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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 마스터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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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26, 2012 13:24에 작성됨.

프로젝트 페어리의 기념비적인 데뷔를 이틀 남겨둔 날의 아침.
평상시보다 이른 아침부터, 나와 카에데 누나는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치하야? 아침 일찍부터 전화해서 미안. 오늘은 내가 일이 있어서 말이지. 불편하겠지만 혼자 출근해줘. 응? 아. 응. 그럼 부탁할게.”

이유인즉슨, 오늘 카에데 누나가 현장직행인데, 그 장소까지의 거리가 상당했다. 그래서 내가 출근 전에 수고를 하게 된 거다. 물론 누나는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차로 가는 편이 훨씬 낫지. 듣기로는 무슨 촬영 비슷한 거라는데, 거기까지 대중교통으로 갔다간 쓸데없이 피곤해져서 좋은 사진이 안 나온다고.
그나저나 누나네 프로덕션, 꽤나 수완이 좋은 건가. 벌써 우리 애들보다 더 일거리를 얻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인데.

“자, 자. 빨리 가자고.”

“………”

“안 오고 뭐해?”

“미안해. 괜히…”

“거 신경 쓰지 말고 갑시다.”

“후훗… 응.”

누나의 말대로라면 그 촬영, 876프로의 모든 인원이 참여한다고 했었지. 이건 전략적 행동도 될 수 있다는 거다. 876프로의 페스티벌 참가 유닛인 ‘디어리 스타즈’의 세 사람도 볼 수 있겠지.

곧바로 차를 타고 촬영장소로 이동했다. 네비를 찍어보니 거의 한 시간은 걸릴 것 같았다. 누나에게 컨디션을 위해 자둘 것을 권했지만, 누나는 살짝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안전벨트를 매는 것과 동시에 잠이 들어버리는 미키와는 역시 다르군.
이동하는 시간동안 서로의 프로덕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니, 금방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누나는 내려주고 곧바로 가려다가, 역시 그 세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어 나도 차에서 내리기로 했다. 료와는 안면이 있는데다, 에리는 인터넷에서 봤지만, 나머지 한 명은 본 적이 없었다.
차 문을 열고 조수석 문을 열고 나온 누나에게 다가가려는데,

“카--에--데--쨔앙--!!”

뭔가 거대한 것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마치 들소와 같은 기세로. 하지만 놀랍게도 여자아이였다.

“뭐, 뭐야.”

“어머. 키라리 일찍 왔네.”

내가 당황하고, 누나가 평온하게 인사를 건네는 사이,

“뇨왓--!!!”

그 커다란 여자아이가 누나를 덮치려 했기에, 나는 본능적으로 누나를 옆으로 밀어냈고, 덕분에 나는 여자아이의 보디체크를 정통으로 맞아버렸다. 맞자마자 그대로 열린 차문으로 구겨져 들어가 버릴 정도의 위력이었다.

“우-웅?”

“괘, 괜찮니?”

“죽을 것 같아…”

소녀라고 하기엔 너무 큰 무언가에게 전력을 다한 보디체크를 당해 조수석까지 날아갔던 내가 기어 나오자, 걱정스러운 눈빛의 누나와 눈을 깜박이는 소녀가 보였다.

“카에데쨩. 이 귀여운 오빠는 누-구?”
생면부지인 소녀에게 귀여운 오빠라는 말을 들어버렸다. 귀엽다는 말은 어렸을 때 나보다 훨씬 연상인 사람들에게나 들어본 이후 처음이었다. 이제 보니 이 녀석. 나랑 키가 똑같다. 아니. 저쪽이 약간 더 큰 건가?

“누, 누나. 이 애는 누구야?”

누나는 빙긋 웃으며 서로를 소개시켜주었다. 나에게 필살의 보디체크를 감행한 녀석의 이름은 모로보시 키라리. 물론 876프로덕션의 아이돌이며, 키라리 본인의 말로는 큐트의 정점인 17살에 키는 184.5라고 했다. 역시나 나보다 큰 키였다. 비록 소수점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도. 우리 765프로의 17살(하루카, 마코토, 유키호)을 생각하면… 이 녀석은 아이돌이 아니라 기인열전에 나가거나 특촬물 괴수 역을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물론 외모는 아이돌을 해도 충분할 정도의 미소녀였지만. 아니. 저 정도 크기의 소녀를 정말 소녀라고 불러도 되는 건가.

“키라링은 아직도 쭉-쭉 자라고 있어-!”

…아직 성장판이 닫히지 않았다는 건가. 저기서 얼마나 더 커질지 기대가 된다. 안토니오 이노키 정도는 커질 셈인 것 같다. 다아-!

