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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은 잠 못 이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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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0-16, 2018 23:58에 작성됨.

프로듀서. producer. 앞이란 뜻의 접두사 pro, 이끌단 뜻의 어근 duc, 사람이란 뜻의 접미사 er이 붙어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이를 해석해보자면 앞으로 이끄는 사람. 단어 그대로, 프로듀서씨는 절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준 사람입니다. 책더미 사이에 낀 채 나갈 줄을 모르던 전 어느새 유리구두를 신은 신데렐라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였을까요. 분명 신데렐라에게 주문을 건 마법사였을 프로듀서가, 어째서인지 제겐 왕자님처럼 보였습니다. 행복한 왕자인지, 어린 왕자인지, 행복하고 어린 왕자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프로듀서씨는, 지금 침대에 누워있습니다.


"프로듀서씨."


"....."


"잠이 잘 안오세요?"


"으응....."


머릿속을 점령한 통증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제대로 숨을 쉬기 어렵기 때문일까요. 무엇인가 잠을 이루지 못했을 만한 이유가 있을 것만 같아, 병을 낫게 해줄 수가 없는 저의 마음은 애틋해지기만 합니다. 고통에 신음하는 프로듀서씨의 온 몸을 홀로 지탱해나가는 그의 심장도 슬슬 지쳐가는 듯 싶습니다. 


"후미카?"


"네."


"머리가 너무 아파.... 약 좀 가져다줄래?"


전 품에 끼고 다니던 책을 덮어놓은 채, 곧장 거실로 향했습니다. 프로듀서씨가 먹는 약이 거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책상 위에 있는 약과 함께 컵에 물을 따라서 가지고 갑니다. 찬 물은 안 되니, 따뜻하지만 뜨겁지는 않은 물로.


물을 컵에 따르는 중, 프로듀서씨가 이불 속에서 뒤척이는 소리가 들립니다. 가만히 병을 받아들이는 것이 너무 힘들었는지, 몸을 움직이면서 잠시나마 병에서 멀어지려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프로듀서씨는 이불 안에 움츠러든 채 있겠지만, 문 너머로 귀로는 들리지 않는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프로듀서씨의 병은, 약을 먹는다고 한 번에 나을 수 있는 병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지금 들고 있는 약은 그저 증상을 억제시키거나 통증을 완화시키는 약. 자세한 효과나 약의 이름은 다를지 몰라도, 저와 프로듀서 씨에게 있어서 이 약은 그저 아스피린일 뿐입니다.


"아스피린..... 아스피린, 아달린, 아스피린, 아달린....."


"마르크스, 말사스, 마도로스, 아스피린, 아달린."


프로듀서씨는 누워서도 홀로 떨어진 채 중얼거리던 절 신경써주신 건지, 한마디 대답을 해주시곤 제게 손을 뻗어 오셨습니다. 프로듀서씨는 제 손을 잡고 힘겹게 몸을 일으켜 침대 가장자리에 앉습니다. 아직 몸을 가누긴 힘든 것인지, 바닥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 프로듀서씨는 겨우 고개를 들어올립니다.


프로듀서씨는 약을 복용하는게 익숙한 듯이 알약 몇개를 손에 쥐고는, 물 한모금과 함께 단숨에 들이킵니다. 약과는 별개로 목이 말랐던 것인지, 프로듀서씨는 물 한컵을 단숨에 다 마셨습니다. 잠시동안, 정적이 흐릅니다. 전 괜히 지친 프로듀서씨를 건드리기 싫었고, 지친 프로듀서씨도 제게 다가올 힘이 없는 것이겠죠.


프로듀서씨는 다시 침대 위로 드러눕습니다. 이불을 덮어드리고 싶어 잠시 다가와봤지만, 프로듀서씨는 고개를 젓고는 스스로 이불을 뒤집어썼습니다. 프로듀서씨는 그것으로 괜찮은 걸까요. 


"프로듀서씨. 혹시 다른 건 필요 없나요?"


"딱히 없어... 하나 있다면 좀 심심하단 걸까나."


심심하다... 프로듀서씨는 저랑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까요. 제가 얼마나 도움이 될 진 모르겠지만, 제가 고통을 조금이라도 더는데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야 언제든지. 


