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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는 숲속의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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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15, 2016 22:09에 작성됨.

 아마미 하루카는 톱 아이돌이다. 아니, 톱 아이돌이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얼마 전 큰 사고를 당했고, 대수술을 받았으며, 그리고 회복중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하루카가 다시 톱 아이돌의 위치로 돌아올 것이라 확신하지 못했다.
 그것은 키사라기 치하야도 마찬가지였다. 하루카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누구보다도 그녀에게 구원받은 소녀. 그녀가 하루카의 병실에 찾아올 때마다 마주한 것은 절망이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하루카와, 옆에서 규칙적인 소리를 내는 뭔지 모를 기계들과, 하얗고 가느다란 팔에 어울리지 않는 비닐관. 두 눈은 감긴 채, 조용히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는 폐.
하루카가 잠들고 나서……1개월이 지났다.


 그것은 중요한 라이브가 있던 날의 일이었다. 라이브는 대성공이었고 사무소 사람들 모두가 모여 파티를 했다. 계절은 따스한 봄. 하루카의 생일이 목전이었다.
 파티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 치하야는 만발한 벚꽃을 공원 입구에서 올려다보았다. 하루카가 함께였다. 어슴푸레한 가로등 불빛에 유난히 밝게 빛나는 하얀 꽃잎. 그리고 그녀 옆에는, 화려한 벚꽃에 지지 않는 따스한 꽃이 피어 있었다.
 "하루카, 왜 웃어?"
 "아니, 그냥. 치하야 짱이 먼저 말을 꺼내다니 별 일도 다 있구나 싶어서."
 벚꽃을 보러 공원에 가자. 그렇게 말한 건 치하야였다. 밤 늦은 시간. 아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하루카가 탈 전철이 끊길 것이다. 하지만 하루카는, 그렇게 되면 그건 그것대로 괜찮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벚꽃은 금방 져 버리잖아. 놓치긴 아쉬워서. 그리고……."
 치하야는 어깨에 맨 가방에서 한 봉투를 꺼냈다. 비닐 포장지로 된, 손바닥 정도 크기의 봉투. 철끈으로 묶인 포장지 끄트머리는 핑킹 가위로 자른 것처럼 삐죽삐죽했다. 반투명한 포장지 너머로 비치는 그것은, 하루카에게 아주 익숙한 것이었다.
 "생일 축하해, 하루카."
 "어, 아직 내 생일은 이틀이나 남았는걸."
 "나도 알아. 내일부터 일이 바빠서 오늘밖에 시간이 안 될 것 같았어."
 하루카는 치하야가 건네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들여다보니 역시 쿠키였다. 하지만 어쩐지 모양이 엉성한 게 파는 물건은 아니었다.
 "쿠키를 좀 구워 봤어. 그나마 잘 된 것만 포장한 건데……. 역시 하루카처럼 잘 하진 못했어. 그래도 일단 먹을만할 거야. 아마도."
 "헤헤, 고마워! 치하야 짱이 만든 거니까 분명 맛있을 거야."
 하루카는 활짝 웃으며 치하야에게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 곧장 철끈 매듭을 풀기 시작했다.
 "어!? 자, 잠깐만, 하루카. 지금 바로 먹는 거야?"
 "응? 그야 치하야 짱이 준 거니까 바로 먹어야지. 잘 먹겠습니다~."
 당황하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치하야를 내버려 두고, 하루카는 쿠키 하나를 꺼내 베어물었다.
 대체 어느 부분에서 실수했는지 익은 정도도 촉촉함도 제각각인 쿠키. 재료가 뭉쳐 있기도 하고, 가장자리가 거뭇 거뭇 하기도 하고. 잘 된 것만 포장했다고 했으니, 이것 말고도 굉장히 많은 실패작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결점 투성이 쿠키에 담긴 마음이, 하루카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생일 선물이었다.
 "응, 맛있어! 역시 치하야 짱!"
 "노, 놀리지 마. 제대로 안 된 거 스스로도 알고 있어."
 "아니라니까~."
 하루카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쿠키를 하나 더 입에 넣었다. 그리고 슬쩍 손목시계를 보고 싱글벙글한 웃음을 씁쓸한 미소로 바꾸었다.
 "미안해, 치하야 짱. 슬슬 안 가면 막차가……."