키라리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란코가 도착하고(‘성가신 태양이네.’가 그녀 나름대로의 인사법인 것 같았다.), 내가 기다렸던 ‘디어리 스타즈’의 세 사람이 차례대로 도착했다. 예상대로 에리의 목소리는 상당히 예뻤다. 그래봤자 ‘저 분은… 누구?’가 내가 들은 전부였지만.
료와 에리를 제외한 또 한 명의 멤버. 아이. 누나에게서 이름만 들었기 때문에 몰랐던 일이었지만, 아이의 풀 네임은 히다카 아이. 놀랍게도 내가 초등학생 때 아이돌계의 전설이라 불렸던 그 히다카 마이의 딸. 이라는 것 같았다. 그 사람 엄청 유명했었는데, 오토나시 씨가 하늘을 불렀는지도 몰랐던 내가 이름까지 기억할 정도로 유명한 아이돌이었다. 그런 사람의 딸이라… 왠지 강적이라는 느낌이잖아.
료는 여전히 귀여웠다. 그런데 이 유닛. 에리가 넷아이돌인데다 아이는 전설적인 아이돌의 2세인데, 료는 무슨 거창한 타이틀 같은 거 없나. 그저 전직 아이돌이자 현 프로듀서의 사촌동생. 이라는 타이틀은 폼이 안 사는데. 이 녀석도 뭔가 비밀이 있다면 재미있어질 것 같다.

마지막으로 말끝마다 고양이처럼 냥냥거리는 마에카와 미쿠라는 아이가 도착. 876프로의 현 인원 8명 중 7명이 모인 셈이다. 누나의 말대로라면 나머지 한 명은 안즈라는 아이가 될 텐데.

“그 애는 언제와?”

내 말에 카에데 누나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자, 마치 고양이가 그러듯 누나의 팔에 몸을 쓱쓱 비비고 있던 미쿠가 입을 열었다.

“안즈쨩이라면 프로듀서가 데리러 갔다냥.”

미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차의 앞으로 승용차 한 대가 섰다. 그리고는 어째 화가 잔뜩 난 것처럼 보이는 여성이 조수석에서 작은 여자아이 한 명을 끌어냈다.

“아-귀찮다고-!”

“당장 내려! 그리고 옷부터 갈아입도록 해!”

여성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여자아이의 옷차림을 볼 수 있었다. 헐렁헐렁한 흰 티에 검은 글씨로 ‘일하면 지는 것’이라고 써져있는데다, 들고 있는 토끼 인형은 이오리가 보면 기절을 할 정도로 꼬질꼬질했다.

“아아…”

“정말… 오늘은 쉬는 날이라고 했잖아, 프로듀서…”

의욕이라고는 에베레스트 산에 있는 코끼리의 숫자만큼 없어보였다. 다시 말하면 아예 없어 보인다는 거다. 하지만 그 여성 프로듀서(당연하겠지만 876프로의 프로듀서 같았다.)는 그에 굴하지 않고 여자아이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제-발-! 그만 하고 따라와!”

“싫-어-!”

“하아… 일 끝내면 사탕 한 봉지 줄 테니까.”

그러자 여자아이(아직 이름은 듣지 않았지만, 정황상 이 녀석이 안즈라는 이름의 876프로 아이돌인 것 같았다.)의 눈빛이 살짝 바뀌기 시작하더니.

“정말이지?”

“그래.”

“설마 내 인세에서 까는 건 아니지?”

“…내 돈으로 살게.”

“그렇다면야 오늘 하루 정도는 노력해볼게.”

순순히, 하지만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프로듀서의 뒤를 따라 들어가는 안즈를 보며,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누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니. 그런 표정하고.”

“누나. 진짜 괜찮겠어? 이 프로덕션.”

“응. 다들 재미있어.”

“재미야 있겠지.”

넷아이돌에 전설 주니어는 그렇다 치고, 거인, 중2병, 고양이인간, 니트는 대체 뭐라고 설명할 셈인지. 나는 우리 765프로의 녀석들이나 우리 누나만 해도 꽤나 특별한 사람인줄 알고 있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구나. 우리 애들은 지극히 정상이었어. 다행이다.



누나와 헤어진 뒤 그대로 사무소로 출근.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오늘은 다른 녀석들 쪽이 워낙 바쁘기 때문에, 페어리와는 그다지 오랜 시간 있을 수 없겠지만, 그래도 그 세 명이라면 잘할 거라 믿는다.

