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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리티P 시리즈]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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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08, 2017 04:25에 작성됨.

<퍼스널리티P 시리즈의 이전 이야기들>

1. 타카가키 카에데 <밤 바다의 이정표>

2. 사기사와 후미카 <First Step>

3. P <인내의 삶> 

4. <신데렐라 걸스> 

5. 센카와 치히로 <함께 걷는 길> 

6. <'어제'가 '오늘'과 함께 할 '내일'에게> 

7-1. <방랑자라고 다 길 잃은 것은 아니다> 

7-2. 호죠 카렌 <히로인과 소녀, 꿈의 무게> 

8. 네가 모르는 이야기, 너만이 아는 이야기

9. (Re)Write─덮어 쓰는, 혹은 다시 쓰는

10. 촛불과 별빛이 가장 밝게 빛날 때

11. 결말을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것 

 

<외전격 이야기들>

메모리얼 <사쿠마 마유의 회상>

사기사와 후미카<걷지 않은 길>

사기사와 후미카 <파트너>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

 

 

 

“아, 안돼요!”

 

새된 비명을 지르며 치히로는 눈을 떴다. 굳게 닫힌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가느다란 햇빛이 방 안을 어슴푸레 비추고 있었다.

 

“……꾸, 꿈이었구나…….”

 

두 팔을 허공으로 뻗은 채 눈을 깜박이던 치히로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부끄러움 덕분인지 막 일어난 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무척 또렷했다. 화끈거리는 두 뺨을 양 손으로 두드리던 그녀는 얼굴의 열기가 조금 가라앉자 다시 얇은 홑이불 사이로 몸을 파묻었다.

 

‘나도 참……무슨 개꿈을…….’

 

슬금슬금, 밀물처럼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몸을 이리저리 배배 꼬던 치히로의 머릿속에, 무척 선명하게 남아 있는 꿈의 내용이 다시 떠올랐다. 평소에

는 자고 일어나면 마치 소독용 알코올처럼 시원스레 날아가던 꿈의 내용이 오늘은 이상할 정도로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센카와 씨, 아니, 치히로 씨. 결혼을 전제로 저와 사귀어 주시겠습니까?
-여기까지 왔다는 건……OK라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겠죠?

 

“으으~!”

 

치히로는 눈을 질끈 감으며 이불을 뒤집어 썼다. 홑이불 틈새로 슬쩍 보이는 그녀의 귀는 한 눈에 보더라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른 날도 아니고 하필이면 오늘 그런 꿈을 꾼 것일까?

 

“난 몰라……그 사람 얼굴을 어떻게 봐…….”

 

그녀는 이불 밖으로 손을 내밀어 머리맡에 놓인 자신의 휴대전화를 이불 속으로 가지고 왔다. 은은하게 빛나는 휴대전화의 화면에는 오늘의 일정이 떠올라 있었다.

 

[오전 11시, 프로듀서 씨 만나기.]

 

덮어 쓰고 있던 이불을 걷어내고 휴대전화의 화면 한 켠에 떠오른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전 아홉 시. 아직은 조금 여유가 있었다.

 

 


 

 

활짝 열린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아침의 햇빛이 방 안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초여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문을 등지고, 프로듀서는 거실 바닥에 설치된 탁자에 앉은 채로 누군가와 전화를 하고 있었다. 탁자 위를 거의 뒤덮다시피 산개한 서류들을 보아 하니 아무래도 업무와 관련된 내용인 듯 했다.

 

“네, 그럼 인선은 이쪽에서 최종 결정이 내려지면 알려드리겠습니다. 네, 수고하십시오.”

뚝, 하고 전화가 끊어졌다. 프로듀서는 귓가에 갖다 대고 있던 업무용 휴대전화를 탁자 위로 내려놓았다.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반으로 접히는 모델의 화면에는 영업처 상대의 번호가 잠깐 떠올랐다가 곧바로 새까만 화면 속으로 사라졌다.

