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익은 채 끝나버린 여름의 끝에서

댓글: 14 / 조회: 838 / 추천: 1



본문 - 08-25, 2020 00:21에 작성됨.


그대여,

긴 장마의 끝은 가을이었습니다.


어른의 문턱에서 머뭇거리는 아이처럼.

여름이라기엔 너무 늦어버렸고

가을이라기엔 아직 많이 이른 시기.


그대여, 알고 계시나요?


"올해는 정말 비가 많이 왔군요.

전례 없는 장마로 세상이 모두 물에 잠겨버리고 말았습니다."


무심하게 무시무시한 말을 거리낌없이 내뱉는 뉴스 채널도

이미 여름이 사라져버렸다는 사실만은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바라보는 이 없이 꽃들이 피고 진 핀 봄이 아닌 봄날처럼

무더위도 해변도 바캉스도 열대야도 없는 여름아닌 여름날을 보내며


 우리가 시작하기도 전에 끝나버린 것들이

얼마나 많은 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무너져버린 모래성처럼 흐트러져버린 적란운들이

유유히 흘러가는 하늘 아래엔 주목받지 못한 채 떨어진 능소화.


햇살이 내려쬐기도 전에 빗물 젖은 파도만 남긴 채 

아우성도 발자국도 없이 모두가 떠나가버린 백사장.


비가 그치기를 바라며 하나 둘 매달던 맑음이 인형들이

볼품 없이 매달려 있는 창문에는 새카맣게 말라버린 모기 핏자국.


몇 번 타보지도 못한 채 부서진 서핑 보드와

다 마시기도 전에 김이 빠져버린 맥주.


그대도 알다시피, 

그 어느 곳에도 여름은 이제 없습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따르는 것이 인생의 법칙,

그럼에도 돌고 돌아 다시 만나는 것이 자연의 섭리지만


여전히 이별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까닭은

마치 고백도 못한 채 헤어져버린 수줍은 첫사랑처럼


채 속이 익지 않은 수박을 베어물며 바라보고 있자니

힘을 잃어가는 매미 소리가 더욱 애처로운 까닭입니다. 


그대여,

어제는 벽장 속에 묵혀두었던 가을 옷들을

하나 둘 꺼내어 차곡 차곡 정리하다

왠지 모르게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누구를 위한 여름이었나요.

녹아내린 얼음잔은 싸늘하게

식은 땀만 흘릴 뿐 대답이 없습니다.


무엇을 위한 여름날이었나요.

낡은 선풍기는 윙윙거리며 딴청을 피울 뿐

금새 고개를 피하고 마네요.


다 입어보지도 못한 채 다시 어둠 속으로

반팔 셔츠, 반바지, 샌들을 몰아넣으며


멋쩍은 미소로 언젠가 꼭

다시 만날 약속을 하던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실은 '다시 만나자'라는 가벼운 약속이

'영원한 이별'의 또 다른 말이라는 것을

어느새 알게 되었기 때문이겠죠.


그대여, 우린 분명 또 다시 여름을 마주하겠지만

그땐 지금의 여름은 아닐 것입니다.

그 무렵 우린 지금보다 조금은 더 자라있을까요.

아니면 조금 더 늙어있을까요.


그대여,

부디 보시게 된다면 대답해주셔요.


그대의 여름은 뜨거웠나요.


1 여길 눌러 추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