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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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24, 2016 02:45에 작성됨.

아니 뭐 제가 아버지가 된다는 얘기는 당연히 아니고...

밑에 성적 이야기를 읽고 문득 떠오른 겁니다.

 

저는 만년필 사용자입니다. 남들은 잉크 넣고 하는 거 불편하지 않냐고 하는데 저는 오히려 그게 더 좋더라고요.

만년필을 좋아하게 된 건 고등학생 때였는데, 처음에는 손글씨를 교정하려고 쓰기 시작했다가 아침에 잉크를 넣어서 자기 직전에 잉크를 다 쓴 걸 깨달았을 때의 그 쾌감에 계속 만년필을 쓰게 되었더랬죠.

 

처음 만년필을 쓰게 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만년필이 글씨 교정에 좋다는 말을 접하고 인터넷으로 찾아봤는데 다들 어찌나 비싸던지 용돈으로 사기는커녕 부모님께 사달라고 말씀드리기도 버겁더군요.

그러다가 제가 6월 전국연합모의고사에서 전교 2등을 했습니다. 제가 잘 봤다기보다는 그 전까지는 국수영만 전교등수에 반영하다가 탐구가 반영되면서 많이 딸렸던 수학성적에 물타기가 되면서 상대적으로 등수가 올랐던 거죠.

전교등수가 발표된 날, 저는 이런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성적 이야기는 부모님께 잠시 비밀로 하고 집에 들어오자마자 어떤 만년필을 사 달라고 할 지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제가 눈독을 들인 녀석은 파커의 소네트2라는 녀석이었습니다. 세련된 외관에 눈길을 빼앗겼지만 권장소비자가격 32만원.

제가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니다라는 생각에 워터맨(만년필을 발명한 사람이 만든 회사)의 10만원쯤 하는 나름 중저가(...)의 만년필을 사 달라고 하기로 결정하고 언제 말할지 각을 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적에 굉장히 관심이 많으신 모 마당발 학부모님이 어머니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서는 "그 집 아들이 요번에 전교 2등 했다면서"하는 바람에 타이밍이 완전히 꼬여버렸습니다.

다행히도 잠시 뒤에 어머니께서 직접 "뭐 갖고 싶은 것 있냐"하고 물어보셔서 만년필이라고 대답하고 어떤 건지 보여 드렸는데

가격을 보시더니 "학생이 들고 다닐 물건이 아니다"라고 단칼에 잘라 버리시더군요. 뭐 저도 비싸다는 자각은 있어서 납득하고 체념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 모든 과정을

 

"아버지께서 안방에서 전부 듣고 계셨습니다."

 

...왜 중요한지 모르시겠다면 이 상황을 아버지라는 입장에서 살펴봅시다.

아들내미가 시험을 잘 쳐서 왔습니다.

아들내미는 포상으로 (공부하는데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만년필을 사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와이프가 비싸다고 기각!

여기서 물러나면 아버지로써 자존심이 엄청나게 상하는 상황이죠.

 

아버지께서는 마침 해외 출장 갈 예정인 친구분에게 몰래 전화를 걸어서 면세점에서 만년필 한 자루만 사 오라고 하셨다더군요.

며친 뒤 주말 저녁식사가 끝나고 아버지께서 안방으로 저를 부르시더니 작은 종이가방을 하나 건네주셨는데

그런데! 놀랍게도! 제가 포장지를 열어 보니 그 안에 들어 있던 것은 제가 갖고 싶어했던 32만원짜리 그 만년필이었습니다.

진짜 무슨 소설도 아니고 참. 저는 좋다고 일주일 뒤에 갱지에 글씨를 쓰면 잉크가 번져서 못 알아볼 지경이 된다는 걸 발견할 때까지 모든 글씨를 만년필로 썼더랬습니다.

면세점에선 반값에 팔았었다는 건 안 비밀.

 

그 뒤로 만년필에 푹 빠져서 대학생이 된 이후에 용돈으로 네 자루를 더 샀지만 저것보다 비싼 녀석은 없습니다. 이제 제겐 가격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까지 있지만 말이죠.

볼 때마다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만년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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