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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 마스터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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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22, 2012 22:25에 작성됨.

내가 정식으로 765프로덕션의 프로듀서가 된지도 어느새 일주일이 흘렀다. 그동안 미친 듯이 머릿속에 쑤셔 넣기만 해서, 이제 파일첩만 봐도 경기부터 일으킬 정도가 되었지만 누구나가 예상하다시피 아직 멀었다. 아직도.
그 사이에 나는 몇 번이나 참지 못하고 사표를 내밀려 했지만, 가끔 사장님과 만나 잘만 이야기가 흘러가다가도 그만두겠다는 얘기만 하려고 하면 사장님은 급하게 일이 생기셨다는 말을 하며 어디론가 사라지셨고, 리츠코는 그저 웃어넘길(한 번만 더 그런 얘기하면 울 때까지 설교를 해주겠다는 뜻이 농후한 웃음이었다.)뿐이었다. 그래서 결국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정말. ‘마음대로 부려먹어 봐.’라고 말했던 건 다름 아닌 프로듀서였다고요?”

“내가 언제. 증거 있어?”

“있는 거야.”

“저도 들었답니다.”

“나도-”

“여기 사람이 몇 명인데 그렇게 넘어가려는 거야? 바보잖아.”

나는 순식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하, 하지만. 내 말은 여기저기 움직이는 걸 맡겨달라고 한 거지, 하루 온종일 책상 앞에 앉아 머릿속에 뭔가를 쑤셔 박는 걸 맡겨달라고 하진 않았어.”

“바로 그 여기저기 움직이는 것을 위해서 거쳐야 할 필수 코스니까요. 자, 더 이상 군소리 없이 하는 겁니다?”

“…망할 것.”

“그리고… 안 그래도 오늘 하루는 프로듀서가 맡아주셔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으니까요.”

“호오? 지금의 나라도 가능한?”

“네.”

“드디어. 드디어 프로듀서다운 뭔가를 해보는 건가. 아아… 참으로 길었던 고난의 세월을…”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오늘은 일정이 조금 빡빡해서 그런 것뿐이에요. 내일부터는 다시…”

“그건 안들은 걸로 할게.”

“프로듀서!”

“…알았다고. 내일 일은 좀 내일 생각하면 안 되겠어? 오늘 할 일에 대해서나 좀 이야기하자고.”

“그건… 자. 여기요.”

리츠코는 자신이 항상 들고 다니는 노트를 펴더니 그 중 한 페이지를 뜯어내 내게 건네주었다. 그 페이지에는 내가 오늘 해야 할 일들이 시간에 맞춰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고마워.”

“프로듀서가 고마워하실 필요가 있나요. 저야말로 오늘 같은 날 프로듀서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아. 그래. 저번에 바다에 갈 때 오면서 했던 말 기억나지?”

내 말에 그녀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무슨 말이요?”

“내가 프로듀서 되면 노래불러주겠다고 했잖아.”

“에에에에??? 어째서 그 얘기가 지금 나오는 거죠?”

“그냥. 지금 생각났어. 언제 불러줄 거야?”

“아니… 그건… 애, 애초에 제가 불러드리겠다고 한 적도 없잖아요!”

“있어.”

“없어요! 있다면 증거를 대보시죠!”

“여기요~”

리츠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소파에 앉아 있던 아즈사 씨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아즈사 씨 나이스.

“…둘이 짜고 저를 몰아넣으려는 거군요.”

“그럴 리가. 자. 노래는 언제 불러줄 거냐고.”

“그, 그건… 앗! 벌써 시간이 이렇게! 프로듀서. 그 스케줄 표 꼭 기억하고 계셔야 해요? 자, 하루카, 히비키. 빨리 가자!”

“그렇게 도망가기냐!”

“프로듀서도 시간 얼마 없다구요?”

리츠코의 말에 시계를 본 다음, 리츠코가 건네준 노트 페이지를 보았다. 노트에는 AM 9:30 미나세 이오리 레코딩이라고 써져있는 첫줄을 시작으로 뭔가 이것저것 적혀있었다. 정말 시간이 별로 없다. 슬슬 출발하도록 하자.
나는 이미 나를 향해 다가오는 이오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챙길 것들을 챙겨가지고 이오리와 함께 사무소를 나왔다.



