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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터의 어떤 하루 _ 리츠코, 치하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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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6-20, 2018 12:06에 작성됨.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리츠코는 액정에 띄운 번호를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오늘을 넘겨버리면, 담판을 지을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당할 것이다. 이미 머릿속으로는 해야 할 말들과 얻어 와야 할 것들이 정리되었는데 이를 실행시키기 위한 행동의 첫 발걸음을 떼기가 왜 이리 어려운걸까. 통화 버튼에서 엄지손가락이 꼼지락거리며 머뭇거렸다.


 “하아...”


 한숨이 떨렸다. 긴장하고 있나보다. 아니야, 머뭇거려선 안 된다. 1분 1초 버린 시간들이 쌓이면 불리해진다. 입술을 몇 번 깨물기를 반복하던 리츠코는 통화키를 터치했다. 진부한 연결음이 한 번, 두 번, 세 번. 딸깍. 상대편에서 들리는 목소리. 여보세요?


 “여보세요? 765프로의 아키즈키 리츠코라 합니다.”


 돌이킬 수 없다. 저질러버리자, 복잡하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아아-. 765프로에 연락을 한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네.’


 “공연이 불과 하루 반 남짓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기사로 소식을 접한 것, 굉장히 유감입니다. 설마 통보를 하게 되더라도 저희가 그를 기사로 접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말이 세게 나오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일어난 일련의 일들을 쭉 떠올리자 절로 머리 위로 뚜껑이 열릴 것 같았다. 강경해야하지만, 냉정을 잃으면 안 된다.


 ‘사정이 어쩔 수 없었네. 자네도 알지 않은가?’


 “하물며 그 후에 어느 순번으로 공연을 하게 될지도 알려주시지 않으셨죠.”


 ‘업계 사정상 어쩔 수 없었다 하지 않는가. 그래도 단체 합동 무대를 제외하고 끝에서 두 번째야. 이는 절대 손해 보는 무대가 아니라고?’


 “키사라기 치하야를 제치고 엔딩 무대를 차지했다는 기사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알지 않은가. 언론 나부랭이들은 우리 뜻대로 손을 댈 수가 없는 부분일세.’


 “회피만 하시는 건가요?”


 ‘회피라니. 말이 좀 심하지 않은가. 그 기사들이 우리 공연에 어떠한 도움이 된다고 그러는지 모르겠구만.’


 “방송국 차원에서 홍보 기사를 뿌리지 않았음에도 그 기사로 인해서 SNS 실시간 트렌드, 포털 사이트 화제의 키워드 등을 차지한 부분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건너오는 대답이 없다. 이런 말로 왈가왈부 할 때가 아니라 답답할 따름이었다. 본론을 위한 초석부터 삐걱거리는 것 같았다. 리츠코는 멘탈을 다잡았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게. 키사라기 치하야의 엔딩 무대는 더 이상 유니크하지 않아. 특별하지 않다고. 또한 이번 공연의 주제는 풋풋한 청춘의 시원한 청량함일세. 파랑새와 약속은 엇나가지 않는가.’


 “파랑새와 약속을 선곡한 건 방송국이었습니다. 애초에 치하야의 이미지를 그 곡들로 한정지으신 건 아니신지요?”


 ‘애절한 보컬리스트로서의 치하야의 이미지가 아니면 치하야는 어떻게 소비 되어야 맞는가?’


 “치하야는 아이돌이자, 보컬리스트입니다. 그 앞에 사족은 필요 없습니다.”


 저들 마음대로 이미지를 한정짓고, 멋대로 평을 취한다. 이미지를 전달해야 할 매개체가 이미 편견으로 치우쳐 있었다. 리츠코는 생각보다 넘어야 할 산이 크다는 것을 즉감했다. 오히려 잘 됐다. 그들이 쳐 놓은 덫을 이용해 역전시켜보리라.


 “저희는 처음 치하야에게서 섭외를 받았을 때의 자료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저희 측에도 바로 언론사에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연락 통로가 있습니다. 오늘의 이 일들이 기사화된다면 손해는 누가 보게 될까요? 언론플레이를 하자면 우리야말로 가지고 있는 키가 많습니다.”


  ‘......765프로. 어느 정도 자리 잡았다고 으름장을 놓는 건가?’


  “저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는 걸 인정하시고 있었다면.”


  그러지 마셨어야 해요. 리츠코는 돌연 넋두리하듯 목소리에 탁, 힘을 풀었다.