 

“하하, 좋아. 이제야 이게 일단락됐군.”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크게 기지개를 켰다.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 그가 왼팔에 차고 있는 시계에서 찰칵, 하는 자그마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곧이어 흘러 나오는 아홉 번의 타종 소리. 오전 아홉 시를 알리는 소리에 그는 기지개를 켜다 말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 그럼 슬슬 준비할까!”

 

약속 장소는 그다지 멀지 않은 장소였다. 지금 나간다면 분명히 한 시간은 넘게 기다려야 할 터.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그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시간을 때우는 방법이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몇 가지나 나열할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상 위에 늘어놓은 자료들을 정리해 옆에 세워 둔 서류가방에 집어 넣고, 프로듀서는 다시 한번 크게 기지개를 펴며 욕실로 향했다.

 

 


 

 


윤기가 흐르는 짙은 푸른색의 머리카락 위에는 챙이 넓은 모자를 가볍게 머리에 올려놓듯 쓰고, 얼굴에는 옅게 색이 들어간 선글라스를 걸친 그녀가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선글라스의 렌즈 사이로 샛노란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녀의 이름은 하야미 카나데.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신데렐라 걸즈’의 일원이었다.

 


카나데는 길을 걷고 있었다. ‘매일매일이 바쁜 일상 가운데 여유를 느끼기 위한 산책’이라거나,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기를 느끼고 싶어서’ 같은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오늘이라는 날은 그녀에게는 무척이나 오래간만의 휴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가 걷고 있는 것 또한 막연히 걷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전의 그녀는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오늘의 카나데에게는 확고한 목적지가 있었다.

 

‘조금 아슬아슬하려나…….’

 

그녀는 발걸음을 옮기면서 왼팔에 차고 있는 자그마한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티켓에 적혀 있는 시간은 분명 9시 50분이었을 터. 평소에는 조금은 여유롭게 움직이는 편인 그녀가 이토록 시간에 쫓기게 된 것은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변장용 선글라스를 고르는 데 예상 밖으로 시간이 많이 걸린 탓이었다.

 

‘응……?’

 

빠르게 걷되 잰걸음이 되지 않도록, 미묘하게 발걸음을 재촉하던 카나데의 눈에 한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보였다’라기보다는 ‘들어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사람의 머리는 주위 사람들보다 적어도 머리 두 개 정도는 더 높이 불쑥 올라와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는 사무실에 있어야 할 시간일 텐데, 이 시간에는 무슨 일로 이곳에 있는 것일까……’라고 생각하던 카나데는 뒤늦게 오늘이 그의 휴일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그가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사람이 맞는지를 확신한 카나데는 그 사람을 향해 더 가까이 다가갔다.

 

“어머, P씨 아니야?”

 

길 건너편을 바라보며 횡단보도의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그는 자신의 이름이 들려오자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하고 있는 변장 때문인지, 늘 쓰고 다니는 검은 뿔테 안경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가 금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야미?”

 

“정답.” 카나데는 선글라스를 반쯤 벗으며 눈 앞의 프로듀서에게 가볍게 윙크를 보냈다.

 

“역시 P씨였구나. 당신이 이 시간에 여기에 있다니 뜻밖인걸? 산책이라도 나온 거야?”
“아니, 누굴 만날 일이 있어서.”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구를 만날 일이 있다고?’ 선글라스 너머로 카나데의 눈매가 약간 가늘어졌다. 그녀의 눈에 비친 프로듀서는 업무용의 짙은 감색이 아닌, 약간 밝은 회색 계열의 정장을 걸치고 있었다. 얼굴이나 머리에 신경을 쓴 흔적은 그다지 보이지 않았지만, 그처럼 자신을 꾸미는 데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 평소와는 다른 옷을 입고 나왔다는 것은 분명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만날 사람이 있다니……우리한테 비밀로 숨겨둔 여자라도 있는 거야?”
“나도 있으면 좋겠다. 그러는 하야미는 무슨 일이야?”
“요즘 기다리던 영화가 개봉했거든. 간만에 여유도 생겼고 해서, 이제 막 보려 가려던 참이야.”
“최근 개봉한 거라면……아아, ‘캐서린 오브라이언’ 주연의 그거구나?”
“맞아. 배우 이름까지 외우고 다닐 줄은 몰랐네.”
“……뭐, 프로듀서니까. 그 정도는 상식이지.”

