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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나이트 7 - 경계境界 : 닛타 미나미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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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6-28, 2018 18:29에 작성됨.

 촬영은 금방 재개되어 미오와 미나미의 촬영은 순조롭게 마칠 수 있었다. 감독이 좋게 봐준 덕에 촬영이 끝날 때쯤 분위기도 많이 누그러들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거기서 사쨩은 예외였다. 촬영이 끝나고 헤어질 때까지 나와 눈을 마주치려하지 않았다.

 그래도 친구라고 미나미는 사쨩을 챙기려 했다. 기분 풀어주기 위해 시내에 놀러갈 거라며 한발 먼저 스튜디오를 벗어났다. 덕분에 여기서도 불편한 기류가 사라졌다.

 촬영이 끝나고, 여러 장의 사진 중에서 제일 멋들어진 것들을 고르고, 장비 치우는 것까지 도운 뒤에 건물을 나왔다. 일정은 마무리 됐으니 미오를 데려다주려 했는데 내가 일하는 곳에 따라가고 싶다고 졸라왔다.

 “심심할 텐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혼자 시간 때우는 것쯤은 어렵지 않아. 그보다 미오쨩은 지금 너무 배가 고파서 겨울P가 맛있는 걸 사주면 좋겠단 말이야.”

 미오는 화보 촬영 때문에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 했다. 전날 합숙을 할 때는 평소보다 적은 양을 먹었고, 아침에 아나스타샤와 시키를 챙길 때도 배고픔을 꾹 참았다. 아이돌 혼자만 굶길 수 없다는 핑계로 나 또한 괴로운 식사를 건너 뛸 수 있었으니 한 끼 어울리는 정도는 괜찮겠지. 오히려 당연한 의리일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미오를 데리고 거래처를 돌았다. 해야 될 일은 이벤트에 쓸 의상과 판매 굿즈 점검, 기타 사항 체크 등.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인지 평소보다 더 빠르게 일을 끝낼 수 있었다.

 시간은 어느새 퇴근 시간. 오전에 계획한 일정대로면 이제 회사로 돌아가야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겠지. 퇴근한다고 메시지를 보내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뭐 먹을래? 미오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야 후라이드 치킨이지!”

 닭 한 마리를 무자비하게 씹어 먹는 여고생의 전투력은 놀라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냥 한 번 먹고 소스에 찍어먹고 소금에 찍어먹고 샐러드와 함께 먹고 순식간에 뼈를 발라먹고……. 아무튼 간에 보는 것만으로 배가 찰 정도로 먹어댔다. 금방 찔 텐데, 트레이너에겐 뭐라고 변명하지.

 “바삭바삭하고 맛있다! 집에 가는 길에 먹는 편의점 치킨도 좋지만 이렇게 가게에 앉아서 먹는 것도 좋네.”

 “널 보고 있으면, 한국에 데려가고 싶어.”

 “왜? 거기에 뭐가 있어?”

 “치킨이 유명하거든. 많이.”

 미오가 닭날개를 내려놓았다. 가자 겨울P, 비행기 표 끊어! 티슈를 뽑아 입에 묻은 기름을 닦아주었다. 시킨 거나 다 먹어.

 패스트푸드 가게를 나와 거리를 순회했다. “짭짤한 걸 먹은 다음엔 단 게 땡기지!” 라고 하길래 근처 노점에서 크레이프를 사줬다. 얇게 구운 팬케이크 위에 아이스크림과 딸기를 얹고 초콜릿 시럽을 뿌린 디저트는 매우 먹음직스러워 보여, 저게 다 몇 칼로리일지 계산하게 만들었다.

 이런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오는 폰 안에 사진들을 넘겨보고 있었다. 아나스타샤가 보내온 로케지의 사진들이었다.

 “이것 봐. 유카타 입고 단체 사진도 찍었어. 여관 외형도 왠지 정취가 있고, 절벽 아래 바다도 멋져 보여. 온천 사진은 없지만 거기도 분명 풍류가 흐르겠지.”

 “온천, 가고 싶어?”

 “두말 하면 잔소리! 이런 온천에 다 같이 갈 수만 있다면 일이라도 좋아. 그치만 겨울P는 싫어하려나.”

 “싫지는 않아. 온천이라면, 오히려 좋지.”

 아무리 나라도 뜨거운 물을 기피하는 수준은 아니다. 단지 몸에 흉터가 많아 남들 앞에선 옷을 벗는 게 꺼려질 뿐.

 “의외네. 새로운 걸 알았어. 이것이 데이트의 힘인가!”

 “데이트라니…….”

 “어라? 그런 반응이면 미오쨩 상처 받아요. 섹시한 미소녀 여고생과의 데이트, 당연히 반겨야 하는 거 아니야?”

 “섹시해서 별로인데.”

 “그렇지. 겨울P는 그런 취향이지. 일도 그런 쪽으로는 잘 안 받아오고.”

 “하고 싶으면, 생각해 볼게. 섹시한 일.”

 “그것도 되는 거야? 진작 말해주지!”

