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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나무 밑에는 시체가 묻혀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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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18, 2018 15:04에 작성됨.

* 제목은 뒤숭숭하지만 호러는 아닙니다


"프로듀서 씨. 알고 계시나요?"


벚나무 밑에는 시체가 묻혀있다는 이야기. 벚꽃잎이 분홍색을 띄는 건, 시체의 피를 머금고 있기 때문이래요. 붉은 의상으로 몸을 감싼, 갈색 단발 머리 소녀가 그렇게 말했다. 마치 노래하듯이 오르락내리는 목소리는 밝게도 어둡게도 울렸다. 프로듀서 씨. 그렇게 불렸던, 검은 양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남자는 적당히 대꾸했다.


"아아, 그거? 물론 알고 있지."


꽃구경 시즌이면 심심찮게 흘러나오곤 하는, 조금 짖궃은 농담 같은 이야기다. 프로듀서는 언젠가 사무소 전원과 함께 갔던 꽃구경을 돌이켜보았다. 그 때도 그런 이야기, 한 번쯤은 나왔던가? 이제는 적당히 좋았다는 정도로 희석되어버린 기억. 프로듀서는 아직 목소리가 들렸던 곳을 돌아보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실은 그냥 도시전설이래."

"에헤헤, 그런 걸까요."


소녀, 아마미 하루카는 멋쩍게 웃고는 의상에 달린 장식을 몇 번 만지작거렸다. 하얀 장갑을 끼고 있는 손. 그보다는 조금 더 붉은 빛을 띄고 있는, 모조 꽃 장식. 그 꽃은 틀림없는 벚꽃이었다.


.....


요즘 들어 하루카가 이상하다.


정확히는 요즘 들어 이상해진 게 아닐 것이었다. 이상하기는 전부터 이상했을 것이고, 그게 최근에 와서 겉으로 드러났을 뿐.


안경 너머로 걱정을 담은 시선이 조금 멀리 있던 하루카에게 향했다. 언뜻 보면 언제나와 별 다를 바 없이 온화한 그 얼굴에는, 수심이 옅게 깔려있었다. 아주 얇은 막이 살포시 덮인 것 같았다.


"하루카, 수고했어."

"아, 프로듀서 씨. 어땠어요 저? 잘 했나요?"


쪼르르. 하루카가 금방 프로듀서에게 달려온다. 프로듀서는 하루카에게 상냥하게 웃어주고는, 드러난 어깨 한 쪽을 통통 두드려주었다.


"잘 했어."

"다행이네요! 저, 이번에는 괜찮을까- 하고 걱정했었는데."


하루카가 크고 둥근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가, 다시 프로듀서를 본다.  조금 흐트러져있던 앞머리를 손 끝으로 정돈하고는, 작은 입술로 호를 그린다. 한 마음 한 뜻으로 기쁨을 표현하는 하루카. 그렇지만 얇은 막은 여전히 벗겨지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걱정할 것도 아니야. 이제 하루카는 어엿한 아이돌이니까. 후배도 39명이나 생겼잖아."

"에, 아아....."

"미안 미안. 하루카에게 너무 부담을 줬으려나."

"아, 아니요. 프로듀서 씨가 말하는 대로, 저도 이젠 선배가 되었으니까요. 그렇지, 후배들에게도 모범이 될 수 있도록 힘내야겠다!"


불끈. 하루카가 주먹을 꽉 쥐며 화이팅 포즈를 취했다. 일단은 수심의 막이 걷혀진 것처럼 보여, 프로듀서는 안심했다는 듯 등을 돌렸다. 오디션은 끝났다. 하루카는 합격했다. 1등은 아니었지만, 이 오디션 수준을 고려하면 그것까지 바라는 건 아직 욕심이었다. 일단 붙었다는 게 중요했다.


"그래주면 정말 고맙지. 이제 가자."

"네!"


프로듀서는 편한 발걸음으로 출구를 향했다. 하루카도 기세 좋은 대답과 함께 뒤를 따라, 이윽고 프로듀서와 나란히 걸었다.


"후아아.....좀 아까는 완전 긴장해서 죽을 뻔 했다니까요."

"푸핫, 하루카는 항상 그러는 구나."

"하지만 어떡해요. 긴장되는 걸."

"뭐 적당한 긴장은 아예 풀어진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건 그렇고 하루카,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네?"

"다음 스케줄까지는 시간 좀 있잖아. 마침 또 저녁 시간이기도 하고."

"아직 해, 떠 있는데요."


하루카의 태클에 프로듀서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쭉 이어진 통로. 그 벽에 붙어있는 창문에서는 햇빛이 조금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럼 점심?"

