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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OL M@STER in SCANDAL - Track 01 "Pin Hill Suffer"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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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8-16, 2013 03:10에 작성됨.

지금도 눈만 감으면 그 때의 끈적한 공기가 밀려들 것처럼 선명하게 더운 날이었다. 하늘은 구름 없는 파란색, 창밖에선 더위의 끄트머리에 매달린 쓰르라미 우는 소리. 운동장은 흙먼지로 노란색, 수돗가에 몰려든 경식야구부 남자아이들의 왁자지껄한 농지거리. 하얗게 휘날리는 치맛자락, 테니스장에서 까야꺄아 소리 지르는 여자아이들의 수다소리. 긴 복도 끝 아지랑이는 여전한 잿빛, 청소를 마치고 빗자루를 휘두르며 칼싸움에 열중하는 철모르는 아이들의 소리. 엄숙함과 삼엄함이 사라진 여름의 고등학교에, 잔뜩 흘러넘치던 더위의 색과 여름의 소리.

그리고 그 모든 소리들을 앰프의 잡음으로 솎아내던,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여름 끄트머리였다. 마치 우리들의 비밀기지처럼 자리를 잡은 신관 5층 구석의 낡은 교실. 책상 위에 걸터앉아 미지근한 칼피스를 꼴깍거리던 나는 그날따라 안 어울리는 질문을 입에 담았다.

“선배는 공부 안 해요?”

치지직. 낡은 앰프에서 팝콘 튀는 잡음이 뛰쳐나왔다. 아아, 이건 좀 위험했나. 농지거리나 욕지거리, 둘 중 하나를 상상한 나는 재빨리 눈을 질끈 감았고, 그런 내 질문에 화들짝 놀란 나머지 너무 세게 돌려버렸던 앰프의 노브를 제대로 원위치 시킨 그녀는 대뜸 도끼날 같은 눈매를 마치 당신이 방금 전 돌렸던 노브 마냥 나를 향해 홱 돌렸다.

“너까지 또 왜 그래?”
“하, 할 수도 있는 질문인데요, 뭘….”
“아니, 내 말은… 하아, 됐다. 내가 너 붙잡고 이래서 뭐해.”

끓는점이 좀 낮긴 해도 그렇게 별스러울 정도로 나를 까칠하게 대했던 적은 없었던 선배였다. 뭔가 있긴 있는 모양이구나. 손가락을 꼽아가며 고민해보니 나올 만한 답은 그리 많지 않았다.

“…누가 또 타박하던가요? 공부 안 한다고.”
“우리 꼰대.”
“그래도 아버지인데 꼰대는 좀….”
“좀은 무슨 좀? 뇌만 뽑아다가 무로마치 막부에 갖다놓은 것 같은 사람인데. 완전 짜증난다니까, 정말.”

낡은 앰프를 실내화 발끝으로 탁탁 차며 투덜거리는 모습은 유감스럽게도 그녀를 휘감고 돌아다니는 교내의 소문과 그리 상관이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생각해보면 당신은 이미지 관리라는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이었다. 물론 나는 당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그저 당신을 좋아라 하며 따라다니던 철모르는 1학년 신입생일 뿐이었고.

“말하는 것만 들어보면 순 여자는 시집만 잘 가면 장땡이라는 것처럼 구는데. 어제는 또 뭐라는지 알아? 여대 아니면 대학 안 보낸다더라. 하, 거 잘 됐네. 나도 이참에 그냥 확 독립해버릴까 보다.”
“선배 대학 갈 마음은 있었네요.”
“어허, 왜 이래? 나 이래봬도 성적 꽤 잘 나온다고.”

정말일까. 물론 의심해서 좋을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쓸 마음이 없어서 그렇지 머리가 비상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열 페이지에 가까운 기타 코드 타보를 앉은 자리에서 5분도 되지 않아 외워버리는 기억력이 평범한 사람의 그것일 리는 없을 테니까.

