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닐라 향기로 남은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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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19, 2019 18:36에 작성됨.

Winter Aid - The Wisp Sing


여전히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는 초가을.

석양이 지는 근처 공원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쉬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네요.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붉게 물들고

그 너머의 하늘은 짙푸르게어둠에 잠기며

하나 둘 불을 밝힙니다.


가을이지만 아직 가을은 아닌,

그렇다고 여름이기엔 너무나 늦어버린

그런 시간.


태풍의 소식도 잠시, 아직은 후텁지근한 북태평양 고기압의 시간

그렇지만 한창일 때의 그런 무자비함은 온데간데 없군요. 


가로수들 사이에서 귀를 때리던

매미 소리가 부쩍 사그라든 가운데 보도 블럭 위로 종종 바스라진 그네들이

개미떼들에 둘러쌓인 채로 부지런히 조각나고 있습니다.


파아란 하늘을 유유히 흘러가는 거대한 적란운들 아래에서

공원의 능소화들은 하나 둘 떨어진 채로 말 없이 썩어가고

아이들은 꽃잎들을 짓밟으면서 재잘거리며 바닥 분수 주위를 뛰노네요.


여름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나버린 지금 

아직까지는 파릇파릇한 잎사귀들도 머잖아 곱게 단풍이 들겠죠.

이렇게 또 계절이 흘러가는군요.


뭐랄까, 불과 시간상으로는 며칠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것이지만

마음은 벌써 여름에게 한참 전부터 작별 인사를 건넨것만 같습니다.

물론 여름은 대꾸도 없이 떠나버렸지만요.


너무 덥지도 너무 습하지도 않았던 올 여름.

장미철 비 오는 해변에서의 무난한 여름 휴가도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도심 빌딩 속을 오가다 소나기에 갇힌 기억도

이젠 모두 과거가 되었군요. 


이런저런 일들로 올해 여름도 다사다난했지만... 

특별히 별 일도 없었던 것을 생각하면  

다행스럽기도 합니다.


어머나,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손가락 위로 녹아버린 아이스크림이 흐르고 있군요.

정말이지 한 낮의 열기 속에서 몽롱한 백일몽을 꾼것만 같습니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채, 저만치 떠나보낸 시간들.

홀로 이 계절을 짝사랑한것만 같아 부끄럽기도 하네요.


이맘때 쯤에는 좀 더 여름다운 여름을 

보내지 못한 것을 늘 후회하곤 합니다.


미련과 회한을 담아 한 웅큼 베어무는 아이스크림.

부드러운 바닐라향이 차갑고 달콤하게 여운을 남깁니다.


확실히 여름은 비록 차를 마시기엔 너무 더운 계절이지만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정말 맛있는 시절이죠.

추운 겨울 덜덜 떨면서 먹는 아이스 캔디와는 달리 자연스럽기도 하고요.


다른 계절은 떠나가도 아무렇지 않지만

유독 여름만은 아쉬움이 큰 까닭은 무엇인가...


일년의 절반이 지나갔다든 것을

비로소 실감하게 되어서 그런걸까요.

아니면 이제 모든 것이 시들고 떨어지고 죽어가는 것만이

남은 것을 알기에 그런 것일까요.


찬란했던 햇살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짙푸른 바다는 너무나 멀리 있으며

철지나 버린 샌들은 이제 신발장 속에서

다시 수감되는 신세


녹아버린 아이스크림과 얼음만 남은 채로

달그락 거리는 유리잔을 보면서

사라져 가는 여름날을 잠시나마 붙잡아 두고 싶어지네요.


언젠가 옷깃을 여미며 이 열기가 그리운 때가 온다면

손 끝에 스며든 바닐라 향을 기억해야 겠습니다.


헤어진 시간들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서.

안녕. 안녕. 안녕.


여름이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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