야요이와 아미, 마미를 보내놓고, 연습실에 와서 페어리의 세 사람을 봐주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리츠코에게서 온 전화였다. 곧바로 연습실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리츠코?”

[프로듀서.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급하게 나갈 일이 있는데, 저 대신 아즈사 씨를 픽업해주시겠어요?]

어째 저번의 그 고생이 생각나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리츠코 역시 내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느낀 것 같았다.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번엔 장소가 확실하니까.]

“그래? 그럼 갈게. 위치 좀 불러줘.”

하필이면 저번의 그 장소라서 또 식겁했지만, 그래도 믿어보기로 했다. 바로 가겠다는 말을 한 후, 전화를 끊고 연습실로 들어가 세 사람에게 양해를 구했다.
차를 몰고 리츠코가 이야기 한 장소-하필이면 저번에 아즈사 씨를 찾으러 뺑뺑이를 돌았던 그 번화가 부근이었다-로 이동했다.

“아아…”

그래. 이렇게 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
역시나 아즈사 씨는 그 장소에 없었다. 일단 심호흡을 크게 하고, 차에서 내려서 번화가 안쪽을 찾아보기로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번화가 광장에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뭔 노상 공연이라도 하는 건지, 사람들의 웅성거림 사이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때에는… 심호흡 해봐요~♬”

어… 이 목소리.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인데, 설마?
나는 인파를 뚫고 모두가 보고 있는 누군가를 향해 움직였다. 중앙으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내가 듣고 있는 목소리의 주인이 확실해졌다.


♬ 맑음색 - 미우라 아즈사


마을은 맑은 빛깔 마음도 맑아져요
고민하지 말고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나가요
언제나 웃으며 지낼 수 있으면 좋겠네요
주위는 신경 쓰지 말고 나답게 오늘도


인파의 한가운데에는 역시나 아즈사 씨가 웬 네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를 앞에 두고 노래하고 있었다. 그 아이는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서는 아즈사 씨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은 울지 않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펑펑 울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비오는 날이라도 마음은 맑아서
멋있는 우산을 쓴 것뿐인데 웃음이 지어져요
무지개를 건너서 갈 수 있다면 좋겠네요
본 적 없는 파란 하늘이라던가 만날지도 몰라요


울고 있던 아이는 물론 구경하던 사람들 역시 아즈사 씨에게 시선에 못이 박힌 듯 멍하니 보고 있었다. 역시나 아즈사 씨라고 해야 할지. 제대로 된 무대도 아닌 곳에서 이 정도 인파의 시선을 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평온한 분위기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까지 청중들을 자신의 느긋한 분위기로 끌어당기는 것이, 역시나 아즈사 씨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노랫소리 또한 평소의 고운 목소리 그대로, 치하야가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타카네가 몽환적인 분위기로 사람들을 매료시킨다면, 아즈사 씨의 노래는 지금 부르고 있는 노래 제목 그대로 맑고 차분하게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누군가의 흉내도 화제의 가게도
힘내 보았지만 아닌 것 같아요

마을은 맑은 빛깔 마음도 맑아져요
고민하지 말고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나가요
언젠가의 장소에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찾는 물건은 이미 찾았어요 이제 괜찮으니까요


“카, 카오루쨩!!”

아즈사 씨의 노래가 끝나고, 청중들이 일제히 박수를 치는 것과 동시에, 울고 있던 아이의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 부인이 허겁지겁 인파를 뚫고 달려왔다.

“엄마-!”

방금 전까지 방긋 웃고 있던 아이는 다시금 눈물을 흘리며 부인에게 안겼다. 그 광경을 보며 그 아이와도 같이 방긋 웃고 있던 아즈사 씨는, 곧 고개를 위로 올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내게 손을 흔들었다.

“아. 프로듀서 씨!”

“…대체 뭘 하고 계셨나요. 아즈사 씨. 찾았단 말입니다.”

“죄송해요. 프로듀서 씨. 저 아이가 엄마를 잃어버리고 울고 있어서, 울음을 그치게 하려고 노래를 불러주었답니다.”

오른손을 뺨에 대고 미소 짓는 아즈사 씨를 보고 어누 누가 화를 낼 수 있단 말인가. 화는커녕 나도 따라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가시죠. 아즈사 씨. 사무소까지 태워드릴 테니까요.”

나와 아즈사 씨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주위의 사람들은, ‘역시 아이돌이었나 봐.’ ‘이름이 아즈사래. 이제부터 팬이라도 해볼까.’라며 수군대기 시작했다.

“좋은 어필이었네요, 아즈사 씨. 팬들이 늘어날지도 모르겠어요.”