 “하기 싫은 일은, 안 시켜. 반대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고려할 수 있어. 섹시한 일, 노출이 많은 일도. 내 취향이 아닐 뿐이야. 내가 납득 못 하니까, 진심으로 임할 수 없어서, 지금껏 안 시킨 거지. 그래도, 너희가 하고 싶다면야.”

 “그렇구나. 미리 말해주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크레이프를 다 먹은 뒤에야 미오가 아무렇지 않게 폭탄 발언을 했다. 겨울P, 아냐 좋아하지?

 구두가 땅을 긁고 멈춰 섰다. 나는 드물게도 눈을 크게 뜬 채 앞서가는 미오를 응시했다.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미오는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뭐야, 설마 모를 줄 안 거야? 이거 실망인데. 겨울P 눈치면 당연히 알 거라 생각했는데.”

 “언제부터…….”

 “최근. 낌새는 처음 봤을 때부터 느끼고 있었는데 확신을 가진 건 얼마 안 됐어. 뭐, 너무 걱정하진 마. 겨울P 잘 숨기고 있는 거 맞아. 나는 항상 가까이서 볼 수 있으니까 눈치 챘던 거지. 아냐 앞에선 확연히 약해지잖아.”

 “혹시, 시키도?”

 “당연히 알지. 둘이 상의해서 내린 결론이니까.”

 “그 외에는…….”

 “없을 거야. 아, 치히로 씨라면 알지도.”

 “센카와 씨는, 알아. 내가 말했어.”

 “뭐야. 정작 우리한테는 말 안 했으면서.”

 미오가 툴툴대는 어조를 냈다. 정말로 불만을 가진 건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도 나에겐 치명적인 피해였다. 어쩔 수 없이 한심한 변명들을 입 밖으로 냈다.

 “너희를, 차별하려고 한 건 아니야.”

 “그렇게 생각 안 해. 겨울P는 우리 모두한테 잘 해주고 있어. 항상 열심이고 노력하는 게 눈에 보여. 그 증거로 나랑 시키냥은 요새 일 엄청 늘었는걸. 방학 동안에 쉴 틈도 없었고, 셋 다 지옥특훈 하느라 실력도 늘었고. 공적으로 봤을 때 겨울P가 우릴 차별하는 점은 없어. 단지 겨울P도 사람이니까, 마음을 완전히 감추진 못 한 거야.”

 우린 그걸로 엄청 놀려먹었으니 할 말은 없지만서도. 미오가 손가락을 꼽았다. 전에 아이스크림 사다 달라고 했을 때, 특훈 중에 휴식하자고 했을 때, 또……. 잊었던 것을 떠올리고 뒤늦게 말했다. 맞아, 아냐도 겨울P 좋아해.

 “그게 단순 호감인지 연애 감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아해. 어떻게 알았을까? 나랑 아냐는 이런 이야기 엄청 자주하거든. 힘들면 힘들다, 좋으면 좋다. 겨울P랑 다르게. 내가 이런 말을 왜 하느냐면.”

 미오가 나와 똑바로 마주섰다.

 “나, 아냐랑 겨울P는 닮았다고 생각해. 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속은 섬세하단 점에서. 반대로 다른 점은 뭔지 알아? 아냐랑 달리 겨울P는 속마음을 숨겨. 걱정 돼. 벌써 며칠 째 피곤해 보이고 밥도 못 먹는 게 뻔히 보이는데도 괜찮은 척 하잖아. 전혀 그렇지 않으면서. 그래서 오늘은 조금 억지를 써가면서까지 붙잡았어. 이렇게라도 안 하면 겨울P는 또 가서 일 할 테니까.”

 “…… 미안. 미안해. 걱정 끼쳐서.”

 “사과 받으려는 게 아니야. 고마운 거야. 내가 힘들어 할 때 아냐랑 겨울P가 도와줬잖아. 의지할 곳이 되어줬잖아. 덕분에 난 아이돌이 될 수 있었어. 아이돌이 된 지금은 하루하루가 너무 즐거워서 힘들어도 견딜 수 있어. 겨울P에겐 그런 즐거움이 있어?”

 즐거움. 이 일을 하면서 느끼는 나의 즐거움.

 있다. 내 눈앞에 있는 이 아이를 포함해 나를 프로듀서로 만드는 아이돌들이. 제각기 다른 개성으로 빛을 내는 소녀들이 나를 즐겁게 만드는 별들이었다.

 그런 아이가 나를 걱정한다는 걸 알자 의문이 들었다. 나는 정말로 프로듀서의 자격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는……. 부정적인 망상이 진해질 때 미오가 하늘을 가리켰다. 저무는 노을에 물든 세상이 망상을 덧칠했다. 낮과 밤의 경계에서 별이 반짝였다.

 아직 밤이 아닌데도 떠오르는 별. 금성이었다.

 “전에 아냐가 나의 별은 오리온자리라고 한 적 있어. 아마 노래 제목 때문에 그런 거라 생각해. 그래서 지금 내 목표는 저기 있는 저 별, 금성이야. 함께 빛나는 세 개의 별도 좋지만, 언젠가는 홀로 반짝이는 별이 되고 싶어.”

 하지만 나는 약하니까. 순간적으로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래서 미아가 될지 모르지만.

