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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나이트 4 - 표류漂流 : 이치노세 시키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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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15, 2018 16:52에 작성됨.

 백야야. 하나 명심해라.

 뭘 말입니까.

 우리 같은 놈들은 변하는 게 없어. 항상 쓰레기야.

 네. 알고 있습니다.

 그치. 넌 잘 알겠지. 하지만 어쩌겠냐. 이따위로 자란 것을. 그렇다고 죽을 수도 없잖아. 이따위로 살아가야지. 돈 주면 주는 대로, 빡돌면 빡도는 대로. 그래. 이 새끼 조져놓은 것처럼 말이야. 본성대로. 본능대로.

 이런 새끼들은 이렇게 대하는 수밖에 없죠.

 그러니까 우리 같은 놈들도 쓸모가 있는 거야. 이독제독이라고 하잖아.

 그런데 가끔 그런 생각도 듭니다. 이런 놈들도 어떻게 자랐느냐에 따라선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우리도…….

 억울하냐? 이렇게 된 게?

 아니요. 저는 현 생활에 꽤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럼 됐어. 도리에만 벗어나지 않게 살아가자고. 어차피 세상은 뭐 같으니까. 씨발, 누가 감히 우리한테 뭐라 그러겠어. 지들이 우릴 이렇게 만들었는데. 슬슬 일어나자.

 가실 겁니까?

 아니. 이 새끼랑 끝장 봐야지. 일으켜 세우고, 연장가방 가져와라.

 형님도 참 지독하십니다.

 네가 할 말이냐.

 그건 아니죠.

 

 *

 

 허망했다. 지금껏 참아온 것이 전부 헛수고가 되는 기분. 스스로에 대한 경멸도 함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무리 문제아라지만 나의 담당 아이돌에게 그딴 짓을 하다니. 정말로 나란 놈은 바뀌는 게 없구나, 평범한 사람들과 안 맞는구나. 복잡한 감정들이 모자 아래에서 뇌를 잠식해 갔다. 이 와중에 녀석이 신고라도 해서 잘리면 어쩌나, 하는 현실적인 생각이 들어 점점 더 심란해졌다.

 안 그래도 먹고 살기 힘든데, 새로 일자리를 알아봐야 하나, 선배한테 빚도 못 갚았는데, 무엇보다 아이돌들은 어쩌지.

 눈물 나는 이별식의 망상을 하고 있을 때 익숙한 발소리들이 가까워졌다. 고개 돌리지 않아도 눈가에 스치는 반짝임, 그리고 서늘한 기운. 아나스타샤와 미오였다. 두 아이들이 “겨울P!”, “프로듀서!”하고 굉장히 반갑게 나를 불렀다. 순간적으로 묵은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듯 했다.

 학교가 같은 두 여고생은 회사 안에서는 거의 함께 다니며 굉장히 밝은 기운을 발산했다. 원래부터 아나스타샤와 함께 있는 게 좋긴 했으나 미오가 더해지자 훨씬 산뜻해진 것이다. 딸아이들 목소리 들으면 힘이 난다는 직장인들 말이 이런 뜻이 아닐까 싶었다.

 “겨울P. 왜 복도에서 이러고 있어? 더워서 그래?”

 “사무실로 들어가요. 에어컨은 시원하니까.”

 “아니. 그게 좀, 안 되겠어서.”

 “어라? 수상한데.”

 미오가 사무실 안을 슬쩍 들여다봤다. 녀석을 보았는지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나스타샤도 확인하고는 미오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대체 뭘 어떻게 한 건지 알 수 없는 의사소통 방법으로 자기들끼리 신호를 주고받더니 나를 끌어당겼다. 직감으로도 알아내지 못한 상황에 당혹스러웠다. 역시 여고생들은 굉장해. 혀를 내둘렀다.

 두 별들에게 끌려 간 곳은 회사 휴게실이었다. 에어컨도 있고 자판기도 있는 낙원이지만, 업무시간 중에 오래 있으면 눈총을 받기 딱 좋아 자주 들르지는 못 했는데, 오늘 따라 휴게실에 사람이 많았다.

 우리는 중앙의 자리에 둘러앉았다.

 그러자 미오가 대뜸 ‘겨울P 힘들지?’ 하고 정곡을 찔러왔다.

 “말 안 해도 알아. 시키냥 때문이잖아.”