 "으응, 괜찮아. 피곤했을 텐데 괜히 불러서 미안. 역까지 바래다 줄까?"
 "아냐, 치하야 짱도 피곤할 거 아냐. 쿠키 정말 고마워. 나중에 보자!"
 이쪽을 돌아보고 걸으면서 "집에 가는 길에 다 먹어 버려야지~" 하고 웃는 하루카를 향해 치하야는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자주 넘어지니까 걱정되기도 했지만, 넘어지는 데에 익숙한 만큼 일어서는 것도 빠르다. 오늘처럼 늦게 집에 가는 것도 빈번히 있는 일이다. 오늘도 그저 수많은 하루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분명 그랬을 터였다.
 하지만 설마 했던 대로 하루카는 넘어졌고, 하필이면 넘어진 쪽은 차도였고, 넘어지면서 굴러간 쿠키 봉투를 줍느라 하루카는 일어서는 게 늦고 말았다. 하루카를 향해 강렬한 헤드라이트가 비쳤다. 밤 늦은 시각, 인적 없는 공원 앞. 횡단보도와는 조금 떨어진 곳. 치하야가 숨을 삼켰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하루카!!"
 아마미 하루카는 피투성이가 되어 도로 위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하루카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고, 온 몸에 붕대와 깁스를 두른 채로 침대 위에서 가만히 자고 있다. 며칠이고 며칠이고.
 치하야는 거의 매일, 일이 면회 시간 안에 끝나지 않았을 때를 빼놓고는 늘 하루카의 병실에 찾아왔다. 대체 얼마나 더 이 괴로운 광경을 지켜보아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하루카가 사고를 당한 게 자신 때문이란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가 공원에 가잔 말을 꺼내지 않았으면. 쿠키 같은 선물을 하지 않았으면. 하루카를 역까지 배웅해 주었으면.
그런 후회와 죄책감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하루카는 운이 나쁘게도 어깨와 머리를 치였다. 쿠키 봉투를 줍고 일어나려다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횡단보도에서 떨어진 곳이었기에, 트럭이 뒤늦게 하루카를 발견하고 감속했을 땐 이미 늦었다. 원래 인적이 드문 곳인 데다 밤 늦게였으니 운전자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하루카는 세게 치여 날아갔고, 직접 치인 어깨와 머리 뿐만 아니라 전신에 큰 부상을 입었다.
 그대로 응급실에 실려가 의사도 생존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수술을 받고, 하루카는 일단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녀는 계속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한 달이 지나 몸의 상처는 어느 정도 나아졌지만,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1주일, 2주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치하야의 슬픔과 절망은 커져 갔다. 그녀는 이미 한 번 소중한 사람을 사고로 잃었다. 사고는 이제 지긋지긋했다. 도대체 왜 자신은 소중한 사람을 또 잃어야 한단 말인가.
 "하루카……"
 기계 소리만 울리는 병실에, 치하야의 목소리가 조그맣게 퍼졌다.


 나는 숲속에 있었다.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와 그 바닥을 수북이 메운 풀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버거울 정도로 녹음이 우거진 곳이었다.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숲속을 걸었다. 낮인지 밤인지도 알 수 없을 만큼 어두침침한 숲속. 한참을 걸어도 보이는 것은 비슷비슷한 풍경 뿐, 특별한 것은 없었다.
 아마도 하루 종일 걸었을 텐데도 나는 지치지 않았다. 피곤하지도 않았다. 피로 대신 수많은 의문이 몰려왔다.
나는 대체 왜 이런 곳에 있는 걸까. 평소에는 뭘 하고 지냈더라. 나는 어떤 사람이었더라. 나는…….
 "어라."
 거기서 처음으로 발을 멈추고 목소리를 냈다. 누구도 듣는 사람이 없으니 생각만 하나 입에 올리나 차이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난, 마치 자기 자신에게 들려주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는 누구였더라?"
 생각나지 않는다. 이름도, 나이도, 고향도.
 떠올릴 수 없다. 가족들도, 친구들도.
 생각해 내려고 하면 할 수록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기억들.
 이 숲에 들어와서 한참이나 시간이 지났지만,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어두운 숲보다 자신이 정체불명이란 것이 훨씬 무서웠다. 나는 공포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오한이 멈추지 않았다.
