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팬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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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07, 2013 17:39에 작성됨.

 내가 그녀와 만난 것은 아직은 따스한 햇살에 몸이 나른해지는 봄이었다.
 벚꽃이 작은 봉오리를 활짝 피우며 그 아름다움을 뽐낼 때, 대학을 졸업하고 한없이 잉여가 되어 방구석에서 이력서나 깨작대던 난 엄마의 맹렬한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저녁 찬거리를 사기 위해서 상점가를 향해 털레털레 발걸음을 옮겼다.
 이럴 시간이 있다면, 인터넷 취업 강좌나 하나 더 듣는데 엄마도 참 너무한다고 집에 있을 때는 결코 할 수 없을 말을 중얼거리며 상점가에 들어선 나의 귓가에 낮선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태양의 젤러시. 내가 처음 들은 그녀의 노래였다.
 데뷔한지 고작 반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무명 아이돌.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조금 귀여운 여자아이. 이것이 내가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받은 첫인상이었다. 그녀는 사람들을 향해 밝게 미소 지으며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다. 저런 걸 보통 아이돌들이 하는 건가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옆에 놓인 초라한 간판에서 아 그래하고 납득해버렸지만.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려던 나를 바라본 그녀는 “아마미 하루카에요, 잘 부탁드립니다.”라며 어딘가 대선 후보 같은 인사를 하며 싱긋 웃어보였다. 누구에게나 하던 인사말이었을 것이고, 누구에게나 보이던 미소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미소에, 그 목소리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그 다음은 멍하니 장볼 돈으로 CD를 구입하고, 결국 돈이 모자라서 두부를 못 사고, 잠들 때까지 엄마한테 혼났지만, 내 마음은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이상야릇한 무언가로 가득 차있었다. 사랑? 아니다 그것과는 명확히 달랐다. 친애? 그것과도 명확히 달랐다. 처음이었다. 이런 기분이 든 건. 25년을 살아오면서도 처음 느낀 감정이었다. 그 날 밤은,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수면부족 때문에 멍해진 상태로 세수를 하고 방으로 올라간 나는 곧바로 컴퓨터를 켜고 그녀의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하늘 바다와 봄의 향기라고 쓰고 아마미 하루카(天海春香). 그녀의 소속사인 765 프로덕션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그녀의 프로필을 바라보며 눈에 새기고, 그녀의 앨범을, 그녀의 노래를, 그녀의 최근 소식들을 주워 모았다.
 그렇지만 부족했다.
 나는 바로 홈페이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게시판 하나로만 이루어진 홈페이지라고도 부르기도 부끄러운 거였지만, 그래도 그 당시 나한테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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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홈페이지를 열고 꽤 지났지만, 회원 수는 거의 늘지 않았다. 총 회원 수 13명. 개설자인 나를 포함하면 고작 12명이 모인 것이다. 그들은 서로를 765의 십이지신이라고 칭했고 나더러는 운느님이라는 이상한 별명을 붙여주었다. 물어보니 운영자+하느님이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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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5 프로덕션 홈페이지에 올라와있던 프로필 사진이 변경되었다. 전에 달려있던 그 이상한 사진이 아닌 제대로 된 프로필 사진에 이 기획사에 갖고 있던 불신이 약간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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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루사토 마을이라는 시골 촌구석로 전원 참가 이벤트를 받았다는 말에 게시판이 잔치 분위기가 되었다. 십이지신과 나 말고도 다른 회원들이 몇 분 생겼다. 어떤 분이 ‘유키호 나다 결혼해 주라아아아아!!!’라는 글과 함께 라이브 영상을 올려서 잔치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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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처음으로 그녀가 TV방송에 출연했다. 마이저한 케이블 방송국에서 하는 마이저한 프로그램(이름도 무슨 개굴개굴 키친이었던가?)이었지만, 그녀가 처음으로 TV에 출연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날이었다. 은발을 밀고 계시던 십이지신중 쥐를 맡고 계시던 분은 ‘운느님이 밀고 있는 쪽이 적이라니 이쪽이 보정이 불리해!’라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올리셨지만, 어쩐지 나 빼고는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여서 그냥 웃어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날 그녀는 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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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의 대외활동이 거의 없다. 아니 765의 모든 아이돌들이 활동을 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이 없는 것 같았다. 765 프로덕션의 최근 소식에는 아이돌들이 레슨을 받는 사진밖에 올라오지 않는다. 십이지신중 돼지를 맡으신 분이 밀고 있는 ‘아즈사 씨한테 일을 안 주는 이 세상에 절망했다!’라는 게시물을 올려서 한동안 그게 홈페이지에 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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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765 프로덕션 홈페이지에 아이돌들이 단체로 바다로 여행 갔을 때 찍은 사진과 영상이 올라왔다. 그녀가 입은 분홍색 비키니도 엄청 귀여웠지만, 역시 91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내 홈페이지에도 91의 위엄에 굴복한 이들의 글로 한동안 시끌시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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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구코마치라는 이름의 아이돌 유닛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돼지님과 개님, 원숭이님이 아주 신났다. 그 덕분에 765의 다른 아이돌들한테도 조금씩 일이 늘어나기 시작해서 이 홈페이지의 회원 수도 나날이 갱신되고 있다. 