 “그럴 때는 겨울P가 이끌어주겠지. 분명. 난 그 정도로 겨울P를 믿어. 그러니까 겨울P도 나를, 우리를 믿어줘. 힘들다고 말해줘.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고민을 털어놓아줬으면 해.”

 미오가 돌아섰다. 프로듀서는 힘드네. 말꼬리에 안타까운 감정이 묻어있었다. 아이돌이랑 달리 의지할 데가 없잖아. 강한 듯 여려 보이는 그 등을 따라 나는 은하수를 건너는 기분에 휩싸였다.

 언제까지나 이 길을 걸어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나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을까.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나 지금은 신기하게도 그 모든 문제가 사소하게 느껴져, 잠시 동안은 그것들을 모두 잊기로 했다.

 나의 내면에 저주스런 태양이 저물고 금성이 떠올랐다.


 그 후로도 한참 미오를 따라다녔다. 길거리에서 간식거리를 사주거나 쇼핑몰에서 액세서리를 구경하는데 동참하고 1시간 정도 노래방에도 다녀왔다. 여고생 아이돌의 논스톱 메들리를 특등석에서 구경한 매우 사치스러운 시간이었다.

 역 앞에 차를 세웠을 땐 땅거미조차 져버린 시간이었다. 거리에는 아직 생기가 넘쳐 야경이 멋지고 젊은이들이 돌아다니는 와중에 술 취한 직장인들도 배회했다. 좀비처럼 으어어어, 하다가 히드라처럼 우에에엑, 하더니 꼬부라진 어투로 “두고 봐, 이 자식아!”라고 소리치는 혼란한 광경이었다. 분명 일본어로 말하는데 한국어 더빙처럼 들려서 신기했다.

 어쨌든 어린애가 보기엔 교육적이지 못한 광경이군. 일부러 사람이 없는 방향으로 걷자 미오가 아쉬워했다. 에이, 이 정도는 괜찮은데. 하여간에 요즘 애들은 까져서 문제였다. 혀를 차며 역으로 향하다 멈칫 했다.

 역 입구 근처 상가 건물 앞에 익숙한 모습이 둘 있었다. 같이 멈춰선 미오가 내 시선을 따라가다 눈이 가늘어졌다. 미나밍? 초췌한 인상으로 기운 없이 주저앉은 미나미와 어째서인지 분노해서 발을 크게 구르는 사쨩. 한눈에 봐도 심각해 보이는 두 사람에게 미오가 달려갔다. 미나밍!

 미나미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헝클어지고 호흡은 불안정했다. 눈빛을 보는 순간 미나미가 느끼고 있는 감정의 소용돌이가 직감에 닿았다. 불안, 공포, 당혹, 당황. 전부…….

 “무슨 일이십니까.”

 정중히 물었다.

 무언가를 말하려던 미나미가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사쨩이 끼어들어 거친 말을 쏟았다.

 “알바 아니에요. 저희가 해결할 거니까. 가자, 미나미.”

 사쨩이 미나미의 팔을 잡아끌었다. 힘없이 끌려가던 미나미가 중심을 잃자 미오가 부축했다. 잠깐만요, 그만하세요!

 “닛타 씨에게, 물었습니다.”

 무겁게 말하자 세 사람이 멈춰 섰다. 모자챙을 올리고 미나미와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무슨 일이십니까.

 “도와드리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또박또박 힘주어 전달했다. 미나미가 잠시 눈치를 보다 내게 초점을 맞췄다. 떨리는 호흡을 진정시키고 간신히 홀로 선 채 힘겹게 말했다. 집까지 바래다주세요.

 “혼자서는 못 가겠어요…….”


 *


 무슨 일인가요.

 수영복 화보집을 낸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네. 여름 특별 화보집이고 이미 촬영도 들어갔어요.

 미나미 님. 제발 제 말을 들어주세요. 그런 일은 하면 안 된다니까요.

 또 같은 이야기나 할 거라면 차단하겠습니다. 앞으로는 DM도 보내지 말고 멘션도 달지 말아주세요.

 저는 미나미 님을 진심으로 생각해서 말하는 거예요.

 제 팬이시라면 다른 분들처럼 저를 응원해 주셨으면 해요.

 다른 사람들은 미나미 님의 진짜 팬이 아니에요. 그저 성적인 눈으로 쳐다보는 거죠.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믿고 일을 하세요? 제가 지켜드릴게요. 저만이 미나미 님을 알고, 지켜드릴 수 있어요. 저는 미나미 님 덕에 구원받았으니까.

 차단하겠습니다.

 저는 항상 미나미 님을 지켜보고 있어요.

 그런 짓을 하면 소속사를 통해 공식적으로 대응하겠어요.

 언젠가 저만이 진짜 팬이라는 걸 알게 되실 거예요.


 *


 한창 폰에 빠져있던 메서드에게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넌 어떻게 그런 재주를 키웠냐?

 “뭘.”

 “통찰력. 추리력. 네가 나보다 훨씬 낫잖아. 아마 강이 형님보다도 더.”

 “아, 그렇지. 힘은 너, 설계는 강이 형이 최고지만 이쪽은 내 전문이지. 아무래도 그런 세상을 살았으니까.”