 그 때, 눈앞에 빛이 보였다. 어둠 뿐인 이 숲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무언가. 빛은 점점 내 가까이로 다가왔다.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오자 그것이 빛나는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소녀는 내 눈앞까지 와서 멈춰 섰다.
 "……너는 누구야?"
 소녀는 대답하지 않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모르게 맞잡은 손. 햇살처럼 따뜻하면서도 약간 서늘한 손.
 "같이 이 숲을 빠져나가자."
 소녀는 그렇게 말하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일어서서 보니 소녀는 나보다도 키가 컸다.
 "이 숲에서 나가는 법을 알아?"
 "아무것도 걱정 안 해도 돼. 너는 너야. 너 그대로 있으면 돼. 너는 내가 지킬 테니까."
 여전히 소녀는 동문서답이었지만, 어쩐지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늘 내게 용기를 주었던 목소리. 누구 목소리였더라.
 "자, 가자."
 소녀가 앞에서 내 손을 잡아 끌었다. 나는 맞잡은 손에 힘을 주고, 소녀 뒤를 따라갔다.


 키사라기 치하야는 모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정확히는, 모든 일과 병문안을 마치고. 저녁을 먹을 기분도 들지 않아서 가방을 대충 던져두고 침대에 눕는다. 눕자마자 피로가 몰려와 모든 의욕을 몰아내 버렸다.
 오늘도 하루카는 눈을 뜨지 않았다.
 벌써 며칠이나 지났을까.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그 날. 하지만 지금은 벚꽃은 모두 져 버렸고, 햇살은 점점 더 강해져 낮에는 반팔을 입어야 할 정도다. 그런 시간의 변화를 알려 주는 것들이, 지금의 그녀에겐 무척이나 아팠다.
 치하야는 무리를 하고 있었다. 소중한 친구가 사고를 당한 것은 물론 괴로웠지만 그것으로 인해 주변에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가면을 쓰고, 상처를 숨기고. 자신만 감내하면 될 일이라 믿었다. 어떤 일에서도 실수하지 읺았고 레슨도 평소 이상으로 열심히 했다. 모두가 그녀를 장하게 여겼다.
 하지만 오늘 유키호에게 걱정어린 응원을 듣고 말았다. 동료에게 걱정을 들었다는 게 아니라, 자신의 무리를 다른 사람이 눈치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는데.
 또다. 또 자신은 이렇게나 무력하다. 무엇 하나 마음먹은 대로 되질 않는다. 유가 사고를 당했을 때도, 부모님이 다투기 시작했을 때도, 결국 이혼하게 되었을 때도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인생이 부서져 가는 와중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무력하게 바라볼 뿐.
 이번에도 그렇다. 하루카는 병원에서 누워 있기만 할 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나마 동료들이 괜히 신경 쓰지 않게 괜찮은 척 연기를 하려 해도, 그것조차 잘 되지 않았다. 애초에 파티가 끝난 늦은 시간에 굳이 공원에 갈 필요는 없었다. 쿠키 같은 건 생일이 지나서 줘도 됐고, 벚꽃도 며칠은 더 피어 있었을 것이다. 굳지 하지 않아도 됐을 일을 해서, 나 때문에, 하루카는――
 "……윽."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벌써 이걸로 몇 번째일까.
 그녀는 완전히 자각하고 말았다. 무리해서 괜찮은 척을 하는 것도 한계에 이르렀단 것을.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지쳐 버렸다. 도저히 내일 평소처럼 일을 할 자신이 없었다.
 이대로라면 자신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치하야는 거칠게 눈물을 훔쳤다. 자신은 그것을 인정해선 안 됐다. 키사라기 치하야는 괜찮다고, 혼자서라도 내일로 걸어나갈 수 있다고 모두에게 증명해야 한다.
 증명해야 하는데.
 "크, 흑…."
 눈물은 멈춰 주지 않았다. 닦아내면 닦아낼수록 북받쳐오르는 감정에 가슴이 옥죄는 것 같았다.
 결국 그녀는 소리내서 울기 시작했다. 눈을 뜨지 않는 하루카도. 진심으로 걱정의 눈빛을 보내던 유키호도. 말은 안 하지만 스케줄에 신경을 써 주는 프로듀서도. 전부 전부 눈물에 녹아 사라져 버리면 좋을 텐데.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도록. 아파하지 않아도 되도록.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은 또 얼마나 이기적인가.
 치하야는 그렇게 동이 틀 때까지 계속해서 울었다.