 

“그보다도.” 프로듀서는 의외라는 듯 턱을 쓰다듬으며 카나데를 바라보았다.

 

“로맨스 영화는 거르는 줄 알았다만.”
“보통은 그러는 편인데……이건 평이 꽤 좋다고 들었거든. 연기하는 데도 참고가 되지 않을까 싶었고. 나도 언젠가는 카에데 씨처럼 될지도 모르니까.”

 

카나데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키가 큰 그에게만 보이도록 선글라스 너머로 한 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그러자 프로듀서는 씨익 웃으며 그녀의 모자를 가볍게 두드렸다.

 

“믿음직하구나. 그래, 좋은 자세야. 기회가 있다면 뭐든 배워야지.”
“칭찬 고마워. 그나저나 아까운걸? 당신이 한가했다면 같이 보러 가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저번에 상영회 했잖아? 그걸로 봐 줘라.”
“난 기왕이면 극장이 좋은걸. 당신이 직접 선택하는, 당신의 취향도 궁금하고 말이야.”
“어허, 또 큰일 날 소리를.”
“후훗, 농담이야. 농담.”

 

카나데가 프로듀서를 향해 혀 끝을 날름 내밀어 보이던 그 때, 도로를 내달리던 자동차들의 움직임이 멈추고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었다.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길을 건너기 시작하자 카나데는 가만히 서 있는 프로듀서의 팔을 두드렸다.

 

“자, 얼른 가 봐. 신호 바뀌겠다.”
“그래. 너도 영화 잘 보고, 사무실에서 만나자.”
“응, 고마워. 조심해서 가.”

 

자신의 등을 두드리는 카나데에게 손을 흔들어 준 뒤 프로듀서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뒷모습이 삽시간에 도로 저편으로 멀어졌다.

 

“……그래, ‘약속’이란 말이지.”

 

카나데는 멀어져 가는 프로듀서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작은 일자로 닫혀 있던 그녀의 선홍색 입술이 매끄러운 호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것도 ‘뉴스’이려나……? 후훗.”

 

다시 신호등의 불이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몸을 돌려 영화관으로 향하는 카나데의 손에는 언제 꺼낸 것인지 모를 그녀의 휴대전화가 들려 있었다. 휴대전화의 화면에는 ‘송신 완료’라는 짤막한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치히로는 화장대에 설치된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비춰보고 있었다. 막 화장을 마친 참인지 뚜껑이 열린 화장품들 사이에는 최근 유행하는 헤어스타일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는 잡지가 펼쳐져 있었다.

 

“으음……그냥 평소처럼 하는 게 좋으려나……?”

 

평소에는 늘 댕기를 땋아 정리하던 황갈색 머리카락을 보기 드물게 활짝 풀어헤친 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감아 쥐었다. 들어 올린 머리카락 아래로, 평소대로라면 절반 정도만 보이는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가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니까……목덜미를 드러내는 쪽을 더 좋아한다고 했던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모아 쥔 채,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곁눈질로 바라보던 그녀는 화장대 위에 올려둔 휴대전화에서 울려 퍼지는 알람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머리를 쥐고 있던 손을 풀었다. 어느덧 출발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휴대전화를 뒤집어 알람 소리를 끄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던 치히로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치히로! 이럴 때는 신선한 쪽으로 가는 거야!”

 

가스와 전기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나갈 채비를 마친 치히로는 현관문을 열었다. 초여름이었지만 아직 해가 완전히 중천에 뜨지는 않았기 때문인지, 바깥의 공기는 초여름 특유의 서늘함을 품고 있었다. 벌써 몇 번째인가,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라고 다짐하며 현관문을 나서기 직전에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그녀는 현관문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관문을 닫고, 문을 잠그려던 치히로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잠시동안 가만히 서 있던 그녀는 손을 들어 자신의 두 뺨을 가볍게 두드리고 고개를 붕붕 가로저었다.