  “저희 사무소에선 이 방송사의 돌발적인 출연 요청에도 적극적으로 임해 왔습니다. 그로 인한 신뢰관계가 단단히 구축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만의 착각이었나 봅니다. 저희가 지금 항의하는 건 엔딩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 전에 미리 저희와 상의라도 해 주셨으면 하는 제스처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예상치 못한 기사였다면 그에 대한 양해라도 저희에게 구하길 바랐습니다. 치하야는 이 무대를 위해 자신의 연습 시간을 할애하며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선곡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다면 공연에 맞는 이미지를 저희에게 요구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차근차근. 리츠코는 불합리하다 여겨졌던 부분을 아무런 감정을 녹이지 않고 말을 해 나갔다. 이러나저러나 방송사를 상대로 하는 항의였다. 심기를 거스를 정도로 도를 넘어설 수 없었다. 하지만 소위 크나큰 갑이라는 입장에게 비굴해질 수도 없었다. 어느 부분이 서운했고, 그 부분에 대해 어떠한 조치가 있었다면 우리는 이해할 수 있었다는 상식선을 제시하는 것.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 사이에서 리츠코가 선택한 조율 방법이었다.


  ‘...... 원하는 방향이 있는가?’


  자고로 방송국은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길이 막힌 부분을 수리하려 하지 않고 그 샛길을 넓히는 방법을 취한다. 그리고 이는, 리츠코가 원하는 방향이었다.


 “선곡을 바꾸고 싶습니다. 그리고 1곡 반의 선곡을 두 곡으로 늘리고 싶습니다.”


  ‘그게 전부인건가?’


  “그리고 선곡은 저희가 선택하게 해 주시지요.”


  정적이 일었다. 리츠코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최대한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일 초 일 초가 억겁의 시간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그 단어를 듣자마자 몸에 들어간 힘이 마구 풀려버린 리츠코는 전화 통화가 끝나자마자 사무소 책상에 머리를 떨어뜨렸다.


*


 [순서는 라스트 직전 무대. 곡은 2곡. Just be myself!! 네 마음 가는 곡 하나. 보장된 출연시간 약 9분.]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맞이한 건 간 밤에 리츠코에게 날아온 메일 한 통이었다. 승전보 같은 메일의 내용은 간결했다. 선곡을 바꾸는데도 성공했고 한 곡 반이었던 곡의 개수도 두 곡으로 늘어났다. 메일이 날아온 시간은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그 때까지 치열하게 주최측을 상대했을 리츠코에게 고맙고 미안했다. 공연까지 남은 시간은 하루. 무대 뒤에서의 딜을 마무리 짓는 건 무대 위에서의 성과일 것이다. 치하야는 일어나 간단한 먹을거리를 만들었다. 그래봐야 매번 아침으로 먹는 손수 만든 주스였다. 오늘의 과일은 딸기, 바나나였다. 딸기의 색에서 뜬금없이 줄리아의 머리색이 떠올랐다. 바나나의 모습에서 에밀리의 노란색 트윈 테일이 떠올랐다. 실없는 웃음을 흘리며 딸기와 바나나를 한데 넣어 갈았다. 그리고는 준비한 컵에 주스가 된 음료를 담았다. 초록색의 컵이었다. 마츠리가 떠올랐다. 으음. 그럼 여기서 후카씨를 첨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찬장을 뒤졌다. 후카의 머리색과 비슷한 남색의 컵받침을 꺼냈다. 받침을 밑에 두고 그 위에 초록색의 컵을 올렸다. 각자의 색들이 서로의 개성을 마구 뽐내고 있었다. 아침에 즐기게 된 싱거운 장난을 사진으로 저장한 치하야는 음료를 마시며 라인방에 들어갔다. ‘이터널 하모니’라 쓰여 있는 방으로 들어가 방금 찍은 사진을 전송했다.


 ‘컵이 마츠리인거예요!’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건 마츠리였다.


 ‘맞아요. 역시 도쿠가와상 예리하시네요.’

 ‘히메의 눈은 정확한 거예요.’

 ‘뭐야 그럼 저 음료수는 나라는 거야?’

 ‘정답. 후훗.’

 ‘나를 마실 때 감사하며 마시라고.’

 ‘어머, 그럼 저 컵받침은 나라는 걸까?’

 ‘맞아요. 후카씨를 포함하기 위한 저의 노력의 결과물이네요.’

 ‘저, 저는... 어디에 있을까요?’

 ‘저 음료는 바나나와 딸기를 간 거니까 에밀리와 줄리아가 합쳐진 거겠네.’

 ‘좋아요! 줄리아씨와 일심동체가 된 거로군요!’

 ‘치하. 우리 둘을 마실 때 감사하며 마시라고!’


 한데 어울리지 않으며 각자 개성을 뽐내는 것도 보는 입장에서는 재미있는 일이다. 색의 언밸런스가 오히려 시선을 당기니 쏟아 낼 수 있는 말도 많았다. 라인의 메시지를 보며 치하야는 문득, 무대를 떠올렸다. 정해진 한 곡과 정해지지 않은 한 곡. 청춘이라면, 개인의 청춘보다도 더 값지게 느껴질 수 있는 건 무리의 청춘이지 않을까. 융합되지 않은 개성이 모인 청춘의 하모니는 청량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 여러모로 흥미로울 것 같은 무대가 눈앞에 그려졌다.