이 스튜디오에 와본 것은 이걸로 세 번째다. 하지만 전의 두 번은 그저 구경꾼이었고, 이번엔 진짜 비즈니스를 위해 온 거니까, 뭔가 새로워보였다. 이제부터 신세를 많이 지게 될 텐데, 스태프들 한명 한명에게 돌아다니면서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를 했다. 중간에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저번엔 그냥 구석에 서있기만 해서 몰랐는데, 이번엔 직접 돌아다니면서 인사를 하니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있었지만 다행히 내게 그다지 악감정은 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야구선수가 프로듀서를 하니 신기하다.’라고만 했다. 나는 겉으로는 그저 웃었지만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도 분명히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겠지. 그리고 그 사람이 지금처럼 내게 호의적이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될 경우, 나로 인해 아이돌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문제는 나 혼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될 일이 아니겠지. 만약 그런 일이 진짜로 발생하면 어떻게 되는 건지.
순간 내가 너무 마음만 앞서서 프로듀서를 하겠다고 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아…”

“뭘 그렇게 바보같이 한숨 쉬고 있는 거야? 이 나를 앞에 두고.”

“응? 아. 이오리…”

“표정이 왜 그래?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생각하느라 이오리가 내 앞에 있었다는 것까지 모르고 있었다. 내색은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내 얼굴이 아무래도 살짝 굳어있었던 모양이다. 곧 녹음을 하러 들어가야 할 이오리에게 영향을 끼칠 수는 없지. 프로듀서라면 이때 아이돌에게 힘을 북돋아줘야 하는 게 아닌가.
뭔가 기운을 불어넣어줄 멘트를 생각하려다, 곧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앞에 있는 녀석은 다름 아닌 미나세 이오리다.

“아. 아무 일도 아냐.”

“…다른 사람도 아닌 이 이오리쨩이 녹음하기 직전인데 다른 생각을 하다니.”

“그야. 이오리는 딱히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완벽하게 해낼 게 분명하니까. 안심하고 다른 생각 좀 하고 있었어. 물론 시작하면 잘 보고 있을게.”

내 말에 살짝 놀란 표정을 짓던 이오리는 곧 빙긋 웃으며,

“흐응. 잘 알고 있잖아? 이 이오리쨩에게 이 정도야 여유지. 여유. 그러니까 너도 조금은 여유 있게 보고 있으라고.”

“그래.”

“여유가 있더라도, 확실히 내가 녹음하는 것. 보고 있어야 하니까?”

“알고 있어. 뭐해줄까. 응원의 춤이라도 춰줘?”

“…그런 꼴불견은 보고 싶지 않아.”

“꼴불견이라니. 어이. 말이 심해.”

“니히힛. 그럼 하고 올게. 미래의 슈퍼아이돌이 될 내 노래에 매료되어도 책임은 지지 않을 거지만.”

이오리가 녹음실로 들어간 후, 스텝들은 자기네들끼리 뭔가 전문용어를 섞어서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하더니, 곧 스탠바이를 외쳤다.


♬ 래빗 패닉 - 미나세 이오리


꽤나 재미있는 노래다. 라고 생각했다.
우연히 마법의 노트를 줍게 되었지만, 그게 마법의 노트라는 걸 믿을 리 없는 노래속의 주인공은 시험 반 장난 반으로 노트에 토끼 낙서를 그렸는데, 그때부터 정말로 토끼가 여기저기 증식하게 된다. 주인공은 그 노트가 정말 마법의 노트였다는 것에 놀라면서도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예쁘게 그릴걸 그랬어.’ 하고 후회를 하게 된다는, 재미있으면서도 귀여운 노래였다.


화장실의 휴지 굴리기
배수구에서 HEY HELLO!
파자마 주머니에 토끼
이런저런 곳에서 토끼 토끼

라라라 라라라 라라라 토끼-


듣고 있으면 그냥 웃음이 나오는 곡이다. 대충 완곡으로 한 번 부르고 그다음부터 한 구절씩 부르며 세세한 것을 수정하는 것 같다. 뭐. 대충은 느꼈지만 노래 한 곡 만드는 것도 쉬운 게 아니구나.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은 내가 할 일이 없어서, 이대로 멀뚱히 서있기도 뭐하고 스튜디오 안이 조금 덥기도 해서 잘 좀 봐달라는 뜻으로 음료수를 사오기로 했다.

밖에 나가 편의점에 다녀왔더니 마침 잠시 쉬는 시간인 것 같아 스텝들에게 음료수를 돌리고, 막 밖으로 나온 이오리에게도 오렌지주스를 건네주었다.