 

“나도 참……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잰걸음으로 원룸의 출구를 향해 걸어가는 그녀의 두 뺨은 옅은 화장 너머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카나데와 헤어진 뒤 약 5분 정도 걷자 약속 장소가 나타났다. 장소는 다름아닌 CG프로덕션의 건물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전철역 앞의 광장. 러시아워를 살짝 빗겨간 덕분인지 역 앞의 광장은 그의 기억보다는 조금 더 한산했다.

 

“그래, 저기가 좋겠군.”

 

잠시 동안 넓은 광장을 둘러보던 프로듀서는 광장의 정 중앙에 서 있는 시계탑으로 걸어갔다. 광장 전체가 한 눈에 보이는 장소였다.
시계탑의 주위를 감싸고 있는 계단식 화단으로 다가간 그는 화단의 화강암 구조물에 적당히 기대어 서서, 팔에 두른 재킷 주머니 속에서 자그마한 수첩을 꺼냈다. 그가 늘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수첩 내부에는 시간이나 날짜, 그리고 사람 이름 같은 단어들이 깨알 같은 글자로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어디……내가 어디까지 했더라.”

 

이어서 재킷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와 볼펜을 꺼낸 그는 휴대전화의 화면에 떠오른 내용들을 수첩으로 옮겨 적기 시작했다.

 

 

 


 

 

 

“으으……저질러버렸다…….”

 

버스에서 내린 뒤, 역 건너편의 횡단보도에 서서 좀처럼 바뀌지 않는 신호를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치히로는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미 약속시간보다 약 5분 정도가 지난 시각이었다.

 

“어쩌지……화 내시려나……내시겠지……?”

 

마침내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었다. 안절부절하며 신호등을 바라보던 치히로는 잰걸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피하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횡단보도를 건너서 역 건물의 모퉁이를 돌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광장이 나타났다. 광장의 광경이 눈에 들어오는 것과 거의 동시에 그녀는 오늘의 약속 상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광장의 정 중앙에 세워진, 시계탑을 둘러싼 계단식 화단에 기대어 서서 자그마한 수첩을 들여다 보고 있는 남자가 보였던 것이다.

 

‘으으, 역시 먼저 도착하셨구나…….’

 

늦어서 화가 난 건 아닐까? 혼나는 건 아닐까? 콩닥거리는 가슴을 안고 치히로는 조심스레 그를 향해 다가갔다.

 

“저기…….”

 

 

 


 

 

 

“저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수첩에 적힌 내용들을 검토하던 프로듀서는 자신을 부르는 낯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언제 도착한 것인지, 그의 앞에는 연갈색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한 여성이 서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많이 기다리셨나요……?”

 

프로듀서는 두 눈을 깜박이며 눈 앞의 여성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에 떠오른 ‘어떤 사람’의 모습과 지금 눈 앞의 여성의 모습을 대조하며 그녀를 바라보던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답을 조심스레 끄집어 냈다.

 

“……혹시, 센카와 씨……입니까?”
“네, 네!”

 

자신을 향해 자세를 낮추며 묻는 프로듀서의 질문에 손을 꼼지락거리며 쭈뼛거리던 치히로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듀서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치히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늘 입고 다니던 연녹색 유니폼 대신 하체 라인을 강조하는 청바지 위에 소매가 짧은 하얀 블라우스와 얇은 가디건을 걸친 입은 그녀의 모습이 무척이나 신선했던 것이다.
물론 같은 회사의 동료인 이상 사복 차림을 아예 처음 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지금까지 봐 온 그녀의 사복이라고 해 봐야 캐주얼 정장 정도였기에, 그녀가 이렇게까지 본격적으로 꾸미고 나온 모습은 그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 조, 조금 이미지 변신이랄까……어, 어때요? 이, 이상하지는 않나요……?”