 미오는 어느새 녀석에게도 별명을 붙여 부르고 있었다. 시키냥. 본명에다가 고양이를 뜻하는 냥을 붙여 지은 이름. 녀석뿐만 아니라 미오는 모든 아이돌, 심지어 친한 직원들에게까지 별명을 지어줬다. 특이하게도 치히로는 따로 별명 없이 ‘치히로 씨’라고 불렀다. “치히로 씨는 그냥 치히로 씨라는 느낌이잖아.” 라는 이유였는데, 묘한 설득력이 있어서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어쨌든 이런 별명메이커가 시키냥이라 부르는 녀석에 대해 우리는 이야기를 나눴다.

 “시키냥은 연습생들 사이에서도 평이 안 좋아. 좀 제멋대로인 면이 있잖아. 툭하면 레슨 빠지고, 갑자기 얼굴을 들이대고. 다른 부서에서는 따돌리는 그룹도 생긴 것 같아. 이상한 소문도 퍼지고. 집에 잘 안 들어간다나. 본인은 전혀 신경 안 쓰는 것 같지만.”

 “Да(네). 사람들이 시키를 안 좋게 말하는 걸 들었어요. 저는 조금 슬펐는데, 시키는 그렇지 않은가 봐요. 다른 부서에도 자주 들러요.”

 “철면피라고 해야 할까, 자유분방하다고 해야 할까. 다른 사람들도 버거워하는데 겨울P가 힘든 것도 이해가 가.”

 “…… 너희는, 어떤데?”

 두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나는 진지하게 물었다. 시키를, 어떻게 생각해?

 “싫어? 아니면, 좋아? 모두 내 담당이니까, 다른 사람들보다, 너희 의견이, 중요해. 나 혼자서, 어떻게든 하려 했지만, 안 되겠어. 솔직히, 힘들어.”

 털어놓았다. 그리고 조금 미안했다. 이런 일을 이제 와서 얘기한다는 것이. 제대로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아 자꾸 우울해졌다.

 그 사이 두 사람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당장은 대답하기 어려운 일이니까. 나는 차분히 기다렸고, 먼저 말을 꺼낸 건 아나스타샤였다.

 “시키와는 많이 대화한 적은 없어요. 처음 만났을 때, 시키가 먼저 말을 걸어왔지만, 냄새가 좋다거나, 예쁘게 생겼다거나. 그런 말만 했고. 그런데…….”

 “그런데?”

 “한 번, 연습하는 모습을 봤는데 сюрприз. 많이 놀랐어요. 어려운 춤을 한 번에 따라했거든요. 저보다도 더 잘했어요. 보고 있으면 굉장히 멋지고, 저도 저렇게 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어서 미오가 말했다.

 “나도 시키냥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함부로 말하기는 그런데, 내 생각엔 그게 시키냥의 스타일 같아. 정해진 방식에 따르기보단 자신만의 방식을 고수…… 는 아니지. 시시각각 변한다고 해야 하나. 음. 뭐라고 딱 정의할 수는 없겠다. 그래도 이거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어.”

 뭔가요? 아나스타샤가 물었다.

 “나는 부활동을 많이 해봤으니까 다양한 모습을 많이 봤거든. 연습하는 모습, 대회에 나가는 모습. 그 때 내가 제일 좋은 연습 스타일이라고 생각한 게 배구부 감독님이었어. 엄청 무서운데 은근히 부원들을 챙겨주면서 각자의 스타일을 존중해주시더라고. 덕분에 가끔 부원들끼리 마찰이 있을 때도 감독님이 나서면 금방 해결되고. 그러니까 시키냥에게만 우리에게 맞추라고 할 게 아니라, 우리도 시키냥에게 맞춰줘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해.”

 도움이 됐어? 미오가 씨익, 웃었다. 아나스타샤는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머릿속을 정리했다. 잠깐 반성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정해진 방식을 강요했을지도 모른다. 레슨을 받고 데뷔를 하고 그에 따른 일을 하는 방식, 아이돌 업계에 정해진 시스템을 말이다. 시스템이 꼭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지만 녀석에겐 답답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스트레스인가. 내가 제멋대로 행동 못 하니 너도 네 맘대로 행동해선 안 돼, 이런 식으로 녀석에게 불만을…….

 우스웠다. 평범한 사람들과 섞이고 싶어 하더니 의외로 잘 녹아들어 있었어.

 문제점을 알았으니 답은 하나. 나도 녀석의 스타일에 맞춰 줄 필요가 있다. 그럼 대체 어떤 식으로? 고민하고 있을 때 당사자가 찾아왔다.

