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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흥환상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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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02-26, 2017 20:07에 작성됨.

힘든 사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행운의, 혹은 행복한 시간.

세 장일지 네 장일지 알 수 없는 클로버를 보듯이, 천천히 내가 몸을 뉘이는 세 평, 혹은 네 평의 공간 안으로 들어간다.

다다미 넉 장 반에서 여섯 장 정도 되는 공간.

그리고 그 곳에는 내 집의 거의 반을 차지하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싸고 고귀한 피아노 한 대가 놓여져있다.

마치 인간보다도 고귀하다는 듯이, 그 우람한 풍채를 자랑하고 있는 나의 과거 한 대.

나는 아침에 일어나고서는 전혀 치우지도 않은 이부자리를 발로 슥슥 구석으로 밀어놓고는 피아노 앞에 앉아 쇼팽의 곡을 사정없이 내려친다.

너무나도 오래되었고, 너무나도 세게 두드린 나머지 피아노에서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는 듯이 삐그덕삐그덕하는 소리가 난다.

하지만 두들기고 있는 쇠가 소리를 낸다고 두드리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나는 그렇게 몇 번이고 자신을 타이르며 몇 번이고 눌렀던 건반들을 사정없이 내리친다.

꽤나 들을 만한 쇼팽의 곡이 내 손에서 완성되어 울려퍼진다.

듣기 좋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놀려 그것들이 건반 위를 춤추게한다.

피아노를 배웠었던 어릴 적을, 건반을 잘못 누르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회상해본다.

그 때를 되돌아보면, 그 어릴 적의 시간들은 꽤나 무서운 선생님을 봐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날카롭고, 고집스러우며, 자기 마음대로 곡을 편곡하고는 그대로 치라고 하던, 월봉 30만의 과외 선생.

제대로 치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내고, 피아노의 뚜겅으로 내 손가락을 사정없이 내려치던 그.

울면서 피아노를 배우던 나는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부모님에게 그의 체벌내용을 이야기했고, 웬만하면 넘어가려했던 부모님께서도 이것만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크게 화를 내며 그를 내쫓았었다.

그리고 마침내 고대하던 마지막으로 만나던 날.

피아노 수업을 마치고 집을 나서는 그에게 나는 어린 날의 객기를 충분히 머금은 채로 그의 등 뒤에 크게 소리쳤었다.

여러가지 욕설과 비아냥을 듬뿍 담아, 나는 그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훌륭한 음악가가 될 거라고 소리쳤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며 확인해보니 넘쳐나는 재능들에 비해 내 재능은 그저 작은 반딧불이 수준.

그것을 깨달은 나는 결국 음악을 그만두고, 그래도 그 때까지 배웠던 것들을 조금이나마 살려 한 프로덕션에 취직했다.

그리고 프로덕션에서, 아이돌들을 프로듀싱하는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다.

여기까지가 나의 이야기.

나는 천천히 회상에서 깨며 조금은 느슨해져 있는 손가락들을 채찍질한다.

어릴 적의 객기였어, 나는 그렇게 다시 중얼거리고는 새끼손가락을 잘못 놀려 조금 미묘한 힘으로 건반을 누른다.

무의식적으로 연주를 멈추려던 나는 아직도 그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에게 온 힘을 다해 실소를 내뱉고는 다시 피아노를 연주한다.

미친 듯이 몰두하면서 치는 곡은 단 한 곡.

쇼팽, 쇼팽, 쇼팽!

그는, 현재의 나와 너무 닮아있는 그는, 내가 이 곡을 칠 때마다 나의 손을 사정없이 내리치며 그렇게 말하곤 했었다.

그 의미는 그 때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 곡을 작곡한 천재는 그런 시덥잖은 것을 듣고 싶었던 것이 아니야.

그는 그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현재의 나에게도 그렇게 말하겠지.

그리고, 미래의 나에게도 그렇게 말할 것이다.

배울 때는 너무나도 어렵게 배웠고, 칠 때도 너무나 어렵게 쳤고, 기억해낼 때도 너무나 어렵게 기억해내는 곡.

이 곡은 물 흐르는 듯한 기교와 정확한 박자에 울리는 건반뿐만 아니라, 쇼팽이라는 사람이 썼다는 것 또한 기억해야 한다고.

일이 끝나고 집으로 온전히 돌아오는 날이 되면 이 곡을 치는 이유는 바로 그것.

나는 오늘, 아름다운 하나의 곡을 써내려갔는가.

혹여, 그녀들과는 맞지 않는, 아이돌이라는 환상에 맞지 않는 곡을 쓰지는 않았는가.

그녀들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다른 새카만 흑건의 아름다움에 휘둘려, 흑건으로 사용하지는 않았는가.

겨울같은 파랑새의 목소리를, 나는 여름의 넓다란 바다를 표현하는데 쓰지 않았는가.

건반을 치며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복습하고, 삶의 이유를 재생산하는 환상의 시간.

나는 오늘도 삐그덕거리는 피아노 앞에 앉아 사정없이 건반을 내리쳐 환상을 만들어내는 마법사의 머릿속을 정리해낸다.

한 반쯤 곡을 연주해갔을 때, 내 뇌리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그래, 생각해보니 그와 나는 다른 차이점이 있었다.

그는 그저 떠돌아다니며 피아노를 가르칠 뿐, 그는 그 어떤 환상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음유시인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는, 그래 나는, 그래 나는!

나의 가슴에서 뜨거운 감정이 용솟음친다.

나의 가슴에서 뜨거운 분노가 용솟음친다.

나의 가슴에서 뜨거운 부정이 용솟음친다!

그래, 나는 그런 녀석과는 달라!

그 감정을 온전히 손가락에 실어보낸 나는 마치 마지막 하나 남은 생명까지 끊어내버리는 잔인하면서도 인간애 넘치는 전사처럼 건반을 두들긴다.

마지막 건반을 누르는 동시에 건반과 피아노를 이어주고 있던 약하디 약한 줄이 마치 틀렸다는 듯이 팅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작게 들린 듯했다.

끝났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잠시 모든 것을 쏟아내고 산화해버린 피아니스트처럼 잠시 멍하니 내 방의 천장을 쳐다본다.

그런 후, 나는 휴우,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쉰 다음에 거칠게 피아노의 뚜껑을 닫아버린다.

음악을 연주하던 마법사는 이제 피아노 한 대를 잃어버렸다.

이제 마법사에게 남은 것은 신데렐라들과 그가 만들어내야 하는 환상의 이야기들 뿐.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신데렐라에는 피아노따위는 등장하지 않는다.

마법사는 그저 노래를 부르며 신데렐라를 아름다이 꾸며주고 무대 위로 등장시킬 뿐.

나는 이제야 나와 닮은 그에게서 벗어나, 한 사람이 마법사가 된 기분을 느낀다.

나는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의자를 피아노 깊숙이 밀어놓고는 잠시 옷을 갈아입는다.

이제 나에게는 피아니스트의 거추장한 연미복 따위 필요하지 않다.

다다미 넉 장 반에서 여섯 장 정도 되는, 환상을 만들어 내야만 하는 마법사가 사는 조그마한 방에는, 환상을 꿈꾸며 잠에 들어야 하는 넥타이와 정장으로 온 몸을 무장한 마법사가 살고 있다.

 

 

후기

말 그대로 쇼팽의 즉흥환상곡을 들으며 즉흥으로 써낸 스토리를 올려봤습니다.

마감작업을 몇 번 해보긴 했는데 그래도 조금 즉흥스러운 티가 나지 않는것은 아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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