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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 마스터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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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11-20, 2012 23:16에 작성됨.

“말도 안 돼!!! 카에데 누나??”

내가 버럭 소리친 탓에 사무소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지만, 나는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곧바로 누나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누나는 대체 뭘하고 있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거 진짜 미치겠네. 대체 뭐야? 설마 그 ‘준비’가 아이돌 데뷔? 아닐 텐데. 이 잡지 촬영을 언제 했는지는 모르겠다만, 이걸 촬영할 때부터 이미 누나는 아이돌이 되어있었다는 거다. 어쨌거나 정말 궁금해 돌아버리겠군.

“무슨 일인가요, 프로듀서.”

리츠코가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물었다. 기운이 쭉 빠져버린 탓에 소파에 쓰러지듯이 앉았다. 요 며칠사이 이 소파 신세를 꽤 많이 지게 되는데.

“저번에 바다에서 내가 했던 말 기억나?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누나가 있다고.”

“아. 그랬었죠. …설마?”

눈치 빠른 리츠코는 이미 펼쳐진 잡지속의 누나 사진을 보고 무언가 알아낸 모양이다.

“그래. 맞아. 그 사진 속 주인공이 그 누나야. 타카가키 카에데. 나보다 두 살 연상의, 조용하고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누나.”

“흐음… 나이에 비해 꽤 동안이시네요.”

“고등학교 때 모습 그대로야. 고등학교 때도 둘이 같이 다니면 오히려 누나가 여동생 취급을 받았을 정도니까. 지금은 확실히 그때보다 성숙해진 것 같긴 해도. 역시 어려보이네.”

프로 은퇴 이후 아직 얼굴을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전화로 하는 연락도 요 근래 타카네 덕분에 다시 시작하게 된 거니까. 그런데 설마 이렇게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통화할 때 아이돌 이야기만 나오면 말수가 줄고, 나에게 프로듀서를 할 것을 권유하는 등, 그럴 기미는 많이 보이긴 했다만. 그래도 설마 했었다.

“876프로덕션이라… 거긴 또 어디람.”

“아. 876이라면…”

“제 사촌…여동생도 876프로 소속의 아이돌이에요.”

“호오. 그래?”

“네.”

우연이라면 우연이군. 같은 프로덕션에서 프로듀서를 하고 있는 두 사람 중 한 명의 사촌동생과 한 명의 친한 누나가 또 다른 프로덕션의 아이돌이라는 건.

“그런데 왜 그 사촌동생은 765프로가 아닌 거야?”

“그건… 어쩌다보니.”

“어찌됐든 쇼크네. 누나가 아이돌이라니. 아이돌이랑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이 사진 보면 누구라도 납득할 것 같은데요.”

“그런가…”

머리를 긁적이는 와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혹시나 하고 발신자를 확인하니 역시나 누나였다.

“여보세요.”

[전화 했었니…?]

“응. 했었지. 내가 지금 엄청나게 쇼크를 먹었거든.”

[왜?]

“누나. 언제부터 아이돌 했던 거야?”

[어머. 후훗… 그건 어떻게 알았니.]

“이 월간 러블리 패션인지 뭐시긴지 하는 잡지에 누나 사진이 있더라고. 기절초풍했단 말야.”

[그 잡지 봤구나. 나. 잘 나왔니?]

“응. 잘 나왔어. 누나 얼굴은 여전하네…가 아니라! 아이돌을 하게 됐으면 말을 했어야지! 왜 그 동안 아무 말도 안한 거야?”

[널 놀라게 해주고 싶었어.]

“아. 그래. 그랬던 거면 대성공이네. 나 진짜 다리 풀려서 주저앉을 뻔했거든?”

[…화났니?]

“아, 아니. 화났다는 건 아닌데. 뭐라고 할까… 난 그래도 한 마디 말이라도 해줄 줄 알았지. …그래서. 언제 아이돌이 된 거야?”

카에데 누나의 설명대로라면, 내가 은퇴 후 처음 누나에게 전화를 했을 때 이미 길거리 캐스팅 권유를 받았던 것 같다. 한참을 고민하던 누나는 내가 미키를 촬영장에 데려다준 후 통화를 했던 그날부터 슬슬 아이돌에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고, 결국 내가 바다에 갔던 전날에 아이돌을 할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럼 이 사진촬영은 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거네.”