참 여러 가지 의미로 알기 어려운 사람이다. 나는 대체 어쩌다 이런 사람과 만나게 된 걸까.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라는 미지근한 접점 정도로는 지금의 이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고, 지금의 관계가 계속되는 한 앞으로도 알 수 없으리라는 기묘한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적어도 그 때의 나는 그런 자신의 막연한 추측에 한 점 의심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는 넌? 너 요즘 공부 안 한다고 학교 꼰대들이 걱정 많이 하던데.”
“아니, 그러니까 아버지도 모자라서 선생님들까지….”
“말 나온 김에 하는 건데, 너 앞으로 나 따라다니지 마. 정 따라다니고 싶으면 좀 티 안 나게 따라다니던가.”

아, 상황이 역전됐다. 이번엔 그녀가 나에게 뻔한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칼피스 병을 입에 물고 있던 그 때의 내 얼굴은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볼썽사납게 늘어져 있지 않았을까 싶다.

“나야 어차피 버린 몸이니 그렇다 쳐도 넌 아니잖아. 안 그래도 저기 생활지도부 키무라가 아주 나를 잡고 그냥 열불을 토하던데. 뭐? 순진한 애 꼬드기지 말고 놀 거면 혼자 놀라나?”
“그, 그런 거 아니잖아요! 선배는…?!”
“아아, 그래. 알았어. 믿어주면 나야 고맙지.”

하나도 안 믿어준 모양이다. 나는 볼을 부풀렸고, 당신은 웃으며 그런 내 볼을 쿡쿡 찔러댔다.

“뭐, 그래. 까짓 거 다른 사람 눈이 무슨 소용이야? 내가 믿고, 네가 믿으면 그걸로 땡이지.”
“그러면서 은근 애 취급하는 것도 좀….”
“나보다 가슴도 큰 꼬맹이가 세 살배기 애처럼 구는데 그럼 그게 귀엽지 않고 배겨?”
“으, 으으… 가, 가슴 얘기는 금지!”
“어이쿠, 어이쿠. 알겠습니다.”

불만을 가득 머금고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내 볼이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그녀는 묶어 올린 머리를 한 번 흔들고 그렇게 웃었다. 앰프를 만지고 목에 건 기타를 쓰다듬는 손가락이 구름만큼 하얗다. 빨간 광택이 어지러운 기타를 목에 걸고 머리카락을 들어 올린 순간 하얀 목덜미가 에나멜 광택을 뒤집어쓴 기타만큼 반질거린다. 햇빛은 육각의 포말을 일으키며 그녀의 얼굴에 그림자를 덧칠하고, 날카로운 콧날에 땀 한 방울은 오후의 새침한 여우비, 풀어놓은 리본 사이로는 가슴께의 하얀 살결이 시원한 계곡처럼 빛난다. 역시나 교복 규정 따위는 나 몰라라 하는 자유분방의 끝을 달리는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은 이제 내게 있어 놀라움이 아니었다.

그야 그럴 테다. 교칙 같은 걸로 얽어두기엔 당신은 너무 자유분방했고, 그랬기에 나는 당신을 볼 때마다 마치 이름 모를 정글의 혁명 전사를 연상하곤 했다. 내가 당신에게 끌렸던 것도 어쩌면 당신의 안에 있던 그 거대한 갈망의 함성에 응답한 결과일 수도 있었을 테다. 내게 있어 당신은 책 속의 압제에 자유로 화답하는 전사 그리스도였다. 낡은 교각에 젊음을 표출하고 시시한 도덕의 추적을 따돌리는 거리의 시인들이었다. 회색 건물로 겁박할 수 없는 눈이 아프게 현란한 형광 물감이었고, 고리타분한 신부의 검열을 피한 흑백영화 속의 키스신이었다.

“자자, 잡담은 그만하고 연습이다, 연습.”