 ‘내일 무대에 혹시 여러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요?’


 고민 없이 전송했다. 무대 위를 전적으로 맡긴 리츠코에게도 따로 연락했다. 지금까지 리츠코가 무대의 시작을 위해 고군분투 했다면 이제부터는 무대의 마무리를 위해 자신이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할 때라고 치하야는 생각을 다졌다.


.

.

.


 금요일 무대에서 ‘Eternal Harmony’를 유닛 멤버들과 부르고 싶어.


 치하야의 입에서 나온 말에 리츠코를 제외한 네 사람은 깜짝 놀랐다. 무대의 도움을 받고 싶다는 뜻이 무대에 유닛으로 출연해서 유닛 곡을 선보이고 싶다는 뜻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저기, 치하야쨩. 치하야쨩에게만 섭외가 왔던 공연인데 우리가 거기에 껴도 괜찮은....걸까?”


 후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음... 그러네요. 하지만 괜찮을 거예요.”


 “호? 치하야쨩. 괜찮을 거라는 말은,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단 이야기인건가요?”


 평소엔 속을 알 수 없이 뜬구름을 잡는 것 같은 이미지의 마츠리였지만 치하야가 건넨 말의 속뜻을 제일 먼저 파악하여 질문을 꽂았다. 치하야는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유능한 프로듀서의 재량으로 새로 얻어낸 무대니까요. 그 무대에서 조금 다른 저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 저는 여러분과 함께 무대를 꾸미고 싶어요.”


 치하야는 리츠코를 쳐다봤다. 치하야의 시선에 따라 다른 네 사람 또한 시선이 리츠코에게 꽂혔다. 리츠코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다 마주하게 된 치하야의 눈. 리츠코는 살풋 웃음 지었다.


 “아아-. 이거, 우리가 모르는 베테랑들만의 비하인드가 있는 모양인데?”


 시선의 교환을 목격한 줄리아가 리츠코와 치하야를 번갈아 손짓하며 말했다.


 “숙련가들만의 뒷이야기라니! 정말로 멋져요! 정말 저희가 함께 해도 괜찮은 건가요?”


 줄리아의 말을 에밀리가 뒷받침했다. 질문이 향한 곳은 치하야가 아닌 리츠코였다.


 “그러네요, 결국엔 프로듀서가 결정해야 하는 사항인거죠? 그죠? 그렇죠?”


 마츠리마저 리츠코를 향해 묻고 있었다. 치하야는 리츠코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치하야는 치하야 나름대로 치열한 고민의 숲을 헤매다가 발견해 낸 타파의 통로일 것이다. 나아가려는 뱡향의 키를 스스로 잡은 치하야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좀 더 수월한 길로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레이더가 되어주는 것, 그 뿐이었다.


 “무대 위에서의 모든 방향은 치하야의 결정에 따르기로 했어. 치햐야의 뜻이 곧 내 뜻이야.”


 “자, 그럼 다시. 금요일 무대에서 ‘Eternal Harmony’를 유닛 멤버들과 부르고 싶어.”


 리츠코의 말에 힘입어 치하야는 한 치의 오타도 없는 문장을 재차 내었다. 치하야와 리츠코를 제외한 네 사람은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도미노처럼 네 사람은 각자 뜻을 다지듯 고개를 끄덕였다.


 “치하야쨩. 부디, 잘 부탁해.”


 대표 격으로 후카가 입을 열었다.


 “아니요. 저야말로.”


 치하야는 고개 숙여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여 준 유닛의 멤버이자 동료들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결정이 된 후 남은 건 공연 직전까지의 연습이었다. 치하야는 빠르게 자신의 공연 무대를 어떻게 꾸려나갈지에 대해 그려나갔다. 네 사람도 진지하게 치하야의 구상에 임했다. 박차를 가하는 다섯 사람의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리츠코는 조용히 그 자리를 피해주었다.


*


 공연 당일의 날이 밝았다. 대규모의 공연은 아침부터 리허설 등의 스케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외부적으로 새어나간 정보라고는 유명 사무소의 유명 아이돌들이 출연한다는 정보 하나, 그리고 사쿠사 미치로라는 신예 아이돌이 키사라기 치하야를 제치고 라스트 무대를 꾸미게 되었다는 정보 하나. 이 두 개의 정보였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치하야의 선곡 리스트 변화와 치하야 말고도 출연하게 된 4명의 765프로 멤버들에 대한 여러 말들이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아... 이거. 아무래도 리허설이 끝나면 기사가 엄청 뜰 거 같단 말이야.”