 "얼마나 더 가야 해?"
 "……."
 소녀는 여전히 내 말에 대답해주지 않았다. 묵묵히 숲길을 걷기 시작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은 보이지도 않고 밝기도 변하질 않으니 시간을 짐작할 수가 없다.
 누군가를 만나 바뀌었다고 생각했던 상황이 사실은 전혀 바뀐 게 없다는 걸 깨닫고 한숨을 쉬었을 때였다. 갑자기 소녀가 말을 걸어왔다.
 "있잖아. 미로는 왜 있는 거라고 생각해?"
 "응? 미로? 글쎄……."
 그 말은 내용도 정말 갑작스러웠다.
 미로라고 하면, 보통은 유희를 위한 거라고 생각한다. 종이에 그려진 길찾기 게임이나, 유원지 같은 데에 설치된 큰 미로 같은 거. 아니면 방해물. 발을 묶어두거나, 게임 난이도를 올리거나. 그런 게 아닐까.
 하지만 그녀가 말한 해답은 내 생각과는 조금 달랐다.
 "미로는 있지, 사실 뭔가를 가두기 위한 거야. 한 번 들어오면 빠져나가지 못하게."
 "그, 그렇구나."
 "그리고……이 숲도 그렇지."
 "응?"
 소녀는 조금 쓸쓸한 미소를 짓고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이 숲도 그렇다는 말은, 이 숲도 뭔가를 가두기 위한 곳이란 말일까. 하지만 뭘? 이 숲에는 아무것도 없다. 있는 것이라봤자 수많은 나무, 풀, 그리고――
 "……나?"
 아니, 어쩌면 소녀일지도 모른다. 둘 다일지도 모르고.
 하지만 소녀는 숲을, 미로를 빠져나가자고 했다.
 "……넌 소중한 사람이 있어?"
 다음 질문도 마찬가지로 갑작스러웠다.
 안타깝게도 지금 나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소중한 사람이 있었는지 없었는지조차.
 "기억 안 나."
 "그래. 하지만 분명 있었을 거야. 네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널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나도 그렇고."
 "넌 날 알아?"
 "알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에 대한 단서가 나왔다. 이 숲에 오기 전의 나도 알고 있는 걸까.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얘기해 주는 걸까.
 하지만 그녀는 내 바람과는 다른 말을 한다.
 "그래도 내가 얘기해 줄 수는 없어. 미안."
 "그…렇구나."
 실망에 찬 내 대답에 그녀는 부드럽게 웃었다. 못 이기겠다는 듯이.
 "힌트라면 줄게. 넌 있지……. 내 동경의 대상이었어."
 "동경? 내가?"
 "응. 넌 내가 못 가진 걸 많이 갖고 있었거든……."
 힌트라고 했지만 더 잘 모르게 돼버렸다. 그녀가 갖지 못한 것. 갖고 있는 것도 모르는데 갖지 못한 걸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 딱 하나.
 "……있잖아, 왠지 말야. 네 목소리를 들은 적 있는 것 같아. 기억 안 나지만."
 소녀는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소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질문을 던진다.
 "그거, 말곤?"
 "음……."
 잠시 생각을 해 본다.
 소녀가 나를 알고 있다면, 나도 소녀를 알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나보다 조금 큰 키. 가녀린 실루엣. 예쁜 아몬드형 눈. 등까지 오는 깨끗한 생머리. 조금 서늘한 손. 그리고 편안한 목소리. 목소리――
 '――――카!!'
 "어?"
 누군가가 나를 부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평소와는 다른 절박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하지만 나는 그 외침에 답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잖아. 그야 나는――
 "……저기, 괜찮아?"
 "……아."
 소녀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나는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너무 생각에 몰두한 것 같다. 뭔가 기억날 것 같았는데.
 "일단 마저 걷자."
 그렇게 말하고 소녀는 다시 내 손을 잡아 끌었다.


 다음날. 치하야는 결국 스케줄을 펑크내고 말았다. 도저히 아이돌로서 남들 앞에 설 수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목도 부었다. 일을 못 나가겠다는 전화를 받은 프로듀서는, 그 목소리에서 무언가를 읽었는지 전혀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그저 푹 쉬라는 말 뿐. 어쩌면 유키호에게 뭔가 얘기를 들었는지도 모른다.