“이거 100%야?”

“물론.”

“니히힛. 제법 센스가 있잖아?”

“그 정도도 없어서야 프로듀서 실격이라고 생각하는데.”

“뭐. 아직 많이 부족하긴 하지만. 어쨌든, 내 노래. 어땠어?”

“아. 노래가 귀여워서 좋았어.”

“그것뿐?”

“물론 이오리가 불러서 두 배는 더 귀여웠던 것 같지만. 역시나 이오리는 뭐든 소화해낼 수 있구나. 라고 생각했어.”

“그거야 새삼 당연한 걸 말한다는 느낌이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네.”

“뭐가.”

“너에게서 그런 말을 들으니까.”

“호오. 저야말로 고저스와 엘레강트의 상징이신 슈퍼 아이돌 이오리쨩에게 나쁘지 않다는 소리를 들으니 무지무지하게 영광… 알겠어. 장난스럽게 말 안할 테니까 발을 밟으려는 건 그만두라고.”

“흥.”

세차게 고개를 돌리며 코웃음을 치던 이오리는, 자주 그래왔듯이 고개를 돌린 채로 눈동자만 힐끗 내 쪽을 향하며,

“그래도… 괜찮은 것 같네.”

“뭐가?”

“아까 전엔 왜 벌레 씹은 표정 하고 있었던 거야?”

설마 아까 그걸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건가.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안 그런 척 하지만 의외로 사려 깊은 녀석이었지. 그… 뭐냐. 요즘 서브컬처에 약간 눈길을 돌리면서 들어봤던 단어였는데.
아. 그래. 츤데레.

“설마 그거 걱정 하느라 녹음 100% 컨디션으로 못한 건 아니지?”

“뭐? 그럴 리가 없잖아? 난 프로라고. 단지 한 번도 그런 표정 지은 적 없었던 사람이 그러니까 궁금했을 뿐이야.”

“그런가. 뭐. 난 괜찮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일해.”

“걱정한 적 없다니까.”

“아. 네. 네. 그렇게 알고 있죠. 후후.”

“…왠지 열 받네.”

“열 내지 말고 주스나 마셔둬. 슬슬 또 시작할 것 같으니까.”

“흥. 너보단 내가 더 잘 알고 있거든?”

콧방귀를 뀌며 주스를 들이켜는 이오리를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사장님이라고 그런 생각 한 번 안하고 나를 고용하셨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



이오리의 녹음이 끝난 다음, 나는 사무소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아즈사 씨의 그라비아 촬영 오디션을 위해 아즈사 씨를 태우고 이동해야만 했다.

“우후훗. 오늘은 제가 지금까지 본 프로듀서 씨 중에 가장 프로듀서다워 보이시네요.”

“…칭찬입니까, 그거.”

“물론이죠~”

내가 프로듀서가 된 이후, 당연하겠지만 프로덕션의 아이돌들과 더 가까이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친해봤자 결국 부외자’의 입장에서 ‘본격적으로 아이돌을 프로듀스 해야 하는 프로듀서’의 입장으로 바뀌어서 그런지, 그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녀석들의 다른 성격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아즈사 씨의 성격이 가장 극적으로 변해서, ‘말 그대로 천사같이 상냥한 미인’에서 지금의 이미지는 ‘뭘 생각하는지 알기 정말 쉽지만 결국 뭘 생각하는지 모르는 미인’으로 바뀌었다. 결국 미인인건 마찬가지지만.

호칭도 계속해서 미우라 씨로 부르려 했지만, 아즈사 씨 쪽에서 먼저 ‘아즈사라고 불러주세요.’라고 조르는 바람에 부르게 된 거다. 만약 프로듀서가 아닌 상황에서 저런 말을 들었더라면 뭔가 여러 가지 상상을 했겠지만, 프로듀서가 된 몸으로 대놓고 아이돌과의 관계 진전에 좋아할 수도 없고, 이래저래 복잡하다.

“그나저나 그라비아 촬영이라…”

“왜 그러시나요?”

“아, 아닙니다. 뭐라고 할까… 아즈사 씨의 그 아름다운 몸매가 잡지에 실려 다른 남자의 눈요깃거리가… 라니. 내,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에에…?”

“…실언입니다. 잊어주세요.”

“푸후훗. 아름답다고 말해주시다니, 고맙네요.”

“그걸로… 끝인가요?”

“네? 또 뭔가 할 말이 있을까요?”

