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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가키 카에데 『약속, 기억하고 있습니까?』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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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30, 2018 02:14에 작성됨.


처음 너를 만나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사람을 낯설어하던 너는 이젠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존재가 되었고,
하루하루 그저 나이만 먹어 간다며 한탄하던 너는 이제 웃으며 내일을 기다리게 되었고,
주변의 흐름에 쉽사리 끌려가던 너는 이제는 당당하게 자신의 길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너를 보고 나를 본다.

앞으로 나아가는 너의 눈에 비치는 것은 어떤 광경일까.


적어도 나는 아니겠지.

나는, 이제는 너의 한참 뒤에 서 있을 뿐이니까.






【(上), Side. P ; 이 세상의 영화는 이처럼 사라져 간다.】





일곱 번째 총선거가 막 끝났을 무렵, 날이 한창 더워지며 연일 수은주 높이가 최고치를 갱신하던 6월 말의 일이었다.



오늘의 메뉴는 카레라이스.

오늘의 귀중한 식사가 담긴 식판을 들고, 나는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구내식당 내부를 한번 돌아보았다. 중앙의 긴 테이블에는 듬성듬성 자리가 나 있었다. 어디 좀 한산한 곳은 없나 싶어서 조금 더 돌아보자 식당 구석진 곳에 방금 식사를 마친 것처럼 보이는 4인용 테이블 하나가 텅 빈 것이 보였다. 테이블로 향하면서 벽면에 걸린 디스펜서에서 휴지를 두어 장 챙겼다.

테이블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의자가 정리가 안 되어 있다는 게 흠이긴 했지만, 바쁘게 먹고 가다 보면 의자 정도는 신경쓰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 이 정도면 훌륭하지. 나는 벽을 마주보는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이보쇼, 같이 좀 먹자.”

“……그러시든가. 얼굴 가릴 건 들고 왔지?”

“없어, 이 새끼야.”

“그럼 썩 꺼져!”

“남아일언중천금이라고 했다. 싫으면 거기 사타구니에 달린 거 떼던가.”

“새끼가 밥맛 떨어지게.”


나는 입으로 가져가려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뜬금없이 밥맛 떨어지는 소리를 내뱉은 눈 앞의 원수를 쳐다보았다. 내 동기였다. 정확하게는 매니지먼트가 아닌 미디어 제작 쪽에서 일하는 녀석으로, 복식 제한도 없건만 정장 바지 위로 단정하게 흰 셔츠를 넣어 입는 주제에 소매는 또 대충 걷어부치고 다니는 희한한 녀석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좋은지, 늘 서글서글한 웃음을 달고 다니는 녀석의 머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스포츠컷으로 짧게 정리한 것이 꼭 자라다 만 잡초가 듬성듬성 나 있는 것 같았다.


“요즘 너한테 이상한 소문 돌더라? 그 소문 진짜냐?”

“뭔데, 무슨 소문?”

“너 이직한다고.”

“그건 뭔 개 풀 뜯는 소리래. 이직은 무슨, 안 해.”

“안 한다고? 너 이제 약발 다 떨어졌잖아. 다른 길 알아봐야 하는 거 아냐?”


의자가 부서져라 털썩 주저앉는 그의 식판에는 내 것과 같은 카레라이스가 담겨 있었다. 나는 수저통에서 숟가락을 뽑아 밥을 먹으려 하는 녀석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얌마, 이 몸이 애니버서리 라이브 때 올린 실적 못 봤냐? 그 큰 회장에서 회수율 98%라고. 이거 장난 아니거든?”

“그래, 대단하지. 근데 그건 카에데 씨가 잘난 거고. 솔직히 니가 뭘 했냐? 「타카가키 카에데」라고 써붙여놓으면 전국 사방팔방에서 우르르 몰려와서 매진 딱 찍어주는데, 거기에 니 이름이 있냐? 없지?”


정곡을 찔렸다. 나는 눈 앞의 밥맛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조용히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분명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인데, 다른 놈도 아니고 이 놈한테 들으니까 화가 난다.