“네? 무슨 말씀이신지…”

역시나 천연. 뭐. 그게 아즈사 씨의 매력이니까.
두 사람 모두 차에 탑승한 다음, 시간을 보니 슬슬 점심을 먹을 때가 되었다. 이대로 돌아가서 식사를…

잠깐.
지금 나와 아즈사 씨 둘 뿐이라는 건. 이번에야말로 두 사람이 식사를 한다는 시츄에이션이 완성된다는 게 아니겠는가! 비록 지금은 프로듀서와 아이돌간의 관계라지만, 나는 둘이서 식사를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만족하리라.

“저… 아즈사 씨?”

“네. 프로듀서 씨.”

여기서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드디어, 드디어 이루어지는 건가. 아즈사 씨 성격상 거절할 리가 없다. 만약에 거절당한다면 난 모든 걸 내버리고 잠적하리라.

“점심식사는 하셨나요?”

“아. 아직…”

대쓰요! 이걸로 됐다! 이제 한 마디만 하면 되는 거다!

“그렇다면 같…!”

갑자기 전화가 걸려왔기에, 나는 운전석에서 30cm는 튀어오를 정도로 놀랐다. 나의 그런 모습을 본 아즈사 씨 역시 같이 놀라는 건 덤이었다.

“여보세요… 리츠코? 젠장. 놀랐잖아.”

[왜 그러시죠? 무슨 일이라도?]

“아니. 별거 아냐. 근데 왜 전화한 거야?”

[지금 아즈사 씨 데리고 오시는 길인가요?]

좋아. 이때 리츠코에게 미리 이야기해서 기정사실화를…

“응? 아. 중간에 일이 생겨서 이제 막 차에 탔어. 점심…”

[지금 급하게 일이 생겼으니까요. 두 분 모두 빨리 사무소로 와주세요?]

…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키즈키 리츠코 양.

“…빨리?”

[네. 최대한 빨리.]

“얼마나 급한 일인데.”

[사활이 걸린 일이랍니다. 지금 이런 대화 할 시간도 없어요.]

“사무실에 불이라도 났냐.”

[그건 아니지만… 어쨌든 빨리 오시는 게 좋을 거에요? 그럼 이만.]

끊겼다.
조수석에 아즈사 씨가 없었더라면 지금쯤 있는 힘껏 고함을 지르며 밟았겠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일단은 빨리 가보도록 하자. 별일 아니면 진짜 엎어버릴 거야.

그러나

“………”

허겁지겁 사무실에 도착한 나와 아즈사 씨. 그 두 사람 앞에 펼쳐진 것은 싸구려 초밥 세트였다.

“아키즈키 리츠코. 설명을 해보실까.”

“사장님께서 점심은 초밥으로 하자고, 사장님께서 한 턱 내신다고 해서요. 모두 모여서 먹기로 했거든요.”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너는 이딴 싸구려 초밥 따위에 사활씩이나 걸고 사는 거냐!!”

“…싸구려라서 미안하네. 엇흠.”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되는 느낌이었다. 사장님. 계셨던 건가. 아니. 사장님이 초밥을 샀으니 당연히 계시겠지만.
결국 아즈사 씨와 단 둘이 식사는 고사하고 사장님을 달래느라 식은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오후 일과는 평소와 마찬가지. 페어리의 세 사람의 레슨을 지켜보며, 내 나름대로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방송에 대한 전략이라던가, 그 이후에 페어리의 멤버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는 것.
그러던 와중에, 또 리츠코의 전화가 왔다. 아까의 일을 생각하고 이를 부득 간 다음 전화를 받았다.

“뭐냐.”

이번에는 유키호를 서포트 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오늘은 확실히 바쁜가보군. 이미 지나간 일에 으르렁거리기도 그래서 순순히 부탁을 받아들였다.

유키호는 놀랍게도 소극장에 있는 미니 라이브에 한 곡을 부르기로 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사무실로 이동해 유키호를 태워 소극장으로 이동했다. 예전까지만 해도 항상 뒷좌석을 고집했던 유키호지만, 요즘은 그래도 조수석에 곧잘 앉게 되었다. 오늘도 혼자이기 때문에 조수석에 앉았지만, 빳빳하게 굳은 게 마치 목각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

“유키호.”

“네, 네!”

엄청나게 굳어있구만. 이 녀석.

“벌써부터 긴장하면 어쩔 셈이야.”

“하, 하하하지만… 치하야쨩도, 하루카쨩도, 아즈사 씨도 아닌 제가 벌써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다니… 이건…”

“달랑 한 곡이야. 한 곡. 게다가 방송 데뷔도 뭣도 아닌 거리 공연 비슷한 수준이라고.”

