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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마코//제목없음

댓글: 2 / 조회: 2009 / 추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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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20, 2012 23:51에 작성됨.

예전 아이마스 온리 이벤트때 카피본으로 냈었던 내용입니다.
무진합체 키사라기를 베이스로 제멋대로 구성.


이걸 읽고 난 다음 세휘님의 하루마코 글을 읽으면 조금 더 재미있을...지도...?




※백합성향 주의










악을 멸함이 나의 사명이요, 숙명이라 외치었으나
-그에 대한 결의로 들어 올린 검이 손을 떠난 그 날. 

나는 정의를 맹세하던 입을 그녀의 발등에 가져갔다.



















“나쁘지 않아.”

화면 너머에서 날뛰는 키사라기의 거체를 본 그녀가 쿡쿡 웃었다. 기억에 남아있는 대사였다. 나를 만나고 한참 싸우던 그 때 내뱉은 말이다. 그녀는 키사라기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마음에 드는 것들을 소유하길 원한다. 동료, 친구, 가족 같은 끈끈한 무언가가 담긴 친밀한 호칭을 사용할 필요가 없는 장난감 같은 존재. 어느 순간 지루해지면 버릴 수 있는 가벼운 물건. 나 또한 그런 소유물 중에 하나이다. 허나 다른 것들과는 다르다고, 자부한다.

“그렇습니까?”

툭 내뱉는다. 돌처럼 구르기 시작한 말이 그녀의 귓가를 두드리자 시선이 나를 향했다. 어쩌면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녀가 나를 보며 웃는다. 키사라기를 보며 짓던 웃음과 약간 다르다.

“질투하는 거야?”
“……”

거짓을 고하면 들통 난다. 그렇다고 본심을 말하는 일은 사양하고 싶다. 무어라 대답하건 그녀는 날 비웃을 것이다. 하지만 고민의 여지는 나에게 없다. 나는 그녀의 장난감이고, 따라서 거짓말을 말해 혼나기보다 진심을 내뱉고 조소를 사는 편이 낫다. 그러나 내 입은 떨어지지 않았다. 혀를 가볍게 깨물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며 묵묵히 서있는다. 갑자기 그녀가 내게 팔을 뻗었다. 
이미 모든 것을 버리고 단 한 가지만을 담았다 생각했던 나의 심장에서 미처 버리지 못한 기대가 흘러나온다. 혈관을 타고 온 몸을 헤집는다.


내 뺨에 그녀의 손이 닿는다.







과거의 나는 나름 이름이 알려진 검사였다. 어릴 적부터 꾸준히 검을 수련하다 세상에 나오고, 운 좋게 기연을 만나 인간 치고는 제법 강한 축에 들게 되었다. 로봇이 사람을 태우고 싸우는 시대에 무슨 검이겠냐 마는, 그 틈바구니에서 홀로 살아남을 힘이 내게 있었다. 따라서 그녀, 하루슈타인을 처단하겠다고 각오하며 여행을 떠난 그 때의 나는 패배를 예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패배했다.


분명 나 홀로 그녀의 군단에 맞서 싸울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녀와 단독으로 싸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었다. 그 와중에 그녀, 하루슈타인이 소녀의 외모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보통을 통해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소녀라 부르기에는 성숙하면서도 여성이라고 하기에는 앳된. 두 단어 사이에서 방황하지 않는 모습. 순수하다는 표현을 써도 좋을 정도로 진득한 악에서 흘러나오는 특유의 매혹. 
그러나 그것이 나의 검을 무디게 하진 않는다. 허나 평소라면 쇠도 베어냈을 내 검은 무력하게 땅 위를 구르고 있었다. 쓰러진 그대로 방금까지 내 손에 쥐어져 있었던 검을 멍청히 바라보자 발소리가 들렸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세워 일어서자 내게 다가온 그녀가 보인다.

“맨 몸으로 여기까지 왔기에 좀 기대했는데, 겨우 그 정도야?”