“……너 뭐 잘못 먹었냐? 웬일로 니가 맞는 말을 다 하네.”

“쯧쯧, 나 아니면 누가 이런 팩트로 마사지를 해 주겠냐. 역시 동기밖에 없지?”

“팩트는 지랄이, 쳐 맞는 말이라는 뜻이다 이 새끼야.”

“으억?!”


나는 잽싸게 수저통에서 새 숟가락을 뽑아 녀석의 마빡에 냅다 휘둘렀다. 딱, 하는 경쾌한 타격감이 금속 손잡이를 타고 전해져 왔다. 이마를 감싸 쥐는 녀석을 쏘아보며 나는 개기름 범벅이 되어 못 쓰게 된 숟가락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 또한 맞는 말이기도 하니 한 대로 봐 주마. 내 자비심에 감사하도록.”

“야이 씨, 그런다고 진짜 때리냐?”

“시끄러워, 밥맛 떨어지게 일 먹는데 밥 얘기 꺼내지 마라. 그렇잖아도 어제 부장한테 된통 깨졌단 말이야.”

“니가? 왜?”

“총선거 결과 가지고 내 노력이 부족하다느니 뭐라느니……에이 씨, 또 생각하니까 밥맛 떨어지네.”


7차 총선거에서 그녀의 순위는 전체 8위이자 속성 내 4위. 분명 높은 순위였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보여 준 행보에 비하면 처지는 결과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잘못이 없다. 잘못이 있다면, 그녀라는 최고급 재료를 들고도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지 못한 내 잘못이다.

나는 밥을 먹다 말고 내 식판을 내려다보았다. 반쯤 먹다 남은 카레가 남아 있었다.

누렇게 번들거리는 카레가 ‘지금 이러고도 니 주제에 밥이 넘어가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에휴,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것을 눈치챈 듯, 녀석이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려다 말고 나를 바라보았다.


“어? 야, 어디 가?”

“어제 뭘 잘못 먹었나, 속이 안 좋아서.”


의자에서 일어나기 위해 팔걸이에 손을 올리던 그 때,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옆자리에 식판이 내려앉으며 동시에 시야 한 구석에 옷자락이 보였다. 몹시 눈에 익은 디자인의 짙은 녹색 튜닉이었다. 조금 더 시선을 돌리면, 튜닉 아래로 뻗어나온, 새하얗고 기다란 다리가 있었다.

니가 여기서 왜 나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들어 옆을 바라보았다.


“어머, 벌써 다 드셨어요? 모처럼 이렇게 만난 김에 같이 먹으려고 왔는데…….”


녹색과 푸른색, 색이 다른 두 눈동자 위로 매끈하고 가느다란 눈썹이 아래로 향하는 완만한 호를 그렸다. 고작 그 정도의 변화만으로도 새침해 보이는 표정에서 순식간에 무척 처연해 보이는 표정이 된다. 그야말로 천변만화의 여인이다.

어쩐다. 이제 와서 다시 앉을 수도 없는데.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짰다.

자연스러워 보이는 대답이 뭐가 있을까, 상사에게 시원하게 닦일 때처럼 내 두뇌가 풀가동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도중에 때마침 식당 한 켠의 반찬 코너가 눈에 띄었다. 나는 반쯤 먹은 단무지 그릇을 집어 들었다.


“……천만에, 반찬이 좀 모자라서 더 가져오려고.”

“잘 먹는 남자는 보기 좋지요. 아참, 저도 합석해도 괜찮을까요?”
“아 그럼요! 물론이죠! 저거처럼 칙칙한 사내놈보다야 카에데 씨가 백배천배 낫지요!”
“후훗, 고마워요♬”


녀석에게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넨 뒤, 안쪽 자리로 들어간 그녀는 작게 웃으며 자리에 앉아 자그마한 목소리로 ‘잘 먹겠습니다’를 말했다. 매운 고추가 들어간 우동 정식이었다. 어제 간만에 『요이오토메』멤버의 모임이 있었다고 했던가. 그 조합으로 술을 안 먹을 수는 없으니 분명히 해장용이겠지.