[응. 그런 셈이야.]

“그럼 지금까진 어디 있었던 거야? 876 프로덕션 사무소도 내가 있는 곳 근처 아니었나.”

[집에서 왔다 갔다 했었지.]

“불편하지 않아?”

[응. 그래서 오늘 사무소 근처로 옮기기로 했어.]

“그랬구나… 라니. 잠깐.”

누나는 저번부터 이 근방에 적당한 거처를 구할 때까지 우리 집에 신세를 지겠다고 했다. 근데 오늘 옮긴다는 말은…

“누나. 집 구했어?”

[아니. 아직 적당한 곳을 구하지 못했어.]

그렇다는 건…

“누나. 지금 어디야.”

설마 했다. 정말 설마의 설마의 설마의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저번에 내 집주소를 물어보길래 가르쳐 줬던 것이 생각났기에.

[너희 집에 가고 있어.]

역시나!!

“으아아---!!! 뭐하자는 거야, 이 대책 없는 누나야--!!!”

[응? 왜 그러니?]

“기다려. 금방 갈 테니까!!”

바로 전화를 끊자마자 내 책상으로 달려가 대충 챙겨서 튀어나갔다.

“미안. 리츠코. 지금 당장 집에 가봐야 해! 지금 사태에 대해 물어볼 거 있으면 나중에 설명할 테니까. 퇴근해도 되지? 응?”

“아. 네… 저도 막 가려했었고.”

“오늘 고마웠어! 내일 봐!”

라는 말을 하면서 나는 이미 사무소 문을 박차고 달려가고 있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야! 말도 안하고 갑자기 오는 게 어딨냐고!

“크아아아아아아아-------!!!!!!!!!”

다 비켜, 이것들아!!! 나는 지금 누구보다 빠르게 집으로 가야 할 의무가 있다고!!

지금까지 사무소에서 집으로 향하는 시간 중에 가장 빨리 도착한 것 같았다. 신기록이었다. 기네스북에 등재해도 될 정도로 빨랐다. 물론 몇 번이나 위험을 감수했지만.
젠장. 피곤해. 진짜 피곤하다고. 오전부터 지금까지 머릿속에 계속 밀어 넣느라 안 그래도 피곤한데, 어째서 갑자기 이런 시련을?

계단을 기어오르다시피 해서 집이 있는 층에 도착했다.
복도에는 역시나, 카에데 누나가 짐 꾸러미와 가방을 잔뜩 들고 집 앞에 서있었다. 그 옆엔 처음 보는 여자아이가 누나 것임이 분명한 짐을 들고 있었다.

“…누나. 오랜만이네.”

내 끊어지려는 듯한 목소리를 들었는지, 누나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빙긋 웃었다. 아주 환하게 웃지는 않지만 마치 타카네의 그것처럼 잔잔한 웃음. 나를 항상 치유해주던 그 미소였다. 단발머리에 왼쪽 눈 밑의 눈물점, 양 눈동자의 색깔이 약간 다른 것까지. 사진에서 봤던, 프로선수였을 때까지 봐왔던 누나의 모습이 확실했다.

“후훗. 그 양복은 뭐니? 네가 양복 입은 모습은 처음보는 것 같아.”

“…나 결국 프로듀서 됐어.”

내 말에 누나는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입가에 포근한 미소를 걸쳤다.

“잘됐구나.”

“정확히는 오늘부터지만. 근데 옆에 그 애는 누구?”

“아. 같은 소속사 아이돌인 아키즈키 료야. 고맙게도 날 도와주러 여기까지 와줬어.”

누나와 비슷한 모양의 단발을 한 호리호리한 소녀는 나를 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키즈키 료라고 합니다.”

“아. 고마워. 아키즈키… 아키즈키?”

“네. 그렇습니다만…”

“아키즈키 리츠코랑 무슨 관계?”

“아. 제 사촌…언니에요.”

역시 리츠코가 말했던 그 사촌동생 아이돌이 이 녀석인가 보군.