방금 입은 타격으로 바닥을 굴렀던 나는 입 안의 흙먼지를 뱉었다. 타액은 피가 섞여 검붉었다. 입가를 훔치며 검의 위치를 확인한다. 다섯 발자국 정도. 그녀의 위치는? 비슷한 정도. 조금 빠듯할지도 모르나 그녀가 내게 말을 거느라 방심한 틈을 노린다면 역전의 기회는 있다. 허나 기회가 있다 한들 그것이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확신은 없었다. 마음먹은 것보다 한 템포 늦게 따라오는 전신의 움직임이 의아하다. 이 악의 소굴에 침투하며 얻은 피로가 축적된 것인가? 하지만 그 또한 예상에 넣고 활동했었다. 따라서 지금 상황은 계산 밖의 결과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그녀를 노려본다. 패배를 직감하면서도 티를 내는 나약함은 내게 없다. 그녀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쁘지 않은데. 특히 그 얼굴. 제법 반반하니 봐줄 만한걸.”
“허튼 소리를.”
“나름 진심인데? 죽이기 아까워. 정말로 아까운……”

발끝에 힘을 집중한다. 땅을 박찬다. 검을 쥔다. 달려든다. 벤다.

베이지 않았다. 이 정도가 그녀의 수비 범위에 있으리라는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라는 기대에 의지한 공격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녀가 가볍게 뒤로 몸을 날리며 손짓한다. 로봇의 거대한 팔이 내 옆으로 떨어져 내려 지면을 잡아 뜯는다. 그 틈새를 빠져 나와 그녀를 쫓는다. 벨 수 있을까? 베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사이엔가 로봇의 움직임이 멎어 있었다. 내가 멈춰선 탓일지도 모른다. 당장이라도 뛰어 들어 그녀를 죽이든가, 내가 죽든가 해야 한다고 느끼면서도 나는 검을 내린다.

“나를 죽일 마음이 없는 건가?”
“그럴 리가. 네가 좀 더 빨랐을 뿐이야.”
“거짓말."
“설령 그렇다 하여도 무슨 상관이지?”

머리 위에서 미동조차 없는 로봇의 팔을 보지 않아도 상황의 주도권이 그녀에게 있음은 진작 느끼고 있었다. 다시 검을 세우지만 그 끝이 흔들리고 있다. 여태껏 누적된 상처의 영향이라고 말하기엔 함께 흔들리는 내 마음까지 설명할 순 없었다. 불길한 징조였다. 그녀가 한 걸음, 내 쪽으로 걷는다.

“사실 네 이야기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듣고 있었어. 구시대의 유물이나 마찬가지인 검을 들고 다닌다고. 정의의 용사님 행세를 하고 있다곤 하나 설마 내게 덤빌 줄은 생각 못 했지. 아무리 그래도, 몸뚱이 하나를 가지고 홀로 올 줄이야.”
“혼자서도 자신이 있었으니까. 물론 내가 너무 무르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여기서 널 죽이고 죽는다면 그거로 충분하다.”
“정말로 충분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이상하다. 이상한 기분이다. 마치 뱀에 물린 것처럼 그녀의 말이 나를 파고든다. 그 송곳니에서 새어 나온 독이 달콤한 향으로 나를 잠식시킨다. 분명 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받아 마시고픈 충동에 눈을 감는다. 고개를 흔든다. 다시 눈을 뜨면 그녀가 내 앞에 서있었다. 무방비한 그 모습은 지금 당장 팔을 들어올리기만 해도 단숨에 찢겨질 것이다. 아니다, 이것은 함정이다. 내 빈 틈을 유도하여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다.
“왜 검을 안 드는 거지?”

그녀가 내게 물어 온다. 그렇다. 검을 들어야 한다.
뒤로 물러선다. 거리를 마련하고 검을 휘두른다. 휘둘러야만 했다.


내 신념이 떨어지며 탁한 쇳소리를 흘렸다. 챙그랑.

“아……”

비어있는 손을 들어올린다. 흙과 혈액으로 지저분해진 손에는 그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와 다르게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을 본다. 다시 손을 본다. 그녀를 본다. 번갈아 본다. 주춤주춤 물러난다. 그녀는 나의 도망을 용납하지 않았다. 턱을 붙잡힌 그대로 키스 당한다.

독을 삼킨다.

내게서 멀어진 그녀가 입술을 핥았다. 생각보단 맛이 별로야. 피 냄새가 나서. 그녀가 미소 지었다.

“너야말로 날 죽일 생각이 있다면 이래선 안 되지?”