“아니, 아니. 아닙니다. 틀림없이 경멸당할 거라고 생각해서…”

“확실히 그 발언. 프로듀서 씨가 아니었더라면 좋은 말은 듣지 못했을 거에요?”

그건 맞는 말이지만… 그래도 ‘프로듀서 씨가 아니었더라면’이라면 이건 분명 아즈사 씨가 나를 특별하게 생각해서? 라고 확대해석을 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정말이지. 요즘 들어 아즈사 씨에게 계속 휘둘려 다닌단 말이지. 물론 거의 절반은 내 자신의 자뻑이지만, 그걸 유도하는 것 역시 아즈사 씨다. 어쨌든 이래저래 피곤하다.
정말이지. 피곤한 건 집에서 만으로도 충분하단 말이다. 누나가 아직 집에 있다고.

“확실히.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좋군요.”

아즈사 씨가 문득 내뱉은 말에, 나는 잠시 신호에 걸린 시간을 이용해 그녀를 힐끔 바라 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물론 리츠코 씨도 많이 의지가 되었지만, 프로듀서 씨가 프로듀서가 되어주셔서 더 안심이 된다고 할까요?”

“그렇습니까.”

“네. 프로듀서 씨가 오신 후부터 길을 잃어도 더 안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잠깐만요. 벌써부터 길을 잃는다는 걸 전제로 삼는 겁니까. 더 이상 길을 잃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겁니까?”

“어라, 어라. 그것도 그렇군요~”

정말이지 엉뚱한 사람이다. 그래도 아즈사 씨라서 다 용서가 되지만.

내가 차를 몰고 도착한 오디션장은 다름 아닌 수영장이었다. 이거 대놓고 그라비아 촬영 오디션이라는 티가 확 나는데.
아무래도 그라비아에 충실하게 수영복 차림으로 비주얼 어필을 하는 것으로 심사를 진행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나보다 리츠코가 왔어야 했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라비아 촬영 오디션답게 섹시 컨셉의 아이돌들이 많아서 눈을 어디에 뒤야 할지 몰라 그냥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탈의실로 들어가려던 아즈사 씨가 뭔가 고민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짓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인가요, 아즈사 씨.”

“아… 그게… 리츠코 씨가 오늘을 대비해서 수영복 몇 벌을 골라주셨는데 뭘 입어야 할지 잘…”

“음… 실례가 안 된다면 제가 한 번 봐도 될까요? 이런 건 남자가 보는 게 더 맞다고들 하니까.”

내 말에 아즈사 씨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각기 다른 색의 수영복 세 벌을 보여주었다. 한 벌은 검은색, 한 벌은 꽃무늬, 한 벌은 표범무늬. 어느 걸 골라줄까.

어째 5초 안에 골라야 한다는 압박감이 밀려들어와, 나는 짧은 고민 끝에 표범무늬 비키니를 가리켰다.

“이걸로 하는 게 어필이 더 잘 될 것 같은데요. 여긴 미성년이 많은 것 같으니까, 그 애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어른의 색을 보여주는 겁니다. 아. 그래. 이참에 아예 컨셉 자체를 그걸로 잡는 거에요. 강렬하고도 섹시한 한 마리의 암표범 같은 느낌으로 말이죠.”

“암표범…인가요?”

“네. 이렇게 엎드려서 캬앙! 같은 느낌으로.”

직접 엎드려서 살짝 시범을 보여 봤자. 물론 이 포즈는 23살의 건장한 남자가 하면 안 되는 행동이라는 걸 알고는 있다만, 어차피 보는 사람이라고는 아즈사 씨밖에 없으니까. 내가 직접 행동까지 취해보이자, 아즈사 씨는 우후훗 하고 웃으며,

“과연. 캬앙~ 이라는 느낌이군요. 네에. 프로듀서 씨가 제안하신 대로 한 번 해볼게요.”

“네. 마음 편히 가지고 한 번 해보세요. 제가 한 번 죽 둘러봤는데, 아즈사 씨만큼 압도적인 비주얼을 가진 사람은 없는 것 같으니까. 낙승입니다. 낙승.”

“어머나아~ 우후훗. 그럼 부담 갖지 않고 할 테니까요?”

아즈사 씨는 방긋 웃으며 표범무늬 비키니 하나만을 갖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졸지에 비키니 두 벌 들고 탈의실 앞에 서 있는 변태가 되어버린 나는 재빨리 아즈사 씨가 맡긴 백에 비키니를 쑤셔 넣고 자리를 피했다.