기타를 목에 거는 당신은 나에게 눈이 아픈 자유였고, 현란한 유화 물감의 춤이고, 끈적한 데칼코마니의 물감이었다.
앰프를 돌리는 당신은 단색의 정물화 속에 끼얹은 한 점의 작은 자유였고, 숨이 막힐 정도로 청량한 울트라마린이었다.

그리고 부산함과 난잡함을 휘감고서도 언제나 내 앞에 서있던 당신은,

“이번에 신곡 끝내주는 걸로 뽑았거든? 감상이나 제대로 들려달라고.”

내 인생에서 처음 만난 반짝임이었다.



IDOL M@STER in SCANDAL

Track 01
"Pin Hill Suffer"



“어머, 록이요?”

보통 일하는 중에 다른 일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프로듀서의 철칙이건만, 오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별스럽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다른 건을 꺼내들었다. 목덜미에 반짝이는 땀을 닦아내며 물병을 기울인 아즈사가 별스럽게 눈을 동그랗게 치뜨자, 면목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거린 프로듀서가 딴청을 피우며 입을 열었다.

“뭐… 일하는 중에 딴 얘기해서 미안하긴 하지만, 그게 그렇게 됐어요.”
“아뇨, 아뇨. 그만큼 민감한 얘기라는 거니까 사과하실 것까진 없는데….”

왜 뜬금없이 록 이야기가 나오는 걸까. 순간 머릿속에 머리를 빨갛고 파랗게 물들인 피어스 투성이의 사나운 얼굴 두서너 개가 스쳐지나갔다. 물론 방송일 하다 보니 그게 편견인 줄은 알고 있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는 별개로 사나운 음악이라는 선입견까지 어디 가버리는 건 아니다.

“그런데 록이라니 무슨….”
“뭐, 아즈사 씨가 생각하시는 그런 건 아니고… 말하자면 걸 밴드 같은 거예요. 왜 그, 고등학교 경음악부의 확장 버전.”
“…헤에, 알 것도 같아요.”
“이해가 빨라서 다행이네요.”

언제나 느긋하고 나사가 한 주먹은 풀려있는 것 같은 아즈사이다보니, 이런 간단한 통고에도 동의와 이해가 필요하다. 길도 잘 잃어버리고 제 나이에 비해 칠칠치 못한 구석이 있는 아즈사지만 이런 사실이 팬덤에 알려진다면 아주 경을 치를 것이니 그녀의 사적인 인적사항은 무덤까지 가지고 들어가리라고 프로듀서는 새삼스레 굳게 다짐했다.

“아, 아무튼 이번 카운트다운에서 새 기획이 잡혔는데, 재능 있는 밴드들을 발굴해서 프로 데뷔의 기회를 준다는 내용이에요. 이미 비공개 예선전도 치렀고, 그렇게 해서 밴드를 하나 고르긴 했는데….”
“…보컬이 없다던가?”
“그렇죠. 아니, 사실 있기는 있지만 기타리스트가 겸하고 있었어요.”

물론 따로 보컬을 두지 않는 밴드야 차고 널릴 정도로 많기는 하지만, 그쪽 프로듀서를 비롯해서 관계자들 보기에는 실력이 썩 보기 좋지 않았다는 모양이다. 푸욱 한숨을 내쉰 프로듀서가 자기 몫의 물병을 꺼내 입 안 가득 부어넣고 말을 이었다.

“하긴 인디밴드가 보컬이고 뭐고 다 갖추고 있었으면 진작 프로 데뷔했겠죠. 그래서 그 건 때문에 그쪽 PD한테 이번에 연락이 왔어요. 765 프로덕션에서 활동하는 아이돌 중 한 명이 보컬 세션으로 좀 뛰어줬으면 싶다고요.”
“어머나….”
“업무상 중요한 사람이라 거절하기도 뭐하고, 그게 제 입으로 말하긴 뭐하긴 하지만 다들 주가가 팍팍 뛰고 있으니까 말이죠. 누구 한 명만 끼어들어도 흥행성은 보장된 거나 마찬가지에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세션이라는 게 그리 간단한 것도 아니라서요.”

