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

[[email protected]] 채팅방의 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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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28, 2012 05:52에 작성됨.

 

    "굿밤되세요."
    "좋은 밤 보내세요."

    짧은 인사를 나누고 나는 채팅방을 껐다. 채팅방에서 떠들다 보면 늘 날이 바뀌고서야 하루를 마감하게 된다. 채팅방에서 만난 사람들은 만나 본 적이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고, 알게 된 것도 기껏해야 보름 안팎인 사람들이었다. 다들 공통된 주제를 놓고 모인 사람들이었지만 정작 그 주제로만 이야기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 뜻 없는 이야기만 해도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이, 또 그렇게 몇 분이고, 몇 시간이고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새롭고 재미있었다. 하지만 꽤나 좋은 추억거리라고 생각했으면서도 그저 스치듯 지나간 감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재밌게 읽었던 이야기 책도 책장에 꽂아놓으면 금새 잊어버리게 된다. 책을 덮듯 브라우저를 끄고 나니 감상도 같이 지워져버리는 것 같았다.

    채팅방은 오늘의 첫 정적을 맞이하고 있었고, 나는 밀린 일들을 이상하리만치 잘 풀어나가고 있었다. 그래도 약한 집중력이었던지라 한계는 금방 찾아왔다. 잠깐 숨 좀 돌리려고 생각하면서, 나는 습관처럼 브라우저를 켰다. 그리고 또 몸에 익은 모양으로 주소를 입력하고, 웹페이지 오른쪽 위의 '현재 접속자' 박스를 보았다. 파란 상자 안에는 내가 나왔을 때와 똑같이 '2'가 적혀 있었다. 지금까지 안 주무시고 있는 분이 계실까, 안 주무시더라도 이 창을 띄워놓고 지켜보는 분이 계실까, 평소처럼 누군가와 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하지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대화방 링크를 클릭하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어차피 들어가도 아무 변화 없이 굳어버린, 지난 이야기들만 보일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생각대로 로그는 지워지지 않았다. 짧막한 인사와, 한 분이 나가셨다는 알림글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쓸쓸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아래에, 방금 전엔 보지 못한 굵고 붉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으아아아!"

    조금 전까진 보지 못했던 말, 하지만 언젠가 이 곳에서 본 적 있는 말. 그리고 대답 없는 말. 새벽 3시 30분이었다. 채팅방에 남아계신 다른 한 분은 그냥 주무시는듯 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똑같이 '으아아아!'를 화면에 띄웠다.

    '저 말은 언제 쓰신 것일까?'

    엔터를 누르며 무심결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저 분은 언제 저 말을 남기셨을까? 내가 나간 직후에 남기셨을까? 남은 한 분의 대답을 기다리며 남기신걸까? 뭘 하고 계실까? 별거 없을지도 모르는 새벽의 외침에 생각은 꼬리를 물었다. 말과 말이 오가는 채팅방에, 자신의 말을 마지막으로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다면 무척 외로운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나게 떠드는 와중 재밌을거라 생각한 말에 아무도 반응을 해주지 않으면 무척 당황스러워진다. 모두 저마다의 깊은 생각을 꺼내고 공감하는 와중에 자신의 말에 대답이 오지 않으면 불안해지기도 한다. 대화의 마지막 마침점 뒤에 찾아오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 정적은 모두 자신에게 고스란히 날아온다. 때에 따라, 또 사람에 따라 정적의 무게는 다르게 느껴지겠지만, 이 정적은 항상 어느정도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

    나와 또 다른 분이 인사를 나누며 떠났을 때, 대화의 흐름은 매끄럽게 마침점을 찍었다. 뭔갈 말할 사람은 떠났고, 누가 새로 올 것을 기대할 수도 없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굳이 '으아아아!' 하고 뜻 없는 외침을 남기신 이유는 뭘까? 홀로 남겨진 외로움을 스스로 상기시켜 보고자 하신 것일까? 굳이 그걸 느끼실 필요가 있었을까? 생각은 점점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 때 채팅방 스크롤이 움직였다.

    "으아아아!"
    화면을 주시하고 있던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으아아아! 안 주무시네요."
    금방 대답해 드려서인지, 곧 별 내용 없는 이야기가 띄엄띄엄 이어졌다.
    "으아아!"
    "아!!!"
    "아아아!!"
    "아"
    "이"
    "마"
    "스"
    "타"
    "지"
    "오!!!!!"
    "예이!"

    의미 없는 말 뒤에 또 정적이 찾아왔다. 방금 전에 저 분이 느끼셨을 정적이 이제 내 마음에 찾아온다. 한참이 지나도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10분, 그리고 또 10분… 나는 이상하게 오기가 생겼다. 언제 대답이 돌아올지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 새벽의 고요함이 어떤 느낌인지 느껴 보기로 했다. 웹 브라우저를 작게 만들어 채팅방을 언제든 볼 수 있게 해둔 채 시간을 보냈다. 짧은 이야기를 하느라 그쳤던 생각이 다시 이어졌다. 대화의 장소에서, 대화가 될 수 없는 말을 남기신 이유가 무엇일까. 채팅방의 본질에서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으아아아!'의 의미가 궁금했다. 별로 든 것 없는 머리를 이리저리 굴려보아도 뾰족한 답이 나오진 않았다. 

    채팅방은 모두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만들어진 장소다. 내가 말을 하면, 누군가가 그 말을 들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는 공간이다. 서로는 존중되고 이해되어야 하는 대상이라는 '믿음'이 전제된 곳이다. 자신말의 말을 하고, 자신만의 세계를 펼치는 것도, 혹은 반대로 자신의 생각을 전혀 펼지지 않는 것은 이 믿음에 어긋나는 일일 것이다. 보이지 않는 이 받침돌이 무너지면, 그 공간은 죽은 공간과 다르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 분의 의미없는 '으아아아!'의 무게가 갑자기 느껴져 오는 것이었다.


    내가 말을 하면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들어 줄 것이다. 스스로의 생각만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무도 없더라도, 언젠간 누군가 돌아와 나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 가망없어 보이는 정적 속에서 그 분은 짧은 말로 이 믿음을 증명해 보이신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새벽에 남아 종종 '으아아아!'를 외치신 것도 이 깊은 뜻을 누군가가 알아차려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희망에서 우러나온 하나의 고행일지도 모른단 생각도 들었다.

    종종 일어나는 채팅방의 폭주, 그리고 커뮤니티, 아니 우리 일상 생활속에서도 볼수 있는 많은 다툼과 싸움도 결국 같은 뿌리에서 자란 일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계셨다. 이것은 무척 단순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해결된 적이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이 분은 희망을 버리지 않으셨다. 적막한 채팅방에 글을 남기시며, 누군가 서로의 이야기를 경청해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셨다. 이 대답 없는 외침이 오히려 모두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금 뒤면 동이 트고, 아침이 밝을 것이다. 나는 벌써부터 이 분의 고귀한 정신을 모두에게 알릴 생각으로 뛰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경청하고, 존중해야만 한다는 사실. 프로메테우스가 찾아와 어둠이 밝혀졌듯, 불꽃과 강이 만나 이미르를 낳았듯, 모두가 당연히 알고 있던 이 사실에 다시 한 번 새로운 불을 비출 수 있는 때가 온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분은 그냥 카오스 하고 계셨다. 다른 한 분도 방송하고 계셨던 거였다. 하하하. 히데부 등신 하하하.
[이 게시물은 에아노르님에 의해 2013-06-07 00:10:50 창작글판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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