"그럼.... 프로듀서씨."


"왜? 후미카?"


"프로듀서씨는 행복했나요?"


"행복했냐 하면, 어느 때를 말하는 거야? 프로덕션에 입사하고 나서? 아니면 어렸을때?"


"절 담당하게 되고 나서부터요."


"글쎄. 항상 행복하기만 했다면 거짓말이겠지. 나도 사람이니까. 늘상 행복하게 지낼 순 없다고 생각해. 그래도 후미카랑 함께일땐 행복했어. 확실하게."


"프로듀서씨는 저랑 있을 땐 정말 행복한 건가요?"


"물론이지."


"프로듀서씨. 행복한 왕자 이야기 아시죠? 행복한 왕자는, 제비더러 자신의 온 몸을 뜯어달라고 했을 때도, 고통도 안 느끼는 듯이 행복해했다고 해요... 정말로 행복한가요?"


"행복한 왕자 이야기야? 어릴 땐 그 이야기가 이해가 잘 되지 않았어. 아무리 다른 사람이 불쌍하다고 해도 무슨 가치가 있길래 그렇게 자기 몸을 떼어준 것일까 하고."


그렇게 말하던 프로듀서씨는 온 몸을 스스로 쥐어뜯었죠. 움직일 힘도 없어서 구둣발을 땅에 질질 끌듯이 걸으며, 피로로 가득 젖은 와이셔츠를 이끈 채 제 곁까지 와줄 때, 전 자신이 괜찮다고 하는 프로듀서씨의 말은 이미 거짓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것을 알았을 땐, 프로듀서씨는 어느 새 병까지 얻은 뒤였죠. 격렬한 감정이 목을 타고 올라오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한번 입안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속으로 삼키는 것 뿐입니다.


"그럼 지금은 어떤가요?"


"지금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해. 행복한 왕자는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겼다기보단 사람들을 진정으로 좋아했던 거야. 그래서 온 몸을 다 떼어준 거고."


".....저도 비슷한 생각이에요."


프로듀서씨는, 그렇게 제 몸을 쥐어뜯고도 제 앞에선 힘들다고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걱정해도 오히려 괜찮다고 해줬어요. 제가 신경쓰지 않았으면 해서 그런것이었겠지 했지만...


"왕자 하니까 말인데. 난 왕자 하면 어린왕자가 가장 먼저 떠올라."


"어째서에요?"


"고등학교때 늘 어린 왕자 모양 장식이 달려있는 샤프를 썼었거든. 샤프가 망가졌을땐 장식만 따로 떼서 뱃지도 만들었어. 지금은 잃어버렸지만."


"프로듀서씨는 어린왕자를 고등학교때 읽었나 보네요."


"그건 아니야. 사실 워낙 어릴 때 읽은 거라서 내용은 기억이 잘 안나. 여덟 살 때나 읽었나. 사실 고등학교때도 내용은 기억이 잘 안났어."


"저, 조금이라도 내용이 기억나는 부분이 있나요?"


"으음, 어린왕자가 자기가 있던 별을 떠나고 우주의 다른 별을 돌아다닐 때, 늘상 술만 마시는 사람이 있는 별에 가는 부분이 있잖아. 그부분은 기억이 나."


"술 마시는 사람이면, 술을 마시는 걸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단 그 부분이요?"


"맞아. 술을 마시는게 결국 자신에게 짐이 되더라도, 술을 마시는 것이 너무 좋으니까. 좋은 것을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 결국 술을 마시러 돌아갈 수밖엔 없는 거구나 싶었거든. 그래서 그 부분이 너무 슬펐어."


프로듀서씨는 확실이 나아진 듯, 표정이 밝아지셨습니다. 어린 왕자 하면 여러 유명한 부분이 많습니다. 어린 왕자가 양을 그려달라고 하는 장면, 코끼리를 삼킨 도마뱀도. 그런 장면을 제치고 나서도, 프로듀서씨는, 그런 장면이 기억에 남은 걸까요.


"프로듀서씨는 저랑 있으면 힘든가요?"


"아까도 말했잖아. 함께 있으면 행복하다고."