잠시 후, 단무지 몇 조각을 얹어서 자리에 돌아오자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던 맞은편의 녀석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히죽거리면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가 그리 좋다고 웃어?”

“웃을 만 하니까 웃지. 웃으면 복이 와요. 웃어~우서~”

“새끼, 염병하네.”


광대처럼 과장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녀석의 모습에 실소가 새어나왔다.


“아, 그런데 카에데 씨는 알고 계신가? ‘그거’.”

“어머, 그게 뭔데요?”

“요즘 도는 소문 있잖아요? 이 녀석이 이ㅈ……”

“어이쿠.”


또 이 녀석의 안 좋은 버릇이 나오려고 했다. 쓸데없는 소리가 나오기 전에 나는 자리에 앉는 척 하며 있는 힘껏 구두의 코를 세워 녀석의 정강이를 찍었다. 억! 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녀석의 몸이 위로 크게 튀어 올랐다.


“야!!”

“어 미안하다. 다리가 너무 길어서. 부딪혔냐?”

“오냐, 길어서 주체가 안 되면 분질러서 짧게 만들어주랴?”

“어쭈, 할 수 있으면 해 보시던가.”

“……풉, 푸훗!”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씩씩대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녀석에게 나 역시 일어나려던 찰나, 문득 들려오는 쿡쿡거리는 웃음소리에 옆을 슬쩍 바라보았다. 옆자리의 그녀가 젓가락을 손에 든 채 잔뜩 몸을 웅크리고는 소리 죽여 웃고 있었다.

시커먼 사내놈 둘이 으르렁대는 게 무엇이 그리 우스운 것인지, 한참 동안이나 그녀는 우동 면발을 집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며 혼자서 쿡쿡거리기를 반복했다.


그녀의 이름은 타카가키 카에데.

7년 전에 처음으로 만나, 내가 담당을 맡은 첫 번째 아이돌이었다.











“프로듀서 씨! 저 먼저 가볼게요.”

“수고했어. 내일 보자고.”

“네! 수고하셨습니다!”


늘 입고 다니는 연녹색 유니폼에서 캐주얼한 사복으로 갈아 입었음에도, 어깨 위로 땋아 내린 연갈색 댕기머리만큼은 고수하는 아담한 체구의 동료가 사무실을 나갔다. 센카와 치히로라고 하는 그녀는 우리 부서의 사무 어시스턴트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유능한 사람이다. 기본적인 사무업무의 처리는 물론이고, 처음 하는 일이라도 몇 번 어드바이스를 듣고 시행 착오를 거치면 그것이 원래 자신의 일인 마냥 능숙하게 처리해낸다.

아마도 내가 속한 이 부서가 성공을 거둔 데에는 그녀의 지분 역시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나 하나쯤 빠지더라도 이 부서를 존속시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겠지.


“으음…….”


혼자 남은 사무실에서 크게 기지개를 폈다. 자리에서 일어나 한번 몸을 풀고,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가져갔다. 자그마한 물건이 손 끝에 걸렸다. 꺼내어 살펴보면 그건 엄지손톱보다 조금 큰 사무용 책상의 서랍 열쇠였다.

손바닥에 올려놓은 열쇠는 굉장히 작았다. 그야 그렇겠지. 휴대성을 상정하고 만든 물건일 테니.

열쇠를 쥔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나는 천장에 달린 형광등을 바라보았다.




아이돌로써의 그녀에 대해 말하자면, 딱히 재능이랄 것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목소리는 좋았지만 노래를 잘 하는 것은 아니었고, 팔다리가 길고 우아하게 서는 법을 아는 사람이었지만 춤을 출 줄 아는 것은 아니었다. 가느다란 몸에 술을 좋아한다더니,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그녀의 체력은 저질 그 자체였다.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곤 ‘모델’이었다는 경험뿐, 그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제로. 그런 상황에서, 나는 그녀와 함께 처음부터 올라가는 것을 선택했다.