 어떤 세상인데? 자세를 고쳐 잡고 진지하게 물었다. 흥미 삼아 건드리는 게 아님을 알고 메서드도 허리를 폈다. 폰은 놓지 않은 채 설명했다.

 “표현의 시작은 관찰이야. 인간을 표현하려면 인간을, 짐승을 표현하려면 짐승을 알아야 하지. 그림이든 글이든 연기든 간에. 예술을 하려면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명확히 알고 연구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질 낮은 작품들이 판을 치는 거야. 나는 집요할 정도로 인간을 관찰했지.”

 “과연. 이해했어.”

 “‘미장센’이라는 게 있어. 스크린에 나오는 모든 사물은 작은 장식품 하나까지도 전부 감독에 의해 의도되어 그 공간을 꾸미는 요소가 된다는 거야. 마찬가지로 인간의 사소한 버릇, 행동거지, 함부로 뱉은 말 한마디가 그 인간을 이루는 요소가 돼. 주변 환경도 그래. 일반쓰레기 봉투를 보면 집안에 어떤 인간들이 몇 명이나 사는지도 알 수 있어. SNS는 말할 것도 없고.”

 메서드가 폰을 내려놓고 펜을 들었다. 화면에는 예쁜 거리와 맛집 음식 사진들, 이를 설명하는 양산형 설명문이 아무렇게나 나열되어있었다. 일관성도 전문성도 없는 허위정보들을 보면. 벽에 붙은 용의자들의 사진을 떼어내고 한 놈만을 남겨 빨갛게 동그라미를 쳤다.

 “이놈이 허언증에 빠진 관심종자라는 걸 알 수 있지. 화제가 된 글에는 빠지지 않고 끼어들어서 자기 정보를 나불대기까지…….”

 “우리 의뢰인을 귀찮게 하는 놈이 그 녀석이었군.”

 “이번엔 되도록 경고만 주고 신사적으로 끝내자. 이 녀석은 패고 쑤셔봤자 재미없을 것 같아.”

 다시 폰을 메서드가 달력에 들어갔다. 콧노래를 부르며 미팅 날짜를 정하는 녀석에게 내가 물었다. 넌 어째 스토킹 하는 놈들은 죽자 살자 찾아내더라. 무심한 대답이 돌아왔다. 전문분야거든.

 “내가 다 해본 짓이야.”

 병적인 재능을 가진 놈이었다. 잘만 살렸으면 꿈을 이루었을 텐데 그러지 못 하고 어두운 바닥에 몸을 담아야만 했으니.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에 나는 관찰한 정보를 조합하는 법을 익힐 수 있었다.

 그 때 메서드에게 배운 대로 나는 폰을 만지작거렸다. 미나미가 캡처해둔 대화 내용들이 시야를 채울 때마다 두통이 머리를 쑤셨다.


 ‘미나미 님. 오늘 단편 드라마에 출연하신 걸 봤어요. 청초한 교복이 잘 어울리는 학생회장 역할이라니! 미나미 님의 이미지에 정말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뒤에서는 나쁜 짓을 일삼는다는 반전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이해할게요. 진짜 미나미 님은 그런 분이 아니니까.’


 ‘미나미 님의 회사는 이상한 곳이에요. 어린애들에게 노출 많은 옷이나 입히다니. 그런 걸 좋아하는 남자들도 이상해요. 변태예요. 그런 녀석들이 미나미 님에게 달라붙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미나미 님. 혹시 회사에 약점이라도 잡힌 건가요? 연예 업계엔 그런 게 많다고 들었어요. 도움이 필요하면 저에게 말씀해주세요.’


 ‘미나미 님. 저는 점점 화가 나려고 해요. 제가 말씀드렸는데도 왜 이상한 일들만 하시는 거죠? 오늘 라이브에서 관객석을 향해 키스를 날리셨죠. 그런 건 천박해요. 저를 무시하는 건가요? 아니겠죠? 미나미 님이 그럴 리가 없죠. 의심해서 죄송해요. 하지만 화가 풀리진 않았어요.’


 ‘미나미 님.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보는지 아나요? 아마 아시겠죠. 그럼에도 바뀌는 게 없으시다니. 정말 실망이에요. 아이돌이니까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마세요. 저 같은 진짜 팬은 그런 걸 원하지 않아요.’


 ‘미나미 님이 그렇게나 화를 내실 줄은 몰랐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진짜로 화내는 게 아니라는 걸 저는 알아요. 저는 미나미 님이 얼마나 상냥하신지 아니까.’


 ‘미나미 님.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에요. 하루 종일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었거든요. 대학에서 나오자마자 일을 하셨는데. 피곤하진 않으신가요? 점심은 국수를 드시는군요. 저도 같은 메뉴로 먹을게요.’

 ‘그런데 옆에 있는 이 남자는 누구죠? 전에 언급한 프로듀서? 이 남자가 미나미 님에게 이상한 일들을 가져오는 거군요.’

 ‘음악방송은 멋졌어요. 미나미 님의 노래들 전부 좋아해요. 친구 분도 만나셨네요. 남자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에요.’

