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가 지배하는 계절의 도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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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9-17, 2019 22:33에 작성됨.

 수확의 시기. 


 가을 하늘 아래 벼 이삭들은 탐스럽게 익을수록 겸손히 고개를 숙인다는 오래된 거짓말의 시간이 또 다시 다가왔습니다. 실상은 잘 익은 이삭일수록 가장 먼저 목이 잘려나가는데도 말입니다. 소스라치게 차가워진 바람 속에서 무심히 흘러가는 새털구름. 화들짝 놀라 옷깃을 여미다보면 발치엔 이미 바스라진 잎새들이 한가득이네요.


 생각해보면 지금의 이 별의 시간대에는 제법 여러가지 이름이 별칭으로 붙는군요. '식욕의 계절'이니 '독서의 계절'이니 하는 오래된 경구와 같은 말들은 이미 고유 명사처럼 느껴집니다. 어째서 이런 말들이 생겨난 것인지 늘 궁금증이 들었지만 뾰족한 해답은 없군요. 단지 다른 시기보다 먹거리가 풍부해지고 보다 책을 읽기에 한층 여유가 생기는 시기라기엔 이치에 맞지 않는 점이 한둘이 아니네요.


 계절의 풍물시를 음미하며 지내온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딱히 가을만이 더욱 특별한 순간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봄이면 봄이어서 좋았던 것들이, 여름이면 여름이어서 좋았던 것들이 너무나도 많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만 되면 확실히 짧아진 낮의 길이 탓인지, 더욱 감성에 젖는 순간들이 많아지는 건 사실이군요. 차가 더욱 맛있어지는 시점이기도 하고요.   


 '독서의 가을'이라기엔, 최근 무언가를 읽어본 것이 희미한 감각만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씁쓸하게 느껴집니다. 언제부턴가 활자가 전해주는 이야기들의 한계와 여러 매체들과 비교했을 때의 진부함에 염증을 느껴서였을까요. 단순히 '시간이 없어서', '게을러서' 독서를 안 한 것이라면 차라리 좋겠습니다만, 책들이 주는 즐거움이 퇴색되어버린 감이 없지 않습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글자'들의 감옥 속에서 살고 있는 셈이 아니던가요. 물론 독서는 누군가에겐 여전히 유익하고, 필요한 일이겠지만, 이토록 멋진 가을날에 유독 책상 앞으로 사람들을 붙잡아두는 건 왠지 모를 '음모'와 같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가을날을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독차지 하고 싶어하는 부류들의 음모라거나...말도 안되는 이야기겠지만요.  


 예전부터 '독서의 주간' 처럼 특정 시간을 강제로 '독서'에 할애해야 한다는 운동은 그다지 정감이가지 않았는데 최근에는 더욱 공감이 되지 않는군요. 이 별에서의 삶을 읽어나가기도 바빠져서 다른 무언가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서부터 일까요. 머릿 속이 자기만의 시간들로 가득차서 타인의 생각은 받아들일 여유가 충분치 않아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독서만으로 삶의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순진한 생각은 오래전에 버려버렸답니다. 


 그대신 책상을 물리고 밖으로 나가 세상을 조금 더 가까이서 바라보는 일은 꽤나 유쾌하네요. 거창하게 '여행'이라기엔 조금 어설픈 산책같기도 하지만 그 어디든 '활자'로부터 해방되어 두 눈을 구속하지 않는 곳이라면 절로 두 발을 움직여 걸어보고 싶어집니다.


 도시 근교의 공원에서 피처럼 붉은 잎들을 뚝뚝 떨어뜨리는 단풍이 일상 속으로 침략하는 모습도, 피서객들이 모두 떠나버린 해변에서 남겨진 쓰레기들을 혼자 남은 파도가 가지고 노는 모습도, 하루가 다르게 사람들의 복장이 몰라보게 달라져가는 풍경들도 오직 이 시기에만 볼 수 있는 것들일테니까요. 페이지 속에 눈을 가두어 둔 채 방에 갇혀서는 아마 그런 광경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겠죠.


 그러고 보면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책으로 비유하는 작품은 제법 많죠. 세상 어딘가엔 진리를 담은 비밀의 문장(文章)이 새겨져 있다거나, 우리는 결국 어느 소설가의 상상 속에서 춤추는 배역들일 뿐이라는 그런 흔한 클리셰들. 어떤 상상이든 그 모습은 각자 다르겠지만 결국 삶이란 거대한 시간을 읽어나가는 과정의 일부라 보는 건 같군요. 그런 점에서 독서라는 것은 비단 '책을 읽는 것'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언제부턴가 듭니다.


 모두가 페이지들 틈에서 마음의 양식을 사냥해야 한다고 천편일률로 소리칠 때, 익어가는 활자들을 수확하기 보다는 단지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고 싶어지는 계절. 글자들이 미처 담지 못한 것들을 주으러  오늘도 책장을 덮고 책상을 물리고 밖으로 나가 봅니다.

   

 애초엔 가을은 그 무엇의 계절도 아닌,

 그저 가을이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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