“고마워. 누나를 도와줘서.”

“에… 아무 것도 아니에요. 같은 프로덕션 소속이자 저야말로 카에데 씨에게 항상 도움만 받으니까요.”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일단 들어가자. 아키즈키… 그냥 료라고 불러도 될까?”

“네.”

“료도 같이 들어와. 여자애가 여기까지 무거운 거 들고 오느라고 힘들었을 텐데. 조금 쉬었다 가지그래? 시원한 거라도 내줄게.”

“아, 아닙니다.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저. 집에 빨리 돌아가야 하니까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해.”

“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카에데 씨. 내일 봐요.”

“고마워. 료.”

료가 돌아간 다음, 일단 누나를 안으로 들였다.

“귀여운 애네.”

“그렇지? 우리 프로덕션에는 나 빼고는 다 귀여운 아이들이니까.”

“누나는 귀엽다기보다 예쁜 거지. 876프로덕션. 일하기 괜찮아?”

“응. 아직은 무명 프로덕션이지만. 보다시피 료도, 그리고 다른 멤버인 아이도, 안즈도. 모두 귀엽고 실력도 좋으니까 이제 차츰 성장할 거라고 믿어.”

“누나는?”

“난 아직 부족할지도.”

“약한 소리 하지 마. 내가 보기엔 누나야 말로 876의 에이스가 될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걸? 누난 얼굴도 예쁘고, 늘씬하니 몸매도 좋고, 목소리도 나긋하고. 아이돌의 모든 걸 갖췄다고 생각해.”

“………”

“웃지만 말고 말을 해줘.”

“후훗. 전화통화를 했을때도 느꼈지만, 못 보던 사이에 말이 많이 늘었구나. 라고 생각했어. 비행기 태워봤자 아무 것도 주지 않을 거야?”

“필요 없어. 크흠. 뭐. 사실을 말한 거니까.”

이렇게 짐을 잔뜩 들고 왔는데, 이 시간에 또 다른 곳에서 자라고 할 수도 없고, 오늘 하루는 우리 집에서 자게 한 다음 내일부터 어떻게 대책을 마련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일단 샤워라도 하는 게 어때? 무거운 짐 들고 여기까지 오느라 덥지 않아?”

“응. 그래야겠지.”

“남자 혼자 쓰는 곳이라 없는 게 많을지도 모르겠지만.”

“괜찮아.”

누나는 가져온 가방에서 갈아입을 평상복과 수건을 꺼내서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곧이어 샤워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소리가 내 귓가를 간질이기 시작했다. 이거 어째 기분이 이상한데, 아무리 어릴 때부터 봐왔던 누나라지만, 남자 혼자 사는 집에서 여자가 샤워를 하고 있다는 상황은 나로 하여금 참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물론 어릴 때부터 여러 가지로 나를 도와줬던 누나에게 그런 감정을 가질 수는 없지만.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했던가. 다른 일을 하고 있으면 곧 저 물소리도 머릿속에서 사라지겠지. 한참을 고뇌하던 나는 PC의 전원을 켜 인터넷 서핑을 하기로 했다.
호오. 또 ELLIE의 영상이 올라왔잖아? 예의 ‘춤춰보았다.’시리즈인 것 같은데, 어디 한 번 재생해 볼까.
하지만 재생버튼을 클릭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화장실에서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뭐야?”

[저… 미안한데.]

“뭔데 그래? 신경 쓰지 말고 말해봐. 뭐가 없어? 없으면 지금이라도 내가 가서 사올 테니까.”

[아니. 그건 아니야. 깜박해서 갈아입을 속옷을 가지고 들어오지 않아서. 네가 꺼내줄래?]

…이건 또 무슨 시련을 내게 주는 건지.

“어, 어, 어느 가방에 있는데?”

[내가 옷이랑 수건을 꺼냈던 그 가방.]

“어어으으으… 그래. 찾아볼게.”