 “어쩔 수 없지.”


 리츠코가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바로 옆에는 치하야가 서 있었다. 혼잣말에 신속한 대답이 오자 리츠코는 화들짝 놀라 옆을 쳐다봤다.


 “얼마나 흥미로운 떡밥이겠어. 물지 않겠어?”


 “아하...... 치하야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까 좀 신선하네.”


 “음... 뭐랄까. 이미 여러 번 물려본 사람의 경험담이라면 어떨까?”


 풋. 별로 재미도 없는데 웃는다. 리츠코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치하야는 능청스럽게 리츠코의 팔을 팔꿈치로 툭 쳤다. 어머, 얘 좀 보소. 왜 이러는 거야.


 “나는 정말 괜찮아. 걱정이라면 유닛 멤버들이지.”


 “졸지에 대규모 무대의 데뷔 공연을 하게 된 셈이니까 말이지.”


 “나를 위해 그 네 사람을 끌어들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리츠코는 치하야의 몸을 돌려 자신을 마주보게 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손가락을 쫙 펼쳐보였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봤거든. 우리가 이 무대로 얻을 수 있을 것들에 대해서.”


 리츠코는 엄지손가락을 접었다. 하나, 치하야는 애절하고 슬픈류의 장르만 소화하는 가수가 아니다. 검지를 접었다. 둘, 그놈의 방향성이라는 청량감을 치하야는 충분히 보여주고도 남는다. 중지를 접었다. 셋, 치하야는 솔로로서의 역량뿐만 아니라 유닛으로서의 역량 또한 충분하다. 약지를 접었다. 넷, 또한 이 치하야를 받춰 줄 능력이 되는 아이돌들이 765프로에 존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새끼손가락을 접었다. 엔딩 무대라고 반드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엔딩으로 남는 게 아니다. 모든 손가락을 접자, 주먹이 만들어졌다. 이 주먹을 리츠코는 파이팅의 포즈인 양 취했다.


 “분명 공연 직전까지 흔들려는 사람이 많을 거야.”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그래.”


 “그리고... 어... 리츠코.”


 치하야가 말에 뜸을 들인다. 리츠코는 치하야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지 알 것 같았다.


 “치하야. 나중에. 다 끝나면.”


 “......응.”


 리츠코의 의중을 알아 챈 치하야는 납득하며 응답했다.


.


.


.


 [765프로, 치하야를 제외한 4명의 새로운 멤버 리허설 참가]

 [사진‘톡’ 이슈! : 치하야와 아이들?!]

 [리허설 중인 키사라기 치하야 ‘오늘은 혼자가 아니에요’]


 시답잖은 제목을 얹고 리허설과 관련된 기사가 우수수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치하야를 중심으로 유닛 멤버에 대해서도 여러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다. 뭔가 새로운 무대를 보여주려는 게 아니냐는 기대감을 보이는 반응들도 많았지만 못지않게 부정적인 반응들도 많았다.


 “저... 끼워팔기란게 뭘까요?”


 폰을 만지작거리며 반응을 살피던 에밀리의 입에서 나온 그 단어가, 부정적인 반응의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줄리아는 말없이 에밀리의 휴대폰을 가져가 에밀리가 본 댓글을 살폈다. 하다하다 끼워팔기까지 하고 있네. 따위의 댓글이었다. 줄리아는 에밀리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홈으로 화면을 돌렸다.


 “딱히 신경 쓸 필요는 없단다.”


 후카가 에밀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지만 후카 역시 목에 가시가 걸린 듯 그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대기실에 활기차지 못한 이유의 반은 그 탓이었다.


 “잘 쉬고 계신건가요? 음료수 가져온 거예요.”


 마츠리가 양 손에 음료수를 하나씩 들고 들어왔다. 뒤이어서 치하야도 같이 들어왔다. 대기실의 문이 열리자 시끌벅적한 소란이 가감 없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아니, 경우가 없지 않습니까. 분명 치하야 한 사람만 출연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 떼 무리는 뭐랍니까!’


 ‘라인업은 언제든지 변동이 가능합니다.’


 ‘이런 끼워팔기가 아이돌 생태계를 망치는 주범이라고요!’


 소란의 중심은 765프로였다. 대중에게도 나오는 반응이, 관계자라고 다를 바는 없었지만 지금 이 요란을 일으키는 쪽은 엔딩 무대를 가져간 459프로의 사람이었다. 치하야는 뒤를 돌아 그 광경을 하릴없이 지켜보았다. 그 뒤로 마츠리와 줄리아 역시 시선을 고정했다. 겁먹은 에밀리 옆으론 후카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토닥여주었다.


 “어-. 거기. 키사라기 치하야. 착한 중소 프로덕션 코스프레는 다 쳐 하면서 지금 하는 그 행위들은 대기업의 횡포라고 생각하지 않아?”


