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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SK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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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21, 2017 02:12에 작성됨.

일을 마치고 늦은 시간. 바에 들어간다. 바텐더가 맞이한다. 나를 알아본다. 나에게 인사를 한 바텐더가 무엇을 주문하시겠냐고 물어본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스트레이트 샷을 주문한다. 동그랗게 눈을 뜬 채로 나를 쳐다보던 바텐더가 조금의 머뭇거림을 손끝에 머금은 채로 나에게 한 잔의 술을 내민다. 스트레이트 위스키. 달달함은 없는 불같은 물.  잔을 기울인다. 내용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타는 것만 같다. 심장과 함께 타고 있는 것만 같다. 완전히 연소해버리면 좋을텐데, 나는 작게 중얼거린다. 길게 한숨을 한 번 내쉬고 문득 바텐더 쪽을 쳐다보니 궁금한 것이 있는 모양이다. 물어볼 것이 있다면 물으면 될 것을. 주저하던 바텐더가, 항상 같이 오던 미인 분은 어디 갔느냐고 묻는다. 그 물음에 나는 위스키보다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불이 점점 사그러져 간다. 바텐더를 속으로 조금 욕해본다. 그도 다 타버린 모닥불에 남은 것이라곤 검은 재 뿐인걸 알 텐데도.

 

사랑이란건 무엇일까. 한 눈에 반하는 것일까, 같이 지내다보면 감정이 쌓이는 걸까.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둘 다 경험했으므로, 그녀를 만나 두 가지 다 경험했으므로. 나는 내 인생에 그녀보다 더 잘 맞는 열쇠는 없다고 생각한, 초기의 시간을 떠올린다. 나는 아이돌을 몇 명이고 프로듀싱한 전적이 있는, 나름 이름이 있는 프로듀서. 그녀는 모델에서 갓 아이돌로 전업한 신인. 그녀와의 첫 만남에서, 그녀의 청록색 눈가에 자리한 눈물점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에, 나는 그녀에게 홀려버렸었다. 나도 모르게 열에 들떠 그녀를 칭찬했다. 그녀의 청록색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눈에서 눈물을 흘릴 일 따위는 없다는 듯이. 그래, 그 때의 그녀는 생명의 물 같았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만난, 꽉 닫혀버린 사랑이란 자물쇠를 열어줄 열쇠.

 

처음으로 그녀가 힘들어했을 때, 나는 그 곳에 있었다. 그녀는 스물 다섯의 신인 아이돌.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적은 아이돌 지망생들을 보며 좌절했을 때. 나는 그 곳에 있었다. 그녀보다 먼저 떠 버린, 그녀보다 어린 신인 아이돌을 보며 좌절한 그녀 옆에 내가 있었다. 나는 그녀와 단 둘이 있었다. 그녀를 내가 격려해 주었다. 그녀를 내가 보듬어주었다. 그녀를 내가 보증해주었다. 내가 그녀의 첫 팬이라고, 나는 말해주었다. 그녀는 이것보다 더 성공할 것이라고, 그녀는 당연히 톱 아이돌이 될거라고 말해주었다. 나의 말에 그녀는 눈물점 근처에 맺혀있던 눈물을 지워내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 곳에는 내가 있었다. 내가 있었다. 내가. 내가.

 

그녀와 촬영의 일로 바다에 갔을 때, 그녀는 나에게 회심의 수영복을 입은 모습을 보여주며 미소를 지었다. 그 어떤 바다보다도 아름다운 그녀의 미소. 그 어떤 바다로도 비견할 수 없는,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 즐겁게 촬영을 마친 우리는, 마침 해가 지는 바다를 안주 삼아 칵테일을 한 잔씩 마셨었다. 그녀는 블루 마가리타, 운전을 해야 하는 나는 무알콜인 선라이즈. 해질녘에 마시는 선라이즈.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니 조금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입가에 약간의 미소를 띄운 채로, 나는 얼음이 담긴 잔을 한 번 짤랑거린다. 그것을 신호로 알아들은 듯, 바텐더가 한 잔 더 하시겠냐고 물어본다. 스트레이트로 위스키를 마신 탓에 정신이 조금 몽롱하지만, 한 잔 더 달라고 해본다. 문득 본 유리잔 안의 얼음이 투명하다. 잘 세공된 보석 같다. 그래,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이 술김에 조금 보이는 것도 같다. 보석을 연상한 탓인가, 나는 죄 없는 얼음에 약간의 실소를 지어보인다.