정말이지. 아무리 친한 동생인데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도 자기 짐을 남자한테 막 뒤지게 해도 되는 거야? 그것도 속옷을? 하긴. 누나의 그 무방비함이라면 자기가 직접 수건만 걸치고 나와서 속옷을 꺼낸 다음 그 자리에서 입을지도 모르니까, 이 정도로 타협하자. 건강에 좋지 않은 건.

가방이라고 뭔가 잔뜩 들어가서 팔만 넣고 더듬거리다 드디어 내 손에 뭔가 폭신한 것이 느껴졌다.
이 감촉은… 그거다!

“우리얍-!”

전혀 쓸모없는 기합성을 내지르며 손에 잡힌 것을 번쩍 들어올렸다. 꺼내서 확인해보니 섹시함의 상징인 검은색…

“거, 거, 검은색!!”

나도 모르게 쥐었던 것을 떨어뜨리며 앉은 자리에서 1미터는 뛰어올랐다.

[아직이니?]

“아, 아, 아, 아니. 지, 지, 지금 꺼냈어. 지금!”

그 검은색의 상하의 세트를 마치 살인사건 현장에서 증거 채취하는 과학수사대마냥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이런 세상에. 검은색이라니. 검은색. 아무나 소화할 수 없다는 검은색!

“여기 있어.”

그 와중에 슬쩍 확인했다. 역시 누나는 80이상이었어. 이 세상의 보물…
이라고 생각하는 와중에 문이 살짝 열리고 누나의 얼굴과 물에 촉촉이 젖은 왼쪽 어깨가 드러났다. 내가 움찔하는 동안, 누나는 내가 누나의 속옷을 조심스럽게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내 속옷은 그렇게 더럽지 않아.”

“응? 아아니야! 이건 절대 더럽다는 의미가 아냐!”

“그럼 왜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들고 있니?”

“으아-- 이 바보야! 그것도 모르겠어? 당장 가지고 문 닫아!”

속옷 세트를 누나의 왼손에 거의 강제로 쥐게 한 다음 누나를 몰아넣고 문을 닫았다. 집에 온지 이제 한 시간 조금 넘었는데 벌써부터 핀치라니. 하루빨리 누나가 거처를 찾았으면 하는데. 설마 이대로 우리 집에 눌러있겠다고는 하지 않겠지. 솔직히 누나가 지금까지 내게 해줬던 걸 생각하면 내 집에서 흔쾌히 지내게 해줘야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내 수명이 분 단위로 축소되고 있는 걸 생각하면 어쩔 수가 없다.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고, PC 앞에 가서 앉았다. ELLIE의 영상을 다시 재생. 보고 있는 동안 누나가 샤워를 마쳤는지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옷을 주섬주섬 입는 소리가 또 내 청각을 부단히도 자극해, 스피커 볼륨을 조금 더 올렸다. 웬만하면 옷을 입고 나오는 게 어때?
최대한 시선을 모니터에만 못박으며 ELLIE의 댄스를 보고 있는데, 뒤에서 누나가 다가오는 기척이 났다.

“저애는 누구? 네가 돌보는 아이돌이니?”

내 양어깨 위에 손을 올려놓고, 얼굴을 옆으로 쑥 내밀었다. 말리긴 했다지만 아직 촉촉한 머릿결이 내 왼쪽 귀를 쓸고 지나가며, 샴푸냄새와 성인 여성의 그 향긋한 냄새가 코를 간질이며, 등 위쪽엔 약속된 가슴 밀착 클리셰가…
이 여자 너무 무방비해!!! 이 무슨 번뇌의 마천루란 말이냐!

“나무사암--!!!”

“응?”

내가 버럭 소리치자 누나는 살짝 놀란 표정으로 물러나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달라붙지 마!”

“왜?”

“여러 가지로 신경 쓰이니까.”

“많이 변했구나. 어렸을 때만 해도 같이 목욕도 한 사이인데.”

“그건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전의 일이지. 지금 내가 몇 살이고, 누나가 몇 살인지 자각 좀 해.”

“그땐 그렇게나 귀여웠던 아이가, 이렇게 커버렸구나.”

“…그 ‘이렇게’가 뭔가 부정적인 뉘앙스로 들리는 건 내가 잘못된 거지?”

“마음대로 생각하렴. 후후…”

“후… 정말. 우리 그냥 다른 얘기를 하자.”