 전혀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알 수 없는 의무감에 그녀는 침대에서 기어나왔다.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나갈 채비를 한다. 어차피 이런 얼굴이어서야 아무도 못 알아볼 테지만, 일단은 변장도 한다. 그대로 치하야는 방을 나왔다.
 자연스럽게 발이 향한 곳은 병원이었다. 접수대의 직원들이 딱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런 눈빛도 지금의 그녀에겐 신경쓰이지 않았다.
 병실로 들어가자 변함없이 하루카는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치하야는 하루카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 늘 따뜻했던 손. 언제나 자신을 이끌어 주었던 손. 지금은 붕대에 싸여 있는 손.
 의사는 말했다.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고.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도 각오해 두란 말을 들었었다. 하지만 하루카는 살아남았다. 기적은 일어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기적은 너무했다. 이런 일말의 희망을 남겨놓은 절망뿐일 거라면 기적은 필요 없었다. 그런 건 차라리 일어나지 않는 편이 깔끔하게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어중간한 상황이 더욱 그녀를 내몰고 있었다.
 하루카는 늘 곁에서 치하야를 도와 주었다. 기쁜 일이 있으면 자기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함께 기뻐해 주었고,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진심으로 걱정과 위로를 건넸다. 생일에는 생각지도 않은 지나칠 정도로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치하야가 모든 것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틀어박히려 했을 때 마지막까지 손을 뻗었던 것도 그녀였다. 하루카와 함께라면 결코 순탄치 않은 이 일도 어디까지든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말하자면 그녀에게 하루카는 마음의 버팀목이자 은인, 동경의 대상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었는지도 몰랐다.
 늘 어떻게든 고마움을 표하고 싶었다. 앞으로도 계속 함께 있었으면 했다. 의지하는 만큼 의지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깨닫고 보니 그 사람은 먼 곳으로 가 버렸다.
 벌써 한 달이 넘게 지났다. 어쩌면 이제……아니, 분명 하루카는, 이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하루카……. 윽……."
 또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으며 치하야는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하루카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나 있지, 한 달 동안 정말 괴로웠어. 하루카가 없는 매일 매일이, 너무 괴로웠어……. 네가 이렇게 된 게 꼭 내 잘못 같아서, 남들 앞에선 그런 모습 보이기 싫어서, 그러다 결국 오늘은 일도 빼먹고 널 만나러 오고……. 미안해, 하루카. 미안해……."
 눈물도, 흘러나오는 본심도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하루카는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다. 이건 그저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어도, 말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나, 내일부터는 제대로 할 테니까. 혼자서, 네 도움 없이 잘 해볼 테니까. 그러니까 오늘은, 오늘만은……."
 오늘로 매듭을 짓자. 이 절망에, 의미 없을 희망에, 아름다웠던 추억에.
 이대로 가다간 자신이 망가져버릴 것 같으니까. 이미 한 번 일어난 기적을 다시 한 번 바랄 수는 없으니까. 그런 바람은 죄가 될 테니까. 그러니까.
 소중한 그대에게 작별의 키스를. 모든 것을 끌어안고 날아오를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 소중한 것을 잘라내려는 이기심. 그 모든 것의 속죄를.
 "으흑, 하루카, ……안녕――"
 오열로 잘 나오지 않는 말을 쥐어짜내고, 그녀는 하루카의 입술에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그 후로 소녀는 한 마디도 말이 없었다.
 나는 그녀 뒤를 따라 걸으며 계속 생각했다. 나는 누구인지. 소녀는 누구인지. 목소리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분명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 소녀였을 것 같다. 음색이 같으니까. 하지만 정작 그 소녀는 누구였을까. 왜 그런 절박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을까. 나는 왜 대답하지 못했을까.
 나는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다. 하지만 떠올리지 못할 뿐이다. 분명 소중한 기억이었을 텐데.
 그러고 보니, 그 목소리는 내 이름을 불렀다. 자꾸만 흐릿해지는 기억을 더듬어 그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본다. 분명 '카'로 끝나는 이름이었는데. 카…… 카…….
 "……하루, 카?"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소녀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하루카. 그래, 내 이름은 하루카였다. 왜, 어떻게 잊어버리고 있었을까. 그녀가 몇 번이고 어울린다고 칭찬해주었던 이름. 봄 향기, 하루카. 그러면 나는 배시시 웃으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다. '안 그렇다니까~. 난 ――짱 이름도 좋은데.'