"글쎄요.....점심이라고 하기에는 또 한참 늦어버렸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건 그럴지도. 창문 너머로 조금 나른하게 느껴지는 하늘을 바라본 프로듀서는 쓴웃음 지었다.


"뭐, 어쨌든 시간 있잖아. 커피라도 한 잔 하고 가자고."

"에헤헤, 그럴까요."


하루카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대화가 중간에 끊겼다. 프로듀서와 하루카의 눈 앞에, 어느덧 출구가 자리잡고 있었다. 의상을 갈아입을 수 있는 대기실은 다른 동에 있다. 우선은 이 건물에서부터 나오지 않으면. 프로듀서는 유리 문의 손잡이를 붙잡아 열어젖혔다. 그리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꺼냈다.


"들어왔을 때는 몰라도, 나올 때는 기분 좋게 나올 수 있어서 다행이네. 하루카 덕분이야."

"천만에요~ 이것도 프로듀서 씨가 저희를 잘 지도해주셨으니까 그런 거죠."

"그래도 그 지도를 잘 따라준 건 하루카잖아."

"아....그렇다고 해도 프로듀서 씨가....."

"됐어됐어. 그럼 우리 둘 다 잘했다고 하자. 둘 다 잘해서 이길 수 있었던 거야. 어때. 좋지?"

"....."


대답을 받지 못한 말소리가 허공을 맴돌다 사라졌다. 프로듀서는 조금 커진 눈으로 하루카를 보았다. 이미 바깥에 나와있었던 프로듀서와는 달리, 하루카는 아직 그 자리에 있었다. 같이 나가려던 발이 우뚝 멈춰있었다.


"하루카?"


프로듀서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다시 이어졌던 대화는 좀 전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누군가를 욕하거나 탓하는 것도 아니고, 어두운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었다. 적당히, 기분 좋게 주고받을 수 있었던 말이었다. 그런데 왜, 하루카는 저렇게. 프로듀서는 붉은 빛의 화사한 의상과는 정반대되는 하루카의 얼굴을 응시했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수심의 막이 불쑥 떠올라있었다. 


"왜 그러니? 혹시 내가 이상한 말 했어?"

"저어, 프로듀서 씨."

"응."


하루카가 말을 잇지 못하고 한 쪽 어깨에 둘러진 끈에 손을 대었다. 그리고는 끈에 달려있는 연분홍 꽃 장식을 하얀 장갑을 낀 손 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그 행동에 프로듀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 쪽으로 향했다. 옅은 분홍빛을 띄고 있는 꽃. 벚꽃. 하루카와 무척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따뜻한 봄을 상징하는 꽃.


"또 이긴 거네요."

"그렇지."


하루카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아직 유리문은 열린 채 그대로다. 잠시 고민하던 프로듀서는 다시 건물 안 쪽으로 들어와, 유리문을 천천히 닫았다. 그리고는 하루카의 곁에 서서 어둡게 된 얼굴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기쁘지 않아?"


이미 짐작했던 사실을, 프로듀서는 굳이 질문으로 만들어서 내보냈다. 그래, 맞아. 전부터 그랬다. 이렇게 오디션을 보는 날이면, 하루카는 평소보다 조금 가라앉아있었다. 붙었는데. 합격했는데. 계속 이겼는데. 그런데도.


-프로듀서 씨! 저 해냈어요! 합격이라고요!


프로듀서는 아주 전의 일을 떠올렸다. 정말로 기쁘다는 듯 두 손을 번쩍 들고 크게 외치는 하루카의 모습을 떠올렸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떨어진 끝에 겨우 붙었던 언젠가의 작은 오디션. 거기서 하루카는 그렇게나 기뻐했었는데.


".....기, 기쁘긴 기쁘지만요....."


지금은 다르다. 상당히 미묘한 반응. 순수하게 기뻐할 수 없는 부분만큼, 다른 것이 파고들어온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마음에 걸려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 어째서일까. 그러는 이유까지는 모르고 있었던 프로듀서는 생각에 잠긴다. 하루카는 그런 프로듀서를 올려다보며, 여전히 벚꽃 장식을 만지작거렸다.


"프로듀서 씨는 벚꽃이 왜 아름답게 피어나는 건지, 이유를 알고 있나요?"


그러던 하루카의 입에서는, 뜬금없는 질문이 흘러나왔다. 프로듀서는 순간 생각을 멈추고는 하루카를 보았다. 하루카는 메마른 웃음을 띠며 말했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제 생각은 이래요." 


