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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노미야 아스카, 18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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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28, 2018 03:21에 작성됨.

 늦여름 오후의 프로덕션 내 정원의 분수대. 점심 휴게 시간 동안 끼리끼리 모인 아이들의 틈 사이에서 한 소녀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앉아있다. 그녀가 아침에 산 커피는 이미 차갑게 식어버렸다. 손에 들린 오이 샌드위치를 무슨 맛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질겅질겅 씹는다. 그래도 넘어가지 않는 것을 겨우 넘기기 위해 마시는 인상을 찌푸리며 블랙커피. 이토록 쓰디쓴 시간을 보내게 될 줄 알았다면 진작 평소처럼 설탕을 넣을 걸. 물론 후회해봤자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모면할 수 는 없었겠지만. 오전 내내 존재 증명을 위해 그녀가 프로덕션 여기저기를 돌아다녀야 했던 까닭은 담당 프로듀서라는 놈이 무척 한심했던 탓이 컸다담당 프로듀서에게 던진 너는.....지금 내가 누군지 알고 있겠지?’ 라는 말의 대답은 ...?’였다. 그 녀석의 얼빠진 표정이란. 평소처럼 장난스런 느낌이 아니라 정말 처음 보는 사람이라는 눈치였다. ‘이쪽은 에쿠스테가 돋보이는, 니노미야 아스카 파트라서 말이야, 담당 프로듀서를 찾아보렴.’이라니 그게 네가 할 말이야? 이쯤 되면 황당함을 넘어 두렵기까지 할 정도다. 기대와 달리 그곳에는 그녀가 니노미야 아스카라는 것을 증명할만한 증거는 없었다. 입사 할 때의 지원 서류나 계약서, 하다못해 프로듀서의 핸드폰에 저장된 담당 아이돌의 사진마저도 그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증명 사진란에는 오직 떠다니는 에쿠스테가 있을 뿐. 소녀는 더 이상의 서류를 뒤적이는 건 무의미하다고 느꼈다. 고작 어린 소녀 하나를 속이려고 세상 전체가 모른 척을 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프로듀서와 오랜 실랑이 끝에 그에게서 알아낸 것은 정말로 허공에 떠 있는 에쿠스테그들에겐 니노미야 아스카라는 것이다. 처음에 그들은 사무소의 소수 인원들이었다. 그러나 조금 시간이 지나자 사무소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되었고 머잖아 사무소 이외의 사람들도 그 범주에 속하기 시작했다.   

 소녀는 혹시 에쿠스테를 착용하지 않아서 나를 니노미야 아스카로 인식하지 못 하는 건가?’라는 순진한 생각도 해봤지만 사무소 복도 내에 걸린 포스터나 아이돌 화보에서 자신의 자리에 허공에 뜬 에쿠스테가 자리한 모습을 보곤 그만두기로 했다. 확실하다. 세상 사람들은 춤추는 에쿠스테가 니노미야 아스카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엔 귀신에 홀린 것 같았는데 이젠 자신이 귀신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존재는 하되, 아무도 알지 못하는. 그런 고독한 녀석 말이다. 이런 감정은...이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어제만 하더라도 니노미야 아스카는 분명 자기 자신이었는데, 지금은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게 되어버렸다. 늘 부르던 자신의 첫 솔로곡의 가사들처럼, ‘존재 증명이라는 넌센스한 상황에 처하게 되니 헛웃음만 나온다. 흔히들 자신과 퍽이나 닮은 도플갱어가 자신의 자리를 대체해서 살아가는 망상을 하곤 하지만 지금은 사람의 형상도 아닌 떠다니는 에쿠스테따위가 자신의 행세를 한다는 사실을 아스카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난감하다. 플라잉 에쿠스테라니, 실로 비논리적인 현상이지만 분명 두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다. 특히나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드는 건, 사람들의 말마따나 니노미야 아스카가 아니라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것이었다.      

 소녀는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평소대로 보던 손의 모습 그대로이다. 부드럽고 따뜻한 피부의 감촉, 손목에서 뛰는 맥박, 손톱의 모양이나 손금의 무늬, 손가락의 길이 역시 무엇 하나 변함이 없어 보인다. 나는 그대로 나인데, 세상은 나를 더 이상 나로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그녀는 단지 정의되지 않은 한 명의 이방인이었고, 그녀 역시 그들이 어제보다 좀 더 낯선 누군가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어느 영국작가는 장미의 이름은 다르게 불려도 그 향기는 그대로라고 말했지만, 장미를 장미라 부를 수 없다면 장미와 똑같은 그걸 무엇이라 불러야할지 난처한 상황은 변함이 없다. 아마도 그 영국인은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별 수 없다면 고향인 시즈오카로 돌아가는 건 어떨까라고 생각해보았지만 가장 가깝던 동료들도 믿었던 프로듀서라는 녀석마저 나를 아스카로 인지하지 못하는 시점에서, 부모라고 다를까......사실은 두렵다. 그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면, 내가 아스카일 수 있는 마지막 보루마저 잃게 되는 건 아닐까. 소녀는 반쯤 확신하고 있었다. 아마 이런 전개라면 분명 떠다니는 에쿠스테 녀석이 그들에겐 도쿄로 상경한 딸이고, 노래하고 춤추는 딸임에 틀림없겠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결국 이 세상은 나와 접점이 없는 곳이 되는 것이다. 아무런 이유나 연고도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에게 이 별은 친절하지 않다. 아니 애초에 내가 누구이든 간에 이 곳은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렇게 달콤한 곳이 아니었지 않나.  