 "……아."
 기억났다. 소녀의 이름도. 소녀와 나의 관계도. 한 번 떠오르기 시작한 기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른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함께 섰던 빛나는 무대. 함께 벚꽃을 올려다보았던 공원. 그리고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하지만.
 이건 너무하다.
 소녀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 눈에는 긴장이 서려 있었다.
 "기억, 났어?"
 "응. 전부 다."
 "그래……."
 그녀는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시선을 떨구었다. 무척이나 면목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게 아니다. 난 그녀가 이런 표정을 짓길 바라지 않는다.
 "이 숲은 있지, 내가 만든 거야. 널 잃고 싶지 않아서. 도저히 널 놓아줄 수 없었어."
 "……응."
 "기적을 일으키는 데에는 대가가 필요했어. 어쩌면 나 자신을 전부 희생했더라면 네가 이런 고생을 할 필요도 없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난 그렇게 강하지 못했으니까……. 미안해. 너한테 폐를 끼치고 말았어."
 폐라니, 당치도 않다. 분명 난 그녀가 없었으면 이렇게 살아있지조차 못했을 것이다.
 강렬한 헤드라이트. 경적 소리가 들렸을 땐 난 이미 몸이 얼어붙은 후였다. 직후에 온몸에 강렬한 충격. 그녀가 나를 부르는 절박한 소리. 원래대로라면 난 거기서 죽을 게 분명했다.
 한 발 앞으로 다가가 그녀를 끌어안는다.
 "아니야, 고마워. 날 구해 줘서. 걱정해 줘서."
 "……응."
 그제서야 그녀는 다시 표정을 되돌렸다. 부드러운 미소. 내가 좋아하는 그녀의 표정.
 "널 구하긴 했지만, 상당히 불완전한 형태로밖에 이룰 수 없었어. 네 기억이 돌아올 거란 보장도 없었고, 네 몸이 회복될 만한 시간도 필요했어. 그리고 시간이 길어질수록 현실의 내가 질 대가도 커지니까……. 원래대로라면 더 오래 널 숲에 묶어 둬야 했는데, 도저히 진짜 내가 버틸 수 없을 것 같았어. 하지만 네가 전부 기억해 냈다면 분명 이제 괜찮을 거야."
 불완전한 형태라도 내게는 그걸로 충분했다. 시간은 좀 걸렸을지 모르지만, 조금 번거로운 형태가 됐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난 여기에 이렇게 살아 있다. 그녀는 분명 그러기 위한 대가를 치뤄 준 것이다. 날 위해서.
 그녀는 끌어안은 팔을 풀고, 오른손을 들어 내 뺨을 쓰다듬었다.
 "있지, 난 이제 가 봐야 해."
 "어?"
 그럴 수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이제야 전부 알았는데. 네 마음을 알았는데.
 "곧 동이 틀 거야. 그러면 난 사라지고, 넌 혼자서 해가 비치는 곳으로 나아가면 돼. 걱정하지 마. 난 사라지더라도, 정말로 내가 사라지는 건 아냐. 꼭 다시 만날 수 있어."
 어둠 뿐이었던 숲에 여명이 밝아온다. 보랏빛에서 붉은 빛으로, 붉은 빛에서 노란 빛으로.
 "네겐 네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어. 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어. 나도 그렇고. 그러니까 괜찮아. 그걸 잊지 마."
 그녀는 왼손을 마저 내 어깨 위에 올리고, 내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아침 햇살이 나무들을 뚫고 비치기 시작한다. 그녀의 윤곽이 흐릿해진다. 빛나는 원피스가 햇살에 녹아들듯이 투명해진다.
 내 눈에서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분명 아침 햇살이 눈부셨기 때문이다.
 "또 만날 수 있지? 그렇지?"
 "물론이지. 이런 마음의 미로가 아니라, 진짜 세계에서."
 그녀는 더이상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깨와 뺨에 분명히 느껴지던 감촉도 사라지고 말았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그녀의 목소리만이 들렸다.
 "하루카, 안녕――"
 "――치하야 짱!"
 푸르게 빛나는 아침의 숲속에 내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나는 잠깐 동안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직접 내 눈을 쬐었지만 눈은 감지 않았다.