수많은 이들의 피를 머금은 벚꽃은, 아름답게 피어날 의무가 있다고. 그게, 그러지 않고서는 그 안에 잠든 사람들이 무척 억울해할 거니까요. 하루카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프로듀서는 하루카가 한껏 두르고 있는 붉은 원피스와, 아직도 하루카의 손길이 닿아있는 벚꽃 장식을 번갈아 보았다.


피. 꽃. 꽃은 피를 머금고 피어난다.


-벚꽃잎이 분홍색을 띄는 건, 시체의 피를 머금고 있기 때문이래요.


언젠가 들었던 말이 그의 머리 속을 한 차례 스치고 지나갔다. 프로듀서는 주먹을 꽈아악 쥐었다.


"하루카."


분노를 겨우 억누르는 낮은 목소리가 하루카를 불렀다. 하루카는 겁을 먹고는 한 차례 뒤로 물러섰다. 프로듀서가 그런 말을 하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벚꽃은 원래부터 아름다운 거야, 하루카. 누군가의 피를 머금어서가 아니고."


하지만 프로듀서는 하루카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담당 아이돌에게 그런 슬픈 생각을 하게 만든 자신에게 화가 난 것이었다. 


"....떨어진 사람들은 정말 슬프겠지요."

"응. 그렇겠지. 하지만."


프로듀서가 하루카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트레이드 마크나 다름 없는 리본 한 쌍, 정확히는 그 쪽에도 달려있었던 벚꽃 장식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아이돌은 의무가 아니야."

"그건, 그렇지만....."

"이 벚꽃은 피를 머금고 피어난 게 아니야."


그런 건, 단순한 도시전설일 뿐이야. 프로듀서는 말을 씹어 뱉었다.


"너는 네 전부를 보였고, 그 사람들도 그 사람의 전부를 보였을 뿐이야. 음....그렇다고는 해도 완벽히 공정하다고는 할 수 없으려나."


각자 사정이 있고. 각자 기량이 다르고. 같은 노력이라도 나올 수 있는 결과는 다르고. 심사위원에게도 취향이라는 것은 존재하고 있으니까. 프로듀서가 오디션이 공정하지는 않은 이유를 거듭 토해내자, 하루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래도 말야.....꼼수를 쓰거나 비겁한 수단으로 얻은 자리는 아니잖아."


그것도 그렇지요. 하루카가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프로듀서는 한 차례 쓴웃음을 짓고는 다시 말을 꺼냈다.


"네가 떨어진 사람들을 걱정하는 마음은 알겠어. 너도 한 때는 떨어지기만 했던 쪽이니까. 그 괴로움, 무척 잘 알겠지."


하지만. 프로듀서가 지금까지의 말을 딱 잘라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떨어진 사람들의 분함까지 짊어질 필요는 없어. 너는 너대로 아이돌을 계속 해나가면 되는 거야."

"아....."


그래도 될까요. 하루카는 마치 그렇게 물어보는 것처럼 프로듀서를 올려다보았다. 프로듀서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뭘 그렇게 걱정하는 거야. 망설이는 거야. 당연히 그래도 돼! 프로듀서는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그렇게 말하는 건 쉽지만 과연 하루카가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조금 생각하던 프로듀서는 마침내 괜찮다고 생각한 말을 찾아냈다.


"각자에게는 각자의 꽃이 있다고 생각해. 하루카, 네가 벚꽃인 것처럼."


자신치고는 슬쩍 멋있는 말을 해버린 것 같네. 프로듀서는 그렇게 자각하면서, 하루카를 곁눈질했다. 그저 멋있기만 한 말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프로듀서가 그렇게 바란 순간. 하루카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조금 맺혀있던 눈가를 슥 훔쳤다. 그리고는 작게 웃었다. 언제나와 같이 환한 웃음은 아니었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마음이 편해지게끔 하는 미소였다.


다행이다. 그 미소의 의미를 알아챈 프로듀서는 똑같이 웃음으로 화답하려다 멈췄다.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루카, 내가 말했었지. 그 의상은 모두의 아이디어를 모아 만든 거라고."

"네, 그랬었죠."


프로듀서는 괜히 퉁명스럽게 하루카의 붉은 원피스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힘있게 고했다.


"그 안에 깃든 마음은 결코 원념 같은 게 아니야. 너를 응원해주는 마음이지."


그러니까, 알았지? 그 이상 말할 필요는 없었다. 프로듀서는 슬쩍 눈을 찡긋했다. 하루카는 곧 그 동작에 담긴 뜻을 알아채고는, 이번에야말로 힘껏 웃었다. 꽃이 활짝 피어나는 듯한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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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도시전설과 통상 하루카 SSR 의상(스위티 블로섬)을 적당히 엮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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