 주변의 말림에도 아랑곳 않고 삿대질하며 공격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치하야는 피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그가 오길 기다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이 사나워졌다.


 “먼저 저희를 건드린 건 그 쪽이었습니다.”


 “우린 이런 꼼수를 부리지 않았어. 정정당당히 주최측에 부탁했고, 받아들여진 거라고.”


 “저희 역시 꼼수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 할 뿐입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거야?”


 “순리대로 진행되었으면 애초에 이런 번거로움도 없었을 겁니다.”


 “네 그 진부한 이미지가 언제까지 먹힐 수 있을 것 같아?”


 저 사람 대체 뭐라는 거야? 줄리아가 한 걸음 앞으로 내딛었다. 마츠리가 그런 줄리아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마츠!”


 “기다리는 거예요. 우린 나설 수 없어요.”


 마츠리는 정색하며 말했다. 줄리아는 강하게 자신의 뒤통수를 한 번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화를 다스렸다.


 “이미지를 만든 건 나일 수 있지만 이미지를 유지하는 건 내가 아닙니다. 제게 쌓인 이미지의 틀에 갇히지도 않을 겁니다. 정말로 그 쪽의 아이돌이 뛰어나다면 이미지가 아니라 실력으로 상대하세요. 그리고 제 이미지를 함부로 단정 짓지 말아주세요. 저의 유닛을 끼워팔기라고 격하시키지도 마세요. 이 또한 바로 키사라기 치하야입니다.”


 치하야는 차분하고 침착한 어조로 흥분한 상대에게 대응했다. 그저 흥미와 관심 정도로 이 두 사람 간의 신경전을 구경하던 주변의 시선이 소란을 피우던 상대를 적대시하는 시선으로 바뀌고 있었다. 여기서 소란피우시면 안 됩니다. 한참 지나서야 온 안전요원들이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두고 볼 거야. 공연이 끝나서도 그렇게 나올 수 있나 보자고.”


 대꾸하지 않았다. 옷을 털며 뒤돌아서는 상대의 뒷모습을 치하야는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치하, 괜찮아?”


 줄리아가 치하야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응. 괜찮아. 치하야는 즉각적으로 답하며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줄리아는 바로 치하야의 뒤를 따랐고, 마츠리는 한 번 복도를 두리번거린 후 대기실 안으로 들어오며 문을 닫았다. 잔뜩 움츠린 에밀리가 눈에 들어왔다. 원래대로라면 이 네 사람들은 오늘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극장에서 극장 공연의 연습에 열을 올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험한 꼴 같은 걸 당하지 않아도 되었다.


 “여러분. 죄송해요.”


 “호? 전혀요. 왜 치하야쨩의 사과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는걸요?


 고개를 숙인 치하야를 바로 일으킨 건 마츠리였다.


 “도쿠가와씨.”


 “설사 지금 우리가 이 무대에 오르는 것이 오로지 치하야쨩을 위한 이유라 하더라도, 전혀 사과 할 필요 없는 거예요.”


 이미 이들은 자신들이 이 무대에 어떠한 이유로 출연하게 되었는지 알고 있었다. 치하야는 무대에 서기까지의 경로에, 도움의 손길을 받지 않은 과정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게 만든 환경을 원망해 봤자, 이제 남은 건 무대에 서는 일 밖에 없었다. 성공적인 무대의 마무리를 위하겠다는 다짐을 다시 상기했다. 그리고 그 마무리의 결과가 향해야 할 곳을 찾아냈다. 나를 위한 무대였지만, 나만을 위한 무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


 현장의 열기는 뜨거웠다. 내로라하는 아이돌 가수들이 집합한 공연이니만큼 열성적인 팬덤이 가득 메운 관객석은 쉽게 접할 수 없는 볼거리이기도 했다. 생방송으로 송출되는 무대. 포털사이트나 SNS을 통해 실시간으로 오르내리는 즉각적인 반응. 솔로의 공연이든, 유닛의 공연이든 한 팀의 공연이 끝날 때 마다 매번 화제의 키워드를 갈아치우고 있었다. 점차 순번이 다가올수록 긴장감이 서서히 치솟았다. 다른 여느 때처럼의 무대일 수 없다는 부담감이 점차 표출되려 하는 것 같았다. 조금 나중에 등장할 이터널 하모니의 멤버들은 무대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처음 홀로 등장하게 될 치하야는 무대의 밑, 리프트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쪼그리고 앉아 튀어 올라갈 준비를 마친 치하야의 뒤로 리츠코가 다가갔다. 쿵쿵거리는 현장음에 치하야에게 전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그렇기에 리츠코는 주먹 가득 힘을 실어 그를 치하야의 시선으로 뻗었다. 그를 본 치하야는 마찬가지로 주먹을 말아 쥐며 파이팅의 포즈를 취했다. 사회자의 마이크소리가 에코를 따라 퍼져 웅웅거렸다. 그 와중에도 ‘청춘, 청량한 한 때’라는 문장은 귀에 쏙 박혀 들어갔다. 다음은 765프로. 키사라기 치하야의 무대입니다. 소개 문구 후 3초가 지나면 리프트가 올라간다. 셋, 둘, 하나. 사인에 맞춰서 치하야는 튕겨 오르듯 무대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