 치하야 짱은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 주었다. 그녀의 마음에, 그녀가 구해준 목숨에, 그녀가 치뤄 주었을 대가에 감사를 잊지 않는다.
 나는 걷기 시작한다. 내일을 향해, 빛나는 아침 햇살 너머로.
 어느새인가 숲은 끝나 있었다. 햇살은 점점 강해져, 이윽고 주변은 온통 빛에 휩싸였다.
 이번엔 참지 못하고 나는 눈을 꼭 감았다.


 감았던 눈을 뜨자, 치하야 짱이 눈앞에 있었다. 눈앞이라고 할지, 입이 맞닿아 있었다. 소위 밀하는 입맞춤이라는 상태였다.
 잠시 후, 그녀는 천천히 입술을 떼며 눈을 떴고, 나를 보았다. 그 눈은 그저 놀람으로 크게 뜨인 채 멍하니 나를 바라본다.
 "……치하야 짱?"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서야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침대 옆에 서서 조그맣게 입술을 움직인다. 그 입술은 내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보였다.
 "또 만났네, 에헤헤……."
 온 몸이 아팠다. 팔도 다리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간신히 딱딱한 미소를 짓는 것뿐이었다.
 이 마음은 잘 전해졌을까. 다시 한 번 널 만날 수 있게 해준 이 고마움은. 기쁨은.
 아직 일어나서 이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졸음이 몰려왔다. 아직 안 되는데. 좀 더 전할 말이 있었는데.
 "하루카, 다행이다……."
 치하야 짱, 얼굴이 엉망이야. 금방이라도 울 것 같다. 아니, 이미 많이 운 것 같다. 치하야 짱을 울리다니 못된 사람인걸. 나중에 물어 봐야지.
 하지만 일단은,
 지금 웃고 있으니까 그거면 됐을까――


 하루카가 퇴원한 건 한 달 뒤였다. 눈을 떴던 하루카는 금방 다시 잠들어 버렸다. 의사 말로는 점점 오래 일어나 있게 될 거라고 했고, 그 말대로 보름쯤 지나자 낮잠을 좀 자면 하루 종일 일어나 있을 수 있게 됐다. 평범히 식사도 할 수 있게 됐고, 아직 거동은 불편하지만 재활 치료는 통원으로 해도 된다는 판정을 받았다.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던 것 치고는 무척이나 회복이 빨랐다.
 그렇게 말은 하고 있지만 정작 나는 하루카를 한동안 만나지 못했다. 너무 우는 바람에 목이 쉬어서, 프로듀서와 다른 친구들에 의해 강제 요양형에 처해졌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유키호나 프로듀서 뿐만 아니라 다른 모두도 나를 계속 걱정해주었던 것 같다. 내가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을 뿐이다. 목이 나아진 뒤로는 그동안 밀린 스케줄을 해치우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덕분에 하루카의 상태는 프로듀서에게 전해 들은 게 전부였다.
 그리고 오랜만의, 정말 오랜만의 오프인 오늘. 지금 나는 하루카의 집에서 침대 앞에 앉아 있다. 한동안 휠체어 신세가 된 하루카는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했고, 오늘은 하루카의 부모님께서 일이 생겨서 내가 자진해서 간호를 하기로 했다. 하루카의 부모님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셨지만 난 이렇게라도 그녀를 만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하루카는 침대 위에서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언제나 내게 용기를 주었던, 내가 정말 좋아하는 웃음. 그녀가 다시 내 눈앞에서 미소지어 주는 것이 너무나 기쁘다. 하루카도 오랜만에 나를 만나서 조금이라도 기뻐해 주고 있을까.
 "있잖아, 치하야 짱."
 "왜 그래?"
 "고마워. 날 구해 줘서."
 "구해 줘? 내가? 하루카를?"
 당연하게도 나는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사고를 당했을 때 난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그런데도 하루카는 내게 만면의 웃음을 짓고 고맙다고 말한다.
 "잠들어 있는 동안에 꿈을 꿨는데, 거기서 치하야 짱을 만났어. 치하야 짱이 간절히 바라서 기적을 일으킨 거래. 분명 뭔가 대가를 치뤘다고 했는데……. 그러니까 고마워, 치하야 짱."
 분명 하루카가 살아남은 것도, 다시 깨어난 것도 기적이었다. 게다가 후유증도 남지 않을 거라고 한다. 정말 무서울 정도로 잘 짜여진 기적이다.