 냐하, 다들 여기 있었네? 녀석이 고양이 같은 웃음을 짓더니, 백의 주머니에 넣어둔 음료수들을 자랑하듯 꺼내놓았다. 자, 여기 선물.

 “아까 좀 화나게 한 것 같아서 사과하려고 가져왔어. 마셔.”

 녀석이 차가운 음료를 건넸다. 캔 표면에 작은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미오와 아나스타샤는 또 신호를 주고받더니 내게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지금 상황을 좋은 기회로 여기는 듯 했다.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전혀 아니야.

 내가 음료를 받지 않자 녀석은 두 사람에게 접근했다. 짠! 너희도 마셔. 내게 준 것과 같은 음료를 선물했는데, 그 모습을 보자 또 화가 치밀었다. 녀석의 팔목을 붙잡고 행동을 저지했다. 이번에는 매우 이성적으로. 음료를 빼앗아 쓰레기통에 집어던졌다.

 아나스타샤와 미오는 경악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우리를 쳐다봤다. 오직 나와 녀석만이 장난기와 살기 머금은 표정을 유지했다.

 “작작 좀 해라.”

 내가 말했다. 한국어로.

 이 공간 안의 모든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 하고 있었다. 한 놈 빼고.

 “내가 지금까지 많이 봐줬는데, 이젠 안 될 거 같아. 그러니 마지막 기회야. 작작 좀 하자. 선을 지키자고.”

 모르는 언어로 내가 유창하게 말하자 아나스타샤가 놀랐다. 미오는 어리둥절해 했고, 녀석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소리하는 거야?

 “알아듣지 못 하겠는데.”

 “발뺌하지 마. 너무 긴장하지도 말고. 얘기 좀 하려는 것뿐이니까. 뭐부터 할까.”

 “그거 한국어? 맞다, 너 외국인이라고 했지. 근데 내가 아무리 천재라도 못 알아듣는 건 못 알아듣는 거라서…….”

 “네 가족사는 어때?”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이럴 줄 알았어. 나는 아무렇지 않은 여유로운 태도를 가졌다. 시종일관 유지하던 녀석의 페이스가 무너지고 내가 주도권을 잡은 순간이었다. 내가 언어문제로 곤란해 하는 걸 즐기고 있었겠지, 다 알아들으면서. 모자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한국에서 예전 일을 할 때 나는 모자가 아니라 가방을 챙겼다. 망치와 송곳, 나이프 등 살벌한 도구들이 가득한 가방을 사이즈 별로 준비하고, 맡은 일의 사이즈에 따라 메고 다녔다. 고아원에서 학수에게 배운 만큼 도구를 다루는데 있어선 날 따라올 자가 없었다. 내가 손에 쥔 도구는 세상 무엇보다 날카롭고 예리하고 치명적이었다. 이젠 그것을 가방 대신 머릿속에 챙기고 손에 쥐는 대신 입에 물었다. 전부 녀석에게 시달리면서 모은 무기들이었다.

 떠올렸다. ‘늑대.’ 예전 나의 별명. 지금 가진 ‘겨울P’라는 별명을 넣어두고 대신 꺼내들 모습을.

 지금껏 그냥 큰 개인 줄 알고 실컷 건드렸겠지. 이젠 그 실체를 알아두라고. 아파도 너무 뭐라 하지는 마.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으니까. 본성대로, 본능대로. 내가 변하지 않았다는 걸 알려줬지. 나도 알려줄게. 내가 누군지.

 칼을 휘둘렀다.

 “네가 혼자서 살고 있다는 건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야. 너한텐 보살핌의 흔적이 안 보이거든. 단서가 많았어. 예를 들면, 그거.”

 백의 속에 교복 주름을 흘겨봤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쭉 거기에 남아있던 흔적. 시간이 지나서 그 때보다 주름이 깊었지만, 위치는 똑같았다. 그런 것들이 교복 곳곳에 남아있었다. 내내 저 교복을 입고 다녔다는 뜻이지, 돌보는 사람이 있다면 불가능한 일이야. 그나마 전문분야인 냄새에 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해 악취는 제거된 상태였지만.

 “냄새 말고 딴 데도 좀 신경 쓰지. 집 앞에 쓰레기봉투라던가.”

 재밌는 걸 알려줄게. 녀석을 데리러 갔던 날을 떠올렸다. 쓰레기봉투를 보면 그 집에 누가 사는지 알 수 있어. 음료수병, 도시락 용기, 휴지 롤, 여자 사이즈 신발 상자 여러 개, 신발도 여러 개, 더러워진 책.