그건, 아니다. 아니라고 말하지만 그녀는 이미 내 거짓말 따위를 통찰하고 있었다. 정면으로 주저 없이 찔러오는 말을 내뱉은 그녀가 키득 웃었다. 여태껏 나를 깔아뭉개려 들던 모습과는 상반되는 해맑은 웃음이었다. 머리가 아찔하다. 드디어 독이 온 몸을 타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렇다. 이것은 중독이다. 절대로 내 의지가 아니라고 믿는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돌아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돌아버린 게 아닌가 싶은 의구심. 이내 그녀가 내게 손을 내민다. 입꼬리를 가볍게 올리며 나를 바라본다.

그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껴 버려서.

“너를 갖고 싶은데.”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탓에, 라고 변명하기엔 이미 틀렸다는 걸 깨닫는다.






상처 입은 그대로 그녀에게 시달린 탓에 들끓는 열이 괴로웠다. 회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쪽으로 움직여야 했기에 고통과 피로로 젖은 몸이 뻐근하다. 침대 옆에서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자각한 뒤에야 내가 기절했었음을 깨닫는다. 몸을 살짝 움직이자 단단히 매어진 붕대가 느껴졌다.

“시트가 피로 젖었어요. 이걸 빨려면 또 얼마나 고생을 해야 할지. 내가 직접 빠는 건 아니지만.”

앳된 목소리로 투덜투덜. 불평불만을 늘어놓다가 내가 눈을 떴음을 깨달은 소녀가 앗-! 하고 고함쳤다.

“일어났다면 자리를 비켜 주세요. 시트를 갈아야 하니까. 그나저나 저런 모습이면서 여자라니, 하루슈타인 각하는 무슨 생각으로-”
“야요이. 치료는 다 마친 거야?”
“아와, 와와! 네! 다 끝났습니다! ……저기, 방금 한 말, 들으셨어요?”
“무슨 말?”

이미 다 들었을 법도 하지만 그녀는 모른 척 한다. 야요이라고 불린 소녀는 그녀가 눈감아주고 있음을 깨닫자마자 재빠르게 움직였다. 내가 힘겹게 침대에서 빠져 나오자 순식간에 시트가 갈아 끼워지고, 그와 함께 더럽혀진 이불을 돌돌 말아 꼬깃꼬깃 품에 안은 야요이가 그녀를 보며 헤헤 웃었다.

“웃우~침대 정리도 완료에요!”
“그래. 잘 했어. 그러면 나가 줄래?”
“그치만, 저 녀석과 단 둘이 있을 생각이신가요? 아무리 다쳤다지만 각하의 목숨을 노리던 녀석인데.”
“상관없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야요이는 날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으나 그녀의 명령에 항의할 마음은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곧 문이 닫히고 나와 그녀만이 방에 남는다. 물론 야요이의 걱정은 옳았다. 비록 이렇게 다쳐 있다곤 하나 원래부터 단련된 몸이다. 얼마든지 그녀를 제압할 수 있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걸친 거라고는 붕대와 하의가 전부인 채로 어색하게 침대 옆에 서 있자 그녀가 손짓한다.

“침대로 들어가.”

서 있기 조금 불편한 몸이었기에 반가운 말이었다. 그러나 확연한 명령이었다. 허나 원래부터 그랬던 것처럼 얌전히 그 말을 따른다. 물론 편히 눕는 대신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녀가 나를 가볍게 밀어 눕힌 뒤 몸을 겹쳐왔다. 그녀의 무릎에 눌린 상처가 욱신거려 새어 나오는 신음을 억누른다.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가 웃음을 흘린다.

“좋은 표정인데.”

일부러 다친 부위만을 자극하는 그녀의 손길을 타고 고통이 덮쳐온다. 멍으로 물든 피부를 움켜쥐고, 긁히고 베여 터진 상처를 손톱으로 긁어낸다. 분명 배려라고는 한 톨도 담기지 않은 난폭한 애무가 괴로웠다. 그러나 더 괴로운 것은 만족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요동치는 가슴이었다. 


머리가 울릴 정도로 몸이 떨리는 이유는 아픔 탓인지 기쁨 탓인지. 

알 수가 없다.
“넌 필요 없어.”