 그런데 그 기적이 나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기적의 대가라. 생각해 본다. 지난 두 달 간 내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었던가? 그야 안 좋은 일이라면 잔뜩 있었다. 무엇보다도 하루카가 일어나지 않는 게 가장 아팠다. 그 한 달 동안은 정말 매일 매일 심장을 도려내는 듯 했다. 그러면서도 남들에겐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려서 결국 몸도 마음도 상당히 아슬아슬한 상황까지 갔었다. 마침 맞게 하루카가 일어났기에 망정이지, 아마도 나는 얼마 가지 않아 무언가를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아니, 하루카가 깨어났던 바로 그 날 나는 하루카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던가. 그녀 앞에서 울며 작별의 키스, 를…….
 "치하야 짱? 왜 그래? 얼굴이 빨간데……."
 "아냐! 아무것도 아냐! 응, 나도 하루카가 무사해서 기뻐!"
 속사포로 말하며 얼버무리려는 나를 하루카는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분명 대가로 한동안의 행복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한없는 절망의 늪에서 여태껏 느낀 적 없었던 슬픔을 맛보았다. 그때 느낀 고통이야말로 내가 치룬 대가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하루카가 돌아올 수 있었던 거라면 값싼 대가다. 그리고, 아마도 하나 더.
 "하루카."
 "응~?"
 나를 보고 싱글거리는 무방비한 하루카의 어깨를 잡고, 얼굴을 가까이 가져간다. 하루카는 놀란 것 같았지만 밀어내지도 않았다.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 하루카의 눈은 평소처럼 예뻤다. 내가 잠깐 하루카의 얼굴을 감상하는 동안, 입술과 입술이 맞닿아――
 내가 아니었다. 움직인 건 하루카 쪽이다. 분명 시작한 건 내 쪽이었는데. 나는 당황해서 하루카를 바라보고 있고, 그녀는 여전히 여유만만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아니, 그녀의 뺨도 발그레한 걸 보면 여유롭지는 않은 것 같다.
 "……꿈속에서의 복수야. 에헤헤."
 "대체 무슨 꿈을 꾼 거야."
 그래, 아마도 이 감정은 그 기적의 대가란 녀석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루카를 향한 내 마음이 아주 조금 바뀌어 버린 걸 설명할 수 없으니까. 아마도.
 "……하루카, 살아 줘서 고마워."
 "응, 치하야 짱도 구해 줘서 고마워."
 하루카와 함께라면, 분명 어디까지라도 갈 수 있다. 아무리 험한 길이라도 상관 없이.
 하루카의 손을 잡는다. 여전히 하루카의 손은 따뜻했다. 그 당연한 사실이 지금은 이렇게나 기쁘다.
 "그러고 보면, 저번에 그 쿠키 있잖아."
 "치하야 짱이 줬던 생일 선물?"
 "응, 그거. 결국 하루카가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다 못 먹었잖아. 그래서 또 구워 왔어."
 "어, 진짜?! 왓호이!"
 하루카는 기묘한 환성을 지르며 눈을 빛냈다. 이번에 가져온 쿠키는 저번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안정적인 물건이다. 이번 쿠키를 위해 얼마만큼의 희생이 있었는지는 언급하지 말아 두자.
 역시나 그녀는 내가 쿠키 봉지를 건네자마자 철끈 매듭을 풀고 하나를 꺼내 입안에 넣었다. 쿠키를 씹는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저기, 음식 씹으면서 그러지 마.
 "으으음~! 치하야 짱 대단해! 저번 쿠키보다 훨씬 맛있어졌어!"
 "응, 다행이네. 연습한 보람이 있었어."
 그런데, 내가 구워 와 놓고 좀 그렇지만. 역시 환자는 과자를 멀리하는 게 좋지 않을까. 다음엔 쿠키가 아니라 좀 더 영양 밸런스를 생각한 요리를 만들자.
 그런 아주 평범하고 별것 아닌 생각을 하면서.
 나는 하루카와 함께하는 일상이, 아주 행복하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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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도전해 봤습니다.

새까망숲의 노래와 잠자는 공주가 뒤범벅된 기묘한 이야기.

[이 게시물은 님에 의해 2016-02-16 13:57:06 창작판에서 복사 됨] http://idolmaster.co.kr/bbs/board.php?bo_table=create&wr_id=5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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