적당히 박자 맞춰서 노래만 불러주는 간단한 일이 아니다. 특히 밴드와의 호흡이 전혀 맞지 않을 세션으로 들어가야 된다면 단순히 가창력으로만 정하기에도 난감한 문제다. 가창력도 있고 친화성도 어느 정도 갖추면서 느긋하게 밴드 분위기에 녹아들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고, 765 프로덕션 소속 아이돌 중 그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이라면 적어도 프로듀서가 알기로는 한 명 밖에 없었다.

“사실 전체적으로 연령대가 어려서 치하야 쪽이 좀 더 잘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시다시피 치하야가 노래에 있어서는 고집이 엄청 세다보니, 그것도 맘대로 안 되겠더라고요. 남의 밴드에 끼어들어서 싸움이라도 났다간 큰일이니까….”
“그래서 저라는 거군요?”
“…면목 없습니다, 아즈사 씨.”
“아뇨, 아뇨. 고개까지 숙이실 필요는 없어요.”

직각 90도로 팍 숙이는 프로듀서의 정수리에 깜짝 놀라 손사래를 쳤다. 무슨 엄청 곤란한 부탁인가 싶었는데, 이런 거라면 자신도 거절할 이유가 없다.

“하던 대로만 하면 되는 거죠? 열심히 연습해서, 무대에서 노래하는 거요. 그렇다면 그렇게 어려울 것도 없네요.”
“제가 이런 말하기에는 뭐하지만, 요즘 여고생들이라는 게 또 쉽지가 않아서….”
“저도 불과 몇 년 전까지는 여고생이었다고요?”
“…….”

그러고 보니 그러네. 워낙 느긋하고 천연덕스럽다 보니 가끔씩 그녀가 창창한 20대 초반의 숙녀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어머, 어머. 뭔가 이상한 생각을….”
“아, 아닙니다! 그런 거 절대 아니에요!”

하지만 저토록 심상치 않은 눈썰미는 확실히 제 나이보다 몇 년은 더 먹어 보인다. 느긋하게 휘어지는 아즈사의 시선에 떠밀린 프로듀서가 허겁지겁 대기실을 뛰쳐나갔다.



생각해보면 그리 별스러운 일도 아니다. 스케줄은 프로듀서 쪽에서 알아서 조정해줄 터이니 자기가 신경 쓸 일은 없다. 처음 보는 소녀들과 호흡을 맞춰가야 하는 건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겠지만, 처음으로 스테이지에 섰을 때의 긴장에 비하면 대수로운 것도 아니다.

‘록이라….’

하지만 이성과 감성이 늘 같이 움직이라는 법도 없다. 눈앞에서 찰칵거리는 카메라의 플래시에 따라 기계적으로 포즈를 바꿔가면서도, 아즈사의 뇌리에서는 그 록이라는 단어가 쳇바퀴 돌리듯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었다.

‘오랜만에 들어보네.’

편견과는 별개로 추억이 얽힌 장르다. 아니, 굳이 추억이라고 대단하게 부를 것까지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이름 모를 누군가의 품에서 슬쩍 흘러나온 민트 향기처럼, 록이라는 단어는 시원한 청량감만 머금은 채 자신의 기억을 휙 스쳐지나간 것들 중 하나였다. 으레 그 나이의 소년소녀들이 품곤 하는, 별 의미는 없지만 이상하게 소중했던 추억의 한 조각이기도 했다.

