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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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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1-02, 2018 01:27에 작성됨.

이치노세 시키 연작선 『기억을 걷는 시간』 - 2017/12/30

이치노세 시키 연작선 『그녀가 없는 거리』 - 2017/01/25

이치노세 시키 연작선 『빗속의 거리』 - 2017/03/11

 

돌아온 시키를 껴안고 한참이나 흐느껴 운다. 몇 번이고 울어버렸는지 알 수조차 없다. 눈물은 애초에 비에 씻겨져 내려갔으니까. 시키는 예전 모습 그대로다. 몇 년이라는 시간은 마법사인 그녀에게 그저 찰나의 순간이라는 듯이, 거의 변한 것이 없는 시키의 모습. 비는 눈물이 되고, 눈물은 또다시 비가 되어 흘러내린다. 조용히 내리는 비가 나의 머리와, 가슴과, 발과, 온몸에 천천히 파고든다. 시키도 우산을 내팽개치고 나를 꼭 껴안는다. 빗 속에서, 바보같이 울어제끼는 남자와 그런 남자를 꼭 껴안아주는 따스한 여성.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겨우 울음을 멈추고 시키에거 떨어진 나는, 몰골이 말이 아닌 나의 모습을 잠시 보고는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나의 눈물에 흠뻑 젖어 나의 눈물 향이 나는 시키는 그녀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미소짓는다. 그래, 나는 그녀의 그 미소가 보고 싶었다. 고양이같기도 하고, 조금은 슬픔도 느껴지는 그녀의 웃음소리. 언젠가 비오는 날 실종되었던 그 때에 내가 우산을 씌워주었던 것처럼, 그녀가 나에게 내팽겨쳤던 우산을 씌워준다. 그녀는 이제 그림으로만 남겨졌었던 나스카에서 돌아온 것이다. 비오지 않는 사막에서 비가 오는 도쿄 한복판의 거리로, 그녀답게 돌아온 것이다. 그녀는, 나에게서부터 실종되었던 이치노세 시키는, 그렇게 돌아왔다.

 

나란히 우산을 쓰고 나의 집으로 간다. 물어보니 묵을 곳은 딱히 정해놓지 않은 듯하다.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작은 캐리어가 그 증거.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 나의 집으로 향한다. 집이라고 부르기도 무엇한, 남자 혼자 사는 쓰레기장에 들어온 시키가 홀딱 맞은 캐리어에서 옷을 꺼내며 나를 보고 빙긋 미소를 짓더니 같이 씻지 않겠냐고 그녀답게 물어온다. 예전의 나라면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그러면 안 된다고 손사래를 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그녀는 더 이상 아이돌이 아니고, 나도 더 이상 프로듀서가 아니니까.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시키의 실종으로 더욱 가까워질 기회를 얻은 것이다. 아이돌과 프로듀서가 아닌, 여성과 남성으로서, 혹은 두 사람만의 정원을 가꾸는 사이로서.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여 같이 씻는다. 안 그래도 길었던 시키의 머리는 안 본 사이에 조금 더 길어져 있다. 그만큼이 우리의 간극이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샴푸 냄새와 함께 시키의 달콤한 향이 나의 코를 간질인다. 아니, 이건 시키의 머리카락이 간질이는 건가. 나는 내 코 끝에서 묘한 움직임으로 희롱하는 시키의 머리카락을 쳐다보고,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고 나의 코를 간질이고 있는 시키를 쳐다본다. 나의 시선에 시키가 그녀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미소를 짓는다. 그 미소에 나도 픽하고 웃어버린다. 그래, 이런 시간을 나는 원했는지도 모르겠다. 평화롭고 장난기 가득한 우리들만의 시간.