 탁 트인 무대 위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장관이었다. 단합되지 않은 라이트봉의 색들이 타워 위에서 바라보는 야경마냥 흩어졌다. 벌써부터 펜라이트가 좌우로 느리게 움직이는 걸 보니, 관객들 또한 치하야 하면 떠오르는 음악이 관계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나보다. 그리고 치하야는 그 편견에 맞서 섰다. 노래의 전주가 흘러 나왔다. 박자에 맞지 않아 우왕좌왕 거리던 라이트가 가사가 나오기 직전 즈음 맞춰 들어갔다.


 곱씹은 어제는 내가 나로 있기 위한 증거

 눈물을 잊은 척 했어


 희망찬 멜로디에, 성장을 표한 가사가 치하야의 음색을 타고 무대를 메우고 전파에 올랐다. 기교가 가득한 발성이 아니기에 목소리의 들어간 힘이 더욱 힘차게 뻗어 나갔다. 장르를 심하게 탈 것 같은 치하야의 음색은 장르를 파괴하지도, 장르에 묻히지도 않았다. 움직임에 있어서는 비교적 정적이었으나 평소 알고 있었던 치하야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느낌의 노래를 미소 지으며 부르는 치하야 그 자체가 주는 센세이션이 엄청났다. 전광판에 봉을 흔들다 입을 벌리고 감상 모드에 빠진 관객들의 모습이 여러 번 비춰지기도 했다. 그 기운을 그대로 이으며 노래는 끝을 향해 달려갔다. 2절이 끝나고 간주 부분에 돌입하자 치하야는 돌연 뒤를 돌아 마이크를 쥐지 않은 한 손을 날개처럼 펼쳐 들었다. 그 신호에 맞춰서 무대의 뒤가 열리며 4명의 인원이 마이크를 쥐며 걸어 나왔다. 무대의 2층에서 각자 열을 맞춘 네 사람은 노래가 다시 시작되는 타이밍에 맞춰 마이크를 올렸다. 치하야 또한 타이밍에 맞춰 다시 관객들을 바라보았다.


 그래, 마치 억지로 입혀진 드레스처럼

 답답하다고, 이 마음이 외치고 있어

 꾸밈도, 거짓도, 망설임까지 벗어던지고

 아름답고 강하게 빛나는 이 세계에서


 네 사람이 쌓아주는 화음을 받아 메인 멜로디에 가사를 입혔다. 처한 상황과 가사의 상관관계가 찰싹 맞아 떨어지고 있다는 잡념이 잠시 스쳤다. 그 동안의 무대들을 떠올린다. 765프로의 가희, 사연을 딛고 일어난 보컬리스트, 그 밖의 여러 네타들. 활동하는 시간들이 쌓이며 모르는 사이 굳어져버린 치하야의 이미지. 그 이미지가 무대를 이루는 데에 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요 며칠간의 사투. 언젠가는 분명 오늘의 이 무대도 치하야를 이루는 하나의 이미지가 되겠지. 그 때는 또 그 때의 치하야의 이미지를 탈피하려 노력할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는 나중의 문제다. 지금 당장은 나에게, 멤버들에게, 765프로에게 탄생할 또 하나의 서사를 만들면 그 뿐이다. 노래는 끝에 다다르고 있었다. 반복되는 가사를 화음으로 넣어주는 멤버들의 목소리 위로


 just be myself-----!!


 치하야는 곧게 내질렀다. 그렇게 턴을 마치자 공연장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와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만족할만한 고음은 희열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으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 치하야는 무대의 뒤로 몇 걸음 걸었다. 그에 맞춰 뒤에서 코러스를 맞춰주던 멤버들이 치하야의 곁으로 섰다. 치하야는 양 옆에 둘씩 선 멤버들에게 번갈아 눈짓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이터널 하모니입니다-!