 “네 집엔 딱 네가 쓸 물건들이 있더라고. 네가 쓸 것들만.”

 인스턴트가 많다는 건 집밥을 먹지 않는다는 것. 그나마도 거의 남겼으니 편식이거나 소식을 하거나. 사이즈 동일한 신발 상자가 이상할 정도로 많다는 건, 차고에서 실험하다가 신발이 상할 일이 많았다는 뜻. 빠는데 관심이 없으니 못 신게 되면 버리고 새 것을 산 것이다. 더러워진 책도 마찬가지. 그것과 같은 제목의 책을 실험실에서 발견했다.

 “넌 정리 자체에 관심이 없어. 물건을 소중히 여기지 않아. 실험실은 그 꼴에다 혼자 사는 주제에 대용량 쓰레기봉투를 썼어. 쓰레기를 막 버리다 감당하기 어려워져서야 한 번에 몰아서 버렸지. 당연히 분리수거도 안 되어있고. 기억해둬. 네가 사는 동네는 쓰레기 버리는 구역과 날짜가 따로 있다는 걸.”

 청소에 흥미가 없으니 당연히 몰랐던 사실. 쌓여있는 쓰레기봉투가 그걸 증명했다. 그 집에서 사는 내내 쌓여온 거겠지. 봉투 안엔 약품 냄새가 가득했으니 대부분의, 어쩌면 모든 물건들이 실험실에서 쓰였을 것이다. 돌보는 사람 정도가 아니라 그 집은 가사를 보는 사람이 아예 없다.

 어째서? 아무리 천재라도 아직 고등학생인 딸을 혼자 일본에 돌려보내놓고 가사 도우미 하나 붙여놓지 않았다? 녀석의 부모는 왜 그런 짓을 했을까? 녀석과 만나고부터 내내 시달렸기에 나는 이 시답지도 않은 문제에 간단한 답을 내릴 수 있었다.

 “부모가 너를 포기한 거야.”

 녀석의 눈가가 씰룩였다. 이건 예상 못 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큰 피해를 입힌 모양이었다.

 방금 전에 녀석이 건넨 음료는 내게 준 것만 표면에 물이 맺혀있었다. 차가운 음료니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현상, 또한 다른 음료들과는 구입한 시간에 차이가 있다는 증거. 손쉽게 정황이 상상됐다.

 내가 사무실에서 나가고 아나스타샤랑 미오와 대화 할 동안 녀석은 내게 줄 음료를 구입했다. 아마도 냄새로 나를 찾아내고, 휴게실에서 내가 일행들과 있는 걸 보고 음료를 추가로 사왔다. 휴게실에도 자판기가 있는데 굳이 다른 곳에서 사온 이유는 음료수에 장난을 치기 위해서. 원래는 나에게만 하려던 짓을 두 사람에게도 하려던 것이다.

 그것이 나를 분노케 했다. 직감적으로 바로 알아챘지만, 이성적인 판단까지 더해지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미국에서도 이 따위 장난질을 일삼았기 때문에 부모도 정이 떨어졌겠지. 네가 그 나라의 학문에 질렸듯이, 네 부모도 너에게 질린 거야.

 “넌 남에 대한 배려가 없고 흥미분야 이외에는 극단적으로 무관심해. 항상 장난치는 태도에 사람들이 뭐라 해도 신경 쓰지 않아. 쓰레기와 실험 문제로 동네 사람들이 뭐라 해도 무시했겠지.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이러는데 가족에겐 오죽했을까. 참다못해서 골치 아픈 딸을 일본으로 돌려보낸 거야. 집도 구해주고 실험실도 만들어준 걸로 남은 책임을 다하려고. 온갖 약품을 살 정도면 생활비는 꽤 지원해주는 것 같지만, 거기까지야. 이건 내 생각인데 네가 성인 되는 순간 그 지원은 끊기고 잘난 머리 하나만 남은 너는 비참한 최후를 맞을 거야. 이것저것 다 잘 하니 활로야 있겠지만, 그 성격으로 오래 갈 수 있을지는 의문이군.”

 말을 쏟아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판기에서 새로 음료를 사 단숨에 들이켰다. 다 마신 캔을 쓰레기통에 버리자 아까 녀석이 준, 정체불명의 약물이 섞여있을 캔과 부딪혀 캉, 소리를 냈다.