이것도 무슨 운명 같은 걸까. 프로듀서에게 록이라는 단어를 들은 것도, 그녀를 처음 만난 것도 꼭 오늘처럼 푹푹 찌는 여름날이었다. 하얀 태양빛이 창살의 그림자를 드리운 곳에서, 탁상에 걸터앉아 전원 꺼진 일렉트릭 기타를 튕기면서 인상을 쓰던 그녀. 귓가에 꽂은 하얀 피어싱에서 은백색 인조 진주를 반짝이던 그녀는, 하얀 옷깃에 젖은 땀만큼이나 서늘하고 끈끈하게 내 안의 무언가를 옭아매었던 것도 같다. 조제된 청춘의 열기가 쌓여가는 학교에서, 오로지 그녀만이 날것 그대로의 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하기도 하지. 난 왜 그녀에게 끌린 것일까. 어느 학교에나 한 명은 있는 불량학생, 조금 더 쳐줘서 기타 치는 불량학생에 불과할 뿐인데. 대체 그녀의 무엇이 나를 붙잡고 늘어졌던 것일까. 그 때는 이유를 알았던 것도 같지만, 지금은 기억해낼 수 없다. 단 몇 년 사이, 나는 그녀의 체취도 시원함도 잊어버리고 만 것일까.

“…나도 어른이 되어서 그런 건가?”
“미우라 씨? 방금 뭐라고…?”
“어, 어머. 아니에요. 그냥 혼잣말.”

이런, 딴생각이 튀어나와버렸네. 아무래도 너무 정신을 놓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마의 진땀을 닦아내는 카메라맨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기 무섭게, 촬영장 구석에서 뭔가 무너지는 우당탕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머나…?”
“마키시마 씨! 이게 뭐하는 거예요?!”

세트장의 밝은 조명이 닿지 않는 준비실에서 앙칼진 고함이 터져 나왔다. 뭔가 사고라도 터진 걸까. 깜짝 놀란 스텝들이 서로의 얼굴만 돌아보며 속닥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모자를 벗어던지고 땀투성이 머리를 긁적인 조명감독이 옆자리의 스탭에게 건네는 중얼거림이 또렷이 들어왔다.

“또 야마모토지? 하여튼 저놈의 성질하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타고난 성질머리가 저런데 별 수 없죠.”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보는 눈도 많은데 무슨… 어이쿠, 죄송합니다.”

한창 투덜거리는 와중에 아즈사와 눈이 마주친 조명감독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느긋하고 상황판단이 느린 아즈사지만 그 정도만 들어도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잠깐 쉬었다 해도 될까요?”
“아, 아아. 그러시죠.”

허둥지둥 고개를 굽실대는 카메라 감독에게 공손하게 마주 고개를 숙인 아즈사가 벗어두었던 샌들을 신고 스테이지에서 내려왔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지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준비실에서 터져 나오는 표독스런 고함은 여전히 기세 좋게 스튜디오 안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내가 못 살아, 정말! 입사 1년이 다 되어가도록 어떻게 제대로 하는 일이 없어요?! 월급 받고 싶은 마음은 있는 거야?!”
“죄,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이번 대리 승진에서 누락된 거지! 당신 입사 동기들은 지금 승진을 하네 파견을 가네 난리인데, 부끄럽지도 않아요? 제 날짜에 월급만 받아 가는 게 회사 생활이 아니라고! 사회생활 그렇게 할 바에야 당장 사표 쓰던가!”

준비실의 어둑한 조명 아래에서 씩씩대며 들썩거리는 어깨만 봐도 굉장히 화가 많이 난 것 같다. 하지만 화가 난 건 난 거고, 슬슬 수위가 에스컬레이트되기 시작하는 그녀의 폭언은 사람 좋은 아즈사조차도 참고 넘어갈 수 없었다.

“이따위로 할 거면 앞으로 스튜디오 나오지 마요! 내가 미쳤지 정말, 무슨 의리가 있다고 이런 사람을 데리고… 어휴, 진짜.”
“죄송합니다….”
“나니까 이정도로 끝난 줄 알아요! 무능한 것도 어느 정도껏이지,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작 모가지였으니까! 고마운 줄 알면 앞으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저기….”