체력이 없는 그녀를 위해 함께 아침 저녁으로 달리기를 했다.

아침은 괜찮았지만, 저녁시간에는 이자카야의 빨간 등불에 홀리듯 끌려가는 그녀를 말리는 것이 고역이었다.

큰 목소리를 낸 적이 없는 그녀를 위해 여유가 생기면 늘 함께 노래방을 가거나, 목청껏 응원가를 부를 수 있는 야구를 보러 갔다.

노래방은 그녀가 익숙해질 때까지 한 달 내내 나 혼자서만 목청껏 노래를 불러댔다. 사람이 많은 야구장은 처음에는 무척 낯설어했지만, 맥주 한 잔 까지는 허용된다고 하자 그녀 쪽에서 먼저 보러 가자고 졸라 대게 되었다.

박자감각이 없는 그녀를 위해 난생 처음으로 오락실을 갔다.

둘 다 리듬감은 거기서 거기였던지 서로 코인 러시를 하기 바빴기에, 우리는 누가 더 많이 폭사하는지를 놓고 깔깔대며 열심히 서로를 비웃어댔다.


그렇게 하루가 1주일이 되고, 1주가 한 달이 되고, 한 달이 1년이 되었다.

비어 있던 것을 채우고, 튀어 나온 부분을 갈고 닦은 그녀는 훌륭한 아이돌 타카가키 카에데가 되어 있었다. 신비로워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말장난을 일삼고, 가만히 있으면 고상하고 우아해 보이면서도 정작 사람들과 있을 때면 순진한 장난을 좋아하는 그녀의 모습에 사람들은 삽시간에 매료되었다. 그녀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치솟았고, 그에 따라 그녀를 찾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많아지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점점 자신감을 찾아 갔다. 늘 가만히 남의 눈치를 보던 사람이 이제는 서서히 자기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다른 부서의 아이돌과 함께 일할 때도, 태연히 웃으면서 먼저 말장난을 걸고 먼저 웃을 정도가 되었다.

좋은 현상이었다. 드디어 다른 누군가에게 구애받지 않고 자기 스스로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래, 좋은 일이야. 그러니 그러면 된 거야.

그 때는 그렇게 생각했고, 그렇게 납득했다. 그녀가 어디까지 올라가더라도, 나는 언제까지고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착각하고 있었다.


고맙게도 그런 나의 환상을 깨 준 것은, 어느 날 별안간 떠오른 어떤 생각이었다.

그녀는 내가 없어도 자신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내고 있었다.

내가 없어도 그녀는 톱 아이돌이었고, 내가 없어도 그녀는 주변의 아이들이나 비슷한 연배의 여성들에게서 동경의 대상이었다.

어느덧 그녀의 주위에는 많은 동료들이 생겼고, 내가 없어도 그녀는 자신을 속내를 털어놓고, 이해해줄 수 있는 많은 친구들을 갖게 되었다.

거기서 나는 생각했다.


‘어라, 이거 이제 내가 없어도 되는 거 아냐?’라고.


그 생각이 든 이후로, 나는 비겁하게도 그녀의 일에서 일부러 몇 걸음 떨어졌다. 평소라면 늘 그녀와 함께 했던 일도, 나는 가만히 사무실에 앉아 그녀에게 붙여 둔 매니저에게서 날아오는 보고만을 들었다.

나쁜 소식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아니, 내심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식은 좋은 소식 뿐이었다. 오히려 그녀는 나라는 족쇄가 없으니 더 크게, 더 높이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녀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때마다, 나는 내 두 발을 지탱하고 있던, 무너질 리가 없다고 여겼던 단단한 땅이 조금씩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가장 먼저 그녀가 함께 서 있던 이제는 공허해진 내 옆자리가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는 마치 땅따먹기를 하듯 내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서서히 내가 서 있는 땅이 외곽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서 있을 수 있던 땅은 사람 하나가 앉을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사람 하나가 간신히 설 수 있을 정도로.