 다시 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세 아이돌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아나스타샤와 미오는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내 말 뜻은 모르지만 뭔가 심각한 상황이라는 건 아는 것이다. 녀석은 계속 무표정했다. 그것만 봐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렵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녀석의 감정을 알 수 있었다.

 당당히 말했다.

 “이젠 널 대하는 방법을 알았어. 앞으로 더 흥미로워질 테니 기대해.”

 모자를 눌러 쓰고 뻐근한 목을 풀었다. 오늘 레슨 없다고 했지?

 “돌아가도 좋아. 네 스타일대로 맞춰줄게.”

 

 *

 

 항상 들어왔어. 왜 그런 식으로 사느냐는 말.

 ‘그런 식’이라는 고상한 표현을 썼지만, 사실 녀석들이 하려던 말은 따로 있었겠지. 왜 그 따위로, 그렇게 쓰레기 같이 사느냐고. 그 때마다 대답은 같았어.

 이딴 식으로 자랐으니까 어쩔 수 없는 거야.

 처음으로 사람을 죽인 게 열 살 때였어. 처음으로 칼을 쥐고, 살을 갈라 뼈를 찍은 것도 열 살이었고. 그랬더니 천재 소리를 들었어. 정말 대단하다, 너는 나를 이을 사람이다. 학수가 말했지. 고아원장한테서 그딴 말이나 듣고 자랐다고.

 평범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힘들어. 녀석들은 항상 너 같은 놈은 우릴 이해 못한다고 했지. 웃기는 소리야.

 그러는 너희들도 날 이해하려 하지 않잖아.

 

 *

 

 그 일이 있은 뒤로 사흘. 시키는 한 번도 회사에 오지 않았다.

 모든 것이 녀석이 오기 전과 다름없이 돌아……간 건 아니고, 아나스타샤와 미오가 엄청나게 신경 썼다. 대놓고 물어보지 않을 뿐 내가 그 날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해 했다. 나는 애써 무시했다. 그 외에는 전부 원상 복귀였으니까. 평소처럼 업무를 보고, 기획을 짜고, 레슨을 보러가고, 더워서 땀이 흐르는 나날.

 너무 평화로워 약간의 권태마저 느낄 때 쯤 감이 반응했다. 원래 이런 날에 사건이 터지기 마련이야. 충분히 공감한 나는 사무실을 둘러봤다. 과연 어디서 어떤 일이 찾아올까.

 다른 때 같았으면 골치 아픈 일은 사양이지만 지금은 달랐다. 오히려 원했다. 슬슬 사건이 필요한 시기였다.

 “지금 당장 시간 되는 사람!”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선배가 들어온 것은 그 때였다. 치히로도 함께.

 뭔지는 몰라도 심각한 일인 것 같은데 빠른 일본어로 설명해서 나는 알아듣기 어려웠다. 하나 알 수 있는 건 다른 사람들도 바쁜 나머지 손을 빌려줄 수 없다는 것. 선배가 꽤나 곤란해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세한 정황을 알기 위해 나는 치히로에게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행사 업체에 보낼 백댄서가 필요한데 원래 가기로 한 사람들이 펑크가 났어요. 두 명은 보내야 하는데 워낙 갑작스러운 사람인데다, 안무 외울 시간도 촉박해서…….”

 치히로가 들고 있던 자료를 넘겨받았다. 큰 상가 무대에서 하는 이벤트. 아는 행사였다. 모자 안에서 생각이 번뜩였다.

 잠시 기다리라 한 뒤 나는 레슨실에서 미오를 데려왔다. 자료를 보여주니 미오도 알아봤다.

 “응. 나 여기 알아. 쇼핑할 때 자주 가는 곳이야. 여기 무대 꽤 큰데. 안무도 알고 있어. 트레이너랑 개인 레슨 할 때 이걸로 연습했거든.”

 “그럼, 할 수 있겠어? 당장, 들어가야 해.”

 “얼마든지! 무대가 기다리고 있는데 빼는 건 미오짱답지 않다고!”

 한 명 확보. 그럼 나머지는…….

 나는 외투와 쿨팩을 챙기며 치히로에게 말했다. 잠깐, 나갔다 오겠습니다.

 “데려올 사람이 있나요?”

 “있죠. 안무, 빨리 외우고, 당장 전력이 될, 그런 사람.”

 미오와 치히로가 굳었다. 설마? 걱정 어린 시선들이 나를 향했다. 순간 일본어 단어장에서 봤던 속담이 떠올랐다.