필요 없다는 말은, 내가 다른 부하와 마찬가지로 로봇에 탄 채 전투에 나설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마치 내 존재 자체가 필요 없다는 말처럼 들렸기에 울컥한다. 하지만 곧 냉정해진다. 그녀에 대한 저항심 따위는 이미 없앤 지 오래이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묵묵히 고개를 숙인다. 그런 나를 보기라도 한 듯 목소리가 이어졌다.

“쓸데없이 나가서 싸우겠네, 어쩌네 하는 소리는 집어 치우도록. 어차피 네겐 조종사의 자질이 없어.”
“정말 그러합니까?”
“그래.”

전에도 말 했잖아? 약간 짜증 섞인 목소리를 눈치 챈 순간 나는 침묵을 택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진실일지는 모른다. 실제로 그녀 몰래 기체를 조종해본 순간에는 그런 소리를 듣지 못했다. 어느새 나와 친해진 야요이는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기왕이면 전투원이 많은 게 좋지 않을까요? 각하는 왜 그런 건지. 뭐,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러시는 거겠죠?

“네게 주어진 역할은 내 호위야. 너처럼 귀찮게 몸으로 덤빌 녀석들을 대비해서.”

그러나 나 외에 그런 무모한 짓을 저지를 자가 있단 말인가? 여태껏 그녀의 아성에 도전하는 자들 중에 나와 같은 자는 없었다. 정확히는 내가 마지막이었다. 어찌되었든 힘으로 치면 인간보다 로봇의 쪽이 우월하다. 새삼 그 날의 내가 얼마나 무모한 짓을 저질렀는가 싶어 그만 웃었다. 그 웃음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그녀가 나를 돌아보았다.

“왜 웃는 거지? 건방지게.”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표정을 가장하지만 이미 치켜 올라간 그녀의 눈꼬리는 도통 내려오지 않는다.
“넌 너무 정직한 게 탈이야. 거짓말마저 쉽게 들통 나지.”
“네.”
“대답할 필요는 없어.”

“……물론 너의 그 점이 마음에 들지만.” 그녀답지 않게 우물거리는 목소리로 내뱉은 말이 귓가에 겨우 들어왔다. 분명 들었음에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내용에 네? 하며 그녀에게 묻는다. 허나 눈에 들어오는 건 그녀의 뒷모습이다. 어느새 몸을 돌리고 내게 관심을 끊었다는 사실을 어필하듯 돌아보지 않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는 내 입가가 씰룩였다.


그것을 미소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분명 정상적인 관계와는 한참을 벗어난 형태라 하여도 나는 그녀를 택한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아마 그녀도 그렇게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내 자의가 아니라 하여도 상관없었다. 만약 이것이 최면처럼 불확실하고 증명하기 힘든 더러운 수단에 의한 것이라 하여도 나는 만족한다. 그 동안 정의라는 이름 아래에서 살아온 모든 삶을 부정하는 일이라 하여도 좋았다. 그녀의 웃음을 볼 수 있다면 만족할 수 있었다.

“ ”

비어있는 그녀의 자리를 바라보며 여태껏 해본 적 없는 말을 입에 담는다. 낯간지러운 그 울림에 민망하다는 감정이 온 몸을 휘감는다. 하지만 그보다 더 적절하게 이 마음을 표현할 단어가 있는가? 그렇기에 감히 입에 올린다. 사랑한다고 속삭여 본다. 그녀가 없는 공간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그녀를 생각한다.


그녀가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가? 그에 대한 의문은 뒤로 미룬다.
-최후의 최후까지 미룬 의문이었다.





불길이 날름거리며 혓바닥으로 주위를 훑는다. 남모르게 연습해오긴 했으나 손에 쥔 조종간이 어색했다. 엉망으로 망가진 그녀의 상징을 본 순간 크게 도약한다. 내가 뛰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움직임에 거리가 순식간에 줄어들었으나 어딘가 불편했다. 차라리 내 발로 뛰고 싶었다. 이토록 둔탁한 기계를 손에 쥐는 대신 검을 쥔 채로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쿵, 쿵, 쿵. 지축을 울리며 달리던 로봇을 멈춘다. 그대로 조종석에서 뛰쳐나간다. 그녀가 싸늘한 눈으로 날 노려본다. 

“제법, 조종이 능숙하군. 내 명령을 어기다니.”
“죄송합니다.”
“이제 와서 사과 따위는.”