아쉽게도 오디션이 진행되는 과정은 볼 수 없었다. 프로듀서가 참관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을 때는 나도 모르게 눈물마저 날 뻔했다. 아즈사 씨의 수영복 차림을 다시 볼 수 없다니. 저번 바다에서와는 다르게 이번엔 완전히 대놓고 노린 승부 수영복인데, 암표범인데!!

어쨌든, 발을 동동 구르며 언제 끝나나 기다리던 참에, 드디어 아즈사 씨가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결국 표범무늬 비키니를 입은 아즈사 씨를 볼 수 없게 되는 건가. 아쉽다.
아니. 지금 그걸 생각하고 있을 때냐, 멍청아.

“겨, 결과는요?”

내 말에 아즈사 씨는 얼굴 한가득 미소를 그리며,

“우후훗… 어떻게 됐을 것 같나요~?”

아즈사 씨의 그런 모습에 나 역시 얼굴에 미소를 그렸다. 저 반응이라면 다음 말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합격이군요!”

“네에! 그것도 심사위원 전원 만점이랍니다?”

대쓰요!!
아즈사 씨가 원래 신체 스펙이 무시무시하긴 하지만, 그래도 전원 만점이라니, 대단하잖아?

“이게 다 프로듀서 씨의 조언 덕분이라고요? 다들 그 표범 컨셉에 만족하신 것 같았아요.”

“아하하… 제가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조금이 아니에요. 정말 많은 도움이 됐어요.”

“아닙니다. 제가 제안했다지만, 이게 다 아즈사 씨가 어쩌다 내뱉은 한 마디를 그렇게 매력적으로 소화해낼 만큼 멋진 여성이기 때문인걸요.”

“어머나아. 고마워요. 프로듀서 씨?”

어쨌거나 드디어 한 건 해냈다. 뭔가 감동적이네. 그라비아 촬영 오디션 합격한 정도로 이렇게 가슴이 벅찬데, 뭔가 그랑프리 같은 걸 우승이라도 하면 그 자리에서 목 놓아 울어버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조금 감정을 조절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자. 어서 가죠. 사무소에 기쁜 소식을 전해야죠.”

“네에. 프로듀서 씨.”

즐거운 발걸음으로 사무소에 도착하자마자 합격소식을 전했더니, 리츠코를 포함해 모두들 기뻐해주었다.

“역시 제 눈은 정확하다니까요. 사실 여기에 제가 갈지 프로듀서를 보낼지 꽤나 고민했거든요. 그래도 역시 이런 건 남자가 잘 볼 것 같다고 생각해서 프로듀서를 보냈더니. 후훗. 꽤 하시는데요? 저도 분발하지 않으면.”

“뭘… 이런 걸 가지고. 앞으로 더 힘낼 테니까 말이야.”

“호오. 솔직히 지금까지는 ‘아직이야.’라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힘이 되어주시는데요?”

“그래.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 저 의미 없는 파일첩 들여다보는 건 때려치우고…”

“하지만. 저거. 도움됐죠?”

“윽.”

솔직히 도움 안 됐다고는 못하겠다. 아까 이오리 녹음할 때도 그렇고.

“알겠다고. 앞으로도 기합 팍 넣고 할 테니… 까.”

이오리 녹음 때 생각을 했더니 자연스럽게 그때 했던 걱정도 떠오르는데. 앞으로… 할 수 있을까.

“갑자기 왜 그런 표정을…?”

“응? 아. 아무 것도 아냐.”



그 이후로 퇴근하기 전까지 잡무를 몇 가지 더 본 다음, 다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며 나도 서류를 정리했다. 사실은 그 이후로 자꾸 머릿속에서 그 생각이 지워지지가 않아 서류고 뭐고 대강대강 해치웠지만.
내가 욕먹는 것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야 은퇴 이후 2년 가까이 된 시간동안 평생 먹을 욕을 다 먹으면서 살아왔으니까. 하지만 내 좋지 않은 이미지로 인해 내가 프로듀스하는 아이돌들이 타격을 입게 된다면 그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민폐를 끼친 건 전 소속팀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이대로 있다간 머리가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아서 커피 한 잔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저녁이라고 해봤자 해가 긴 시기라 아직 밝다. 햇빛도 그럭저럭 위력을 발휘하고 있고. 하지만 오랜만에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와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그래봤자 뭐 어쩔 도리가 없는 건 마찬가지라, 한숨을 푹푹 내쉬며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데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여기 계셨군요.”