 “고양이 손이라도, 필요하잖습니까.”

 

 사람들이 착각하는 건 내가 녀석에게서 손을 놨을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럴 리가 없잖은가. 어찌됐건 내가 담당한 아이돌이고, 내가 책임져야할 사람인데. 나는 맡은 일을 내팽개칠 만큼 무책임한 사람이 아니다. 선배가 그리 평가했고, 실제로도 그런 사람이다. 이젠 증명해야 할 때야. 여전히 쓰레기봉투 가득한 집 앞에서 생각했다.

 아나스타샤에겐 미안하지만, 지난 사흘 간 나는 자발적인 야근을 했다. 퇴근길에 일부러 멀리 돌아가서 이 집을 둘러보고 가는 것이다.

 어젯밤은 차고에 불이 켜져 있었다. 불온한 기운이 가득해서 보기만 해도 수상했다.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마녀의 집 같다고 할까. 섣불리 발을 들이면 마취 돼서 실험대 위에 오를 것만 같았다.

 녀석은 밤새 실험을 했다. 지금 이 시간까지 퍼질러 자고 있을 확률이 높았고, 집 앞에 서자 확신할 수 있었다. 나에게 나의 영역이 있듯 녀석에겐 녀석의 영역이 있겠지. 바로 여기. 자유분방한 녀석이지만 이곳만은 쉽게 버리지 않을 거야. 흥미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말이야.

 차고 문을 열고 들어가자 굉장히 요염한 자세로 자고 있는 녀석이 있었다. 참자, 참아. 찌푸려진 눈살을 피고 흔들어 깨웠다. 야, 일어나.

 녀석이 교성 같은 하품 소리를 냈다. 눈도 뜨지 않고 냄새부터 맡더니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야?

 “나 아이돌 그만둔 거 아니었나?”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어. 애초에 넌 아직 아이돌도 아니야. 데뷔도 안 한 주제에.”

 “맞아, 맞아. 그랬었지. 그럼 오늘은 뭐 하러 가는 거야? 혹시 데뷔?”

 “데뷔하기 전에 이미지 쇄신이 필요해. 이 전까지 넌 너무 막장이었거든.”

 헐렁한 백의를 벗기고, 아무렇게나 놓인 교복을 던져줬다. 갈아입어. 시간을 확인하고 머릿속에 동선을 그렸다.

 “아주 흥미로운 일을 하러 갈 거야.”

 

 *

 

 매혹, 혹은 고혹. 아니면 둘 다.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몸짓이었다.

 분명 직책은 백댄서일 텐데 내 눈길은 단 두 사람, 그 백댄서들에게 향해 있었다. 임무 실패로군, 메인을 돋보여야 하는데 자기들이 제일 눈에 띄잖아. 스스로의 편협한 시선을 탓하며 끝까지 두 아이돌을 지켜봤다.

 미오는 반짝였다. 말 그대로 별처럼. 지금껏 쌓인 연습량이 빛을 발했다.

 체력도 운동신경도 좋은데 의외로 댄스 레슨 때 애먹었지. 평균은 해내지만 그 이상으로 나아가기 어려워했어. 커버하기 위해서 들인 노력을 나는 두 눈으로 지켜봤다. 감개무량하면서도 바로 옆에 있는 시키를 보면 역시 세상은 불합리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공연 한 시간 전. 도착하자마자 의상부터 입히고 바로 안무를 외우게 했다. 미오가 추는 것을 한 번 봤을 뿐인데, 시키는 안무를 완벽하게 외웠다. 리허설도 없이 투입됐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지지 않을 만큼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이 거리에서는 맡을 수 없을 향을 직감이 잡아냈다. 지금까지의 역한 냄새와는 명백히 다른 달콤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게 무엇일까, 생각하다가 얼굴을 보니 바로 알 수 있었다. 시키가 자주 보이던 장난기 넘치는 표정. 그 안에 숨겨져 있던 본질. 무언가에 강한 흥미를 느낄 때 보이던 그것이었다.

 속으로 물었다. 너는 지금 무대 위에서 뭘 보고 있지?

 시키의 춤이 대신 답했다. 굉장히 흥미로운 광경을 보고, 느끼고 있어.

 암전된 상가에서 무대 위를 비추는 조명, 화려한 의상, 귀를 울리는 음악, 함께 무대에 선 사람들, 동료, 관객들의 시선과 환호성. 모든 것이 한데 녹아들어 독특한 풍미를 자아냈다. 오로지 지금 이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그것을 느낀 순간 무대 위 아이돌의 영역이 시키의 영역이자 또한 미오의 영역이 되었다.