다음엔 사람 하나가 한쪽 발을 들고 간신히 설 수 있을 정도로.

이윽고, 디딜 것이 없어진 나는 추락했다.

구름 아래로 떨어지며 내가 원래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새하얀 날개로 몸을 감싸고 희망의 빛으로 반짝이는 그녀가 있었다.

손을 뻗어도 닿기는커녕 점차 멀어지기만 할 뿐.




쥐락펴락하던 손을 멈추었다. 활짝 펼친 손바닥 안에는 여전히 그 열쇠가 조용히 들어 있었다.


『그건 카에데 씨가 잘난 거고. 솔직히 니가 뭘 했냐? 「타카가키 카에데」라고 써붙여놓으면 전국 사방팔방에서 우르르 몰려와서 매진 딱 찍어주는데, 거기에 니 이름이 있냐? 없지?』


녀석의 말을 떠올리며 열쇠를 서랍에 꽂고 돌렸다.

난 팩트가 싫다.

기분 나쁘지만 그 녀석의 말이 정답이었다.

그녀가 잘난 것이지 내가 잘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용수철이 설치되어 있었기에 자신을 누르고 있던 자물쇠가 풀리자 팅, 하는 소리를 내며 서랍이 약간 열렸다. 그 열린 틈새에 손끝을 넣고 힘을 주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서랍이 열렸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봉투입이 테이프로 밀봉되어 있는 새하얀 봉투였다.

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에 적힌 세 글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꺼지기 직전의 촛불이 흔들리는 것처럼.

봉투의 안에 든 것은, ‘그 생각’을 가졌을 때부터 쓰기 시작해 몇 번이나 쓰고 지우기를 반복한 물건이었다.


“……따지고 보면 꽤나 오래 된 생각이었지.”


그래, 이제 그만 하자.

더 이상 뜨거워지지 않는, 이제는 완전히 미적지근해진 가슴에 대고 그렇게 말했다.

반발하듯 두근, 하고 가슴이 크게 뛰었지만, 그것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그래, 여기까지만 하자」라고 말하려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출근일이 며칠 남지 않은 날의 일이었다.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곧 나를 대신할 후임자에게 인수인계 준비를 마치고 평소처럼 퇴근하려던 찰나에 녀석이 나를 불러냈다.

우리가 향한 곳은 회사 근처의 재즈바로, 퇴근 시간이 겹치거나 하면 종종 같이 들르곤 하던 나름대로의 단골 가게였다. 이제 막 불혹을 넘어선 주인의, 마치 영화에서나 볼 법한, 끝을 동그랗게 말아 올린 콧수염이 무척 인상적이었던 탓에 한두 번씩 찾아가다 보니 어느샌가 단골이 되어 있었다.

뭔가 회의라도 있었던 것인지, 녀석은 약속시간을 약간 넘겨서야 뒤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헐레벌떡 뛰어 온 듯, 땀 범벅이 되어 가게로 들어온 녀석은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는 황급히 가게 한 켠의 에어컨으로 뛰어갔다.


“이야기 들었어. 너 진짜 그만 둘거냐?”


어느 정도 땀이 식은 모양인지, 인사 대신 오자마자 한다는 말이 이런 소리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참 시원하게도 넘어가더라.”
“너 저번에 내가 물었을 때는 이직 생각 없다며?”
“그래, 이직 할 생각은 아직도 없어. 근데 이직 안 한다고 했지, 사표 안 낸다곤 안했다.”


나는 고심 끝에 전무네 집무실의 문을 두드리던 때를 떠올렸다.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래, 쉬고 싶단 말이지.』

그 말 한 마디 뿐이었다. 누구는 몇날 며칠동안 어느 타이밍에 해야 저걸 순순히 받아 줄까 고민을 해 가면서 찾아 간 것인데, 정작 찾아간 전무는 열어보지도 않은 사직서를 그대로 자신의 서랍 속으로 던져넣고는 이 바닥에서 손을 뗀 사람이 해야 할 일들을 내게 알려주기 시작한 것이었다.