말을 자르듯 나온 기침에 터져 나온 선혈이 내 볼에 닿았다. 이미 제 기능을 잃어버린 그녀의 조종석을 살핀 뒤, 잔뜩 우그러져서 그녀를 붙잡은 쇳덩이를 최대한 벌린다. 이 순간 내 몸이 단련되어 있음에 감사했다. 가볍디가벼운 그녀의 몸을 안은 채 땅에 두 발을 내딛는다. 품 안의 그녀가 나를 흘겨본다.

“게다가, 네게는 다른 명령을 했는데.”
“저를 전장에서 도망치게 하려는 명령은 명령이 아닙니다.”
“어차피 넌 쓸모없었어. 그리고 명령을 듣지 않는 부하 또한 필요 없어. 꺼져버려.”
“그럴 수 없습니다.”

처음으로 그녀의 명령을 거부한 나는, 다시 저항한다. 피투성이가 된 몸을 끌어안는다. 하루슈타인으로써 보여주던 위압감은 찢겨진 그녀의 망토만큼이나 부질없이 사라져 있었다. 최초로 본 애처로운 그녀의 모습은 힘줘서 품으면 산산조각이 날듯이 연약해 보였다. 
물론 이미 산산조각이라는 단어에 가까운 모습이기도 했다. 그 마지막이라는 직감에 그녀를 내 몸에 아로새길 만큼 안고 싶었다. 그러나 내 팔은 덜덜 떨리고 있다.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다. 사선을 넘나드는 전투를 벌였던 어느 날 마주했던 죽음의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을. 죽음. 그녀를 다시 볼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 날 두렵게 한다.

“……부탁이야. 가 줘.”

떨리는 목소리는 명령이 아닌 부탁이었다. 애원이었다. 너라도 가서 살아남아. 나에게 속박될 필요는 없어. 나는 이미 끝났고, 패배자답게 최후를 맞이할 일만 남아 있지. 악역이라는 게 그런 거잖아?

“간다면, 당신과 함께.”

감정을 드러내면 울어버릴 것 같았다. 일부러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그녀가 웃음인지 한숨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흘렸다. 하하, 하아, 하……그녀가 내 팔을 잡는다.

“사실은 네 손에 죽어도 괜찮으리라 생각했는데, 대신 네 품에서 죽는 것도 나쁘진 않네.”

손에 힘이 들어간다. 최후의 최후에 내뱉는 그녀의 고백에 희열이 차오른다. 그러나 너무 늦은 고백이 아닌가? 이를 악문다. 나 또한 그러하다고 말하려는 순간 그녀가 내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마치 윤곽을 확인하듯 나를 어루만지는 그녀의 모습에서 불길한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의 눈동자가 흐릿한 안개로 가득하다.

“저기, 하나 더, 명령 할게.”
“네.”
“하루카라고 불러줘.”
“……하루카.”

이름을 허락 받아 입에 담는 순간 그녀가 웃었다. 그러나 웃는다고 하기엔 그녀의 눈가에 흐르는 눈물이 어색하지 않은가. 하루카, 하루카. 이름을 부르며 그 눈물에 입을 맞춘다. 하루카. 그녀의 손이 바닥을 향한다. 하루카…… 그녀의 몸은 아직 따스하다.




따스한 온기였다.





* * *





“그래서 진짜 나오는 거야? 극장판 무진합체 키사라기 2기.”
“어……잘 모르겠어.”

치하야의 물음에 하루카가 어색하게 웃었다. 2기 이야기를 듣지는 않았지만 저 떡밥은 2기의 가능성을 충분히 열어주고 있었다. 아니, 갑자기 추가 촬영이 있다고 해서 끌려갔더니 저런 엄청난 내용의 물건을 찍을 줄이야. 게다가 중간에 저거, 아무리 봐도 아동용은 아닌데 말이죠? 이 추가 영상이 어떤 팬 층을 노리고 만든 것인가 하는 의심이 무럭무럭 자라나 꽃을 피울 지경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하루카는 슬쩍 마코토를 돌아보았다. 마코토는 영상을 보고 상당히 감명 받은 몇몇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곤란해 하는 상태였다. 

“마코토군마코토군!! 완전 멋있는 거야! 정말!”
“아, 아하, 하하하……어쩌다 보니 몰입해 버려서.”
“나는 로봇 역이었는데……저런 걸 찍을 줄은……”
“유, 유키호? 왜 손에 삽을? 우왓, 멈춰!”