 상상했다. 하늘에 떠 있는 무수한 별들,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강렬한 화학작용을. 별과 별이 만나면서 일으키는 폭발에 우주는 빛에 휩싸이고 그 감동은 영원처럼 이어질 것이다. 놀랍도록 화려하게, 또한 아름답게.

 괜찮은 공식이군.

 모자챙을 올려 나의 별들에게 집중했다.

 

 *

 

 “난 이만 내릴게. 둘 다 잘 가!”

 미오를 역에서 내려주고 나는 시키와 둘만 남았다. 슬슬 밤에도 열기가 남아있는 시기였지만, 자동차 에어컨 덕에 그럭저럭 버틸 만 했다. 아나스타샤에겐 일이 끝나자마자 퇴근하겠다고 얘기했다. 선배와 치히로 씨에게도. 그러니까 지금 이 시간은 온전히 나와 여기 있는 신인 아이돌의 시간인 것이다.

 집으로 가는 도로에서 간단히 물었다. 느낌이 어땠어? 시키가 과장해서 떨리는 손을 보여줬다.

 “처음 느껴보는 프레이그런스였어. 그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여 반응하다니. 뭔가 좀 더 실험적인 시도를 해서 훨씬 강렬하게 만들어 볼까 했지만…… 떠오르지 않더라고. 그 때의 그 상태가 너무 좋아서. 당장이라도 실험 일지를 적고 싶은 기분이야.”

 “그래. 재미있었다니 다행이네.”

 짧게 대답하자 시키는 반대로 크게 웃음 지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흥분해서 당장이라도 차 안에서 날뛸 기세였다.

 “갑작스러운 결원과 갑작스러운 보충요원! 모든 것이 예상외의 트러블로 인해 일어났는데 이만한 결과를 냈어! 대체 어떤 요소가 작용한 걸까? 아무리 계산해 봐도 답은 하나야. 바로 너! 네가 가져온 일이라서 이렇게나 즐거웠던 거야!”

 시키가 처음 보는 익숙한 얼굴을 꺼내들었다. 장난기 속에 감춰두고 있던 본성, 본능. 내가 녀석에게서 내내 느끼고 있던 그것을. 여고생이나 아이돌 이전에 인간으로서 지으면 안 되는 표정으로 내가 예전 일을 할 때 자주 보던 것이었다. 보통 나와 내 주위의 망가진 인간들, 또는 내가 적으로 삼은 부류들이 지었는데, 여고생에게서 본 것은 나도 처음이었다.

 조금 착잡해졌다. 어떤 과거를 지녔을지 짐작이 가서. 그래도 저 나이 때의 나보다는 나으려나.

 “냄새를 맡았을 때부터 확신했어. 너는, 백야는 나를 즐겁게 해줄 사람이라고. 수수께끼에 싸이고 정체불명의 능력을 지닌 데다 내 패턴을 파악했지. 처음이야. 나를 파악하고 대응한 사람은. 연구하고 싶어졌어. 백야는 내 최고의 실험대상이야. 그러니까 하나만 물어보고 싶은데…….”

 흥분을 가라앉히고 시키가 말했다. 왜 날 버리지 않았어?

 “보통은 감당하지 못 할 텐데.”

 “아름다우니까.”

 “아름다움?”

 “네 이름에 대해 알아봤었어.”

 시키가 프로덕션에 찾아온 그 날, 그 이름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봤다. 일본어 공부의 일환으로 한자를 알아보려고 한 것이다. 수많은 검색 자료들 사이에서 하나의 기사를 찾아냈는데, 그 중에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이치노세 교수.’

 “네 아버지에 대해 알았지.”

 “…….”

 화학 분야에서 훌륭한 논문을 발표했으며, 현재는 미국 대학에서 연구를 하는 중이라고 했다. 미디어에 노출이 적어 자세한 정보는 없었지만, 그가 미국으로 넘어간 시기와 시키가 미국으로 간 시기가 같다는 점에서 한 가지 추측을 할 수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간 거지?”

 “맞아.”

 깔끔한 답변이 돌아왔다. 숨기고 싶은 마음도 없었나 보다. 한 번 호되게 당했으니 숨겨도 소용없는 걸 알았거나.

 “남들이 어렵다고 하는 문제도 나는 너무 쉽게 풀어버렸어. 그랬더니 다들 주위에서 천재라고 떠들더라고. 추켜세우든 말든 상관없지만, 너무 들으니까 지겹더라.”