곁눈질로 자신을 쳐다보는 마스터에게 넉살 좋게 웃으며 「저도 늘 먹던 걸로요」라고 말한 녀석은 자연스럽게 내 옆자리로 앉았다.


“갑자기 왜 그래? 저번에 내가 한 말 때문이야? 미안하다. 그거 때문이라면 내가 사과할게.”

“사내새끼가 뒤끝은 무슨…….”


나는 팔꿈치로 녀석의 옆구리를 가볍게 찔렀다. 윽! 하면서 녀석이 허리를 옆으로 비틀었다.


“그런 거 아니야 임마. 내가 언제부터 니가 씨부리는 거 귀담아 들었다고.”


달그락, 하며 얼음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좀 오만해졌구나, 싶어서 말이다.”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까지 카에데를 보면서 뭐라고 해야 할까……내가 그녀를 이끌고 왔다고, 내가 아니면 그녀를 봐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뭐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거든.”

“그렇게 생각하는 게 뭐가 어때서?”

“……난 그렇게 대단한 놈이 아니잖아. 너도 알다시피.”

“너…….”


녀석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자식 눈치챘군, 나는 직감했다.


”너 설마, 최근에 로케 넣어놓고 출장이니 뭐니 하면서 카에데 씨를 일부러 피해다닌 게 그것 때문이었냐?”

“……그래. 한번 확인해보고 싶었지. 내 생각이 그냥 자의식 과잉인지, 아니면 사실인지. 그런데 적어도……전자는 아닌 것 같더라고. 그래서, 이제는 그냥 내가 없어도 되지 않겠나 싶더라.”


그 때, 쾅! 하고 녀석이 테이블을 내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게 안의 시선이 일제히 내 옆자리로 향했지만 그 정도로는 안 부서져, 라고 말하듯 마스터는 미동도 하지 않고 글라스를 닦고 있었다. 뭐, 우리가 이 곳에서 한두 번 이런 것도 아니긴 하지만.

자신에게 시선이 날아와 꽂히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녀석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니가 뭐가 대단한 게 아니야?! 지금의 그녀를 만든 게 누군데? 그냥 모델이었던 그녀를 거기까지 끌고 가 준 게 누군데! 너잖아? 너 밖에 없잖아? 너 지금까지는 그녀한테 있는 거 없는 거 다 꺼내줘 놓고, 이제 와서 아닌 척 하는 거야?”

“……그래, 그랬지.”


나는 손아귀의 글라스를 내려다보았다. 컵 바닥이 비치는 투명한 연갈색 액체에 둥둥 떠있는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손을 약간 흔들자 컵 안을 이리저리 부유하던 얼음덩이는 천천히 유리벽에 부딪히며 딸랑, 하는 작은 소리를 냈다.

녀석의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가슴 속에 얹혀 있던 것이 조금은 사라지나 싶었더니, 그것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잡초처럼 다시 자라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거면 된 거야.”

“아니, 조금만 다시 생각해 봐. 얼마든지 새로 시작할 수 있잖아.”


녀석의 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흥분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버릇이었다.
안 좋은 버릇이라고 고치라 몇 번을 말했는데.


”너 실적 좋잖아? 7년 연속 최상위권 유지에 6대 신데렐라 걸이라고? 그런 경력이면 어디서 A급 후보생 하나 건져다가 다시 시작할 수 있다니까? 혹시 알아? 저기 시마무라 우즈키처럼 또 신데렐라 하나 발굴할지? 마침 지금 신인 오디션도 하고 있으니까, 너만 괜찮다면 내가 새 자리 알아봐 줄게. 응? 그러니까 다시 생각해 봐.”

“……그렇지, 그런 방법도 있겠어.”