곧 무시무시한 삽질을 시작한 유키호를 말리기 위해 주위 사람들이 몸을 던지고, 그 중 한 명이었던 하루카는 제압당한 유키호를 보며 이마의 땀을 훔쳤다. 그나마 제압이라는 것도 마코토가 애원하며 매달리다시피 했기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오늘 어디에 놀러 가자, 다음에는 좋은 역을 맡을 수 있을 거야-등등의 말로 유키호를 설득한 마코토가 아, 하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맞아. 난 일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
“마코토군. 도망치는 거 아냐? 미키는 영화 이야기 좀 더 하고 싶은데.”
“그, 그럴 리 없잖아! 진짜 일이라고!”

얼굴을 약간 붉히는 모습이 당황해서인지 오해 받음에 화를 내서인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부끄러움 쪽이 더 큰 듯하다. 진짜로 나갈 채비를 하며 옷을 걸치는 마코토를 보던 하루카는 무심코 내뱉었다.

“그럼 나도 잠시, 편의점에나 들릴까. 같이 나가자.”
“어. 좋아-”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는 친구를 보며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가, 아연해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일단 그에 맞춰 나갈 채비를 하면서 하루카는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해 고민했다.



그저 문득,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헤헤. 사실 좀 부끄럽긴 하네. 연기할 때는 몰랐는데. 아, 야요이도 같이 봤으면 좋았을걸.”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면서도 방금 받은 주위 사람들의 칭찬에 헤죽거리는 입이 참으로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함께 연기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그러나 평소와 같은 마코토의 모습에 맞춰 하루카는 웃어주었다.

“그래도 다들 좋게 본 모양이야. 처음에 대본을 받았을 땐 당황했는데.”
“그치그치그치! 특히 하루카의 대사 하나하나가 장난 아니었다구.”
“흐흥-그래?”
“우왓, 그렇다고 여기서 하진 말라고. 무섭단 말야.”

무섭다고는 하지만 마코토, 웃고 있잖아? 하루카가 그 점을 지적하자 마코토가 재차 웃는다. 촬영할 때는 전혀 보이지 않았던 헤픈 웃음이었다. 뒤이어 영화라거나, 다른 이야기로 짧게 대화하며 즐겁게 웃던 하루카는 문득 마코토가 고민하는 표정을 짓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나저나 유키호가 꽤 신경 쓰인단 말야. 다음 극장판에서는 유키호도 괜찮은 역을 맡으면 좋을 텐데. 아, 혹시 로봇 역할의 아이돌이 파일럿으로 나온다거나 하면 어떨까?”
“그치만 2기가 확정된 건 아니잖아?”
“그래도~유키호가 악역을 맡는다거나 하면 어떨까. 제법 궁금한 걸.”

그 유키호가 말이지-하고 마코토의 입에서 이야기가 쏟아져 내린다. 적어도 한 문장에 한 번씩은 들어가는 그 이름에, 하루카는 쓰게 웃었다.

“마코토는 유키호를 정말 신경 써주는 구나.”
“그, 그런가?”

헤헤, 그랬던가― 마코토가 깍지 낀 두 손을 머리 뒤로 가져갔다.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자각조차 없고, 그에 대한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당연히, 악의도 없었다.
어느새 입가로 배어든 쓴웃음을 느끼면서 하루카가 중얼거렸다.

“설령 2기가 나온다 하여도 난 나오기 힘들겠지.”
“어……그렇지. 하루슈타인은 죽은 거로 되었으니.”

당연한 사실을 입에 담는 마코토의 목소리가 마음에 걸렸다. 
하루슈타인 역을 마친 뒤로부터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는지. 분명 길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짧다고도 할 수 없는 시간이 흐름은 분명했다. 하루카와 마코토가 주역으로 나온 영상은 이미 마무리 되어 공개만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때부터 계속, 지금까지도, 아쉽다는 생각이 가슴 한 구석에 남아 있었다.

“마코토랑 좀 더 연기하고 싶은데.”