“하지마안…”

“뭐가 또 하지만이야. 한 번 만 더 하지만…같은 소리를 했다간 그대로 사무실로 돌아간다.”

꽤 엄하게 쏘아준 다음 유키호의 반응을 보았다. 혹시나 정말 돌아가자고 하면 어쩔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하지만 유키호는 그럴 생각까지는 없는 것 같았다.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쉽게 생각하자. 유키호. 이번이 처음이 아니잖아? 우리 팀원들 앞에서도, 현 대회 행사에서도 멋지게 노래했으니까, 이번에도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 그랬죠…”

“그래. 그때와 같다고 생각해. 청중들을 저번의 아저씨들이라고 생각하라고. 모두 네 편이야. 네가 어떤 노래를 하던 그들은 널 응원해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불러.”

“해볼게요오.”

유키호는 눈을 감고 몇 번이나 하-후-하고 귀엽게 심호흡을 한 다음 눈을 떴다.
그때의 유키호는 드디어 얼굴에 생기가 돌아, 지금까지 봐왔던 유키호 중에 가장 아름다워 보였다. 마치 그때 하루카와 함께 ‘Kosmos Cosmos’를 불렀을 때처럼.



유키호는 자신의 무대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청중들은 유키호에게 열렬히 박수를 쳐주었다. 나 역시 뿌듯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남았기에, 유키호의 요청대로 소극장 주변 산책로를 잠깐 걷기로 했다.

“어때? 내 말대로지? 다 네 편이라니까.”

“네. 프로듀서의 말이 맞았어요. 저… 지금 와서 이런 말을 하면 안 될 것 같지만… 몇 곡 정도 더 부르고 싶은 기분이에요.”

“하. 그렇게 좋았냐.”

“네. 앞으로 여기보다 더 넓은 곳에서, 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할 수 있겠지요?”

“그래.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게.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어.”

“고마워요. 프로듀서. 저. 아직 TV 데뷔는 무리지만. 언젠가는 꼭 그런 무대에 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만약 그때 프로듀서가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저는 여기까지도 오지 못하고 포기했었겠지요.”

그때의 그 말이라면 역시 팀원들 앞에서 노래를 못하겠다는 유키호에게 해준 말이겠지.

말을 마친 유키호는 양 손을 허리 뒤에 두고 수줍게 웃었다. 그리고는 나보다 몇 걸음 더 앞서서 걸어간 뒤에 빙글 몸을 돌려 나를 마주보고 섰다. 이 녀석의 이런 행동. 알고 있지. 아직도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거다.

“저… 프로듀서?”

“응.”

“여기서 한 곡 정도 더 불러도 되겠지요?”

“좋을 대로.”

내가 멈춰 서자, 유키호는 내게서 한 걸음 더 물러난 다음, 미소 띤 얼굴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바람과 구름과 나 - 하기와라 유키호


정신이 드니 어느새 비는 그치고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였어
흠뻑 젖은 구두는 벗어버리고
맨발이 되니 계절이 지나갔어


아까 소극장에서 불렀던 노래랑은 다른데. 이건 나도 처음 들어보는 곡이다.


잠시 멈춰 서서 올려다보렴
빛나기 시작한 바람과 구름과
내가 있어 언제부턴가 여기에
눈부시게 혼자 서 있어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내일에
내가 있어 아주 조금
젖은 눈을 닦고 혼자 걷기 시작해


마치 유키호 자신에게 하는 말 같은 가사였다. 유키호 특유의 끊어질 것 같은 미성이 가사와, 음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항상 ‘저는 틀렸어요, 구제불능이에요.’같은 말을 달고 살지만, 역시나 텐션이 올라가면 이 녀석도 끝내주는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 텐션이 언제 어디서 박살이 날지 모른다는 거지만.


나는 좋아 그 어떤 아침이라도
쓰러질 것 같다고 해도
어제보다는 더 앞을 바라보고 있어
내일이 좋아 아주 조금
나의 하늘이 보이는 내일이 정말 좋아


“어떤가요?”

“역시 넌 잘한다니까.”

“그런…가요?”

“그래. 그러니까 앞으로 네 자신을 비하하는 건 그만 두라고. 이렇게 되면 네가 아무리 부정적으로 나와 봤자 엄살 부리는 걸로밖에 생각 들지 않아.”

“하, 하지마안…”

“또 하지만!!”

“히익-”

이 성격은 대체 언제쯤이면 고칠 수 있는 걸까. 이것도 내 숙제라고 생각하면 어깨가 엄청나게 무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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