 어쨌든 두 사람은 연한 붉은 색이었다. 얼굴빛도, 분위기도.
두 사람은 한 동안 말 없이 저녁풍경을 보며 맥주만을 마신다.

맥주가 한 모금 정도 남았을 때 프로듀서가 입을 열었다.

“그건 운명의 상대가 맞는지 확인 기간이라는 것으로 부탁드립니다.”

아즈사 또한 한 모금을 마시자 마신 만큼의 양만이 남았다는 것을 무게로 알게 되었다.

“아라- 운명의 상대가 맞으면 어떡해 하죠? 그대로 은퇴해도 되나요?”
“그 때는-”

프로듀서의 시선이 아즈사에게 향한다. 아즈사 또한 그런 프로듀서의 눈을 본다. 노을빛이 서로의 눈에 머무르고, 서로의 모습이 그런 연하거나 짙은 주홍빛의 세계에 머문다. 그 눈 속의 세계에 머문 자신들의 얼굴은 그 주홍빛보다 더 짙어 보였다.

“당시가 되면 제가 말하겠습니다.”

프로듀서는 그리 말하고서 고개를 돌렸다. 아즈사는 풋하고 웃더니 맥주캔을 내밀었고, 그 내민 맥주캔에 프로듀서는 말없이 자신의 맥주를 부딪혔다.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자 세상은 노을빛은 사라져 버렸다. 짙은 남색의 색으로 하늘이 물들고, 거리의 불빛이 가로등과 광고판, 관판 건물의 형광등 색으로 물들었다. 프로듀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털며 아즈사에게 말했다.

“배고프네요. 저녁은 드셨나요?”

그러면서 부드럽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고 일어나며 아즈사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네요.”
“그럼 저녁이라도 같이 할까요?”
“좋아요. 좋은 가게 아시는 곳 있나요?”
“좋은 곳이 있어요. 음식이 담백한데, 허기를 채우고 나면 다시 맥주가 그리워지는 가게죠.”
“정말 좋은 가게네요.”

아즈사가 일어나고서도 둘은 손을 놓지 않았다. 놓아야 한다는 것을 잊은 듯 두 사람은 사람이 돌아다니지 않는 저녁 동산을 천천히 내려갔다. 저녁이지만 동산에서는 이른 달이 보이고 있었다. 
그것을 두 사람은 나란히 올려다보다가 아즈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달이-”
“매우 아름답군요.”

아즈사의 말을 프로듀서가 이어 답하고, 이내 두 사람은 매우 유쾌하다는 듯이 크게 웃었다. 어느 저녁, 어쩐지 노을의 푸근하고 따스한 분위기가 밤 늦게까지 사라지지 않던 날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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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훈훈달달 네잎이었습니다.
[이 게시물은 에아노르님에 의해 2013-06-07 00:02:31 창작글판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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