 ‘카페에 갔다가 배팅장도 가시고, 공원을 산책하시고, 와플을 드셨어요. 서점에 들러 자격증 공부를 위해 책도 사시다니. 정말 지적이세요. 저녁까지만 먹고 늦기 전에 집에 돌아가신 것도 좋아요. 더 함께하지 못해 아쉽지만 일을 하셨으니 피곤하시겠죠. 이해할게요.’

 ‘미나미 님. 항상 지켜보고 있어요. 미나미 님의 모든 것을 공유하고 싶어요. 몸도 마음도요. 언제 어디서라도 제가 미나미 님을 지켜드릴게요. 그러니 저를 내치지 말아주세요.’


 캡처에는 다수의 사진이 포함되어 있었다.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미나미, 회사로 들어가는 미나미, 회사에서 나오는 미나미, 식당에 들어가는 선배와 미나미, 국수를 먹고 있는 미나미,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미나미.

 이어서 카페 입구, 배팅장, 공원, 와플 트럭, 서점, 패밀리 레스토랑이 찍혀 있고 마지막은 불 켜진 미나미의 집 앞. 미나미가 집에 도착했을 때 한꺼번에 보낸 것이었다.

 길고 불쾌하게 반복된 스토킹이군.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내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야.

 “언제부터, 이런 일이 있었죠?”

 폰을 돌려주고 미나미에게 물었다.

 옆에서 미오가 보살핀 덕에 미나미는 많이 안정되어 있었다. 머리카락도 정돈했고 이마에 식은땀도 닦아냈다. 여전히 죽을상이긴 했지만 내 질문에 또렷이 대답할 수준만큼은 회복해 있었다. 천천히 말해도 돼. 미오가 부드럽게 말해주자 끄덕이면서 답해주었다.

 “한 달쯤 전이요.”

 “그때부터, 쭉?”

 “처음에는 띄엄띄엄. SNS에서 멘션 달고 가끔 메시지를 주고받는 정도였어요. 그저 응원해주시는 팬으로만 알았는데 점점 빈도가 높아져서 이상함을 느꼈고요. 말이 험해지고 갈수록 무서워졌어요. 가을P에게 상담했더니 일단은 증거물부터 모으고 확실히 경고하라고 들었어요. 마지막으로 DM을 주고받은 뒤론 계정도 삭제해 버려서 끝난 줄 알았는데…….”

 “오늘, 이게 올라왔군요.”

 나는 SNS에 접속했다. 하나 있으면 가끔씩 도움이 된다 해서 만들어놓기만 했던 계정으로 1시간 30분 전에 작성 된 어느 글의 캡처 사진을 찾아냈다.

 ‘식당에서 닛타 미나미가 앉았던 변기를 만지고 왔다. 미나미의 엉덩이를 만진 기분이야.’ 라는 내용에 화장실 변기 사진이 첨부된 글이었다. 보고 있으려니 피와 함께 충동이 솟아오르려 했다. 비난이 거세서 계정과 함께 원본 글은 삭제되었지만 인터넷에선 이미 퍼져나간 지 오래였다.

 함께 떠돌아다니는 글들은 훨씬 가관이었다. ‘변기 좀 만진 걸로 시끄럽게 굴지 마.’, ‘닛타 미나미 얘는 더한 것도 찍잖아.’, ‘거기에 비하면 난 깨끗하다고.’ 글을 쓴 놈이 쏟아지는 비난에 대해 반론이랍시고 지껄인 문장들이었다.

 “경찰에는, 신고하셨습니까?”

 “안 했어요. 일을 크게 만들기 싫어서.”

 “스토커와, 이 글을 쓴 사람이, 동일인물이라 보십니까?”

 그야 당연하죠! 사쨩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이런 짓을 할 놈이 또 누가 있어요!”

 “계정 삭제하고 조용한 척 있다가 다시 본색을 드러낸 게 분명해요. 이따위 짓을 하는 놈인데 벌써 돌아갔을 리는 없고 분명 미나미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텐데. 이대로 집에 돌아갈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오늘은, 친구 분의 집으로 가려고 했군요.”

 “맞아요. 그런데 미나미가 너무 지쳐서 여기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좀 이상한 걸. 미오가 박제 된 글을 보고 의문을 표했다.

 “처음에 나온 스토커랑 오늘 글을 쓴 사람, 말투나 행동이 달라 보여. 미나밍을 부르는 호칭도 다르고.”

 나는 무심히 답했다.

 “경고 당했으니까, 컨셉을 바꾼 거겠지. 동일인물인 걸, 들키지 않으려고.”

 “그런 걸까. 하지만 다른 사람은 변태 같다 해놓고 자기가 이런 짓을…….”

 “자기가 하니까, 괜찮다고 여기는 거야.”

 토 쏠려. 마지막에 덧붙였다.

 듣고 있던 사쨩이 더욱 분노했다. 긴 치마가 걸려서 불편해 하면서도 발을 쾅, 굴렀다.

 “그러니까 그 토 쏠리는 놈이 지금 미나미를 노리고 있다고요! 안 그래도 지쳤는데 이대론 집에 가서 쉬지도 못 해요!”

 “압니다. 그래서, 친구 분 집으로 데려가시겠다, 그 말이죠. 그런데 그것보단, 본인 집에 가시는 게 낫습니다.”