무심코 말해버린 본심에 아차 한다. 방금 이 말, 이상한 뜻으로 들리진 않을까-힐끔 돌아본 마코토의 얼굴은 별 변화가 없었다. 도리어 웃고 있었다. 
'헤헤, 그래? 나도 하루슈타인 각하를 좀 더 보고 싶은걸~'같은 농담조의 말을 흘리는 마코토의 모습. 그쯤에서 하루카는 멈춰 섰다.

“슬슬 헤어져야겠네. 잘 다녀와. 마코토.”
“응. 그럼 다녀올게.”

한쪽 손을 들어 경쾌한 인사를 남긴 마코토가 서서히 멀어졌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하루카는 사무소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일상적인 보폭으로 걷다가, 서서히 느려진다. 천천히 앞을 향해 걷다가 어느 순간 멈춰 선다. 뒤를 돌아보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다. 당연한 사실인데 이상하리만큼 가슴이 허전했다. 혹시 뒤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어라.”

어느새 눈가가 젖어 있었다. 비가 내린 걸까? 하지만 볼을 타고 흐르는 액체는 따스했다. 어디에서 나왔는지 의아해할 것도 없이, 분명 자신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었다. 손가락을 가져가자 곧 눈물이 연이어 흐르기 시작한다.

“이, 이상하다.” 

당황해서 눈물을 닦아낸다. 지나가던 사람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또 놀라 몸을 돌려 자리를 피한다. 이미 얼굴이 알려진 아이돌이니만큼 더 이상 시선을 모으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몸을 돌리는 와중에도 눈물은 끝이 없었다. 아무도 없는 골목에 몸을 숨긴다. 어느새 입에서 흐느낌이 새어 나오고 있다. 손으로 그것을 틀어막는다. 의아해한다.

이상해. 정말로 이상해. 왜 울음이 나오는 거지?

설마, 앞으로 하루슈타인 각하를 연기할 수 없다는 게 슬프게 느껴져서?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아쉬움이 남을 이유도 없고, 연기를 마친 순간은 오히려 기쁘기까지 했었다. 평소에 맡을 일이 적었던 악역 연기를 하며 자신의 한계도 경험할 수 있었다. 동시에 한계를 뛰어 넘었을 때의 쾌감도. 그것은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역할에 대한 설명을 듣고는 곤란해 하던 기색의 마코토도 어느새 몰입하지 않았던가. 뻘쭘해하며 수줍어하던 모습도 처음 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느낀 순간부터 마코토의 연기는 눈부시게 늘어나 있었다. 마치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래.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지금은?

너무 역할에 몰입해버린 탓일까? 촬영하던 순간의 감정이 아직 잔재하고 있었다면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변명에 불과하다.
질투하고 있었다. 마코토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대화하며 웃고 떠드는 모습을. 다른 이에게 매달려 이것저것 약속하는 모습을. 자신과 대화하는 와중에도 간간히 끼어드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하나하나 풀어 설명하기엔 너무도 구차하고 어리석다. 발톱을 드러내어 내장 안쪽을 긁어대는 그것은 분명히 질투였다.
지금까지 왜 알아차리지 못했던 걸까? 하루카는 그 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질투하는 일이라면 그 이전에도 충분히 그럴 법 했다. 매일 사무소에서 얼굴을 마주하며 지내는 사이였다. 그리고 마코토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서도 충분히 질투할 만 했을 텐데, 왜 이제 와서?


-그거야, 네가 혼자 알고 있었던 마코토의 모습을 들켰으니까.


속삭이는 목소리는 분명 자신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달랐다. 마치 자신이 연기했던 하루슈타인에 비슷한 느낌으로. 그것을 환청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허나 무시할 수 없는 뼈아픈 진실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부디 그렇게 되길 바란다는 듯이 중얼거려 보지만 눈물은 멎지 않았다. 멈출 마음도 들지 않았다. 결국 눈치채버린 마음의 외침에 따라 고개를 숙인다. 눈물이 땅으로 떨어져 내린다. 비처럼 떨어져 내려 땅에 배어든다.

“이, 이상하네. 나.”

이상하다고 중얼거리면서도, 친구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버렸다.
흐르는 눈물을 제멋대로 내버려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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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보니 퇴고할 엄두도 안 나네요...엉엉



사실 표지와 삽화와 축전이 더 대단했던 카피본이었지만 이미지 파일은 넣기귀찮할 수 있으면 언젠가 추가하는 방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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