 유닛명 소개와 함께 바로 두 번째 음악이 흘렀다. 청아한 멜로디를 바로 뒷받침하며 다섯 명의 하모니가 조화를 이뤘다. 한데 뭉쳤다가, 흩어졌다가, 동선을 바꿨다가, 제자리를 찾았다가. 관객들도 슬슬 이들이 만들어가는 조화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각계 팬층의 가지각색 응원 봉들의 색이 파랗게 물들며 파도쳤다. 적당히 선선한 여름의 밤 아래 바다가 상쾌하게 넘실거리는 것 같았다. 그 바닷바람을 맞으며 다섯 사람들은 열심히 무대를 휘저었다. 버닝 하트! 하이호-! 킬링 파트에 대한 호응도 좋았다. 노래는 힘차게 달려 나가, 간주 부분이 다가왔다. 치하야를 필두로 브이 대형을 만든 다섯 사람은 짧은 군무를 선보였다. 그와 함께 터지는 폭죽이 여름밤을 수놓았다. 가사 그대로 터질 것 같은 두근거림이 엔돌핀처럼 온 몸을 휘감았다. 빠르게 몰아친 하모니가 끝을 알리자 다시 한 번 폭죽이 터졌다. 푸른색의 빛깔들이 함성을 쏟아냈다. 어느 순간부터 잡념이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지금 치하야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건 온갖 자극들이 맞부딪치는 짜릿한 감각이었다. 치하야는 자신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무대의 쾌감이 주는 자극에 몸서리쳤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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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시간 트렌드 1위. 화제의 키워드 1위. 실시간 급상승 동영상 1위. 즉각적으로 반응을 얻을 수 있는 부분에서 치하야의 무대는 화제성을 집어삼켰다고 표현할 정도로 뜨거웠다. 그 후의 솔로 엔딩 무대, 그리고 출연진 모두가 함께 펼치는 집단 엔딩 무대도 치하야의 화제성을 따라잡지 못했다. 대기실에서 반응들을 모니터링 하던 멤버들은 쉬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내내 무대 뒤에서 긴장의 끈을 놓지 못했던 리츠코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야. 역시. 치하야 실력은 무시 못 한다니까."


 리츠코의 말에 치하야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무대 끝나니까 좀 어때?"


 "그러게."


 무대에서는 아드레날린이 정수리를 뚫고 터져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그 흥분은 놀랄 정도로 금방 잠잠해졌다. 흥분하고 있는 객관적인 성과들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것 같은 기분이 일었다. 이건 그러니까, 그거같다.


 "실감이 잘 안나."


 간만이었다. 방금 전에 피로한 무대였음에도 현실감이 없었다.


 "호? 그건 한 마디로 정말 흥분했던 거 아닐까요?"


 마츠리가 한 마디로 정리했다. 정말 그런 걸까. 침착한 게 아니라, 도리어 아직도 심장이 날뛰고 있는 걸까.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의 박동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내달리고 있었다.


 "치하, 아마 내일 기사 같은 거 보면 그제야 좀 느껴지지 않을까?"


 "저, 저는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게... 으으."


 "그러게. 두근거리는데, 막상 기억하려니 기억이 잘 안 나네."


 줄리아와 에밀리, 후카의 말을 차례대로 들으며 치하야는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손이 미세하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몸을 이루는 신체조각들이 제 위치에서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공연 후의 흥분을 달래고 있다는 결론을 낸 치하야는 잠시 양해를 구하고 대기실 밖으로 나갔다. 수많은 공연 관계자들이 무대의 뒤편을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발길 가는 대로 가자 도착한 곳은 무대의 뒤편이었다. 공연하면서 봤던 파란 물결이 썰물처럼 빠져버린 관객석은 공허했다.


 "저기."


 모르는 목소리였다. 치하야는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았다.


 "사쿠사 미치로라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를 받았다. 기사 속 이름으로만 접하던 존재의 실물이 눈앞에 서 있자 다른 의미로 현실감이 없었다. 평소와 다름없을 무수한 스케줄 중 하나를 특별하게 만들어버린 실체. 하지만 그 역시 결국엔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동반자였다. 왜소한 체격이지만, 빛나는 눈빛을 치하야는 순수하게 마주했다.


 "과정에 안 좋은 마찰이 있었던 걸 알아요. 하지만 소속된 사람으로서 제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어찌되었든 주어진 무대에 서 공연하는 것. 그 뿐이었어요."


 "이해할 수 있어요."


 "정말 이해하실 수 있는 건가요? 어쨌든 승부로 따진다면 저는 오늘 완벽하게 키사라기씨에게 졌으니까요."


 무대의 기억이 휘발 된 지금으로서는 사쿠사의 말에 선뜻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치하야는 답을 하지 않는 대신 그 눈을 깊이 바라보았다.


 "저는 키사라기씨에겐 오로지 슬프고, 사연있는 애절한 이미지만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주변에서 말해왔고, 그를 믿었죠. 오늘의 키사라기씨에게는 전혀 볼 수 없었어요. 비결이 뭔가요?"


 비결이라. 그는 먼 곳에서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 이미지에 묶인 저를 풀어주려 애쓴 이의 도움이 있었죠."


 "도움이라면 프로듀서를 뜻하는 건가요?"