 “왜요?”

 “자기 집이 더, 편하니까요.”

 “스토커가 기다리고 있는데 뭐가 편해요!”

 “그 놈, 못 기다립니다.”

 제가 있는 한은. 자신감의 표시로 살짝 모자를 고쳐 썼다. 신호를 받은 미오가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냈다. 맞아, 미나밍.

 “겨울P 완전 대단한 사람이야. 키도 크고 몸도 탄탄하잖아. 운동도 잘 해서 스토커가 나타나면 당장 때려잡을 수 있어. 아니지. 안 나타나도 겨울P가 먼저 찾아낼 걸? 뭐든지 알아맞히니까. 그렇지?”

 미오가 간절하게 동의를 구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미나미를 안심시켰다. 집까지, 안전하게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결심한 표정으로 미나미가 일어섰다. 부탁드릴게요.

 미오에게는 동행을 구했다. 시간도 늦었는데 미나미를 부탁할 겸 미나미의 집에서 자고 가라고 제안하자 흔쾌히 받아들이고 함께 차에 올랐다.

 사쨩은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떠나기 전까진 미나미의 결정에 투덜대는 기색이었다. 난 정말 괜찮은데. 미나미가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사쨩을 불편하게 만들긴 싫어.

 백미러로 차안을 살피고 엑셀을 밟았다. 출발합니다. 밤의 도로는 이 시간 치고는 한적해서 속도를 좀 낼 수 있었다. 미오가 수시로 밖을 살피다 다른 차가 지나가면 긴장하는 게 보였다. 안심해. 핸들을 돌렸다. 여기까진 못 쫓아와.

 “겨울P가 그렇다면 안심해도 돼, 미나밍.”

 “응. 고맙습니다.”

 미나미의 안색은 확연히 좋아져 있었다. 덕분에 미오도 걱정을 덜고 편히 이야기 했다. 주제를 돌리고 다양한 화제를 꺼내 미나미가 불안과 마주하지 않게 해줬다. 그 중엔 사쨩에 대한 것도 있었다.

 “미나밍의 친구는 뭔가 불같네. 아까는 그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미안. 불편하게 해버렸지.”

 “응? 아니야.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 느껴졌는걸.”

 골목 입구에 도착해 속도를 줄였다. 미나미의 자취방은 안쪽에 있다고 했다. 가로등이 켜져 있지만 어둠이 짙어 스산함이 가시지 않는 길이었다. 차에서 내린 미오가 불안하게 말했다. 혹시 안에서 기다리는 건 아니겠지? 나는 단번에 부정했다. 아니, 없어.

 “안심하세요, 닛타 씨.”

 “네. 바래다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그것 말고도, 할 얘기가 있잖습니까.”

 미나미가 어깨를 떨었다. 뭐를 말하는 것인지 되묻지도 못할 만큼 정신이 없어보였다. 질문은 미오가 대신했다. 뭘 말하는 거야?

 주머니에 손을 넣어 미지근한 쿨팩을 꺼냈다. 있어봐야 효용이 없겠군. 차안에 던져놓고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가시죠.

 “스토커에 대해선, 가면서 이야기 하죠.”


 *


 목이 말랐다. 할 말이 많은데 입안에 수분은 부족하고 반대로 공기 중에는 끈적한 습기가 많았다. 피부에 달라붙고 땀과 섞여 미세한 먼지들을 끌어당겼다. 한낮에 달궈진 거리의 열기까지 남아있어 공기가 끓는 것만 같았다. 불쾌했다. 이제부터 할 이야기까지 해서 전부.

 “범인이 누군지 아는 거야? 설마 정말로 여기에…….”

 미오가 말끝을 흐렸다. 분명 좀 전에는 내가 없다고 했는데 이제 와서 무슨 소리인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없어. 나는 다시 강조했다.

 “지금은.”

 “지금?”

 “집에 갔으니까.”

 의문투성이였던 미오의 얼굴에 점차 깨달음이 번졌다. 그 자리에서 굳을 뻔하다가 재빨리 나를 쫓아왔다.

 “설마…….”

 “친구가 스토커야.”

 고개를 돌려 미나미를 확인했다. 충격을 받았는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미오도 입만 뻐끔거릴 뿐 말을 하진 못 했다.

 나는 단서를 이었다.

 “우선, 이 스토커의 성향부터.”

 어느새 다가온 메서드가 강의를 시작했다. 스토커는 간단히 말해 집착의 산물이야. 병적인 소유욕과 지배욕, 질투, 증오, 경쟁심 등 다양한 욕망과 감정이 집착을 만나 발화한 것. 그것이 스토커이며 따라서 집착의 동기를 알면 범인의 쉽게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사쨩의 동기는 간단했다.

 “숭배하고 있어.”

 아이돌이니까.

 “‘미나미 님’, 이라고 불렀지.”

 집요하게 보낸 메시지의 공통된 요소. 시작은 미나미를 찬양하는 모습이었으나 특정 모습을 불쾌히 여기고는 경고를 보냈다. 뜻대로 안 되자 화를 내었고, 오히려 미나미가 화를 냈을 땐 의미를 곡해해 들었다. 그러면서 안위를 걱정하는 게 마치 광신도와 같은 모습이었다.