서버도 조금 증설했고, 얼마 전에는 765 프로에 연락해서 첫 공식 765 프로덕션 팬클럽으로 인정받았다. 기왕이면 그녀를 위한 첫 공식 팬클럽이 되고 싶었지만, 그녀는 아직까지 무명이니까 홈페이지를 만든들 회원이 안 모여서 힘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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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첫 정모를 가졌다. 비록 나랑 십이지신분들만 모인 조촐한 모임이었지만 무지 즐거웠다. 각각 밀고 있는 아이돌들의 자랑을 하고 그동안 모은 전리품들을 자랑했다. 돼지님과 소님이 제일 들떠있었는데, 그날 아즈사 씨와 미키미키가 웨딩드레스를 입은 사진이 실린 패션 잡지의 발매일이었다는 것 같다. 마코토도 나오기에 양님도 신날 줄 알았는데 마코토만 턱시도라며 상당히 실망한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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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구코마치가 주역을 맡은 미니 드라마가 방영됐다. 류구파 분들은 류구의 연기는 훌륭했지만, 내용 자체는 너무 뻔해서 중간쯤에 범인을 알아버렸다. 작가를 죽입시다. 작가는 나의 원수! 같은 글들을 올렸다. 나도 재방송할 때 봤지만 류구코마치의 연기는 괜찮았지만, 나머지 스토리나 연출 등은 별로였다. 작가를 죽입시다. 작가는 나의 원수! 라는 글들이 이해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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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사스러운 일이다. 예능인 대항 운동회에서 765 프로덕션이 우승을 했다. 그녀도 꽤 괜찮은 분량이 잡혔다, 특히 그 치어리딩만 봐도 ‘안 되겠어 이 방송 빨리 녹화하지 않으면’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리고 역시 91의 위엄은 엄청났다. ‘그 장면만 계속 돌려봤다’라는 게시물에는 ‘여기에 내가 있다!’라는 댓글로 도배되었다. 물론 나도 참가했지만…… 덕분에 ‘운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고 한소리 들었다. 그나저나 요즘 친구들이랑 만나면 많이 변했다는 말을 많이 한다. 좀 폐인 같다나, 인터넷을 좀 줄이라는 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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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취직이 결정되었다. 작은 회사지만 꽤나 안정적인 자금원과 성장세를 보이고 있으니 걱정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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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65 프로덕션 올스타 라이브가 결정되었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별 것 없는 무명 프로덕션이었는데 어느새 그렇게 커다란 무대에서, 올스타 라이브라니. 물론 류구코마치가 메인이고 그녀를 포함한 나머지 아이돌들은 게스트라는 느낌이지만 그게 어딘가. 나는 이 무대가 반드시 그녀를 톱 아이돌의 자리에 올려줄 거라고 믿는다. 반드시 가야지, 두 번 간다. 계속 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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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를 포함한 모든 아이돌들이 엄청난 기세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역시 그 라이브에 온 모든 사람들이 그녀의 매력을 알아준 거겠지. 덕분에 우리 홈페이지에도 엄청난 속도로 회원이 늘고 있어서 매일 같이 수많은 게시물이 올라오고 있다. 개중에 서로 지지하는 아이돌 때문에 큰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가 있어서 각 아이돌 별로 게시판을 만들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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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방임까 선데이가 방영개시! 덕분에 홈페이지도 잔치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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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765프로 정기 라이브를 다녀왔다. 한동안 슬럼프였던 치하야가 나왔는데 역시나 노래를 못했다. 그렇지만 그녀가 나와서 치하야를 격려하고, 나머지 아이돌들도 함께 노래를 불러 치하야를 격려해주자 우렁찬 목소리로 노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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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동안은 회사일 때문에 바빠서, 제대로 그녀를 보지 못했다. 무슨 연극에 출연한다는데, 감독이고 각본가고 전부 엄청 유명한 사람들이라는 것 같았다. 이 연극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으면 그녀는 더 큰 무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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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슬럼프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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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맞이 라이브에 그녀가 나왔다. 다행이다 슬럼프를 잘 극복해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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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은퇴를 선언했다. 그녀의 프로듀싱을 맡던 남자와 결혼한다는 것 같았다. 결혼식은 다음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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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어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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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가 다시 아이돌 활동을 재개했다. 다행이다. 그녀가 아이돌을 그만둘 리가 없지.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하루카.
 그녀는 더 이상 웃어주지 않았다.
 하루카
 그녀는 더 이상 노래하지 않았다.
 하루카
 그녀는 더 이상 춤추지 않았다.
 하루카
 그녀는………




 더 이상 내말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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