 

그녀의 노래가 하늘 높은줄 모르고 순위가 올라갔다. 56위에서 42위로, 42위에서 13위로, 결국은 2위까지. 아쉽게도 1위는 차지하지 못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의 노래에는 문제가 없다. 그녀에겐 문제가 없다. 그저 상대가 너무 강력했을 뿐. 상대가 너무 강대한 프로덕션에서 밀어주는 아이돌 그룹이었을 뿐. 나는 다음에 이기면 된다고, 다음에는 1등을 할 수 있을거라고 다독인다. 나의 말에 그녀의 청록색 눈이 반짝였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정말로 그럴 수 있냐고 묻는듯이. 그래, 그녀라면 1위가 문제가 아니야.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었다. 그래, 조금만 더 그녀에게 맞는 바람이 찾아온다면. 그녀를 위한 바람을, 이렇게나 더 깊어진 그녀를 향한 사랑으로 만들 수 있다면.

 

스트레이트 위스키 한 잔이 다시 내 앞에 대령한다. 빈 잔은 치워드릴까요, 바텐더의 목소리가 내 귓가를 파고든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빈 잔을 쳐다본다. 보석같은 얼음이 다시 내 눈을 희롱한다. 그래, 어쩌면 그녀는 얼음이었는지도 몰라. 나의 체온으로 녹지 않기 위해,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야만 하는 보석. 그래야 몇 번이고 빛날 수 있는, 아름답고 고고한 차가움을 지닌 콜드 에메랄드. 그렇다면 이 상황이 맞을지도 몰라. 나는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살짝 떠올린다. 나의 얼굴에 유리잔에 비친다. 슬퍼하는 남자의 얼굴이 비친다. 스트레이트 위스키가 든 얼음잔을 손에 꼭 쥔 채로, 괴로운 듯한 남자의 얼굴이 비친다.

 

사랑의 바람은 그녀를 톱 아이돌로 만들어주었다. 염원해 마지 않았던 1위도 했다. 톱 아이돌이 되었다. 하얀 화이트보드가 검게 물들어갔다. 청록색의 보석이 빛나지 않았다. 가끔은 그 문제로 그녀와 싸웠다. 사랑이 식었던 걸까, 열쇠는 점점 망가져 갔었다. 자물쇠는 더더욱 닫혀 갔었다. 점점 대화를 하는 횟수가 줄어간다. 일은 늘어만 간다. 며칠 동안이나 말을 하지 않았던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촬영의 일로 바다에 갔다. 그 때는 끝나고 잠자코 술만 마셨다. 그녀는 블랙 마티니, 예전과 달리 운전할 필요가 없어진 나는 카미카제. 석양을 보고도 한 마디 대화도 없이, 단 한 마디의 대화도 없이.

 

그 다음 달이었던가, 그 다다음 달이었던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녀는 다른 프로덕션의 이직을 선언했다. 그 쪽의 조건이 조금 더 좋았기 때문이었다고, 그녀의 입으로 말했다. 마지막 날, 나는 시원섭섭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보냈다. 눈물점에는 눈물 한 방울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은 아쉽다는 말을 해도 될 텐데도. 그녀는 블랙 마티니를 마셨던 그 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로 돌아서 내 눈 앞에서 사라져 갔다. 그녀의 모습이 안 보일 때쯤, 나의 눈에서 몇 방울의 눈물이 떨어진다. 후회하고 있었던 걸까, 지금의 나는 모른다.

 

스트레이트 위스키를 마신다. 단 한 번의 주저함도 없이, 생명의 물을 마신다. 식도가 불타는 것만 같다. 하지만 두 번째라, 처음보다 아프진 않다. 나는 오늘도 위스키를 마신다. 나는 생명의 물을 마신다. 얼음잔에는 자물쇠로 완전히 잠겨버린 남자가 비쳐 보인다.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져 있다. 너무나도 씁쓸해 보이는 모습, 그는 다시 한 번 위스키 한 잔을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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