 “스토커에게 닛타 씨는, 완전무결한 신적 존재, 라고 볼 수 있어.”

 스토커가 불쾌히 여긴 특정 모습은 섹시 어필. 노출이 많은 옷이나 손으로 키스를 날리는 등의 행위, 남자와 붙어 있는 것을 반대하고 부정했다. 프로덕션을 부조리한 집단으로 여기고 선배 또한 적대시하면서 ‘진짜 팬’이나 ‘진짜 미나미 님’이란 말을 강조했다는 건 스스로 정답으로 여기는 미나미의 모습이 있다는 것. 그 외에는 지킨다는 명목으로 모든 것을 거부했다. 미나미의 의사까지.

 “또, 닛타 씨는 닮고 싶은 존재, 였지.”

 스토커는 하루 종일 미나미를 스토킹한 적 있었다.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장소에 들렀으며 같은 즐거움을 공유하려 했다. 몸과 마음까지도. 이 모든 특징을 조합하면 그대로 사쨩이 나왔다.

 “어울리지도 않는데, 닛타 씨를 흉내 낸 스타일. 촬영장에서, 다른 아이돌을 무시한 행동. 강압적으로, 닛타 씨를 집에 데려가려고도 했지. 지키기 위해.”

 그래서 미나미를 그 집에 보내서만은 안 되었다. 억지스러운 이유를 대서라도 떨어뜨려놓아야만 했고, 이를 위해 이 늦은 시간에 미오를 굳이 여기까지 데려왔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한 지붕 아래 두라니. 너무한 일이잖아.

 “그럼 오늘 올라온 그 글은? 그건 미나밍의 친구가 올릴 수 없는 글이잖아. 쭉 미나밍이랑 같이 있었으니까.”

 “다른 사람이야.”

 “아까는 같은 사람이라고…….”

 “거짓말했어.”

 미오는 입을 다물지 못 했다.

 좀 심했나. 멋쩍어져서 어깨를 으쓱했다.

 “정보를 얻으려고, 일부러 그랬어. 덕분에 확실해졌지.”

 사쨩은 스토커와 성희롱범을 동일인물이라 주장했다. 그래야 자신이 용의선상에서 벗어나니까. 언행의 패턴이 확연히 다른 걸 알면서도 나는 일부러 동조해줬다. 덕분에 사쨩이 안심했다는 것, 그러나 바로 다음 나의 토 쏠린다는 말에 성을 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속으로 나를 얼마나 씹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사진.

 “다량의 사진들은, 두 가지 기준으로, 분류할 수 있어.”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미나미, 회사로 들어가는 미나미, 회사에서 나오는 미나미, 식당에 들어가는 선배와 미나미, 국수를 먹고 있는 미나미,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미나미. 전부 멀리서 미나미를 도촬한 것들이었다.

 나머지 사진은 카페 입구, 배팅장, 공원, 와플 트럭, 서점, 패밀리 레스토랑, 불 켜진 미나미의 집 앞. 사람은 없이 오로지 배경만이 나와 있고 스토커의 메시지에 따르면 전부 ‘어느 여자인 친구와 함께’ 갔던 곳들이었다.

 “그 친구가…….”

 미오의 말끝이 흐려졌다.

 집 앞에 도착했다. 뒤를 돌아보니 미나미와 조금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나는 성큼 다가가 확인했다. 맞습니까? 미나미는 마지못해 답했다. 맞아요.

 “쭉, 닛타 씨와 함께 있었으니, 당연히 사람이 못 나오겠죠.”

 “…… 그렇네요.”

 미나미가 내 눈을 피하려 했다. 그것이 단지 내 눈빛이 날카롭기 때문만은 아님을 나는 알고 있었다. 기류가 변한 것을 감지하고 미오가 나를 불렀다. 겨울P? 아랑곳 않고 나는 미나미와 눈을 마주쳤다. 알고 계셨겠죠.

 “친구 분이, 범인이란 걸.”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갑작스러운 발언에 미오가 소리쳤다.

 미나미는 힘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와 거부할 의사도 기운도 없는 거겠지.

 “단서들, 그러니까 스토커와 친구분의 행동은, 노골적이었습니다. 닛타 씨는 똑똑하고, 당사자니까, 저희가 모르는 정보들도, 알고 있겠죠. 덕분에, 범인이 누구인지, 무슨 목적인지, 누구보다 빠르게 알아챘습니다.”

 역 앞에서 다시 만난 미나미는 겁에 질리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불안, 공포, 당혹, 당황의 감정이 느껴졌고 그 대상은 전부 옆에 있는 사쨩이었다. 나와 미오에겐 도움을 구했지만 친구의 도움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사쨩과 떨어져 차로 이동한 뒤론 불안이 많이 가셨다. 전부 사쨩이 범인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나온 행동들이었다.

 그렇다면 왜.

 “알고 있었으면서 왜.”

 지금까지 사쨩과 함께 다녔는가. 어째서 사태를 여기까지 키우고 피해를 받아들이기만 했는가.

 “책임감과 죄책감, 때문이겠죠.”