“음… 그럼 저 아인 누구?”

“요즘 인터넷 상에서 떠오르는 넷 아이돌이라고 할까.”

“넷 아이돌?”

“응.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아이돌이 아니라, 그냥 인터넷에 자신이 춤을 추거나 노래를 부르는 영상을 투고해 인기를 얻은 케이스야. ‘넷 아이돌’이라고 해도 진짜 아이돌이 아니라 마치 아이돌 같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어서 아이돌이라고 부르는 거지.”

“그럼 저 아이는 소속사가 없다는 말이네.”

“있을 리가 없잖아. 아니. 영상 편집이라던가 보면 정말 어느 소속사에서 노리고 미는 녀석이 아닌가 생각들 정도로 좋지만.”

최대한 평정을 유지하며 누나와 대화하려 했지만, 그 검은색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 자꾸 엉뚱한 생각만 들었다. 지금 입고 있겠지? 그 검은색?
아, 안 돼. 안 돼. 누나한테만큼은 안 돼.

맨 정신으로는 안 될 것 같아 냉장고로 걸어가 캔 맥주를 하나 꺼냈다.

“누나도?”

“응.”

“의외네. 누나는 맥주보다는 와인이라는 느낌인데. 고급 레스토랑 같은 곳에서 한 잔.”

“술은 뭐든 마셔.”

의외로 애주가였던 건가, 누나는. 내가 성인이 된 이후로는 프로 시절엔 바빠서 별로 만난 적이 없고, 은퇴 이후로 처음 만나보는 거니까.
안줏거리라고 해봤자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아몬드가 전부였다. 대충 그거라도 깔아놓고 마주보며 맥주를 마시는데,

“………”

또 누나가 뭔가 말하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누나의 이 표정을 간파해내는 건 누나의 식구들을 제외하면 나뿐이라고. 이건 자랑해도 좋겠지.

“또 무슨 생각 하고 있어?”

“응? 아. 맥주를 마시고 있자니… 꼬치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꼬치라…”

거 맛있겠네. 마침 오늘 저녁도 조금 부실하게 먹었는데. 막 공부에 빠져있을 때라 저녁 먹을 시간 따위 없어! 하고 샌드위치로 해결했었다.

“그래. 기다려.”

“응? 아니. 일부러 사올 필요는…”

“내가 먹고 싶으니까.”

결국 내가 가서 꼬치를 사왔다. 안주가 생겼으니 당연히 마시는 맥주도 늘어나기 마련, 누나는 의외로 술이 센지 맥주 캔을 계속 비워내면서도 별로 취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긴. 요즘 캔 맥주는 술도 아니라지만.

“요즘은 데뷔곡 녹음을 하고 있어.”

“호오. 벌써?”

하긴 데뷔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꽤 인지도가 있다는(미키의 말로는) 패션지에 사진이 실렸으니, 누나의 재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건가. 아니. 앞서 언급했다시피 누나는 분명히 아이돌의 자질이 있다. 비록 ‘아이돌’이라기엔 나이가 좀 많긴 하다만. 어쨌든 어렸을 때도 누나가 곧 잘 노래를 불러주곤 했던 게 기억난다.

“그래. 맞아. 오랜만에 노래 좀 불러줘. 옛날엔 곧잘 불러줬잖아.”

“그랬었지.”

“될 수 있으면 그 데뷔곡 불러줘. 한 번 들어보고 싶은데.”

누나는 약간 생각하는 듯 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미완성된 곡이니까 조금밖에 불러줄 수는 없어. 그래도 괜찮니.”

“물론이지.”

내 대답에 누나는 들고 있던 맥주 캔을 놓고 목을 살짝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숨을 살짝 내뱉은 다음 작은 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연풍 - 타카가키 카에데


메마른 바람이 마음속을 스쳐 지나가
흘러넘치는 이 마음도 데려가줘
두 사람의 그림자 별것 아닌 대화도
질투하게 되고, 애달파지는 이것이 사랑일까?