“리츠코? 뭐 할 일이라도 남았어?”

“아뇨. 오늘 일은 이걸로 종료. 그런데 프로듀서가 퇴근 안하고 남아있어서 올라와봤어요.”

“그런가.”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서있었다.
그러던 중 먼저 말을 꺼낸 건 리츠코였다.

“고민. 있으시죠?”

“아니. 별로.”

“거짓말. 그 표정을 보면 누구라도 고민 있는 사람의 표정이라고 말할걸요.”

그, 그렇게 티가 났나. 최대한 평정을 유지한다고는 했는데.

“푸훗. 그야 프로듀서는 뭘 생각하든 얼굴에 써져있는 사람이니까요.”

“지, 진짜냐, 그거? 그 정도로 티가 나?”

“네- 는 사실 농담이지만. 그냥 감이 왔어요. 결국 스스로 밝혀주셨네요?”

“…너. 날 속였겠다.”

“우훗… 아하핫! 미안해요. 하지만, 아까의 프로듀서는 정말 표정이 안 좋아보였으니까요.”

“뭐. 고민이라면 고민이지.”

“무엇에 대한 고민인가요?”

“이 일에 대해.”

“그럼 저에게 상담해주세요. 이래 보여도 이쪽 일은 엄연한 선배랍니다? 자. 이 선배에게 한 번 고민을 털어놔보세요.”

리츠코는 엣헴 하고 가슴을 쭉 펴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공부해야 하는 것 때문에 고민이신가요?”

“아니. 그런 단순한 문제였다면 이렇게 고민하지 않았겠지. 다름이 아니라…”

“다름이 아니라?”

“네가 알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은퇴한 경위가 그다지 매끄럽지는 못해.”

이 한 마디만으로 리츠코는 내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 다 알겠다는 표정으로 씩 웃어보였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웃음이 꽤나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그건 알고 있답니다. 프로듀서가 입사한 그날. 사장님께 들었어요.”

“사장님께선 알고 계셨던 건가.”

“네. 물론이죠. 설마 그것도 모른 채 그저 아이돌이랑 친하다는 이유로 받아주신 건 줄 알았나요?”

“…뭐. 그런 생각도 안한 건 아니지만.”

“사장님도, 저도, 코토리 씨도, 다 알고 있어요. 프로듀서를 프로듀서로 받아들인 후에 생길지도 모르는 리스크를. 하지만 일단 여긴 프로듀서의 전 직업과는 분야가 다른 곳이잖아요? 설령 그 일로 인해 프로듀서의 이미지가 좋지 않다는 걸 전제로 해도, 프로듀서라면 충분히 그 이미지를 개선해나가실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날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말아줘.”

“하실 수 있다고 생각해요. 프로듀서라면. 왜냐하면, 프로듀서는 우리 765프로의 아이돌들을 정말 좋아하니까요. 그렇죠?”

그 말은 확실히 맞다. 오랜 고민 끝에 프로듀서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다 이 녀석들을 좋아하니까. 더 높은 곳으로 갈 수 있게 내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은 마음에서 선택한 거다. 애초에 가장 큰 이유도 미키의 부탁 때문이니까.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내 모습을 보며 리츠코는 방긋 웃었다.

“그러니까. 그 아이들에게 폐가 되는 것부터 생각하지 마시고 그 아이들을 위해 더욱더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아직 이 일은 지금 막 시작한 것에 불과하니까요.”

리츠코의 말이 맞다. 나에 대해 좋지 않은 시각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걸 어떻게든 바꿔놓는 것도 내 일이다. 그래야 내가 맡는 아이돌들이 힘을 낼 수 있겠지.

“꽤 어려운 일이었네.”

“맞아요. 하지만 그만큼의 보람도 있으니까요.”

“어차피 하기로 한 일. 제대로 해볼게.”

“네. 저도 기대하고 있을 테니까요?”

“그 전에 노래 불러주면 더 힘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에에? 거, 거기서 그 말은 또 왜 나오는 건가요?”

“약속했잖아.”

“약속 같은 거 안 했거든요!”

얼굴이 빨개져서 소리를 지르는 리츠코의 뒤로 그녀의 얼굴빛과 같은 노을이 지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막 일주일 지났다지만, 역시 이 일. 나쁘지 않다는 걸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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