 아직 내가 아스카로 남아있을 수 있는 곳은 어딜까? 손지갑 속의 빛바랜 학생증, 금 간 휴대폰 액정에 비친 나? 아니다 그 정도론 부족하다. 아스카의 머리색, 아스카의 에쿠스테, 아스카의 바디 사이즈...가장 확실하게 여겨지는 생물학적인 증거들마저 이미 에쿠스테에게 홀려버린 그들에겐 그저 유사도 높은 복제품으로 여겨질 뿐이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소녀는 자신의 발치에서 뻗어 나온 자기 그림자마저 믿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어떻게 해도 아스카일 수 없는 걸까. 애초에 니노미야 아스카란 무엇이지? 비일상 속에선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가장 어려운 질문들이 된다.  

, 그렇구나. 에헤헤. 아스카도 역시 그랬구나.”  

상념에 잠겨있는 와중에 다정하게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렸다. 이 목소리는 란코? ‘아스카라면 혹시 에쿠스테녀석과 지금 같이 있는 건가? 뒤를 돌아본 곳엔 어김없이...  

언제나 생각하는 점이지만 아스카와는 역시 마음이 통한다랄까. ...”  

 떠다니는 에쿠스테의 곁에서, 수줍어하는 란코가 언어의 갑옷을 벗고서 과감 없이 속마음을 털어놓다니. 평소라면 란코의 곁에 있어야할 소녀는 또다시 알 수 없는 울컥함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대답 없이 하늘거리는 에쿠스테를 잠시 바라보던 란코는 이내 다시 말을 이었다.

, 아냐.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러니까...아스카의 곁에 있으면...그걸로 충분하니까.”  

“...”  

? 정말이야? , 그렇구나. 에헤헤...아스카도 그렇게 생각해주니 정말 기뻐.”  

“...” 

이벤트. 조금 있으면 시작이니까 좀 더 힘내지 않으면...? 그래? 그렇구나. 후훗, 고마워 아스카.”  

 란코, 결국 너마저. 항상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오랜 시간을 함께 해왔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유대감이 이리도 가볍게 도둑맞을 수 있는 것일 줄이야. 차라리 란코의 혼잣말이었다면 좋았겠지만 란코는 분명 플라잉 에쿠스테’....그러니까 다른 세계선의 니노미야 아스카와 공명하고 있었다. 간간이 이어지는 침묵이 어떤 말을 하는지 소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 란코에게 달콤한 밀어(密語)를 속삭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이 두려워 언어의 장벽을 쌓았던 란코, 그 아이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아스카는 더욱 솟구치는 분함에 가슴이 쓰라려왔다. 이상한 것은 내가 아니라 이 현실이라고, 저 녀석은 단지 하늘거리는 에쿠스테일 뿐, 진짜 니노미야 아스카는 바로 이 나라고. 자기주장을 위한 두 주먹을 꽉 쥐었지만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날뛰어봤자 가장 부자연스러운 존재는 자기 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소녀는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래, 허공을 향해 주먹을 내질러 봤자 변하는 건 아무 것도 없어. 존재 증명이란, 존재 증명이란 것은...이젠 뭐가 뭔지 모르겠어.   

...그렇지! 이벤트 끝나면 같이 가려고 봐둔 부띠끄가 있는데 아스카도 괜찮다면. , 정말? 다행이다. 응응, 그래서...”  

 어쨌거나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순 없다는 건 확실했다. 돌아가자, 돌아갈 곳이 완전히 없어지기 전에. 자기만의 방에서 한 잠 푹 자고 나면 이런 악몽 같은 일들도, 불가해한 기억들도 어제의 꿈처럼 사라져있겠지. 빈 컵과 샌드위치 포장지를 구겨 쥐고서 소녀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기울어가는 오후의 햇살에 길어져 가는 그녀의 그림자가 희미하게 사라져간다.  

? 아스카? 왜 그래? ? 뒤에 누가 있었어? ? 아무도...없는데?”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 란코의 곁에서 줄곧 말이 없던 플라잉 에쿠스테가 가을바람에 살짝 흔들린다. 마치 회심의 미소를 짓기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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