당신밖에 보이지 않아 감정만이 커져갈 뿐
괴로워서 억지로 짓는 미소마저 만들지 못해

마음은 바람에 갇혀
헤아릴 수 없는 눈물과 말할 수 없는 말을 끌어안고
흔들리는 마음은 이끌리듯이
당신을 찾아, 당신을 만나고 싶어 Only you


“…어때?”

가, 강적이다. 강적이야. 순간적으로 저번 밤바다에서 타카네가 불렀던 ‘달의 왈츠’가 떠오를 정도였다. 게다가 그때는 분위기가 있는 밤바다라지만 여긴 분위기도 뭣도 없는 집구석에서 맥주 캔 늘어놓고 부르는 건데.

“누나…”

“응?”

“아, 아냐. 오와. 진짜로 놀랐어. 누나 그때보다 훨씬 더 잘 부르는 구나.”

“그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불렀잖니. 지금은 보컬 트레이닝도 충실히 받고 있고.”

사실 맨 처음 말하려 했던 건 ‘누나 우리 프로덕션에 들어올 생각 없어?’였다. 하지만 아무리 두 소속사 모두 무명이라지만, 소속사 간의 이적은 야구에서의 트레이드와는 꽤나 이미지가 다른 모양이라 나는 함부로 누나에게 그런 말을 꺼낼 수 없었다. 혹시나 정말 그랬다가 누나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나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 말고도, 그냥 누나는 876에 있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고.\

“누난 역시 대단하네. 새삼 느꼈어. 못 하는 게 없잖아? 가끔 엉뚱한 생각하는 걸 빼면.”

“엉뚱한 생각…?”

“누나가 더 잘 알 텐데.”

하지만 누나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천연계로구만.



결국 그날 누나를 거의 반강제로 침대에서 재운 후 나는 거의 창고로 쓰다시피 하던 방으로 들어가 잤다. 오랜만에 바닥에서 잔 탓에 그렇게 잠을 잘 잤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제 차차 적응이 되겠지.
아니. 적응하면 안 되지. 누나를 어떻게든 빨리 다른 곳으로 보내야…

잠에 취해 다리를 질질 끌며 거실로 나왔더니, 이미 침대는 가지런히 정돈이 되어 있고 누나가 부엌에서 무언가 하고 있었다.

“뭐하는 거야?”

“아침.”

“호오. 오랜만에 누나가 만들어준 걸 먹는 건가… 으하암…”

밥을 맛있게 먹고 슬슬 출근할 준비를 하는데,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현관문 쪽으로 향하는 누나를 말린 다음, 누구냐고 소리쳐보니,

“저에요…”

라는 짤막한 대답이 들려왔다. 치하야의 목소리였다.
치하야가 왜…라고 생각하던 차에, 어제 퇴근 전에 치하야와 이야기를 했던 게 생각났다.

‘이제 같은 직장에 다니는 셈이니까. 아침은 내가 태워줄게. 퇴근 시간은 갈릴 확률이 많아서 못 태워주겠지만, 출근이야 뭐.’

‘저는 괜찮습니다만…’

‘어허. 빼지 말고. 이런 호의 정도는 받아들여도 좋지 않아?’

‘그렇다면… 네. 감사합니다.’

우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누나. 일단 숨어있어봐. 빨리!”

“으, 응?”

“빨리!!”

지금 생각하면 왜 누나보고 숨으라고 했는지 모르겠다. 치하야는 문 밖에 있는데 말이다. 설령 우리 집 안에 들어와 있었다고 해도 그 시점에선 늦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 때의 나는 급작스러운 상황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탓에 정신이 뒤죽박죽되어있었다.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빼먹은 것 없나 체크한 뒤 문을 살짝 열고 그 틈으로 빠져나와 재빨리 문을 닫았다. 그런 나의 모습에 치하야는 ‘저 사람이 뭘 하는 거지.’라는 표정을 지으며 내가 하는 짓을 보고 있었다.

“으, 으하하. 좋은 아침!”

“네. 안녕하세요. 프로듀서.”

“그럼 가자. 후하하. 아. 그리고 다음부턴 조금만 더 늦게 와줘.”

“그럴게요.”

이래저래 피곤하다. 전혀 잔 것 같지 않은 기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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