“그치? 너 예전에 몇 번인가 다른 애 담당으로 땜빵 들어간 적 있잖아. 그때도 너 평가 되게 좋았지? 너만 원하면 윗선에서도 별 말 없이 붙여줄 거야. 그러니까 임마,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응?”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사실 그런 건 침까지 튀겨가며 역설을 토해내는 이 녀석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

견습 어시스턴트로 입사해서 정사원, 말단 매니저를 거쳐 프로듀서가 되기까지, 이 녀석만큼은 질릴 정도로 떨어지지도 않고 악착같이 나를 쫓아왔다. 때론 서로를 넘어서기도 하고, 때론 서로에게 부딪혀 넘어지기도 하고, 서로 멱살을 드잡기도 하고, 이렇게 술집에서 상사를 열심히 씹어대기도 하고. 우리는 그렇게 여기까지 달려왔다.

그러니 이 녀석은 정말로 말리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라이벌이면서도 가장 친한 친구일 테니까.

……여기까지 생각하는 건 자의식 과잉인가.


“……그래서 더더욱 안 되는 거다. 두 번은 그렇게 할 자신이 없어.”

“무슨 소리야?”

“그녀에게 했던 것만큼 열정을 쏟을 자신이 없다는 뜻이야. 나는……나를 믿고 내게 인생을 걸 사람들을 그렇게 대하고 싶지 않다.”

“……윽.”


뜻밖의 대답이었던 것인지 녀석이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던 녀석은 뭔가가 떠오른 듯 다시 나를 보았다.


“그, 그럼, 그럼! 카에데 씨는?!”

“그 사람이 왜.”

“카에데 씨가 너 엄청 찾고 있다고. 왜 연락은 안 되고, 회사에서도 얼굴 못 보냐고. 무슨 사고 난 건 아니냐고……그녀는, 그녀는 어떻게 할 건데?”


이젠 거짓말까지 하는군.
7년이라는 세월 동안 꽤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왔다. 그렇기에 녀석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녀석이 지금 말하고 있는 사실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나는 눈을 감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지금부터 할 말은, 나한테 있어서는 적어도 맨정신으로 내뱉을 수 있는 말은 아니었으니까.


……내가 있다고 해서 크게 바뀌는 게 있을까?”
“너……!


나름 독한 술을 몇 모금이나 마셨지만, 약간 알딸딸해지려던 머리가 마치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순식간에 제정신으로 돌아올 정도였다. 그렇기에 최대한,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쥐어짜서 태연한 척 말을 내뱉었다. 들키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도 잔뜩 흥분한 녀석에게는 과분한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녀석이 번개같이 손을 내밀어 내 멱살을 움켜쥐었던 것이다.


“……진짜, 진심이구나.”

“난 늘 진심이란다, 소년.”

“염병하네. 너랑 나랑 썼다가 찢었던 사직서 모아보면 백과사전 반 권은 나올걸.”

“이젠 내가 한 장 더 많아졌지만 말이지.”

“이 새끼가 끝까지……!”


멱살을 붙잡힌 채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한 대 정도는 맞아도 이상하지 않을 터.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프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기에 슬며시 눈을 떴다. 쥐어박을 듯 올라왔던 주먹이 힘없이 내려가고 있었다. 멱살에서 손을 놓더니, 녀석은 복잡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잔에 든 위스키를 홀짝였다.


“……그래, 신변 정리 끝나면 그 다음엔 뭐 할 건데? 생각해 둔 거라도 있냐?”

“글쎄……여행이나 좀 다녀볼까 싶다만.”

“여행? 니가? 웬일이냐? 주말이면 집세 아깝다고 밖으로 나오지도 않던 놈이?”

“그러게 말이다. 나도 모르겠네.”

“그래, 어디로 가려고?”

“……와카야마.”

“와카야마? 거기 카에데 씨 고향 아냐?”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프로덕션에 소속된 아이돌 가운데는 카에데와 같은 고향 출신인 나미키 메이코라는 아이가 있다. 아이……라고나 할까, 실은 22살이나 먹은 어엿한 숙녀다만.