 사쨩은 부정적인 성격이었다. 남들과 어울리지 못 하고 마음에 안 드는 일은 두고 보지 못 하면서 뒤에서 욕이나 하는 타입. 혼자 다닐 때는 움츠러들면서 미나미가 옆에 있거나 미나미와 관련된 일에는 흥분하고 공격성을 드러내는 타입.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마찰을 빚다가 미나미에게 피해가 된다고 하니 그제야 마지못한 사과를 하는 타입. 미나미를 향한 의존 증세를 보였고 그것이 집착으로 이어진 케이스였다.

 이렇게 된 이유는 분명했다. 사쨩이 ‘말을 직설적으로 하고’ ‘학교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있었으며’ ‘그러지 말라고 했음에도 또 실례를 범하는’ 사람이라면, 미나미는 그런 사람을 유일하게 내치지 않고 포용하며 아이돌로서 모두의 동경의 대상이 되는 이상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사쨩의 머릿속에서만.

 “저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미나미가 털어놓듯 입을 열었다. 잔잔하던 바다에 물결이 일더니 조금은 거친 감정의 파도가 몰려왔다.

 “학기 초부터 사쨩은 남들이랑 어울리지 못 했어요. 자주 싸움도 나고, 다른 애들한테 음침해 보인다며 무시당했죠. 이러면 안 되는 거니까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었어요. 다행히 금방 친해지는 것 같았는데.”

 미나미의 시야가 멀어졌다. 나처럼 과거의 어느 환상을 헤매고 있는 눈빛이었다.

 “제가 자주 하던 액세서리를 사쨩도 하고 온 적 있어요. 나중에는 옷도, 헤어스타일도 점점 저랑 비슷해지더라고요. 그 때 처음 이상함을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어요. 그것보단 저를 따라한다고 놀림 받는 사쨩에게 신경써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이것이 ‘미나미 님에게 받은 구원’, 그토록 부르짖던 ‘진짜 미나미 님’의 정체였다.

 실제 미나미는 모든 면에서 완벽한 인간은 아니다. 인간이기에 부족함 점도 있고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지금도 괴로워하고 있다. 자신의 잘못으로 친구가 변했으니 마땅히 책임져야 할, 감당해야 할 일로 여기는 것이다.

 스토커 문제를 선배가 알고 있으면서도 조용히 덮은 것도 같은 이유겠지. 프로 중에 프로인 선배가 이런 일을 회사에 알리지 않았다는 건 미나미가 법적대응을 거부했다는 뜻. 일을 크게 만들기 싫다고 핑계를 댔을 것이다. 친구를 범죄자로 몰기 싫어서.

 하지만 나는 선배가 아니다.

 “이 일, 선배가 돌아오면,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까지 오지랖을 부린 이상 무책임하게 발을 뺄 수는 없다. 일의 제대로 된 해결. 그것이 나의 책임이다. 그 전에 미나미에게 진실을 이야기한 것은 시간을 주기 위해서다.

 “생각을 정리하십시오. 쓸데없는 죄책감을, 떨쳐내세요. 당신 잘못이, 아니니까. 그리고, 고민해 보세요. 사쨩이 보고 있는 것이, 진짜 당신인지, 아니면.”

 상상 속에서 과장된, 이상적인 존재인지.

 들어가십시오. 미오가 미나미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갔다. 분명 긍정적인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했다. 친구와의 문제라면 미오도 크게 데여봤고, 지금은 극복했으니까.

 아마 미나미에겐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닐 것이다. 여신이니까. 정도는 다르더라도 추종자들이 꼬이고 다투고 이용하려 드는 일이야 자주 겪어봤겠지. 지금껏 잘 헤쳐 왔고 나는 그 점을 아름답게 여겼지만 이제는 선을 넘어버렸다. 혼자서 전전긍긍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홀로 남은 나는 세워둔 차를 찾아 떠밀리듯 습한 골목을 방황했다. 시커멓고 미지근한 물속을 걷는 것처럼 걸음도 느리고 몸이 피곤했다. 더웠다. 괴로움의 파도가 몰려왔다.

 나는 아이돌에게 구원 받아 멋대로 가치를 매겼다. 나에게만 보이는 이미지로 아이돌의 매력을 재단하고 있으며 범죄의 영역에 들어서서 쓰레기 같은 짓을 일삼는 사회부적응자, 패배자, 저지른 짓이 들킬까봐 떨고 있는 겁쟁이다.

 이런 내가 사쨩을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다를 바가 없는데 대체 무슨 자격으로. 정도의 차이? 그 경계는 누가 정하는 거지.

 모든 것이 희미했다. 골목을 빠져나와도, 차에 탑승해도, 문을 닫아 시커먼 물이 들어오지 못 하게 막아도 이미 몸을 적신 습기는 마르지 않았다. 기온은 내려가지 않고 어디로 갔는지 하늘에 별도 보이지 않는다. 낮과 밤의 경계를 허문 폭염이 공기로 퍼져 나를 압박했다. 떨쳐내는 건 불가능. 이대로 시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오늘 밤은 열대야. 해가 없는 낮, 잠들 수 없는 시간이었다.











후기는 내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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