 

자신을 바라보는 프로듀서의 시선이 신경 쓰였던 것일까, 치히로는 눈썹 위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면서 조심스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는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천만에요. 아주 잘 어울립니다. 근사해요.”
“그, 그런가요? 다행이다…….”

 

그제서야 치히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 그녀의 옆에서 프로듀서는 그녀에게 들킬세라 조용히 마른 침을 삼켰다. 지금 치히로의 모습이 그의 직업정신을 자극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만약 목소리를 기억하지 못했다면 난 지금쯤 명함부터 먼저 꺼냈겠지…….’라고 생각하며 프로듀서는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그럼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네, 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지각은 했지만…….”

 

 

 


 

 

 

어째서 이 두 사람이 회사가 아닌 다른 곳에 있는 것인가. 휴가는 또 무슨 소리인가.
이야기의 발단은 1주일 전으로 거슬러간다.

 


1주일 전 금요일. 치히로와 프로듀서는 결산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상무의 집무실에서 호출을 받았다.

 

“너희 둘, 다음 주에 2일간 쉬다 와라.”
“……네?”

상무는 자신을 향해 되묻는 프로듀서를 쏘아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뇨……문제라고 할 건 아닙니다만……어째서 하필 지금입니까? 다음 달에 드림 페스티벌이, 또 그 다음달에는 프로덕션 매치도 있는데……”
“그러니까 ‘지금’이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상무가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너희 두 사람은 사실상 우리 신데렐라 걸즈의 전부라고 봐도 무방하다. 특히 P, 네가 저질러 놓은 일들을 보면 더욱 더 중요하지. 그러니까 큰 일을 앞두고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라는 거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상무의 말에 프로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박할 수 없는 정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곧바로 그의 옆에 서 있는 치히로를 바라보았다.

 

“센카와, 너는 어떻지? 휴가에 대해서 의견이 있나?”
“아, 아뇨! 없습니다…….”
“그래, 그러면 두 사람 모두 다음 주 중으로 휴가를 실시할 수 있도록. 알겠나?”
“”네!””

 

상무는 힘차게 대답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돌아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으면 이만 업무에 복귀하도록. 먼저 퇴근해도 좋다.”

 

두 사람은 집무실을 나와 사무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옮겼다.

 

“갑작스레 휴가가 생겼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음…….”

 

턱을 만지작거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던 프로듀서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두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서 치히로 역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만…….”

 

프로듀서는 턱에서 손을 떼고 치히로를 향해 자세를 낮추었다.

 

“센카와 씨, 혹시 휴가 날에 시간 좀 내 주실 수 있을까요?”
“네? 저, 저요?”
“네, 센카와 씨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라서요.”

 

뜬금없이 자신을 지목하는 프로듀서의 말에 치히로는 자신을 가리킨 채 가만히 굳어 있었다.

 


***

 


“뭐, 뭐라고?! P군이 그런 말을 꺼냈어?!”
“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어? 거절했어?”

 

그 날 저녁, 치히로는 일과를 마친 연상조의 여성들과 함께 언제나 가던 골목길의 선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아……저, 그, 그게…….”
“응? 가르쳐 줘. 응?”

 

유난히 강도가 높았던 레슨 때문인가, 평소보다 훨씬 빨리 술기운이 올라온 미즈키의 집요한 추궁에 두 손으로 맥주잔을 꼼지락거리던 치히로는 백기를 드는 것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되, 된다고 했어요…….”
“세상에!”

 

과장되게 놀라며 미즈키는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미유의 어깨를 두드렸다.

 

“미유, 들었어? 사내연애래! 사내연애! 어머머, 남사스러워라…….”
“그, 그런가요……?”
“그럼! 우리는 연애도 못하게 꽁꽁 틀어막아놓고 둘이서 꽁냥꽁냥대려고!”
“진정하세요, 미즈키 씨.”