아무튼, 그 아이와 카에데는 동향 사람이라는 이유로 『러블리 다이너스』라는 이름으로 몇 번인가 함께 활동한 적이 있다. 평소에는 고향에 대한 이야기가 별로 없는 그녀이지만, 러블리 다이너스 활동을 시작한 다음부터 메이코와 함께 있을 때가 되면 그녀는 자신이 살던 곳에 대한 이야기를 곧잘 풀어놓곤 했다.

심심하면 여행 팜플렛이나 관광 가이드 따위를 들고 와서는 와카야마는 어떻고 저렇고를 늘어 놓으니 귀에 딱지가 앉을 수 밖에. 여행=와카야마라는 생각이 든 것도 아마 그 악영향일 것이다.


“……그냥, 예전부터 한번 가 보고 싶었어.”

“……그러냐.”


그 말을 마지막으로 녀석은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신의 앞에 놓인 글라스를 손으로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물론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다. 털어놓고 싶은 것도 많았고, 투덜거리고 싶은 것도 많았다. 하지만 그것을 이 녀석에게 꺼내 놓을 수는 없었다. 앞길이 창창한 사람한테 나 같은 도망자와 이야기를 오래 섞어서 좋을 건 없을 것이다.

그래, 이 정도면 됐다. 이 녀석은 나와는 달리 더 달려갈 수 있는 녀석이니까.

죽을 사람은 죽어야지. 살 사람은 살고.

마음을 정리하고, 글라스 안에 든 액체를 모두 들이킨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간다. 그 동안 고마웠어. 신세 많이 졌다.”

“…….”

“……넌 나처럼 되지 마라. 네놈새끼 하는 거 봐선 넌 니가 관두기보다 먼저 짤리기를 걱정해야겠지만.”


일부러 욕설이라도 듣자 싶어서 거친 말을 던졌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곁눈질로 옆을 보면, 고개를 숙인 녀석이 작게 웅크린 채 자신의 잔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늘 기세 좋은 잡초처럼 뻣뻣하게 서 있던 녀석의 머리가 오늘따라 축 늘어진 것처럼 보였다.
발걸음을 돌려 가게를 나가려던 순간, 가만히 있던 녀석이 중얼거렸다.


“……카에데 씨가.”
“뭐?”
“……카에데 씨가 많이 외로워하실 거다.”
“……글쎄, 지금까지랑 별 차이도 없을 텐데 그럴까 모르겠네.”


나는 녀석의 등을 가볍게 툭, 두드리고 발걸음을 돌렸다.


“……건강해라. 언제 시간 되면 다시 만나자.”
“안녕히 가십시오.”
“아저씨한테도 신세 많이 졌어요. 다음에 또 올게요. 올 수 있으면.”
“허허, 기다리고 있지요.”


카운터 앞에서 마스터의 인사를 받으며 가게의 출입문까지 도착한 나는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녀석은 그대로 자신의 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평소보다 작아 보이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새끼, 한번 옷자락이라도 잡아 주지…….”


설마 들리진 않았겠지.

나는 딸랑거리는 도어벨 소리를 뒤로 했다.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지만, 제법 멀리 떨어질 때까지 도어벨이 다시 울리는 일은 없었다.



서늘할 정도로 에어컨이 빵빵했던 가게를 나오자 후끈한 공기가 덮쳐왔다. 해가 떨어진 지 꽤나 시간이 지났을 터인데도 아스팔트는 여전히 한낮의 열기를 품고 있던 모양이다. 희끄무레한 구름 너머로 떠오른 달을 바라보며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자니 문득 며칠 전, 저 녀석이 기획했던 전국 투어 공연의 대본에서 본 대사 하나가 떠올랐다.


『Sic transit gloria mundi.』


“이 세상의 영화(榮華)는 이처럼 사라져 간다…하핫, 딱 내 꼴이군.”






7년하고도 반년째의 여름, 나는 너에게 묻는다.


【그 날 나누었던 약속을, 당신은 기억하고 있습니까?】




【(中), Side. K】 편에서 계속됩니다.



중간에 탈자가 많이 발생해서 부득이하게 다시 업로드하게 되었습니다.

이걸 왜 이제 발견했는지....너무 늦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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