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수필[대패질 하는 여중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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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2-20, 2016 16:57에 작성됨.

벌써 일주일 전이다. 내가 여느날과 같이 작가들의 트위터를 둘러보고 있었다. 거기에서 마음에 드는 작가가 신작을 올렸기에, 나는 대패질 하는 사람을 찾아 아이커뮤를 뒤졌다. 문득 여중생이라는 사람이 역식질을 한다는 것을 보아, 이번 작품을 역식좀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렇지만 시간이 좀 많이 걸린다는듯 하였다.

 

"좀 빨리 해 줄 수 없습니까?"

 

했더니,

 

"대패질 하나 가지고 에누리하겠소? 느리거든 다른 데 가 부탁하우."

 

대단히 무뚝뚝한 여중생이었다. 흥정하지도 못하고 잘 해달라고만 부탁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대패질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지우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색 넣고, 저 색 넣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내가 보기에는 그만하면 다 됐는데, 자꾸만 더 깎고 있었다.

인제 다 됐으니 그냥 올려달라 해도 통 못 들은 척 대꾸가 없다. 내용이 궁금해, 갑갑하고 지루하고 초조할 지경이었다.

 

"더 깎지 않아도 좋으니 그만 주십시오."

 

라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며,

 

"대패질 할만큼 해야 역식이라고 할수있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한다. 나도 기가 막혀서,

 

"볼 사람이 좋다는데 무얼 더 깎는다는 말이오? 여중생, 외고집이시구먼. 빨리 보고싶다니까요."

 

여중생은 퉁명스럽게,

 

"다른 데 가서 부탁하우. 난 안 하겠소."

 

하고 내뱉는다.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포기할 수도 없고, 될 대로 되라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마음대로 해 보시오."

 

"글쎄, 재촉을 하면 점점 거칠고 늦어진다니까. 식질이란이란 제대로 해야지, 놓치면 되나."

 

좀 누그러진 말씨다. 이번에는 하던 것을 그만두고 태연스럽게 데레스테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도 그만 지쳐 버려 구경꾼이 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야 완성품을 들고 이리저리 보더니 다 됐다고 올려 준다. 사실 다 되기는 아까부터 다 돼 있던 번역이다.

 

나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따위로 역식질을 해서 될 턱이 없다. 커뮤니티 본위가 아니고 제 본위다. 그래 가지고 늑장은 되게 부른다. 불친절하고 무뚝뚝한 여중생이다." 생각할수록 화증이 났다. 그러다가 뒤를 돌아다보니 여중생은 태연히 허리를 펴고 클로저스의 근로를 하고 있다. 그 때, 바라보고 있는 옆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여중생다워 보였다. 내 마음은 약간 누그러졌다. 여중생에 대한 멸시와 증오도 감쇄(減殺)된 셈이다.

 

아이커뮤에서 완성작에 대한 감상을 보았더니 다들 이쁘게 깎았다고 야단이다. 다른 대패질들보다 참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의 것이나 별로 다른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회원의 설명을 들어 보니, 깎는게 지나치면 원본의 느낌이 훼손되고, 깎는게 미약하면 번역된 글자가 어울려지지 않아, 느낌을 해치기 쉽단다. 요렇게 꼭 알맞은 역식질은 좀체로 만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확 풀렸다. 그리고 그 여중생에 대한 내 태도를 뉘우쳤다. 참으로 미안했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명품 식질은 마치 한글이 원본인듯, 신음소리나 효과음이 우리의 것이니만큼 짝 박혀있다.. 그러나, 요새 식질은 그림판에 글상자로 굴림체를 쓴듯, 엉성한 퀄리티이다. 명품이라 불리는 역식질을 할때,  난잡하게 박힌 일본어를 세세하게 지우고 그 빈자리를 그림까지 그려가며 세세하게 채운다. 물론 날짜가 걸린다. 그러나 요새는 효과음 따위는 번역하지 않는다. 금방 식질한다. 그러나 원본만 못하다. 그렇지만 요새 남이 보지도 않는 효과음을 몇시간이나 걸려 가며 붙일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다.

 

번역만 해도 그렇다. 명품은 그 사이에 관용어나 말장난따위를 전부 알아채고 그것을 초월 번역하는 경우가 많다. 남들이 슬쩍 지나가는 부분에서 머리를 싸매는지 알수없다. 어느 누가 남이 보지도 않는데 굳이 말장난에 각주도 달지 않고 번역할 필요가 없다. 명품 번역가는 번역은 번역이요, 식질은 식질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엄청난 번역물을 제작한다는 것에 열중했다. 그리고 스스로 보람을 느꼈다. 그렇게 순수하게 심혈을 기울여 역식질을 해냈다.

 

이 역식질도 그런 심정에서 만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 여중생에 대해서 죄를 지은 것 같은 괴로움을 느꼈다. "그 따위로 해서 무슨 번역을 해 먹는담." 하던 말은 "그런 역식가가 나 같은 악플러들에게 멸시와 증오를 받는 세상에서, 어떻게 아름다운 작품이 탄생할 수 있담." 하는 말로 바뀌어졌다.

 

나는 그 여중생을 찾아가서 주소로 치킨이라도 사주면서 진심으로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다음 일요일에 아이커뮤에 접속하는 길로 그 여중생을 찾았다. 그러나 그 여중생이 있던 여중생은 있지 아니했다. 나는 그 여중생의 작품들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허전하고 서운했다. 내 마음은 사과드릴 길이 없어 안타까웠다. 문득 유튜브로 티나의 공략을 보고있었다 클로저스의 티나가, 결전기를 쓰고 있었다. 로켓런처가 하늘로 발사된뒤 비구름처럼 로켓이 뿌려지고 있었다. 아, 그 때 여중생이 저 로켓을 보고 있었구나. 열심히 역식질을 깎다가 유연히 하늘에서 내려오는 로켓을 바라보던 여중생의 거룩한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 익헨에 들어갔더니 새로운 동인지가 나와있었다. 세로 식질에 그림판 식질이라는 아주 극혐인 방식이다. 명품 역식 구경한지도 오래다. 요새는 효과음 깎이는 것을 본적이 없다. 번밀레... 번밀레... 애수를 자아내던 그 소리도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문득 일주일 전 대패질 하던 여중생의 모습이 떠오른다.

 

 

창작판에 올리기에는 용량이 적고, 그렇다고 억지로 용량을 넣기에는 원본의 느낌이 훼손될까봐 이곳에 올립니다. 애초에 아이돌과 관련된 글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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