 

목욕을 끝내고 나의 좁고 불편한 방으로 돌아와, 조금 빠른 저녁으로 먹을 만한 것을 만들기 위해 냉장고를 살펴본다. 재료가 별로 없지만 간단한 오므라이스라면 만들 수 있을 듯하다. 달걀을 깨고, 파를 썰어넣은 다음 소금간을 한다. 아차, 밥은 있었던가. 다급히 전기밥솥을 열어 밥이 있는지 살펴본다. 다행히도 두 사람 분의 밥이 따스한 온기를 품은 채로 오롯이 놓여있다. 좋아, 이 정도면 괜찮겠지. 다시 풀어놓은 달걀물로 시선을 옮긴다. 이제 달걀을 넓게 펴 구워내 밥 위에 올려놓으면 완성. 두 사람 분의 약식 오므라이스가 만들어지자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시키가 킁킁거리며 들어온다. 내가 내 온 오므라이스를 보자 시키가 놀랍다는 눈을 하며 나를 쳐다본다. 어이, 아무리 그래도 달걀을 구울 줄은 안다고.

 

따스한 밥과 몰캉몰캉한 지단, 그리고 약간의 케첩. 시키가 환한 표정으로 잘 먹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수저를 들어 식사를 한다. 그녀가 먹는 모습이 너무 귀여운 나는, 나 자신의 밥을 뜨지도 않은 채로 그녀가 먹는 모습을 쳐다본다. 꽤나 굶은 사람처럼 빠르게 오므라이스를 해치운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처음 만든 상태 그대로인 나의 오므라이스를 보고 묻는다. 나는 곧 수저를 뜰 것이라고 말하고는 한 입 먹는다. 소금간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지, 어느 부분은 짜고 어느 부분은 싱겁다. 이 요리답지 못한 요리를, 시키는 아무 말 없이 먹어준 건가. 왠지 모를 죄책감에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괜찮아, 나의 표정을 본 시키가 어느새 다가와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짓는다. 시베리아에서 무사귀환한 탐험가가 된 기분이다. 이치노세 시키라는, 나스카에서만 서식하는 귀여운 생물을 데리고.

 

식사를 마치고, 어느 정도 집안 정리를 한다. 어느 정도는 치우지 않으면 안 되겠지. 거실과 화장실, 그리고 현관까지 청소한 내가 방으로 돌아온다. 내 방이라고는 믿을 수조차 없이 잘 정돈된 방 안에서, 시키가 왠지 모르게 우울한 표정으로 비 내리는 바깥을 쳐다보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고 지금 묻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나중에 물어보는 편이 나을까. 쉽사리 선택할 수 없는 나는,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시키를 쳐다볼 수밖에 없다. 바깥을 쳐다보던 시키가, 내가 들어온 것을 눈치챘는지 그녀가 늘 짓는 미소로 나를 맞이한다. 약간은 쓸쓸하게, 전체적으로는 고양이같은 미소를 지으며 맞이한다. 쓸쓸한 모습,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용히 그녀 옆에 앉아 그녀가 보는 방향을 쳐다본다. 내가 언제 가지고 왔는지 모를, 다 시들어버린 이름모를 잡초 몇 포기가 화분에 위태롭게 뿌리를 박아놓은 채로 비의 방향에 따라 흔들리고 있다. 나는 잠시, 한 때는 꽃이었을 잡초를 생각한다.

 

밤이 되고, 내가 자던 침대에 시키를 재운다. 귀여운 고양이, 나는 시키를 보면 항상 그렇게 생각했었다. 언제나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조금은 손이 많이 가는 귀여운 고양이. 하지만 지금은 한 사람의 어엿한 숙녀. 조용한 밤에 가만히 잠이 든 그녀는, 나에게서 잠자리를 빌려 곤히 자고 있는 천사같다. 그녀를 깨우지 않으려 조심하며 가까이 다가가 쳐다본다. 언젠가는 사라질지도 모를 얼굴.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 밤과 같이, 고요히 그녀를 보며 잠들 수 있다. 따스한 바람이 조금 창가에 흩뿌리듯이 지나간 것 같다. 아까 보았던 잡초가 바람 따라 천천히 머리를 누인다. 마치 그것도 잠을 자려는 것처럼. 단 하루일지라도, 이런 날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설령, 내일 그녀가 멎어버린 비와 함께 사라질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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