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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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07, 2013 20:52에 작성됨.

"................"

헝클어진 머리, 멍한 표정, 물자국이 남은 초췌한 얼굴. 아무렇게나 입은 옷.

그 어디에서도 당당한 미나세 가의 아가씨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찌익. 찌익.

아마 영화표로 추정되는 종이가 휴지가 된다.

".................."

그녀의 눈에 곰인형 하나가 들어온다. 그것을 집어든다.

"키잇!! 키이잇!! 키이이잇!!"

인형의 다리를 잡아들고 바닥에 마구 내려쳤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있는 힘껏 주먹질도 한다. 아까워서 안고 자지도 못하던 그것이었는데.

"키...키...ㅋ...ㅎ....흐아앙!! 흐아아앙!!!!"

미친듯이 인형을 때리던 손이 점점 느려진다.

이오리의 두 눈에서 계속 답답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부서진 싸구려 휴대전화. 산산조각난 싸구려 유리 악세사리.

배가 터져서 솜이 드러난 싸구려 곰인형. 박살난 액자와 구겨진 사진.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소용없었다.

아무리 해도 그녀의 믿음직스럽지 못한 프로듀서를 잊을 수 없었다.






"아가씨....타카츠키 씨가 왔습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싫어."

"............그러지 마시고."

"싫어!! 싫다고!!! 아무도 보고 싶지 않다고!!!"

".................."

신도는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생각같아서는 그 프로듀서라는 작자를

찢어발겨버리고 싶다. 그러나 그에게 죄가 있을까?

그저 자신의 아가씨가 겪는 첫사랑의 상처를 잘 극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신도는 조용히 주황머리 아가씨에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믿음직스럽지 못한 프로듀서가 그녀의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

왠지 모르게 두근거리는 가슴이 싫었다. 그게 싫어 괜히 밉살맞게 굴었다.

그리고 또 후회하고. 그러면 또다시 가슴이 뛰고.

이상한 열병이 그녀를 덮쳤다. 프로듀서 앞에만 서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허니~ 에헤헤헤! 쓰담쓰담해주세요인거야!!"

밉다. 어떻게 저렇게 마음대로 말할 수 있는거지?

이쪽은 눈만 마주쳐도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은데. 숨도 잘 쉬어지지 않는데.

무력했다. 미나세 가의 재산과 권력으로도 되지 않는 일이 거기 있었다.

"아핫! 허니 정말 좋아해인거야!!"

밉다. 이제는 저 금발이 미운게 아니라 멋쩍은 웃음만 짓는 프로듀서가.

두려웠다. 좋아한다고 한 마디 못한 채로 잃어버릴까봐.




그래도 조금은 자신이 있었다.

휴대전화도 선물받았다. 곰인형도 선물받았다. 귀걸이도 선물받았다.

추억도 훨씬 많이 선물받았는데........

그의 옆에는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가 있었다.




"이오리. 그게 무슨 말이야....."

그 말과 함께 짓는 프로듀서의 표정은 그녀에게 공포였다.

[좋아해. 프로듀서 아닌 남자로.]라는 말을 정말정말 어렵게 내뱉은 뒤의 일.

거절이 아니다. 당혹.

아예 그녀를 이성으로서 인식해보지 못했다는 그 당혹어린 표정.

절망해버렸다. 그녀의 빨간 하트는 그렇게 여러 토막이 났다.

"흐흑........흐아아아앙!!!!!!!"

짐승같은 울음소리가 미나세 가의 큰 저택에 울러퍼졌다.




달칵.

"아가씨!"

"..............밥 줘. 신도."

드디어 문이 열리고 이오리가 나왔다. 신도는 마치 복음을 들었다는 듯

메이드들을 닦달해 최고의 저녁상을 차려 올렸다.

이오리는 마구 음식을 입에 쑤셔넣는다. 음식이 입에 묻고 옷에 떨어져도

미나세 가의 아가씨로의 품위를 따지는 눈치없는 사람은 없다.

"신도."

"네 아가씨."

"술 있어? 한 잔만 줘. 부탁이야."

".................."

신도는 미성년자는 술을 드시면 안 됩니다 같은 쓸데없는 설교 대신 

말없이 최고급 와인을 이오리의 잔에 따랐다.

붉은 피 같은 잔을 말없이 쳐다보던 이오리가 잔을 확 기울인다.

"왜..."

"아가씨?"

"왜!! 왜!!!!"

"?????"

"왜 안되는 거야!!! 밥도 많이 먹고 술도 먹었는데!!! 도대체 왜!!!!

왜....왜 그 바보를 잊어먹지 못하는 거야!!!!!!!! 흐..흐아앙!!!!!!!!!!"

"................."





신도는 말없이 서 있었다.

공허해 보이는 커다란 저택에는 이오리의 울음소리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짧은 가을비 같은 이오리의 첫사랑이 지나가고 있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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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카만 괴롭히냐는 항의를 받아서 써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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