 

치히로의 옆자리에 앉아서,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던 카에데가 입을 열었다. 그러자 미즈키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반쯤 남아 있던 맥주를 들이키고는 푸핫~!하고 한숨을 토해냈다.

 

“……카에데는 이상하게 침착하다? 예전엔 프로듀서 일이라면 귀가 솔깃해하지 않았던가?”
“그 사람을 믿으니까요. 그 정도로 사리분별을 못 하는 사람도 아니고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

 

술잔을 입에 가져가려던 카에데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미즈키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두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반 년쯤 전이었지? 둘이서 같이 미국 갔다 온 거. 그 때부터 이상하게 침착했어. 아니, 여유가 넘친다고 해야 하나?”
“후훗, 그런가요?”

 

미즈키의 말을 태연하게 웃어 넘기며, 카에데는 술잔을 입 속으로 털어 넣었다.

 

“그나저나, 뜻밖인걸요? 프로듀서라면 당연히 휴일에도 회사로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아, 맞아요. 상무님께서도 그거 때문인지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휴가 가기 전에 출입증 내 방에 놓고 가라’라고요.”
“아하하하! 맞아, P군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후후, 역시 상무님이시네요.

 

상무의 딱딱한 말투를 흉내내어 말하는 치히로의 모습에 세 사람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잠시 후, 어느 정도 웃음이 가라앉았을 때, 잠자코 안주로 나온 오징어를 씹던 미유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그럼, 그 날에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으신가요……?”
“글쎄요…….”

 

치히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약속 시간만 정한 거라서요. 아마 프로듀서 씨께서 어떤 생각이 있으신 게 아닐까 싶어요.”

 

 

 


 

 

 

“처음에는 다른 사람인 줄 알았어요. 목소리 안 들었으면 아마 몰라봤을 겁니다.”
“후훗, 칭찬 감사합니다. 프로듀서 씨는 오늘도 정장이시네요.”
“하하, 매일같이 입다 보니 이제는 이게 몸에 맞아서 말이죠. 아주 신체의 일부가 된 것 같아요.”

 

프로듀서는 씨익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정오가 가까워지면서 기온이 점차 오르기 시작했기에, 프로듀서의 팔에는 여전히 그의 재킷이 걸려 있었다.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첫 번째 목적지인 영화관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가는 두 사람의 손에는 테이크아웃 서비스로 유명한 카페 브랜드의 로고가 새겨진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지각을 한 것에 대한 사과라며 치히로가 막무가내로 산 것이었다.
그렇게 약 10분 정도를 걷자 두 사람은 목적지인 영화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최근 리뉴얼 공사를 마친 곳으로, 각 상영관마다 비치되어 있는 열댓 자리 정도의 특별석을 특징으로 내세운 곳이었다.

 

“뭐 보실 거에요?”
“미리 준비해 뒀지요.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프로듀서는 매표소로 성큼성큼 걸어가 담당 직원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그의 손에는 두 장의 티켓이 들려 있었다.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품으로, 유명한 기자였던 한 남자가 은퇴 후, 고향에 돌아와 옛 친구를 만난다는 전형적인 드라마였다.
두 사람은 매표소를 지나 매점이 있는 영화관의 로비에 들어섰다. 이제 막 사람들이 빠진 참인지, 한산하게 비어 있는 매점을 본 프로듀서는 치히로를 돌아보았다.

 

”팝콘 드실래요?”
“머, 먹어도 되나요?”
“물론이죠. 커피도 사 주셨으니, 이번에는 제가 사겠습니다.”

 

프로듀서가 매점으로 간 사이 멀뚱히 서 있던 치히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영관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상영 중인, 그리고 앞으로 상영하게 될 영화들의 입간판이 줄줄이 서 있었다. 그 중에서, 그녀의 눈에 띄는 포스터가 하나 있었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자 캐서린 오브라이언 주연’이라는 금빛 글자가 대문짝만하게 적혀 있는 포스터였다. ‘캐서린 오브라이언’이라는 이름을 본 순간, 치히로의 머릿속에 어떤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늘 친근한 사이를 유지하던 프로듀서와 카에데 사에에서 찬바람이 쌩쌩 몰아치던 날의 기억이었다.