나직하지만 힘이 실린 부름에 뒷짐을 진 채 악을 쓰던 머리가 아즈사를 향해 홱 돌아갔다. 얇은 은테 안경에 눈꼬리가 한껏 올라간, 무슨 드라마에서나 나올 것 같은 악역의 인상을 한껏 뒤집어 쓴 심술궂은 인상이었지만, 그런 얼굴조차도 아즈사와 마주친 순간 방금 전까지의 새빨간 기세가 무색할 정도로 하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어, 어….”
“무슨 일이신지는 모르겠지만, 말씀이 너무 지나치셨어요.”
“아… 흠흠, 시, 실례했습니다. 미우라 씨.”

애써 당황한 기색을 지우려 흠흠 헛기침을 하지만, 다급하게 자리를 피하는 그녀의 걸음걸이에서까지 당혹감을 지울 수는 없었다. 톱 랭크 아이돌의 위세를 이상한 데서 실감하게 된 순간이었지만, 그런 새삼스러운 권력을 만끽하는 대신 아즈사는 하얀 치마를 좁힌 채 여태껏 주저앉아 있는 여성을 향해 상냥하게 손을 뻗었다.

“저런, 많이 무서웠죠?”
“죄, 죄송합니다….”
“저한테 죄송할 게 뭐 있나요.”

상냥하게 미소 짓는 아즈사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방금 전까지 무지막지한 언어폭력에 시달리던 여직원이 소심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발치에 잔뜩 구겨진 서류가 흩어져 있는 걸 보니 그녀를 이 모양으로 만든 원흉도 아마 저것일 테다. 딱한 마음에 눈매를 찡그리며 앞머리가 길게 늘어진 그녀의 얼굴을 살피니, 빨갛게 부어오른 뺨이 고개가 흔들릴 때마다 짧은 단발 안에서 어른거렸다.

“…저런, 얼굴이….”
“아, 아니에요! 아무 것도 아니에요!”

괜한 걸 지적당했다 싶은 것인지 여직원의 언성이 절로 뾰족해졌다. 말단 직원과 톱 랭크 아이돌, 괜히 얽혀서 좋을 게 없다 생각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즈사 또한 그런 사람들의 거리감에는 웬만큼 단련된 뒤였다.

“사양할 거 없어요. 여자 얼굴에 흉이 남으면 큰일이니까요.”“그, 그러니까 걱정해주실 필요 없다고….”
“사양하지 말라니까요? 자, 그러지 말고 저랑 같이….”

가까운 병원이라도. 하지만 그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갈색 단발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낸 얼굴에 아즈사의 심장이 덜컥 굳어버렸다.

“아….”
“어어….”

딱히 예쁜 얼굴은 아니다. 강하게 인상에 남는 얼굴도 아니다. 신주쿠 역 같은 곳에서 일 분이라도 눈을 돌리면 금방 잊어버릴 것만 같은, 조용하고 티 안 나는 무난한 얼굴의 교집합 같은 여성이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콧잔등이 시큰하게 물들었다. 잊고 있던 향기가 되살아난다.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어쩔 줄 모르고 감싸 안은 그녀의 눈물 젖은 얼굴 위로 그날의 하얀 햇살이 겹쳐진다. 창살의 십자 모양 그림자, 뜨거운 여름의 공기, 눅눅하게 현 튕기는 소리, 귓가에서 반짝이던 진주 피어스.

“설마….”

그래, 기억났다. 콧잔등을 물들이는 이 찐득한 시원함의 실체.
잊고 있던 여름의 향기. 콘크리트 위에서 펄떡이는 날것. 진하고 선명한 민트 향.

“카즈미 선배…?”

울상이 되어 자신을 올려다보는 기억에, 아즈사가 놀라서 치켜뜬 눈을 부르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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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마스넷에는 처음 올리네요. 안녕하십니까, 아스트랄로라고 합니다.
다른 곳에서 쓰던 글이 막혀서, 그 사이 손이나 풀어둘까 싶어 쓰는 글입니다.

물론 원작 설정까지는 도저히 뭘 어쩔 수가 없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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