 "그럴까요? 프로듀서이기도, 동료이기도요."


 "제가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시는군요. 아무래도 좋아요. 저의 목표는 키사라기씨입니다. 그렇기에 이번 무대에 서는 과정에서 있었던 저희 사무소의 무례함에 대해서는 제가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언젠가는 키사라기씨를 이겨볼겁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멀어져가는 사쿠사의 뒷모습을 보며 치하야는 알 수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무소는 거지같아도, 소속된 아이돌은 괜찮은 모양이네."


 리츠코였다. 치하야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의 의미기도 했지만 생각을 떨치기 위한 행동이기도 했다. 사무소의 방향과 자신의 신념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경우를 많이 봐 왔다. 지금 저 아이가 딱 그러한 경우인 것 같았다.


 "치하야. 저 아이 입장에서는 우리가 악역 같은 포지션일까?"


 "악역같은 포지션?"


 "그런 말을 했었거든. 저쪽 프로듀서한테. 우리를 밟았으니까, 지뢰가 되어주겠다고."


 "대단한 말을 꺼냈었구나."


 "어느 정도 입지가 생기니까 본의 아니게 공격을 받는 경우가 많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생기게 되지. 우린 우리가 받은 불이익에 대항했을 뿐이지만 그 과정에서 상처 받지 않는 사람이 나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잖아. 대항하지 않았으면 모든 상처는 우리가 짊어졌겠지. 냉정하게 이 과정에서 우리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프로의 세계에 자비란 없다는 걸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아직 치하야에게 누군가에게 좌절을 안기는 당사자가 되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이 일은 하면 할수록 왜 생각해봐야 할 게 많은 걸까. 그저 노래만 불러도 그 자체가 전부였을 때도 있었는데 말이지."


 "뭐, 그렇게 치하야에게 또 하나의 인간적인 이미지가 쌓이는 거 아니겠어?"


 리츠코가 대수롭지 않다는 양 치하야의 팔을 툭 쳤다. 치하야가 황당하게 쳐다보자 리츠코가 천연덕스럽게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다가 진지하게 표정을 굳히며 리츠코가 말을 이었다.


 "이미지. 이미지. 별로 듣고 싶진 않겠지만 지금 치하야가 하나의 틀을 깬 건 시작일지도 몰라. 연차가 쌓여갈수록, 정상에 오래 있을수록 고착화 된 이미지를 깨는 건 어려울 수 있어. 거기에다 치하야를 목표로 하는 새로운 신예들은 무수히 쏟아지겠지. 단단해져야해. 하지만 그만큼 물러져야 해."


 치하야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만족할만한 무대 뒤의 씁쓸함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오늘의 무대는 여러모로 많은 걸 남기고 가는구나 싶었다. 진정으로 마음이 차분해지자 휘발되었던 무대 자체의 기억이 서서히 그려지기 시작했다.


 "리츠코쨩-! 치하야쨩-! 여기 있었구나. 한참 찾았어. 이제 슬슬 여길 나가야 한다고 해!"


 멀찍이서 후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보니 이터널 하모니 멤버들을 대기실에 너무 오래 방치하고 있었다.


 "금방 갈게요!"


 리츠코는 치하야의 손을 잡았다. 자, 잠깐. 리츠코! 치하야의 다급한 외침에도 아랑곳 않고 리츠코는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 덕에 급하게 발동 걸린 치하야는 나풀거리며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리츠코, 그 말을 못했네.


무슨 말?


고맙다는 말. 나보다 아마 리츠코가 제일 고생했겠지.


뭐, 프로듀서로서의 예행연습 정도라 생각한다면 엄청난 경험을 했으니까 퉁치자. 쌤쌤.


하지만 나는 아이돌로서의 리츠코랑도 함께 활동하고 싶다고?


아아. 나도 물론이야. 그래서 이터널 하모니에 대항할 새로운 레전드 데이즈를 만들려고.


푸...풋.... 뭐야.... 크흣... 그거.....후훗.


딱히 말장난이 아닌데도 웃을 거 같더라.


재밌었어. 그런 거 좋거든.


부정 안 하네. 아무튼 프로듀서 오면 원망도 할 겸 축배나 들자. 그래도 의미 깊은 무대였는데 이대로 넘기긴 아까워.


그렇지. 동의해.


아까까지만 해도 센치해져서 난리도 아니더니.


그 땐 그랬는데, 아무래도 좋아졌어.


그래. 그 마인드로 가자. 결국 우리가 일하는 이 바닥이 그런 거 아니겠어?


그렇지. 응. 맞아. 그런거겠지.



............


사무소를 대표하는 선배이자, 업계에 입지가 있는 아이돌이라면 이런 일을 겪을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싶어 써 보게 된 글입니다. 괜찮았으면 좋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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