 

“햐악?!”

 

‘분명 그 날에 캐서린 씨의 특집 인터뷰가 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하던 치히로는 자신의 뺨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자신도 모르게 새된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움츠렸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자, 한 손에는 커다란 팝콘을, 그리고 나머지 한 손에는 빨대가 두 개 꽂힌 음료수를 들고 있는 프로듀서의 모습이 보였다.

 

“프, 프로듀서 씨……?”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몇 번을 불러도 반응이 없으세요?”
“죄, 죄송해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하하, 영화 시작하겠네요. 얼른 갑시다.”
“네.”

 

고개를 끄덕인 치히로는 프로듀서의 뒤를 따라 상영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겼다.

 

 

 


 

 


엔딩이 끝나고, 스탭롤이 올라오며 어두웠던 상영관에 불이 하나 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치히로는 시큰거리는 코 끝을 문지르며 주머니 속에서 손수건을 꺼내 촉촉해진 눈가를 훔쳐냈다.

 

“감동적인 내용이었네요…….”
“그렇군요.”

 

어쩐지 건성으로 보이는 대답이 들려왔다. 치히로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언제 꺼낸 것인지, 프로듀서는 늘 가지고 다니던 자그마한 노트에 어마어마한 속도로 무언가를 적어 넣고 있었다. 키 차이가 있었기에 확실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중간중간 보이는 단어나 표현 같은 것을 보면 업무에 관련된 것이라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치히로는 영화가 한창 상영중일 때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감동적인 장면에서도, 비극적인 장면에서도,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는 것처럼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죄송합니다. 잠깐 머리에 떠오른 걸 정리하느라…….”

 

잠시 후, 사람들이 상영관을 거의 다 빠져나갔을 무렵이 되어서야 프로듀서는 수첩을 다시 주머니 속으로 되돌리며 그녀에게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요. 저도 이제야 여운이 좀 가라앉은 참이라서요. 우선 나가죠. 여기에 계속 앉아있으면 정리를 못 할 거에요.”
“네, 그렇게 하죠.”

 

두 사람은 상영관의 출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프로듀서 씨.”
“말씀하세요.”
“이 영화를 선택한 이유라도 있나요?”

 

치히로의 질문에 프로듀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 별 다른 뜻은 아니에요. 그냥, 이런 장르를 즐겨 보시는가, 싶어서요…….”
“딱히 장르를 가리는 건 없습니다. 그냥 마음에 드는 건 다 보는 편이죠.”

“다만”프로듀서는 고개를 돌려, 영화관의 복도에 걸려 있는 포스터를 바라보았다.

“이 영화를 선택한 건, 감독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감독이요?”

 

프로듀서는 대답 대신 자신이 보고 있던 포스터를 가리켰다. 방금 전까지 두 사람이 보고 있던 영화의 포스터였다. 그 포스터에 적힌 감독의 이름은 치히로 역시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카에데 씨가 곧 촬영하게 될 영화의 감독도…….”
“네, 맞습니다. 저 사람이죠.”

 

프로듀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감독마다 생각이 다르고, 우선시하는 가치가 달라요.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 감독이 어떤 방식을 선호하는가, 어떤 표현을 좋아하는가를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겠죠.”
“그렇군요……그래서 이 영화를…….”

 

그제서야 치히로는 그가 그토록 열심히 수첩에 적던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렸다. 그것은 아마도 그 나름대로의 어드바이스. 영화라는 미답의 경지에 도전하는 카에데를 위한 그의 선물이었던 것이다.

 

“이 다음에는 어디로 갈 건가요?”

 

치히로의 질문에 프로듀서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물론, 다 생각 해 두었습니다.”

 

 

 

------------<오프 더 레코드(下)에서 계속됩니다.>


 

저는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살아 있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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