"그게 아니에요. 절 담당하시게 된 이후로 힘든 일을 겪었냐고 묻고 싶은 거에요."


"힘든 일? 그저 프로듀서로써 할 일을 한 것 뿐인걸."


"아니에요."


"그리고 아무리 힘들어도 난 후미카의 목소리만 들어도 안에서 힘이 난다고. 7시에 널 만나게 된다면, 난 새벽 3시에도 힘이 솟아오를 거야."


거짓말입니다. 프로듀서씨는 분명 저랑 함께 있으면 세상의 모든 짐을 다 내려놓은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정말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고, 그 짐을 지고도 아무렇지 않게 달릴 수 있을 만큼 프로듀서씨에게 새 힘이 생기는 건 더욱 아니었습니다. 나조차도 알 수 있는 건데. 프로듀서씨는, 그걸 누구보다도 더욱 잘 알고 있겠지요.


"거짓말. 거짓말인게 당연하잖아요. 그냥 프로듀서라서 할 일을 했다는 것도 그렇고, 저만 봐도 힘이 솟아오른다는 말도 그렇고. 그런 말 정도로 다 끝날 일이었으면, 프로듀서씬 여기 누워있지도 않았어요."


"......"


"그럼 힘들었던 일이 어떤 일인지 말해주실래요?"


"음, 새로운 프로젝트 기획하느라 밤새고, 섭외때문에 방송국에 왔다갔다하고, 뭐 잘못하면 크게 한소리 듣거나, 뭔가 안 풀리는 날에는 안팎으로 동시에 쪼이거나 하기도 했으니....."


"혹시 저때문에 무리를 한 건가요?"


"후미카, 괜찮아."


".....괜찮지 않아요."


프로듀서씨는 괜찮지 않습니다. 프로듀서씨가 괜찮지 않으면 저도 괜찮지 않습니다. 만일 저때문에 프로듀서씨가 힘든 거라면, 그래서 병까지 얻었다면, 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헤매기만 할 지도 모릅니다.


나는, 괜히 몸부림친다면 프로듀서씨를 힘들게 할 것이란 생각에, 온 몸에 녹이 슬 만큼 이대로, 여기서, 늘상 가만히 있다가 그대로 밑바닥까지 가라앉을 겁니다. 프로듀서씨는, 그런 저에게도 손을 뻗어드릴까요.


"프로듀서씨는 어딘가로 사라져버리지 않을 거에요?"


"내가?"


"프로듀서씨는, 제가 하는 말을 이해해주시고, 절 그대로 바라봐주시니까요... 그래서 무서워요. 제가 만일 이 방을 나가고, 프로듀서씨가 혼자 남게 된다면, 그대로 사라질 것만 같아요."


"...무서워?"


"......"


"으윽..."


"아...!"


프로듀서씨는 신음소리를 내면서 몸을 일으켜 손을 뻗어주셨습니다. 프로듀서씨는 지금 다시, 저를 위해서, 살을 깎아내셨습니다.


"괜찮아요?"


"난... 괜찮아. 내가 진짜로 아팠으면, 이렇게 움직이지도 못했을 거야."


"제가 안 괜찮아요. 부탁이니까, 편히 누워 계세요."


"... 난 무슨 일이 있어도 괜찮다고. 알잖아. 내가 매일같이 밤도 새고 하루종일 돌아다닌거. 그렇게 돌아다녔는데, 이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 쯤이야 뭐가 어렵겠어?"


"......"


프로듀서 씨는 괜찮다고는 하지만, 제 맥박과 공명해서 제 심장을 그대로 터트릴 것만 같이, 프로듀서의 몸은 떨려옵니다. 새로운 새벽, 이 밤을 짓눌러서 덮어버린다면, 나는, 프로듀서씨는, 그대로 남아있을까요. 누가 잠을 자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우리 둘 중 한명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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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춥습니다. 다들 감기 조심하세요. 고등학교에서 잠도 못 잘만큼 심한 감기에 걸렸을때 기숙사에서 밤을 쫄딱 샜다가 집에 도착하니 쓰러져서 1시간동안 컴퓨터 앞에서 그대로 뻗어있던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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