 “그럼에도 월반까지 해서 공부를 한 이유가 아버지 때문이었고.”

 “응. 대드. 대디, 파파, 파더. 그 사람이랑 같이 있고 싶었지. 어떻게 안 거야?”

 “사진을 봤거든.”

 연구실을 어지럽힌 수많은 책과 연구 자료들, 그 사이에 파묻혀 있던 액자. 거기에는 어린 시절의 시키와 한 남자가 찍혀있었다.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어린 시절의 시키는 지금보다 훨씬 귀염성 있고, 훨씬 그 나이다운 표정을 지을 줄 알았다.

 아, 그거. 시키가 이제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거기 두고 까맣게 잊고 있었네, 집에 가면 찾아볼까.

 “너는 아버지에게 영향을 많이 받았어. 아버지와 같은 전공을 가지고,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갈 만큼. 어린 시절에는 사이가 좋았겠지. 그래서 따분한 세상살이를 견뎌가면서 함께 하려 했지만…….”

 “그 사람에겐 나보다 연구가 더 중요했나봐.”

 “네 아버진 너와 같은 부류의 인간이야.”

 “흐음. 이건 혹시 유전이려나?”

 시키는 아버지와 함께 있고 싶었다. 하지만 딸보다 연구를 좋아했던 남자는 딸을 챙겨주지 않았다. 잡아줄 사람이 없었던 시키는 스스로의 천재성에 망가져갔고, 천재인 아버지조차 감당하기 힘든 트러블을 일으켰다. 아마 재앙에 가까운 무언가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지금. 일본으로 돌아온 시키는 우연히 흥미로운 대상을 만났다. 자신과는 다르지만 비슷하게 망가진 부류의 인간. 한국에서 트러블을 겪고 프로듀서가 된 전직 해결사를 말이다. 나 역시 시키를 나와 닮았다고 여겼지만, 우리에겐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었다.

 “시키. 넌 굉장히 현명한 아이야. 남들은 너를 이상하게 여기겠지만, 그건 너의 스타일이자 삶의 방식이지. 너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혼란스러운 자신을 받아들임으로서 무한한 자유로움을 얻었어. 딱딱한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혼란마저도 즐기고 있지. 굉장한 강점이야. 하지만 지금처럼 남들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없이 삶을 살아갔다간 전에 말한 대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거야. 너는 상관없다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둘 수 없어.”

 차를 멈추고 밤의 거리에 내렸다. 시키와 함께 도로를 걸으니 망상이 지식의 우주를 만들어냈다. 그 우주를 탐구하는 존재도 같이. 자유롭게 여행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으나 그만 낯선 행성에 불시착하고 말았다.

 우린 표류 중이야.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야만 하지. 방황하는 사람이 모두 길을 잃은 건 아니지만, 별로 긍정적인 상황은 아니지. 그래도 너무 걱정은 하지 마. 약속할 테니까.

 “네가 우주 어디에 있든, 내가 찾아내줄게. 찾아내서 네가 흥미 있어 할 무대로 데려다줄게. 어쩌면 그곳에는.”

 보고 싶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시키가 웃었다.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였다. 집 앞에서 헤어지며 나는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촬영 현장에서 갑자기 시키의 관심을 끈 것은 나와 아나스타샤의 별 것 아닌 대화였다.

 

 이 드라마, 아빠랑 엄마가 꼭 보겠다고 했어요. 멋진 모습 보여주고 싶어요.

 분명, 아버지도, 어머니도 보실 거야. 아름다운 모습, 보여드리자.

 

 신경 쓰지 않았지만 버리지도 않은 액자. 어린 시절의 기억. 어릴 때는 그 만큼 사랑을 받고 자랐겠지.

 바랄 희希. ‘시키’라는 이름에는 희망을 바란다는 의미가 있었다. 이 뜻이 맞을지, 다른 뜻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처음부터 이런 관계는 아니었을 것이다. 온전히는 아니라도 조금쯤은 그 때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을까.

 갑자기 나의 옛날 이름이 생각났다. 나의 부모는 어떤 뜻을 담아 그런 이름을 지으셨을까. 지금의 백야라는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실까. 나를 어떻게 여기실까. 어쩌면 우리의 관계도 시키처럼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 시키처럼 현명하지 못한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그들을 떠올렸다. 오늘 밤은 추억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밤. 마냥 달콤하지 만은 않은, 열기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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